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섬에 있는 서점
개브리얼 제빈 지음, 엄일녀 옮김 / 문학동네 / 2017년 10월
평점 :
.
아쉬케나지 유대인 아빠와 한국인 이민자 엄마 사이의 77년생 외동딸. <내일 또 내일 또 내일>이 재미있어서 두 번째 제빈을 골랐다. <내일 또 내일 또 내일>에서는 남자 주인공이 제빈처럼 유대인 아빠, 한국인 엄마 사이의 외아들이었는데, <섬에 있는 서점>의 남자 주인공은 인도계 미국인, 여자 주인공은 흔히들 백인이라 부르는 종족. 이들이 키우는 입양아는 흑백 혼혈. 역시 복잡하다.
책은 여자 주인공 어밀리아 로먼의 등장으로 시작한다. 나이틀리 출판사의 영업사원. 전임자 하비 로스가 죽어 그의 후임으로 들어왔다. 신입인지 경력인지는 모르겠지만 하여간 연봉 3만7천달러에 성과급 보너스 별도 조건으로 도장 찍었다. 문제는 성과급 받는 직원이 이 업종에서 나온 지 한참 됐다는 것이지만. 그리하여 올 겨울 출판 기획에 관한 팜플렛과 가제본 몇 권을 들고, 이걸 다 넣은 숄더백의 무게가 20kg을 가볍게 넘지만 워낙 건장한 에밀리는 별로 힘도 들이지 않고 보스턴에서 기차를 타고 와 다시 페리로 갈아타 도착한 앨리스 섬의 유일한 서점인 “아일랜드 서점”에 도착한다.
아일랜드 서점으로 말할 것 같으면 연매출 35만달러 대부분이 피서객 몰리는 여름철에 집중되는 17평 정도의 2층 책가게다. 1층은 책방과 카운터, 사무실. 2층은 주인 AJ의 생활공간. 이름하여 주상복합? 근데 책방이 조그맣고 까다로운 서점으로 소문이 났다. 하지만 씩씩한 서른한 살의 긍정왕 어밀리아, 에밀리는 특별히 까칠한 주인에게 강점을 가졌다고 자평한다. 소설 속에서 에밀리의 휴대폰을 제일 먼저 울리게 한 남자는 보이드 플래너건. 온라인 소개팅 사이트에서 만나 잘 안 된 세번째 남자다. 그가 제안한다. 다시 만날래요? 보이드는 오래된 것, 골동품, 집, 개, 사람을 싫어한단다. 이것 빼고는 자기하고 맞는 거 하나도 없는 남자. 에밀리의 신념은 감수성과 관심사를 공유하지 못하는 사람과 살 바에는 혼자 사는 것이 낫다는 것인데 보이드가 딱 그런 사람이다. 이 말을 독자에게 하고 싶어 보이드를 출연시켰다. 당연히 독자는 이후 보이드의 꽁무니도 구경할 수 없다.
아일랜드 서점의 주인 AJ 피크리. 인도 사람의 경우에 이름이 하도 복잡하고 길면서 발음하기도 어려워 그냥 A.J. 이렇게 쓰는 것이 훨씬 좋다. 나는 A.J.도 귀찮아서 점 안 찍고 그냥 AJ라고 하겠다.
AJ. 39세 홀아비. 컬럼비아 대학의 대학원에서 영문학 박사 과정을 밟고 있던 중에 대학원생 니콜을 만나 서로 사랑했다. 사랑이 지극했다. 하루는 니콜이 AJ에게 자기가 태어나 대학입학 전까지 자란 고향, 앨리스 섬에 들어가 살지 않겠느냐고 제안했다. 뭐 해서 먹고 살려고? 섬에 책방이 한 군데도 없거든. 책방이 없는 곳은 사람 사는 동네가 아니라고. 영문학 박사 지망생이었던 AJ가 생각하기에 그럴 듯한 말이다. 이 말이 어느 책 속에서 나오는 말이라고 <섬에 있는 서점>에 쓰여 있다. 근데 잊었다. 문학을 좋아하는 AJ가 서점 주인을 하면 평생 책을 읽으며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둘은 일단 결혼하고, 니콜이 부모에게 유증받은 돈도 보태 작은 책방을 열어 섬에 들어와 살게 된 것.
근데 니콜이 죽었다. 21개월 전에 작가의 날 행사를 하고 작가를 집까지 데려다 주고 오다가 마지막 페리를 놓치지 않기 위해 과속을 했든지, 길가에서 갑자기 뛰쳐나온 사슴을 치지 않으려 핸들을 꺾었는지 그 추운 겨울날 차가 얼어붙은 호수의 얼음을 깨고 처박혀버렸던 거다. 임신 2개월이었던 니콜이 운전한 차가.
이제 홀아비가 된 AJ. 도무지 혼자 서점을 운영할 수 없어 아르바이트 여고생 몰리 클럭을 들였다. 성실한 것 같지는 않지만 적어도 전혀 물건을 훔쳐가지 않는다. 아무리 사소한 것일지언정. 작가 초청 행사 같은 건 아예 생각도 하지 않았고, 니콜이 살았을 때처럼 독서클럽 운영 같은 것도 신경쓰지 않았다. 성격은 더욱 까칠해지기만 했고 음식은 인도인이니까 주로 즉석 카레 같은 가공품이나 냉동식품을 먹는 둥 마는 둥 깨작거리는 수준이었다. 대신 다량 복용, 섭취한 것이 신의 눈물, 술이었다. 주종 불문, 청탁淸濁 불문, 강약 불문. 그래서 척 보면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아 보인다.
하필이면 첫 출장지로 고른 책방이 이런 곳이니 에밀리 팔자도 참.
에밀리가 명함을 내밀자마자 AJ가 대꾸하기를, 하비는 어디 갔소? 죽었는뎁쇼. 죽었다? 몰랐네. 어찌 전화 한 통 없었을까? 온라인에도 게시했고, 메일도 보냈을 겁니다.
AJ는 메일 같은 건 아예 읽어보지도 않고 지워버린다. 니콜이 죽은 다음부터 늘 그렇다. 에밀리는 몰랐겠지. 하비 로스로 말할 거 같으면 6년 동안 그가 이 책방에 들를 때마다 몇 시간씩 함께 책 이야기를 하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는 것을. AJ와 완전히 취향을 공유했던 유일한 사람이 하비였는데 그가 죽었으니 심통이 나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지만 그걸 어밀리아 로먼, 에밀리가 알 턱이 없다. AJ와 하비가 공유하지 못한 유일한 작품이 데이비드 토스터 윌리스의 <한없는 웃음거리>. 이 문단을 읽은 순간 나는 허겁지겁 나 사는 도시의 다른 도서관에 그의 작품집 《오블리비언》을 상호대차 신청해 지금 읽고 있다는 거 아닌가! 그러거나 말거나 에밀리는 영업을 시작하지만 AJ의 입에서는 거친 말만 쏟아진다.
좋아하는 거? 싫어하는 걸 말하면 어떨까요? 나는 포스트모더니즘과 종말물, 죽은 사람이 화자거나 마술적 리얼리즘을 싫어합니다. 딴에는 기발하답시고 쓴 실험적 기법, 이것저것 번잡하게 사용한 서체, 없어야 할 자리에 있는 삽화 등 괜히 요란 떠는 짓에는 근본적으로 끌리지 않습니다. 홀로코스트나 뭐 그런 전 세계적 규모의 심각한 비극에 관한 소설은 다 마뜩찮더군―부탁인데 논픽션만 가져와요. 문학적 탐정소설이니 문학적 판타지니 하는 장르 잡탕도 싫습니다. 문학은 문학이고 장르는 장르지, 이종교배가 만족스러운 결과물을 내는 경우는 드물어요. 어린이책, 특히 고아가 나오는 건 질색이고, 우리 서가를 청소년물로 어수선하게 채우는 건 사양하겠습니다. 사백 쪽이 넘거나 백오십 쪽이 안 되는 책도 일단 싫어요.
뒤로 더 이어지는데 다 인용했다가는 저게 지금 독후감 쓰기 싫어서 이 지랄이지, 이런 말 들을까봐 여기서 멈췄다. 근데 이어지는 것 중에서 중요한 게 하나 빠졌으니 “난 무엇보다 말이죠, 별볼일 없는 노인들이 별볼일 없는 자기 아내가 암으로 죽었다고 끼적거린 얄팍한 회상록은 도대체 참을 수가 없더군요.”라고 말한 것이 있다.
크. 정곡을 짚었다. 어밀리아가 아일랜드 서점에 오면서 적극 추천하려고 했던 책이 자기가 읽으면서 눈물을 철철 흘렸던 <늦게 핀 꽃>이란 건데, 평생 독신으로 살다가 일흔여덟의 나이에 결혼해, 2년 후에 암에 걸린 아내를 보낸 남자의 회고록이었던 거다.
어떻게 됐을 거 같은가? 당연히 거의 쫓겨났다. 그런데, 이 둘 사이에 뭔가가 있을 거 같은데 하도 오래 어밀리아가 작품 속에 등장하지 않아 역시 엑스트라였나? 싶은 즈음에 AJ가 어밀리아에게 앨리스 섬에서 두 번째로 근사한 해물전문 레스토랑에서 점심을 대접하기에 이르니 바로 우연히, 정말 우연히 <늦게 핀 꽃>을 읽은 다음이었던 거다. 근데 그건 그거고.
AJ가 벼룩시장에서 발견한 보물이 하나 있다. 에드거 앨런 포가 18세 때 처음으로 출간한 익명 시집 《태멀레인》 초판. 딱 50부만 찍어 이것처럼 표지가 멀쩡하면 적어도 4십만달러는 충분히 받을 수 있다. 그걸 유리 금고에 보관해 지금처럼 잔뜩 취한 상태에서 가끔 꺼내 별로 잘 쓰지도 못한 시를 읽어보는 걸 낙으로 삼았다. 혼자 살아봐라. 자기가 싼 똥은 반드시 자기가 치워야 하고, 속상하든 말든 아무도 신경쓰는 사람이 없다.
이날도 어밀리아를 보내고 잔뜩 취해 곳곳에 구토를 하다가 시집을 꺼내 몇 수… 읽기나 했나, 그냥 쳐다보고 말았겠지, 금고를 닫지 않고 자빠져 자버렸다. 아이고, 아침에 일어나보니 누군가 서점에 들어와 AJ 본인이 벽에다 집어던진 카레 먹던 거, 구토 토사물 같은 걸 깨끗하게 치워놓고 그 값으로 그랬는지 《태멀레인》을 훔쳐가버렸다. 곡소리 났겠지? 조만간에 그것도 팔고, 서점도 팔아 따뜻한 플로리다쯤에 가서 편안하게 죽으려 했건만.
대신 누군가 어린 갈색 천사를 책방에 두고 갔다. 경찰에 신고하고 보호시설로 보내려다가 아이가 너무 예뻐서 AJ가 직접 키우기로 했는데, 앨리스 섬의 착한 주민들이 적극적으로 도와주면서, 책방에 오면 그냥 오나, 책도 한 두 권씩 사가기 시작했다. 이건 크고 작은 여러 도서모임 결성으로 이어지고, 당연히 독서회도 이 아일랜드 서점에서 열리게 되는데, <늦게 핀 꽃>으로 인연이 이어진 어밀리아 로먼, 그리고 나이틀리 출판사의 책들도 많아지면서, 일이 점점 커지게 된다. 당연히 사랑도 싹이 트다가 점점 커지고, 우리의 어린 갈색 천사, 이름을 마야 태멀레인 피크리로 지은 갈색 천사도 점점 성장해가며 아름다운 앨리스 섬, 아름다운 주민, 아름다운 서점, 아름다운 가족을 이룬다.
우리 독자들은 그냥 즐겁게 읽으면 된다. 세상에 이런 낙원은 절대로 없으니 이런 곳에서 살아볼까, 하는 꿈만 꾸지 않으면 된다. 그래서 누구나 읽는 동화책 정도로 여겨도 마땅한 착한 책. 개브리얼 제빈도 될 수 있으면 재미난 묘사를 하려고 안간힘을 쓰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