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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 ㅣ 로알드 달 베스트 단편 1
로알드 달 지음, 정영목 옮김 / 교유서가 / 2021년 1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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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집 《맛》, 하면 팍 떠오르는 작가가 로알드 달 말고 뮈리엘 바르베리의 책 아니었나? 난 그랬는데 아니더라도 상관없지 뭐. 나는 바르베리의 책을 읽고 왜 우리나라의 소위 맛 칼럼니스트라 일컫는 작자 황땡땡은 일천한 지식과 그렇게 하찮은 단어만 구사하면서 자칭 기고가寄稿家라고 떠들고 다닐까, 라는 생각을 했었다. 누구를 일컫는 지 아시겠지? 요즘엔 어디서 뭐 하고 사는지 모르겠지만.
사실 소설집 《맛》이라면 바르베리 한 권으로 충분하다. 근데 왜 또 로알드 달의 작품집을 골랐지? 로알드 달이라면 재미있게 본 영화 <찰리와 초콜릿 공장>의 원작을 쓴 어린이 책 전문작가인 걸 번히 알면서 말이지. 다 이유가 있다.
(이유? 나 중딩 1학년 때 골목길에서 친구하고 농담 따먹기 하고 있다가 걔가 뭐라고 헛소리를 하길래 왜 그런 일이 생겼는지 이유를 대보라 했던 적 있다. 걔가 대답을 못하니까 내가 또 “아니, 처녀가 아이를 배도 이유가 있는 법인데 왜 말을 안 하느냐”고 했다. 이때 골목을 지나던 호호 할머니가 “처녀가 애를 배도” 운운하는 걸 우연히 듣고는 나더러 ‘배워 먹지 못한 것 같으니’ 어쩌고저쩌고 막 야단을 친 기억이 난다. 아이고, 그땐 그런 시절이었지. 갑자기 이 생각이 나서 독후감과 상관없이 한 번 지껄여봤다. 그 할머니는 벌써, 벌써 갔을 거다. 편히 쉬시기를.)
며칠 전에 읽은 개브리얼 제빈의 작품 <섬에 있는 서점>에서 서점의 주인이자 주인공인 A.J.가 특히 단편소설을 좋아하는데 소설가 가운데 로알드 달을 여간 편애하는 게 아니었다. 로알드 달? 마흔 살이 넘은 인도계 미국인 A.J.가 좋아한다니 어린이 책 전문가 로알드 달이 아니라 틀림없이 단편소설가 로알드 달일 터. 당장 개가실 내려가서 고른 책 두 권 가운데 하나가 《맛》이었다. 다른 하나는 금요일에 업로드한 데이비드 포스터 월리스의 소설집 《오블리비언》이고. 월리스가 에세이스트인 줄만 알았던 것처럼 달 역시 어린이 책 작가로만 알았으니 새삼스레 무식이 탄로난 순간이다.
위키피디아에서 로알드 달을 검색하면 상당한 분량이 뜬다. 너무 길어서 인터넷 책방 알라딘에 실린 정보를 적당히 섞으면, 1916년에 돈 좀 있는, 아니다, 실수, 웨일스 카디프의 부유한 노르웨이 이민자 가정에서 태어난 영국인으로, 기숙학교인 랩턴 스쿨에서 지긋지긋한 시절을 보내고 아마도 (내 생각을 말하자면) 교육받는다는 것 자체가 지옥불에 타는 거하고 비슷한 느낌이 들어 더 이상의 공부는 작파하고 석유회사의 아프리카 지사에서 일했다. 랩턴 스쿨의 남학생 기숙사. 완전 정글이었겠지. 역시 영화로도 만든 달 원작의 <마틸다>가 이곳을 모델로 쓰지 않았을까 싶다.
2차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달은 영국 왕립공군에 입대해 전투기 조종사로 비행 에이스Flying Ace의 명예를 얻었지만 크게 부상해 정보장교로 지내다가 전쟁이 끝난 후 중령으로 제대한다. 이후 본격적으로 글을 쓰기 시작했는데 세상에나, 자기도 자신이 그렇게 성공할 줄은 몰랐을 거다. 전세계에서 2억 권의 책을 팔았으니 인세로 한 권에 천원만 받았다 쳐도 2천억 원. 이것으로 끝나는 것도 아니고 영화로 만들어 매출에 따른 배당까지 받았을 터, 그럴 줄 알았으면 중령 달기 전에 얼른 제대해 일찌감치 책이나 쓸 것을. 돈 버는 재주는 아빠를 닮은 게 확실하다.
책방의 작가 소개는 이렇게 말한다.
“도박과 내기에 대한 집착, 속고 속이는 의뭉스러운 술수, 통념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기이한 목표를 향해 놀라운 집념을 발휘하는 인물 등을 보여주면서 인간사의 미묘한 국면을 차근차근 밀도 높은 이야기로 조여붙이는 그의 솜씨는 결말에서 으스스한 반전과 다층적인 유머를 선사하면서 정점에 달한다.”
책가게 소개글도 일종의 광고니까 위 인용문이 조금 과장은 되어 있지만 맞는 말이다. 다만 달이 1916년생이니 지금 독자들이 읽으면 달과 비슷한 연배의 사람들이 느꼈을 반전과 다층적 유머를 좀 덜 진하게 느끼지 않을까 싶다. 무슨 말씀이냐 하면, 소설집 《맛》에서도 달 특유의 것이 확실한 내기 장면이 나오는데, 이미 발랑 까진 독자의 눈에 결론이 어떻게 날지 보인다는 것. 물론 훤히 보이지는 않지만 거의 예상대로 스토리가 진행된다.
그래서 이 책이 흥미롭지 못하다는 건 전혀 아니다. 무척 재미있다. 얼마나 재미있느냐 하면, 출판사 교유서가에서 달의 단편집 세 권을 냈는데, 올해 안에 나머지 두 권도 싹 읽을 결심을 하게 만들 만큼 재미있다.
재미를 가장 잘 보장해주는 건 역시 악당이 지옥으로 떨어지는 장면이다. 아니면 적어도 원래 치려 하던 사기 행각이 실패하는 모습. 달이 내기 전문 작가이니만큼 선량한 내기꾼은 등장하지 않는다. 그냥 일상적인 내기라면 그게 (아무리 단편이라지만) 소설 스토리가 될 수 없을 터. 책 속의 내기에는 빠짐없이 좀스러운 사기꾼이 등장한다. 아니면 달의 십대를 망쳐버린 랩턴 스쿨의 폭력적인 교장처럼, 영화 <마틸다>의 군복 입고, 위압적이고, 뚱뚱하고, 못생기고, 힘세고, 냄새나고, 고함치는 여자 교장처럼 잔혹한 남자이거나. 딱 한 번 잔혹한 악당이 승리하는 작품도 있지만 어떤 건지는 알려드릴 수 없다. 짧은 소설이라 제목이라도 노출하면 그대로 결말 자체가 드러나는 꼴이라서.
예를 하나 들어보자. 첫 작품 <목사의 기쁨>에 나오는 주인공 시럴 워닝턴 보기스의 직업은 목사가 아니다. 목사 명함을 파서 뿌릴지언정 그냥 골동 가구 판매상이다. 우연히 시골에 갔다가 차의 팬벨트가 끊어지는 바람에 들른 농가에서 첫 경험을 한다. 거, 야한 생각 하지 마시라. 여자 혼자 있는 집에 들어가기는 했는데 거실에 대단히 훌륭한 고가구가 좋은 상태로 놓여 있는 것을 발견해서, 그게 명품인지 꿈에도 모르고 사는 여자한테 거의 헐값에 건네받아 무척 비싸게 팔아먹은 경험을 말하는 거니까. 빙고! 보기스가 속으로 이렇게 외쳤겠지. 그리하여 지도를 한 장 사서 이후 런던 인근의 시골지역을 정사각형으로 쪼개어 샅샅이 뒤지고 다니며 똑 같은 짓을 시작했다.
영국이나 우리나라나 뭐 거의 비슷하게 시골 사람들이 보수적인 구석이 많다. 의심도 많고. 어떻게 하면 그들의 경계심을 누그러뜨릴 수 있을까 궁리하다가 생각해낸 것이 영국 국교회 목사 옷을 한 벌 지어 입고 자기가 목사인 척하는 거였다. 이 찌질한 보기스 사장의 철칙은 아무리 작은 돈이라도 철저하게 깎을 수 있을 때까지 깎아서 가장 싸게 가구를 구입해, 받을 수 있는 최고의 돈을 받고 파는 것. 그래서 시골 농가를 뒤지며 농부들한테도 마구, 마구, 또 한 번 마구 값을 후려친다. 그럴려면 농부의 집에 있는 가구가 아무리 명품 itself라고 하더라도 아주 하잘것없는 하품으로 말해야 한다.
그러다가 하루는 남자만 있는 농가에서 영국의 가구 장인, 마치 건축가 하면 크리스토퍼 렌을 떠올리듯, 역사상 가장 훌륭한 가구 장인인 토머스 치펀데일이 자필로 써준 영수증이 첨부된 진짜배기 고가구 명품을 발견한다. 이 장면만 딱 써 놓으니 별 감정이 없겠지만 정말로 작품 전체를 읽어보면 이미 게임이 어떻게 끝날 지 눈에 훤히 보이는 걸 워쪄? 그래도 재미있는 건 또 어떻게 할 건데?
<목사의 기쁨>에서는 한 찌질이의 사기행각만 이야기하는데, 역시 달의 진가는 사기를 포함한 내기에 있다. 미리 짜고 또는 알고 하는 내기도 있고, 상상이 힘든 내기도 있다. 아오, 정말 읽어보셔야 할 터인데. 오늘은 내가 약한 샘플만 소개하고 마는 거 같아서 이렇게라도 좀 더 보태야겠다.
<목사의 기쁨>을 포함해 모두 여덟 편의 단편소설이 실려 있다. 다 재미있다. 물론 감동/동감하고는 다른 재미를 말한다. 그러면 됐지 뭘 더 바래, 그지? 딱 재미만 생각하고 읽어도 좋은 건 좋은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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