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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저 옛생각이 나서 황지우의 시집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를 들췄다. 책꽂이에 40년 꽂혀있던 묵고 묵은 시집. 생각나면, 혼술에 얼근해지면 한 번씩 들춰보려 했지만 사실은 여간해 다시 읽게 되지 않는 것이 책인지라, 그저 종이만 바싹 말라가던 시집.

  이 가운데 <활엽수림에서>을 읽으면서, 피식, 웃었다.

  여태 내가 즐겨 쓰고, 정말로 내 머리에서 만든 묘사인 줄 알았던 것들. 세상에나. 예컨대:


  "비인칭 주어로 살다."

  "생을 탕진한 죄"

  "무작정 살다."


  이게 다 황지우가 쓴 시 <활엽수림에서> 딱 한 수에 몽땅 나오는 거였다. 고백하노니, 정말 내가 만들어 쓴 구절인 것으로 알았던 것. 그래서 틈나는 대로 열심히 써먹던 구절이다. 웃기지? 앞으로 다시는 누구, 누구를 흉보지 못하리라.

  이 시에 이런 구절이 있으니:


  "새벽 기슭에 서서 부은 눈으로 눈 덮인 산을 멩하게, 바라보다."


  '멩하게' 다음에 찍힌 쉼표 ","에 연필로 동그라미 하나 그려놓은 스물네 살의 나.

  옛 시집을 읽는 재미가 퍽 좋다. 아직도 외우고 있는 시 <歸巢의 새. 2>가 이 시집에 실린 거였구나. "지 울음이 들릴락말락한 까마득한 달팽이管 속으로 날아가부럿다."  시 쓰는 고단함을 어찌 이렇게 쓸 수 있었을까.


  <같은 緯度 위에서>의 11행에 "<악으로> 詩를 쓰는 것이 아니다."에는 또 연필로 의문문이 보태졌구나. "愕?, 惡? 또는 깡다구?"라고. 웃기고 재미있다.


  그래도 나 같은 잡것들한테는 아마도 이 시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시가 <심인>이었을 거다. 이거 한 번 올려보자.



  심 인



  김종수 80년 5월 이후 가출

  소식 두절 11월 3일 입대 영장 나왔음

  귀가 요 아는 분 연락 바람 누나

  829-1551


  이광필 광필아 모든 것을 묻지 않겠다

  돌아와서 이야기하자

  어머니가 위독하시다


  조순혜 21세 아버지가

  기다리니 집으로 속히 돌아오라

  내가 잘못했다


  나는 쭈그리고 앉아

  똥을 눈다  (p.29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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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6-05-03 20:0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스물세살의 나‘ 여기서 가슴이 뭉클해집니다.
저는 황지우 시집 들추면 눈물이 나요. 심지어 펑펑 울기도 했던 기억이 ㅠㅠ

Falstaff 2026-05-03 20:15   좋아요 1 | URL
아이구, 혹시 저린 추억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런 추억은 부럽지만 이제 울지는 않으시겠지요. ^^
 
로알드 달 베스트 단편 1
로알드 달 지음, 정영목 옮김 / 교유서가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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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설집 《맛》, 하면 팍 떠오르는 작가가 로알드 달 말고 뮈리엘 바르베리의 책 아니었나? 난 그랬는데 아니더라도 상관없지 뭐. 나는 바르베리의 책을 읽고 왜 우리나라의 소위 맛 칼럼니스트라 일컫는 작자 황땡땡은 일천한 지식과 그렇게 하찮은 단어만 구사하면서 자칭 기고가寄稿家라고 떠들고 다닐까, 라는 생각을 했었다. 누구를 일컫는 지 아시겠지? 요즘엔 어디서 뭐 하고 사는지 모르겠지만.

  사실 소설집 《맛》이라면 바르베리 한 권으로 충분하다. 근데 왜 또 로알드 달의 작품집을 골랐지? 로알드 달이라면 재미있게 본 영화 <찰리와 초콜릿 공장>의 원작을 쓴 어린이 책 전문작가인 걸 번히 알면서 말이지. 다 이유가 있다.

  (이유? 나 중딩 1학년 때 골목길에서 친구하고 농담 따먹기 하고 있다가 걔가 뭐라고 헛소리를 하길래 왜 그런 일이 생겼는지 이유를 대보라 했던 적 있다. 걔가 대답을 못하니까 내가 또 “아니, 처녀가 아이를 배도 이유가 있는 법인데 왜 말을 안 하느냐”고 했다. 이때 골목을 지나던 호호 할머니가 “처녀가 애를 배도” 운운하는 걸 우연히 듣고는 나더러 ‘배워 먹지 못한 것 같으니’ 어쩌고저쩌고 막 야단을 친 기억이 난다. 아이고, 그땐 그런 시절이었지. 갑자기 이 생각이 나서 독후감과 상관없이 한 번 지껄여봤다. 그 할머니는 벌써, 벌써 갔을 거다. 편히 쉬시기를.)

  며칠 전에 읽은 개브리얼 제빈의 작품 <섬에 있는 서점>에서 서점의 주인이자 주인공인 A.J.가 특히 단편소설을 좋아하는데 소설가 가운데 로알드 달을 여간 편애하는 게 아니었다. 로알드 달? 마흔 살이 넘은 인도계 미국인 A.J.가 좋아한다니 어린이 책 전문가 로알드 달이 아니라 틀림없이 단편소설가 로알드 달일 터. 당장 개가실 내려가서 고른 책 두 권 가운데 하나가 《맛》이었다. 다른 하나는 금요일에 업로드한 데이비드 포스터 월리스의 소설집 《오블리비언》이고. 월리스가 에세이스트인 줄만 알았던 것처럼 달 역시 어린이 책 작가로만 알았으니 새삼스레 무식이 탄로난 순간이다.


  위키피디아에서 로알드 달을 검색하면 상당한 분량이 뜬다. 너무 길어서 인터넷 책방 알라딘에 실린 정보를 적당히 섞으면, 1916년에 돈 좀 있는, 아니다, 실수, 웨일스 카디프의 부유한 노르웨이 이민자 가정에서 태어난 영국인으로, 기숙학교인 랩턴 스쿨에서 지긋지긋한 시절을 보내고 아마도 (내 생각을 말하자면) 교육받는다는 것 자체가 지옥불에 타는 거하고 비슷한 느낌이 들어 더 이상의 공부는 작파하고 석유회사의 아프리카 지사에서 일했다. 랩턴 스쿨의 남학생 기숙사. 완전 정글이었겠지. 역시 영화로도 만든 달 원작의 <마틸다>가 이곳을 모델로 쓰지 않았을까 싶다.

  2차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달은 영국 왕립공군에 입대해 전투기 조종사로 비행 에이스Flying Ace의 명예를 얻었지만 크게 부상해 정보장교로 지내다가 전쟁이 끝난 후 중령으로 제대한다. 이후 본격적으로 글을 쓰기 시작했는데 세상에나, 자기도 자신이 그렇게 성공할 줄은 몰랐을 거다. 전세계에서 2억 권의 책을 팔았으니 인세로 한 권에 천원만 받았다 쳐도 2천억 원. 이것으로 끝나는 것도 아니고 영화로 만들어 매출에 따른 배당까지 받았을 터, 그럴 줄 알았으면 중령 달기 전에 얼른 제대해 일찌감치 책이나 쓸 것을. 돈 버는 재주는 아빠를 닮은 게 확실하다.

  책방의 작가 소개는 이렇게 말한다.


  “도박과 내기에 대한 집착, 속고 속이는 의뭉스러운 술수, 통념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기이한 목표를 향해 놀라운 집념을 발휘하는 인물 등을 보여주면서 인간사의 미묘한 국면을 차근차근 밀도 높은 이야기로 조여붙이는 그의 솜씨는 결말에서 으스스한 반전과 다층적인 유머를 선사하면서 정점에 달한다.”


  책가게 소개글도 일종의 광고니까 위 인용문이 조금 과장은 되어 있지만 맞는 말이다. 다만 달이 1916년생이니 지금 독자들이 읽으면 달과 비슷한 연배의 사람들이 느꼈을 반전과 다층적 유머를 좀 덜 진하게 느끼지 않을까 싶다. 무슨 말씀이냐 하면, 소설집 《맛》에서도 달 특유의 것이 확실한 내기 장면이 나오는데, 이미 발랑 까진 독자의 눈에 결론이 어떻게 날지 보인다는 것. 물론 훤히 보이지는 않지만 거의 예상대로 스토리가 진행된다.

  그래서 이 책이 흥미롭지 못하다는 건 전혀 아니다. 무척 재미있다. 얼마나 재미있느냐 하면, 출판사 교유서가에서 달의 단편집 세 권을 냈는데, 올해 안에 나머지 두 권도 싹 읽을 결심을 하게 만들 만큼 재미있다.

  재미를 가장 잘 보장해주는 건 역시 악당이 지옥으로 떨어지는 장면이다. 아니면 적어도 원래 치려 하던 사기 행각이 실패하는 모습. 달이 내기 전문 작가이니만큼 선량한 내기꾼은 등장하지 않는다. 그냥 일상적인 내기라면 그게 (아무리 단편이라지만) 소설 스토리가 될 수 없을 터. 책 속의 내기에는 빠짐없이 좀스러운 사기꾼이 등장한다. 아니면 달의 십대를 망쳐버린 랩턴 스쿨의 폭력적인 교장처럼, 영화 <마틸다>의 군복 입고, 위압적이고, 뚱뚱하고, 못생기고, 힘세고, 냄새나고, 고함치는 여자 교장처럼 잔혹한 남자이거나. 딱 한 번 잔혹한 악당이 승리하는 작품도 있지만 어떤 건지는 알려드릴 수 없다. 짧은 소설이라 제목이라도 노출하면 그대로 결말 자체가 드러나는 꼴이라서.


  예를 하나 들어보자. 첫 작품 <목사의 기쁨>에 나오는 주인공 시럴 워닝턴 보기스의 직업은 목사가 아니다. 목사 명함을 파서 뿌릴지언정 그냥 골동 가구 판매상이다. 우연히 시골에 갔다가 차의 팬벨트가 끊어지는 바람에 들른 농가에서 첫 경험을 한다. 거, 야한 생각 하지 마시라. 여자 혼자 있는 집에 들어가기는 했는데 거실에 대단히 훌륭한 고가구가 좋은 상태로 놓여 있는 것을 발견해서, 그게 명품인지 꿈에도 모르고 사는 여자한테 거의 헐값에 건네받아 무척 비싸게 팔아먹은 경험을 말하는 거니까. 빙고! 보기스가 속으로 이렇게 외쳤겠지. 그리하여 지도를 한 장 사서 이후 런던 인근의 시골지역을 정사각형으로 쪼개어 샅샅이 뒤지고 다니며 똑 같은 짓을 시작했다.

  영국이나 우리나라나 뭐 거의 비슷하게 시골 사람들이 보수적인 구석이 많다. 의심도 많고. 어떻게 하면 그들의 경계심을 누그러뜨릴 수 있을까 궁리하다가 생각해낸 것이 영국 국교회 목사 옷을 한 벌 지어 입고 자기가 목사인 척하는 거였다. 이 찌질한 보기스 사장의 철칙은 아무리 작은 돈이라도 철저하게 깎을 수 있을 때까지 깎아서 가장 싸게 가구를 구입해, 받을 수 있는 최고의 돈을 받고 파는 것. 그래서 시골 농가를 뒤지며 농부들한테도 마구, 마구, 또 한 번 마구 값을 후려친다. 그럴려면 농부의 집에 있는 가구가 아무리 명품 itself라고 하더라도 아주 하잘것없는 하품으로 말해야 한다.

  그러다가 하루는 남자만 있는 농가에서 영국의 가구 장인, 마치 건축가 하면 크리스토퍼 렌을 떠올리듯, 역사상 가장 훌륭한 가구 장인인 토머스 치펀데일이 자필로 써준 영수증이 첨부된 진짜배기 고가구 명품을 발견한다. 이 장면만 딱 써 놓으니 별 감정이 없겠지만 정말로 작품 전체를 읽어보면 이미 게임이 어떻게 끝날 지 눈에 훤히 보이는 걸 워쪄? 그래도 재미있는 건 또 어떻게 할 건데?

  <목사의 기쁨>에서는 한 찌질이의 사기행각만 이야기하는데, 역시 달의 진가는 사기를 포함한 내기에 있다. 미리 짜고 또는 알고 하는 내기도 있고, 상상이 힘든 내기도 있다. 아오, 정말 읽어보셔야 할 터인데. 오늘은 내가 약한 샘플만 소개하고 마는 거 같아서 이렇게라도 좀 더 보태야겠다.

  <목사의 기쁨>을 포함해 모두 여덟 편의 단편소설이 실려 있다. 다 재미있다. 물론 감동/동감하고는 다른 재미를 말한다. 그러면 됐지 뭘 더 바래, 그지? 딱 재미만 생각하고 읽어도 좋은 건 좋은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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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olcat329 2026-05-02 08:4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십여 년 전에 읽었는데도 첫 번째 이야기의 그 사기꾼 생생하게 기억이 납니다. 이 책 진짜 재밌게 읽어서 친구들에게 선물도 몇 번 했네요. ㅎㅎ

Falstaff 2026-05-03 05:39   좋아요 1 | URL
앗 그러셨습니까. ㅎㅎㅎ 재미 하나는 끝내주더군요.
내달엔 <헨리 슈거> 올릴 건데 단연 <맛>이 훨씬 재밌습니다!
 
오블리비언 알마 인코그니타
데이비드 포스터 월리스 지음, 신지영 옮김 / 알마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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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데이비드 포스터 월리스는 알마 인코그니타 시리즈에서 나온 <끈이론>으로 처음 이름을 들은 후에 알마 보다 먼저 이이의 에세이집을 펴낸 바다출판사 표지로 얼굴을 익혔다. 면도를 하지 않아 고슴도치 털이 솟은 뺨과 턱, 그리고 이마를 넓은 스카프로 가린 안경 쓴 남자. 에세이스트인 줄 알고 그냥 그런가보다, 넘어갔다. 그러다가 새삼스레 이이의 작품을 뒤져 《오블리비언》은 에세이가 아니라 소설집이라는 걸 발견해 득달같이 읽은 것. 왜 이 시점에 월리스를 검색해보았느냐 하면, 한국에서 미국으로 이민간 엄마를 둔 유대계 미국 작가 개브리얼 제빈이 쓴 재미있는 책 <섬에 있는 서점>에서 인도 출신 주인공이자 책 가게 주인인 A.J.가 한 출판사 영업사원 하비 로스가 죽기 전까지 하비와 더불어 책에 대한 깊은 대화를 많이 했는데 하비만큼 A.J.와 뜻이 같은 독자가 없었다는 거였다. 딱 한 명의 작품 데이비드 포스터 월리스가 쓴 <끝없는 농담Infinite Jest>만 빼고. A.J. 역시 좋은 작품이라는 것은 알겠으나 그건 하도 어렵고 길기까지 해서 일주일에 걸쳐 다 읽은 다음에 <끝없는 농담>이 후진 작품이라고 한다면 자신이 일주일을 날려버렸다고 자백하는 꼴 밖에는 안 되는 셈이라 그렇단다. 반면에 하비 로스는 그냥 최고의 작품이라고 거품을 물었다나? 그래서 나도 <끝없는 농담>을 읽으려고 검색을 해봤더니, <끈이론>을 쓴 에세이스트 그 월리스가 이 월리스였다는 거 아냐?

  책 읽는 것도 이렇게 꼬리를 문다.

  어느 광고에서 <내일 또 내일 또 내일>이 21세기 좋은 책 100권 안에 든다는 얘기를 듣고 책을 읽다가 그게 재미있어서 개브리얼 제빈의 다른 책 <섬에 있는 서점>을 읽었는데, 이번엔 책 속 주인공과 등장인물이 입에 침을 튀며 입씨름을 하는 작품을 검색해보고, 그 책이 없으니 같은 작가가 쓴 다른 작품을 꿩 대신 닭인 셈치고 골라 읽는 연쇄 책살인마?


  우리식으로 말하면 빠른 1962년생 데이비드 포스터 월리스. 가운데 이름 포스터는 외갓집의 성씨를 가져온 거다. 나기는 뉴욕 북부에서 나고, 어린 시절은 엄마 아빠가 교수를 해서 먹고 사는 일리노이주 샴페인-어배너에서 자랐다. 거기가 어딘가 하면, 시카고에서 남쪽으로 고속도로를 한 네댓 시간 운전하면 나올 듯싶다. 아빠가 일리노이 대학 샴페인-어배나 캠퍼스 철학교수, 엄마는 파크랜드 칼리지 영어교수. 괜찮은 집에서 자란 월리스는 청소년 시절에 지역 챔피언급 청소년 테니스 선수를 지낼 정도로 스포츠에 조예가 깊은 공부 잘 하는 학생이었던 듯. 대학에서는 영어와 철학을 전공해, 워낙 공부를 잘 하니까 철학 교수들은 월리스가 철학자가 될 줄 알았고, 영어 교수들은 소설가가 될 줄 알았는데 결국 문학을 택한 우울증 환자. 공부 잘하면 뭐하니, 운동 잘 하면 뭐하고. 그냥 좀 찌질해도 우울증 같은 거 모르고 그저 그냥 그런가보다 하는 마음으로 늘 웃고 사는 게 장땡이다. 남들이 뭐라 하든 말든.

  그리하여 이이는 평생 죽음, 특히 자살의 방법에 관해 뇌를 쓰다가 결국 2008년 자신이 그토록 바랐던 바와 같이 스스로의 삶을 스스로 종결시켰다. 세상에 우울증 증세가 없는 사람이 도대체 몇 명이나 있을까? 나도 우울증 증세가 좀 있는데, 솔직히 말해서, 딱 죽기를 결심하지 않을 수준 정도인 거 같다. 죽고는 싶은데 적극적으로 죽을 준비는 되어있지 않은 상태. 우울증이라고 다 죽어버리면 세상 인구 절반은 사라지지 않을까? 하여간 월리스처럼 똑똑한 사람이라도 좀 오래 살면 좋았을 텐데.


  이 책은 그래서 진입장벽이 높다. 특히 제일 앞에 실린 <미스터 스퀴시>가 그렇다. 명색이 단편소설인데 순분량純分量이 104쪽에 이르고, 당신이 펴는 페이지에는 온통 한 가득 활자만 빽빽하게 들어차 여백 구경을 하기도 힘든다. 숱하게 쏟아지는 영어 알파벳 약자들의 파도에 한 번 휩쓸렸다 하면 하다못해 몸을 의지해 떠내려가고 싶은 판자때기도 한 조각 발견하기 쉽지 않은 진퇴양난. 도서관 열람실에 앉아 하루 종일 이 책 껴안은 채 기껏 104쪽 읽고 퇴근했다. 그래, 그래. 중간에 CJ컵밥 철판김치볶음밥 하나 까먹었다. 이 책에 별점을 주면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내 과실로 하나를 감할 수밖에 없다.

  <미스터 스퀴시>는 리즈마이어 셰넌 벨트 광고회사 19층에 있는 회의실에서 리즈마이어 셰넌 벨트가 근 몇 년간 독점적으로 계약을 맺어온 최첨단 시장조사기관인 ‘팀Δy’의 포커스 그룹의 회의를 하는 이야기이다. 근데 아쉽게도 35년간 회사 사무실밥을 빌어먹었어도 이들이 도무지 무슨 말을 하고 있는 지 감이 잘 잡히지 않는 거였다. 그래서 읽으면 읽을수록 뇌 세포가 뒤틀리다가 나중에는 비틀리면서 머리 가죽과 두개골 사이의 막이 막 당기는 듯한, 말하자면 편두통 증세까지 생기는 것이었으니, 편두통을 참으며 중간에 세 번 오줌 누고, 물 마시고, CJ컵밥 철판김치볶음밥 한 번 먹었더라도 그것 빼고는 줄곧 딱딱하고 찬 의자에 앉아 혹시 치질 도지는 게 아닐까 조금 걱정까지 하면서 꾸역꾸역 읽었더니 기진맥진, 집으로 돌아갈 수밖에. 한 시간에 스무 페이지도 읽지 못할 정도였으니 에휴, 젊어서 이렇게 공부했으면 지금 못해도… 주접을 떤다, 주접을.

  소설집 《오블리비언》의 제일 앞에 이런 고난도 작품을 배열한 이유는 뭘까? 일종의 액땜? 이걸 견딜 수 있는 자들만 다음 작품을 읽기 시작하라는 경고? 아이고, 내가 출판사 사장이라면 제일 재미있고 길지 않은 작품을 제일 앞에다 배열하고 <미스터 스퀴시>는 저 뒤에 가져다 놓겠다. 그래야 독자들이 읽다가 팍 질리지 않아, 거 재미있군, 이러다가 끝판 가서 제대로 뒤통수 한 방 맞지. 그러면 다만 몇 권이라도 더 팔릴 거 아니냐고. 보아하니 책 또는 실린 작품들의 질에 비해 별로 팔리지 않는 것 같더구먼.


  나도 <미스티 스퀴시> 읽고 질려서 그날 쐬주 한 병 까고 말았는데, 쐬주 한 병이 발렌타인 세 잔을 보태게 만들어 다음날 숙취에 절어서 다리가 후들거렸는지, 아니면 또다시 《오블리비언》을 읽을 생각으로 잔뜩 겁에 질려 그러했는지 떨리는 걸음으로 도서관 사물함에서 《오블리비언》을 꺼내 드디어 두번째 작품을 읽기 시작했는데, 이건 또 뭐야, 심지어 재미있잖아? 제목은 <영혼은 대장간이 아니다>.

  고등학교 교실을 무대로 한 작품인데 이걸 코미디라고 해야 하나, 트래저디라고 해야 하나 모르겠다.

  일찍이 ‘나’는 프랭크 캘드웰, 크리스 드매테이스, 맨디 블램과 함께 ‘무자각적 인질 4인방’이라 불리게 된 교실에서의 사건을 이야기한 작품이다. 화자 ‘나’는 나중에야 공부를 잘 해 대학 교수도 되고 철학자 비슷한 소설가도 되고, 인생이 무상하여 46세 되는 해에 자살해버릴 정도로 천재 비슷하지만, 당시엔 집중력 부족과 산만한 성격 때문에 교실에서도 창가에는 절대 앉히지 않는 문제 학생이었다고. 그런데 교사 한 명이 임신과 출산 때문에 휴직하고 대신 들어온 소위 기간제 교사가 ‘나’에 대해 잘 몰라 ‘나’를 창가에 앉히고 말았다. 학교가 아마추어 야구장과 멀지 않은 이유로 가끔 공이 날라오거나 길거리 애들이 돌을 던져 유리창을 깨는 일이 많아 그걸 방지하느라 상대적으로 좀 덜 촘촘한 철망을 유리에 덧댔는데, 독자가 척 봐도 머리 좋아 앞으로 대학교수도 하고 철학자겸 소설가도 될 ‘나’는 철망의 작은 사각형 하나하나마다 무슨 이야기를 만들고 있는 것 같다.

  짓궂게도 처음 창밖으로 본 장면이 큰 개와 작은 개가 교미를 시작하는 순간부터 거의 모든 진행과정을 상세하게 관찰하는 일이었지만, 점점 규모가 커져 카오스의 경지에 이른다. 왜 ‘무자각적 인질’이라 했느냐 하면, 기간제 교사께서 일종의 발작을 해 학생들이 비명을 지르며 한꺼번에 교실을 탈출할 때, 좀 덩치가 작은 학생 몇 명이 넘어져 넘어진 학생을 마구 짓밟으면서 탈출해야 할 정도의 급박한 상황이 도래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냥 자리에서 광경을 멀거니 바라다만 보고 있던 네 명의 찌질이 가운데 하나라는 뜻이다. 상황을 보면 얘네들 역시 얼른 위험을 피해 달아나야 했을 것 같은데 말이지.


  내가 이 책을 다 읽은 건 맞는데, 그래도 좀 아쉬운 게 있다. 나름대로 재미있고 인상깊게 읽은 책이라는 건 분명하다. 하지만 지금 말고, 시간이 좀 지난 다음에 다시 한번 읽으면 훨씬 더 재미있게 읽을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든다. 이 책은 한번 읽고 말 것이 아니라 책장에 꽂아두고 혹시 불면증이란 것이 생긴다면 불면의 밤을 하얗게 새우지 말고 이 책이나 읽으면서 키득거리는 것도 아주 훌륭한 방법이 될 듯하다. 늘 침대 탁자 서랍에 넣어두어도 좋을 책.

  이렇게 말한다고 이 책이 사람을 침잠시키거나, 안정시키거나, 수면에 도움을 줄 정도로 지겨운 책이란 말은 아니다. 어차피 잠 못 자는 밤, 엣다 모르겠다, 그냥 제대로 골머리 한 번 썩여보자는 것이지.

  그러면서 한 편으로 우울한 책. 조심해서 읽어야 할 독자도 분명히 있을 터. 그런 사람은, 접.근.금.지.

 여전히 하고 싶은 말은, 그래도 대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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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6-05-01 11: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기대됩니다. 컵밥 준비하고 읽겠습니다!

Falstaff 2026-05-01 17:47   좋아요 0 | URL
기대하셔도 좋습니닷!
 
태초의 냄새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49
김지연 지음 / 현대문학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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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해연습>을 재미있게 읽어 김지연을 좀 더 읽어봐야겠다, 싶은 마음이 있었다. 근데 이번에 또 이이를 고른 것은 그것 때문이 아니었고, 작가한테는 좀 미안하지만 백땡땡하고 헛갈려서 고른 책이다. 즉 백땡땡을 읽으려 도서관에 갔다가 백땡땡인줄 알고 김지연의 <태초의 냄새>를 가져왔다는 것.


  냄새 이야기. 이 감각을 우리말 “냄새”라고 하면 보통 악취를 연상한다. 좋은 쪽으로 냄새는 “향기” 또는 “방향”이라 표현한다. 꽃냄새하고 꽃향기, 어느 쪽을 선택할까? 이번달에 쓴 독후감에 한 번 이야기했듯이 알파치노가 탱고를 추는 영화의 제목을 <여인의 향기> 대신 <여인의 냄새>라고 했으면 어땠을까? 보통 ‘냄새’는 안 좋은 상태를 드러낼 때 쓰는 단어로 추락했다. 똥 냄새, 겨드랑이 냄새, 쓰레기 냄새, 땀냄새, 배꼽 때 냄새. 또 아랫도리에서 나는 오징어 꼬랑 냄새 등등.

  김지연의 <태초의 냄새>도 이런 의미에서 제목부터 뭔가 더러운 감각을 포함하고 있다. 근데 앞의 단어 “태초”에 워낙 무게가 있어 독자가 잠깐 잊고 있게 만들 뿐.

  냄새를 맡지 못해도 문제다. 비염이 극심해 후각을 상실한 사람도 있다. 나도 봤다. 그가 말하기를, 아주 독한 냄새가 나는 화장실에 가도 자기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거다. 냄새가 나지 않으니까. 지독한 암모니아 가스 때문에 눈이 지물거리기는 해도 냄새는 안 난다나? 염병할 거, 좋기도 하겠다. 근데 음식 맛은 또 기가 막히게 알던걸?


  최근 세계사 적으로 세계인들의 후각이 잠시나마 멈춘 적이 있었다. 중국에서 발생해 순식간에 전세계로 퍼진 COVID-19. 코로나 감염의 대표적인 후유증이 일시적인 후각 상실이었다. 심한 사람은 미각도 상실했다던데. 난 코로나 걸려보지 않아 모르겠지만 하여간 그랬다며. 김지연이 여기서 힌트를 받은 모양이다.

  K. 어린시절 집안이 쫄딱 망했는지, 부모가 점점 원수지간이 되어 그랬는지 K는 오랫동안 시골/산골의 외갓집에 맡겨졌다. 어릴 때부터 냄새에 민감했던 모양이다. 무당벌레처럼 반들반들한 겉껍데기를 가진 곤충을 엄지와 검지로 잡아 지그시 눌렀을 때, 곤충이 버둥대며 몸이 터지면서 체액이 비져나와 풍기는 냄새. 이 계집 아이는 그런 냄새에 익숙했다. 곤충만 보면 눌러 죽이고, 개울 속 도롱뇽 알을 보면 흙 위로 집어던져 바싹 말려 죽이던 K. K가 P와 함께 캠핑을 왔다. 캠핑을 간 게 아니라 “왔다”라고 했으니 작품은 현지에서 벌어진 일이다.

  원래는 K하고 P는 태국으로 여행을 가기로 했다. 이제 비행기만 뜨면 되는데 코로나가 터졌다. 비행기는 뜨지 않았고, 설상가상 P가 감염이 되어 자가격리를 거쳤으며, K는 P가 격리기간을 끝내자 뒤따라 감염됐다. 그것도 P는 재택근무 중에. 회사의 팀장은 뭐라 생각했을까? 병 걸리지 말라고 재택근무 시켰더니 덜컥 걸려? 그것 참. 하여간 그래서 P는 괜찮은데 K가 냄새 감각에 문제가 생겼다. 자가 격리 기간이 끝나면 또 무슨 조치/검사를 받아야 했던 모양이지? 아직 검사를 받지 않은 상태에서, 즉 K가 코로나를 끝냈는지 확실하지 않은 상태에서 P와 함께 비 오는 바닷가 캠핑장으로 1박2일 여행을 왔다.


  처음부터 냄새 타령이다. K와 P가 차의 트렁크에서 와인을 꺼내 캠핑용 스테인레스 와인 잔에 따라 마신다. P는 혹시 운전할 일이 있을 지 모르니까 K만 마신다. 와인에서 K한테 익숙한 죽어가는 곤충의 냄새가 난다. 차 안에서 마신다. 비 오고 바람부는 날. P의 선배한테 빌려온 텐트 속에서는 쉰내가 심하게 나서 아무래도 차에서 자야할 거 같다. 싸구려 와인 냄새, 곤충 몸 터지는 냄새, 텐트 속 쉰내. 냄새, 냄새, 냄새.

  K의 외할머니가 말했다. 아주 오래 산 사람은 자신만의 냄새를 갖기 마련이라고. 날 때부터 누구나 냄새를 갖지만 살다 보면 점점 더 자신에게 꼭 맞는 냄새를 갖게 되는 것일 수도 있다고.

  냄새를 말하는 자. 좀 웃기다. 자기한테는 냄새가 나지 않는 것처럼.

  태초에 냄새가 있었다. 그게 어떤 냄새였을까? 기억 속 할머니가 말한다. 정말 고약한 냄새겠지.

  김지연의 할머니는 어떤 사람일까? <새해연습>에서 나오는 글 좋은 일기를 백권 넘게 남긴 할머니? 지독한 냄새를 피우며 태초가 생겼을 거라 생각하는 할머니? 다 합하면 사람 사는 일, 그게 일기이거나 태초부터 이어져 내려온 것이거나 고약한 냄새를 풍기다 간 할머니? 설마.


  K와 P는 장거리 연애중이다. 태국에 가지 못했으니 짧게 여행이라도 해야 한다고 해서 아직 여행할 수 있는 법적 조건에 맞지는 않지만 P의 선배한테 텐트 빌리고, 오빠한테 차를 빌려 K가 사는 도시 근처 해변에 온 거다. K는 원래 S의 애인이었다. 셋이 친했는데 둘은 연인이었고 셋은 친구였다. 그러다가 S가 5년 전에 죽었다. 흠. 코로나는 2019년. 5년 전인 2014년에는 세월호인데. 또? 어제 읽은 <섬에 있는 서점>의 주인 AJ처럼 나도 “큰 규모의 심각한 비극에 관한 소설”은 마뜩찮건만….

  근데 아니다. 그냥 죽었다. 그 후에 자연스레 P가 S의 자리를 대신했다. 아직 S의 기일이 오면 K는 P와 함께 그의 납골묘를 찾는다. 그건 그거다. 즉 S는 그냥 쓸데없이 한 번 등장하고 사라진다.

  잠깐 텐트에 가보니 텐트 안에 뱀이 한 마리 들어와 있다(웃긴 장면이다). 기겁을 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뱀은 여간해 나가려 하지 않는다. 김이 팍 샌 둘. 이들은 이미 컴컴해지기 시작한 해변에서 드라이브를 선택한다. 와인을 마시지 않은 P가 운전을 하고 시내를 돌아다니다가 조명이 하나도 없는 건물을 발견해 그쪽으로 향한다. 가서 보니 10층 아파트 건물. 공사를 하다 중간에 그만 둔 을씨년스러운 흉물. 지방도시에서 간혹 볼 수 있다.

  건물 앞에 차를 세운 P가 건물 7층에 올라가보잖다. 미쳤다. 저녁이라 컴컴하면 건물 속은 깜깜할 테고, 아직 내장은 손도 대지 않았을 터이니 계단 손잡이도 설치되지 않아 발 한 번만 삐긋해도 그냥 아래로 떨어질 것인데 거기를 여자 둘이서 올라가보자고? 소설이니까 가능한 거라고? 그렇게 우기지 마시라. 억지로 이야기를 만들려다 보니까 이렇게 무리를 하는 거다. 그래야, 딱 7층까지 가야 거기서 비닐을 깔고 자는 남자 고등학생을 만날 수 있으니까. K나 P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남자 고등학생.

  사건이 터질 거 같지? 걱정하지 마시라. 안 터진다.

  대신 엉뚱하게 K가 고딩한테 묻는다. 배 안 고프니? 밥 먹을래? 이것도 좀 웃기지 않아? 당신 같아도 기꺼이 그렇게 할 거 같나? 나는 도무지 공감이 가지 않더라고.

  한 번 더 겁나게 웃긴 게, 고딩이 배달하는 친구한테 주문해 득달같이, 7층에서 걸어 내려오는 것보다 빨리 건물 앞에 곱도리탕을 가져다주고, 그걸 들고 다시 해변으로 와서 먹는다. 그 새 텐트 안의 뱀이 사라졌고, 코로나로 자가격리 기간임에도 방이 하나라 집에 있을 수 없어 폐건물 7층에서 혼자 자던 고딩 아이가 잠깐 텐트 안에서 자다가 집에 간다.

  그러다가 갑자기 악취 속에 빠져버리는 K. 작가 천희란은 작품해설에서 좋은 말을 좌르륵 해 놓았지만 나는 작품은 물론이고 작품 해설조차 도무지 무슨 뜻인지 알아먹지 못하겠다. 그래서 뭘 주장하는 거야? 어쨌거나 다음엔 꼭 백땡땡을 읽어봐야지. 다음번 책이 백땡땡이라는 게 아니고, 그냥 그렇다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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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에 있는 서점
개브리얼 제빈 지음, 엄일녀 옮김 / 문학동네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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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쉬케나지 유대인 아빠와 한국인 이민자 엄마 사이의 77년생 외동딸. <내일 또 내일 또 내일>이 재미있어서 두 번째 제빈을 골랐다. <내일 또 내일 또 내일>에서는 남자 주인공이 제빈처럼 유대인 아빠, 한국인 엄마 사이의 외아들이었는데, <섬에 있는 서점>의 남자 주인공은 인도계 미국인, 여자 주인공은 흔히들 백인이라 부르는 종족. 이들이 키우는 입양아는 흑백 혼혈. 역시 복잡하다.


  책은 여자 주인공 어밀리아 로먼의 등장으로 시작한다. 나이틀리 출판사의 영업사원. 전임자 하비 로스가 죽어 그의 후임으로 들어왔다. 신입인지 경력인지는 모르겠지만 하여간 연봉 3만7천달러에 성과급 보너스 별도 조건으로 도장 찍었다. 문제는 성과급 받는 직원이 이 업종에서 나온 지 한참 됐다는 것이지만. 그리하여 올 겨울 출판 기획에 관한 팜플렛과 가제본 몇 권을 들고, 이걸 다 넣은 숄더백의 무게가 20kg을 가볍게 넘지만 워낙 건장한 에밀리는 별로 힘도 들이지 않고 보스턴에서 기차를 타고 와 다시 페리로 갈아타 도착한 앨리스 섬의 유일한 서점인 “아일랜드 서점”에 도착한다.

  아일랜드 서점으로 말할 것 같으면 연매출 35만달러 대부분이 피서객 몰리는 여름철에 집중되는 17평 정도의 2층 책가게다. 1층은 책방과 카운터, 사무실. 2층은 주인 AJ의 생활공간. 이름하여 주상복합? 근데 책방이 조그맣고 까다로운 서점으로 소문이 났다. 하지만 씩씩한 서른한 살의 긍정왕 어밀리아, 에밀리는 특별히 까칠한 주인에게 강점을 가졌다고 자평한다. 소설 속에서 에밀리의 휴대폰을 제일 먼저 울리게 한 남자는 보이드 플래너건. 온라인 소개팅 사이트에서 만나 잘 안 된 세번째 남자다. 그가 제안한다. 다시 만날래요? 보이드는 오래된 것, 골동품, 집, 개, 사람을 싫어한단다. 이것 빼고는 자기하고 맞는 거 하나도 없는 남자. 에밀리의 신념은 감수성과 관심사를 공유하지 못하는 사람과 살 바에는 혼자 사는 것이 낫다는 것인데 보이드가 딱 그런 사람이다. 이 말을 독자에게 하고 싶어 보이드를 출연시켰다. 당연히 독자는 이후 보이드의 꽁무니도 구경할 수 없다.


  아일랜드 서점의 주인 AJ 피크리. 인도 사람의 경우에 이름이 하도 복잡하고 길면서 발음하기도 어려워 그냥 A.J. 이렇게 쓰는 것이 훨씬 좋다. 나는 A.J.도 귀찮아서 점 안 찍고 그냥 AJ라고 하겠다.

  AJ. 39세 홀아비. 컬럼비아 대학의 대학원에서 영문학 박사 과정을 밟고 있던 중에 대학원생 니콜을 만나 서로 사랑했다. 사랑이 지극했다. 하루는 니콜이 AJ에게 자기가 태어나 대학입학 전까지 자란 고향, 앨리스 섬에 들어가 살지 않겠느냐고 제안했다. 뭐 해서 먹고 살려고? 섬에 책방이 한 군데도 없거든. 책방이 없는 곳은 사람 사는 동네가 아니라고. 영문학 박사 지망생이었던 AJ가 생각하기에 그럴 듯한 말이다. 이 말이 어느 책 속에서 나오는 말이라고 <섬에 있는 서점>에 쓰여 있다. 근데 잊었다. 문학을 좋아하는 AJ가 서점 주인을 하면 평생 책을 읽으며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둘은 일단 결혼하고, 니콜이 부모에게 유증받은 돈도 보태 작은 책방을 열어 섬에 들어와 살게 된 것.

  근데 니콜이 죽었다. 21개월 전에 작가의 날 행사를 하고 작가를 집까지 데려다 주고 오다가 마지막 페리를 놓치지 않기 위해 과속을 했든지, 길가에서 갑자기 뛰쳐나온 사슴을 치지 않으려 핸들을 꺾었는지 그 추운 겨울날 차가 얼어붙은 호수의 얼음을 깨고 처박혀버렸던 거다. 임신 2개월이었던 니콜이 운전한 차가.

  이제 홀아비가 된 AJ. 도무지 혼자 서점을 운영할 수 없어 아르바이트 여고생 몰리 클럭을 들였다. 성실한 것 같지는 않지만 적어도 전혀 물건을 훔쳐가지 않는다. 아무리 사소한 것일지언정. 작가 초청 행사 같은 건 아예 생각도 하지 않았고, 니콜이 살았을 때처럼 독서클럽 운영 같은 것도 신경쓰지 않았다. 성격은 더욱 까칠해지기만 했고 음식은 인도인이니까 주로 즉석 카레 같은 가공품이나 냉동식품을 먹는 둥 마는 둥 깨작거리는 수준이었다. 대신 다량 복용, 섭취한 것이 신의 눈물, 술이었다. 주종 불문, 청탁淸濁 불문, 강약 불문. 그래서 척 보면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아 보인다.


  하필이면 첫 출장지로 고른 책방이 이런 곳이니 에밀리 팔자도 참.

  에밀리가 명함을 내밀자마자 AJ가 대꾸하기를, 하비는 어디 갔소? 죽었는뎁쇼. 죽었다? 몰랐네. 어찌 전화 한 통 없었을까? 온라인에도 게시했고, 메일도 보냈을 겁니다.

  AJ는 메일 같은 건 아예 읽어보지도 않고 지워버린다. 니콜이 죽은 다음부터 늘 그렇다. 에밀리는 몰랐겠지. 하비 로스로 말할 거 같으면 6년 동안 그가 이 책방에 들를 때마다 몇 시간씩 함께 책 이야기를 하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는 것을. AJ와 완전히 취향을 공유했던 유일한 사람이 하비였는데 그가 죽었으니 심통이 나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지만 그걸 어밀리아 로먼, 에밀리가 알 턱이 없다. AJ와 하비가 공유하지 못한 유일한 작품이 데이비드 토스터 윌리스의 <한없는 웃음거리>. 이 문단을 읽은 순간 나는 허겁지겁 나 사는 도시의 다른 도서관에 그의 작품집 《오블리비언》을 상호대차 신청해 지금 읽고 있다는 거 아닌가! 그러거나 말거나 에밀리는 영업을 시작하지만 AJ의 입에서는 거친 말만 쏟아진다.


  좋아하는 거? 싫어하는 걸 말하면 어떨까요? 나는 포스트모더니즘과 종말물, 죽은 사람이 화자거나 마술적 리얼리즘을 싫어합니다. 딴에는 기발하답시고 쓴 실험적 기법, 이것저것 번잡하게 사용한 서체, 없어야 할 자리에 있는 삽화 등 괜히 요란 떠는 짓에는 근본적으로 끌리지 않습니다. 홀로코스트나 뭐 그런 전 세계적 규모의 심각한 비극에 관한 소설은 다 마뜩찮더군―부탁인데 논픽션만 가져와요. 문학적 탐정소설이니 문학적 판타지니 하는 장르 잡탕도 싫습니다. 문학은 문학이고 장르는 장르지, 이종교배가 만족스러운 결과물을 내는 경우는 드물어요. 어린이책, 특히 고아가 나오는 건 질색이고, 우리 서가를 청소년물로 어수선하게 채우는 건 사양하겠습니다. 사백 쪽이 넘거나 백오십 쪽이 안 되는 책도 일단 싫어요.


  뒤로 더 이어지는데 다 인용했다가는 저게 지금 독후감 쓰기 싫어서 이 지랄이지, 이런 말 들을까봐 여기서 멈췄다. 근데 이어지는 것 중에서 중요한 게 하나 빠졌으니 “난 무엇보다 말이죠, 별볼일 없는 노인들이 별볼일 없는 자기 아내가 암으로 죽었다고 끼적거린 얄팍한 회상록은 도대체 참을 수가 없더군요.”라고 말한 것이 있다.

  크. 정곡을 짚었다. 어밀리아가 아일랜드 서점에 오면서 적극 추천하려고 했던 책이 자기가 읽으면서 눈물을 철철 흘렸던 <늦게 핀 꽃>이란 건데, 평생 독신으로 살다가 일흔여덟의 나이에 결혼해, 2년 후에 암에 걸린 아내를 보낸 남자의 회고록이었던 거다.

  어떻게 됐을 거 같은가? 당연히 거의 쫓겨났다. 그런데, 이 둘 사이에 뭔가가 있을 거 같은데 하도 오래 어밀리아가 작품 속에 등장하지 않아 역시 엑스트라였나? 싶은 즈음에 AJ가 어밀리아에게 앨리스 섬에서 두 번째로 근사한 해물전문 레스토랑에서 점심을 대접하기에 이르니 바로 우연히, 정말 우연히 <늦게 핀 꽃>을 읽은 다음이었던 거다. 근데 그건 그거고.


  AJ가 벼룩시장에서 발견한 보물이 하나 있다. 에드거 앨런 포가 18세 때 처음으로 출간한 익명 시집 《태멀레인》 초판. 딱 50부만 찍어 이것처럼 표지가 멀쩡하면 적어도 4십만달러는 충분히 받을 수 있다. 그걸 유리 금고에 보관해 지금처럼 잔뜩 취한 상태에서 가끔 꺼내 별로 잘 쓰지도 못한 시를 읽어보는 걸 낙으로 삼았다. 혼자 살아봐라. 자기가 싼 똥은 반드시 자기가 치워야 하고, 속상하든 말든 아무도 신경쓰는 사람이 없다.

  이날도 어밀리아를 보내고 잔뜩 취해 곳곳에 구토를 하다가 시집을 꺼내 몇 수… 읽기나 했나, 그냥 쳐다보고 말았겠지, 금고를 닫지 않고 자빠져 자버렸다. 아이고, 아침에 일어나보니 누군가 서점에 들어와 AJ 본인이 벽에다 집어던진 카레 먹던 거, 구토 토사물 같은 걸 깨끗하게 치워놓고 그 값으로 그랬는지 《태멀레인》을 훔쳐가버렸다. 곡소리 났겠지? 조만간에 그것도 팔고, 서점도 팔아 따뜻한 플로리다쯤에 가서 편안하게 죽으려 했건만.

  대신 누군가 어린 갈색 천사를 책방에 두고 갔다. 경찰에 신고하고 보호시설로 보내려다가 아이가 너무 예뻐서 AJ가 직접 키우기로 했는데, 앨리스 섬의 착한 주민들이 적극적으로 도와주면서, 책방에 오면 그냥 오나, 책도 한 두 권씩 사가기 시작했다. 이건 크고 작은 여러 도서모임 결성으로 이어지고, 당연히 독서회도 이 아일랜드 서점에서 열리게 되는데, <늦게 핀 꽃>으로 인연이 이어진 어밀리아 로먼, 그리고 나이틀리 출판사의 책들도 많아지면서, 일이 점점 커지게 된다. 당연히 사랑도 싹이 트다가 점점 커지고, 우리의 어린 갈색 천사, 이름을 마야 태멀레인 피크리로 지은 갈색 천사도 점점 성장해가며 아름다운 앨리스 섬, 아름다운 주민, 아름다운 서점, 아름다운 가족을 이룬다.

  우리 독자들은 그냥 즐겁게 읽으면 된다. 세상에 이런 낙원은 절대로 없으니 이런 곳에서 살아볼까, 하는 꿈만 꾸지 않으면 된다. 그래서 누구나 읽는 동화책 정도로 여겨도 마땅한 착한 책. 개브리얼 제빈도 될 수 있으면 재미난 묘사를 하려고 안간힘을 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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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6-04-29 13:1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게 지금 독후감 쓰기 싫어서 이 지랄이지,˝ 싶은 순간 멈춘 폴스타프 ㅋㅋㅋㅋㅋㅋㅋㅋㅋ

Falstaff 2026-04-29 15:52   좋아요 0 | URL
뭐 사는 게 다 거기가 거기 아녜요? ㅎㅎㅎ

다락방 2026-04-30 14:2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저 이거 되게 재미있게 읽었었는데, 폴스타프 님 리뷰 읽으니까 또 읽고 싶어졌어요!! 어른들을 위한 동화라는 것이 맞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가끔은 동화도 읽고 살아야 할 것 같아요. 이 책 영화로 나와도 너무 좋을 것 같아요.

Falstaff 2026-04-30 15:41   좋아요 0 | URL
저도 재미나게 읽었습니다. 그럼요, 동화도 읽어야지요. 잠깜이라도 위안을 받는 게 좋잖습니까, 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