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난 듯이 눈이 내렸다


눈은 점점 길바닥 위에 몸을 포개어

제 고요를 쌓고 그리고 가끔

바람에 몰리기도 하면서

무언가 한 가지씩만 덮고 있었다


나는 나의 뒤에 발자국이 찍히는 것도

알지 못하고 걸었다


그 후 내

발자국이 작은 냇물을 이루어

근해에 나가 물살에 시달리는지

자주 꿈결에 물소리가 들렸고

발이 시렸다


또다시 나무에 싹이 나고

나는 나무에 오르고 싶어

아무 생각도 하지 못했다 그리고

잘못 자란 생각 끝에서 꽃이 피었다

생각 위에 찍힌 생각이 생각에

지워지는 것도 모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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zaza 2005-04-04 02: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번에 나온 장석남 시집 샀습니다ㅋㅋ<왼쪽 가슴 아래께에 온 통증>

도서관여행자 2005-04-04 08: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는 어젯밤에 장석남 시집 <별의 감옥> 읽었거든 ^^우히히 (도서관에서 빌린 거) 프로젝트 409라는 데서 나온 걸 보면, 그리고 일러스트와 디자인이 독특한 걸 보면 아마 한정판인가봐. 아...그리고 나는 <왼쪽 가슴...>을 먼저 읽었는데 그 이후에 읽은 <새떼...>가 더 느낌이 좋던걸. 부드러운 서정시라, 편안해지고 싶은 밤에 읽으면 좋은 거 같애.
 

고요히 귀신 들린 꽃

흔들리지도 않아


눈썹 위에 숨을 죽이고

보라, 이것이 세상을 만들고 있다


고요히 색깔을 엷게 하면서

좌우 사방으로 번져가는 속삭임


이 속삭임 아래

모든 것이 다시 만들어진다


흙 속으로 발목을 깊이 묻어본다

어느 징그러운 물을 만나


외로이 귀신 들린 꽃

나도 하나의 세계를 만들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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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말했잖아

정말, 정말, 사랑하는, 사랑하는, 사람들,

사랑하는 사람들은,

너, 나 사랑해?

묻질 않어

그냥, 그래,

그냥 살어

그냥 서로를 사는 게야

말하지 않고, 확인하려 하지 않고,

그냥 그대 눈에 낀 눈곱을 훔치거나

그대 옷깃의 솔밥이 뜯어주고 싶게 유난히 커 보이는 게야

생각나?


지금으로부터 14년 전, 늦가을,

낡은 목조 적산 가옥이 많던 동네의 어둑어둑한 기슭,

높은 축대가 있었고, 흐린 가로등이 있었고

그 너머 잎 내리는 잡목숲이 있었고

그대의 집, 대문 앞에선

이 세상에서 가장 쓸쓸한 바람이 불었고

머리카락보다 더 가벼운 젊음을 만나고 들어가는 그대는

내 어깨 위의 비듬을 털어주었지

그런 거야, 서로를 오래오래 그냥, 보게 하는 거

그리고 내가 많이 아프던 날

그대가 와서, 참으로 하기 힘든, 그러나 속에서는

몇 날 밤을 잠 못 자고 단련시켰던 뜨거운 말:

저도 형과 같이 그 병에 걸리고 싶어요


그대의 그 말은 에탐부톨과 스트렙토마이신을 한알 한알

들어내고 적갈색의 빈 병을 환하게 했었지

아, 그곳은 비어 있는 만큼 그대 마음이었지

너무나 벅차 그 말을 사용할 수조차 없게 하는 그 사랑은

아픔을 낫게 하기보다는, 정신없이,

아픔을 함께 앓고 싶어하는 것임을

한밤, 약병을 쥐고 울어버린 나는 알았지

그래서, 그래서, 내가 살아나야 할 이유가 된 그대는 차츰

내가 살아갈 미래와 교대되었고


이제는 세월이라고 불러도 될 기간을 우리는 함께 통과했다

살았다는 말이 온갖 경력의 주름을 늘리는 일이듯

세월은 넥타이를 여며주는 그대 손끝에 역력하다

이제 내가 할 일은 아침 머리맡에 떨어진 그대 머리카락을

침 묻힌 손으로 집어내는 일이 아니라

그대와 더불어, 최선을 다해 늙는 일이리라

우리가 그렇게 잘 늙은 다음

힘없는 소리로, 임자, 우리 괜찮았지?

라고 말할 수 있을 때, 그때나 가서

그대를 사랑한다는 말은 그때나 가서

할 수 있는 말일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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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가 섬을 떠난다, 비로소 살아 움직이는 바다, 툭툭 수평선이 끊어지고 있다. 돛배가 거쳐간 섬은 無人島, 떠날 사람 다 묶인 無人島, 그는 캄캄한 제 몸 속으로 기어들어가 모기 소리만 내놓고 아이를 불러들였다.

헤엄쳐 가 볼까?

저 배, 어디로 흘러가는 거죠? 아이는 아까부터 혼잣말을 하고 있다.

노을 속으로, ……노을은 차지할수록 남는 시간이지. 우리도 그 일부분이야, 사람들 각자 조금씩 차지하고 있으니까. 대개들 저 자신 노을이라 생각하지.

우리를 노을로 알고 오는 사람은 없을까요?


돛배는 가면서 짐을 내려 놓기만 한다, 어둠에 먹히도록 서로 멀어져 가는 사람들, 멀어져 가 섬의 한 끝식 되는 사람들.

돛배가 아주 꺼지기를 기다리다 아이는 잠 들고, 잠자리엔 은은히 노을이 비치고 있다. 피가 따뜻해진다. 그는 잠든 아이의 꿈속으로 아이를 들여 놓고, 그가 이 세상에 살아 있는 동안 그를 단 한번 野生이게 하는

“우리를 노을로 알고 오는 사람은 없을까요?”

황홀하게 펴오르는 이 노을말도 꿈 속에 발갛게 비치어 넣고, 그는 몸 밖으로 기어나왔다. 맑다, 아무도 살지 않는 시간, 섬의 별이란 별은 전부 올라가 있는 시간, 그는 無人島 한복판으로 바람 부는 대로 걸어나갔다. 그리고 우뚝 서서 그를 인간이게 하는 겉껍질을 깎는다. 깎을수록 투명한 하나의 돛이 될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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쎈연필 2004-09-29 14: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흐, 제가 참 좋아하는 시집입니다
 

 

   사랑은 나의 권력

   ―페테르부르크 시편2



먼지 가득한 한 소극장에서

나움 코르자빈이란 사람의

「사랑에 대하여」를 보았네.

내가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은

배우 윗호주머니에 꽂은 장미뿐,

츠베타예바와 보즈네센스키와

그런 시인들의 시로 구성한 대사들에서

한 구절이 꽃피었다고

내 사랑 내 귀에 속삭였네

“사랑은 나의 권력”

나는 내 사랑의 귀에 속삭이네

“내 권력이 약해지지 않도록”

“내 권력이 약해지지 않도록”

사랑이여

우리의 권력이 약해지지 않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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