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죽지 않은 자들의 섬
필리프 클로델 지음, 길경선 옮김 / 은행나무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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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직 죽지 않은 자들의 섬: 이후 “아직”이라 표기>을 읽을 때 감안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시리아 내전 등과 비슷한 시기에 전쟁과 독재정권에 의한 탄압, 종교분쟁 등을 피해 중동과 북아프리카 지역에서 수많은 난민들이 비싼 비용을 들여 낡고 작은 배에 발 디딜 틈도 없을 정도로 밀집해 타고 유럽을 향해 가다가 터키, 그리스 또는 그곳 근처에 도달하지도 못한 채 지중해에 빠져 익사한 사실이다.

  줄퓌 리바넬리의 작품 <어부와 아들>에서도 이 부자의 어장에 둥둥 뜬 수많은 어두운 피부색의 익사자를 경험한 적 있어서 낯설지는 않다. 클로델도 그렇고 리바넬리도 그렇고, 아마도 2015년 터키의 해변에서 발견한 시리아 난민 소년 아일란 쿠르디의 시신 사진이 미디어에 소개되어 전세계로 퍼진 것에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이전에도 물론 난민 문제, 난민 발생부터 이주, 그리고 이주 중의 열악하고 위험한 과정 중 지중해에 빠져 죽는 숱한 사람들이 있기는 했지만 이에 관한 문제 제기에 적어도 ‘본격적으로’ 초점을 맞추지는 않았던 걸로 기억한다.

  물론 소년의 죽음 이후에 잠깐 세상의 이목이 집중되기도 하였지만 이런 비극도 짧은 시간이 지나자 세인의 뇌리에서 흐려져 또다시 세상 사람들은 그것 말고도 다른 어려운 문제로 눈을 돌려, 전과 같은 문제는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고 작가들은 생각했던 것 같다.

  리바넬리는 아예 <어부와 아들>의 제일 큰 주제를 이 부자가 사는 섬에 조수를 타고 밀려오는 시신들에 집중하지만 <아직>은 그렇지 않다. 물론 난민 문제에 관심이 있다. 하지만 난민의 시신이 섬에 밀려오고 난 이후에 섬 사람, 섬 집단 사이에서 벌어지는 집단 히스테리에 더 주목한다.


  작품을 시작하면서 작가의 역할을 이야기한다. 또는 자신이 책을 통해 하고자 하는 것에 관하여.

  “나는 이 이야기의 목격자이다. 당신이 그러했던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당신은 보고 싶어 하지 않았다. 당신은 결코 보고 싶어 하지 않는다. 나는 당신에게 그 사실을 일깨우는 자이다. 나는 성가시게 하는 자이다. 나는 모든 것을 본다. 나는 어둠으로부터 당신에게 이야기를 들려주게 되리라” (p.10)

  여기서 “당신”은 무엇에 관해 보고싶어 하지 않을까? 난민문제? 만일 난민문제라면 당신은 난민에 관심이 없는 전세계 사람이며, 위에서 내가 말한 집단 히스테리라면 공간적 무대인 섬사람 또는 비슷한 정치상황을 가진 진영들이라고 볼 수 있다. 둘 다? 뭐 그럴 수도.

  이야기를 시작해보자.


  작품은 상상의 장소인 군도, 이름이 “개의 군도群島”인 섬 지역에서 유일하게 사람들이 사는 화산섬 브라우에서 일어난다. 섬이 오종종하게 모여 있는데 그걸 마치 별자리를 그리듯 이리저리 선을 이어보면 개의 대가리 형상이 나타난다. 개의 귀, 눈, 코, 이, 침까지. 무대가 되는 섬은 개의 아래턱 맨 끝에 있는 화산섬인데, 이 화산은 심지어 활화산이다. 최근에 용암을 흘리고 지금은 좀 쉬고 있지만 잊을 만하면 몸을 부르르 떨어, 그때마다 사람이 살고 있는 벽과 땅도 부르르 떨게 하는 지진으로 자신의 수명이 다하지 않았음을, 언젠가는 터지고 말리라는 것을, 마치 소설 속에 등장하는 소총처럼 끊임없이 알려주고 있다. 그러니 언젠가는 터질 거라고? 뭐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안 가르쳐드린다.

  사람이 사는 섬은 아마도 페니키아 시절에 해적들이 근해를 항해하다가 약탈한 보화를 숨기다 좌초한 이후에 어쩔 수 없이 터를 잡아 그냥저냥 살다가 정착했다고 짐작하는 곳이다. 수 대를 걸쳐 비슷한 사람끼리 모여 사는 곳. 아이들이 자라 청년이 되면 부모가 죽어라 하던 농사일과 바닷일에 진저리가 나 꼬박꼬박 육지로 일하러 나가는 바람에 이제는 섬의 쇠락을 바라볼 수밖에 없는 현대의 섬들 가운데 하나. 그러나 아직도 철이 되면 몰려드는 거대한 참치떼가 있어 더운바람이 식기 시작하는 초가을에는 축제와 긴장의 분위기가 한꺼번에 섬을 휩싸기도 한다.


  모든 것은 9월의 어느 월요일 아침, 해변에서 시작한다. 섬에서 나 육지로 가 공부를 하고 돌아와 50년이 넘게 섬 학교의 교사를 지내다 은퇴한 노파가 중형 믹스견과 함께 해변을 산책하다가 해안에 세 개 길쭉한 형체가 놓인 것을 발견했다. 포도주를 만드는 마흔 가까이 된 농부 아메리크와, 최고의 황새치잡이 어부 스파동도 거의 동시에 그것들이 눈에 들어왔다. 세 명이 가까이 가보니 얼굴을 바닥에 대고 엎드린 채 죽어 있는 흑인 남자 시신 세구. 모두 티셔츠에 청바지를 입은 단출한 차림에 맨발이며 안타깝게도 스무 살도 안 되어 보이는 젊은이들이다.

  노파는 오래 전 제자였던 스파동더러 시장을 불러오라 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스파동은 시장과 의사를 데리고 온다. 시장이 시신을 보더니 아랍어, 스페인어, 그리스어 단어들의 조합으로 만든 천 년도 더 된 욕설을 터뜨린다. 이때 외지에서 온 교사가 아침 조깅을 하다 이들을 발견하고 합류한다. 노파는 교사가 싫다. 밉기까지 하다. 자신이 은퇴하여 후임으로 왔음에도 교사가 뭔가를 훔쳐간 듯한 느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어서, 그래서 싫고 밉다. 사람이 다 비슷하지 뭐. 옆집 총각이 장가가도 괜히 속상한 게 인지상정이니까. 시장은 교사가 합류하는 게 마음에 안 든다. 교사는 외지 사람이다. 교사 일을 하며 월급 받아먹고 살기 위해 섬에 들어온 뜨내기.

  시장은 잔뜩 화가 난다. 지금 이 섬은 젊은이들이 점점 빠져나가 몇 년 후면 황량한 사막 비슷하게 변해버릴 것이 뻔해서, 화산이 있으면 당연히 동반하는 온천, 그리고 특산품이라 할 수 있는 고급의 기막힌 포도주, 올리브 오일, 파랗고 파랗고 또 파란 바다, 풍접초를 이용한 복합단지 개발 컨소시엄을 만들기 위해 준비작업 중이다. 근데 중동, 아프리카 난민이 부근을 지나다가 좌초하여 시신이 빠져 밀려온다면 어떤 돈 많은 관광객이 이 섬에 와서 휴양을 하겠느냐는 말이지. 어떤 부자가 바다에 빠져 썩은 시체를 뜯어먹은 새우, 가재, 물고기를 먹겠으며, 그 바다에 희고 포동포동하고 매끄러운 몸을 담그겠느냐고? 만일 시신이 밀려왔다는 것이 세상에 알려지면 복합단지 컨소시엄은 물 건너 간 거라고 판단했다. 그리하여 섬에서 가장 큰 어부이자, 선주이자, 냉동/냉장창고 주인이기도 한 시장은 다른 사람은 다 보내고 부하 비슷한 어부 스파동과 함께 시신 세 구를 일단 자신의 냉동창고에서 꽝꽝 얼려 보관하기로 했다. 육지의 경찰이나 판사한테는 알릴 수 없으니까.


  이틀 후, 당시 현장에 있던 여섯 명과, 이 가운데 누군가의 고해성사로 일을 알아낸 신부까지 포함해 일곱 명은 얼었다가 녹으면서 흐른 물에 하나로 엉겨버린 세 시신을 처음엔 무한궤도차에 싣고 화산을 향해 올라갈 수 있는 높이까지 올라가다가, 남은 몇 백 미터는 사람들이 끙끙거리며 짊어지고 가야 했는데, 이때 외지에서 오고 평소에 체력관리에 힘쓴 교사가 제일 많이 보탬이 되어, 시신 세 구를 화산 구덩이로 밀어 넣어버린다. 마그마에 녹아 완전히 사라져 버린 것. 섬 사람들이 자기들 쓰레기를 몰래 버리는 거하고 똑 같은 일을 저질러버린 것.

  교사는 낙담한다. 일곱 명 가운데 유일하게 반대한 사람. 경찰과 판사에게 알릴 것, 화산 구덩이에 사람의 시신을 버릴 수 없으니 시신을 섬에서 반출하거나 이곳에서 묻을 것. 이렇게 주장했지만 이도 먹히지 않았다. 외지인이라서? 그럴 수도 있고. 그런데, 교사는 시신이 하필이면 이 섬에 밀려온 이유가 궁금하다. 그래서 자기 돈을 써서 배를 빌려 조수를 관찰하고 사람 무게의 마네킹을 빠뜨려 몇 개가 이 섬으로 오는지 관찰을 하고, 드디어 수상한 점을 발견해 그걸 문서로 만든다. 그럼 그걸 육지 판사나 경찰한테 주었으면 좀 좋아? 교사는 문서를 시장에게 건네고 조치해달라는데, 여전히 컨소시엄에 집중하는 시장이 들어줄 리가 없다. 오히려 유일한 외지사람 교사만 없어지면 섬사람들은 섬사람들끼리 오붓하게, 여태 잘 살아왔듯이 그렇게 살 수 있을 것이다. 틀림없다.

  시장은 독한 꾀를 낸다. 그리하여 교사를 좌절에 빠뜨리고, 어떻게 해서라도, 어떤 모습으로 변하더라도 결국 섬을 떠날 수밖에 없는 누명을 씌운다. 그 다음에 문득 정신을 차려 자신이 한 짓, 자신과 섬사람들이 한 짓이 무엇인가를 알아차렸을 때는….

  나는 이 독후감에서 이후에 등장하는 중요한 인물, 육지에서 온 경찰 이야기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가 누구인지, 그래서 교사는 어떻게 되었는지 알고 싶으시면 직접 읽어 보시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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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수하 2026-03-06 10: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화산 구덩이에 접근하는 것은 상당히 위험할텐데 그런 일을...
그나저나 여기까지가 도입인건가요? 여기까지만 이렇게 재밌게 길게 쓰실 수 있다니 역시 폴스타프님 필력이 대단하십니다.

(그나저나 저는 뭔가 조금 더 나와야 읽고싶은 마음이 생길 것 같...)

Falstaff 2026-03-06 15:52   좋아요 0 | URL
화산구덩이가 여러 형태거든요. 이 책에서는 이해 가능한 구덩이기는 한데, 제가 의심한 건 이런 구덩이(입구가 매우 좁습니다)에 시신을 떨어뜨리면 떨어지면서 시신을 훼손한 살점이 바위 표면에...... 에구.. 이쯤에서....
ㅎㅎㅎ 작품의 진도가 더 나가면 좀 곤란할 거라고 판단해서 말입죠. 그저 잘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
 
위대한 앰버슨가 휴머니스트 세계문학 20
부스 타킹턴 지음, 최민우 옮김 / 휴머니스트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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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 시절에 부스 타킹턴을 기념하는 이유는 그가 최초로 퓰리처 상을 두 번 받았기 때문인 거 같다. 나도 전에 <앨리스 애덤스>를 읽었고, 이제 <위대한 앰버슨가> 마저 읽어 타킹턴으로 하여금 퓰리처 상을 받게 한 두 작품을 다 읽는다. 이제 타킹턴하고는 헤어져야 할 시간인 듯.

  이이 말고 퓰리처 상 2회 수상에 빛나는 작가들은 윌리엄 포크너, 존 업다이크 그리고 21세기 작가인 콜슨 화이트헤드. 이들의 퓰리처 상 수상작품을 모두 읽었을 거 같지? 아니다. 포크너의 수상작은 <우화>하고 <약탈자들>, 나도 포크너 좀 읽었지만 이 둘은 아직 손을 대지 않았다. 나머지 다른 작가들의 작품은 다 읽었고.

  독후감을 쓰면서 왜 이렇게 버벅거리느냐 하면, 책을 읽고나서 며칠 지났기 때문이다. 습관적으로 책을 읽으면서, 읽은 다음에 즉각 머리속으로 독후감을 어떻게 쓸까 구상을 하는데 그게 시간이 조금만 지나도 휘리릭 사라지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 책 이전에는 찬쉐의 골치 아픈 초기작, 이 책 뒤엔 중동 난민 지역에서 배를 타고 유럽으로 밀항하는 유랑민들의 비참한 이야기, 가볍지 않은 책들 사이에 끼어 있어서 쓴지 백 년이 넘어간 조금 낡은 스타일 작품의 인상이 그리 많이 남지 않았기 때문이다.


  앰버슨 소령. 미국 내전 시기의 북군 지휘관으로 게티스버그 전투에서 눈썹을 휘날리다 제대한 예비역 소령은 이후 지명을 밝히지 않은 미국 중서부의 작은 도시에 정착한다. 아무리 19세기라도 소령을 지냈으니 일정 수준 이상 신사라 칭할 수 있는 재산과 지식을 가지고 있었으리라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소령은 신사에 머무르기를 거부하고 사업에 관심이 많았다. 전쟁 후 미국에서는 1873년부터 96년까지 장기 불황에 빠졌는데, 정말로 이재에 밝은 이들은 이 위기, 한자어로 쓰면 危機, 즉 아무도 선택하려 하지 않는 “위험한 기회”에 과감한 변신을 시도해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큰 재산을 얻는 거다. 앰버슨 소령이 그러했다. 그의 재산은 미국 중서부에서 소문이 자자할 정도. 그러나 조금 눈을 크게 뜨면, 뉴욕과 메릴랜드, 워싱턴의 대부호에 견주면 말 그대로 “시골부자” 수준이었을지도 모른다. 아마 그랬겠지. 록펠러와 카네기의 시절이었으니.

  그래도 앰버슨 소령은 도시에서 80만 제곱미터, 24만2천 평이 넘는 넓은 땅을 구입하고, 토지를 구획하여 거리와 교차로를 조성한다. 교차로에는 그리스의 여신과 남신, 영웅을 청동이나 황동 주물로 세운 화려한 분수를 만들어 방문객의 눈을 즐겁게 하기도 했다. 도로 양쪽으로 다른 신사들의 가정을 위한 택지를 개발했다. 이 가운데 1만6천제곱미터, 약 4천8백평이 넘는 제일 좋은 자리에 이 도시의 랜드마크가 될 거대한 앰버슨 저택을 지었다. 3층 전체를 무도회장으로 꾸몄고, 악사들의 자리를 위한 조금 높은 단은 검정색 호두나무로 만들었다. 이왕 검정 호두나무를 사용하기로 한 바에 거의 모든 목재도 같은 재질로 마감하니 설치비용을 뺀 목재비로만 당시 화폐가치로 6만 달러를 지불했다는 뒷말이 몇 년 동안이나 도시를 배회했다나?


  1870년대. 아마도 후반이겠지. 소령이 본격적으로 돈 세는 경리직원을 열댓 명 거느리기 시작했을 즈음으로 보이는데, 이때 출생 순으로 2남1녀 중 막내딸 이저벨 앰버슨이 18~19세, 결혼 적령기에 이르렀다. 아주 활기차 보이는 젊고 어여쁜 아가씨. 그러나 무려 백 달러짜리 세인트버나드를 끌고 산보를 다니는 바람에 쫄보 총각들은 말도 붙이기 힘든 이 아가씨한테는 두 명의 경쟁자가 있었다.

  1번은 유진 모건. 유진은 활발하고 총명하고 매사 적극적인 반면 특히 오지랖이 넓어 온갖 거리에 다 집중하는 좀 어수선한 미남자. 이이가 하루 날을 잡아 이저벨의 오빠 조지와 작당을 해 도시의 작은 밴드를 몰고와 이 당시 낭만적인 청년들이 거의 다 그랬듯이 이저벨의 창가에서 세레나데를 불러댔다. 그러면서 술을 왕창 마시고 소동을 피우다가 친구 조지는 취해서 뻗어 버리고, 유진도 비틀거리다가 베이스 비올을 밟아 와자작 박살이 나고 말았다. 2층 창가에서 만면에 미소를 지으며 유쾌한 장면을 보고 있던 이저벨이 채점을 하니 함부로 비올을 망가뜨린 것 때문에 C.

  2번은 이런 소란스러운 절차에 전혀 관심이 없는 성실한 일꾼 윌버 미내퍼. 아폴론 같은 사람은 아닐지언정 건실한 청년 사업가라는 중평이 시내에 가득하다. 부잣집 사위로 들어갈지라도 처가에 아쉬운 소리를 한 번도 하지 않을 듬직한 사람. 여자가 한 평생 기대 살기에 너무도 적절해 보이는 믿음직한 청년, 비록 매력은 없더라도.

  두 가지 선택지에 평소 마음에 들던 1번이 C를 받았으니, 범이 없는 골에 여우가 대빵이다 싶은 마음으로 이저벨은 윌버 미내퍼를 선택한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결혼해버렸고, 1년 후에 아들을 낳아, 사랑하고 의지하던, 그리고 죽을 때까지 의지할, 의지해야 할, 의지할 수밖에 없는 오빠 조지의 이름을 따 아들에게 조지 앰버슨 미내퍼라고 짓는다.

  경사 뒤엔 언제나 슬픔도 있는 법. 슬픔이 가득한 유진 모건은 젊음을 허비하느라 여기저기 작지 않은 빚을 지었는데, 사람이 좀 허랑한 면이 있더라도 깔끔하게 자기 자리를 정리할 줄 알아서 짧은 기간 열심히 돈을 벌어 자기 빚을 다 갚은 후에 도시를 떠나버린다. 그리고 별의 별 짓을 다 한 모양이다. 출신이 신사라서, 코피 나게 공부를 해 변호사 자격을 따 변호사도 해보고, 작은 회사 경영도 해보고. 근데 그건 나중 일이니 다음으로 하자. 즉, 언젠가 뒤에 다시 이 도시에 나타난다는 말이다.


  이 도시에 문화 전반에 가장 권위를 가지고 있는 부인이 있었다. 헨리 프랭클린 포스터 부인. 물론 중산층 부인 계급의 오피니언 리더를 말하는 것으로, 예를 들어 도시에 셰익스피어 공연단이 들어와 연극을 했다 해도, 거의 모든 부인들은 포스터 부인이 공연에 대해 먼저 뭐라 소감을 말하기 전까지는 굳게 입을 다물고 있었을 정도이다. 괜히 포스터 부인과 다른 의견을 먼저 말했다가는 나중에 웃음거리나 되지 않을까 싶어서.

  포스터 부인 역시 윌버 미내퍼와 이저벨 앰버슨의 결혼식에 참석하여 축하해주었지만 그날 부인의 살롱에 모인 다른 부인들에게 몇 가지 예언을 했다. 내 생각에, 정말로 현명한 여인이었다면 차라리 말을 하지 않는 것이 더 좋았을 것들을. 부스 타킹턴 역시 침묵은 금이란 걸 몰랐을 리 없지만 굳이 포스터 부인에게 입방정 역할을 맡긴 건 올드 스타일 소설답게 “포스터 부인, 여기서 복선을 좀 깔아주시겠습니까?” 극진하게 부탁을 했을 것이다. 우리 독자는 당연히 이 복선을 유심히 읽어볼 권리가 있다.

  “이저벨은 좋은 부인이 되겠지만 도시가 지금껏 본 적 없는 버릇없는 아이들을 잔뜩 낳을 것이다. 이저벨은 윌버를 사랑할 수 없고, 이 마음이 아이들에게 모두 전해질 것이라, 이저벨은 아이들을 망칠 것이다.”

  부인의 예언 가운데 딱 한 가지 세부사항만 틀렸으니 이저벨의 배에는 맏이 조지 앰버슨 미내퍼 하나만 들고 영원히 닫힌 상태가 되었다는 것. 사람들이 훗날 포스터 부인에게 와서 하나 밖에 안 낳았다고 지청구를 하니, 부인께서는 또 입방정을 떨기를:

  “겨우 하나라니. 하지만 그 애가 과연 마차 한 대를 채울 만큼 넉넉히 버릇없는 애인지 아닌지는 알고 싶군요!”

  이 정도면 포스터 부인은 자기 말이 맞다는 걸 증명하기 위해서라도 어린 조지가 엉망으로 크기를 바라고, 만일 아니라면 제발 망가지라고 굿이라도 할 듯하다. 나무아미타불. 하늘의 도움인지 포스터 부인은 그리 오래 살지 못하고 얼른 얼른 알아서 갔다.


  사실 이 작품은 소령. 소령의 아들 조지 앰버슨. 외동딸 이저벨 앰버슨과 거의 보이지 않아 존재감 레벨 14 수준인 남편 윌버 미내퍼, 이들 사이의 아들 조지 앰버슨 미내퍼, 그리고 여기에 포스터 부인의 예언으로 줄거리는 거의 다 끝난 거다. 즉 예측할 수 있다는 뜻.

  거기에 문제의 어린 조지. 아홉 살밖에 되지 않은 조지는 세상에서 자기 마음대로 안 되는 일이 하나도 없는 줄 안다. 모든 것은 자기의 외가, 즉 앰버슨가의 재력, 그것도 무한 재력에서 화수분처럼 솟아난다고 굳게 믿는다. 구렁마가 끄는 마차를 무참한 속도로 달리게 만들어 시내의 신사 숙녀를 여차하면 치어 다치게 할 위험한 폭주를 감행하기도 하고, 잘 먹고 잘 살아 힘이 세서 그런가 동네 아이들을 무참하게 두드려 패기도 해서 도시에서 조지를 좋아하는 인간이라고는 그저 어린 조지의 비위에 맞추고 싶어하는 하인 계급의 주로 흑인들, 그리고 콩고물이라도 떨어질까 싶은 또래 아이들 몇 명뿐이다.

많은 타운의 사람들은 어린 조지에 대해 매우, 매우 불쾌하게 생각한다. 조지는 이런 인간들을 “천한 것들”이라 여기고. 그리하여 대부분의 타운 사람들은 소망을 가지고 있으니:

  “꼬마가 천벌을 받는 날을 볼 때까지 내가 살아 있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조지는 정말로 그렇게 큰다. 안하무인. 못하는 일이 없다. 뒷배경엔 자기 가문도 아닌 외갓집 가문이 있어서. 그런데 앰버슨 저택에서 열린 대무도회에서 낯선 사람을 발견하니 한 명이 키가 크고 낡은 연미복을 입은 멋진 외모이지만 정이 조금도 가지 않게 생긴 중년 남자였고, 다른 한 명은 그의 딸인 것처럼 보이는 키 작고 귀엽고 매력적인 아가씨였다. 이때가 조지의 나이 15세가량. 소위 첫사랑이 싹트는 순간이다. 근데 보니까, 키 큰 중년남자가 엄마를 미내퍼 부인이라고 부르는 것이 아니라 그저 “이저벨”이라 하고, 삼촌 조지 앰버슨과는 아예 어렸을 때부터 친구란다. 아이쿠. 저 위에서 말한 1번 경쟁자 유진 모건이 이제 원시(초기) 자동차 제작사 또는 공장주가 되기 바로 직전에 홀아비가 되어 외동딸 루시와 함께 도시로 돌아온 거였다.

  아직 경영자도 아니고 공장을 만들지도 않았으며 하다못해 사업자등록증도 내지 않은 유진 모건이 나이만 많다고, 엄마와 삼촌의 친구라는 것 때문에 위대한 앰버슨가의 앰버슨 소령의 유일한 손자 조지 앰버슨 미내퍼가 고개를 숙일 수 없는 일. 그러나 그의 딸 루시가 저리도 아름다우니 이걸 어쩔꼬?

  앰버슨 가문의 융성이 절정에 달했으니 이 순간 앰버슨가의 쇠망은 시작하는 거였다. 즉, 지금이 앰버슨 가문의 전성기라는 말이겠지. 어떻게 망가지는지는 직접 읽어보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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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moo 2026-03-05 11: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퓰리처상을 두 번이나 받은 작가인데 저는 완전 첨 듣는 작가입니다. 퓰리처상 수상작이니 이것도 구매해야 할 듯해요. 부커상이나 퓰리처상 수상작은 무조건 모아놓고 보거든요~
별4개이니 잘 하면 대어를 낚을 수도 있겠단 생각입니다!ㅎㅎ

Falstaff 2026-03-05 15:43   좋아요 0 | URL
ㅎㅎ 재미있는 책인데요, 스타일이 좀 오래 전 것이라 어떨지 모르겠습니다. 즐겁게 읽으시기 바랍니다!!!
 
오래된 뜬구름
찬쉐 지음, 김태성 옮김 / 열린책들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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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찬쉐의 중편소설. 그동안 찬쉐의 단행본은 다섯 권을 읽었는데 이 가운데 <황니가>가 가장 읽기 어려웠다. 디스토피아적 상상력으로 독자마저 우울하게 만든 <황니가>는 참 다양하게 독자를 어렵게 만들었다. 순간마다 지금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어 이런 장면이 등장하는지 이해하기 쉽지 않았고, 아마도 대부분 오해하게 만들었으며, 그리하여 여간 독하게 마음먹지 않으면 끝까지 읽기도 어려웠던 찬쉐의 데뷔작. 크. 데뷔작이 이랬다. <황니가>에 비하면 뒤에 출간할 초현실주의적 작품들은 시쳇말로 이도 나지 않은 수준일 정도로.

  <오래된 뜬구름>이 <황니가>와 더불어 찬쉐의 초기 작품군으로 분류한단다. 이걸 알았으면 읽었을까? 그래도 읽기는 했겠지. 중편소설. 2백쪽도 되지 않아 그나마 다행이었다. 이 순간도 지나가리니. 책을 읽으며 주문을 몇 번이나 외웠는지, 거 참.


  제일 먼저 등장하는 인물이자 조금 덜 주인공 또는 중요한 조연 겅산우(更善无). 그가 꿈을 꾼다.

  우리말 재미있다. 꿈은 꾸고, 잠은 자고, 봄은 보고, 먹음은 먹고, 그림은 그린다. 그냥 이런 생각이 불쑥 들어서 한 마디. 책하고 관계없는.

  겅산우의 꿈속 닥나무의 새하얀 꽃. 근데 그게, 꽃이 말씀이지, “향기 속에 하수도 물을 연상케 하는 혼탁한 냄새가” 섞였다. 그리하여 작품의 시작이:

  “닥나무의 새하얀 꽃이 빗물을 잔뜩 머금어 몹시 무거워졌다. 잠시 후 투둑 하는 소리와 함께 한 송이가 땅바닥에 떨어졌다.”

  이렇게 된다. 그저 나 같은 범부라면 새하얀 꽃은 보기도 좋고, 향기에도 취할 만해야 할 터인데, <오래된 뜬구름>의 새하얀 닥나무 꽃은 처음부터 밤새 빗물을 맞아 투둑, 마치 목이 잘리듯 떨어져 내리고 만다. 그러면 선운사 동백처럼 떨어진 모습이 처연하기라도 해야 할 터인데, 겅선우의 닥나무 꽃은 “하수도 물을 연상케 하는 혼탁한 냄새가 섞여” 있고 이런 아침 광경을 창문으로 머리를 내밀고 내다보는 여자들의 하나같이 가늘고 긴 “목이 커다란 독버섯 군락” 같다.

  겅산우의 마누라 무란慕蘭도 이리저리 감추고 몸을 숨기며 쉴 새 없이 엉덩이를 들어 올리는 행동이 아주 비밀스럽다고 생각하면서 닥나무 새하얀 꽃을 따 빻아 넣어 끓인 기괴한 국을 머시고는 밤중에 한 번 또 한 번 쉬지 않고 냄새가 고약한 방귀를 뀌어댄다. 이렇게 쉼 없이 비가 내리고 악취가 풍기는 풍경. 앞서 말한 <황니가>에서 숱하게 본 장면이다. 이 순간 독자는 끙, 신음소리를 낸다. 아이고, 또 시작이군, 하면서.

  아침. 밤비를 맞아 꽃잎이 땅바닥 가득 떨어져 있다. 그러면 앞에 묘사한 것처럼 하수도 물을 연상하게 만드는 혼탁한 냄새가 나니까, 좀 시들시들해야 할 터이건만, 떨어진 닥나무 꽃들은 “여전히 탐욕스럽고 생기가 넘치는 모습으로 송이가 전부 똑바로” 서 있다. 어떻게 연상해야 할까? 꽃받침을 땅에 묻거나 꽃받침이 땅을 디디고 꽃잎과 꽃술이 하늘을 향한 도발적인 모습을 상상하면 될까? 근데 그게 혼탁한 냄새하고는 그리 가깝지 않을 거 같거든. 하여간 처음부터 쉽지 않다.


  이어지는 장면은 겅산우의 옆집에 사는 여자 쉬루화虛汝華. 이름 좋다. 근데 이름만 좋은 거고, 찬쉐의 초기작품 주인공답게 참 기구한 여자. 엄마가 하도 머리를 감지 않아 머리가죽 위를 덮은 때와 기름이 모근과 엉겨 있을 정도였다. 엄마가 다가오면 시큼한 냄새가 코를 찔러 도무지 사람들이 견딜 수가 없을 지경이 되니까 특별하게 날을 잡아 머리를 감았는데 이게 쉽게 감기나 어디. 물을 부으니까 땟덩이가 모근에 엉겨 그냥 머리카락이 홀랑 다 빠져버렸다. 남편한테 머리에 물을 부어달라고 했지만 아빠는 손이 부들부들 떨려 바가지가 땅에 떨어졌고 그러자 엄마가 벌떡 일어나 아빠한테 더러운 욕을 쏟아내더니 머리카락이 다 빠져 빨간 대머리가 된 채 차가운 물을 아빠 정수리에 쏟아 부어, 아빠는 열을 펄펄 내며 일주일 동안이나 누워 있어야 했다. 그동안에 아빠도 머리카락이 홀랑 다 빠져버렸으니 열이 하도 올라 염라대왕전을 들락날락 했기 때문이었다. 침대에서 일어나자마자 엄마가 너무 무서워진 아빠는 그 길로 집을 나가 담배 파는 아줌마한테 몸을 의탁해버렸다.

  시어머니의 반대를 무릅쓰고 결혼한 라오쾅老況은 세상에 이런 게으름뱅이가 없을 만한 무능력자에 천생 마마보이. 라오쾅은 떨어진 낙나무 꽃냄새에 짜증을 내면서도 불면증을 다스리기 위해 누에콩 볶은 걸 열심히 오도독 씹어먹고 있다. 하여간 누에콩이 수면제 역할을 한다고 하니 그냥 민간요법이라 치자. 근데 그가 갑자기 선언한다.

  “엄마 말이 완전히 다 맞아. 우리에겐 독립적인 생활을 할 능력이 너무 부족하잖아.”

  그러더니 그 길로 좁은 집에다 아직 수태해보지 않은 아내 쉬루화 혼자 남겨두고 엄마 집에 들어가 산다. 그래도 아직 이혼하지 않아 호적상 분명히 아내라서 굶지 말라고 누에콩 한 자루씩 보내주면서.

  근데 라오쾅이 엄마한테 털어놓은 실제적인 가출의 이유는 쉬루화가 원래, 그러니까 본 모습이 쥐였기 때문이다. 책 표지에 쥐가 등장하는 게 바로 이 이유.

  아내가 갑자기 쥐가 되고, 즉 쥐로 변신한다고 굳이 카프카를 연상할 필요는 없다. 찬쉐하면 꼭 들먹이는 작가가 카프카이고 보르헤스인 거. 난 좀 불만이다. 그보다는, 특히 <황니가>와 이 <오래된 뜬구름>의 경우엔 프랑스에서 꽃 핀 부조리 문학 같지 않나? 쥐로 변신했다고 꼭 카프카를 들먹일 필요는 없을 거 같은데 뭐 그건 감상자 마음이기는 하다.


  하여간 작품은 이렇게 시작해서, 조금 덜 주인공 또는 중요한 조연 겅산우의 바로 옆집에 진짜 주인공 쉬루화가 사니까 언제 한 번은 불이 화르륵 붙어야겠지? 그렇다. 한 번 불이 붙는다. 이들이 신기하게도 같은 꿈을 꾸는 걸로 시작해서. 그리고 쉬루화의 불꽃은 사라지면서, 겅산우는 여전히 옆집에 마누라 무관 몰래 왔다리갔다리 하지만 작품은 쉬루화의 가족 간, 남편 라오쾅과 시어머니로 옮겨간다.

  낡은 모자를 쓰고 다니는 대머리 엄마는 참새를 귀신같이 잡아 잠깐 돌보다가 담벽에 못으로 박아 놓는데 꼭 눈에다 못을 친다. 아빠는 여전히 딸과 유대하며 살기는 하지만 근손실로 인해 허벅지가 빗자루 손잡이처럼 가늘어졌다.

  온갖 은유와 부조리한 묘사와 초현실적 그림을 보는 듯한 헷갈림. 찬쉐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이런 작품을 썼는지는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하여간 읽기는 읽었다. 읽은 건가, 아니면 읽어 낸 건가? 읽어 치웠다고? 좋아, 좋아. 아무려면 어떠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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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6-03-04 09: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ㅋㅋㅋ 어휴 리뷰로 다시 읽는데도 두개골이 지끈지끈..
읽기는 했는데 저도 읽어 치운 거에 만족하렵니다....

이 작품하고 비교하니까 최근에 읽은 <세 번째 경찰관>은 아주 쉬운 편이네요. ㅋㅋㅋ (이것도 지끈지끈했거든요.)

Falstaff 2026-03-04 16:08   좋아요 0 | URL
오, 저 한 달 더 있으면 셌쩨 경찰 옵니다. ㅎㅎㅎ 기대가... 은근히 되네요. ㅋㅋ
 
미국 환상곡
팀 오브라이언 지음, 이승학 옮김 / 섬과달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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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읽은 오브라이언의 두 작품 <카차토를 쫓아서>와 <그들이 가지고 다닌 것들>은 모두 베트남전 이야기였다. 전쟁이라는 독특한 환경, 독특한 비극을 특별한 블랙 유머로 그려낸 오브라이언의 신작 <미국 환상곡>이 번역 출간되었다는 걸 알고 도서관에 즉각 희망도서 신청을 해 읽었다. 다 읽고 나서야 작가가 이 작품을 소설로는 21년만에 출간했다는 걸 알았다. 그래서 그랬을까? 적어도 작품 속에서 미국 최초의 패전인 베트남 전쟁과 관련된 등장인물은 없다. 하지만 작가 오브라이언이 육군 보병으로 참전을 한 경험은 어디 가지 않았으리라. 왜 이런 생각을 하느냐 하면, 작중 주인공 보이드 핼버슨의 심리가 마치 전쟁중 충격으로 PTSD를 겪고 있는 사람과 유사하게 보였기 때문이다. 이런 의견도 타당할 수 있다는 전제로 말하자면, 간략하게 소개할 보이드 핼버슨과 앤지 빙의 로드무비 역시 팀 오브라이언의 독특한 블랙유머 적인 문장으로 일종의 PTSD를 벗어나기 위한 한 인간의 발버둥을 그린 작품이라 말할 수도 있으리라.


  1970년. 이탈리아가 아니라 캘리포니아에 있는 작은 도시 베니스 출신의 중고차 딜러(인지 그냥 판매원인지) 오티스 버드송 씨는 매력적인 아내이지만 점점 거대해져 나중엔 거실의 카우치에서 누운 채로 살다 생을 접어야 할 론다 핼버슨을 통해 유일한 아들 보이드 핼버슨을 낳았다.

  아버지의 이름 ‘버드송’은 알고 보니 개명한 거다. 원래 이름은 따로 있지만 전후 히피 문화를 접했던 오티스 씨가 당시 좋아했던 그룹 사운드 “러빙 스푼풀Lovin’ Spoonful”에서 착안, 그깟 이름이 뭐가 문젠데 싶어서 어떻게 하면 “골때린” 이름을 가질 수 있을까 궁리하다가 바꾼, 이른바 새로운 가문의 탄생을 초래하게 될 이름이었다.

  보이드의 당시 이름은 오티스 주니어. 그냥 ‘주니어’라고만 불렀다. 베니스 출신 오티스 버드송 씨가 아마도 중고차 딜러가 아니라 그냥 판매원이었던 듯, 가족을 먹여 살리기는 했지만 풍족했던 적이 거의 한 번도 없던 걸로 기억하는 주니어는 소년시절부터 샌타모니카에서 신문배달을 해야 했다는데, 이때부터 야심만만한 어린 아이쇼핑 꾼으로 자질을 보여 휘황찬란한 번화가의 마법왕국, 쇼 윈도우 바깥을 돌며 눈을 굴리는 관음증자로서 두각을 나타냈다.

  집안에서는 머리가 커지면서 속으로는 그렇지 않지만 겉으로는 거친 말과 비난을 쏟아내는 아버지 오티스 시니어와 아예 거의 완전히 대화가 끊어져버리고, 뚱보, 그것도 미국 기준으로 엄청난 뚱보로 변신한 엄마를 혐오하게 되면서 일찌감치 가정 속 독립군으로의 자리를 공고하게 만들었다. 이제 주니어에게 남은 건 자수성가 하나뿐.

  주니어는 어느 순간 스르륵 오티스 버드송 주니어에서, 버드송이 뭐야, 새타령이 왜 내 이름이어야 하는데, 그래서, 보이드 핼버슨이 되었다. 흉물스러운 엄마 론다 핼버슨을 따른 것. 이러니 세상이 달라졌다. 보이드는 서던캘리포니아 대학USD를 세 학기만에 중퇴하고 프린스턴 대학으로 가 폴로 선수로 이름을 날리면서도 숨마 쿰 라우데, 즉 수석 졸업의 기염을 토한다. 이후 미 육군에 들어가 쿠웨이트, 이라크, 아프가니스탄에 파병되어 상이군인에게 수여하는 퍼플하트훈장과 은성무공훈장을 받고 제대했다. 끝내주지? 이후 로즈메리 클루니, 로버트 스텍, 팻 히치콕, 세실 B 드밀의 추천서를 받아 유명 통신사의 동남아 주재원으로 인생의 전성기를 맞았다.


  홍콩에서 1년, 자카르타에서 2년을 보내는 동안 미국의 거대 그룹 PS&S 태평양 선박 및 조선의 회장 딸인지는 몰랐지만 처음부터 눈이 맞은 에벌린과 결혼하는 행운을 얻었다. PS&S 자카르타 지점의 강당에서 열린 초호화 결혼식에는 인도네시아에 상주하는 주요 백인국가에서 온 외교관들과 정부 고위 공무원은 당연히 참석해야 했던 자리였고, 심지어 대통령의 축전까지 받을 만한 대단한 자리였지만 참석하여 자리를 빛내주지 못한 한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오티스 버드송씨.

  콩을 볶는 신혼기간이 끝나는 시점에 맞추어 미국의 저널리즘은 동남아 지역의 특파원 수를 대폭 감원하기에 이른다. 원래 출중한 결과물을 내온 보이드 핼버슨은 혼자 살아남은 대신 여러명이 해온 작업을 자기 혼자 맡아 그야말로 중노동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이리하여 동남아 각국으로 며칠씩 출장을 해야 했던 것도 당연해, 얼굴을 마주치지 않으면 사이도 멀어진다는 진리에 입각해 아내 에벌린과의 관계도 조금씩 삐걱거리기 시작했고, 하루는 부부가 대판 싸우고 있다가 품에 안고 있는 아들을 순식간에 손에서 놓쳐, 아이가 그만 충격으로 죽고 말았다. 이게 두번째 트라우마.

  첫번째 트라우마는 그럼 뭐냐고? 이걸 알려드릴까, 말까? 에라 좋다. 어차피 책의 절반도 읽지 않아 독자가 알게 될 터인데 뭘. 위에서 얘기한 보이드의 이력서가 전부 허위였다는 거. 거짓말. 프린스턴, 폴로, 숨마 쿰 라우데, 퍼플하트와 은성무공훈장, 이거 다 싹 거짓말이다. 유명인사 네 명의 추천서는, 추천서 자체가 허위문서였는지 아니면 추천서를 받았다고 거짓으로 이력서에 기록했는지 그건 확실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하여간 보이드는 네 명과 얼굴도 마주쳐본 적이 없다.

  그럼 애초에 가지고 있던 이 첫번째 트라우마의 원인인 거짓말이 어떻게 들통났을까? 이것도 알려드려? 뭐 그러지. 여기까지 왔으니 굳이 숨길 필요 있나?


  에벌린과 사이가 멀어지기 시작할 때, 장인이 회장으로 있는 PS&S의 자카르타 조선소에서 만든 선박 세 채가 침몰하는 사건이 벌어진다. 만일 미국에서 배를 만들었으면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았을 거라 생각이 들 정도로 형편없는 배였다. 규격에 한참 미치지 못하는 얇은 강판, 군데군데 용접상태도 개판이었고, 당연히 설치되어야 했을 장비도 누군가가 어디로 빼먹었는지 달려 있지 않았다. 이런 정보가 보이드의 손에 들어왔던 것. 한참 잘 나가던 보이드는 어느새 퓰리처 상을 꿈꾸기에 이르렀는데 이런 정보가 손에 들어왔으니 그걸 그냥 내버려둬도 바보 아냐?

  이런 모든 건 PS&S가 인도네시아의 관련 공무원들에게 찔러준 현금 뇌물로 통과할 수 있는, 아무것도 아닌 일이었지만, 그 아무것도 아닌 일이 결국 선박의 침몰이라는 대참사로 이어졌고, 그것도 무려 거의 시차 없이 세 척이 한꺼번에 태평양 차가운 바다 밑으로 가라앉아 버렸던 거다. 이건 보도만 나가면 대박, 당연히 퓰리처 상 감이었다.

  근데 명색이 거대회사의 회장인 두니가 가만히 있었겠어? 그는 별의 별 인맥과 탐정과 변호사와 깡패들과 심지어 동사무소 직원들까지 동원해 보이드의 행적을 추적하기 시작해, 그의 첫번째 트라우마를 찾아냈다. 보이드가 저질러온 온갖 거짓말을 한 방에 다 까발렸던 것. 그가 한 거짓말만 여기에 써 놓으면 A4 용지에 행간/자간 좁게 하고 10 폰트로 써도 꽉 차게 한 장 분량이다. 그러니까 앞 문단에서 말한 그의 거짓말은 그저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 정도라고만 감을 잡으시라. 인간 자체가 몽땅 거짓이었던 것. 그걸 홀아비이자 동성애자인 장인 두니가 먼저 만장하신 관계자 여러분께 폭로해버린 것.

  이것으로 보이드의 인생은 종쳤다. 라고 보이드는 생각했다. 이후 아이까지 죽었으니 그는 당연히 이혼당하고, 귀국해서, 소매 체인점 ‘JC 페니’의 지점 매니저로 지내고 있다. 인생이 종치기는. 지점 매니저가 어딘데. 참 배들 불러요. 하여간 보이드의 거짓 때문에 287쪽에서 PS&S의 회장 두니가 실토하듯이 자기가 저지른 “부당이득, 시세조작, 탈세, 금수 조치 불이행, 내부자거래, 사취 모의, 무기수출통제법 위반” 등등을 합쳐 형을 받았다 하면 3백년 형은 너끈할 범죄도 묻혀 버렸다.


  보이드는 이제 뭔가를 끝내야 한다고 결정했다. 그리하여 2019년 어느덧 49세가 된 그는 토요일 오전에 키와니스 브런치 모임에 참석했다가 중간에 슬쩍 나와 지역사회 국법은행에 가서 템프테이션 38구경 권총을 꺼내, 토요일이라 창구에 혼자 있던 29세 행원 앤지 빙, 2년 동안 서로 추파를 던지기도 했던 바로 그 앤지 빙에게 가방을 던져주며 “30만 달러만 챙겨봐.”라고 무장강도를 시현하기에 이르렀다.

  그게 마음먹은 대로 되나 어디. 앤지 빙이 대답한다. “아저씨, 이 은행에 있는 돈을 다 모아도 반도 안 되요.” 그래서 서랍이란 서랍, 금고란 금고를 다 뒤져 8만1천 달러 조금 안 되는 돈을 챙겼고, 앤지 빙을 인질 삼아 둘이 함께 낡은 차를 타고 남쪽으로, 남쪽으로 내려간다. 오래된 전 아내 에벌린의 여권을 앤지에게 건네주고 둘은 멕시코 국경을 넘어 산타로살리아 호텔에서 주로 국법은행의 돈을 써가며 여드레를 보내고 다시 돌아온다. 앤지 빙. 이 터무니없이 말도 많고, 오지랖도 넓은 아가씨와 인생 다 산 거 같은 남자 보이드 사이에 뭔가 있을 거 같지?

  참고로, 보이드의 상습적 거짓말은 미국에서 대 유행한 전염병의 일종이었단다. 작품 시작이 2019지? COVID-19가 유행했던 것처럼 이전에는 전 미국적으로 거짓말이 그렇게 유행이었다고. 물론 팀 오브라이언의 주장에 의하면.

  자, 이것으로 작품은 시작한다. 이제 본격적인 로드무비의 막이 올라가니 기대하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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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넬로페 2026-03-03 08: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전작을 읽지 않고 이 작품을 먼저 읽어도 될까요?

Falstaff 2026-03-03 08:58   좋아요 1 | URL
아무 문제 없을 거 같네요. 즐기셔요!

yamoo 2026-03-03 11: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이 책은 확실히 재밌을 거 같아욤! 별5개니 무조건 구매각입니다..ㅎㅎ

Falstaff 2026-03-03 15:34   좋아요 0 | URL
ㅋㅋㅋ 대신 나중에 탓하기 없기입니다!

coolcat329 2026-03-03 14: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들이 가지고 다니던 것들>을 언젠가 꼭 다시 읽고 싶었는데, 21년만에 신작소설이 나왔다니 넘 반갑네요.
적립금이 7천 원 넘게 있어서 뭘 살까 고민했는데 폴님께 땡투하고 구매합니다.

Falstaff 2026-03-03 15:35   좋아요 1 | URL
땡투 고맙습니다!!
329님은 재미나게 읽으실 수 있을 거라고 믿씁니닷! ㅎㅎㅎ
 
후리 - 2024 공쿠르상 수상작
카멜 다우드 지음, 류재화 옮김 / 민음사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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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0년 개띠 작가 카멜 다우드는 알제리 북서부 항구도시 모스타가넴에서 경찰관 아버지와 중산층 주부 어머니 사이의 6남매 가운데 맏이로 태어났다. <후리>를 읽기 위해서 독자는 작가의 바이오보다는 알제리 현대사를 먼저 훑어보는 것이 좋다.

  오랜 프랑스의 식민 통치에서 독립한 해가 1962년. 알제리의 식민지 추락은 우리나라처럼 몇 위정자들이 식민국의 작위를 얻어가며 합의서에 도장 콱 찍어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프랑스는 알제리를 손에 얻기 위하여 알제리 전 지역에 흩어져 있는 모든 부족을 무력으로 점령해야 했다. 이 싸움에서 알제리인의 저항이 얼마나 뜨거웠는지는 아시아 제바르의 <사랑, 판타지아>에 잘 그려져 있다. 마찬가지로 2차세계대전 승전국이었던 식민국으로부터의 해방 역시 (우리처럼)종전협정에 의해 그냥 얻은 것이 아니라 수많은 국민들의 목숨을 희생시킨 해방전쟁을 통해 이루어졌다. 처절한 대가를 치룬 알제리는 그리하여 2차세계대전이 끝나고 17년이 지난 1962년에야 독립국의 국기를 올릴 수 있었다. 독립전쟁에 참가해 전투를 하고 상처를 입고 불구가 된 사람들은 당연히 베테랑의 품격을 지킬 수 있었으며 국민들의 존경을 받아 곳곳에 기념비의 암각문자로 자신의 이름을 전할 수 있었다.

  알제리의 정식 국호는 알제리인민민주공화국. 사회주의 국가로 시작한 이 나라는 당연하게 국민해방전선(FLN) 일당독재를 유지했다. 초대 국방장관이었다가 쿠데타로 대통령에 오른 부메디엔이 소련, 중국, 동유럽의 본을 받아 석유산업 등을 국유화하는 것은 물론 독재 장기집권을 확립해서 국제유가상승 등으로 1978년까지 잘 살다 갔다. 부메디엔 사후에 집권한 벤제디드 역시 높은 유가 덕택에 정권을 유지할 수 있었으나 1985년부터 석유가격이 하락하는 바람에 국고가 비기 시작했고 동시에 높은 실업률을 기록했다. 독재자는 정치 때문에 무너지는 것이 아니라 배고픔 때문에 망가지는 법. 1988년부터 대규모 시위가 발생하더니 1989년에는 일당제가 무너지고 이슬람해방전선(FIS)이 등장했다.

  다음해인 1990년에 치룬 총선거에서 해방전선이 의회의원 231석 가운데 188석을 차지하는 놀라운 압승을 거두었다. 모두가 생각하지 못한 압승. 이제 이슬람 원리주의자들의 해방전선이 독재를 시작할 것이 확실한 처지.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군부가 다시 쿠데타를 일으켜 FIS를 불법화하고 이들을 강하게 탄압하기 시작하면서 이슬람 반군세력이 무장이슬람그룹을 이루어 10년간 본격적인 내전으로 치닫게 된다.

  10년 후인 1999년에 대통령에 오른 부테플리카는 이슬람주의자들을 사면하고 대신 해방군은 해산하여 내전의 종식을 맞았는데, 대 프랑스 독립 전쟁과 달리 내전은 죽이고, 불구로 만들고 재산을 빼앗는 등의 고통을 같은 민족끼리 서로 저질렀다는 데 더 큰 상처를 낼 수밖에 없었다. 부테플리카 정부는 2005년에 이슬람해방군의 죄를 묻지 않겠다고 선언해 그나마 남아있는 내전의 앙금을 지우려 했고, 실제 가해자와 피해자의 입장은 전혀 고려하지 않은 상태에서 어쨌든 내전은 역사에서 사라지게 됐다. 이 일 이후로 내전에 관하여 논의하거나, 대화하거나, 입에 올리는 일은 암묵적으로 거부당하고, 백안시하고, 피해가야 하는 것으로 여기게 되었을 뿐.


  서론이 너무 길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카멜 다우드 역시 피가 끓는 10대 시절에는 이슬람원리주의에 마음이 기울었으나 오랑 대학에 진학해 프랑스문학을 공부하면서 원리주의의 폭력성이 지나치다는 걸 확인했는지 결별하고, 프랑스어로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결혼을 했지만 아내가 히잡을 쓰기 시작하자 이혼한 경력도 있다. 이제 다우드는 확실하게 종교에서 멀어졌다. 그는 몇몇 원리주의 입장의 이슬람 지도자 이맘들에 의하여 사형선고인 파트와 선언을 받은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이슬람을 부정하며, 아랍 문자를 배신했다는 죄목으로. 그럼에도 계속 쓴다. <후리>가 2024년에 공쿠르상을 받았지만 알제리 내전의 참상을 다루었다는 이유로 알제리에서는 출판은 물론 읽는 행위, 반입도 할 수 없다. 나도 알제리,하면 프랑스 식민전쟁과 독립전쟁, 그리고 용감한 축구를 하는 나라로만 알고 있었지, 내전이 있기는 했으나 <후리>에서 읽을 수 있는 처참한 수준이었는지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있었던 일은 언젠가 밝혀진다. 역사가 하지 못하거나 준비중일 때 가끔은 문학이 먼저 밝히려 애를 쓰기도 한다. 이 책이 그런 문학 가운데 하나이다.


  후리. 브리태니커 사전에 “천국에서 독실한 무슬림을 기다리는 아름다운 처녀” 또는 “정화된 아내” “흠 없는 처녀”라고 설명한다. 그러니까 실제 생활에 존재하지 않는 일종의 영혼. 그러나 후리는 조금 뒤로 미루자.

  주인공 오브. 2018년에 스물여섯 살. 알제리의 아름다운 항구 오랑에서 어머니 하디자와 함께 살고 있다. 직업은 미용실 주인. 길 건너 맞은편에 모스크가 있고, 젊고 잘생기고 정말 하늘에서 내린 아름다운 목소리를 가진 이맘은 아쉽지만 이슬람원리주의에 입각한 여성관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히잡도 쓰지 않고, 바지를 입고 다니며, 몸의 여섯 군데에 한 문신 가운데 그게 드러나는 부위도 있어서 오브를 매우 마땅하지 않게 생각한다. 희생절에 맞춰 셔터를 내린 날 미용실 셔터를 부수고 난입해 기물을 부수고 쓸만한 것은 몽땅 훔쳐간 절도범의 뒷배에 혹시 이 이맘이 있는 건 아닐까 여길 정도로. 읽다보면 이맘이 시켜서 그랬다는 건 아니고, 강도를 당할 것을 미리 알고 있지 않았을까 싶다.

  변호사 엄마를 두어 엄마가 출장을 간 사이, 전부터 사귄 동갑내기 어부 청년과 사랑을 해 몸에 수정란이 착상을 했으나, 청년은 그걸 알지도 못한 상태에서 지중해를 건너 스페인으로 밀항한 후로는, 갔는지, 갔으면 어디에 있는지 모르는 상태이다. 이슬람 사회에서 여자가 결혼도 하지 않고, 아이의 아빠가 누군지도 모르면서 임신을 했으니 이것 참. 그럼에도 오브는 자기 배 속의 아이를 딸이라 단정하고 ‘후리’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이렇게 작품의 제목이 <후리>가 된다.


  오브. 원래 이름은 오브가 아니었다.

  오브가 살던 곳은 하드 셰칼라. 언덕 위에 집이 있고, 건천이 흐르는 척박한 땅에 농장을 지어 살았다. 부모와 언니. 너무 오래 전이라 파편 같은 기억뿐이다. 언니가 물잔을 가만히 들고 있으면서 물잔에 별을 담아 건네던 추억을 잊을 수 없다. 눈을 가리고 숨바꼭질을 하던 것도. 그리도 당연히 그날.

  1999년 12월 31일.

  산에서 산사람들이 내려왔다. 수염 난 사람들이라고도 하고 해방군이라도 하는. 수염 난 사람들은 하드 셰칼라 주민 약 천 명을 건천으로 데려갔으며, 오브의 가족들도 언덕 위로 데려 올라갔다. 내전이 끝나는 날. 그러나 모든 원리주의자들이 전쟁을 끝낸 건 아니었다. 아니면 아직 소식을 듣지 못한 집단이었는지도 모른다. 이들이 마을을 통째로 점령하고, 종교적 판단에 의하여 천 명에 이르는 주민들에게 파트와를 선언했는지, 아니면 저 태초의 이브라힘처럼 자기 아들을 목 베어 신에게 바치려 했는지, 이들의 목을 베기 시작했다. 상징적 의미가 아니라 진짜로 목을 베는 참수를 말한다.

  한 남자가 다섯 살 먹은 오브의 머리를 잡았다. 칼이 예리하지 않았는지, 남자가 초보였는지, 아직 완력이 덜 성장한 청년이었는지, 칼날은 오브의 왼쪽 귀 아래로 들어가 오른쪽 귀 아래까지 부욱 그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칼날이 지나가며 후두와 성대와 식도와 혀를 갈랐음에도 효과적으로 경정맥과 경동맥을 절개하지 못한 상태로 던져 버리고 말았다. 피가 철철 흐르는 오브. 오브는 아프지 않다. 아마도 아드레날린이 과하게 분비되었거나 죽음 바로 이전의 실신 비슷한 상태였는지 모른다. 눈에 옆에 누워 참수의 칼을 기다리는 언니가 보인다. 그런데, 언니가 말은 하지 않고 손가락으로 무엇을 이야기한다. 이야기가 아니다. 손가락으로 숫자를 센다. 하나, 둘, 셋, 넷…, 그리고 눈을 감는다. 오브는 죽어가면서 무슨 뜻일까 잠깐 생각하고는, 절대 다시 뜨지 않을 눈을 감는다. 절대, 절대로 뜨지 않을. 적어도 이곳 언덕의 건천에서는.


  몇 시간 후 붉고 푸른 빛과 함께 목의 절반이 잘라졌지만 아직 완전히 떨어지지 않은 오브의 몸이 움직인다. 그리고 암전. 어딘가 판판한 곳에 실려지고, 몸이 움직이다. 누군가 한 여자의 목소리가 귀에 들린 것 같다. 또다시 암전. 그곳은 가장 가까운 도시, 그러나 멀리 떨어진 동부의 작은 도시 렐리잔에 있는 병원이었으며, 귀에 자기 말이 들리냐고 묻던 여자는 지금 오브의 두번째 엄마를 맡은 용감한 하디자였는데, 또다시 붉고 푸른 빛과 함께 몸이 흔들린 다음에, 오브는 성대를 잃어 말을 하지 못하는 벙어리가 되었다. 그것 말고도 왼쪽 귀에서 오른쪽 귀까지 턱 아래로 이어지는 17센티미터의 꿰맨 자리 때문에 오브는 위고의 <웃는 남자>와 위치와 형태는 조금 다르지만 <웃는 소녀>가 되고 말았다.

  오브는 두가지 언어로 말한다. 밤night 같은 언어와 초승달 같은 언어. 안의 언어와 밖의 언어. 소위 말하는 완전한 벙어리는 아니다. 디즈니 만화 도널드의 목소리와 비슷한 걸 작은 소리로 낼 수는 있다. 호흡하기 위하여 인후에 박은 튜브를 통해 숨도 쉬고 말도 나온다. 일주일에 한 두 번 튜브를 갈려면 소독액으로 손을 깨끗하게 씻고 먼저 목에 꽂힌 튜브를 뺀 다음 완전히 살균한 튜브로 갈아 끼운다. 혀와 식도에 큰 문제가 있어서 음식은 액체 상태로 갈아 그저 목을 넘길 뿐이다. 이렇게 21년을 살았다. 그래서 2021년이 됐고, 스물여섯 살의 미혼 임산부가 되었으나 아직 엄마 하디자도 모른다. 그리하여 오브는 저 변두리 의사의 처방을 받아 매우 위험한 임신중절약 세 정을 가지고 있어, 자기 속의 후리를 없앨 작정이다. 엄마 하디자가 자신의 성대 수술 가능 여부를 묻기 위하여 브뤼셀의 외과의사에게 간 며칠 안 되어.

  그러다가 마음을 바꾼다. 아직도 계속되는 종교와 남자들의 폭력, 비이성적 사고 때문에 마음이 바뀐 게 틀림없다. 자신한테 저질러졌던 폭력, 범죄, 참수라는 형태로 드러난 이브라힘의 희생제의가 있던 곳, 하드 셰킬라에 가 보아야겠다. 마음먹은 오브. 이슬람 국가에서 젊은 여자가 혼자 여행을 해? 그것도 희생절에? 결코 쉽지 않은 길.

  슬픈 이야기. 슬픔이 슬픈 이야기로만 되어 있으면 진정한 비극이 아니다. 좋은 비극이 되려면 슬픔 속에 아름다움이 들어 있어야 하는 법. <후리>가 그렇다. 슬프고 아름답다. 하기 힘든 이야기를 용기 내어 드러낸, 그래서 극동의 한 독자가 지역의 아픈 내력을 알게 해준 작가가 고맙기도 하다. 세상의 모든 아픈 사람들에 관하여 우리는 알 필요가 있다. 이렇게 문학이 탄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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