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들의 대한민국 1
박노자 지음 / 한겨레출판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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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노자. 귀화한 러시아 출신의 한국학 학자. '한겨레'의 지면에서 가끔 만나보는 그의 칼럼들은 신선하고 날카로운 시각에 윤리적인 감수성까지 갖추었다. 태생이 러시아인인데 이렇게까지 우리글 구사를 할 수 있다는 것이 믿기지 않는다. 그래서 어떤 이의 말처럼 그가 혹, 천재가 아닐까도 생각해본다. 물론, 모어가 아닌 언어의 획득 능력만을 가지고 그에게 그런 찬사를 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말과 우리글을 그만큼 잘 다루는 사람은 분명 많을 것이다. 그가 그런 찬사를 얻을 수 있었던 데에는 사회주의적 비판 시각에, 평화주의적 윤리와 감수성, 한국사를 꿰뚫는 인문학적 지식이 평범한 글쟁이와 논객들을 상회한다는 것이다.

문학과 인문학 쪽의 좁은 독서만을 하다보면 내면과 정신의 아래로 깊이 침잠해 버린다. 그러다 보면 가끔씩 비판적 논객들의 칼럼집을 읽어 줄 필요를 느낀다. 2% 부족함을 느끼는 것이다. 더욱이 좌파적 또는 비판적 시각의 논객들은 윤리적 감수성에 빼어난 문체까지 갖춘 경우가 많아서 그들의 글을 찾게 된다. 사회에 어두운 눈을 뜨게 하는 데 그만큼 좋은 글들은 없다. 더욱이 신문의 지면 읽기도 편식하고, 사회과학의 체계적인 이론과 학술서를 소화하기 힘든 나 같은 사람에게는 저널리즘에 가까운 평문, 칼럼은 감사해야할 대상이다.

박노자의 글도 이 같은 맥락에서 내게는 큰 매력이었다. 더욱이 그는 외국인에서 귀화한 학자라는 독특한 내력에서 독특한 관점이 있을 것이란 생각에서도 그렇다. 러시아에서의 체험과 한국 유학과 교수 시절의 체험의 비교도 흥미 있었다. 이 책을 읽어 나가는 과정에서 박노자는 상당한 평화주의자란 사실도 알게 되었다. 여러 종교와 사상을 거치는 동안 자신만의 철학과 세계관을 갖게 된 것일까. 그가 세워놓은 정신 세계도 상당한 매력을 갖는다. 다음과 같은 말은 부끄럽게 고개를 끄덕거리게 한다.

'옛날에 풍류의 맛을 즐기면서 친구의 한마디 말에 깨달음도 얻고 인생에 중요한 가르침도 얻었다는 것을 이 사람들은 상상도 하기 어려울 것이다. 왜냐하면 남에게 정신적인 가르침을 줄 수 있으려면 그 남과 일단 생각의 범위가 달라야 하고, 자신만의 독보적인 정신 생활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개성'과 '개인주의'를 표어로 내세우는 그들의 생각은 사실 놀랍게도 천편일률적이다.' (59-60쪽)

박노자는 군사문화와 패거리 종교문화, 그리고 폭력적인 사회의 성격, 외국인에 대한 차별 등등 한국이란 사회의 어두운 면을 잘 짚어낸다. 강준만 등이 비판한 내역들과 겹쳐지는 항목이 많지만, 인문학자 특유의 예민한 감수성으로 새로이 본 한국, 한국 사람들의 속내는 부끄러운 구석이 많다. 과거의 한국 역사를 끌어내서 오늘날의 사회를 비판하는 역사학도의 독특한 방법론도 눈에 띤다. 비판만 담긴 글이 아닌 지적인 메스가 담긴 것이다.

이렇게도 한국의 썩은 내를 맡고서도 그가 한국인으로 귀화하고 또 한국을 사랑하는 이유는 뭘까? 한국의 지방 사람들이 도시 사람들보다는 외국인 노동자에게 따스하게 대해주는 정. 그 사람 냄새나는 온정이 아직도 자본주의적 서구 사회보다는 많이 남은 까닭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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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 민음 오늘의 시인 총서 16
김광규 지음 / 민음사 / 199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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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규는 자신의 글쓰기의 틀로서 아침에 시를 쓰는 버릇을 얘기한 바 있다. 이것은 물론 실제로 오전에 글을 쓰는 생리적 습관을 말하는 것이기도 하겠지만, 그의 시를 읽어보면 그것이 단순히 오전에 글쓰는 버릇을 밝히는 것이라기 보다는 시세계의 특질을 은유적으로 암시한 말도 된다는 느낌이 든다. 아침 나절에 맑은 정신으로 또박또박 써내려간 것 ㅡ 그것이 바로 김광규의 시편들이다. (해설 : '영산'에서 '크낙산'으로 中 -김영무)

이 시선의 꽁지에 실린 해설의 첫머리는 김광규 시의 특질을 잘 드러내고 있다. 아침의 시, 그게 김광규 시를 가장 잘 표현한 말일 것이다. 이해하기 쉽고 읽기 쉬운 시, 그래서 난해하고 혼란스런 모더니즘 시와는 조금은 다른 듯한 울림으로, 소시민의 세계를 비판적으로 때로는 따스하게 그려낸 것이 김광규의 시들이다.

언젠가 장정일이 그의 '독서일기'에서 '그때 내가 옳게 이해하고 인정할 수 있었던 시는 김광규밖에 없었으며, 이승훈류의 시들에서는 위선된 감정만 느꼈다.(117쪽)'라는 말은 내게 김광규를 읽도록 권하는 한 마디가 되었다. 여기에 더해서 권성우의 평문에도 그가 옛친구와의 술자리에서 지난 젊은 나날을 추억하며 김광규의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를 함께 낭독했다는 구절이 등장한다. 그러니 내 어찌 김광규를 읽지 않으랴.

도서관에서 빌린 책이기에 이미 김광규를 스쳐간 이들의 흔적들이 나를 어지럽게도 했다. 어떤 이유에서인지는 모르겠으나, 검은 펜으로 곳곳을 밑줄을 긋고 카프카의 <변신>이나 <성>과의 겹쳐 읽기를 시도하고 있는 흔적이 발견되었다. 김광규가 독문학자이기 때문인가? 그에게서 어떤 면이 카프카의 목소리와 겹쳐 들린단 말인지... 나는 스쳐간 선배 독자를, 그리고 그를 문학 지식의 칼날로 찌를 만한 힘이 없는 무지한 나를, 저주했다.

그런 잡생각들만 하다보니, 깊은 곳에서의 울림이 기대보다는 적었다. 장정일의 시, <사철나무 그늘 아래 쉴 때는>에서의 그 소시민적 노래와 김광규들의 시편들의 공통분모를 그려보며 위로할 수밖에 없었다. 흠... 장정일 시의 모던함과 극적인 면모는 최승자로부터, 그리고 소시민적 사철나무 그늘에 대한 바람은 김광규로부터 온 것일까? 헛된 생각들은 김광규 시를 잡아먹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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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 잇
김영하 지음 / 현대문학 / 200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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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하의 산문집 <포스트 잇>은 포스트 잇처럼 가볍다. 가벼운 메모를 담는 포스트 잇처럼 가벼웁다. 그리고 언제든 다시 붙였다가 뗄 수 있을 만큼의 융통성도 정말이지 포스트 잇을 닮았다. 그런 감각은 젊은 소설가로서의 김영하의 소설을 그리고 그의 삶을 닮았는지 모른다.

이 책을 4월에 읽기 시작해서, 중간에 그만 읽다가 다시 6월에 빌려서 끝까지 읽어냈다. 많은 분량의 책은 아니지만 어쩌다가 그렇게 읽다보니까, 처음 읽기 시작한 때와 두 번째로 끝까지 읽었을 때의 느낌은 상당히 다르다. 처음 <포스트 잇>을 읽었을 때에는 인상적인 제목의 글들만 몇몇 개씩 중간중간 골라서 읽었다. 그래서인지 상당히 읽는 재미가 있었고 발상의 독특함도 느껴졌다. 그런데 두 번째로 끝까지 읽었을 때에는 순차적으로 처음부터 읽기 시작했고 처음보다는 독특한 미감이 느껴지지는 않는 듯 했다. 표지의 강렬한 주황색깔처럼 내용도 첫 인상만 강한 것일까? 아니면 개인적인 느낌에 불과한 것일까?

하지만 분명한 것은 김영하의 산문은 발랄하고 새로운 시각의 젊은 글이지 철학적인 사유가 진득하게 배어있는 그런 에세이들은 아니다. 가끔씩 진지한 삶의 성찰을 보여주기도 하는 글이 있기는 하지만, 이 책에서 맛볼 수 있는 김영하 산문의 묘미는 젊고 독특한 시각이며 유쾌한 분위기라고 할 수 있겠다. 그것이 김영하만의 득의의 영역이라 하겠고, 또 그 어떤 작가도 자신만의 독특한 영역 안에서만 빛을 발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렇게 아쉬운 것도 아니겠다. 하지만 신영복의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을 읽었을 때의 그 오랜 파장의 감동은 접착력이 쉽게 사라져버리는 포스트 잇에서는 얻을 수 없는 것이겠다.

요즘 에세이의 문학성에 대해서 논한 권성우의 평문을 접하고, 그리고 스스로도 에세이의 매력에 대해 생각해본 일이 있어서, 에세이에 대한 입맛도 점점 높아지나 보다. 가벼운 에세이는 그 가벼움 때문에 오히려 깊이 있는 사색의 자유를 선사한다. 그래서 에세이는 어떤 문학 장르보다도 성찰적인 '삶'에 가까운 문학 장르이며 그래서 높은 문학성을 갖는다. 에세이여, 내게 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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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런 책을 읽어 왔다 - 다치바나 식 독서론, 독서술, 서재론
다치바나 다카시 지음, 이언숙 옮김 / 청어람미디어 / 200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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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정이 가득한 책을 발견했다. 놀라운 독서 경력과 독서술을 가졌고, 그런 독서를 바탕으로 해서 원숭이학, 인터넷, 일본 공산당 연구, 뇌사, 우주, 섹스, 에콜로지에 이르기까지 최첨단의 학문에 관한 다양한 저술 활동을 펼치고 있는 사람. 그가 바로 이 열정이 넘쳐나는 책을 쓴 것이다.

다치바나 다카시는 어린 시절부터 문학과 철학 서적을 탐독했다. 젊은 시절, 그의 학력은 불문학과 철학이지만 실상, 뒷날에는 이과 계열의 논픽션들을 주로 읽었으며 여기서 감동을 얻게 되어 최근까지 독서와 연구, 집필 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그는 지금은 문학을 거의 읽지 않는다고 한다. 잡지사 초년 시절 선배에 의해 문학만을 읽는 독서 행태를 지적 받고 나서 논픽션을 접하게 되었는데 그 이후로는 픽션의 세계가 논픽션에 비하면 얼마나 보잘 것 없는 지를 느끼게 되었다고 한다. 여기서 한편으로 그의 다방면에 걸친 독서편력이 여기서 무너지는 것은 아닌가 생각하고 또 인간의 감정과 고뇌, 사랑을 다룬 문학을 폄하(?)하는 그가 잘 이해되지 않았다. 그렇지만 조금 더 책을 읽어보면 그의 지적 열망이 어린 시절의 문학 독서에서 내공이 쌓여 폭발하기 시작되었음을 간파하게 된다. 그의 관심사가 다른 곳으로 이동해 간 것뿐이다.

자신을 호기심과 지적 욕구가 비정상적으로 강한 '이상 지적 욕구자'라고 말하는 다치바나 다카시는 제너럴리스트인 동시에 스페셜리스트이다. 폭넓은 독서가 제너럴리스트가 되는 길을 열었고, 깊이 있는 독서가 스페셜리스트의 이름을 붙여주었다. 그가 걸어온 독서 여정을 역추적해 나가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독서와 일에 대한 지칠 줄 모르는 그가 부러워지면서 동시에 그 열정이 조금은 내게도 전염된다.

더욱이 놀라운 독서 경력을 가진 독서가이며 탐구가인 그가 일러주는 독서론과 지식에 대한 이야기는 흥미롭고 경쾌하면서도 때로 진중한 울림이 된다. 고전에 대한 그의 생각을 들어보자. '다시 말해, 그 저서(고전)가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는 매체로서 그 역할을 다하는 것이 아니라 그 책 자체가 토론의 대상이 되어, 서로 이야기를 나눌 때의 소재로 활용되기에 적절한 책만이 결국 진정한 의미의 고전으로서 살아남게 되는 것이 아닐까 생각됩니다.'(55쪽) 그러면서 결국 지의 총체란 언제나 최신 보고서 속에서만 존재한다고 본다. 지금은 최첨단 이학계열의 열정에 빠져있는 그에게는 자연스런 답변이었으리라. 그러나 문학과 철학 등의 인문계열의 경우에도, 고전 자체의 메시지도 중요하지만 그것을 다시 되풀이하여 '새롭게 널리' 읽는 책이 될 때 진정한 고전이 될 수 있다는 깨달음도 얻을 수 있다.

독서론에서부터 그는 독학의 방법을 끌어낸다. 늘 새로운 주제의 학문 세계로 진입하여 그 세계의 최정상과 최첨단에까지 뛰어오르기를 원했던 다치바나는 그런 요구 때문에 나름대로의 독학 방법을 만들어 이것을 소개해주고 있다. 학창 시절에 중고등학생의 가정교사를 하면서 생활비를 버는 처지였음에도 페르시아어를 배우기 위해서 개인 가정교사를 고용했다고 한다. 그 교사에게 지불하는 돈은 땀의 결정체였기 때문에 이를 악물고 공부에 매달렸다는 에피소드는 참 처절하면서도 인상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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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운상가 키드의 사랑 문학과지성 시인선 172
유하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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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은, 미친 짓이다>의 영화감독 유하. 그는 영화감독 이전에 시인이다. 그런데 나는, 그를 시인 이전에 영화감독으로 먼저 알게 되었다. 그런데 또 나는, 그를 영화 이전에 시로서 처음 만나게 되었다.

시인 유하는 '세운상가'로 대표되는 지하세계에서 재즈나 비틀즈, 룰라의 김지현 등의 대중문화와 너무도 맑은 유년 혹은 세운상가의 흘러간 어제를 사유하고 노래한다.(이 시집의 전체적인 구성은 재즈를 닮았다.) 세운상가는 이 시대의 뒷골목을 상징한다. 보이지 않는 것이 보이는 것보다 더 많은 의미를 가진 것처럼, 세운상가는 욕망과 일탈의 숨겨진 천국이고, 또한 지옥이다. 중고 제품, 해적판과 포르노의 세계가 세운상가의 세계이다. 우리 모두에게 있는 세운상가는 개인의 음산한 몽상과 금지된 일탈에의 욕망의 지하실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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