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어웨이 ㅣ 앨리스 먼로 컬렉션
앨리스 먼로 지음, 황금진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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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덟 편의 중단〮편을 실은 소설집. 

  앨리스 먼로는 2013년에 노벨문학상 수상자. 주로 짧은 소설을 쓰는 작가가 노벨문학상을 받기가 쉽지 않은데, 라고 생각했다가 지금 보니까, 단편 작가로는 최초로 그 상을 받았다고 한다. 2006년에 출판사 ‘따뜻한손’이 출간한 소설집 《떠남》이 우리말로 나온 최초의 먼로 소설집으로, 나중에 이 책의 원본을 완역한 것이 《런어웨이》라고 ‘옮긴이의 말’에서 밝혔다. 그러니까 우리나라에서 앨리스 먼로가 본격적으로 주목을 받은 것 역시 노벨문학상 수상 직후 부터라고 해도 별로 틀리지 않는 말이겠다.

  내겐 이 책이 여섯 번째 먼로. 2013년에 나는 그제서야 본격적으로 책을 좀 읽어보겠다고 마음을 먹고 고전, 진짜 클래식 작품을 기초부터 읽던 시절이라 누가 노벨문학상을 받건, 부커상, 공쿠르상을 받건 관심이 거의 없었기에 먼로를 찾지 않았다가, 4년 뒤인 2017년에 가서야 먼로, 이 뛰어난 단편 작가의 책을 읽기 시작했다. 지금은 뒤늦게 이 작가의 풍모를 깊이 흠향하고 있는 중이지만 그때는 좋은 지도 몰랐던 것이 좀 우습다.


  《런어웨이》. 재미있게 읽었다. 문장의 앞에 “무척”이라는 부사를 붙이고 싶은 마음도 굴뚝이지만 그러지 않았다. 괜히 오버하고 싶지 않아서. 담담하게 펼쳐 나가는 등장인물들의 한 살이 그림에 붙어 파리똥을 묻힐 것 같기도 했고.

  2004년에 발표했으니 먼로가 73세, 인생을 겪을 만큼 겪어 ‘노작가’라는 품평이 어색하지 않을 시기. 작품들도 그렇다. 이제 삶을 살 만큼은 살아본 내공이 없으면 쓸 수 없을 것 같은 작품. 어느 하나 빼놓지 않고 전부 그렇다. 단편들이라 스토리를 밝히고 싶지 않지만, (표제작 <런어웨이>의 조연, 제이미스 부인 실비아가 특히 그런데)우리가 알고 베푸는 선함과 친절이 언제나 좋은 건 아닐 수도 있고, (세 편의 연작 단편 <우연>, <머지않아>, <침묵>의 주인공 줄리엣처럼)인생을 오래 산 후에야 자기가 그렇게 옳은 삶을 산 게 아니었다는 걸 알게 될 수도 있다.

  보통의 사람들은 거의 다 두번째 이야기 줄리엣과 비슷해서, 자기가 자신을 보기에 그래도 올바르게 살아온 것 같은 생각을 할 듯하다. 물론 나도 마찬가지고. 그러나 천만의 말씀이라는 걸 다행스럽게 나는 안다. 문제는 내가 나를 보고 내리는 판정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나를 겪고 내리는 판정이라는 것. 그걸 앨리스 먼로는 쓸쓸하게, 전혀 감추지 않고 그저 드러낸다. 다들 그렇게 사는 것이라면 것. 《미움, 우정, 구애, 사랑, 결혼》을 읽고 쓴 독후감에서 “한 세대 윗사람으로 내게 영향을 줄 수 있는” 이런 사람과 살아봤으면 좋았을 것이라고 했던 이유이기도 하다.


  표제작도 좋고, 마지막에 실린 <힘>도 반할 만하다. 백페이지에 육박하는 분량의 중편소설. 노년이 아니면 이런 작품을 쓰기가 쉽지 않을 터. 이제 일흔 살에 근접한 먼로는 ‘낸시’라는 여성 등장인물을 설정해, 낸시의 인생을 크게 세 부분으로 가른다. 결혼 적령기, 장난기가 다분한 낸시의 결혼 전과 직후, 주위에서 가까운 사람들이 사라지기 시작하는 60대 중후반, 그리고 정말로 삶을 다 마칠 순간이 그리 멀지 않은 시기.

  삶은 그렇게 특별한 것이 아니라는 결론으로 읽었는데, 이는 독자마다 다르겠지. 스토리를 조금 쓰다가 말았다. 역시 단편소설의 내용 소개는 어렵다.


  나는 이 책 《런어웨이》을 읽고 여전히 똑같이 말한다.

  실패하지 않을 선택을 원하면 먼로의 책을 읽으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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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목련 2026-11-02 10: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 제목이 의미심장하네요 ㅎㅎ

페넬로페 2026-11-02 10: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앨리스 먼로 작가 시작으로 이 책부터 읽어야겠어요^^
 
그리고 투명한 내 마음
베로니크 오발데 지음, 김남주 옮김 / 뮤진트리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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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쿠르-단편소설 상에 빛나는 《한낮의 불운》, 그 청명하고 경쾌한 비극에 반해 오발데의 다른 작품을 찾다가 초기 장편 <그리고 투명한 내 마음>을 골랐다. 우리나라에 번역 출간한 오발데의 책이 세 권 있는데 2011년에 나온 이 책이 첫번째, 이제 2015년에 출간한 <불한당들에게도 은총이>만 읽으면 우리말로 된 오발데는 다 읽는 셈이니 그건 좀 아꼈다가 나중에 읽어야겠다.

  책을 읽는 다양한 방법 가운데 하나가 이렇다. 《한낮의 불운》이 마음에 들어 <그리고 투명한 내 마음>을 찾아 읽었고, 이게 또 재미있어서 <불한당들에게도 은총이>까지 다 읽으면 더 읽을 것이 없어, 그것이 아쉬워 조금 나중에 읽을 거라고 남겨 두는 것. 그러다 어느 날, 도무지 어떤 책을 읽을까, 생각이 나지 않을 때 불쑥 찾아 있는 책. 지금 읽고 있는 책이 바로 그렇다. 앨리스 먼로의 《런어웨이》.


  <그리고 투명한 내 마음>의 주인공은 랜슬롯. 정식 이름이 랜슬론 루빈스타인. 척 보면 유대인인 거 아시겠지? 근데 유대 정체성에 관한 고리타분한 이야기는 없다. 오히려 첫 문장을 읽어보면 다른 유명한 작가의 첫 문장의 패러디가 아닌까, 의심스러울 정도이다.

  “오늘 밤 랜슬롯의 아내가 죽었다.”


  랜슬롯은 출판할 책의 원고를 교정하는 편집자이다. 근데 출판사에 상근 근무하는 정규직이 아니라 회사의 사환이 교정쇄를 가져오면 초벌, 재벌 정도까지 교정을 하는 프리랜서, 그러니까 교정 외주업자인 것처럼 보인다. 일을 전적으로 집에서만 하니 랜슬롯의 하루는 거의 완벽한 루틴에 기대 이루어진다. 아침에 일어나 커피 한 잔 내려 샌드위치를 만들어 같이 마시고, 초등학교 교사인 아내 엘리자베스가 출근하면 원고를 교정하다가, 점심 샌드위치를 먹은 후 따듯한 카메론 시를 산책하고 들어와 오후 일을 한다. 그러면 아내가 돌아온다. 하나 있는 불만은 아내가 랜슬롯을 마치 다섯 살 먹은 초등학교 아이들인 것처럼 하나하나 가르치려 든다는 거. 어투는 물론이고 고개를 기울이거나 흔드는 것을 비롯한 제스처까지 다 그렇다. 아이 없는 부부. 결혼 19년차. 이 가운데 15년 정도는 섹스리스로 살았다. 드라이하지만 간편해 좋다.

하루는 교정을 마치고 출판사에 전화해 사환을 보내지 말고, 날도 좋으니 자기가 직접 원고를 가져다주겠다고 했다. 꽃피는 봄. 랜슬롯의 세계는 가변적으로 불안정해서 사물들이 갑자기 나타나거나 사라지기도 한다. 오늘 랜슬롯은 집을 나오면서 문득 신발장이 없어졌다는 것을 발견한다. 자기 신발은 다른 신발장에 있으니 크게 관심을 쏟지 않는다. 괜히 말했다가 엘리자베스한테 또다시 다섯 살 아이 취급받기는 싫다. 길가 보도를 흥얼거리며 걸을 때는 벌써 신발장이 사라진 건 머리에 남아 있지도 않았다. 꽃가게에 화사한 꽃들이 다양하게 피어 있다. 손짓으로 꽃을 살 생각은 없다는 것을 보여주고 그는 한동안 꽃 구경에 몰두했다. 그리고 다시 몸을 돌려 몇 발자국을 걸었을 때, 하늘에서 무엇인가 손바닥보다는 확실히 큰 물체가 떨어진다는 걸 어쨌거나 알았는데, 그걸 피할 순식간적 반응까지는 하지 못해 철퍼덕, 제대로 머리에 맞았고, 엄청나다고는 할 수 없지만 하여간 꽤 큰 충격을 받았다. 부드러운 생가죽으로 만든 여성용 하이힐. 뾰족한 힐에 맞지 않아 그나마 다행이지 이마와 관자놀이 사이가 벌겋게 자국이 났다. 올려다보니 3층 창문이 열려 있었다.

  원래 성격 같았으면 이 정도야 그냥 지나가버리고 말았을 텐데, 이날 따라 랜슬롯은 건물의 현관으로 들어가 위험해 보이는 유별난 계단을 올라 신발을 버린 창문이 있는 방처럼 보이는 “이리나 아무개”라고 쓴 문을 두드렸더니 역시 스무살 정도, 딱 랜슬롯이 좋아하는 스타일의 여성이 문을 열어 주었다. 열린 창문으로 던진 하이힐에 맞았다고 항의하니까, 이리나로 보이는 여자는 아파트 안쪽으로 몸을 반쯤 돌려 소리를 질렀다.

  멍청이 1호, 여기 멍청이 2호가 있어. 자기 머리 위에 떨어진 네 애인 구두를 주워 왔단다. 혹시라도 내 눈에 띌까봐 창밖으로 그걸 집어던진 거니?

  이리나의 남자가 그의 애인 구두를 던진 거다. 랜슬롯은 조만간 남녀 사이에 큰 싸움이 날 것으로 예상하고 도망치듯 빠져나왔다. 하지만 랜슬롯을 쫓아 건물 밖으로 뛰어나온 이리나가 랜슬롯에게 다가와서 말했다. “죄송하다고 말하고 싶어요.”

  이리나를 처음 바라본 순간, “그는 소리 없는 신음을 내지르지 않을 수 없었다.” 이어지는 베로니크 오발데의 외모 묘사는 생략하자.


  이렇게 해서 양심적이고, 사람과 어울리는 것을 싫어하는 고립적인 랜슬롯은, 학생들과 며칠 동안 야외학습을 다녀와 피곤했을 엘리자베스에게 집을 나가겠다고 선언해 남자를 쫓아낸 이리나의 아파트로 들어간다. 작은 여행가방에 속옷과 양말, 칫솔과 면도기만 넣은 채로.

  이리나의 방문을 열자마자, 15년 동안 사용하지 않았던 랜슬롯의 성기와 심장을 뛰게 만드는 네 가지가 눈에 들어왔다. 검은 인조가죽 코르셋, 검은 새틴 장갑, 반짝이는 핫팬츠, 12cm짜리 하이힐. 네 가지 다 랜슬롯을 위하여 입고 기다린 것들. 그러나 랜슬롯의 귀에 속삭이는 또다른 랜슬롯.

  누가 저 모든 의상을 저 여자에게 주었을까? 널 만나기 전에 누구를 기쁘게 해주려고 저런 정신나간 의상을 산 걸까?

  일단 상관없다. 다 과거의 일이니까. 15년 만에 생애 두번째 만난 여자하고 하는 섹스. 이런 습한 만남과 접촉이 얼마나 좋은 것인지 그동안 모르고 살았던 것이 의아하다.


  그래서 오늘 밤 죽은 랜슬롯의 아내는 어떻게 됐느냐고? 엘리자베스? 아니다. 이리나는 자기가 이리나 루빈스타인이 되고 싶다고 랜슬롯의 귀에 속삭였고, 따듯한 날씨의 대도시 카메론에서 이누이트들이 살 법한 저 북쪽 밀레나 시의 교외 외진마을 카타노로 이사해서, 조촐하게 결혼했다. 그러니 오늘 밤에 죽은 아내는 첫번째 아내 엘리자베스 루빈스타인이 아니라, 두번째 젊은 아내 이리나 루빈스타인. 그녀, 자기는 랜슬롯이라는 웃긴 이름으로 부르지 않고 가볍고 짧게 ‘폴’이라 부르겠다고 해서 랜슬롯을 폴이라고 부른 이리나는 얼어붙을 듯 춥고 우박이 몰아치는 날 차를 운전하고 가다가 오모코 다리에서 시냇물 쪽으로 떨어져 죽었다.

  이리나의 직업은 동물 사진 촬영. 이번에는 곰을 찍으러 몇 주 일정으로 슬로베니아에 간다고 해서, 랜슬롯이 15분 전에 차로 이리나를 공항까지 데려다 주었는데, 그래서 아직 공항 로비에서 비행기를 기다리고 있거나 금방 비행기를 탔지만 아직 하늘을 날지는 않을 터인데, 자기가 운전하는 차가 다리에서 추락해 얼음을 깨고 들어가 익사했다니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그러고 보니, 랜슬롯이 이리나에 대하여 아는 것이 하나도 없다. 분명히 아빠는 일찍 세상을 떴고, 엄마는 저 시골에서 모녀의 정을 끊은 채 혼자 살고 있다고 했건만, 이 추운 날, 아직 이리나의 검시 보고서도 나오지 않은 날, 신문을 보고 알았다는 이리나의 아버지가 집에 찾아왔다. 예순이 넘어 보이는 남자. 키가 크고 마른 사람. 아내에게는 낚시하러 간다고 하고 3일 일정으로 밀레나에 왔다고. 그는 이틀 동안 랜슬롯과 이야기하고, 이리나가 빠져 죽은 오모코 다리 아래에서 낚시도 했다. 그가 정말 이리나의 아버지가 맞을까? 랜슬롯이 그에게 다가가 이름을 묻는다. 당신 이름이 뭔가요?

  파코. 파코 피카소.

  피카소? 이리나의 이름이 이리나 피카소였을까?

  2백여 미터 떨어진 유일한 이웃. 그집 딸하고 친하게 지내 아이 트랄랄라가 크는 것을 보는 재미로 살았고, 이리나는 트랄랄라를 보면서 또 아이를 뭐하러 낳느냐고, 랜슬롯이 바라는 걸 무질러왔다. 트랄랄라의 아버지는 사냥개를 키워 파는 것이 직업이다. 엄마는 2년 전에 죽어서 둘이 살고 있다. 어느 날 트랄랄라가 사라졌다. 황당한 랜슬롯과 이리나. 트랄랄라는 학교 갈 나이가 되어 고모가 데려갔단다. 황당한 이리나가 트랄랄라의 아버지, 바이엘을 찾아가 이야기 좀 하겠노라고 가더니 무려 일곱 시간을 함께 있다가 왔다. 의심스러운 랜슬롯. 그에게 이리나가 말한다. “우리는 야수처럼 사랑을 나누었어.”  “잔인하네.”  “이런, 우리 자기가 유머 감각을 잃어버렸네.” 트랄랄라의 아버지이자 나중에 바이엘이라는 이름을 쓸 남자는 랜슬롯과 이리나가 떠나온 도시 카메론으로 간다고 한다.

  그가 누굴까? 3층 창문에서 황급히 다른 여자의 하이힐을 던진 그 사람일까?

  이리나는 도대체 어떤 사람이었을까, 나의 별, 나의 보물, 나의 빛, 이리나. 랜슬롯은 이미 죽어 화장해 재만 남은 이리나를 알기 위하여 큰 모험을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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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목련 2026-10-30 09: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업로드 말씀하셨던 책이 이 책이군요. 저는 이 책 출판 당시 읽었는데 내용이 생각이 나지 않아요 ㅋㅋ

Falstaff 2026-10-30 16:16   좋아요 0 | URL
옙. 오발데 아주 상큼한 작가더군요. 이이의 책이 딱 세 권만 나온 게 아쉽습니다. ㅎㅎ
 
예술에 관한 살인적 농담
설재인 지음 / 나무옆의자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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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설집 《월영시장》을 재미있게 읽었다. 그래서 여차하면 팬이 되어볼까 싶어 이이가 쓴 장편소설을 더 읽어보자 해서 고른 책이 <그 변기의 역학>과 <예술에 관한 살인적 농담>. 이 중에서 <예술에 관한 살인적 농담>을 먼저 읽었다. 살인적 농담에 정말로 살인 이야기는 나오지 않을 거라고 굳게 믿으면서.

  서울대 수학교육과를 졸업하고 특목고 수학교사를 몇 년 하다가 대책없이 사표를 던진 후 글도 쓰고, 복싱도 하면서, 김포공항 근처 서울 서쪽의 맨 끄트머리에 낮은 청년지원 어쩌구저쩌구 아파트를 얻어 살며, 말을 최대로 줄인 채 음침하게 사람들을 염탐하며 사는 작가. 남들 눈에는 멋있어 보일 수 있다. 인생의 괜찮은 정규 코스라고 할 수 있는 명문대 졸업, 특목고 수학교사 때려 치우고 복싱을 하는 소설가. 그런데 딱 거기까지. <예술에 관한 살인적 농담>을 읽어보면, 문제는 소설을 쓰고, 복싱에 매진할 수 있기 위한 필요조건을 설재인은 갖고 있지 못했다. 아니지, 작가가 되려면 필요한 자질은 가지고 있어 보이니까 필요조건은 만족시켰지만, 충분조건을 못 갖췄다고 말해야겠다.


  저 경상남도 끄트머리, 오지 중에서도 오지, 가난하면 산과 물이라도 좋아야 할 터이지만, 사방을 둘러봐도 뭐 하나 그럴듯한 경치도 없어서 그저 허덕허덕 대는 깡촌 X면 당롱리. 여기 출신 여성 한 분이 혼인을 해서 딸 아람이를 낳았는데, 얼마 살지 못하고 갈라섰다. 요즘 이혼이야 선택 사항이니까 그게 특별한 건 아니지만, 아람이의 아빠는 물론이고 엄마도 도무지 아람이를 기를 마음이 없어서, 일단 양육비를 쓰고 싶으니 양육은 엄마가 하는 걸로 하고, 엄마는 어린 아람이를 당롱리에 사는 자기 엄마, 그러니까 외할머니한테 휙 던져두고 자기 살 길 찾아 사라졌다.

  가만 보면 엄마가 외할머니를 닮았던 것. 외할머니도 외손주한테 정이 1도 없어서 거의 방치하는 수준으로 밥만 먹여주었는데, 아람이가 그나마 똑똑해서 자기가 알아서 한글 깨치고, 책도 읽고, 초등학교, 중학교 졸업까지 했다. 외할머니 속에 고등학교는 아예 들어 있지도 않았는데, 당시 마을의 젊은, 그래봤자 환갑을 넘은 이장이, 나는 흉내도 내지 못할 극한의 경상도 사투리로, 아주머니, 요즘에 고등학교 안 보내면 크~은 일 나요, 협박을 하는 바람에 면에도 없어서 군에 있는 고등학교를 보내주어 다녔던 거다. 아람이는 고등학교 다니면서 연극부에 들어 남의 인생을 원 없이 살아내는 배우가 하고 싶었고, 그리하여 연극, 영화 쪽으로 우리나라에서 캡을 먹는 A대학에 수시 합격했으나 당연히 외할머니가 아무리 알부자라 하더라도 등록금을 내줄 턱이 없어서, 날을 잡아 할머니 장롱 속 현금 서랍을 통째로 훔쳐 그 길로 인서울도 아니고 경기도 모처로 날아가 연극, 영화로는 우리나라 탑 급이지만, 나머지는 거의 바닥인 A대학 입학금과 동시에 등록금까지 내고, 시골 출신이며, 예술고등학교도 다니지 않았으며, 예체능 준비학원 문턱도 밟아보지 못한 건 물론이며, 사방팔방으로 자기를 돌봐줄 부모 친척 한 명 없는 천애고아 바로 근처 수준이라는 열등감을 견뎌가며 친구가 딱 한 명뿐인 채로 하여간 졸업을 했지만, 수천번에 이르는 연극, 영화 배우 오디션에 바나나 껍데기만 밟아 결국 20대 꽃 청춘 시절을 C쇼핑 회사의 서비스 센터, 즉 콜 상담원을 하면서 먹고 사는 신세였다. 지금은 그렇게 어영부영 서른 살이 됐고.

  이 아람이가 대학 다닐 때, 원로 극작가이자 우파 정권에 부역하는 것으로 유명한 인간이 학과장을 하고 있었는데, 돈 많고, 자식 농사 잘 지은 학과장님께서 강의 도중 직접, 예술가가 되기 위한 충분 조건에 대한 말씀을 하시었으니 그걸 요약하자면:


  대대로 예술가란 든든한 후원자를 뒤에 두고 있어야만 생존하여 걸작을 만들 수 있는 법이다. 물론 날 때부터 대단한 천재를 가진 인물이 각 장르마다 한 명쯤 있었지만, 그들 마저 왕족, 귀족, 아니면 부르주아의 단단한 지원이 없으면 곤란했을 터인데, 하물며 그냥 조금 뛰어난 재능을 가진 예술가들이야 어떠했겠느냐. 걸작은 천재들뿐 만 아니라 이런 보통 재능의 손에서도 나왔다. 보통 재능이 걸작을 만들기 위하여는 무지막지한 시간을 필요로 했고, 그렇게 많은 시간을 오직 예술 창작에 투자하기 위하여는 적어도 연 오백파운드의 수입이 없으면 안 되었을 것이다. 예술가도 먹고 싸는 일은 보통 사람들과 같으니까. 그리하여 21세기의 예술가들도 돈. 돈이 없으면 예술이고 걸작이고 아예 처음부터 가능하지 아니하다.


  이 책을 쓴 설재인도 이 학과장님 말씀에 조금 공감을 했던 모양이다. 2019년에 데뷔하여 2026년 8월 말까지 모두 서른네 권의 단행본을 출간했다. 아마 설재인은 이노무 “든든한 후원자”를 두지 못한 거 같다. 그러니까 1년에 4.8권, 근 다섯 권의 책을 내는 엄청난 다작을 감행하고 있겠지.

  이렇게 심하게 창작 노동을 감행하고 있는 걸 보면, 사는 이유를 몰라 그냥 대책없이 사직서 던진 어딘지 모르지만 특목고 수학교사 자리를 괜히 때려치웠다는 후회도 아주 가끔을 할 듯하다.


  그건 그거고 작품의 주인공이자 C쇼핑의 콜서비스 직원인 아람이는 오늘 개 진상 고객과 전화면담 한 건을 치뤘다. 반려견 사료에 하자를 제기한 고객.

  “아 그러세요 고객님, 그럼 언제부터 ‘퍼피러브’ 사료를 반려견께 급여하시기 시작하셨어요?”

  “받고 나서부터요.”

  “아, 그러시군요. 그러면 오늘이 6월 30일이니 이미 일 년이 넘게 지났는데요, 개봉한 지 오래된 사료는 반려견들께서 선호하지 않을 위험성이…”

  “아니, 그런 거 생각하고 팔아야지 왜 내 탓을 해, 이년이, 장난해?”

  아무리 콜 서비스가 험한 일이라도 아람이 기분이 더럽겠지? 더구나 오늘이 자기 생일날인데. 저런. 그래도 이제 연차가 쌓여 이런 사소한 진상들 정도는 가뿐한 수준. 팀장의 꼬나보는 눈치도 깔끔하게 외면한 채 당연히 칼퇴근하는 아람이는 곧바로 중고등학생들의 입시 컨설팅을 하는 소을이를 만나러 술집으로 향한다. 휴대전화를 통해 듣는 소을이는 벌써 한 잔 하고 있는 중이다. 얼음 바스켓에 칠링한 사케 한 병 순삭. 약속한 일식집에 가서 보니, 깔린 메뉴가, 육사시미, 나가사키 짬뽕, 게살 고로케, 휘황찬란한 샐러드. 아오, 이 정도면 콜서비스 노동자가 즐길 만한 식탁이 아니다. 아휴, 몰라. 오늘은 생일이라고 돈 잘 버는 소을이가 쏜다니까.

  소을이는 A대학 연극영화과 동기동창. 처음엔 배우를 하기 위해 연기 전공으로 갔다가 나중에 극작으로 방향을 바꾼 친구인데, 졸업 후에 먹고 살 것이 없어지자, 아람이는 콜서비스, 물론 많고 많은 오디션에 떨어지고, 아무리 우리나라 탑급 영연과라고 해도, 대다수가 자기처럼 지원하는 오디션마다 떨어질 줄 모른 채 거의가 여전히 부모한테 빌붙어 사는 형편이지만, 빌붙은 부모 없는 아람이가 억지로 구한 직장이 쇼핑센터 콜 서비스였던 반면에, 역시 소녀시절부터 가난에 절어 살아왔다고 주장하는 소을이는, 연극 영화예술에 목을 매는 철부지 중고등학생들을 대상으로 자기 자신이 걸어온 연극 영화의 길이 얼마나 험난한 가시덤불 속인지 컨설팅하여 예술인, 즉 딴따라의 길을 포기하고 본격적으로 국영수 공부에 매진해 특목고나 스카이에 갈 수 있도록 설득하는 일에 투신, 말 그대로 떼돈을 벌었고, 지금도 방 세 개짜리 오피스텔에 사신다. 그러니 유일한 친구 아람이 생일이라고 이정도 밥이야 한 끼 못 사겠는가.


  이날 둘은 완전히 꽐라가 될 때까지 술을 퍼부었다. 아람이 정신을 차려보니까 역시나 소을이 오피스텔이었는데, 뭐 자주 있는 일이니 그건 아무렇지도 않건만, 진짜 문제는 어제 취중에 받았던 단톡방 메시지였고, 거기다 이람이가 다시 보낸 답글이었다. 이야기가 길어진다. 원룸 건물에서 다섯 방을 소유한 시골 할아버지가 자택에서 백골이 된 채 발견되었는데, 다섯 방 가운데 한 명의 남자 세입자가 결혼을 앞두고 이사를 하기 위하여 보증금을 돌려달라 했지만 아무 소식이 없어 본인이 직접 그 시골로 운전까지 해 가서 알아낸 것으로, 이 죽은 방주인은 통장에 딱 2,390원만 들어있고, 자식은 미국과 프랑스에서 살아, 그까짓 시골 집 때문에 귀국할 마음이 1도 없어서, 재산은 전부 국가 귀속 예정이다. 국가 귀속에 이은 전세금 반환까지 가려면 그 세월이 얼마랴. 잔뜩 초조해진 세입자가 단톡을 연 건데, 문제는 그 남자를 제외한 네 세입자는 전부 월세. 아람이 경우엔 보증금 백에 월세 삼십.

  더 큰 문제는 나머지 네 명의 월세 세입자는 속으로, 그럼 삼개월 동안 월세를 안 내면 대강 보증금을 깔 수 있고, 이후에 정산이 끝날 때까지 월세 없이 공짜로 살 수 있겠네? 하는 거였는데, 그걸 누가 제일 먼저 이야기했느냐 하면, 완전히 꽐라가 되어 다음날 아침 정신이 들어서도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 우리의 아람이었는데, 그는 단톡에 이렇게 썼던 것이다.

  ‘저눈 저운데요 월세 안내두되닉가’

  ‘평샹 살검데’

  ‘이사안ㄱㅏ’

  ‘지상층ㄱ기리알아ㅅ 해여 번지하층은 ㅁ멀라’

  아람이가 총대를 메고 나는 좋다, 월세 안 내도 되니까, 평생 살 건데, 이사 안 가고, (아람이는 반지하에 사니까) 지상층에 사는 사람들이 알아서 하라고 말하자마자, 단톡 개설자를 제외한 나머지 세 명의 월세 세입자도 싹 안면몰수 한 거다. 이러니 새신랑 후보가 미치겠어, 안 미치겠어?

  그는 그 길로 반지하에 내려가 아람이 사는 방문 앞에 휘발유를 확 뿌리고 불을 싸질러버렸고, 기적 비슷하게 불길은 전 원룸 건물로 번지는 것 같다가 딱 반지하 아람이네 집만 까맣게 태워버렸고, 새신랑은 결국 예식장 대신 경찰서 유치장에 유치되었으며, 이 소식이 전국 SNS를 통해 아람이의 실명과 주소와 전화번호를 뺀 나머지 모든 SNS계정이 백일하에 드러나 거국적으로 망신을 당해야 해서, (사실 여기까지만 과연 설재인이야, 아무나 ‘재인’이란 이름을 함부로 달고 다니는 게 아닌가비여, 코미디는 재인이가 해야 제 맛이지, 이렇게 감탄하도록 재미나게 읽힌다.) 입시 컨설팅 중에 고1짜리 특목고 학생을 꼬드겨 중퇴하게 만들고, 예술대학 대신 밑바닥 세계여행 유튜버로 만들었으며, 심지어 방 세 개짜리 오피스텔에서 동거까지 하는 바로 그 소을이네 집에서 두 달 동안 안면몰수한 채 머물게 되면서 사건은, 진짜 살인사건, 둔기로 해골바가지를 깨뜨려 피를 철철 흘리면서 죽는 살인사건에 휘말리게 되는 이야기.


  안타깝게도 후원자가 없어서 일년에 다섯 권의 책을 내야 했던 설재인의 비교적 최신작. 가지가지로 마음에 들지 않는 것들을 참 알뜰하게 챙겨 책 한 권을 만들어, 《월영시장》으로 잔뜩 기대에 부풀게 한 내 마음도 뒤꿈치로 팍팍 잘도 조져 놓은 책. 좋다. 한 권만 더 읽어보겠다. 그게 마지막 설재인이 되지 않기를 기대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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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moo 2026-10-29 17: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뽈님의 독후감에서 별2개를 볼 줄이야!! ㅎㅎ 항상 후하게 평가하시는데, 별 2개면 뭐....ㅎㅎ

Falstaff 2026-10-29 19:11   좋아요 0 | URL
에휴, 그렇게 됐습니다. 한 권 더 읽고 나서 보태겠습니다. ㅎㅎ

독서괭 2026-10-29 23: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재밌는 부분까지만 자세히 적어두셔서 그런지 재밌어 보이는걸요 ㅋㅋㅋㅋ

Falstaff 2026-10-30 04:48   좋아요 1 | URL
ㅋㅋㅋ 이사안ㄱㅏ 술마시고 꼬장부리는 문자까지만 재미있었습니다.
 
모옌 기담집 - 기기괴괴한 열한 가지 이야기 ㅣ 글항아리 기담 시리즈 3
모옌 지음, 김택규 옮김 / 글항아리 / 202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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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년 만에 모옌의 책을 읽었다. 출판사 글항아리에서 우치다 햣켄, 나쓰메 소세키에 이어 세번째로 출간한 기담집이 《모옌 기담집》이다. 아직 우치다 햣켄과 나쓰메 소세키의 기담집은 안 읽어봤다. 우치다는 모르겠고, 나쓰메 소세키는 조만간 읽어볼 생각이다. 생각만 해도 재미있다. 모옌과 나쓰메, 시대는 다르지만 동양 문학의 두 거장의 기담집이라. 모옌은 그의 전작을 감안하면 기담, 우리식으로 얘기하자면 옛 이야기를 스스로 지은 것이 그리 낯설지 않지만, 이번에 모옌의 기담집을 읽으면서 떠오른 나쓰메 소세키가 쓴 기담은 도무지 상상이 가지 않았다. 조밀조밀한 인간의 내면의 묘사를 주특기로 하는 나쓰메 선생이 엽기발랄하고 간혹 참혹, 잔인하기도 한 기담을 어떻게 썼을 지 궁금해졌다. 그만큼 모옌의 기담 적 입담 읽기가 즐거웠다는 뜻이다. 하긴 모옌의 입담을 따라갈 소설가가 세상에서 몇 명이나 있겠어?

  모옌이 어린 시절, 배고픔과 외로움을 빼고 자신한테 제일 깊은 인상을 남긴 건 바로 두려움이었다고 서문 격으로 쓴 “두려움과 희망” 첫 머리에서 밝혔다. 모옌은 그의 작품들 속에서 끊임없이 등장하는 산둥성 가오미시 둥베이향에서 나서 스물한 살까지 산 농촌 출신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나기는 산과병원에서 났지만 도시의 어둔 골목 안의 집에서 산 내 정서와 많이 닮았다. 희망은 모르겠고, 두려움이. 물과 산과 평야가 두루 펼쳐진 둥베이향과 오직 도로와 어둔 골목뿐인 서울의 고만고만한 동네라는 차이가 모옌에게는 희망이라는 깊은 인상을 갖게 해줄 수 있었던 것일 수 있고.

  모옌과 내가 자란 (전쟁 끝나고 10년도 되지 않았던)시절, 특히 유년의 정서에 영향을 미친 건 책도, TV도 아닌 이야기였다.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 그리하여 쟤와 내가 알고 있는 이야기는 각각의 이야기를 전하는 사람들에 따라 약간의 차이가 있어서, 그걸 빌미로 네가 옳으니, 내가 맞느니 어린 마음에 티격태격하기도 했지만, 이야기의 공통점은, 놀랍게도 모옌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는데, 주로 다른 생명체, 범, 곰, 여우, 늑대, 닭, 멧돼지, 지네 등 다양한 벌레, 거북이, 남생이, 자라, 잉어, 붕어를 비롯한 수생동물 같은 것들이, 하늘에서 어둠이 내려와 지평 위에 깔리면, 사람살이의 경계를 넘어 들어와 좋은 일도 하고, 나쁜 일도 하고, 심지어 악행을 벌여, 인간의 여성을 임신시켜 자신의 후손은 남기기도 하고, 몸 속에 들어가 그 사람의 외연을 가지고 사는 일도 있고, 우습게 생명을 앗아 가기도 하는 등, 별의 별 내용이 다 있는데, 이게 또 아이의 귀를 통해 대뇌에 입력이 되면, 들은 아이들마다 다시 머리속에서 이야기가 재생산되어 다양한 버전으로 이화, 다툼의 이유가 되었기 때문이다. 어떤 경우라도 이야기의 핵심은 어둠과 다른 생명체의 인간으로의 갖가지 변용이 만들어내는 두려움이었다.


  농촌에서 스물한 살까지 산 모옌은 이런 언급은 하지 않았는데, 도시에서 자란 내 경우에는, 초등학교 다닐 때던가, 이모의 손을 잡고 무심코 극장에서 본 우리나라 불멸의 고전 공포영화 <월하의 공동묘지>에서 병풍 앞에 넋을 잃고 앉아 있는 도금봉 여사의 머리 위에서 길고 괴기스러워서 끔찍한 검정 손이 내려와 여사의 쪽진 머리를 왈칵 움켜잡는 장면이 얼마나 경악스러웠든지, 아직까지도 잊지 않고 있는 무서움으로 남아 있다. 이후 점점 더 자라면서 <드라큘라(1958년작 “괴인 드라큐라”)>. <엑소시스트>, <오멘> 같은 공포물도 마찬가지. 이런 영화를 보고 동무들과 영화관 옆의 중국음식점에서 짜장면과 물만두에 빼갈 한 도꾸리씩 마시고 (그땐 중고딩들이 술 달라고 해도 한 번 째려볼 뿐 얼마든지 가져다주던 시절이었다.) 집에 돌아갈 때도, 짙은 어둠만 깔린 외등 없는 골목에서 머리통이 180도 회전하는 악마의 변신이나, 악마의 현현이 불쑥 튀어나올 것 같은 공포스러움에 등골에서부터 척추를 따고 오소소 소름이 돋던 기억이 있다. 아마 지금도 거리가 어둡고 골목에서 산다면 비슷하지 않을까 싶다. 다 늙은 지금도 말이다. 이런 것이 기억이고, 추억이고, 어린 시절의 각인이라서.

  모옌도 이런 두려움을 서문에서 이야기하기에, 이 책은, 모옌이 어린 시절에 듣고 아직도 기억하고 있는 중국 산둥성 지역의 기담 가운데 몇 편을 골라 실었거나, 옛 기담에 자기가 가필을 조금 한 것이겠구나 싶었지만, 아니다. 1번으로 실린 <보물지도>와 2번 <살구나무에 거꾸로 매달린 늑대>까지는 작가가 고른 옛이야기일 수 있겠다고, 내 추측이 맞았다고 생각했으나, 3번 이후로 넘어가면, 아이쿠, 아니구나, 이 책의 기담은 옛이야기 스타일로 모옌 스스로 새롭게 쓴 현대식 기담이구나, 하는 걸 알아차린다. 그럼 모옌은 왜, 21세기에는 이미 그 효용을 TV나 SNS, 휴대폰, 게임에 넘겨준 옛 이야기 방식을 가져왔을까? 춥고 배고팠던 어린 시절에 밥상 머리에 앉아 할머니한테 들은 요정과 귀신 이야기, 가장 대중적이며 효용이 크기도 한 즐기는 방법인 이야기가 더 이상 아래 세대로 전승되지 못하는 걸 아쉬워하다가, 이제는 이야기의 시대가 아니기도 하고, 자기 원래 이름 관모예管謨業를 “입으로 말하지 않는다. 莫言” 즉 글로만 말한다는 의미의 모옌으로 고친 사람답게 새로운 이야기를 글로 쓰기에 이른 거다.

  모옌이 나보다 나이가 많은데도 지금 일흔한 살인데, 여전히 귀신 이야기와 동화 속 변용을 연상하면 두려움을 멈출 수 없다고 하며, 이런 요정과 변신 이야기 속의 두려움은 어둠 속의 불빛처럼 앞길을 비추고, 두려움과 싸울 용기를 주기 때문에 앞으로도 계속 전해지고, 개발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하여 전승이 거의 끊긴 지금, 모옌은 자기나마 새로운 기담을 만들기로 결심한 것은 아닐까 싶다.


  설마 호랑이 고기 자셔본 분 안 계시지? <보물 지도>에는 다싱안링 산맥에서 백두산 수컷 호랑이를 잡아먹은 사람의 허풍이 나온다. 고기는 먹고 발라낸 수호랑이의 성기 길이가 1미터는 넘었는데, 말린 뒤에도 80센티미터나 됐고, 그걸 가지고 술을 담가 먹으면, 비아그라를 꽈배기라고 하면 그 창바이산(장백산, 백두산) 호랑이의 성기는 쇠몽둥이라면서 말이야, 호랑이고기 만두를 의지가 약한 남자가 먹으면 백이면 백 사고를 치게 돼 있어. 난 사고는 안 쳤지만 온몸이 증기기관처럼 달아올라 할 수 없이 친구가 하라는 대로 헤이룽 강의 1미터 두께 얼음을 깨고 그 속에 알몸으로 뛰어들었어. 강 위로 수증기가 모락모락 피어올라서 운운. (p.23)

  모옌의 입담은 경악 수준이다. 이게 두어 페이지 분량으로 계속 이어지는데, 인용한 것만 슬쩍 읽으면 진짜 입담의 맛을 알 수 없어 아쉽다. 두번째 작품 <살구나무에 거꾸로 매달린 늑대>에서는 늑대 고기의 효용을 소개한다. 부위를 두루두루 소개하지만 여기선 내장 부분만 조금 옮겨본다.


  “늑대 소장은 부추랑 같이 볶으면 오장육부를 싹 청소해주고요, 시멘트 공장 노동자들이 그걸 한 그릇 먹고 싼 똥은 바람만 쐬면 돌덩어리처럼 굳어서 망치로 쳐도 안 깨진다니까요. 그리고 늑대 항문은 말려서 가루로 만들어 뜨거운 황주에 타서 먹으면 치질에 끝장입니다. 밖에 난 치질이든 안에 난 치질이든 아주 뿌리까지 치료해서 절대 재발하지 않아요. 늑대 방광은 또 어떻고요? 거기에 연밥을 넣고 고아서 먹으면 아무리 고질적인 요실금이라도 단박에 낫는답니다.” (p.108~109)


  이것도 이렇게 짧게 인용하면 진짜배기 맛의 1할도 느끼지 못한다. 그러니 그저 바라노니, 만일 모옌의 끝판까지 가는 입심을 제대로 즐기시려면, 그냥 팍 읽어버리시라. 세상에 둘도 없는 입심일 터이니. 물론 1번과 2번 작품이 재미로 치면 제일이지만, 이후 작품이야말로 모옌이 시도한 현대식, 도시형 기담이라서 오히려 앞의 작품보다 더 의미가 있을 수 있다. 만일 이런 기담이 모옌이 서문에서 주장한대로 아직도 효용이 있다면. 그건 더 생각해볼 일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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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마요정 2026-10-28 16: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나쓰메 기담집 재밌어요!! 우치다도 읽을만합니다. 모옌 기담집은 읽으면서 역시 중국인들은 뻥이 심하네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ㅋㅋㅋㅋ 삼국지 보면 맨날 백만대군이잖아요 ㅋㅋㅋㅋ 말씀처럼 저 늑대고기 이야기 하는 거 보면 온 동네 사람들이 한 마디씩 얹는 게 갈수록 과대포장.... ㅋㅋㅋ 요재지이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재밌게 읽을 수 있을 듯 합니다.

일본, 한국, 중국 기담이 참 달라요. 정말 신기합니다. 그 분위기라는 것이.

Falstaff 2026-10-28 18:21   좋아요 1 | URL
앗, 그래요? 소세키 기담집 얼른 읽어야겠군요. ㅎㅎㅎ 고맙습니다!
 
2025 창작희곡공모 선정작 - 국립극단 희곡선
이용훈.윤미현.김정윤 지음 / 걷는사람 / 202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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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립극단의 창작희곡공모는 1957년부터 시작했다는데, 연도별로 수상작을 책으로 펴낸 것은 《2024 창작희곡공모 선정작》과 《2025 창작희곡공모 선정작》 두 권인 것 같다. 이렇게 늦게나마 연도별 공모작 수상작을 책으로 남긴 일이 그나마 다행스럽기는 하지만 동시에 만시지탄도 감출 수 없다 2025년 희곡공모에는 모두 175편의 희곡이 응모하여 당선작 이용훈의 <모노텔>과 두 편의 우수상 수상작 윤미현의 <옥수수밭 땡볕이지>, 김정윤의 <극동아시아 요리 연구>를 선정해, 2026년에 국립극단에서 책으로 발간했다. 국립극단은 전에도 2018년부터 2020년까지 젊은 극작가들을 발굴해 《희곡우체통 낭독 희곡집》을 선보인 적이 있었는데 아마도 2019 펜데믹 때문에 2020년 낭독회 자체가 무산되어 이어지지 않은 것으로 짐작한다. 그저 짐작이다. 사실과 다를 수 있다. 어떤 형식이든지 간에 매년 희곡공모가 이어지고 결과를 남기는 일은 의미가 깊다. 아무쪼록 끊기지 않고 계속 희곡공모와 희곡선집이 계속되었으면 좋겠다.


  당선작, 이용훈 작 <모노텔>.

  모노텔은 경기도 서북쪽 국도에서 살짝 들어간 은밀한 곳에 있는 모텔이다. 20년 전에 전국적으로 시골 땅값을 올리는데 혁혁한 공을 세운 업종 가운데 하나가 모텔이었다. 그동안 팬션이나 자연휴양림, 기타 게스트하우스 등의 발달로 이제 모텔은 사양 사업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희곡의 무대가 되는 모노텔도 이젠 도로보수 외국 노동자 등이 장기숙박으로 근근이 연명하고, 가뭄에 콩 나듯이 내국인 손님이 찾지만 전처럼 연인이나 불륜 커플은 드물고, 알코올 중독자가 몇 날 며칠 동안 아무 신경 안 쓰고 술을 퍼 마시거나, 향정신성 의약품 주사를 맞거나, 정신 장애가 있어서 보통 사람이라면 상상도 하지 못할 방법으로 ‘방’을 훼손시키려는 진상 손님들이 주로 찾는다.

  한때 호텔 못지 않은 시설과 청결 등을 자랑한 모텔이 서서히 낡은 숙박시설로 변하는 도중에 모텔도 스스로 살아남기 위하여 평면 TV, 5G 와이파이 같은 장비도 들여놓고, 결제 역시 무인결제 시스템을 도입하는 등 노력을 아끼지 않았지만, 세상에 지는 해를 끌어 올릴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그런데 모텔 이름이 모노텔. 등장인물은 야간청소 노동자, 프런트 안내인, 주간 청소 노동자 부부, 알코올 중독자, 형사 두 명. 그리고 에필로그로 가면 다수의 군인과 유령이 등장하는데 다른 독자는 모르겠고, 내 의견으로는 에필로그, 완전히 뱀다리다.

  모노텔. 다른 등장인물 중에 ‘당신’과 ‘나’도 있기는 하지만 이 두 명은 사랑을 나누기 위해 모텔에 온 것이라기보다 혹시 이것들 동반자살하려고 온 거 아닌가 싶다. 어떻게 되는지는 안 알려드린다. 하여간 이 두 명을 제외하고 작품은 거의 대부분 모노드라마 형식이다.

  바로 앞에서 얘기한 커플 말고는 각 씬마다 한 명의 등장인물이 나와서 몇 페이지에 이르는 독백을 한다. 당연히 자기 입장에서 지금의 모노텔에서 벌어지는 갖가지 진상들과 종업원들 사이의 마찰이나 상호 불신감 등등. 근데 이게 생각보다 재미있다. 별의 별 손님을 경험한 프런트 안내인과 청소 노동자들. 아무래도 모텔업이 전반적으로 사양 모드로 들어가, 전체적으로 암울한 분위기를 띌 수밖에 없기는 하다. 이 속에서 벌어지는 각종 난장판과 우울. 재미있지만 밝게 재미있지는 않다. 당선작으로 뽑은 것에 불만 없다. 만일 에필로그가 없었더라면.

  왜 에필로그?

  이런 에필로그는 사족. 진짜 사족 중에서도 사족. 앞에 길게 썼다가 다 지워버렸다.


  우수상 수상작인 윤미현 작 <옥수수밭 땡볕이지>도 비슷한 의견이다.

  이 작품 속에는 1980년대 초반에 구로공단에서 미싱을 돌렸던 노동자 출신 가족인 반쪽짜리 대문 집 어머니 가족과 당시 위장취업해 노동운동을 하던 녹슨 대문 집 어머니 가족, 그리고 동년배이지만 구로공단 여성 노동자들 대상으로 화장품 외판을 하던 빨간 대문 집 어머니 가족이 등장한다.

  짧게 말해서, 40년 전에 구로공단에서 힘든 노동을 하던 부모, 그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해 노동자로 살며, 천안 부탄가스 공장에서 폭발사고로 죽은 아들, 수도꼭지 공장에서 오른 팔이 잘린 아들, 직장 내 상습적 성희롱으로 삶의 이유를 잃어가는 딸을 내세워, 가난의 세습, 힘든 노동이 대를 이어가는 절망의 현재를 그려낸다.

  정말 가난은 절대로 세습되는 것일까? 세월이 조금 바뀌어 지금은 지도층 계급이 어떻게 해서라도 자기들 계급을 세습해주기 위하여 제도조차 자기들 입맛에 맞추려고 하고 있고, 이것이 가난의 세습보다 더 위험하다는 게 내 생각인데. 202X년에는 극빈의 상태에 처한 최하 계층을 제외하면 어떻게 해서든 상위계층에 진입할 “바늘 구멍 만한” 기회가 있기는 있다. 윤미현은 그 바늘 구멍 만한 기회에는 관심이 없다. 좋다. 그럴 수 있다. 그러면 자기들 지위를 세습하기 위한 지도층 계급의 비겁함 정도는 함께 말을 해주었어야지. 증거가 있냐고? 있지만 그만 하자.


  다른 우수상 수상작, 김정윤의 <극동아시아 요리 연구>

  연애 이야기라 할 수 있는 작품. 연애는 연애인데 남성 동성애. 연애 이야기는 결국 이별 이야기일 경우가 많다. 이 작품도 그렇다.

  주인공 심진원의 직업이 요리 연구가이다. 어떻게 연구를 하느냐 하면, 특정 요리에 특별한 추억이나 기억이 있는 사람이, 자신이 전에 먹었던, 먹어봤던 음식의 재현을 의뢰하면 요구한대로 그 음식을 재현해주는 일이다. 쉽지 않을 일. 어쩌면 불가능한 작업일 수도 있다. 먼저 의뢰인이, 자신이 다시 맛보고 싶어하는 음식의 맛을 연구자에게 설명하는 일이 가능하지 않다. 사람이 느낄 수 있는 맛 몇 가지와, 그것의 강약 정도로 미각을 설명하고, 그 미각을 띄게 만드는 이름을 모르는 재료까지 설명해야 할 터인데, 이건 음악이나 회화를 문자로 설명하는 것만큼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이것과 더불어 진원의 연인 승주의 관계. 승주는 게임 프로그래머. 그래서 작품 내내 게임과 관련한 묘사가 나오는데, 나는 게임 동네 언어는 거의 백치 상태라 도무지 무슨 말을 하는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주된 스토리 라인은 헤어진 연인 승주에 대한 기억 또는 추억, 그리고 애정을 빌미로 한 친절이라는 이름의 치명적 간섭. 읽어볼 만하다.


  이 정도면 우리나라 희곡도 괜찮은 수준이다(아쭈? 지가 뭐라고.). 읽을 기회가 생겨 반가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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