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트겐슈타인의 조카
토마스 베른하르트 지음, 배수아 옮김 / 필로소픽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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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토마스 베른하르트는 두 권을 읽었는데 모두 10년을 훌쩍 지나버렸다. 두 권 가운데 <소멸>은 책을 붙들고 금요일 밤 꼬박 새워 읽었다는 것 말고는 전혀 기억나지 않고, <몰락하는 자>는 하필이면 글렌 굴드와 동문수학하게 된 두 명의 피아니스트가 천재 굴드 때문에 절망할 수밖에 없게 되는 이야기 정도로만 남아 있다. 둘 가운데 한 명이 아마 목매달아 죽어버리지? 이 수준이다. <소멸>은 독후감 쓰기 시작한 초기에 읽어서 작품의 정보도 제대로 써놓지 않았다. 당시에 토마스 베른하르트가 조국인 오스트리아와 대판 쌈박질 한 번 하고 정나미가 뚝 떨어져 자기가 쓴 무슨 책을 오스트리아에서 출판하지 말라고 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거 같다. 그게 시간이 지나니까 아 씨, 나 죽기 전에 조국 오스트리아 땅을 밟지 않을 거야, 이렇게 희뿌연 기억이 자가발전을 해 여태 오해하고 있었고. 그러니 누구나 자신의 기억을 믿으면 안 된다. 그래서 기록을 해 놓아야 하는 법이다. 일기를 써라. 일기 속엔 거짓이 없다고 할 수 없어도 제일 작은 거짓을 적었을 터이니 가장 정확한 기억일 터.


  작품은 오스트리아의 국가대표 철학자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의 5촌 조카 파울 비트겐슈타인과 토마스 베른하르트 작가 본인. 이렇게 두 명이 주인공이고, 이 둘의 우정 주변에 있던 인물 몇 명이 조연으로 우정출연한다. 알다시피 베른하르트는 결핵을 품고 살았다. 하필이면 폐 근처에 있는 심장까지 좋지 않아 평생 고생한 거 같은데, 결국 1989년에 58세의 나이로 심장에 문제가 생겨서, 갔다.

  죽기전에 병 때문에 황천길 제일 가까운 곳까지 갔다가 다시 온 경험이 있다. 빈Wien 서쪽에 드넓게 펼쳐진 빌헬미네 산지를 두 구역으로 나누어 불렀는데 하나는 베른하르트가 입원한 폐병 환자들을 위한 작은 구역인 ‘바움가르트너회에’이고, 넓은 구역은 ‘암 슈타인호프’라고 하는 정신질환자들을 위한 구역이었다. 이곳 병동은 전부 남자 이름을 붙인 건물이어서 베른하르트가 길어야 한 두 달 정도 더 살 수 있다고 판정을 받아 일생일대 큰 수술을 받은 곳이 헤르만 병동이었고, 하필이연 같은 시기에 약 5백미터 떨어진 암 슈타인호프의 루트비히 병동에 ‘수감’되어 악명높은 전기치료 같은 걸 감내하고 있던 이가 파울 비트겐슈타인이었다.


  파울이 베른하르트(이하 “토마스”)와 친하게 지내게 된 건 음악 때문이었다. 빈의 블루멘슈톡가세, 여기서 ‘가세Gasse’는 큰 길 말고 좁은 거리나 골목 같은 걸 칭하는 말로, 하여간 그곳에 음악에 대단한 관심, 아마도 프로페셔널한 비평을 할 수준의 소양이 있는 여성 이리나의 집이 있어서 토마스가 불쑥 찾아 갔더니 마침 카를 슈리히트가 지휘한 런던 필하모닉의 하프너 교향곡에 관해 이리나와 파울이 열라 재미있게 토론을 하고 있었나 보다.

  책에는 슈리히트라고 성姓만 부르는데, 이이는 19세기에 출생해 20세기 중반에 전성기를 구가한 지휘자이다. 나치가 집권하고 전쟁에 돌입하자 스위스로 몸을 피했다가 종전 후 주로 독일에서 연주한 걸로. 우리나라 클래식 골수팬들 가운데 이이가 연주한 베토벤을 제일 좋아한다고 떠드는 사람도 많다. 음악 포털 “고전은 가라”에 가보시면 꽤 모여 있을 듯.

  이 슈리히트가 언제 죽었느냐 하면 1967년 1월. 그러니까 토마스는 폐병 병동에, 파울은 정신병동에 입원해 있을 때 죽은 사람이다. 하여간 토마스가 몇 년 전에 이리나의 집에서 자기도 무척 좋아하는 하프너 교향곡, 모차르트 K.385 공연을 직접 관람한 바로 그 공연에 대해 침을 튀었으니 방에 모인 세 명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슈리히트와 모차르트와 K.385 찬양에 날밤을 새웠다는 거 아니냐.

  흠. 나는 모차르트 교향곡 중에서는 딱 두 개밖에 없는 단조, 그것도 우연히 둘 다 사단조 교향곡인 25번과 40번이 좋던데 말이지. 특히 40번 3악장의 미뉴에트, 경쾌한 발랄함이라니!


  그런데 토마스의 말을 그대로 믿는다 하면, 뭐 독자야 작가가 하는 말을 웬만큼 믿을 수밖에 없지만, 이 파울 비트겐슈타인으로 말씀드리자면, 당대 최고 수준의 음악과 문학과 철학과 미술과 수학과 기타 등등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모든 뇌활동에 관한 한 거의 최고 정점에 위치한 인물로, 일찍이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탁월한 자”의 수준에 완벽하게 도달한 인물이다. 그리고 겸양의 말씀이겠지만 자신, 토마스 베른하르트는 이 파울 비트겐슈타인에 조금, 아주 조금 미치지 못하는 수준의 약간 덜 탁월한 자이고.

  게다가 파울은 무기 제작 회사를 가업으로 하는 비트겐슈타인 가문의 직접 상속자로 어마어마어마한 재산을 상속받은 백만장자로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으로 젊음을 소진한 중년이었다가 나중에는 노년이 되고 결국 그렇게 죽는 인간으로, 살면서 노동이란, 그 많던 재산을 아무 생각 없이 지나가는 불쌍한 사람들한테 다 나누어 주거나 사기도 당하면서 완벽하게 거덜이 난 상태에서 이때는 벌써 낼 모래 환갑상 받을 때인데 처음 보험회사 사무직으로 ‘취직 당해’ 근무해본 것이 유일하다.

  음악을 너무너무너무너무 좋아해 모든 오페라하우스의 시즌을 다 경험해보기 위하여 세계일주를 감행했고, 리하르트 슈트라우스가 쓴 <낙소스 섬의 아리아드네>에서 체르비네타 역과 모차르트의 <마술피리>에서 밤의 여왕을 노래한 미국 소프라노를 애인으로 두기도 했다. 자기가 언제나 묵을 수 있는 호수가 딸린 대지가 있는데, 호수 위에 수상 무대를 짓고 그 무대에서 자기가 제일 좋아하는 R. 슈트라우스의 <그림자 없는 여인>을 공연하는 걸 결국 이루지 못하고 눈을 감게 되는 사람. 말러와 브루크너와 바그너 같은 대규모 편성을 좋아하다가 나중에, 내가 보기에는 너무 늦게 실내악으로 되돌아가 줄리아드 사중주단과 부다페스트 사중주단을 즐겨 듣게 되었을 때는 이 백만장자 거부가 방 하나에 부엌, 화장실과 작은 욕실이 달린, 언제나 고장나 있는 엘리베이터가 있는 아파트의 꼭대기에 씻지 않은 접시가 쌓인 산더미와, 빨래하지 않은 천들이 널부러져 무더기 지어 있는 욕실에서, 부자 친척이 입다 버린 고급 비단 옷을 입고 남의 눈에 띌 새라 장 본 것을 비닐 봉지에 담아 비척거리며 계단을 올라 다니고 있었다. 그리고 죽었다. 이때가 1979년.


  3년이 더 흘러 1982년. 토마스 베른하르트는 자신이 말하기를 거의 유일한 친구였던 파울 비트겐슈타인과 함께 했던 1967년부터 1979년까지를 한 권의 책으로 만들어, 이제 내가 읽었다. 2026년에. 그리하여 이들과 나 사이에는 화해하기 어려운 배타적인 매개체, 시간이 놓여 있다. 나름대로 받아들이려 감안은 하겠지만 그래도 쉽지는 않다.

  이 책을 재미있게 읽기 위하여 내 스타일을 버렸다. 메모하지 않았다. 대신 책갈피를 몇 장 꽂았다. 첫 번째 책갈피가 42쪽에 꽂혀있다.


  “그를 만나지 못하는 동안 나는 참으로 파울의 머리가 그리웠다. 그동안 수백 개의 다른 머리에 둘러싸여 있으면서 유감스럽게도 오직 앙상하고 황폐하기만 한 그 머리들 때문에 질식할 만큼 괴로웠기 때문이다. 솔직하게 얘기하자면 대부분의 경우 우리가 흔하게 마주치는 머리들을 상대하는 것은 다 자란 감자 알갱이들과 대화하는 것처럼 지루할 뿐이다.”


  그러니까 월등한 토마스 베른하르트는 자기보다 눈썹만큼 더 월등한 파울 비트겐슈타인을 제외한 오스트리아 빈에 사는 (아마도 지식계층) 사람들의 지능수준이 그저 다 자란 감자 알갱이 수준이라는 말이다. 세상을 이렇게 오만하게 살아도 된다고 인정받은 사람이 몇 명이나 있을까? 정작 그렇게 인정을 받은 사람이 만약 진짜 있다면, 그 오만해도 되는 사람이 정말로 오만하게 살았을까? 오직 덜 떨어진, 좀 아는 새끼들, 혹은 아는 척하는 새끼들이나 이런 마음을 갖는 거 아냐? 여태 베른하르트 선생을 이렇게 보지 않았는데 알고 보니 거 참 진정한 개 호로새낄세.

  그런 토마스가 경애했던 파울 비트겐슈타인의 젊은 시절을 되살려보는 토마스.


  “그가 한때 전 유럽, 구 유럽뿐 아니라 신 유럽의 모든 최고급 호텔까지도 최고 신사의 신분으로 들락거렸던 사람이라는 것도 좀처럼 믿을 수 없었다. 그리고 또한 수십 년 동안 빈 오페라 극장에서 환호성을 지르거나 휘파람을 불어댐으로써 오페라 공연을 절정으로 끌어올리기도 하고 나락으로 떨어뜨리기도 했던, 바로 그 당사자라는 것도 전혀 믿어지지 않았다. (중략) 자신이 몇 번이나 파리에 갔는지, 몇 번이나 런던과 로마에 갔는지, 샴페인을 몇 천 병이나 비웠는지, 여자들을 몇 명이나 유혹했는지, 읽은 책은 도합 몇 권이나 되는지를 헤아려보곤 했다.” (p.84)


  노동하지 않고 즐기기만 한 파울 남작 비트겐슈타인. 유럽의 귀족 자재이자 은수저를 입에 물고 난 부르주아 꼭대기에서 자진해 비렁뱅이로 추락해 쓸쓸하게 죽은 자.

  이 책의 목적은 117쪽에 직접 토마스 베른하르트가 밝혔다.

  “내 친구 파울 비트겐슈타인에 대한 내 인상을 종이에 옮기는 것이 전부.”

  스스로 자기 둘이 대도시 스타일의 우월한 자, 탁월한 자. 그래서 일반 대중을 다 자란 감자 알갱이, 감자 덩어리도 아니고 거기에서 부스러져 나온 감자 알갱이로 알고 평생 산 두 인간의 관계 이야기를, 우리 가운데 누구는 돈 주고 사서 읽었고, 누구는 빌려 읽었다.

  내 스마트폰에 깔린 앱 북적북적에 별 셋 반을 올렸다. 탁월한 자 가운데 한 마리인 토마스 베른하르트의 한 문단짜리 글이 몰입감 있게 스토리를 끌고 나가는 힘에만 준 별점이다. 내용에 관해서는 하나도 아깝다는 생각이, 읽는 내내 들었다. 토마스와 파울, 너희들 만의 샹그릴라. 그 속에서 행복하라. 나, 감자 알갱이 하나는 개똥을 밟아도 땅 위에 좀 더 있을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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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극
클레어 키건 지음, 허진 옮김 / 다산책방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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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키건의 데뷔 소설집을 세번째 키건으로 읽는다. 이이가 이렇게 시작했구나.

  이 책을 출간한 것이 서른한 살 때. 키건은 열일곱 살부터 스물네 살까지 미국 루이지애나주 뉴올리언스로 건너가 로욜라 대학에서 공부했다. 젊은 시절에 6~7년이면 짧은 시간이 아니다. 그래서 첫 소설집 《남극》에 실린 작품의 절반 정도는 아일랜드, 절반은 미국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하지만 당연히 1960년대생 아일랜드 여성의 시점으로 세계를 바라본다. 즉 거의 모든 남성은 찌질하거나 폭력적이고, 세상의 여자들은 그들에 의하여 고통을 당해 분노하지만 견딘다. 아일랜드, 바람이 많이 불고 유사이래 기근이 많이 들어 늘 궁핍했던 섬나라. 하필이면 세계에서 가장 강력했던 잉글랜드 옆에 있어 늘 침략당하고 땅을 빼앗기며 굶주림에 허덕였던 곳. 생존을 위해서라면 그래서 폭력도 혀용 또는 묵인해야 했을 터이고, 이런 땅에서 여성은 늘 당할 수밖에 없었을 것. 굶주림과 전쟁이 있는 곳에서 여성은 없다. 폭력 때문이다. 폭력이 모든 악의 근원이니까. 클레어 키건의 아일랜드는 21세기, 세계 1위의 일인당 국민소득을 자랑하는 가장 부유한 나라 아일랜드가 아니라 여전히 척박한 토양 위에서 궁상에 전, 삭아버린 땅이다. 북풍한설 몰아치는 아일랜드. 그리하여 날씨에도 딱 맞게 키건의 소설들은 그로테스크하다. 간결하면서도 서늘한 문장이라서 더욱 그로테스크하게 느끼는지도 모르겠다.


  클레어 키건, 하면 나는 제일 먼저 가부장적이고 폭력적인 아버지를 연상한다. 앞에서 말했듯 1960년대생 아일랜드 여성이라면 정말로 그런 아버지를 겪었을 수 있다. 비록 키건의 다른 책에서 나오는 개썅노무 아버지처럼 친 딸을 성폭행하는 개자식들부터 시작해 동네의 온갖 똥개새끼들 같은 아저씨들, 심지어 상습적으로 동네 소녀들을 성폭행하는 가톨릭 사제 새끼까지 밀림의 왕국이나 세렝게티-마사이마라를 보는 듯했다. 그리고 거기에 속수무책 당하고 마는 여성들.

  키건을 읽으며 불편했던 것은, 폭력/완력 빼고 형편없는 남성들의 등장이 그랬듯이, 그들이 저지르는 폭력을 그냥 감당하고 마는 아일랜드 여성들의 수동성도 이유 가운데 하나였다. 《남극》의 <자매>에 등장하는 둘째 딸 루이자처럼 십대 후반, 적어도 이십대 초반 정도라면 더블린에서 잉글랜드행 배를 타고 떠나버릴 수도 있는데 말이지.

  떠나지 않더라도 왜 기어오르지 못했을까? 가부장적 아버지/남편 그리고 폭력 때문이었겠지. 하지만 반란을 꾸미지 않으면 언제나, 영원히 그 올가미 아래 대롱대롱 매달려 있어야 하는 걸?


  <남자와 여자>에서는 기어오른다. 아내가 남편한테. 그것도 절대 남성우월주의자이자 더 할 나위 없는 가부장적인 남편임에도.

  아빠는 여간해 움직이지 않는다. 하찮다고 생각하는 건 절대 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집의 여자들, 그러니까 아내와 딸 한테는 운전도 하지 못하게 한다. 어딜 여자가 차를 운전해? 그냥 옆에 타고 있다가 차가 나갈 때 집 문을 열고,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아내/딸이 무도회용 드레스를 입었건 청바지를 입었건 간에, 문을 열고, 차가 나간 다음 다시 문을 닫고, 다녀와서는, 역순으로, 다시 문을 열고 차가 들어온 다음에 다시 닫아야 마땅하다. 대문과 집까지 거리가 있으니 다시 남편의 옆자리에 타, 남편이 운전하는, 운전해주는 차에 타고 와야 한다.

  오빠도 꼼짝하지 않는다. 나는 차 안에 흘린 염소똥과 양똥도 치워야 하고, 외양간의 허드레 일도 해야 하는데 공부 잘한다고 알려졌지만 사실은 생 구라인 오빠는 자기 방에서 숙제한다는 핑계로 열심히 딴 짓만 하고 있다. 저녁밥을 차려놓고, “오빠한테 나와서 밥 먹으라고 해라” 엄마가 말하면 여동생이 가서 “내려가서 먹어. 이 망할 게으름뱅이 새끼야.” 하고 말한다.

  이 가족이 송년 춤파티에 갔다. 아버지는 엄마를 두고 다른 여자를 안고 신나게 뺑뺑이를 돌지만 엄마는 한 구석에서 완전히 꿔다 놓은 보릿자루다. 게다가 마지막 순서인 경품 뽑기에서 실수도 해 이웃들한테 웃음거리가 되기도 했다.

  집에 올 때 차 안에서 아빠가 엄마한테 이 말을 하며 비웃기도 하고 약 올리기도 했지만, 아무래도 자기도 덩달아 창피를 당한 거 같아 열받은 게 틀림없다. 집에 왔다. 엄마더러 내려서 대문을 열라고 한다. 엄마는 차에서 안 내린다. 그냥 버티고 앉아있다. 뒤에 남매가 쳐다보고 있으니 아빠도 답답하겠지. 분명 잔뜩 화가 나서 자기가 궂은 날씨에 내려 직접 문을 여는 순간, 재빨리 운전석으로 넘어간 엄마가 차를 운전해 집까지 부웅, 아빠더러 비오는 진흙탕 길을 걸어오라는 듯이 출발해버렸다. 엄마는 TV에서 유심히 운전 교습하는 방송을 보아왔던 거였다.


  겨우 이것 가지고 가정 속 반란이야? 라고 하지 말라. 태풍도 찻잔 속의 작은 흔들림으로 시작하는 거다. 한 편 더 있다. 어떤 작품인지는 직접 확인하시라.

  책 뒤표지에 “나는 너에게 위안을 주지 않을 것이다. 그런 여자는 내 세대에서 끝이다.”라는 카피가 쓰여 있다. 위안? 아일랜드 남자들은 여자한테 위안 받기를 원했던 모양이지? 그리고 여성들은 그런 찌질하고도 후지며 폭력적이기까지 한 남자들한테 기꺼이 위안을 주었던 모양이고. 이게 168페이지 <남자애한테는 이상한 이름>에서 나오는 구절이다. 카피 가운데 “나는 남자를 아이처럼 보살피는 여자가 되지 않을 것이다.”가 빠져 있다. 이 문장의 전제는 남자 또는 아일랜드 또는 키건이 바라보는 세계의 남성들이 모두 자신을 아이처럼 보살펴달라고 요구했다는 거다. 안 그랬는데도 여자가 자진해서 보살펴주었으면 스스로 자초한 일일 것이다. 세상의 남자들이 정말 나 좀 보살펴줘, 이렇게 졸랐을까?

  지금 읽고 있는 발자크의 <사교계의 영광과 비참 1> 79쪽에도 비슷한 광경이 나온다. 주인공 쥘리앵을 사랑하는 (글자를 쓸 줄도 모르지만 천사처럼 아름다운)에스테르 앞에 스페인 사제가 나타나 쥘리앵과 떨어져 수녀원으로 가서 일정 기간 교육을 받으라고 한다. 그랬더니 에스테르가 신부한테 말하기를,

  “그러면 누가 그를 위로해주나요?”

  신부가 대답하기를, “그가 어떻다고 당신이 그를 위로해야 하지?”

  남자가 여자한테 위안/위로 받기를 원한다고? 좀 웃기다. 합의한 섹스를 원하기는 하지. 물론 “모든” 남자가 아닌 “대부분의 남자”를 일컫는 거다.


  그런데 책을 좀 더 읽어보면, 앞의 단편 <남자와 여자>에 주인공 화자 ‘나’가 이렇게 생각하는 장면이 나온다.


  “나는 다른 집 아빠들이 아내의 외투를 들어주고, 문을 잡아주고, 가게에서 갖고 싶은 게 있는지 물어보고, 필요 없다고 해도 초콜릿과 잘 익은 배를 사 오는 모습을 보았다. 하지만 아빠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그렇군. 하필이면 우리집 아빠 새끼만 저 지랄이고 다른 집 아빠 님들은 안 그렇단다. 주인공이 하는 얘기니까 당연히 맞는 말일 듯. 키건의 소설을 읽고 개썅노무 아빠 두어 새끼들을 아일랜드 또는 세상 전체 아빠로 생각하면 오산이겠군. 당연하지. 아주 선량하거나 악마 같아야 소설의 주인공 자격이 있을 터이니. 그러니 사실 별 일도 아니다. 아무래도 현대 소설에서 이왕이면 주인공이 천사보다 악마인 것이 훨씬 잘 팔리겠지. 그러면 같은 값이면 악마를 캐스팅하지 뭐. 그건 좋은데 가끔 순진한 독자들은 그걸 일반화시킨다는 말이지. 내 생각이 그렇다는 거다. 반론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당연히 당신 의견이 옳다. 다수의 평범하고 선량한 사람은 사실 주인공으로 고려할 만하지 않다고 주장했을 뿐이다.

  차라리 눈비오는 진흙길에 아빠를 놔두고 떠난 엄마처럼 반란을 획책하는 게 어떠냐는 것이다. 괜히 표제작 <남극>의 첫 문장처럼 허튼 짓 해서 코 깨지지 말고.

  “행복한 결혼 생활을 하던 여자는 집을 떠날 때마다 다른 남자와 자면 어떤 기분일까 궁금했다. 그래서 다음 주말에 그 답을 알아내기로 결심했다.”

  사람이 다 거기서 거기지 뭐 대단한 거 있어? 여자나 남자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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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수하 2026-06-15 17:2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정말 나 좀 보살펴줘, 라고 말하진 않지만 위안을 얻고자 하는 남자들이 많다고 생각을 했었습니다. 미디어 같은데서 세뇌된 것인지도 모르지만요.

성폭력같은 중대한 범죄에 저항하는 것도 힘들지만, <남자와 여자> 처럼 딱히 죄는 아닌데 짜증나게 하는 경우에는 그냥 좀 참으면서 사는 사람들도 많죠. 약간의 반란은 있을지언정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는... 80-90년대 한국에 그런 가정도 많았을 것 같아요. 제가 속한 가정도 그랬고.

Falstaff 2026-06-15 20:37   좋아요 1 | URL
댓글 달기가 쉽지 않네요. 남자가 보살펴 줘, 라고 말하기 전에 보살피려 하지 않는 게 좋습니다. 혹시 모르잖아요, 그걸 핑계로 더 달라 붙으려 할지. 그걸 당하는 입장에서도 좋지 않을 수도 있고요. 뭐 사는 게 다 그렇지요. 세상 사는 일 가운데 쉬운 게 하나도 없더라고요.
그냥 끝없이 말, 대화를 해야 할 거 같습니다. 제가 제일 싫어하는 게, ˝그걸 꼭 말로 해야 알아?˝ 하는 겁니다. 말로 하지 않으면 모르거든요. 아마 제가 형광등인 거 같습니다.

건수하 2026-06-16 00:08   좋아요 1 | URL
요즘 젊은 사람들은 더 현명한 것 같고, 미디어나 문학작품의 분위기가 바뀐 것도 그들의 인식에 도움이 되었을 것 같아요.
 

제 노트에 약 140편의 오페라 작품에 나오는 사랑의 듀엣에 관한 메모가 있습니다. 이번 세기 초에 쓴 거니까 벌써 20년도 넘은 잡글들이군요. 오늘은 일요일 아침을 맞아, 제가 좋아하는 사랑의 이중창 가운데 다섯 곡을 골라 소개해볼까 합니다.



5. 푸치니, <나비 부인>



푸치니한테는 진짜 오페라스러운 무엇인가가 있다. 가슴이 저릿저릿, 등뼈부터 소름이 쪼옥 끼치는 감칠맛. 사르비아 꽃을 따 쪽쪽 빨아먹을 때의 그러한 미각을 푸치니에게서 느낄 수 있지 아니한가.


일본 소녀 쵸쵸상. 15세 아가씨니까 소녀라고 불러도 그리 틀리지는 않을 거다.

그녀가 미국인 핑커톤한테 시집가는 날. 쵸쵸상은 자기가 가진 거의 모두를 포기하고 기꺼이 미세스 핑커톤이 되기로 한다. 근데 가문에 본조라고 하는 이름의 아저씨가 있다. 일본은 잡신의 나라. 그만큼 미신이 창궐하는 동네도 드물다. 때때로 본조를 불교의 승려로 연출하는 오페라도 있는 듯한데, 그거 정말 무식한 짓이다. 하여간 본조 아저씨가 보니, 조카딸 쵸쵸가 자기가 믿는 잡신을 버리고 기독교 나라의 서양놈한테 시집을 가니, 이건 분명히 배교 행위라, 결혼식장에서 쵸쵸상~ 쵸쵸상~ 조카딸을 불러 호통을 치며 깽판을 부린다.

핑서방이 그 경황을 당한다. 이것들, 깝데기 노란 야만스런 놈들이 시방 무슨 짓거리들이야.

999년 동안 임대를 한 집에서, 백인의 아내로 맞아준다면 엎드려 칭송은 못할 망정 깽판을 쳐? 에라 이 무식한 것들아, 당장 내 집에서 꺼지지 못하겠느냐! 입에 거품을 물고 길길이 날뛴다.

집 주인이 가라는데 어떻게 해. 가야지.

근데, 쫓겨나는 사람들 입에서 좋은 말이 나올 턱이 없다. 본조 뿐만 아니라 친척들 모두가 한 마디씩 한다.

쵸쵸상, 우릴 버린 년, 네년의 뱀같은 영혼은 끝내 정처없이 떠돌고 말리라!

악담을 하는데, 아.... 오페라에서 악담과 저주는 언제나 틀리는 적이 없다는 거. 이거 이제는 다들 아시는 바, 비극을 예언했구나.


그리하여 쵸쵸상 친구들과 친척들이 몽땅 무대에서 쫓겨나가자 핑서방과 쵸쵸상만 무대에 남아, 정말 달착지근하게 노래하는 이중창.

으아.... 난 <나비 부인> 가운데 이 장면이 제일 좋다.

좋아? 물론 좋기만 한 건 아니지.

이제 바야흐로 시작하는 첫날 밤의 행사.

둘은 더할 수 없이 감미로운 세속의 사랑노래를 하며 신방으로 드는데, 아이구... 짠한 것.

열 다섯 살의 어린 동양 애가, 털복숭이 건장한 서양인한테, 아이구.... 을매나 아팠을꼬... 내 가슴이 다 미어진다.


3번은 발췌반 말고 전곡반으로...






4. 베르디, <오텔로>


사랑.... 어렵다.

그게 두 명이 하는 게임인데다가, 남자는 여자를 죽어도 모르고, 여자 역시 남자는 까무라쳐도 알지를 못한다. 게다가 속 마음이란 것이 곱창 뒤집어 헹구듯 홀딱 까놓고 보여줄 수 없는 거라서 복장 터지는 일이 한 두개가 아니다. 여기 까지는 보통의 선남선녀들이 겪었거나, 겪고 있거나, 앞으로 겪을 당연지사이자 사랑을 하고자 하는 사람들의 숙명인데, 둘 중 하나가 또한 치유할 수 없는 열등의식을 가지고 있다면, 이젠 정말 뒤집어지는 일만 남았다.


한 쪽이 심한 컴플렉스를 가지고 있는 쌍.... 물론 그 컴플렉스를 극복해서 잘 살고 있는 많은 커플을 제외한 나머지 지극히 일부의 경우엔....

이해는 신뢰를 낳고, 신뢰를 바탕으로 사랑을 낳고, 사랑은 갈등을 낳고, 갈등은 오해를 낳고, 오해는 불신을 낳고, 불신은 질투를 낳고, 질투는 눈물을 낳고, 눈물은 증오를 낳고, 증오는.... 파멸을 낳으니, (무슨 성경 구절 같다. 누구는 누구를 낳고, 누구는 누구를 낳고....) 사랑의 잘못된 진화는 질투와 눈물과 파멸?


그걸 셰익스피어는 <오셀로>에서 진짜 실감나게 보여주었다. 사랑의 편지가 잘못 배달된 단 한 번의 사소한 실수가 자신을 죽음에까지 이르게 하는, 그 엄청난 정치적, 사회적 의식의 혼돈을.

오셀로와 데스데모나는 죽을 때까지 서로에게 지독한 중독 증세를 보여준다. 사랑 자체가 사실은 중독과 그리 많이 다르지 않다. 그 중독 증세로 인해 오해의 골은 깊어가고, 사랑 또한 유클리트 물리학이 적용되는지라, 뉴톤의 제 3법칙에 따라 오해가 깊어질수록 반작용으로 사랑 또한 깊어지니 이 아니 아이러니일소냐.

오셀로가 데스데모나를 목졸라 죽일 수밖에 없는 건, 일찌기 최무룡과 김지미의 말대로 사랑하기 때문에 헤어진다는 불멸의 잠언과 정확하게 일치하는 것이니,죽음 만큼 확실하게 헤어지는 것이 또 어디 있겠는가.


우리가 <오셀로>에서 배우는 교훈은?

1. 편지 심부름은 똘똘한 놈한테 시키자.

2. 손수건 함부로 버리거나 내돌리지 말자.

3. 남자 앞에서 다른 남자 얘기할 때 눈치 보자.

4. 여자 앞에서 다른 여자 얘기는 죽어도 하지 말자.

5. 열 받을수록 한 번 더 솔직히 얘기해보자.... 뭐 이런 건가?


어쨌거나, 베르디의 <오텔로> 가운데 1막 마지막 장면을 올리면 좋은데, 그건 그동안 너무 많이 붙인 거라 식상해서, 오늘은 로시니의 <오텔로> 마지막 씬, 바야흐로 데스데모나 혼자 자는 방에 오텔로가 몰래 들어와, 와따 그 년, 죽이려고 보니까 뒤집어지게 이쁘기도 하네... 아리아 한 방 때린 다음, 데스데모나가 잠에서 깨 죽을 때 까지의 이중창, 그야말로 목숨 건 사랑의 장면을 올리려다가 그냥 베르디로 가자. 내 맘이니까.


1번 토스카니니, 2번 카라얀 판은 평생 듣는 인생반. 3번은 젊은 시절 황금의 델 모나코가 어땠는지 확실하게 알 수 있게 만든 판.





3. 모차르트, <돈 지오반니>



<돈 지오반니>의 사랑스런 이중창이다. 너무 사랑스러워 후세 폴란드의 위대한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 쇼팽도 이 주제를 사용하여 초기에 관현악과 피아노를 위한 작품을 만들기도 했다. 물론 쇼팽의 경우엔, 작곡가 신출내기로 자기 이름을 내기 위해 만들었다는 뒷소문이 횡행하기도 하지만.
바로 돈 지오반니와 촌년 체를리나의 이중창 "내 손을 잡아요."

입술과 혓바닥에 참기름을 좌악 바른 돈 지오반니. 결혼식 예비 잔치에서 눈에 확 들어온 신부 체를리나를 어떻게 해서든지 자빠뜨려 보려고 꿀꺼덕, 침을 삼킨다. 그는 저 멀리 보이는 휘황찬란한 성을 가리키며, 저게 내 집이여. 나하고 살지 그래? 그렇게만 된다면 넌 저 멋있는 성의 안주인이 되는 거야. 평생 호강하면서 사는 건 두 번 얘기하면 잔소리지.
무지랭이 체를리나가 보기에도 이거 잘 하면 팔자가 확 필 찬스다. 근데 신랑으로 예비된 마제토 보기가 조금 거시기하고, 귀족 놈들이 자기 같은 농민 계급의 아가씨를 온갖 감언이설로 꼬드겨 딱 한 번 맛을 보신 다음에 나 몰라라 하고 뻥 차버려, 시집도 안 간 아가씨 배가 남산 처럼 부풀어 오른 것을 여러번 본 바라 망설이지 않을 수가 없다.
이 참에 팔자를 한 번 고쳐봐? 더군다나 이렇게 잘 생기고 매너도 죽여주는 귀족 아저씨가 결혼을 하자니 이거 참....
갈팡질팡. 그러나 도저히 거절할 수 없는 지오반니 나리의 달콤한 속삭임이라니. 으이그....





2. 핸델, <롱고바르디의 왕비 로델린다>


예전 롬바르디아 왕국에는 참으로 한심한 남자, 베르타리도가 왕을 먹고 있었다. 아무리 한심하더라도 역시 오페라의 주인공답게 재주가 하나 있었으니 바로 여자 고르는 솜씨. 베르타리도는 롬바르디아 전 국토를 뒤져 자기 영토에서 가장 아름답고 가장 현명하며 가장 정숙한 여자를 뽑더니, 다른 나라의 왕자들하고는 달리 온갖 정성을 바쳐 소위 연애를 했다. 왕자가 연애를 해? 당시엔 필요없는 절차였다. 하지만 여자 고르는 재주 딱 하나밖에 없는 베르타리도는 자기 전공과목을 십분 살려 석삼년 동안 그 처녀, 로델린다한테 공을 들였다.

왜냐하면, 로델린다가 당대가 요구했던 여인의 덕목들을 정말로 잘 지킬 수 있는여자인지 관찰하기도 하고, 한 눈에 반했지만 그녀가 갖고 있는 심성이 자기한테 찰떡처럼 들어맞아 소위 성격차이로 인한 불화가 생기지 않을 것인지를 꼼꼼하게 따진 다음, 이 여자 로델린다야말로 일국의 국모로서도 손색이 없고, 한 남자의 지어미로도 까탈을 잡을 수도 없다는 결론을 내리기 위한 일종의 테스트 기간이었던 거다. 그러니 전공이 여자 고르기였다는 건 베르타리도가 사실은 무척 소심한 사람이었다는 걸 증명하기도 하는 것.


베르타리도는 자기가 잘할 수 있는 오직 한 가지, 마누라 고르기를 무사히 마친 다음, 안타깝게도 더 이상 자기 전공과목이 세상을 무사히 살다가 편안하게 죽을 수 있는데는 조금도 도움을 주지 못한다는 걸 알아차리지도 못하고 그냥 태평세월이겠거니, 맨날 하는 일이라곤 예쁜 마누라 궁둥이만 슬슬 쓰다듬는 것 뿐이었으니 나라 꼬라지가 잘 될 턱이 없었다. 설사 태평성대라 할지라도 백성들을 언제나 긴장하게 하지 않으면 어디선가 황룡이 쇠하는 기운이 뻗친다는 철칙을 무시한 군주의 죄를 물을 수밖에 없으리.


근데 반역을 일으킨 그리모알도 백작 역시 한심하긴 마찬가지. 처음부터 그는 제대로 된 반역도 되지 못할 인물이었다. 그리모알도가 왜 반역을 일으켰느냐 하면, 억눌리고 핍박받고 무거운 세금을 짊어진 백성들의 고충을 해결하기 위해서도 아니고, 무능하지만 그렇다고 나라에 망조가 들 만큼은 망가지지 않은 롬바르디아의 재건을 위해 힘줄을 돋워 자신 한 몸을 바치기 위해서도 아니고, 이웃나라가 호시타탐 롬바르디아를 넘보고 있어 이대로 있다가는 종묘사직이 위태로워서도 아니고, 오직 하나, 총각 때부터 늘상 군침을 흘리던 로델린다의 속고쟁이를 어떻게 한 번 벗겨볼 수 있을까 하는 정념 하나 때문이었다. 원래 꿩 대신 닭이라고 로델린다가 왕한테 시집을 가버리자 그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외모 하나는 빠지지 않는 에두이제로 만족하고 맘잡아 살아보려 했던 그리모알도. 이제 꼭지가 돌아 베르타리도건 에두이제건 간에 모두 제거해버리고 그저 애 하나 딸린 로델린다 만을 꿈꾸며 반역을 일으켜버렸던 거다.

반역이 어떻게 됐느냐고?

반역의 마지막 삼각지 전투에서 최정예인 친위대를 전멸시켰는데 시체들 틈에 찬란한 갑옷을 입은 베르타리도 왕도 누워 있었다 전한다. “전한다”는 무슨 뜻인가. 베르타리도를 죽여 그 시체를 가져온 병사에게 후한 상급을 내리겠다는 모사 그리발도의 명령을 좇다보니 이미 죽은 베르타리도 시체 주변의 반역군들이 너도 나도 베르타리도의 시신을 차지하기 위해 난도질을 쳐, 왕의 갑옷은 확실하지만 갑옷을 입었던 것이 과연 베르타리도였는지는 확인할 수 없다는 거였다.

하여간 왕의 갑옷이 시체더미에서 발견되었으니 국상은 치뤄야 하는 법. 로델린다는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그의 갑옷과 살점 몇 개를 수습해 왕릉도 아니고, 예전에 롬바르디아를 침략했다가 죽은 훈족의 왕 무덤 옆에다가 조그만 봉분을 세우고 망해버린 왕조 앞에서 스스로 혓바닥을 콱 깨물어 죽어버리려 했다가… 참았다.

이 상황에서 오페라는 시작한다.

근데 사실은 베르타리도가 죽지 않았다. 충성스런 신하가 왕의 옷을 입고 대신 죽어준 것. 그리하여 궁궐 근처 자기 묘지 부근에 등장한 베르타리도는 마침 산소를 찾은 마누라 로델린다와 상봉을 하는데, 왕이란 것이 그저 아내가 정절을 지켰는지 그것에만 관심이 있다. 나라야 말아 먹었건 말건.


알란 커티스 아니었으면 핸델의 오페라 구경하기가 쉽지 않았을 듯.





1. 베를리오즈, <트로이 사람들>


세상에나... 이런 슬픔이 있을까.
이별을 앞에 두고, 거역할 수 없는 이별의 명령을 받고도 인간의 눈엔 사랑의 화염이 활활 타올랐으니, 애초부터 이들의 사랑은 하염없는 비탄의 불씨에서 비롯했다. 디돈과 에네.

혹은 길고 긴 절망의 항해에 지친 에네. 디돈을 처음부터 한 시절의 놀이로 생각하고 벌인 엽색?
아, 이런 속된 생각은 말자. 만일 그러했다면 수십 세대가 흐른 다음 어느 작곡가가 있어서 이렇도록 아름다운 이중창을 만들 수 있었겠는가.
디돈. 기울어져가는 조국의 운명을 트로이에서 온 불멸의 영웅 에네에게 기대 다시 세울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이 어느덧 사랑으로 번지고, 에네, 새로운 땅으로의 항해 가운데 그녀를 만나 디돈의 탄식을 발견했는데 그것이 사랑이 될 줄이야.
아직 그들은 고통을 짐작만 할 수 있다. 그것이 얼마나 큰 아픔이 될 것인지 모른 채.
이들의 사랑은, 이미 중년의 연배가 되어버렸으나 아직도 가슴 속에선 사춘기 시절의 애뜻함이 온전하여 이미 이 아름다운 밤의 희열 속에서조차 슬픔이 뚝뚝 묻어 떨어지니, 이별의 순간이 온들 어찌 둘의 사랑마저 식겠는가.
그러나 식지 않은 사랑이 오히려 더 쓰라린 법. 아름다움 속에는 슬픔이 들어있다는 걸 아직도 모르는 이들의 이중창은 하염없이, 하염없이, 그리하여 더욱 하염없이 아름다울 뿐이다.


콜린 데이비스 음반 강추. 굳이 비교하자면... 비교는 뭐하러 하나? 그냥 듣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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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돌이 2026-06-14 06:1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애절하고 로맨틱한 이중창! 폴스타프님과 잘 어울려요. ㅎㅎ 앵콜 무대(?)도 기대할게요! 브라비!

Falstaff 2026-06-14 06:17   좋아요 1 | URL
ㅎㅎㅎ 듣기 괜찮았습니까? 아휴, 좀 그러셨어야 하는데요. ^^;;

페넬로페 2026-06-14 12: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문학 뿐만 아니라 오페라까지
이리 잘 아시다니요👍👍👍
1,2,4번은 잘 모르는 곡이예요
한 곡씩 들어보겠습니다.
저도 앵콜 무대 기대하고 있어요!

Falstaff 2026-06-14 15:12   좋아요 1 | URL
에휴, 뭘요. 문학도, 음악도 둘 다 (이런 말이 아직도 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후루꾸라는 말입죠. 그저 평생 아마추어, 기껏해야 딜레탕트 인생인 걸요. ㅎㅎㅎ
 
불필요한 여자
라비 알라메딘 지음, 이다희 옮김 / 뮤진트리 / 2026년 2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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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라비 알라메딘은 1959년 요르단 암만에서 민족종교인 “레바논 드루즈” 교파 집안에서 태어났다. “레바논 드루즈”는 무슬림이 아니다. 기독교, 유대교, 이슬람교처럼 천지창조와 에덴 추방 같은 것을 믿기는 하지만 라마단, 성지순례 등을 공유하지 않는다. 특히 아브라함 계통의 신비주의적 일신교로 전세계에서 백만명 미만의 신도를 보유한 소수종교라고 위키피디아에 나온다. 라비 알라메딘은 쿠웨이트와 레바논에서 성장했고, 영국을 거쳐 미국 UCLA에서 공학사, 샌프란시스코 대학에서 MBA를 취득해 전공과목으로 먹고 살다가, 뜻한 바 있어 화가와 작가로 살고 있는, 남성 동성애자라고.

  굳이 이이의 성적 정체성을 밝히는 이유는, 작품의 주인공 알리야 살레는 72세의 노인 여성이며, 이이 주변의 주요 등장인물 역시, 절친 한나를 비롯해 어머니와 한 아파트 지붕 밑에서 사는 세 마녀, 파다야, 주마나, 마리-테레즈 등 주로 여성으로, 그냥 읽다 보면 작가 역시 당연히 여성이겠거니 짐작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알리야. 화자 ‘나’의 이름. 1937년에 아버지가 지어 주었다. 높은 데 있는 사람, 하늘이라는 뜻이다. 아버지는 이 이름을 아꼈고, 알리야를 그보다 더 아꼈다는 이야기를 귀에 박히도록 들었음에도 정작 알리야는 기억나지 않는다. 이이가 두 돌도 되지 않아 아장아장 걸어 다닐 때, 아버지는 병들어 죽었다. 이때 아버지가 겨우 스물한 살. 어머니는 16세에 알리야를 낳고 18세에 과부가 됐다.

  1930년대 말에도 이 나라 레바논은 여전히 14세기에서 빠져나오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으나 여전히 그 속에서 허덕이고 있었다. 그래서 아들도 낳지 못한 과부에게 친절하지 않았다. 어머니는 알리야를 안고 다시 친정집으로 들어가고, 친정 부모에게 들들 볶이다가 남편의 동생과 두번째 결혼을 하게 됐다. 알리야는 이후에 세 명의 이부 동생이 생겼으며 새아버지는 죽을 때까지 데면데면한 관계를 유지했다. 나쁜 아버지는 아니었다. 그냥 알리야에 대해 조금도 관심이 없었을 뿐.

  주인공이니까 당연히 공부를 아주 잘했던 알리야는 계속 공부를 하고 싶었음에도 열여섯 살이 되자 한 찌질이한테 시집가야 했고, 먼 훗날, 72세가 되도록 평생을 살게 될 아파트에 집을 얻어 신혼 생활을 시작할 때는 행복한 줄 알았다. 작품에 정확하게는 나오지 않지만 알리야가 4년 후에 이혼당할 때까지 틀림없이 숫처녀는 아니지만 숫처녀와 비슷한 수준으로 살았던 거 같다. 이슬람 여성답게 남편이 요구하면 거절할 수 없었을 테니 “당시” 10대 소녀들이 종종 그랬듯 성적으로 기피나 혐오 같은 것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지만 찌질한 남편이 그 방면으로 문제가 있었던 듯하다. 알리야는 살면서 한 번도 정식으로 남편의 물건을 보지 못했단다. 그래 하루는 밤중에 완전히 잠에 빠진 것을 확인하고 슬쩍 일어나 성냥불을 켠 후 이불을 들춰 남편의 아랫도리를 확인했더니, 세상에나, 공룡이 누워있을 줄 알았는데 글쎄 지렁이가 달려 있었다. 이후에도 몇 번 다시 확인해봐도 여전히 지렁이였다고. 아마도 성기 왜소증이나 조루증세가 있지 않았을까 싶다. 할례를 하다가 껍데기가 아니라 작대기를 잘라 버렸을까?

  나도 <한밤의 아이들>을 읽고 알았다. 이슬람권에서는 남자가 이혼을 원하면 여편 앞에서 “나는 당신과 이혼한다.” 라고 세 번(네 번?)만 외치면 이혼의 모든 과정이 끝난다. 이 지렁이 달린 찌질이도 “아는 당신과 이혼한다.”라고 외쳤을 때 알리야의 나이 스무 살. 천만 다행이었던 것이 남편이 이 말을 던지고, 알리야를 친정으로 쫓아 보낸 것이 아니라, 자기가 집에서 나가버렸다는 거. 속이 다 시원했겠지? 그러나 이후에 시댁에서도, 친정에서도 집을 자기들한테 넘기라고 요구, 강제, 지랄을 했지만 어린 알리야는 감히 버텼다. 여성이 동산이건 부동산이건 소유권을 주장하기 쉽지 않던 시절이었음에도.

  첫번째 의문이 여기서 생겼다. 둘이 살기에 넓기는 하지만 어차피 월세집. 시집이고 친정집이고 간에 왜 이 아파트에 들어와 살겠다는 거지? 다른 아파트 구해 들어가면 되잖아. 특히 친정 어머니와 의붓 큰동생이 협박을 해가면서 집을 내놓으라고 하는 장면을 회상하는 게 이해가 힘들었다. 거액의 보증금을 전남편이 따로 낸 거였나? 그것 참. 이게 다행인 이유를 모르겠던 것.


  찌질한 남편이 50년대 말에 이혼하면서 위자료를 주었을 턱이 없고, 그렇다고 이혼 후 생활비를 보내주었을 리도 없는데 앞으로 어떻게 먹고 살지? 이때 등장한 인물이 한나. 찌질한 남편의 친형과 사랑했던 사이. “사랑했던.” 과거형이니까 지금은? 여전히 숫처녀. 어떻게 그집 집구석 남자들하고 관계만 되면 숫처녀나 숫처녀 비슷하냐고? 한나는 장교, 정확하게 중위와 사랑해서 결혼하자고 굳게 맹세했다. 그런데 남자가 죽어버렸다. 이후에 한나는 결혼 약속을 굳게 마음에 새겨 마치 그 집안의 며느리인양 평생 그렇게 살았다. 한나보다 열다섯 살 더 많지만 알리야와 친밀했던 유일한 사람이 된다. 일흔두 해를 산 알리야가 아꼈던 유일한 사람으로.

  물론 친절했다. 남자 없는 이혼녀에게 아낌없이 친절을 베풀어준 유일한 사람. 그리고 먹보. 아무리 먹고 또 먹어도 그저 통통한 수준을 유지할 뿐 절대로 비만 체형이 되지 않는 행운을 누리던 여자. 역시 가장 큰 친절은 먹고사니즘과 관련이 있어서, 한나의 육촌 형제 가운데 지적 과시욕에 들떠 시내 골목에서 작은 책방을 연 사람이 있어서, 알리야를 이 책방에 취직시켜주었다. 이 책방에 반백년, 오십년을 다닌다. 책방이 결코 이익을 만들지 않는 사업이라 월급을 받아 월세를 내고 나면 남는 게 없었다. 그래서 알리야는 자연스럽게 채식주의자 비슷하게 살았다. 키만 크고 몸에 근육은 별로 없는 꺽다리.

  책방이라니. 물 만난 물고기. 앞에서 이야기했다. 주인공이니까 당연히 공부를 무척 잘했다고. 알리야는 손님이 별로 없는, 별로가 아니라 거의 없는 책방에서 이 책, 저 책 쉬지 않고 읽는다. 곡식과 풀만 먹고도 힘이 남아 열심히 읽는다. 읽고 싶은 책이 있으면 주문을 넣는다. 두 권. 어떤 때는 세 권. 레바논에서 책을 읽는 사람은 별로 없다. 두 권 가운데 한 권 팔리면 나머지 한 권은 남는다. 일정 기간 동안 팔리지 않으면, 알리야가 그냥 집으로 가져간다. 풀만 먹고 살아도 책 살 돈이 없다. 이해해달란다. 뭐 좋다. 어차피 사장도 돈 벌려고 책방 하는 것도 아니고, 처음 한 번 책 훔쳐가는 게 힘들지 이력이 나면 그까짓 거야 뭐. 그래도 도둑년인 건 확실하지만.

  원래 공부를 잘하고, 레바논 역사를 보면 영어와 프랑스어하고 친할 수밖에 없어서 두 언어에 능숙한 알리야는 원문이 영어와 프랑스어가 아닌 책을 중역하기 시작한다. 스물두 살부터 일흔두 살, 이제 2002년이 저물고 며칠 지나면 2003년이 되는 겨울에 제발트의 <아우스터리츠>를 아랍어로 중역할 때까지 모두 37편. 1년에 한 편을 원칙으로 하되 때로는 분량 많은 책들도 있어서 1년이 넘어 걸린 책도 꽤 있다. 알리야는 자기가 번역한 원고를 출판하고자 하지 않는다. 중번역이 끝나면 원고를 종이 박스에 넣고 그걸 하녀방과 하녀화장실에 쌓아 놓았다. 그것으로 끝이다. 물론 나중에 뒤져 보기야 한다.

그래서 이 책 속에는 다른 시인, 작가들이 쓴 시, 소설, 에세이가 많이 등장한다. 소설가의 경우 다행스럽게 많은 작품을 읽어보아 어떤 말을 하고 싶은지 이해하는데 별로 문제가 없었다. 시로 말하자면, 나는 외국시를 읽지 않아 좀 곤혹스럽기는 했다. 근데 알리야가 고전음악도 많이 안다. 알아도 너무 잘 안다.


  음반도 많다. 주로 LP. 두번째 의문. 알리야가 월급 받아 월세 내면 돈이 거의 없어 풀만 먹고 산다는 얘기는 했고, 책도 사지 않고 주로 자기 직장에서 훔쳐 가져왔다는 것도 썼는데, 무슨 돈이 있어서 이 와중에 한 달에 LP 두 장을 샀을까? 해적판도 아니고 음악 좀 듣는다, 하는 사람들 말로 노랑딱지 도이치그라마폰 음반을? 좋다. 그럴 수 있다 치자. 알리야가 50년 동안 돈을 벌었으니 50년 곱하기 12개월 곱하기 LP 두 장은 LP 1,200장. 그런데 하는 얘기를 들어보면 LP 1,200장 소유자가 할 수 있는 말이 아니다. LP 1,200장이면 CD 기준으로 한 7백장 수준. 알리야가 주장하는 레바논의 문화수준에 입각해서 생각해보면 자기가 들은 LP, 그리고 가능했다면(책 속에서는 그렇지 않았지만 그랬다고 치면) 판 가게 주인남자와 나눌 수 있었던 음악 이야기, 그리고 딱 1회성인 라디오 음악방송이 유일하게 접할 수 있는 음악감상 환경일 텐데, 쇼팽의 피아노 곡부터 시작해 베토벤의 현악 사중주를 거쳐 바그너, 브루크너, 말러, 쇤베르크, 메시앙, 리게티까지 도무지 막힘이 없다. 음악 강의 한 번 안 듣고 12음 기법 이후의 현대음악을 이해했다면, 알리야는 정말 천재다. 인정 안 할 도리가 없다.

  그리고 늙은 알리야는 이제 기력이 달리지만 주로 걸어서 이동하고, 좀 먼 거리는 택시를 이용한다. 책방이 문을 닫을 때는 아무리 헐값을 주고 샀다 해도, 집안이 거의 책으로 메워질 만큼 많은 책을 한 방에 사들였다. 1970년대 말부터 레바논은 이스라엘의 공습과 내전으로 허덕이고 또 허덕였는데, 책방도 연 날보다 문 닫은 날이 더 많았을 텐데, 어떻게 이렇게 여유로운 노년을 맞을 수 있었을까? 합당한 설명이 없다.

  뭐 그럴 수 있지. 근데 말이 자꾸 왔다갔다 해서 문제다. 177쪽에는 또 “나는 수시로 책을 사서 읽을 책더미에 올려 놓는다.”라고 헛소리를 한다. 이건 알리야 문제가 아니라 작가 라비 알라메딘이 문제다. 더 큰 문제도 있다. 이게 제일 큰 문제다.

  알리야는 음악, 미술, 문학, 어학에 도가 텄다. 어려서부터 잘 교육받은 라비 알라메딘이 그러하듯이 세상에 모르는 것이 없는 수준이다. 알리야는 자기도 모르게 고백한다.


  “내가 남들과 비슷하지 않다는 사실이 나도 평생 신경 쓰였다. 수년 동안은 내가 특별하다고, 남들과 다르게 살기로 선택했다고 나를 설득할 수 있었다. 사실상 나는 내가 우월하다고 믿고 싶었다. 예술가는 아니라도, 마티스 같은 천재는 아니라도 어중이떠중이들과는 다르다고 생각했다.” (p.280)


  자신이 다른 사람보다 우월하다는 의식. 미안하지만 나는 이런 자만심을 용서해줄 마음이 1도 없다. 내가 음악, 미술, 문학, 다 합해 예술과 어학을 너보다 훨씬 잘 이해하기 때문에, 너보다 낫다, 우월하다는 마음이 차별을 낳고, 차별이 혐오를 낳고, 혐오가 또 무엇을 낳고, 무엇이 아브라함을 낳고,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이 야곱을 낳고… 최종적으로 나치를 낳는다. 알리야 살레도 일흔두 살. 이제 곧 죽을 늙은이라 다행이지 좀 더 오래 살았으면, 어중이떠중이 가운데 한 명이 말씀드립건대, 히틀러가 되지 말라는 보장이 없다. 레바논 근현대를 살면서 그리 많은 이스라엘의 폭격을 맞아도 유대인 천재 작가, 시인, 철학자, 작곡가, 화가, 그리고 홀로코스트만 이야기할 뿐 이스라엘의 대 레바논 공격을 비난하지 않는다. 라비 알라메딘이 미국인이기 때문이다. 여차하면 반유대주의자로 찍힐 거 같거든. 하긴. 사람이 다 거기서 거기지. 근데 똑똑이가 그걸 몰라요. 우월하다고? 사실은 위험한 거야, 대단히.

 라비 알라메딘, 그리고 알리야. 너넨 정말 속물이야, 이것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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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6-06-12 10:3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도둑년 일리야 ㅋㅋㅋㅋ
제가 그래서 그 아파트가 일리야 자가 소유로 생각했다니까요. 그렇지 않고서야 도대체 왜 형제들이 저기 와서 살려고 그렇게 욕심을 부리나.. 도저히 이해가 안 가서.

LP판 ㅋㅋㅋㅋㅋㅋㅋ 저도 이 부분 의아했습니다. 아니 서울 사는 월급쟁이 잠자냥도 단 한 장 사지 못하는 사치품 LP를..... 턱턱 사는 이 여자...(탈을 쓴 레바논계 미국 남성 ㅋㅋㅋㅋ)

건수하 2026-06-12 10:44   좋아요 2 | URL
제가 전에 썼듯이 보증금이 크다고 생각합니다. ㅋㅋ

그러니깐, 그래서 노년 여성의 삶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니까요… 왜 굳이 여성으로 썼을까요 작가는? 마지막 여성 연대 서사까지도 피상적으로 느껴지더라고요.

잠자냥 2026-06-12 10:59   좋아요 2 | URL
저 남자 작가가 (좋게 말해서) 영리한 수를 쓴 거죠. (나쁘게 말하면 잔머리 굴림) 지금 이 시대에 어떻게 쓰면 잘 팔리겠구나! 여성-노인-유색인-페미니즘 담으면 바로 이거야! ㅋㅋㅋㅋㅋㅋㅋ (근데 이게 너무 속 보여서... 얄팍해짐. 심지어 이렇게 정치적으로 예민하고 올바른 나..란 남자까지 느껴져서 좀 더 싫음.)

건수하 2026-06-12 11:03   좋아요 2 | URL
맞아요 얄팍하다에 공감!

Falstaff 2026-06-12 15:46   좋아요 3 | URL
내전이 있던 시대에 리비아계 미국인 작가가 리비아를 무대로, 남자를 주인공으로 하기는 쉽지 않았을 겁니다. 자신이 체험해보지 않은 동족의 이야기를 함부로 떠든다?
그래서 차선으로 생각한 것이 광장이 아니라 자신의 방으로 공간을 축소시킬 수 있는 당시 여성으로 했다는 데 한 표 던집니다.
리비아 현지에 사는 남자 주인공. 리비아 뿐만 아니라 중동의 내전 지역에서 내전에 관해 함부로 썼다가 파트와 판결이라도 받으면 어쩌라고요. 얄팍/잔대가리 이전에 생사의 문제가 달렸을 수도 있습니다.
공쿠르 상 받은 ˝남자˝ 작가 카멜 다우드의 <후리>도 알제리 배경, 여성이 주인공입니다만 그래봤자 다우드는 결국 파트와 판결을 받았을 뿐입니다.

<후리>의 스토리가 다우드의 아내, 신경정신과 전문의의 실제 환자 이야기라서, 의사가 당연히 지켜야 하는 비밀준수의 의무를 위반해 소송을 벌였다고 하지요, 아마? 다우드는 그러면서까지 여자를, 그것도 ˝실재하는˝ 아내의 환자를 주인공으로 해서 써야 했을까요?

건수하 2026-06-12 20:09   좋아요 0 | URL
레바논의 과거 혹은 현재가 안타까워서 썼다기에는 너무 이야기가 평화로운 것 같습니다만… 어쨌든 작가가 잘 모르는 것을 대충 이것저것 엮어서 쓰려했다는 점에 동감입니다.

건수하 2026-06-12 10:4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인용된 책 내용들을 만나는 건 좋은데 책의 나머지 부분이 별로였어요. 인용에 공들이느라 나머지 부분을 너무 대충 쓴 느낌…

Falstaff 2026-06-12 15:45   좋아요 1 | URL
아무렇게나 막 쓴 거, 또는 쓰고 난 다음에 퇴고를 하지 않은 작품이라고밖에 생각할 수 없더라고요.
 
모든 저녁이 저물 때
예니 에르펜베크 지음, 배수아 옮김 / 한길사 / 2018년 7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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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년에만 에르펜베크의 책을 세 권 읽었다. <카이로스>가 2024년에 부커-인터내셔널 상을 받았다고 해서 관심을 두었는데 정작 인상깊게 읽은 책은 <그곳에 집이 있었을까>였다.

  딱 내 마음에 맞는 작품을 읽었다. 20세기 오스트리아-헝가리 지역, 그러니까 중부와 동유럽 지역의 현대사를 지낸 한 아기, 소녀, 청년, 중년, 노년의 이야기. 시대는 프란츠 요제프 1세 시절, 1902년 봄과 여름 사이에 태어난 여자 아이.

  아이는 스페인이 아니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갈리시아에서 열여덟 살의 유대인 어머니와 가톨릭 교도 즉 유럽 원주민 아버지 사이에서 맏이로 난다. 유대 어머니가 갓 태어났을 때 이 가정의 비극이 시작했다. 유대 어머니의 어머니, 그러니까 1902년에 난 아이의 어머니. 이것은 변하지 않는 사실이니, 그녀와 남편이 거실에 있고 아이는 보모가 아이방에서 돌보고 있을 무렵 어수선한 기척이 나 창 밖을 내다보니 집 밖 사람들이 무리 지어 달리면서 고함을 질렀다. 순간 덧문도 닫지 않은 1층 창문에 첫번째 돌이 날아 들어왔다. 남편이 문을 살짝 열고 내다보니까 그곳에 평소 친하게 지내던 안드레이가 있어 그를 불렀더니 안드레이는 못 본 척해버렸다. 두번째 돌이 유리창을 깨고 날아들어 그녀의 머리를 스쳐 지나가 남편이 부모한테 졸업선물로 받은 괴테 전집 9권 책등에 맞았다. 그래서 조금 상처를 입은 괴테 전집 9권은 <모든 저녁이 저물 때>가 끝날 때까지 계속 등장한다.

  이어 안드레이와 청년들이 집 현관문 앞에 들이닥쳐 도끼질을 하기 시작한다. 부부는 피신할 수밖에 없다. 2층 아기방을 두드렸다. 보모는 문을 걸어 닫은 채 아이의 부모에게 아이를 건네주는 것도, 아기방으로 들어오는 것도 거부했다. 긴박한 순간에 부부는 할 수 없이 2층과 지붕 사이의 다락방으로 피신했고, 그 순간 도끼질에 산산조각이 난 현관문을 박차고 청년들이 들이닥쳐 집안을 사정없이 박살내기 시작했다.

  다락방에 숨었다 해도 발각나 폭행을 당할 것이 틀림없어 부부는 맨손으로 천장을 뚫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조금 구멍을 낸 사이에 다락방까지 다가온 청년들이 문짝을 도끼질했다. 겨우 뜯어낸 지붕으로 먼저 아내를 올려보낸 남편이 점프를 했고, 순간 다락방의 방문이 도끼질 두어번에 조각이 나버렸으며 뛰어오른 남편의 팔을 붙잡은 그녀가 힘을 주어 끌어올리는 바로 그때, 안드레이와 함께 들이닥친 청년이 남편을 향해 거침없이 도끼를 휘둘러 그를 산산조각을 내버렸다. 그녀가 죽을 힘을 다해 남편의 팔을 끌어올렸다. 그리고 쑥, 남편의 팔만 아내가 있는 지붕 위로 불쑥 솟아오르고 그냥 고기 덩어리가 된 나머지 부분은 2층 창문에서 거리로 내던져졌고, 지나가던 행인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았다. 바로 이 순간에 유대인 과부가 된 여인은, 아이에게, 훗날 1902년에 난 아이에게, 아버지는 어느 날 집을 나가서 영영 돌아오지 않았다고, 아마도 미국으로 갔을 거라고, 미국 아니면 파리나 베를린에서 살고 있을 거라고 이야기했다. 아이는 평생 그런 줄 알고 살았다.


  이 아이가 갓난 아이였을 때, 아버지가 사실 미국에도, 파리에도, 베를린에도 가지 않고 유대인 거주지역 안에 있는 집에서 안드레이를 비롯한 폴란드 청년들에게 난도질을 당한 채 죽어버린 다음 어머니가 남편의 상점을 이어 운영했는데, 아이가 점점 자라 당연한 듯 상점에서 일을 도왔을 것이다. 열여섯 살이나 열일곱 살이었을 때, 갈리시아 지방 칼 루드비히 철도의 35km 구간을 책임지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최하위 그러니까 11등급 철도 공무원 청년이 상점에서 유대인 여주인의 딸을 알게 되었고 그녀에게 청혼했다. 청년은 매우 가난했으며 그럼에도 살기 위하여 이곳저곳에 빚을 질 수밖에 없었는데, 혹시 결혼하면 유대인 여인이 내줄 혼인 지참금으로 빚을 갚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이 없는 건 아니었다. 정작 오직 법률적으로만 결혼하는 날, 청년에게 축하한다는 말이 없는 거야 뭐라 할 수 없어도, 주변에 침묵이 퍼지는 걸 확인하는 일은 편하지 않았다. 그건 보편적으로 종말과 관련한 ‘무엇’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었다.

  그의 아버지는 법률혼 때도, 아기 그러니까 아버지의 손녀가 출생했을 때도 오지 않았다. 길이 너무 멀고 돈이 많이 든다고만 했다. 아내, 그러니까 아버지가 미국이나 아니면 파리, 베를린으로 떠난 줄 알고 있던 아이가 커서 혼인을 한 여자의 외할아버지도 오지 않았다. 손녀가 이교도와 결혼하는 날. 그는 길을 떠나 손녀를 축복하는 대신, 아직 멀쩡히 살아있는 신부를 위해 죽은 자를 애도하는 의례인 시바를 치루고 있었다. 조상의 신이 보자면 그녀 또한 이미 생사의 경계를 넘어선 것이기 때문에.


  이 젊은 부부가 법률적으로 혼인을 하고, 아홉달이 지나 딸을 낳고 나서, 이제 아빠가 된 청년은 자기 주변에 침묵만 깔린 것을 확실히 알아챌 즈음해서, 아내가 가져온 지참금으로 자기 빚을 다 갚을 수도 없고, 최하위인 11등급 공무원에서 10등급으로 승진 심사를 통과하는 것도 거의 불가능하게 되었다는 것도 충분히 이해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아이는 점점 자라 벌써 세상에 나와 여덟 달이 되고 처음으로 겨울을 맞았고, 그리고, 죽었다. 자다가 담요가 두꺼웠나, 똑바로 누워 재웠는데 사레가 들었나, 아팠는데 그것을 몰랐나. 그렇게 죽었다. 유아돌연사. 그건 지금도 잦은 빈도로 일어난다.

  아이의 엄마, 아버지가 미국으로 간 줄 알며 산, 아니면 파리나 베를린으로 떠난 줄 알고 산 엄마는 그냥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등에 책가방을 메고 집은 나설 어린 여자 아이, 열살 먹어 쉬지 않고 조잘대는 꼬맹이, 청년들의 눈길을 한 없이 즐기는 처녀애, 그리고 늙은 여자가 될 자기 딸이 흙 세 줌과 함께 땅에 눕혀지고 그 위에 흙을 부은 거였다. 그렇게 땅 속에 죽은 아이를 묻고 돌아온 젊은 엄마는 유대인 관습에 따라 현관문 앞에 벽에 등을 기댄 채 그녀의 할머니한테 유일하게 물려받고 싶어했던 발 받침대, 어린 시절 할머니의 옛날 이야기를 들을 때면 늘 앉곤 하던 발 받침대를 옆에 두고 꼬박 일곱 날을 기대 앉아 있을 것이었다.

  아이가 죽었나, 싶었을 때, 그녀는 집안의 물이란 물은 모두 바깥으로 쏟아버렸다. 죽음의 검은 천사가 검을 물에 담아 씻을 테니까. 담요로 거울을 덮고 모든 창문을 열어 놓았다. 아기의 영혼이 되돌아오지 않고 영원히 날아가 버릴 것이기 때문에. 그런데도 아기는 가버렸다. 그런데도 여전히 젖이 돌아 가슴이 뭉쳤다. 땅 속에 묻혀버린 아이를 위한 젖. 너무 많이 갖고 있는 젖 때문에 그녀도 죽어버리고 싶었다. 만일 가능하다면 조상들의 신과 거래하여 자신의 생명과 그녀의 몸에서 태어난 생명을 교환하기를 간절히 원했지만 신은 그녀가 건넨 것을 결코 받으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소설은 모든 가능성을 포함한다. 여기서 막간극이 벌어진다.

  만약 예를 들어, 아이가 죽어가던 순간 그날 밤에 어머니나 아버지가 창문을 열어젖히고, 바깥 창틀에 쌓인 눈을 한 줌 퍼다가 아기의 옷 속으로 밀어 넣었더라면, 그 순간에 창을 열고 은은하게 빛나는 눈을 바라보거나, 추위에 오그라든 창틀이 삐걱대는 소리를 듣기만 해도 그런 영감이 떠올랐을 수 있었을 텐데, 만일 정말로 창틀에 소복하게 쌓인 눈을 한 줌이라도 퍼다가 아기의 가슴 그러니까 심장 부위에 밀어 넣어 자극을 했더라면 아마도 아기는 불현듯 다시 숨을 쉬기 시작했을 것이고, 어쩌면 소리를 지르며 울었을지도 모르는데, 둘 가운데 뭐가 됐든 아기의 심장은 다시 뛰기 시작하고, 아기의 피부는 온기를 회복하면서 눈은 아기의 가슴에서 녹아버렸을 것이다.

  다만, 만약이다. 만약 그러했더라면.

  작가는 결심한다. 창작자의 권한으로 만약이었던 것을 실제로 그렇게 되었다, 라고 결심해버린다. 그리하여 때는 1918년. 아이는 16년 전인 1902년에서 1903년으로 넘어가는 겨울에 죽은 것이 아니라 1918년에서 1919년 사이의 겨울, 오스트리아-헝가리는 제1차세계대전에서 패배해 전 국민이 곤궁의 골짜기로 떨어졌을 무렵, 이제 극도로 좁아진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으로 전근해 온 아버지를 따라 여전히 고도의 위용을 자랑하지만 조금의 식량을 얻기 위하여 밤새도록 배급소 앞에서 줄을 서야 하는 도시에서 살고 있다.

  그러나 아이는 결코 행복하지 않다. 이 나이가 아이의 어머니가 아버지를 처음 만나 사랑을 시작했던 시기. 그렇다고 아이에게 당연히 연인이 생기는 건 아니다. 패전해 곤궁에 떨어진 왕년의 제국 도시 빈에는 스페인 독감이 돌아 아이의 절친한 친구도 죽어버리고, 도시에서 넘쳐나는 빈에서 운구용으로 쓰이던 전차를 타고 공동묘지로 향한다. 죽은 친구의 애인, 전장에서 독가스를 마시고 돌아온 남자를 연모하던 아이는, 남자에게 온몸을 던졌음에도 받아들여지지 않고, 일 주일을 견딘 후에, 1919년 1월 26일, 23시 17분경, 알저 거리 4번지, 북위 48.21497도, 동경 16.35231도, 빈 종합병원 앞에 멈춘 택시 안에서, 우연히 만난 의대 3학기에 재학 중인 페르디난트 G. 씨로 하여금 서로 합의된 내용에 따라, 아이의 관자놀이에 권총을 갖다 대고, 정확히 그 순간 개 짖는 소리가 들려오자, 마치 짖는 소리에 화답하듯, 정말로 방아쇠를 당겨버리게 해서, 죽었다.


  이렇게 아기는, 소녀는, 젊은 여성은, 중년 부인은, 노인은 다섯 번의 삶을 20세기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비엔나, 프라하, 모스크바, 동베를린을 거쳐 역사를 관통한다.

  무엇보다 문장, 글이 매혹적이다. 배수아의 가필이 있었는지 그건 모르겠지만, 전에 인상깊게 읽은 <그곳에 집이 있었을까>를 떠올리게 만드는 빼어난 글과 20세기, 한 문장도 허투루 읽지 못하게, 그렇게 몰입하게 되는 작품. 이런 걸 뭐라 해야 하나? 아름답다고? 비슷한 느낌이다.

  에르펜베크, 이제 이이의 단행본은 한 권 남았다.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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