영화관 옆 철학카페
김용규 지음 / 이론과실천 / 2002년 2월
평점 :
절판


많은 사람들이 영화에 대해 글을 썼다. 영화를 전공하거나 그쪽 직업을 가지지 않은 사람들도 많은 책을 냈다. 특히 인문학을 하는 사람들이나 문학을 하던 사람들이 철학적 시각을 통해서 영화를 보거나(또는 영화를 통해 철학적 사유의 아이디어를 얻거나) 문학을 비평하듯이 영화를 비평하는 작업을 많이 했다.

그런데, 영화 쪽 사람들은 이걸 그다지 반기지 않는 모양이다. 영화란 철학이나 문학과는 다른 언어와 다른 매체를 이용하고 다른 형식이기에 그만큼 차이가 많기 때문이다. 똑같은 줄거리에 똑같은 인물과 배경을 가진 소설과 영화라도, 표현의 방식이 나름대로 다르고 이런 작은 차이가 '전혀 다름'을 만들어 내는 법이다. 그러기에 영화 쪽 사람들의 이런 비판적인 견해에 고개를 끄덕일 수 있다. 그러나 인문학자나 그밖에 영화 밖 사람들의 시각은 '전문적'이지 않기에 오히려 신선할 수 있다.

『영화관 옆 철학카페』는 철학자의 시선으로 영화를 보여주고 있다. 행복, 희망, 시간, 사랑, 죽음, 성과 같은 보편적 주제를 다루었다. 이 주제들을 우리가 자주 들어본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칸트, 사르트르, 그리고 프로이트, 마르쿠제, 프롬 등에 이르기까지 여러 철학자들의 인생과 세상에 대한 깊고 넓은 사유들을 풀어내고 있다. 각 장이 주제별로 나뉘어져 있어서 그 주제에 대한 관심이 커졌을 때 읽기에 좋다. 책에 나오는 영화를 굳이 보지 않아도 글의 내용을 이해하는 데에는 큰 지장이 없지만 영화를 한 편씩 보고 나서 읽는 맛도 꽤나 쏠쏠하다. 내가 영화를 보고 느낀 것과 철학자가 본 것은 어떻게 다른가도 비교해볼 수 있고, 영화를 다시 '읽어보는' 재미도 느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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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거여행
김훈 지음, 이강빈 사진 / 생각의나무 / 2004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살아서 아름다운 것들은 나의 기갈에 물 한 모금 주지 않았다. 그것들은 세계의 불가해한 운명처럼 나를 배반했다. 그러므로 나는 가장 빈곤한 한 줌의 언어로 그 운명에 맞선다. 나는 백전백패할 것이다. (...) 갈 수 없는 모든 길 앞에서 새 바퀴는 얼마나 아름다운가. 아, 아무 것도 만질 수 없다 하더라도 목숨은 기어코 감미로운 것이다, 라고 나는 써야 하는가. 사랑이여, 이 문장은 그대가 써다오.― 「책 머리에」 가운데.

삶은 소설이나 연극과는 많이 다르다. 삶 속에서는 언제나 밥과 사랑이 원한과 치욕보다 먼저다. (54쪽)

스타일리스트, 김훈. 이 책은 아름다운 문장으로 유명한 그의 여행 에세이집이다. 풍륜(風輪)이라는 이름의 자전거를 타고 전국을 돌면서 산과 물을 건너며, 그리고 사람들을 만나고 만났다. 이 책이 기억에 오래 남을 수 있는 책이 된다면, 그것은 놀라우리 만치 시적이고 아름다운 미문 때문일 것이다. 그의 시집을 방불케 하는 표현력은 읽는 맛을 더해주지만 그 때문에 실재감을 잃어버리게 하는 아쉬움도 있다. 그래서 이 책은 <여행기>라기보다 <에세이>라는 이름에 가까운 듯 하다. 다녀간 곳곳마다 마치 꿈속을 거닐다 온 듯한 필체로 써 내려서 여행기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이다.

개인적으로 몇 년 전부터 자전거 여행을 하고 싶었고, 또 올해는 직접 그 꿈을 현실 위에 펼쳐보고 싶다. 그런 생각을 가지고 이 책을 들었는데 자전거 여행 자체의 묘미에 대한 소개는 그다지 없어서 아쉬웠다. 어쨌거나 이 책의 미덕은 김훈의 시적인 문장과의 만남에 있고, 그런 문장을 가능케 하는 그의 삶에 대한 치열한 자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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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미문학 완역본 54%가 표절”
번역 평가사업 보고서 로빈슨 크루소등 13편 추천할만한 역서 '없음'

우리말로 옮겨진 영미소설 중 열에 아홉은 부실한 번역본이라는 영미문학 연구자들의 주장이 나왔다. 도서관과 서점의 서가에 꽂힌 영미문학 완역본의 54%가 표절인데다, 신뢰할 만한 번역본이 전무한 작품도 수두룩하다는 것이다. 영미문학연구회(공동대표 오민석·서강목)는 이런 내용이 담긴 ‘영미 고전문학 번역평가 사업’의 최종보고서를 최근 공개했다.

이번 보고서는 김영희 한국과학기술원 교수를 비롯한 44명의 연구자들이 학술진흥재단의 지원을 받아 해방 이후 지난해 7월까지 남한에서 발간된 영미문학 고전 36편의 번역본을 수집·분석한 결과물이다.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 〈오만과 편견〉, 〈테스〉 등의 영국문학 걸작들과 〈무기여 잘 있거라〉나 〈호밀밭의 파수꾼〉 같은 미국문학의 대표작들이 망라됐다. 문학작품 번역에 대한 종합적 평가작업은 국내에서 처음 있는 일이다. 학술진흥재단의 지원 아래 지난 1년6개월여 동안 평가사업이 진행되는 동안, 그 중간결과물인 ‘샘플평가’(〈한겨레〉 2003년 3월8일치)의 내용이 공개된 바 있다.

축약본·부분번역본과 어린이용 판본을 제외한 573종을 분석한 결과, 310종이 완전한 표절이거나 적당한 윤색만 거친 것으로 드러났다. 표절본의 비율은 1990년대 이후에도 전혀 줄어들지 않았다. 또 추천할 만한 역서가 발견되지 않은 작품도 13개에 이르렀는데, 대중에게 널리 읽히는 〈로빈슨 크루소〉, 〈위대한 유산〉, 〈무기여 잘 있거라〉, 〈허클베리 핀의 모험〉 등이 포함됐다. 다만 셰익스피어 작 〈햄릿〉의 경우 비교적 높은 번역수준을 보여, 추천 가능본이 10종에 달했다.

연구자들은 번역본마다 특징 및 분석결과를 기술하고 별표등급을 부여했다. 여기서 만점을 받은 번역서는

김진만 역 〈캔터베리 이야기〉(정음사·1963),
김영희 역 〈토박이〉(한길사·1981, 창비·1993),
최재서 역 〈햄릿〉(정음문화사·1983),
이상옥 역 〈젊은 예술가의 초상〉(민음사·2002),
김진경 역 〈도둑맞은 편지〉(문학과지성사·1997)


등 6권에 불과했다.

연구결과는 올해 책으로 나올 예정이며, 연구자들은 이번 사업에 포함되지 않은 작품을 대상으로 2차 번역평가 사업을 진행중이다.

임주환 기자 (한겨레 2004.02.13(금) 1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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쎈연필 2004-02-17 13: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상옥의 젊은 예술가의 초상 번역은 인정할 수 없군요. 전 꼼꼼하게 비교한 후에 문지사 걸루 샀거든요. 조이스 문체가 관념적인데, 이상옥이란 역자는 연로해서 그런지 한자를 자주 쓰더군요(한자는 애매하고 관념적이죠). 안 그래도 어려운 조이스의 문체를 더욱 애매모호하게 만들었다는. 뭘 믿어야할지...!!

도서관여행자 2004-02-17 16: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그런가요? 저는 소설 번역에 대해서 아는 것도 없고 평가할 능력도 안 돼서 잘 모르겠지만, 그것 참 어려운 문제로군요. 추천할 만한 번역 소설도 별로 없고 평가도 그저 그렇다면...

카를 2004-02-17 18: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참고자료군요. 헌데 조사한 사람의 책이 포함된 건 모양새가 안 좋네요.

도서관여행자 2004-02-18 09: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녜. 김영희... 같은 이름인데, 동일인물일 수도 있겠죠? ^^;

mannerist 2004-02-22 02: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욱동씨가 번역한 위대한 개츠비도 괜찮던데요. 어떻게들 읽으셨는지, 어떻게 평가되었는지 궁금하네요.
 
 전출처 : 쎈연필 > 바슐라르 할부지


 

 

 

 

바슐라르 할부지한테 얻은 게 많다. 할부지 덕에 망상이라고 치부하던 것을 몽상으로 탈바꿈하게 됐다. 부정에서 긍정으로. 기껍게 몽상가가 돼부렀다. 사진에 있는 책 말고도 바슐라르 책이 세 권 더 있는데 책더미 밑에 깔려서 꺼내기 귀찮았다. 공간의 시학을 읽고서 너무나 감동한 나머지 제본을 했다. 반 년 후에 타 출판사에서 재발간 될 줄이야. 지인과 얘기 도중, 그네도 바슐라르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내가 가장 아끼는 책 중의 하나인 제본한 공간의 시학과 고향역 서가에서 슬쩍한 불의 정신분석(초의 불꽃, 대지와 의지의 몽상) 그리고 헌책방에서 애태우며 힙겹게 구한 몽상의 시학을 줄 생각이다. 무진장 깊은 번뇌가 따르는 결정이다, 마는 나보다 더 아끼겠다는 데야, 게다가 좋은 사람이 청하는 바에 줘도 미련은 그다지 없을 것 같다(?). 책에 집착하는 (암만 생각해도 몹쓸) 버릇을 느슨히 하고 싶다. 사진에 보이는 <唐詩>는 울아부지가 몹시 아끼는 책이다만, 내 책장에 꽂았다. 지난 명절 때 책의 향방을 묻는 아부지께 이실직고를 드렸더니 아무 말씀 없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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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여행자 2004-02-05 12: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리고, 라스꼴리니꽃 님의 조언 :

엑스리브리스님-! 참 반가운 말씀입니다. 할부지가 원래 과학철학자였는데 예술철학으로 진로를 옮겼죠. 과학의 합리주의에서 연금술로 옮겨갔다는 건 정말 의미심장하지 않습니까? 불의 정신분석부터 읽으시는 게 좋을 겁니다. 최초의 저작이거든요. 죽기 직전에 쓴 건 촛불의 미학이고요. 곧, 문학동네에서 바슐라르의 불에 대한 미완성 유고가 번역 발간된다더군요. 불의 정신분석-물과 꿈-대지와 의지의 몽상-대지와 휴식의 몽상-공간의 시학-공기와 꿈-촛불의 미학(그외 꿈꿀 권리, 풍경, 순간의 미학은 편하게 읽으면 좋음). 다 읽어보란 말은 아니구요. 참고하라구요. 문학하려는 사람에게 바슐라르는 필수죠. 무엇보다 상상력의 철학자니까요. 엑스리브리스님 서재를 구경해보니 사회와 상관성을 띠는 (정치 성향의) 책들을 좋아하시는 것 같던데 바슐라르는 그렇지 않아서 마음에 들런지 모르겠습니다.
 

비판적 이성의 귀환
우리시대 비평의 정신
 
2004년 01월 26일  
 

도정일 / 경희대·비평이론

타인의 사유, 담론, 표현에 대한 메타 언술로서의 비평이 일차적으로 추구하는 것은 '극단과 과잉에 대한 견제'이다. 이론은 성격상 어떤 가설 혹은 주장을 그 극단적 지점까지 밀고나가야 한다는 요청을 외면할 수 없을 때가 많다. 극단을 추구함으로써 이론은 종종 새로운 발견에 도달하거나 '보이지 않던 것을 보게' 한다. 보이지 않던 것을 보자면 이미 보이는 것들과 알려진 것들에 대해서는 눈을 감고 보지 않기로 하는 맹목의 방법론이 필요하다. 이 방법의 문제에서 이론과 비평은 확연하게 갈라선다. 맹목, 과잉, 극단의 추구가 이론의 방법론일 수 있다면, 비평의 경우 그것들은 견제의 대상이다. 극단의 추구를 이론의 열정이라 한다면 이 열정의 불을 지피는 것은 분별이기보다는 맹목이다. 그러나 비평은 맹목, 극단, 과잉을 싫어한다. 비평을 위한 '열정의 불'이란 가당치도 않은 은유이다. 비평은 불의 담론이 아니라 물의 담론, 그것도 차가운 얼음물의 담론이다. 비평은 뮤즈의 날개를 타지 않는다. 비평의 수레는 '분별'이다.


지난 수십 년간 사회과학과 인문학 분야에서 국내외 학계에 부단한 충격과 자극을 가해 온 것은 ‘이론’ 혹은 ‘이론들’이다. 구조주의, 맑시즘, 정신분석담론, 기호학, 수용미학, 페미니즘, 해체론, 탈구조주의, 포스트모더니즘, 탈식민주의, 신역사주의, 수용이론―이것들은 구조주의가 등장한 1960년대 이래 화려한 ‘이론의 한 시대’를 열었던 다양한 이론들의 이름이다. 지금 그 이론의 시대는 막을 내리고 있다. 이론의 쇠퇴를 발생시킨 가장 큰 요인은 ‘이론의 넌센스화’다. 극단과 과잉의 추구를 통해 이론(들)이 도달한 것은 어떤 발견이 아니라 이론 자체의 희극적 넌센스화이고 그 도산이다. 극단적 주장과 과잉의 추구를 통해 현대 이론들이 이룬 업적의 목록은 刀斧手의 장부와 흡사하다. 현대 이론들의 상당수가 합작으로 도살해낸 것들 중에는 이성, 진리-진실, 보편, 객관성, 역사, 현실, 근대-근대성, 진보, 주체, 의미, 정신 등이 포함되고 이것들을 끌어내린 자리에 이론이 대신 내세운 것들의 목록에는 비이성(unreason), 허무주의, 구성주의, 우연론, 비본질론, 상대주의, 탈근대론, 무의미론 같은 것들이 포함된다.


이론의 도산을 초래한 것은 현대 이론의 전면적 ‘허위성’ 때문이 아니라 극단적 ‘과잉’ 때문이다. 이성 혹은 이성중심주의의 폐해와 자기기만을 지적하는 일은 반드시 이성을 도살하는 일과 같은 것이 아니다. 보편주의나 목적론적 도그마의 횡포를 지적해야 한다고 해서 우리가 반드시 역사의 전면적 무의미론에 빠져야 하는 것은 아니다. 모든 역사는 무의미하다고 말하는 것은 보편주의를 거부하면서 사실은 무의미의 보편주의 혹은 보편적 무의미론을 내세우는 일이다. 정의, 자유(해방), 평등 같은 가치들을 인간 사회의 역사적 ‘보편원칙’으로 설정하고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우리가 정치적으로 또 사회적으로 해야 할 일과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 근대적 이성의 과잉이 보기 싫어 이성의 전면적인 탈근대적 도살을 주장하는 것은 제 얼굴 보기 싫다고 머리통을 잘라버리는 일과 같다. 과잉을 치유하기 위해 과잉의 치료법을 동원하는 것이 이를테면 포스트모더니즘 같은 극단이론의 오류이다. 비이성과 불합리성(irrationality)의 경축만으로는 어떤 사회도 유지되지 않는다.


국내 사회과학과 인문학계의 젊은 연구자들 사이에는 이런 극단적 과잉이론의 영향이 상당히 널리 퍼져 있는 것 같아 보인다. 이런 극단성은 예컨대 민족주의, 국민주의, 근대적 국민국가, 국가주의 등에 대한 젊은 비판자들의 논리와 태도에서도 자주 발견된다. 국민국가나 민족주의는 지금도 세계화 이론가들과 시장주의자들의 집중적 표적이 되어온 ‘동네북’의 하나다. 시장질서에 의한 세계화의 시대에는 국민국가라는 근대 모형의 ‘폐물화’가 불가피하다고 시장 세계화주의자들은 줄곧 말한다. 그러나 시장체제의 세계화를 주도해온 미국은 여전히 가장 강대한 ‘국가’로 엄존하고 있다. 미국과 서유럽 지역은 이미 갈등의 역사시대를 넘어 탈근대적 탈역사(post-history)의 시대로 진입했다는 것이 잘 알려진 ‘후쿠야마 주제곡’이다. 그러나 9·11 뉴욕 테러 사건은 미국이 탈역사시대에 들어서기는커녕 여전히 갈등의 역사시대에 나포되어 있을 뿐 아니라 그 자신 갈등의 주 생산국이라는 사실을 웅변한다. 러시아, 중국, 일본 같은 강대국들이 근대 국가의 테두리를 벗어나 있는가? 천만의 말씀이다.


극단과 과잉의 주장을 점검하고 견제하는 것이 비평의 과제라면, 분별은 비평의 방법이고 태도이다. 이 방법 속에는 공정성, 균형, 비판적 거리의 유지, 이성의 온당한 행사, 진실에의 헌신, 객관성 같은 덕목들이 포함된다. 이 덕목들이 고전적 의미에서 비평의 ‘아레테’(arete)이며 그 덕목 혹은 아레테를 지키고 발휘하려는 것이 비평의 정신이다. 이 점에서 비평 정신은 비판적 이성의 행사이다. 인간은 이미 충분히 비이성적 동물이다. 은유적으로 말하면, 인간은 99.4 퍼센트의 비이성과 0.6퍼센트의 이성으로 되어 있다. 인간이 비이성적 동물이라는 사실을 애써 부정하고 인간과 사회의 이성적 합리화를 신봉한 것이 근대의 환상이었다면 인간이 보유한 미량의 이성까지도 도살시켜 인간의 전면적 비이성화를 주장하는 것은 탈근대론적 환상이다. 이런 몰이성주의는 위험하고 파괴적이다. 무엇보다도 그것은 진실이 아니다. 진실은 무엇인가. 이성이 제 아무리 미량의 것이라 하더라도 그것의 개인적 공적 사용과 작동 없이는 정의, 공평성, 평화, 공존, 평등, 자유가 불가능하고 의미 있는 행동과 비판적 실천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이다.


비이성의 과잉을 견제하고 이론의 극단주의에 개입하려는 비평의 정신은 지금 같은 시장주의 시대에는 더 없이 중요하고 필요하다. ‘시장’(Market)은 우리 시대의 유일한 지배적 질서, 문화, 정신상태이다. 시장을 떠나서는 지금 어떤 일도 가능하지 않은 것 같아 보인다. 시장은 지금 비평을 전방위에서 포위하고 있는 전면적 환경이다. 이 환경에서 비평이 할 일은 무엇인가. 시장이 지배적 질서라면 그 질서는 이미 그 자체로 과잉이고 극단이며, 따라서 비평의 적극적 견제 대상이다. 지배질서에 대한 저항, 지배문화에 대한 반(反)문화가 아니라면 비평은 무엇인가. ‘시장’이라는 용어의 현대적 의미영역 속에는 시장체제의 지구화, 자본주의 시장의 ‘승리’, 세계화, 국민국가 소멸론, 탈역사, 탈근대, 민주주의, 전쟁 가능성을 배제하는 새로운 국제질서, 개인주의, 행복, 세속주의, 폭력배제, 시장의 힘에 의한 평화, 기업주의 등등의 개념들이 포함되고 연결된다. 그러나 이런 개념들이 시장과 모순 없이 순탄하게 연결되는가? 천만의 말씀이다. 시장체제가 평화를 강화한다는 주장은 맞지 않다. 세계화와 시장이 평화, 번영, 행복을 가져온다는 주장도 정확한 현실 파악에 입각해 있지 않다. 시장세계화와 신무역질서는 지금 세계 평화를 위협하고 개도국 농민들의 분노를 폭발시키는 가장 큰 요인의 하나이다. 시장질서의 지배가 야기시키는 이런 폭력, 불안, 정의와 공정성의 파괴, 이성의 맹목적 도구화를 부단히 지적하고 그 질서에 저항하지 않는다면 비판적 정신으로서의 비평 정신이란 도대체 무엇이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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