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드 프로세서
― 최승자
쓴다는 것이 별것은 아니라고,
쓴다는 것에 아무런 희망도 갖고 있지 않다고 말했지.
그러나 이제 고백하자, 시인하자.
쓴다는 것, 써야 한다는 생각이 없었더라면
내 삶은 아주 시시한 의미밖에 갖지 못했으리라는 것,
어쩌면 내 삶이라는 것도 존재하지 않았으리라는 것.
오 쓴다는 것, 써야 한다는 생각에
내가 얼마나 높이높이 내 희망과 절망을 매달아 놓았던가를
내가 얼마나 깊이깊이 중독되어왔던가를
이제 비로소 분명히 깨달을 수 있겠구나.
내 익숙한, 잘 나가는 달필을 버리고
원고지를 버리고 노트를 버리고
글자 처음 배우는 아이처럼 자꾸만 목이 말라
더듬 더듬 떠듬 떠듬 처음으로 워드 프로세서를 치고 있는 이 밤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