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주 - 차마 말할 수 없어, 사라져간 모든 것들의 이름
방민호 지음 / 생각의나무 / 2003년 1월
평점 :
품절


문학평론가는 글의 무게를 가늠하는 사람이지만, 그 판단을 다시 글에 담음으로써 스스로 글쟁이의 울에 갇힌다. 그렇다면 문학비평가는 어떤 글을 쓰는 사람일까. 문학평론가는 논객인 동시에 에세이스트가 될 것이다. 평론가 방민호의 <명주>도 에세이의 알리바이가 된다. <명주>는 숱한 수필집들처럼 역시나, 자서전적 에세이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치열한 문학도로서의 자의식이 들어있다. 뭐, 꼭 문학도라야만, 작가라야만, 인생을 꿰뚫어보고 호흡이 거칠도록 뜨거운 고백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 책은 세련된 시각적인 생김새만큼이나 알맹이도 꽉 차있다. 그 사람이 걸어간 길 - 시끌벅적하고 환한 대로일 수도 있고, 혼자만의 고요한 오솔길일 수도 있고, 들끓는 영혼의 길일 수도 있을 그런 여러 길들이 잔뜩 찌푸린 이마의 주름처럼 새겨져 있다. 그 길들을 속속들이 다 들여다보는 관음의 쾌감인지, 무엇인지는 나는 잘 모르겠다. <명주>는 그런 쾌감의 책이다.

'(…)내게 문학을 한다는 것은 아홉 살 때 이래 선택의 여지가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도대체 문학을 한다는 것은 뭘 어떻게 한다는 것인가. 생각해 보면 문학을 한다는 말처럼 이상한 말도 없다. 문학을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앞에 닥치는 것이고 힘을 다해 추구하는 것이다. 닥치는 것이 없어, 무엇을 읽고 무엇을 또 읽고 써야 하는지 모르게 되었고, 그 길을 가르쳐줄 선생도 선배도 찾을 줄 모르는 젊은이 앞에는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 모르는 숱한 시간과 자유가 펼쳐져 있을 뿐이었다.
그 해와 다음 해 두 겨울 사이에 나는 기숙사에 기거하고 있었다. 강의는 안 듣고 도서관에서 <마르크스주의의 철학적 기초>니 <청년 헤겔>이니 하는 번역서들을 읽으며 철학을 합네, 했다. 단편소설 하나 완성시켜 보지 못하고 시나 수상隨想이나 쓰고 민음사에서 낸 '오늘의 작가총서'나 읽으면서 문학을 합네, 했다.(…)'(113쪽)

젊은이에게는 뜨거운 깃발이 필요하다. 젊은 날의 방민호에게도 가슴 속의 뜨거운 깃발이 무수한 별자리들처럼 떠올랐던가 보다. 그의 대학시절 기록을 보면, 지나칠 정도의 아포리즘이 별자리처럼 빛나고 있다. '1984년 12월. 겨울 동안 할 중요한 일 : 공장 활동, 공장 경험, 책 숙독, 겨울 여행(걷거나 버스, 기차를 타자)'라는 짧은 기록은 소박하지만 성실한 느낌. '독서의 자취'라 이름 붙인 기록들은 치열한 독서를 보여주고……. 아, 여기서, 무수히 꽂아두고 무수히 꺾어버린 나의 깃발들이 부끄럽다. 청춘은 영과 육이 방황을 하고, 그렇게 뒤틀리며 힘겹게 대지에 뿌리박는 시기이다. 그래, 그래서 청춘은, 지향점이 필요하다. 진실로.

나는 어느 문학도의 고백과 기록을 훑으며 젊음과 문학과, 그리고 그 두 가지가 담지 못하는 더 큰, 다른 세계들을 생각해본다. 그리고 또 나는 물음표를 던진다. 진보적 열정을 품은 평론가가 조선일보에 기고할 수 있다는 것은 여전히 내 머리로는 이해불가다. 어떻게? 도대체 어떻게 그것이 가능한가? 조선일보 기고에 대한, 설득력 약한 변명의 글은 고운 <명주> 천의 흠이다. 그는 치열하되, 조선일보라는 주제의 사색에는 치열하지 못했거나 너무 순진했다. (그러나, 솔직하다.) : 조선일보와 이문열, 이인화의 곡필에 대해 쓰면서 글 말미에 '그러면서도 나 자신 나의 행로에 대해서 자신할 수만은 없으니 그것이 내 마음 한켠에 자리 잡은 불안의 원인이다.'(225쪽)라고 적는다. 그가 학생 시절 읽고서 적어둔, '불안은 선택이 잘못된 것일 수 있음을 감지하고 인정하는 데서 연유한다.'(49쪽)라는 말을 다시 떠올려 보는 것은 나 역시도 나의 행로에 대해 자신할 수 없으면서도 타인을 함부로 해석하고 비판하는 못난 버릇의 소유자이기 때문일까? 그…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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