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후!의 강물에 천 개의 달이 뜬다 문학과지성 시인선 255
이원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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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클릭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이것이 야후! 시대의 시인, 이원의 명제이다. 시인도 어느덧 사이버세계를 노래하나보다. 이원이 이 시집 속에 그려내는 상상세계의 풍경은 '사막'처럼 황량하기 이를 데 없다. 그러니까, '전자 사막'을 떠돌며 채집한 이 스케치북에는 살색이 없다는 얘기다. 이제 더 이상 시인은 눈물이나 더 나아가 피눈물을 흘리면서 이 세계의 슬픔을, 슬픔답게 높게 예우하지 못한다/않는다. 그는 옆구리에 술병을 단, 눈이 젖은 떠돌이 시인이 아니다. 스산한 전자 사막 뒷골목을 떠도는 사이보그 유목민이거나 사이보그 집시이다. 불유쾌한 시공간을 표류하다 얻은 찢어진 상처와 그 상처 밖으로 나와 너덜거리는 전선줄을 그녀는 보여줄 뿐이다.

그러나, 그의 '야후!'에는 '강물'도 없을 뿐더러 그 위에 둥그런 '달'덩이 하나 뜨지 않는다. '디지털'이란 말이 너무도 진부한 이 디지털 시대를 아날로그식 사랑이 담긴 시선으로 그려낼 수는 없는가? '인터넷 서점 알라딘을 클릭한다 신간 목록을 들여다보다 / 가격이 20% 할인된 폴 오스터의 / 우연의 음악과 15% 할인된 가격에 / 르네 지라르의 폭력과 성스러움을 주문 클릭한다'(「나는 클릭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는 일은 너무도 가까이 와 있고, '나'를 검색창에 집어넣어 찾는, 그러나 그 안에서 '나'를 찾을 수 없음을 너무도 잘 아는 시대이다. 시인의 전위적 실험에 대한 집요한 노력은 치열하지만, 역으로 그만큼의 작위성이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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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양 한림신서 일본현대문학대표작선 26
다자이 오사무 지음, 유숙자 옮김 / 소화 / 200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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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철균에 의하면, 다자이 오사무는 강은교, 최승자에게 영향을 준, 허무주의의 대가라고 한다. 해서, 찾아 읽어보니 『사양(斜陽)』은 제목 그대로 저무는 태양을 그려내고 있다. 몰락하는 것들의 아름다움. (그러고 보니, 장정일이 그의 독서일기에서 고급문학은 몰락의 정서를 다루고 통속문학은 신데렐라류의 얘기를 다룬다, 라는 비슷한 말을 했던 게 생각난다.)

전후(戰後) 일본의 몰락 귀족 일가의 이야기를 다룬, 이 소설은 그 절망 안에, 또는 절망 곁에 예술과 퇴폐와 사랑과 혁명을 섞어 내거나 엮어내고 있다. 그런데 소설을 성실히 읽지 않아서인지 자꾸만 다자이 오사무와 소설 속의 '그들'이 겹쳐 보인다. 특히 마약 중독으로 삶을 마감한 나오지의 유서는 차라리, 다자이 오사무 자신의 진심을 담은 것이 아닌가, 싶다. 다자이 오사무를 잘 모르는 나는, 나오지와 그의 삶이 자꾸 경계선이 지워지는 것이다.

귀족이란 자의식과 그에 따른 '민중의 벗'이 될 수 없는 괴로움. 이것은 나오지의 유서를 통해 직접적으로 진술되기도 하고, '당신 동생 나오지도 귀족치곤 꽤 괜찮은 남자지만, 가끔 어쩌다 도저히 상대해 줄 수 없을 만큼 건방진 데가 있지. 나는 시골 농부의 아들이라, 이런 개울가를 지날 때면 어김없이 어릴 적 고향 개울에서 붕어를 낚던 일이며 송사리를 잡던 기억들이 생각나 몹시 그리워지곤 해.'(177쪽)라고 가즈코에게 말하는 소설가 우에하라의 입을 통해서 드러나기도 한다. '계급'은 확실히 인간을 질식시킨다. 민중에게 악수 받지 못한 슬픈 귀족이나, 그들에게 악수를 청하는 귀족이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민중 모두에게.

…허나, 이런 부질없는 생각이 뭐 중하랴. 실은, 이 소설에서 가장 빛나는 부분은, '인간은 모두 다 똑같다. (…) 이 신기한 말은 민주주의와도, 또한 맑시즘과도 무관합니다. 그건 틀림없이 주막에서 못생긴 남자가 미남자를 향해 내뱉은 말입니다. 단순한 초조감입니다. 질투입니다. 사상이고 뭐고 있을 리 없습니다.'(186쪽)라는 나오지가 쓴 유서의 한 대목! 이건 몰락 태양의 블랙유머이다, 최승자의 시에서도 발견되는. ('유사 유서'인) '죽음의 문학'은 무덤을 파두고 쓴 글이라 너무도 무거운 뼈저림이 느껴진다. 한편, 삶과 세상을 등진 예비-주검의 한없이 가벼운 한기(냉소)도 동시에 느껴진다. 그게 사양의 미학? 이상, 독서 과제 완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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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주 - 차마 말할 수 없어, 사라져간 모든 것들의 이름
방민호 지음 / 생각의나무 / 200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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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평론가는 글의 무게를 가늠하는 사람이지만, 그 판단을 다시 글에 담음으로써 스스로 글쟁이의 울에 갇힌다. 그렇다면 문학비평가는 어떤 글을 쓰는 사람일까. 문학평론가는 논객인 동시에 에세이스트가 될 것이다. 평론가 방민호의 <명주>도 에세이의 알리바이가 된다. <명주>는 숱한 수필집들처럼 역시나, 자서전적 에세이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치열한 문학도로서의 자의식이 들어있다. 뭐, 꼭 문학도라야만, 작가라야만, 인생을 꿰뚫어보고 호흡이 거칠도록 뜨거운 고백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 책은 세련된 시각적인 생김새만큼이나 알맹이도 꽉 차있다. 그 사람이 걸어간 길 - 시끌벅적하고 환한 대로일 수도 있고, 혼자만의 고요한 오솔길일 수도 있고, 들끓는 영혼의 길일 수도 있을 그런 여러 길들이 잔뜩 찌푸린 이마의 주름처럼 새겨져 있다. 그 길들을 속속들이 다 들여다보는 관음의 쾌감인지, 무엇인지는 나는 잘 모르겠다. <명주>는 그런 쾌감의 책이다.

'(…)내게 문학을 한다는 것은 아홉 살 때 이래 선택의 여지가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도대체 문학을 한다는 것은 뭘 어떻게 한다는 것인가. 생각해 보면 문학을 한다는 말처럼 이상한 말도 없다. 문학을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앞에 닥치는 것이고 힘을 다해 추구하는 것이다. 닥치는 것이 없어, 무엇을 읽고 무엇을 또 읽고 써야 하는지 모르게 되었고, 그 길을 가르쳐줄 선생도 선배도 찾을 줄 모르는 젊은이 앞에는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 모르는 숱한 시간과 자유가 펼쳐져 있을 뿐이었다.
그 해와 다음 해 두 겨울 사이에 나는 기숙사에 기거하고 있었다. 강의는 안 듣고 도서관에서 <마르크스주의의 철학적 기초>니 <청년 헤겔>이니 하는 번역서들을 읽으며 철학을 합네, 했다. 단편소설 하나 완성시켜 보지 못하고 시나 수상隨想이나 쓰고 민음사에서 낸 '오늘의 작가총서'나 읽으면서 문학을 합네, 했다.(…)'(113쪽)

젊은이에게는 뜨거운 깃발이 필요하다. 젊은 날의 방민호에게도 가슴 속의 뜨거운 깃발이 무수한 별자리들처럼 떠올랐던가 보다. 그의 대학시절 기록을 보면, 지나칠 정도의 아포리즘이 별자리처럼 빛나고 있다. '1984년 12월. 겨울 동안 할 중요한 일 : 공장 활동, 공장 경험, 책 숙독, 겨울 여행(걷거나 버스, 기차를 타자)'라는 짧은 기록은 소박하지만 성실한 느낌. '독서의 자취'라 이름 붙인 기록들은 치열한 독서를 보여주고……. 아, 여기서, 무수히 꽂아두고 무수히 꺾어버린 나의 깃발들이 부끄럽다. 청춘은 영과 육이 방황을 하고, 그렇게 뒤틀리며 힘겹게 대지에 뿌리박는 시기이다. 그래, 그래서 청춘은, 지향점이 필요하다. 진실로.

나는 어느 문학도의 고백과 기록을 훑으며 젊음과 문학과, 그리고 그 두 가지가 담지 못하는 더 큰, 다른 세계들을 생각해본다. 그리고 또 나는 물음표를 던진다. 진보적 열정을 품은 평론가가 조선일보에 기고할 수 있다는 것은 여전히 내 머리로는 이해불가다. 어떻게? 도대체 어떻게 그것이 가능한가? 조선일보 기고에 대한, 설득력 약한 변명의 글은 고운 <명주> 천의 흠이다. 그는 치열하되, 조선일보라는 주제의 사색에는 치열하지 못했거나 너무 순진했다. (그러나, 솔직하다.) : 조선일보와 이문열, 이인화의 곡필에 대해 쓰면서 글 말미에 '그러면서도 나 자신 나의 행로에 대해서 자신할 수만은 없으니 그것이 내 마음 한켠에 자리 잡은 불안의 원인이다.'(225쪽)라고 적는다. 그가 학생 시절 읽고서 적어둔, '불안은 선택이 잘못된 것일 수 있음을 감지하고 인정하는 데서 연유한다.'(49쪽)라는 말을 다시 떠올려 보는 것은 나 역시도 나의 행로에 대해 자신할 수 없으면서도 타인을 함부로 해석하고 비판하는 못난 버릇의 소유자이기 때문일까? 그…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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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
무라카미 류 지음 / 예문 / 199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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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라고? 소설 제목의 강렬함. 그렇게 재미있다는데 뭐가 담겨있을지….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나는 책 뚜껑을 연다.

무라카미 류의 장편소설 <69>는 자전적인 소설이다. 1969년의 일본의 어느 기지촌을 배경으로 하여 좌충우돌하는 '고삐리'들을 경쾌한 펜놀림으로 그려냈다. 현대사의 지식이 텅 비어 바람이 드나들기도 하는, 내 머릿속에는 베트남 전쟁 반대, 프랑스 68혁명, 히피 문화, 마약, 록음악, 마약…이라는 단어들이 '60년대 말'(곧, 69!)이라는 카테고리로 아주 헐겁게 묶인다. 이런 분출을 앞둔 활화산에 다름 아닌 시대적 배경에, 미국의 거르지 않은 문화들이 넘실대는 기지촌이라는 아주 흥미로운 정치-문화적 컨텍스트가 무대로 깔리고, 게다가 랭보와 고다르와 혁명가들을 주절주절 떠벌리고 록 밴드와 예쁜 여고생에 환장한 열일곱(야자키 겐스케=겐)이 주인공이다. 자, 모든 것은 갖추어졌다. 이제 남은 것은 페스티벌을 여는 것 밖에 없다.

나는 <69>를 유쾌하게 읽어가면서 이런 것들을 떠올렸다 : 장정일의 <아담이 눈 뜰 때>, 그리고 샐린저의 <호밀밭의 파수꾼>, 영화 [GO]. 아담처럼 겐은 문학을 읽고 음악을 듣고 하지만 그보다는 덜 음울하고 덜 진지하고 그래서 훨씬 가볍다. 아담은 '내 나이 열아홉 살, 그때 내가 가장 가지고 싶었던 것은 타자기와 뭉크화집과 카세트 라디오에 연결하여 레코드를 들을 수 있게 하는 턴테이블이었다. 단지, 그것들만이 열아홉 살 때 내가 이 세상으로부터 얻고자하는 전부의 것이었다.'라고 낮게 탄식하여 회고하고 또 직업작가가 되기 위해 대학의 영문과 입학을 포기한다.

그렇지만 겐은 대학입시를 앞둔 불안을 '문제는 여자다. 탈락자가 되는 것을 두려워하는 이유는 암컷을 손에 넣을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결혼상대라든지 제도의 문제가 아니다. 불특정 다수의 암컷이 문제였다. 암컷에게 잘 보일 보장이 없을 때, 남자들은 살 맛을 잃고 마는 것이다.(59쪽)'라고 매듭짓는다. 호밀밭의 콜필드도 겐처럼 17살 먹은 지독한 말썽꾼이라 이 학교 저 학교 옮겨다니는 신세이고 '어른세계'와 학교에 대한 신랄한 욕을 일삼는다. 그렇지만 겐은 좌충우돌이긴 했지만 페스티벌을 기획하는 '실천가'이며 그것이 또 비록 천사 같은 여학생이 좋아할 것이란 이유 때문이었지만 학교 옥상을 봉쇄한, 한 시대를 수놓은 '혁명가'(?)이기도 했다. [GO]의 스키하라/이정호는 지하철에서 '수퍼 그레이트 치킨 레이스'를 즐기는 풍운아이지만, 타고난 혈통 덕택에 '정체성'(그것은 곧, '이름')으로 고민한다. 이런 고민은 겐에게서는 찾아 볼 수가 없다.

겐은 권력과 체제, 기성세대와 학교라는 억압에 직접적으로 투쟁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들에게 복수하기 위해서는 노력한다, 즉 그들보다 더 즐겁게 살기 위해(!) 싸우는 것이다. 그래서 겐은 [상상력이 권력을 쟁취한다.]라는 슬로건을 내세우거나 청춘의 페스티벌을 열었던 것이다. 물론, 전위적인 예술, 그리고 전위적인 삶이 정치적 투쟁이나 혁명과 갖는 모종의 관계에 대해서는, 고급한 교양인인 당신도 이미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라고 하는 것은 지나치고, 우리는 겐의 축제를 가벼웁게, 유쾌한 시선으로 바라보면 된다.(이것은 겐의 말을 흉내낸 것!) --- 어차피, 지금껏, 상상력이 권력을 쟁취한 일은 오직 상상 속에서만 이루어졌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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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과 굴뚝청소부
이진경 지음 / 그린비 / 200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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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유명한 철학책. 많은 대학생 독자들이 이 책을 밟고 지나갔으리라. 그리고 나도 그 선배들처럼 이 책을 밟고 지나간다. 철학이 전공인 것은 아니지만, 거의 모든 인문사회과학이 철학적 토대가 없으면 이해하기 힘든 만큼, 기초적인 내용은 알고 있어야 할 것이다. 게다가 그렇게도 많이 읽힌 책을 나도 한번 읽어보자고, 이진경이란 매력적이고 성실한 학자를 단순한 풍문이나 인터뷰 글이 아닌 그의 저서를 통해 만나보자고, 생각했다.

내가 읽은 이 증보판은 멋진 표지와 세련된 디자인으로 탈바꿈한 것 이외에, 도판 텍스트를 추가한 것이 눈에 띤다. 무수한 선배들이 읽은 책과는 조금은 다른 셈이다. 곳곳에 삽입된 도판 텍스트는 그야말로 대위적인데, 솔직히 철학을 모르는 나로서는 이쪽이 더 흥미로웠다. 꾸벅꾸벅 졸다가도 도판을 볼 때는 가끔씩 눈을 번쩍 뜨기도 했으니.

'철학과 굴뚝청소부'라는 책의 제목은 조세희의 소설 <난.쏘.공>에서 빌려온 것.
- 문제 : 두 사람의 굴뚝 청소부가 청소를 마치고 내려왔다. 한 사람은 얼굴이 더러웠고, 한 사람은 얼굴이 깨끗했다. 이 중 과연 누가 세수를 하게 될까?
- 답 : 얼굴이 깨끗한 사람이다. 상대방의 얼굴을 보고서, 자기도 더러우리라고 생각할 것이기 때문이다.

데카르트 이후 근대철학이 인식하는 주체와 인식되는 대상으로 양분된, '굴뚝청소부의 딜레마'를 가지고 데카르트에서부터 푸코에 이르기까지 여러 철학자들을 훑고 지나간다. 이 책을 쓸 당시 ('근대성' 연구를 위해) 이진경은 알튀세르의 '문제설정'이란 개념을 적극 받아들이고 이에 따라 철학독서를 감행한다. 그것이 이 책이 다른 서양철학개론서들과는 다른 점이다.

무식한 내가, 저자의 의도와 상관없이 이 책을 읽고 크게 알게 된 점 하나는, '위대한 철학자는 알튀세르의 말처럼 '극한에서 사고하고 극한을 넘어서려고 감행한 사람'이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20쪽)'라는 것. 그래서인지 철학자들은 정상에서 정상으로, 이리저리 도약한다. 그래서 그들의 우주에서 균열과 경계가 보이는데 이를 더듬어보는 것이 이 책의 작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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