ㅡ 고종석의 시인공화국 풍경들, 서정주편에서

http://news.hankooki.com/lpage/life/200504/h2005040516554567740.htm

 

시인공화국 풍경들, 이번 주는 서정주다. 서정주 시선집 <국화 옆에서>를 읽으며, 그 언어의 도저한 관능에 깜짝 놀랐던 때가 떠오른다. 고종석의 이 글은, 혐오스런 행적의 시인 서정주에 대한 날카로운 정치적 비판을 가하면서도 그의 놀라운 언어 능력에 대해서는 침묵을 다무는 이들과, 정치적 행적들을 전혀 무시해버리고 서정주 시에 대해 찬양하는 이들 어느 편에도 기울지 않으면서도 서정주의 시 세계를 잘 안내한 글이다.

"... 이런 평가의 혼돈과 불능을 치유할 길은 없는가? 있다. 문학적 재능 곧 글 쓰는 재주라는 것이 본질적으로 춤추는 재능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선선히 인정하는 것이다.

그럴 경우, (시민으로서의 정치적 행적이 아니라) 문인으로서의 정치적 행적을 심문하는 것은 무용가로서의 정치적 행적을 심문하는 것만큼이나 부질없는 일이라는 점이 또렷해진다.

문학이라는 장르에 특별한 위엄을 부여하고 싶은 사람들에게는 슬픈 일이겠지만, 문학은 그 정도로 시시한 것이다. 엄중한 것이 삶과 역사라면, 하찮은 것이 문학이다. 미당은 시시한 삶을 살면서도 결코 시시하지 않은 문학을 이뤄냈고, 그럼으로써 문학이라는 행위 자체가 시시하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보여주었다."

 글의 꼬리 부분이 특히 인상적이다. 나는 그러나 고종석의 문학관 전부에 동의하지 않는다. 시란 말의 춤이고, 말부림의 재주라고 할 수 있지만 서정주는 정치적 행적에서뿐만 아니라 그가 부리는 말들의 춤을 통해서도 정치적 간음을 하지 않았던가. 그러니 그의 춤은 춤대로 놓아두고 그의 정치적 삶은 삶대로 놓아두고 볼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때문에 많은 논자들이 문인으로서의 서정주의 정치적 행적을 심문하는 일을 부질없는 일이라고 말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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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부후사 2005-04-07 15: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흠... 찾아 읽어봐야 겠습니다. 고맙습니당.
 

 
66


저승이 어떠한지 지레 짐작해 보려고


볼 수 없는 세계 속에 내 영혼을 보냈더니


이윽고 돌아온 영혼, 이렇게 답을 했네


「내 자신이 천국이요, 지옥일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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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드 프로세서

― 최승자



쓴다는 것이 별것은 아니라고,

쓴다는 것에 아무런 희망도 갖고 있지 않다고 말했지.

그러나 이제 고백하자, 시인하자.

쓴다는 것, 써야 한다는 생각이 없었더라면

내 삶은 아주 시시한 의미밖에 갖지 못했으리라는 것,

어쩌면 내 삶이라는 것도 존재하지 않았으리라는 것.

오 쓴다는 것, 써야 한다는 생각에

내가 얼마나 높이높이 내 희망과 절망을 매달아 놓았던가를

내가 얼마나 깊이깊이 중독되어왔던가를

이제 비로소 분명히 깨달을 수 있겠구나.

내 익숙한, 잘 나가는 달필을 버리고

원고지를 버리고 노트를 버리고

글자 처음 배우는 아이처럼 자꾸만 목이 말라

더듬 더듬 떠듬 떠듬 처음으로 워드 프로세서를 치고 있는 이 밤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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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lmas 2005-04-06 21: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좋습니다.
추천 하나 하고 갑니다. ^____^

도서관여행자 2005-04-07 09: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저는 최승자 시들 정말 좋아해요. 꺄아~하고 소리치고 싶을만큼.
 

 

風笛․ 2

ㅡ 장석남



날 개이면 나

햇빛을 따라나서리

부르튼 걸음걸이를 갈아끼우고 가리

추억은 마르고

영혼은 얼마나 가벼울 것인가

가슴으로 걸어본 사람은 기억하리


햇빛은 내 헐거운 손목을 붙잡고

석양까지 가리

적막이 내 걸음을 다 가지리


캄캄해오는 저녁,

지푸라기들로 마른 목을 축이던

세월들을 탄식하리

탄식 속에 박힌 모래들 손등으로 문지르리

비단 같은 탄식은 얼굴을 흐르리


내 눈은 드넓은 노래를 가득 반짝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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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쟈 > 니체에 대해 말하지 않기

니체를 말하도록 하자. 니체에 대하여가 아니다. 무엇인가에 대하여 말한다는 것보다 反니체적인 것이 있을까? 당신에 대한 사랑만큼 우스운 것이 또 있을까? 우리는 언제나 당신을 사랑할 뿐이다. 우리는 니체를 사랑할 수 있을 뿐이다. 니체에 대한 사랑은 이만 걷어치우도록! 하여 나는 한편의 시와 그 주석을 니체에게 바치기로 한다.

⁂ ⁂ ⁂

모든 것이 되기 위하여 더는
아무것도 될 수 없는 나는 나의 과거는 나의 하루는
미친 척한 찔레나무와 찔레나무 한 그루를 기어
올라가는 벌레 같다는 데 생각이 미친다 그건
미친 생각이다 나는 안다

간혹 어깨가 결린다 무거운
돈가방이라도 들고 어디론가 튀고 싶다
꿈이다 아랫배가 고파오고 기온이 떨어진다
모든 것은 꿈과 같다 어젯밤에 본 영화 속의
치킨처럼 목 잘리고 잘 구워진 치킨처럼
잘만 하면 너도 착한 사람이 될 수 있어
나는 결린 사람

나는 꿈에 자주 결석하고 애린에 물들지 않는
다 내가 무얼 할 수 있다고 믿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표백된 영혼
나는 은근히 다리를 절면서
저 온갖 벌레 같은 인간들을 사랑한다
사랑하는 척한다
나는

미칠 지경이다
간혹 나는 사랑의 유언이며 시체가 아닐까
나는 벌레이기 때문이다 나는 기어이
기어오르고 싶다 자작나무 오동나무 오르지 못할 나무
내게 필요한 날들을 돈다발처럼 세어본다
꿈이다
내가 이 지구를 끌어당기는 힘

이걸 끌고 어디로 가나

어쩌면 이보다 편한 것이 없을 것이다
흥분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나는 없다
아무것도 될 수 없는 나는 나의 과거는 과거의 한 조각은
기온이 떨어지면 따스한 곳을 찾는 꿈처럼
무말랭이처럼 입을 다문다

미친 척한 찔레나무와 찔레나무 한 그루를 기어
올라가는 벌레와 꽁무니에 고무풍선처럼 매달린 지구에
생각만 미친다 미친 생각이다 그건

왜 간혹 나는 어깨가 결리는 것일까?

⁂ ⁂ ⁂

내가 무얼 할 수 있다고 믿지 않는 믿음에서부터 우리의 배움은 시작되어야 하리라. 이것이 나이 서른에 내가 배운 것이며 맨먼저 그대들에게 가르치고 싶은 것이다. 이리하여 우리의 몰락(Untergang)은 시작된다.

내가 꿈에 자주 결석하고 애린에 물들지 않는 것은 내가 결린 사람이기 때문이다. 간혹 주체하지 못할 애린에 빠져 어디론가 튀고 싶어하는 것은 내가 결린 사람이기 때문이다. 나는 자신의 존재조건을 극복하고 넘어가는 사람(Űber-mensch)이 아니라 그것에 걸려 넘어지는 사람(Unter-mensch)이다. 이걸 구상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높이뛰기나 허들(장애물) 경기를 떠올리면 된다. 넘어지는 사람도 생의 정점에서는 한순간 넘어가는 사람 못지않은 날렵한 동작을 취한다. 그리고는 거의 넘어갈 뻔한다. 그러나 그게 전부이다. 넘어지는 사람은 여린 마음에 한 뼘만큼 이 지상의 중력에 굴복하는 것이며, 그래서 결국은 넘어가는 일 대신에 걸려 넘어져 주저앉는 일을 자신의 숙명으로 선택한다. 그리고는 이렇게 속으로 중얼거리는 것이다. “내 이럴 줄 알았어. 나는 내가 무얼 할 수 있다고 믿지 않아.”결린, 기어이 걸린 사람.

결린 사람은 기어이 기어오르고 싶어하는 사람이다. 오르지 못할 나무를 기어이 기어오르(려)는 그는 마치 시지프의 운명처럼 그것이 헛되고 헛되다는 걸 안다. 하지만 이렇듯 명징한 의식 속에서도 자신도 모르는 힘에 이끌려 그는 이 헛된 수난에 입문하게 된다. 편안히 나자빠져 있던 그가 문득 기어오르는 일이 혹 자기 생의 소명이 아닐까 하는 의문을 던지게 되는 것이다. 이 의문에 걸려들어 걸려 넘어진 이후의 삶은 이미 종친 삶이다. 그는 이미 사랑의 시체인 것이며 고작해야 사랑의 유언에 불과하다. 하지만 그와는 다른 삶이 가능하지 않다는 의미에서 그것은 또한 위대한 삶이기도 하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인간의 가장 위대한 점은 인간은 다리이지 목표가 아니라는 점이다. 인간이 가진 사랑받을 수 있는 점은, 그가 <과도Űbergang>이며 <몰락Untergang>이라는 점이다. 나는 몰락하는 자로서가 아니면 살 줄을 모르는 사람을 사랑한다.(...) 인식하기 위해서 사는 사람을, 그리고 언젠가는 초인이 살 수 있도록 인식하고자 하는 사람을 나는 사랑한다.(...) 자기 자신을 잊어버리고서 모든 것들이 자기 내부에 들어올 수 있도록 영혼이 넘쳐흐르는 사람을 나는 사랑한다. 그렇게 하여 모든 것이 그의 몰락이 되는 것이다.”(최승자 옮김)

하여 우리는 모든 죽어가는 것들을 사랑하는 것이며, 모든 몰락하는 것들에 연민과 우정을 느끼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거 말고는 도대체가 더 적을 말도 없는 무능력한 나로서는 그저 두 권의 책을 소개하는 걸로 나의 몰락을 대신하고자 한다. 나는 다리이지 목표가 아니다. 나를 통과해서 읽어야 책은 고병권의 <니체의 위험한 책,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그린비)와 에른스트 벨러의 <데리다-니체 니체-데리다>(책세상)이다. 그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니체와의 우정을 제안한다. 해서, 내가 할일은 끝났다. 더는 할만한 일도 없지만...

2003. 05.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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