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는 없다 - 기독교 뒤집어 읽기
오강남 지음 / 현암사 / 200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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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성경이 아니라 생활에 밑줄을 그어야 한다는
그의 말은 집사들 사이에서
맹렬한 분노를 자아냈다, 폐렴으로 아이를 잃자
마을 전체가 은밀히 눈빛을 주고받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주에 그는 우리 마을을 떠나야 한다
(…)한참 동안 무엇인가 생각하던 목사님은 그제서야
동네를 향해 천천히 페달을 밟았다, 저녁 공기 속에서
그의 친숙한 얼굴은 어딘지 조금 쓸쓸해 보였다

― 기형도 「우리 동네 목사님」

예수는 없다? 다소 상업주의 냄새를 풍기는 선정적 제목이 거슬렸지만, 이런 책이라면 백 번이라도 용서가 된다. 선정적 제목 때문에 더 많은 독자가 생긴다면 그것도 좋은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예수를 잘못 읽고 있는 모든 독자들이여, '그런 예수는 없다.'

비교종교학자 오강남의 '기독교 뒤집어 읽기'는 사실상 '기독교 바로 읽기'나 '기독교 제대로 읽기'이다. 어느 문명비평가가 지적했다는 '무슨 증거, 무슨 논리, 무슨 개인적 체험, 그 어떤 것을 들이대어도 '계시된 진리'에 대한 근본주의자의 마음을 바꿀 수는 없다.'(47쪽)는 인용은 꽉 막혀 있는 한국 기독교계의 어둠에 자신의 저서가 얼마나 빛이 되어줄 수 있을지 하는 의심과 회의의 표현이다. 하지만, 논문식 글쓰기에 익숙할 그가 쉬운 말로 진실을 담아 쓰기 위해서 얼마나 힘을 기울였는지 알게 된다. (더 찾아보고 싶은 독자를 위해서 꼼꼼하게 참고도서목록과 원문의 출처를 제시하는 친절한 저자!)

폐쇄적·독단적이며 근본주의, 율법주의, 문자주의적 성경해석 등의 온갖 난감한 늪에 빠진 한국 교회의 문제 제공의 1차적 원인은 한국에 기독교를 소개한 선교사들에 돌려질 수 있다. 그러나 그 우물 밖으로 빠져 나오지 못하고 교회 체제를 무반성적으로 유지, 확대시키려는 목회자 및 일반 신자들에게 더 큰 문제가 있다. '많은 외국 신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교회가 성장하기 위해서 갖추어야할 필수 조건으로 대략 1) 교리의 절대화, 2) 획일적인 행동강령, 3) 무조건적인 복종, 4) 철통같은 소속감과 헌신, 5) 전도열 등을 꼽는다'(268쪽)라는데, 이런 것은 부정적인 한국 교회를 분석해낸 결과에서 얻어낸 것이 아닌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들어맞는다. 웃을 수밖에 없고, 웃을 수도 없는 현실이다.

사도 바울은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아이의 일을 버렸노라.'(고전13:11)고 고백했다고 한다. 어린아이의 믿음은 순수하고 강하지만 의심할 수 없다는 점에서 위험할 수 있다. 산타 클로스가 있다고 믿는 아이는 아름답고 순수한 영혼을 가지고 있지만 산타의 선물을 받기 위해서 집에 굴뚝을 뚫는 불혹이 넘은 아이 아닌 아이를 우리는 그대로 둘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김진호 목사의 말처럼, 진리를 위해서 죽을 수 있는 자를 우리는 경계해야만 한다.

…기형도의 어느 시에서 나오는 '우리 동네 목사님'은 얼마나 기다려야 다시 돌아와서, 아이들과 웃는 얼굴로 목사관 뒤터에 푸성귀를 심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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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이란 무엇인가
유종호 지음 / 민음사 / 199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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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언어미술이 존속하는 이상 그 민족은 열렬하리라.'

정지용 시인의 말이다. 아니, 정지용을 떠나 유종호의 말이다. 이제는 내 혀에 달라붙은 말이다. 유종호와의 첫 만남은 정지용을 소개하는 글(http://www.sfoc.org/cni1/cultureni/2002/02/etc_01-2.html)에서였다. 이렇게도 멋진 문장을 맥락과 숨겨진 의미를 모른 체 내 혀로 끌고 와버렸다. 아직도 뇌가 없는 내 혀는 이 말을 주기적으로, 자동적으로 내뱉고 있다.(이것이 말의 매혹이며 말의 폭력일까.)

유종호는 정지용을 옹호하며 이상에 대한 주위의 지나친 평가를 경계한다. 그에게 문학이란 '언어예술'이므로, 예술 언어에 대한 자의식을 보여준 정지용이야말로 뛰어난 시인이고, 얄궂은 말놀이의 시를 보여준 이상은 뛰어난 산문에 비해 높은 평가를 받지 못한다. 각별히 동요에 대한 애정을 보여주는 것은 그 자신 동요를 좋아했던 어린이였던 이유도 있겠지만 동요가 언어미를 담는 노래로 '시의 어린이꼴'이기 때문일 것이다.

문학이란 무엇인가? 문학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많은 사람들이 세계에 대해 인간에 대해 던져 왔던 수많은 물음표 중에서 제대로 해결된 일이 거의 없는 것처럼, 이 질문도 본래가 정답이 없는 것인지 우문에 현답으로 대답해줄 목소리가 별로 없다. 덕분에 아직도 끊임없이 여러 표정의 시인작가와 문학자들이 제 목소리로 답을 제출해왔으니 우문이 아니라 너무도 소중한 현문인가 보다.

유종호의 이 책도 문학이란 무엇인지 묻는 질문에 대한 친절하고 자상한 대답들로 이루어져있다. 이 대답들이 과연 현답인지 체크해보는 것은 독자의 몫이다. 아마도, 독자들은 이 책을 문학공부 초행길의 듬직한 길벗으로 여기게 될 것이리라.

* 내 체크 리스트에는 문학과는 관계없이 그의 보수적인 정치관에 대해서만큼은 X표가 그어졌다. 젊은이들의 지적 급진주의를 비판하며 맑스나 엥겔스의 인문주의 전통을 본받으라고 한다. 옳은 말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유종호는 도저한 인문주의자이지만 맑스는 되지 못하나 보다. 그가 안타깝게 여겼을 그 수많은 젊은이들은 편향된 시각과 현실감각의 결여 때문에 들고일어난 것이 아니라 그 반대이다.

** 덤으로 말하자면, 어떻게 읽고 쓸 것인가에 대한 조언과 추천도서목록이 튼실한 혹으로 붙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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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후!의 강물에 천 개의 달이 뜬다 문학과지성 시인선 255
이원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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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클릭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이것이 야후! 시대의 시인, 이원의 명제이다. 시인도 어느덧 사이버세계를 노래하나보다. 이원이 이 시집 속에 그려내는 상상세계의 풍경은 '사막'처럼 황량하기 이를 데 없다. 그러니까, '전자 사막'을 떠돌며 채집한 이 스케치북에는 살색이 없다는 얘기다. 이제 더 이상 시인은 눈물이나 더 나아가 피눈물을 흘리면서 이 세계의 슬픔을, 슬픔답게 높게 예우하지 못한다/않는다. 그는 옆구리에 술병을 단, 눈이 젖은 떠돌이 시인이 아니다. 스산한 전자 사막 뒷골목을 떠도는 사이보그 유목민이거나 사이보그 집시이다. 불유쾌한 시공간을 표류하다 얻은 찢어진 상처와 그 상처 밖으로 나와 너덜거리는 전선줄을 그녀는 보여줄 뿐이다.

그러나, 그의 '야후!'에는 '강물'도 없을 뿐더러 그 위에 둥그런 '달'덩이 하나 뜨지 않는다. '디지털'이란 말이 너무도 진부한 이 디지털 시대를 아날로그식 사랑이 담긴 시선으로 그려낼 수는 없는가? '인터넷 서점 알라딘을 클릭한다 신간 목록을 들여다보다 / 가격이 20% 할인된 폴 오스터의 / 우연의 음악과 15% 할인된 가격에 / 르네 지라르의 폭력과 성스러움을 주문 클릭한다'(「나는 클릭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는 일은 너무도 가까이 와 있고, '나'를 검색창에 집어넣어 찾는, 그러나 그 안에서 '나'를 찾을 수 없음을 너무도 잘 아는 시대이다. 시인의 전위적 실험에 대한 집요한 노력은 치열하지만, 역으로 그만큼의 작위성이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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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양 한림신서 일본현대문학대표작선 26
다자이 오사무 지음, 유숙자 옮김 / 소화 / 200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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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철균에 의하면, 다자이 오사무는 강은교, 최승자에게 영향을 준, 허무주의의 대가라고 한다. 해서, 찾아 읽어보니 『사양(斜陽)』은 제목 그대로 저무는 태양을 그려내고 있다. 몰락하는 것들의 아름다움. (그러고 보니, 장정일이 그의 독서일기에서 고급문학은 몰락의 정서를 다루고 통속문학은 신데렐라류의 얘기를 다룬다, 라는 비슷한 말을 했던 게 생각난다.)

전후(戰後) 일본의 몰락 귀족 일가의 이야기를 다룬, 이 소설은 그 절망 안에, 또는 절망 곁에 예술과 퇴폐와 사랑과 혁명을 섞어 내거나 엮어내고 있다. 그런데 소설을 성실히 읽지 않아서인지 자꾸만 다자이 오사무와 소설 속의 '그들'이 겹쳐 보인다. 특히 마약 중독으로 삶을 마감한 나오지의 유서는 차라리, 다자이 오사무 자신의 진심을 담은 것이 아닌가, 싶다. 다자이 오사무를 잘 모르는 나는, 나오지와 그의 삶이 자꾸 경계선이 지워지는 것이다.

귀족이란 자의식과 그에 따른 '민중의 벗'이 될 수 없는 괴로움. 이것은 나오지의 유서를 통해 직접적으로 진술되기도 하고, '당신 동생 나오지도 귀족치곤 꽤 괜찮은 남자지만, 가끔 어쩌다 도저히 상대해 줄 수 없을 만큼 건방진 데가 있지. 나는 시골 농부의 아들이라, 이런 개울가를 지날 때면 어김없이 어릴 적 고향 개울에서 붕어를 낚던 일이며 송사리를 잡던 기억들이 생각나 몹시 그리워지곤 해.'(177쪽)라고 가즈코에게 말하는 소설가 우에하라의 입을 통해서 드러나기도 한다. '계급'은 확실히 인간을 질식시킨다. 민중에게 악수 받지 못한 슬픈 귀족이나, 그들에게 악수를 청하는 귀족이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민중 모두에게.

…허나, 이런 부질없는 생각이 뭐 중하랴. 실은, 이 소설에서 가장 빛나는 부분은, '인간은 모두 다 똑같다. (…) 이 신기한 말은 민주주의와도, 또한 맑시즘과도 무관합니다. 그건 틀림없이 주막에서 못생긴 남자가 미남자를 향해 내뱉은 말입니다. 단순한 초조감입니다. 질투입니다. 사상이고 뭐고 있을 리 없습니다.'(186쪽)라는 나오지가 쓴 유서의 한 대목! 이건 몰락 태양의 블랙유머이다, 최승자의 시에서도 발견되는. ('유사 유서'인) '죽음의 문학'은 무덤을 파두고 쓴 글이라 너무도 무거운 뼈저림이 느껴진다. 한편, 삶과 세상을 등진 예비-주검의 한없이 가벼운 한기(냉소)도 동시에 느껴진다. 그게 사양의 미학? 이상, 독서 과제 완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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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주 - 차마 말할 수 없어, 사라져간 모든 것들의 이름
방민호 지음 / 생각의나무 / 200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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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평론가는 글의 무게를 가늠하는 사람이지만, 그 판단을 다시 글에 담음으로써 스스로 글쟁이의 울에 갇힌다. 그렇다면 문학비평가는 어떤 글을 쓰는 사람일까. 문학평론가는 논객인 동시에 에세이스트가 될 것이다. 평론가 방민호의 <명주>도 에세이의 알리바이가 된다. <명주>는 숱한 수필집들처럼 역시나, 자서전적 에세이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치열한 문학도로서의 자의식이 들어있다. 뭐, 꼭 문학도라야만, 작가라야만, 인생을 꿰뚫어보고 호흡이 거칠도록 뜨거운 고백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 책은 세련된 시각적인 생김새만큼이나 알맹이도 꽉 차있다. 그 사람이 걸어간 길 - 시끌벅적하고 환한 대로일 수도 있고, 혼자만의 고요한 오솔길일 수도 있고, 들끓는 영혼의 길일 수도 있을 그런 여러 길들이 잔뜩 찌푸린 이마의 주름처럼 새겨져 있다. 그 길들을 속속들이 다 들여다보는 관음의 쾌감인지, 무엇인지는 나는 잘 모르겠다. <명주>는 그런 쾌감의 책이다.

'(…)내게 문학을 한다는 것은 아홉 살 때 이래 선택의 여지가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도대체 문학을 한다는 것은 뭘 어떻게 한다는 것인가. 생각해 보면 문학을 한다는 말처럼 이상한 말도 없다. 문학을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앞에 닥치는 것이고 힘을 다해 추구하는 것이다. 닥치는 것이 없어, 무엇을 읽고 무엇을 또 읽고 써야 하는지 모르게 되었고, 그 길을 가르쳐줄 선생도 선배도 찾을 줄 모르는 젊은이 앞에는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 모르는 숱한 시간과 자유가 펼쳐져 있을 뿐이었다.
그 해와 다음 해 두 겨울 사이에 나는 기숙사에 기거하고 있었다. 강의는 안 듣고 도서관에서 <마르크스주의의 철학적 기초>니 <청년 헤겔>이니 하는 번역서들을 읽으며 철학을 합네, 했다. 단편소설 하나 완성시켜 보지 못하고 시나 수상隨想이나 쓰고 민음사에서 낸 '오늘의 작가총서'나 읽으면서 문학을 합네, 했다.(…)'(113쪽)

젊은이에게는 뜨거운 깃발이 필요하다. 젊은 날의 방민호에게도 가슴 속의 뜨거운 깃발이 무수한 별자리들처럼 떠올랐던가 보다. 그의 대학시절 기록을 보면, 지나칠 정도의 아포리즘이 별자리처럼 빛나고 있다. '1984년 12월. 겨울 동안 할 중요한 일 : 공장 활동, 공장 경험, 책 숙독, 겨울 여행(걷거나 버스, 기차를 타자)'라는 짧은 기록은 소박하지만 성실한 느낌. '독서의 자취'라 이름 붙인 기록들은 치열한 독서를 보여주고……. 아, 여기서, 무수히 꽂아두고 무수히 꺾어버린 나의 깃발들이 부끄럽다. 청춘은 영과 육이 방황을 하고, 그렇게 뒤틀리며 힘겹게 대지에 뿌리박는 시기이다. 그래, 그래서 청춘은, 지향점이 필요하다. 진실로.

나는 어느 문학도의 고백과 기록을 훑으며 젊음과 문학과, 그리고 그 두 가지가 담지 못하는 더 큰, 다른 세계들을 생각해본다. 그리고 또 나는 물음표를 던진다. 진보적 열정을 품은 평론가가 조선일보에 기고할 수 있다는 것은 여전히 내 머리로는 이해불가다. 어떻게? 도대체 어떻게 그것이 가능한가? 조선일보 기고에 대한, 설득력 약한 변명의 글은 고운 <명주> 천의 흠이다. 그는 치열하되, 조선일보라는 주제의 사색에는 치열하지 못했거나 너무 순진했다. (그러나, 솔직하다.) : 조선일보와 이문열, 이인화의 곡필에 대해 쓰면서 글 말미에 '그러면서도 나 자신 나의 행로에 대해서 자신할 수만은 없으니 그것이 내 마음 한켠에 자리 잡은 불안의 원인이다.'(225쪽)라고 적는다. 그가 학생 시절 읽고서 적어둔, '불안은 선택이 잘못된 것일 수 있음을 감지하고 인정하는 데서 연유한다.'(49쪽)라는 말을 다시 떠올려 보는 것은 나 역시도 나의 행로에 대해 자신할 수 없으면서도 타인을 함부로 해석하고 비판하는 못난 버릇의 소유자이기 때문일까? 그…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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