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
무라카미 류 지음 / 예문 / 1996년 4월
평점 :
절판


'69'라고? 소설 제목의 강렬함. 그렇게 재미있다는데 뭐가 담겨있을지….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나는 책 뚜껑을 연다.

무라카미 류의 장편소설 <69>는 자전적인 소설이다. 1969년의 일본의 어느 기지촌을 배경으로 하여 좌충우돌하는 '고삐리'들을 경쾌한 펜놀림으로 그려냈다. 현대사의 지식이 텅 비어 바람이 드나들기도 하는, 내 머릿속에는 베트남 전쟁 반대, 프랑스 68혁명, 히피 문화, 마약, 록음악, 마약…이라는 단어들이 '60년대 말'(곧, 69!)이라는 카테고리로 아주 헐겁게 묶인다. 이런 분출을 앞둔 활화산에 다름 아닌 시대적 배경에, 미국의 거르지 않은 문화들이 넘실대는 기지촌이라는 아주 흥미로운 정치-문화적 컨텍스트가 무대로 깔리고, 게다가 랭보와 고다르와 혁명가들을 주절주절 떠벌리고 록 밴드와 예쁜 여고생에 환장한 열일곱(야자키 겐스케=겐)이 주인공이다. 자, 모든 것은 갖추어졌다. 이제 남은 것은 페스티벌을 여는 것 밖에 없다.

나는 <69>를 유쾌하게 읽어가면서 이런 것들을 떠올렸다 : 장정일의 <아담이 눈 뜰 때>, 그리고 샐린저의 <호밀밭의 파수꾼>, 영화 [GO]. 아담처럼 겐은 문학을 읽고 음악을 듣고 하지만 그보다는 덜 음울하고 덜 진지하고 그래서 훨씬 가볍다. 아담은 '내 나이 열아홉 살, 그때 내가 가장 가지고 싶었던 것은 타자기와 뭉크화집과 카세트 라디오에 연결하여 레코드를 들을 수 있게 하는 턴테이블이었다. 단지, 그것들만이 열아홉 살 때 내가 이 세상으로부터 얻고자하는 전부의 것이었다.'라고 낮게 탄식하여 회고하고 또 직업작가가 되기 위해 대학의 영문과 입학을 포기한다.

그렇지만 겐은 대학입시를 앞둔 불안을 '문제는 여자다. 탈락자가 되는 것을 두려워하는 이유는 암컷을 손에 넣을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결혼상대라든지 제도의 문제가 아니다. 불특정 다수의 암컷이 문제였다. 암컷에게 잘 보일 보장이 없을 때, 남자들은 살 맛을 잃고 마는 것이다.(59쪽)'라고 매듭짓는다. 호밀밭의 콜필드도 겐처럼 17살 먹은 지독한 말썽꾼이라 이 학교 저 학교 옮겨다니는 신세이고 '어른세계'와 학교에 대한 신랄한 욕을 일삼는다. 그렇지만 겐은 좌충우돌이긴 했지만 페스티벌을 기획하는 '실천가'이며 그것이 또 비록 천사 같은 여학생이 좋아할 것이란 이유 때문이었지만 학교 옥상을 봉쇄한, 한 시대를 수놓은 '혁명가'(?)이기도 했다. [GO]의 스키하라/이정호는 지하철에서 '수퍼 그레이트 치킨 레이스'를 즐기는 풍운아이지만, 타고난 혈통 덕택에 '정체성'(그것은 곧, '이름')으로 고민한다. 이런 고민은 겐에게서는 찾아 볼 수가 없다.

겐은 권력과 체제, 기성세대와 학교라는 억압에 직접적으로 투쟁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들에게 복수하기 위해서는 노력한다, 즉 그들보다 더 즐겁게 살기 위해(!) 싸우는 것이다. 그래서 겐은 [상상력이 권력을 쟁취한다.]라는 슬로건을 내세우거나 청춘의 페스티벌을 열었던 것이다. 물론, 전위적인 예술, 그리고 전위적인 삶이 정치적 투쟁이나 혁명과 갖는 모종의 관계에 대해서는, 고급한 교양인인 당신도 이미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라고 하는 것은 지나치고, 우리는 겐의 축제를 가벼웁게, 유쾌한 시선으로 바라보면 된다.(이것은 겐의 말을 흉내낸 것!) --- 어차피, 지금껏, 상상력이 권력을 쟁취한 일은 오직 상상 속에서만 이루어졌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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