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갈대 > 진중권 - 김훈의 우익삼락

김훈의 우익삼락(右翼三樂)

: 43 : 4

최근에 소설가 김훈이 재미있는 얘기를 한 모양이다. 나는 그의 그 유명한 소설을 아직 안 읽었는데, 거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하나는 공적인 것으로, 박정희 시절의 이순신 이데올로기와 그것의 시대착오적 리바이벌에 이미 충분히 질려있기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사적인 것으로, 이순신을 사무라이 삼아버리는 어설픈 일본 우익 미학의 촌스러움이 내 미감을 적잖이 거스르기 때문이다. 그리고 솔직히 말하면 김훈은 미시마 유키오와 달리 사무라이 미학으로 비장하기에는 너무 귀여운 사람이다. 어쨌든 김훈은 그 ‘꽈’가 아니다.

노무현과 이순신
소설 ‘칼의 노래’
/경향신문 자료사진
사실 <칼의 노래>가 베스트셀러가 된 데에는 정치적 배경이 있다. 2001년에 그 책이 나왔을 때만 해도 그렇게 요란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게 갑자기 베스트셀러가 된 것은 어떤 정치적 사건과 관련이 있다.
김훈이 그토록 싫어하는 386 세대의 두목이 언젠가 국회에서 탄핵 먹고 잠시 청와대에 들어앉아서 근신을 한 적이 있다. 그때 직무를 정지당한 그 황건적 두목이 정신수양 차원에서 읽고 있다며 공개한 책의 목록에 우연히 <칼의 노래>가 들어 있었던 것이다.

예수를 믿는 이들이 예수를 닮기를 원하듯, 노짱을 믿는 사람들은 노짱을 닮기를 열망한다. 이런 것을 전문용어로 ‘미메시스’라 하는데, 내가 전공하는 미학에서 대단히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개념이기도 하다.
<칼의 노래>가 나온 지 2년 후에 갑자기 베스트셀러로 떠오른 데에는 황건적들의 이 예술적 습성이 대단히 중요하게 작용했던 것으로 안다. 덕분에 이 책은 베스트셀러가 되어 방송에 소개가 되기도 하고, 최근에는 김훈이 “아동극”이라 평한 그 드라마를 낳기도 했다.

우익일락

김훈에게는 이게 한편으로는 반가웠던 모양이다. 김훈의 말대로 “우익에겐 세 가지 즐거움(右翼三樂)이 있어. 세금 왕창 내고, 아들 최전방으로 보내고, 질서를 지키고.” 책이 많이 팔리면 인세를 많이 받고, 인세를 많이 받으면 “세금을 왕창” 낼 수 있다. 이로써 우익일락(一樂)이 저절로 해결된다.
有錢而自進納稅면 不亦樂乎아. 돈이 생겨도 저를 위해서가 아니라, 국가에 “세금 왕창” 낼 수 있기에 즐거운 것이 우익의 미덕. 거기에 비하면 담배 한 값에 500원 더 받는다고 절필 선언하는 일부 문인들의 좌익적 심성은 얼마나 옹색한가?

다른 한편 이게 부담스럽기도 했을 게다. 우익 김훈이 하필 국가에 “왕창” 공헌을 하는 계기를 마련해준 게 바로 황건적 두목, 그 휘하의 386 장수들, 그들을 따르는 노란 졸병들이 아닌가.
김훈이 종종 연출하는 우익 낭만주의적 위악은 그가 가진 모종의 결벽증에서 나오는 것이다. 내가 보기에 김훈이 맥락 없이 386 비난을 늘어놓는 것은 그가 수구 꼴통이라서가 아니라, 마음 속에서 이 불편한 고리를 잘라버리려는 무의식적 기제의 작동이다. 일종의 문학적 알리바이의 마련이라고나 할까?

우익이락

지난해 10월 종교단체와 보수·우익단체들이 서울시청 앞 광장에서 개최한 ‘국가보안법 사수 국민대회’ 집회에 10만여명이 모여 시위를 벌이고 있다.
/강윤중기자
우익의 두 번째 즐거움은 “아들 최전방으로 보내”는 것이다. 우익과 좌익 미학의 차이는 그들이 처한 물질적 상황의 관념적 반영이리라.
대한민국에서 병역은 국민의 4대의무의 하나로 부과된다. 때문에 좌익의 물적 토대에 처한 이들에게 아들을 군대 보내느냐 마느냐 하는 것은 적어도 존재미학의 대상이 아니다. 왜? 그것은 자유로이 선택할 사안이 아니기 때문이다. 국가가 이렇게 즐거움을, 우익이락의 열락을 온 국민에게 의무적으로 제공하는 것이 바로 대한민국 국민 된 보람이 아니던가.

어떤 이들에게는 아들 군대 보내는 것도 존재를 완성하는 미적 수단이 된다. 여기서 우익은 선택할 수 있는 두 개의 옵션을 갖고 있다.
하나는 김훈처럼 아들을 군대 보냄으로써 그 즐거움을 긍정하는 우익 에피쿠로스(쾌락주의)의 길이다. 다른 하나는 그 즐거움을 애써 거부하는 우익 스토이시즘(금욕주의)의 길이다.
가령 국가안보를 위해 시청 앞에 수만의 인파를 동원한 모 우익 목사. 그는 자신의 쾌락을 7개월 단기복무로 절제하고, 자식 셋 모두 군대에 보내지 않음으로써 성직에 따르는 금욕의 모범을 보여준 바 있다.

우익삼락

우익의 세 번째 즐거움은 “질서를 지키고”이다. 먼저 우익일락의 예를 들어 보자.
“세금 왕창” 내는 우익에게는 존재미학인 것이, 그 주제가 못 되는 좌익에게는 “질서”라는 이름의 의무가 된다. 우익이 세금 내면서 기쁨을 느끼는 것은 안 내도 될 세금을 낸다는 뿌듯함에서 비롯되는 것이리라. 반면 담배 한 갑 살 때마다 500원씩 전에 안 하던 애국을 덤으로 하면서 좌익들이 기쁨을 못 느끼는 것은 아마 그것이 강요된 것이기 때문일 게다. 우익의 존재미학은 좌익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이 지켜야 할 “질서”가 된다.

우익이락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우익의 자식들이 군대에 가지 않는 것은 우익 된 쾌락을 자제하는 스토이시즘의 존재미학이나, 좌익의 자식들이 군대에 한번 안 가려면 난리 바가지를 쳐야 한다. ‘양심적 병역 거부’니 어쩌구 하며 아무리 변명을 해도, 감히 국가에서 제공한 즐거움을 거부한 죄를 단단히 치러야 한다.
이것이 바로 우익의 마지막 즐거움, 즉 공동체의 안녕과 번영을 위하여 반드시 지켜져야 할 “질서”라는 것이다.

소설가 김훈씨
/경향신문 자료사진
짜라투스트라는 귀엽게 놀았다

대한민국의 대부분의 우익들이 삼락(三樂)을 마다하고 저 스스로 불행해지는 금욕주의적 분위기 속에서, 저 홀로 과감하게 쾌락을 긍정하는 소설가는 새 시대의 열림을 알리는 짜라투스트라다.
남들 다 내는 세금 내고, 남들 다 가는 군대 가고, 남들 다 지키는 질서를 지키면서 거기서 남다른 즐거움을 느낀다면, 참으로 귀한 일이다. 내가 우익 미학의 그 처참한 촌스러움을 그나마 참아줄 수 있는 것은, 매사를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이 여유 때문이다.

ps.

아, 김훈씨께 마지막으로 한 마디. 이순신과 노무현의 동일시는 귀엽지만, 이순신과 박정희의 동일시는 징그럽다.



진중권 / 문화비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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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신문 이념지형 ‘보수’ 우세
[미디어오늘 2004-12-16 00:00]

[미디어오늘] 최근 4개월 동안 전국단위 10개 종합일간지를 대상으로 신행정수도 이전과 열린우리당이 제출한 4대입법 등을 다룬 칼럼을 통해 각 신문의 정치적 지향성을 측정한 결과, 한겨레와 경향신문을 제외한 대부분의 신문들이 강한 보수적인 성향을 드러냈다.

이 같은 조사결과는 본지가 지난달 3일 대전 배재대학교 정연정 교수(행정학과)와 성균관대 김위근 강사(언론학)로 구성된 공동연구팀에게 ‘칼럼니스트·취재원 분석을 통한 신문의 정치적 편향성 연구’를 의뢰해 집계한 것이다.

연구팀은 8월1일부터 11월30일까지 4개월 동안 10개 종합일간지에 실린 내·외부 칼럼을 대상으로 한국언론재단 기사데이터 시스템 KINDS DB와 중앙일보 DB 검색을 이용해 조사대상 신문에 실린 칼럼 685건을 추출한 후 이 중 507건을 분석했다.

이 기간 동안 실린 분석대상 칼럼중 신행정수도 이전 4대입법 전체 국가보안법 과거사진상규명법 등의 4개 주제에 대해 긍정적인 입장을 취할 경우 1.00점, 반대일 경우에는 -1.00점을 부여하는 방식으로 점수를 매긴 결과, 10개 일간지 전체 평균은 -0.16점으로 나왔다.

10개 종합일간지의 평균적인 칼럼논조가 4대입법과 신행정수도 이전에 부정적인 입장을 나타냈음을 보여주는 결과로 풀이된다.

조선일보는 -0.89점을 기록해 신행정수도와 4대 개혁법안에 가장 부정적인 것으로 나타났으며, 중앙일보가 -0.62점으로 그 뒤를 이었다.

반면 한겨레와 경향신문은 각각 0.97점과 0.90점을 기록해 조선·중앙과 정반대의 입장을 취하고 있었다.

한편 서로 대척점에 서 있는 조선과 한겨레·경향은 모든 쟁점에서 정치지향이 일관됐으나, 동아일보의 경우 쟁점별 점수 편차가 커 일관성이 떨어졌다.

사내외에서 지면보수화 논란이 한창인 문화일보의 경우 동아일보(-0.52점)보다도 부정적인 -0.56점을 나타내 이미 새로운 보수신문으로서 자리매김했음을 보여줬다.

문화일보는 4가지 쟁점사안의 상당부분에서 동아일보와 비슷한 점수를 받았거나 오히려 더 부정적인 성향을 나타냈다.

한겨레·경향 다음으론 서울신문(0.45점)과 한국일보(0.24점)가 위치했으며 국민일보와 세계일보는 보수쪽으로 기울어진 중립적 논조를 유지하면서 각각 -0.35점과 -0.29점을 기록했다.

한편 이 기간동안 각 신문에 게재된 칼럼 507건 중에서는 과거사청산 문제를 다룬 칼럼이 30.0%를 차지해 신문사들의 높은 관심을 반영했다.

신행정 수도이전과 국가보안법 폐지는 각각 21.9%(111건)와 21.5%(109건)을 차지해 언론개혁과 사학개혁 등의 사안보다 상대적으로 칼럼 게재 비율이 높았다.

외부 칼럼니스트의 직업은 교수가 65.2%를 차지해 학계가 신문의 여론정치에 주요 소스로 활용되고 있음을 확인시켜 줬다.

내부 칼럼니스트의 직책 비율은 논설위원(50.2%), 차장·부장급 데스크(26.6%), 기자(23.2%) 순으로 집계됐다.

김성완 기자 sabi@media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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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립간 2004-12-16 14: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x Libris님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그래프에서 X축은 무엇을 의미하고 있나요? Y축도 범위가 -2부터 2까지 인데...

도서관여행자 2004-12-16 15: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궁금한 점입니다. <미디어오늘>의 기사에는 그래프에 아래와 같은 캡션이 달려있네요 :

▲ 신문사 칼럼의 정치적 지향성의 상호거리를 측정하기 위해 다차원척도법을 사용했다. 분포도 1차원의 위로 올라갈수록 4대 개혁법안 등에 긍정적이며 아래로 내려갈수록 부정적임을 의미한다. 차원1과 2의 함수값은 신문사간 이념적 거리를 뜻하는 것으로, 이 방법에 따르면 조선 중앙을 1그룹, 동아 문화를 2그룹, 한국 세계를 3그룹, 경향 한겨레를 4그룹으로 나눌 수 있다.
 
 전출처 : 노부후사 > [이런 생각] 세속주의를 위하여 - 고종석

 [이런 생각] 세속주의를 위하여
 
[한국일보 2004-12-01 19:33] 
 
화가 친구의 파리 전시회를 보러 온 김에 모로코의 탕헤르에 들렀다.
아프리카 북서단 지브롤터 해협에 자리잡은 항구도시다.



7세기 말 이래 수백년 동안 사라센제국 영토였으나, 전략적 가치 때문에 15세기 말 이후 스페인 포르투갈 영국 프랑스 등 유럽 열강의 각축장이 된 곳이다.



15세기까지 이슬람의 지배를 받았던 남부 스페인 안달루시아 지방이 이슬람적 과거에 기독교적 현재가 포개진 잡거공간이라면, 해협 건너 탕헤르는 제국주의적 기독교인들에게 짓밟힌 몇 세기에도 불구하고 의연히, 압도적으로 이슬람 공간이었다.



라마단 기간이어서 음식점들은 거의 문을 닫았다.



대낮의 굶주림을 실천하는 이슬람인들의 신심에 감동하면서도, 새삼 종교에 대해 딴죽을 걸고 싶어졌다.



죽음에 대한 공포가 종교의 중요한 기반이긴 하지만, 실상 인류는 거의 전 역사에서 종교를 죽임과 죽음의 구실로 남용해 왔다.



기독교의 역사는 그 사랑의 윤리에도 불구하고, 피로 얼룩진 죽임과 죽음의 역사, 증오의 역사였다.



그것은 모든 일신교가 피할 수 없는 운명인 것 같기도 하다.



일신교의 신은 질투하는 신이니 말이다.



상대적 관용성을 역사 속에서 실천해온 이슬람교도들 역시 자신의 신에게 세계를 헌정하려는 욕망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부시가 이슬람권을 상대로 벌여온 전쟁은 경제 정치적 이해관계에 바탕을 둔 것이겠지만, 거기에 기독교 근본주의라는 자기중심적 세계관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역사에서 종교는 흔히 평화와 사랑보다는 전쟁과 증오에 기여해왔다.



그리고 그것은 프랑스혁명사에서 보듯, 공화정의 적이기도 했다.



미디어 이론가 레지스 드브레가 미국은 공화정이 아니라고 주장한 이유의 하나는 그 나라의 유사 신정국가적 성격에 있었다.



그는 취임 선서 때 프랑스 대통령이 공화주의 헌법에 기대는데 비해 미국 대통령은 성서에 손을 얹는 사실을 지적했다.



폐쇄적이고 이기적인 종교관이 이런 유사 신정 분위기 그 언저리 어딘가에 자리잡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한 미국 학자가 21세기를 문명충돌의 세기로 내다봤을 때, 그 문명들은 결국 종교들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요컨대 종교나 신심은 흔히 증오와 전쟁의 연료이고, 잘해봐야 상호 무관심 속에서 실천되는 고립의 연료에 지나지 않는다.



종교라는 사회제도의 보편성은 종교적 열정이 애초부터 인간의 유전자 어딘가에 새겨져 있을지도 모른다는 추측마저 하게 한다.



그것은 인간이라는 종의 나약함과 관련 있는 것이겠지만, 그 나약함이 한 순간의 결단으로 극복될 수 없다는 것도 분명하다.



그렇다면 우리가 할 수 있고 해야 할 일은 종교를 되도록 우리 내면에 가두고 그것이 세속세계에 영향을 덜 끼치도록 애쓰는 것일 터이다.



핵심은 세속적 삶의 역학에 종교를 이용하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이다.



그 것은 직업적 종교인들만이 아니라 세속인들도 함께 실천해야 한다.



예컨대 우리 정치인들은 제 종교적 신념과 무관하게 여러 종교의 지도자들을 찾아 '가르침'을 구하는 버릇이 있는데, 이는 이성의 규칙에 따라 운영돼야 할 세속사회를 탈이성의 영역에 갖다 바치는 퇴행적 악습이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신의 것은 신에게”라는 말로 예수가 표현하고자 했던 것 가운데 하나는 종교를 세속에 개입시키지 않는 세속주의였을지도 모른다.



종교를 지니고 종교의식을 실천하는 것은 인간존재의 자연스러운 일부지만, 문명의 건설과정은 흔히 자연스러움과의 싸움이었다.



/고종석 논설위원



파리에서 aromach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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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대통령, 아르빌 자이툰부대 전격방문














△ 노무현 대통령이 8일 오전(한국시각) 유럽 순방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이라크 북부 에르빌의 자이툰 부대를 전격 방문해 도열한 장병들의 환영을 받으며 손을 흔들고 있다. 에르빌/탁기형 기자 khtak@hani.co.kr




철통보안 속 방문…“평화재건 임무 충실해달라” 격려

유럽 3개국 방문을 마치고 8일(이하 한국시간) 귀국길에 오른 노무현 대통령이 귀국 도중 이라크 아르빌에 주둔중인 자이툰 부대를 전격 방문해 장병들을 격려했다.

노 대통령은 이날 새벽 프랑스 파리를 출발해 쿠웨이트를 경유, 우리 군용기 편으로 낮 1시반께 이라크 북부 아르빌에 도착했으며, 2시간여 동안 현지에 머물며 자이툰 장병들과 조찬을 함께 하는 등의 행사를 한 뒤 다시 귀국길에 올랐다. 노 대통령은 9일 새벽 서울공항을 통해 귀국할 예정이다.

이번 방문은 지난달 27일 노 대통령의 최종결심에 따라 결정되었으며, 청와대와 외교부, 군 등은 그동안 뒤 극도의 보안 속에 행사를 준비해왔다고 정부 관계자는 전했다.

노 대통령은 자이툰 부대 영내에서 장병들과 조찬을 함께 하면서, “처음에 파병할 때 어려 논란이 있었지만 마지막에 안전이라는 측면에서 걱정 많이 했다”며 “와서 보니 우리 군의 능력이 증명되는 것 같아 자부심을 느낀다”고 치하했다. 노 대통령령은 이어 “이라크의 평화재건 지원, 그리고 이라크내에서 한국의 이미지를 심는 것이 고생스런 일이지만 여러본의 몫”이라며 “한국의 역사속에서 우리 군이 맡아야할 일에 오로지 출실해달라”고 당부했다.

노 대통령은 자이툰 부대 황의돈 사단장으로부터 현황보고를 듣고, “국가를 대표해서, 국민들 대표해서 장병들에게 인사를 하고 싶었다”며 “와서보니 정말 잘하고 있고 장하고”고 격려했다. 이어 부대 내무반을 찾아 장병들을 격려했으며, 지난달 27일 개원한 자이툰 병원을 둘러봤다.

노 대통령은 자이툰 방문을 마친 뒤 다시 우리 군용기편으로 쿠웨이트로 이동해 전용기를 이용해 부인 권양숙씨와 함께 귀국했다.

앞서 노 대통령은 파리 출발 직후 기내에서 약식 기자간담회를 열어 “그동안 비공개리에 진행된 자이툰 부대 배치가 완전히 끝났다”며 “장병들이 안착한 만큼 연말을 기해 제가 한번 위로하고 격려하는 것이 도리”라고 말해, 자이툰 부대 방문사실을 최초로 공개했다.

노 대통령의 자이툰 방문에는 반기문 외교통상부 장관, 권진호 국가안보보좌관, 정우성 외교보좌관 등 정부 관계자와 경호요원 등 30여명이 수행했다.

아르빌 현지에는 자이툰 사단 3700명이 주둔중이며, 이라크 군·경의 치안질서 유지를 지원하는 한편, 도로건설·상수도 정비 등 민사 및 재건지원 활동을 벌이고 있다. 아르빌/공동취재단, 쿠웨이트/<한겨레> 백기철 기자 kcbaek@hani.co.kr


△ 12월 9일 오프라인 6판에서는 제1면 오른쪽 상단에 컬러 사진을 포함해서 실렸다. 헤드라인의 글꼴 크기는 두 번째로 크다. 독자들이 신문을 읽을 때의 시선의 움직임을 고려해 보면, 두 번째나 첫 번째로 중요한 기사라고 할 수 있다. 온라인에서는 첫 번째로 중요한 기사로 올라와 있다.


 










“침략범죄 피고 노무현에 유죄를”
[한겨레 2004-12-09 00:39]

[한겨레] 민중재판 “평화의 이름으로 기소” 박수터져 [3판]“피고인 노무현에게 유죄결정을 내려줄 것을 요청합니다.” 7일 밤 ‘부시·블레어·노무현 전범 민중재판’이 열린 서울 연세대 백양관 강당. 3413명의 시민 기소인단을 대표해 위대영 변호사(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가 배심원석을 향해 피고인 단죄를 요구했다.


위 변호사는 “피고인은 대한민국의 대통령으로서 침략전쟁을 거부하고 세계평화를 위해 노력해야 함에도 국군파병을 통해 침략국의 일원이 됐으며, 이는 침략범죄와 침략범죄 방조를 규정한 이라크 전쟁범죄와 파병에 대한 민중법정 헌장 제3조 제1항, 제4조 제1항에 해당한다”며 압박했다.

이에 변호인단은 “유엔의 파병 결정이 있었던 만큼 절차적 정당성을 갖췄다”고 맞섰다. 이어 이라크 재건, 한-미 동맹 강화, 경제적 효과 등 익숙한 파병 논리와 국익론을 강조했다. 앞서 이라크 전쟁의 ‘기원’만큼이나 긴 기소요지 낭독에 이어 “부시·블레어·노무현을 반전평화를 염원하는 전세계 민중의 이름으로 기소한다”는 말이 나오자 150여명의 방청객들은 박수로 답했다.

전국에서 뽑힌 10명의 배심원들 앞에서 열린 이날 법정공방은 예정된 시간을 넘겨 밤 11시가 넘도록 진행됐다. 9일에는 지난해 이라크에서 총을 맞고 숨진 김만수(당시 오무전기 노동자)씨 가족 등이 증인으로 나와 파병으로 인한 국민 생명권 위협을 다룬 심리가 열릴 예정이다. 청와대는 지난 2일 전범 민중재판의 ‘소환장’ 접수를 거부했다. 결심과 선고재판은 오는 11일 오후 3시 서울 경희대 크라운관으로 법정을 옮겨 진행된다. 김남일 기자 namfic@hani.co.kr


△ 12월 9일 오프라인 6판에서는 제10면 왼쪽 하단에 실렸다. 온라인에서는 검색을 통해 찾을 수 있었다.


한겨레 지면 내에서도 노무현의 자이툰 부대 방문에 대한 (비판적 시각이 결여된, 그래서 언뜻 보면 객관적으로만 보이는) 기사가 제1면 기사로 실리는데, 다른 찌라시들은 오죽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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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상과 문화권력의 함수관계

이상빈
한국외대 불어과 대우교수
프랑스 파리제8대학 문학박사



처녀작이 많다는 것은 여전히 문학작품에 대한 수요가 있다는 뜻이고, 문학에 뜻을 두는 사람이 여전히 들끓는다는 사실을 입증한다. 프랑스에서는 영상 쪽에 무한한 상상력을 제공하는 문학의 역할에 대해 사회적 합의가 당연히 이루어져 있다.



문화의 달로 정한 10월이다.
우리가 관 주도의 행사를 통해 일반인들에게 문화의 의미를 부각시키려는 노력을 경주하고 있다면 프랑스인들에게 있어 가을은 무엇보다도 문학상의 계절이다. 우리의 경우 디지털 매체의 보급과 더불어 인쇄 매체, 특히 문학의 죽음에 대한 논의가 많은 신문과 잡지 지면을 채우고 있지만 프랑스 문학의 현재는 더없이 건강해 보인다. 매년 9월 학기 시작과 더불어 집중적으로 신간이 쏟아지는데, 2004년의 경우 총 669권의 소설이 일반인들에게 선보이고 있다. 그중 452권이 프랑스 소설이고, 217권이 외국소설의 번역작품이며, 작가들의 처녀작만도 무려 138권이 이른다. 처녀작이 많다는 것은 여전히 문학작품에 대한 수요가 있다는 뜻이고, 문학에 뜻을 두는 사람이 여전히 들끓는다는 사실을 입증한다. 프랑스에서는 영상 쪽에 무한한 상상력을 제공하는 문학의 역할에 대해 사회적 합의가 당연히 이루어져 있다. 실제로 오늘날 제작되고 있는 많은 영화들이 소설을 기반으로 제작된 것들이고, 그러기에 문학과 영상은 긴밀한 협조 하에 공생을 도모하고 있다.
자국 언어에 대해 누구보다 더 애정을 갖고있는 프랑스인들이기에 언어의 결정체인 문학은 프랑스에서 각별한 관심을 받을 수밖에 없다. 문예지의 의미가 오늘날 많이 퇴색하기는 했지만, 이차대전 당시 프랑스를 접수한 독일 대사가 집중적으로 관리해야할 대상 중 하나로 1909년 소설가 앙드레 지드가 창간한 문예지 ꡔ누벨 르뷔 프랑세즈ꡕ를 거론했다는 사실은 이미 잘 알려진 이야기이다. 적어도 20세기 전반부까지 문학이 프랑스 사회 속에서 차지하는 영향력은 거의 절대적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문학에 대해서는 10월부터 문학상을 통해 집중적으로 보상이 이루어지지만 프랑스 문학상의 역사는 100년 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에드몽 공쿠르의 유언에 따라 제정된 공쿠르 상이 그 시초이다. 이 상을 수상하면 최소 60만 부 정도의 판매가 보장되기에 작가들 입장에서는 평생 글만 쓸 수 있는 재원을 마련하기 위해서라도 이 상을 소망한다. 영화로도 만들어진 바 있는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ꡔ연인ꡕ은 100만 부 이상의 판매부수를 기록하기도 했다.
프랑스에는 공쿠르 상 외에도 무수한 문학상들이 존재한다. 1925년 제정된 르노도 상, 1904년 제정된 후 여성 문제를 다룬 작품들에게 수여되는 페미나 상, 1958년 만들어진 후 새로운 기법을 추구하는 작가들에게 수여되는 메디치 상 등이 대표적인 문학상들이다.

프랑스 문학상에는 문학권력 혹은 문화권력이라는 수식어가 항상 따라다닌다. 공쿠르 상의 경우 ‘갈리그라쇠이유(Galligrasseuil)’라는 표현으로 그 권력이 상징된다. 이 단어는 거의 대부분 공쿠르 상을 독식하는 갈리마르, 그라세, 쇠이유 출판사들을 동시에 지칭하는 표현이다. “공쿠르 상을 조종하는 문학권력이 존재하느냐?”에 대해 논쟁이 끝없이 벌어지지만, 출판사가 심사위원 및 언론을 대상으로 벌이는 로비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작가와 비평가의 이데올로기, 글쓰기 경향, 출신학교, 인맥관계 등에 의해 문단의 현실이 미세하게 나뉘어져 있기 때문이다. 비슷한 모습을 찾기 힘들 정도로 각종 문예지들 역시 서로 완연히 다른 성향을 띠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제도권 쪽의 문학권력에 대항해 시도되는 여러 행사들 역시 언론의 집중 조명을 받고 있는데, 그중 가장 신선한 것이 바로 ‘고등학생 공쿠르 문학상’이다. 공쿠르 상을 본 따 1988년 렌 소재 프낙(FNAC)과 한 문학 담당 선생이 주도하여 만든 이 상은 고등학교 2학년과 3학년 재학생으로 구성된 심사위원들이 매년 ‘올해의 소설’ 수상자를 선정하는 독특한 행사이다. 이 행사를 후원하는 교육부는 매년 문학, 과학, 기술을 전공하는 약 400명으로 구성된 13개 학급을 먼저 선정하고, 이들이 9월중 공쿠르 상 공식 선정작품 중 8개를 고른다. 또 각 학급은 모든 작품을 읽고 서로 의견을 교환한 후 3개의 작품을 최종적으로 선정한다. 그리고 각 학급이 선정한 작품들을 설명, 옹호할 수 있는 대표 겸 심사위원들이 11월 12일 렌에 모여 공쿠르 상 수상작이 공식 발표되기 수십 분 전 ‘고등학생 공쿠르 상’ 수상작을 발표하고 있다. 로비와 인맥 등으로 얼룩진 프랑스의 가장 권위 있는 문학상들의 메커니즘에 공식적으로 도전하는 이러한 시도는 프랑스 문화계에 많은 반향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중이다.

프랑스의 문학권력을 거론할 때면 점증하는 저널리즘 비평의 무게도 소홀히 다룰 수 없다. 가장 주목할 만한 것들은 ꡔ르 몽드ꡕ, ꡔ르 피가로ꡕ 및 ꡔ리베라시옹ꡕ 지의 서평들이고, 글의 성격 역시 각 신문의 성향에 따라 완연히 달라진다. 예를 들어 우파 신문 ꡔ르 피가로ꡕ가 여행, 식도락과 관련된 문학 특집호를 간간이 꾸미는 반면, 좌파 신문 ꡔ리베라시옹ꡕ에서는 그런 부류의 기사를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역사 문제와 작가의 사회 참여에 훨씬 비중을 두는 ꡔ리베라시옹ꡕ지의 경우 미국 만화가 아트 슈피겔만이 그린 ꡔ쥐(Maus)ꡕ에 대해 거의 두 페이지에 걸쳐 취급하고 있다. 풀리처 상을 받은 이 만화집이 유대인 학살 문제를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또 ꡔ르 피가로ꡕ 지가 영국 보수주의자 에드먼드 버크나 이차대전 당시 대독 협력작가 드리외 라 로셸에 대해 관대한 반면, 좌파 신문들에서는 그들에 대한 언급을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젊은 층을 겨냥한 ꡔ리베라시옹ꡕ은 사르트르 같은 작가를 위해서 10페이지씩이나 신문 지면을 할애하는 파격을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오늘날 프랑스 쪽에 진지하게 제기되는 질문은 문학의 의미 쇠퇴나 변질에 대한 것보다, 문학이 과연 권력을 가지고 있는가 하는 근원적 질문에서 비롯된다. 또 1968년 5월 사태 이후 도래한 기성 가치의 전복은 문학 쪽에도 혁명을 가져왔다. 포스트모더니즘 혹은 누보 로망(신소설)의 이름으로 표출된 새로운 문학의 모습은 이성, 합리성이라는 서구의 중심가치를 뿌리째 부정하면서 중심과 주변의 이름으로 설파되던 기존의 프랑스 문학 모습을 완전히 뒤바꾸어놓았다. 환언하자면 보편성, 박애, 인권의 이름으로 세계에 대해 일갈하던 프랑스 문학은 그 역할을 포기하는 대신 주변인, 외국인, 제국주의를 체험한 국가들, 혹은 소외 받는 자들 이름으로 말하기 시작한 것이다. 최근에 집중적으로 문학상을 수상하는 작가들 중에서는 예전에 프랑스가 식민지로 거느렸고 지금도 해외 소재 프랑스 영토로 관리하고 있는 지역 출신들이 많다. 어떤 의미에서는 프랑스의 자신감 상실과도 관련되는 이러한 모습은 제3세계 문학에 대해서 훨씬 관심과 주의를 기울이게 만들고 있다. 단적인 예로 2004년 9월 프랑스 신문들은 황석영의 ꡔ손님ꡕ을 가장 주목해 볼만한 신간 중 하나로 격찬한다.
프랑스 문학계에서 대가들이 거의 사라진 사실에 대해서는 프랑스 사람들 대부분 이 동의한다. 오직 미셸 투르니에 정도가 대가들 시대에 대한 향수를 느끼게 해줄 뿐이다. 그렇지만 문학을 통해 세계를 알려는 진지한 노력이 지속되는 한 프랑스 문학의 권력은 앞으로도 상당기간 유지될 것이다. 문학상이 문학에 대한 경의의 표시이기는 하지만, 문학이 곧 세계 이해의 첩경인 까닭에 우리가 새로운 프랑스 소설들의 차고 넘침에 대해 다시 생각해볼 여지가 충분히 있지 않을까?

http://www.hufs.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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