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 민음 오늘의 시인 총서 16
김광규 지음 / 민음사 / 199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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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규는 자신의 글쓰기의 틀로서 아침에 시를 쓰는 버릇을 얘기한 바 있다. 이것은 물론 실제로 오전에 글을 쓰는 생리적 습관을 말하는 것이기도 하겠지만, 그의 시를 읽어보면 그것이 단순히 오전에 글쓰는 버릇을 밝히는 것이라기 보다는 시세계의 특질을 은유적으로 암시한 말도 된다는 느낌이 든다. 아침 나절에 맑은 정신으로 또박또박 써내려간 것 ㅡ 그것이 바로 김광규의 시편들이다. (해설 : '영산'에서 '크낙산'으로 中 -김영무)

이 시선의 꽁지에 실린 해설의 첫머리는 김광규 시의 특질을 잘 드러내고 있다. 아침의 시, 그게 김광규 시를 가장 잘 표현한 말일 것이다. 이해하기 쉽고 읽기 쉬운 시, 그래서 난해하고 혼란스런 모더니즘 시와는 조금은 다른 듯한 울림으로, 소시민의 세계를 비판적으로 때로는 따스하게 그려낸 것이 김광규의 시들이다.

언젠가 장정일이 그의 '독서일기'에서 '그때 내가 옳게 이해하고 인정할 수 있었던 시는 김광규밖에 없었으며, 이승훈류의 시들에서는 위선된 감정만 느꼈다.(117쪽)'라는 말은 내게 김광규를 읽도록 권하는 한 마디가 되었다. 여기에 더해서 권성우의 평문에도 그가 옛친구와의 술자리에서 지난 젊은 나날을 추억하며 김광규의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를 함께 낭독했다는 구절이 등장한다. 그러니 내 어찌 김광규를 읽지 않으랴.

도서관에서 빌린 책이기에 이미 김광규를 스쳐간 이들의 흔적들이 나를 어지럽게도 했다. 어떤 이유에서인지는 모르겠으나, 검은 펜으로 곳곳을 밑줄을 긋고 카프카의 <변신>이나 <성>과의 겹쳐 읽기를 시도하고 있는 흔적이 발견되었다. 김광규가 독문학자이기 때문인가? 그에게서 어떤 면이 카프카의 목소리와 겹쳐 들린단 말인지... 나는 스쳐간 선배 독자를, 그리고 그를 문학 지식의 칼날로 찌를 만한 힘이 없는 무지한 나를, 저주했다.

그런 잡생각들만 하다보니, 깊은 곳에서의 울림이 기대보다는 적었다. 장정일의 시, <사철나무 그늘 아래 쉴 때는>에서의 그 소시민적 노래와 김광규들의 시편들의 공통분모를 그려보며 위로할 수밖에 없었다. 흠... 장정일 시의 모던함과 극적인 면모는 최승자로부터, 그리고 소시민적 사철나무 그늘에 대한 바람은 김광규로부터 온 것일까? 헛된 생각들은 김광규 시를 잡아먹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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