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드 프로세서

― 최승자



쓴다는 것이 별것은 아니라고,

쓴다는 것에 아무런 희망도 갖고 있지 않다고 말했지.

그러나 이제 고백하자, 시인하자.

쓴다는 것, 써야 한다는 생각이 없었더라면

내 삶은 아주 시시한 의미밖에 갖지 못했으리라는 것,

어쩌면 내 삶이라는 것도 존재하지 않았으리라는 것.

오 쓴다는 것, 써야 한다는 생각에

내가 얼마나 높이높이 내 희망과 절망을 매달아 놓았던가를

내가 얼마나 깊이깊이 중독되어왔던가를

이제 비로소 분명히 깨달을 수 있겠구나.

내 익숙한, 잘 나가는 달필을 버리고

원고지를 버리고 노트를 버리고

글자 처음 배우는 아이처럼 자꾸만 목이 말라

더듬 더듬 떠듬 떠듬 처음으로 워드 프로세서를 치고 있는 이 밤에.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balmas 2005-04-06 21: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좋습니다.
추천 하나 하고 갑니다. ^____^

도서관여행자 2005-04-07 09: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저는 최승자 시들 정말 좋아해요. 꺄아~하고 소리치고 싶을만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