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가방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소설선집
세르게이 도블라토프 지음, 김현정 옮김 / 지식을만드는지식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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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판사 ‘지식을만드는지식’ 소위 ‘지만지’. 참 매력적인 회사다. 쉽게 접근하지 못하는 작가들의 빛나는 소설들을 찾아 출간하는 특별한 출판사인데, 다만 책값이 오지게 비싸다. 세르게이 도블라토프라는 소설가의 이름을 친애하는 서재 친구 잠x냥 님의 소개로, 이 출판사를 통해 처음 들었다. 서문과 몇 편의 단편으로 간신히 200쪽이 넘는 작은 책의 정가를 18,000원으로 책정한 것에 놀랐고, 5%밖에 깎아주지 않는 걸 보고 기겁을 했다. 얼마나 좋은 책이기에. 이런 책, 예를 들어 ‘한국문화사’란 기관에서 나온 조지 엘리엇의 <다니엘 데론다> 같이 무지하게 비싼데다가 한 푼도 안 깎아주는 회사에서 나온 책 같은 건, 본전 생각이 나서 본문을 더욱 까다롭게 볼 수밖에 없다. 나, 돈 안 많거든. <다니엘 데론다>에 관해 다시 한 번 욕바가지를 쏟아 부을 생각은 없고, 오직 <여행가방>만 놓고 따져보면 200쪽짜리 책에 각주를 135번이나 달아, 매우 성실하게 작품을 설명하고 있기는 했다. 물론 각주의 대부분은 읽자마자 곧바로 잊어버렸지만. 역자 김현정의 한국말 번역도 좋다. 오역 여부는 당연히 모른다. 키릴 문자를 배운 적이 한 번도 없어서. 그래도 한 때는 키릴 문자 읽을 줄은 알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리 길게 불평하는 건, 교정 교열에 관해서는 다른 출판사보다 나은 수준이 아니라는 점 때문에. 여기서 다시 한 번. 책이 비싸잖아. 그러니 교정 교열도 더 잘해야지. 가격은 품질과 조금은 비례해야 하는 거 아냐? 그냥 간단하게 한 가지 예만 들자. 서문이 끝나고 첫 번째 본문 <핀란드제 축면사 양말>의 세 번째 문장.
 “학교 건물들은 도시의 구(久) 지구에 위치하고.....”
 역자 김현정이 실수했으면 교정 과정에서 발견했어야지. 구 지구(久 地區)가 뭐니? 신대륙(新大陸)의 상대 말이 구대륙(舊大陸)이 아니고 구대륙(久大陸)이란 말이지? 비싼 책 읽기 시작하면서 초장부터 초 쳤다. 이거 하나가 아니다. 몇 군데 더 있다. 그건 출판사에서 직접 찾아보고 고쳤으면 좋겠다. 한 번도 ‘꼼꼼하게’는 검토하지 않은 거 같다. 힌트를 주자면 한문표기가 아니라 한 문장에 같은 구절을 두 번 쓴 것도 있다면 될까.


 도블라토프, 생전 처음 들어보는 이 체제비판 적 소설가는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자기 작품을 소련 내에서 출판할 방법이 없다는 걸 알아채고, 원고를 서방세계로 몰래 빼돌려 출간을 하기에 이른다. 당시에 이런 작가들 좀 있었다. 50년대에 벌써 보리스 파스테르나크의 <닥터 지바고>의 원고가 빼돌려져 이탈리아에서 출판이 된 것을 시작으로 문인들의 해외출판 경향이 늘어가고, 소비에트 정권은 이 배신자들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골머리를 썩이게 된다. 다들 아시다시피 파스테르나크는 나이 먹은 지바고 씨의 모자 밑으로 쌀알만 한 하얗고 포동포동한 이(蝨)가 이마를 타고 암벽 타듯 기어 내려오는 작품을 쓴 덕택에 1958년에 노벨 문학상을 받음에도 불구하고 흐루쇼프 정권에 의해, 상을 받으러 가든 말든 마음대로 하시오, 대신 한 발짝이라도 국경을 넘으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것이오, 라는 경고를 듣고 결국 한림원 방문을 포기해버리고 말았잖은가. 하여간 소비에트 프롤레타리아 정권은 이후 (난 이이를 정말 싫어하는데 그건 별개로)솔제니친을 필두로 일단 약간의 세월 동안 콩밥을 먹인 다음 외국으로 추방해버리는 형태로도 나타난다. <여행가방>의 저자 세르게이 도블라토프도 이 경우에 해당한다. 더구나 도블라토프는 처자식들이 이미 미국으로 이민을 가서 뉴욕에 자리를 잡아 살고 있으니 다행스러운 결과라고 할 수밖에.
 도블라토프한테 몇 달 동안 콩밥을 먹이고 나서, 다행스럽게 해외추방은 아니고, 미국으로 이민을 허가하는 장면이 ‘서문’의 첫머리에서 나온다. 이렇게.
 “비자 담당 부서의 이 재수 없는 년이 내게 말하더군요. ‘출국자 개인당 여행 가방은 세 개, 규정이 그래요.’”
 심심한데 한 번 까다롭게 굴어볼까? 여기서 '재수 없는 년' 앞에 지시대명사 ‘이’가 붙은 이유는 뭐지? 지금 서문을 쓰고 있는 시기가 이미 미국에 도착해 자기가 가지고 있던 원고는 다 출간을 하고, 이제 소련에서 있었던 과거의 지극히 개인적인 일 몇 가지를, 몇 개의 사물을 내세워 한 권의 책으로 쓰고 있는 시기. 그러니 원문에 어떻게 쓰여 있는지는 몰라도 우리말 번역문에서는 전혀 쓸모없는 단어가 바로 지시대명사 ‘이’다. 빼는 게 제일 좋고, 그래도 쓰고 싶으면, 바람직하지 않지만 차라리 ‘그’를 넣어야 하는 거 아냐? 이리 까다롭게 구는 이유는? 맞습니다. 책값이 비싸서. 이 정도면 나도 너무 집요한가? 좋다, 반성한다.
 까다롭게 굴면서 한 가지 말은 했다. 이 작품은 미국에서 썼다는 거. 도블라토프가 여행 가방 세 개 안에 들어갈 자기 재산목록을 챙겼다. 그랬더니 에그머니, 내가 그동안 살아온 것이 겨우 이것밖에 되지 않았던가, 겨우 가방 하나만 채울 수 있을 뿐이었다. 여행가방. 합판에 천을 덧댄, 모서리마다 니켈 도금을 가방. 자물쇠가 고장 나서 빨랫줄로 칭칭 감아야 했던 것. 이것 하나만 가지고 도블라토프는 이탈리아를 거쳐 미국에 도착하는데, 그동안 작가는 가방을 한 번도 풀어보지 않는다. 몇 달 후, 뉴욕에서 아내 레나와 딸 카탸와 합류하고, 다시 아들이 태어나, 아들이 좀 커져서 장난을 치기 시작해 견디지 못한 아내가, ‘지금 당장 벽장으로 들어가!’라고 호통을 치기 전까지 한 번도 열어보지 않았던 가방. 아이가 금고형에 처해진 벽장을 열어보니 아이는 가방 위에 올라 앉아 태연하게 아빠를 올려다보고, 이제야 생각이 난 아빠는 드디어 가방을 열어보기에 이른다. 그 속에선 더블 버튼 양복, 포플린 셔츠, 종이에 싼 단화, 인조 모피가 달린 벨벳 재킷, 가짜 물개 모피로 만든 겨울 모자, 핀란드제 측면사 양말 세 켤레, 운전기사용 장갑, 그리고 장교용 가죽 벨트가 나온다.
 가방 속에서 나온 자질구레한 낡은 의복들. 도블라토프는 잠깐 헛웃음을 지었을지도 모른다. 이미 20년 가까이 흐른 세월 속에서 의복과 신발이 어떻게 자기 손에 들어오게 되었는지, 하필이면 지상에서 가장 거대한 땅, 소비에트를 영구히(이럴 때 쓰는 한자 단어가 구‘久’다.) 떠나오면서 버리지 못하고 가져온 낡아 남루해진 물건들. 우린 이런 물품을 통해 누추한 기억을 떠올린다. 그걸 추억이라고 칭하면서. 그러나 도블라토프의 추억은 결코 쓸쓸하거나 황량하지 않다. 오히려 신랄한 해학과, 규격화된 사회 속에서의 하찮은 반항과, 껄렁했던 젊은 시절에 대한 미소 띤 애정이 들어있다. 이를테면 이것도 사소설이라 할 수 있으나 당시 소련 사회, 그중에서 스탈린그라드의 초상을 잘 반영하고 있기도 해서, 사소설이란 범주에 가둘 수는 없을 것. 해학과 풍자와 허풍과 재미와 객기가 적절하게 뒤섞인 유쾌한 잡탕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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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나무 2019-01-14 10: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진짜 책값이 비싸면 더 꼼꼼하게 살피게 되더라구요.
지만지 책은 정말이지 비싸서 선뜻 사지 않게 되는데... 편집이 좀 이런 식이면....--;;
요럴 때는 책 자체와 출판사에 대한 별점을 따로 할 수 있으면 좋겠어요. ㅎㅎ


Falstaff 2019-01-14 10:47   좋아요 0 | URL
맞습니다.
저도 위에 쓴 약간의 결함과 가격 때문에 별 하나를 깎았답니다. ^^;

레삭매냐 2019-01-14 11: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만지에서 나오는 책들은 축약본이라는
썰이 있어서 선뜻 손이 가지 않더라구요.

Falstaff 2019-01-14 11:32   좋아요 0 | URL
지만지 책 가운데 ˝천 줄 읽기˝란 제목이 달린 책이 있습니다. 그건 확실하게 축약본 맞습니다. ˝큰 글씨 책˝은 글씨만 큰 글씨로 했는지, 큰 글씨에 맞게 내용도 축약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근데 아무 표시 안 한 책은, 축약하지 않은 거 같습니다. 하긴 티를 안 내고 줄이는 게 기술이긴 합니다만. ^^;
졸라의 <쟁탈전> 같은 경우엔 500쪽이 넘어가거든요. <쟁탈전>의 후속편이랄 수 있는 <돈>이 문학동네에서 나왔는데 그건 해설까지 600쪽. ㅎㅎㅎ 잘 모르겠습니다. 아닐 거 같습니다만....

잠자냥 2019-01-14 12:1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ㅎㅎ 지만지 버전으로 읽으셨군요. 저는 이 책을 2010년 뿌쉬낀하우스라는 출판사에서 나온 버전으로 읽은 터라 지만지 버전은 어떤지 잘 모르겠네요. ㅎㅎ
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7421572

‘학교 건물들은 도시의 구(久) 지구에 위치하고.....‘는 제가 읽은 책에서는 어떻게 표현했는지 궁금해지네요. 집에 가서 찾아봐야겠어요. ㅎㅎ

근데 지만지 책값 정말 비싸긴하죠. 이 얇은 책을.... -_-;
참, 최근에 지만지에서 출간된 유진 오닐, <상복이 어울리는 엘렉트라>가 완역본인지 궁금해서 지만지에 완역본은 완역본이라고 표시해달라고 요청한 적이 있는데요. 그때 돌아온 답변은 아래와 같습니다.

- 참고로, 희곡선집은 발췌가 무의미하기에 거의 완역으로 출간되고 있습니다. 초기 축약본으로 출간했던 것들도 차차 완역으로 재출간하고 있으며 축약본에는 제목에 ‘천줄읽기‘를 달아 완역과 구분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축약본이라면 ˝상복이 어울리는 엘렉트라 천줄읽기˝라는 제목이 됩니다.-

그리고 큰 글씨 책은 천줄읽기라는 표시가 없으면 축약본은 아닌 거 같아요. 제가 예전에 도서관에 카렐 차페크 책 신청했는데 (도서관 정책상) 큰 글씨 책으로 구입해주는 바람에 -_-;; 큰 글씨 책으로 읽었는데요, 완역본이었습니다.

Falstaff 2019-01-14 12:40   좋아요 1 | URL
아, 이게 다른 출판사 책도 있군요! ㅋㅋㅋ 세르게이 도나또비치 도블라또프. 검색이 안 될 수밖에, ㅋㅋ.
제 짐작이 맞았군요. 큰 글씨 책도 축약은 아닐 거란 거. 근데 큰 글씨 책은, 지만지 소설 선집보다 훨, 훨씬 비싸서 감히 살 엄두가 나지 않아요. 늙어 로또 맞았는데 이제 작은 글씨 안 보이게 되면 모를까 말씀이지요. 큰 글씨 책 차페크를 읽는 잠자냥 님. 하하하, 그림이 그려집니다.
 
어느 미술애호가의 방 인문 서가에 꽂힌 작가들
조르주 페렉 지음, 김호영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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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연히 읽은 <인생 사용법> 한 권으로 난 뻑 갔다. 이거 뭐야. 누구야? 그림을 찾아보니 거 참 불량하게도 생겼네. 완전히 동네 양아치 형 같다. 근데 거 참, 어떻게 <인생 사용법> 같은 책을 쓰려 마음을 먹게 됐는지, 아예 불가사의 자체였다. 뭐라 할까? 레고? 한 아파트에 사는 인간들의 모습을 레고 조립하는 것처럼, 또는 해체하는 것처럼 이리저리 뜯어보고, 고쳐보고, 돋보기를 들이내보다가 난데없이 팽개치기도 하는 모습이, 보통의 소설가라면 이 책 한 권의 에피소드 가지고 적어도 열권이 넘는 장편 소설을 쓰겠는데, 하는 심정. 아, 지금 생각해도 참 대단했다. 하여간 <인생 사용법>을 읽은 다음에(근데 그 책이 조금 비싸긴 하다.) 페렉에 꽂혀서 <사물들>, <W 또는 유년의 기억>, <잠자는 남자>를 읽었고, 지금 막 다섯 번째 페렉, <어느 미술애호가의 방> 읽기를 마쳤다. 이 책을 읽고 난 소감을 한 마디로 말하자면, 생긴 거하고 똑같이 정말 동네 양아치다.

 

 

 <어느 미술애호가의 방>을 읽으면 독일 출신 미국 이민자이자 전직 웨이터의 거부, 70명의 백만장자보다 더 많은 재산을 보유한 양조장 사장 헤르만 라프케. 이 거대 부호이자 미술애호가, 1913년 빌헬름 2세 황제 통치 25주년을 축하하기 위해 펜실베이니아 피츠버그에서 독일인회 주최로 대규모 행사를 벌이는데 행사의 일환으로 그의 회화 컬렉션을 전시하게 된다. 많은 그림 가운데 가장 주목을 받은 작품은 하인리히 퀴르츠가 양조장 사장을 그린 초상화였다. 그게 왜? 거울 속의 거울. 양조장 사장 라프케의 초상을 그린 그림. 인물의 배경이 되는 벽면에 그가 거금을 들여 모은 수집품들이 빼곡하게 전시되어 있고, 화가 퀴르츠의 그림 속에도 과거의 명작들이 다들 제각각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을뿐더러(마네가 그린 졸라의 초상 속에 벽에 걸린 자기 그림의 모사화가 걸린 것처럼), 그림 속에 또 미술애호가 라프케 사장을 그리고 있는 화폭이 있었다. 그래 그림 속의 그림에 다시 벽면에 가득한 명작들이 들어 있고, 그림 속의 그림 속의 그림에도 또 그렇다. 그리하여 이론상으로는 무한대 계속되는 거울 속의 거울 현상. 세 번째 그림 속의 화면은 가로 11cm, 높이 8cm. 첫 번째 화면에서 벽에 걸려 있던 그림이 두 번째 화면에선 조금 변형되고, 세 번째에서도 다시 변형시킨 특색 때문에 이 그림이 장안의 화제가 된다. 이쯤에서 미술평론도 했던 페렉이 지금 쓰고 있는 것이 ‘소설’ 즉 ‘구라’라는 걸 이해하게 됐다. 가로 11cm, 세로 8cm 안에 초상을 비롯한 모든 세부사랑은 그려 넣는 일이 그리 만만하지 않을 텐데, 독자가 갖는 권리, 의심이 들기 시작한 거다.
 이쯤에서 머리에 떠오른 또 한 명의 구라꾼, 로베르토 볼라뇨. 그가 쓴 <아메리카의 나치 문학>. 볼라뇨가 그의 책에서 숱한 나치 동조 문인들의 이름을 만들어서 마치 정말로 나치에 협력해 돈을 보내주는 등, 아메리카에서 파시즘을 전개하기 위해 노력했다고 어찌나 거짓말을 잘 하는지 처음엔 단박에 넘어갔다가, 어째 아직 살아 있는 인간들도 많다, 싶어 정신차려보니 여태까지 다 구라였던 기억. <어느 미술애호가의 방>에서도 양조장 사장 헤르만 라프케가 이제 나이 들어 죽자, 그의 소원대로 최고의 박제사에게 자신의 몸을 박제로 떠서 화가 퀴르츠가 그린 그림과 거의 비슷하게 만든 지하의 방에서, 초상을 그리던 의자에 앉아, 초상화와 함께 묻힌다는 내용까지 읽고, 하, 이것도 구라구나. 확신을 하게 됐다. 그래도 얼마나 능글맞게 거짓말을 잘 하는지 화가 이름 '하인리히 퀴르츠‘를 구글 검색까지 해봤다는 거 아닌가. 근데 등장하는 옛 화가들의 명단에 솔찮게 진짜 화가의 이름도 등장하니 검색해보기 전까진 정말 긴가민가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심지어 드가가 그린 <무용수들>은 1896년 1월에 화가에게 직접 6만 프랑을 주고 구입하고, 메종도레 식당에서 드가와 함께 콜체스터 특산 굴을 먹었다는데, 이땐 이미 빌어먹을 페렉이 지금 구라 중임을 알고서도 혀를 찰 수밖에 없었다. 세상에 이런. 드가가 그린 <무용수들>이 한 두 작품이냐 이거지.

 

참 매력적인 작품 <La Classe de Danse> 왼쪽 아가씨가 등이 가려운데 안타깝게도 손이 닿지 않는 거 같아!


 그런데, 15쪽에 시작해 100쪽에서 끝나는 단편 소설에 관해서는 여기까지만 이야기 해야겠다. 아직 덜 얘기한 나머지 하나, 가장 중요한 하나는, 마지막 두 페이지에 나오는 바, 그것까지 밝히면 이 독후감을 읽는 페렉 애호가 또는 애호가 준비생들에게 귀싸대기 몇 방 얻어 터져도 할 말이 없을 것 같기 때문이다. 그거, 정말 인간으로 하여금 할 말 없게 만든다. 그런 게 하나 마지막에 잔뜩 힘을 주어 도사리고 있다는 거 정도는 미리 알아도 뭐 크게 관계가 있을까.
 근데. 그게 뭐냐고?
 안 알려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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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미친 사내의 5년 만의 외출
에두아르도 멘도사 지음, 조구호 옮김 / 시타델퍼블리싱(CITADEL PUBLISHING) / 200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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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볼타 사건의 진실>, <경이로운 도시>, <예수를 부탁해요, 폼포니오>, <구르브 연락 없다>에 이어 다섯 번째로 읽은 멘도사. 이 정도면 멘도사 팬 맞지? <사볼타 사건의 진실>을 읽으면 저절로 <경이로운 도시>를 읽게 마련이고, 그 담엔 당연히 멘도사의 팬이 된다. 이렇게 두 작품 말고, 이어서 읽은 셋, 넷, 다섯 번째 작품은 ‘소품’으로 구분해도 그리 틀리지 않는데 이들의 공통점은 ‘기발하다’는 것. <예수를 부탁해요, 폼포니오>에선 정말로 어린 예수가 등장하고, 로마인 폼포니오가 당연히 예수의 유소년 시대에 간여하면서 겪는 역경을, <구르브 연락 없다>에서 ‘구르브’는 인간이 아니라 바르셀로나를 탐험하는 외계 생명체이고, <어느 미친 사내의 5년 만의 외출>은 정말 미친 사내, 그러나 광증 때문인지 복잡한 사건을 서로 엮어 꿰는 탁월한 능력이 있는 전직 범죄자를 5년 만에 잠깐 정신병원에서 꺼내 또 다른 범죄사건에 연루시키는 이야기다. 소품들의 특징은, 재기발랄하다는 것.
 <어느 미친.....>의 키워드 역시 유머 코드. 출생부터 검사 아버지와 전업주부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부르주아이며, 여러 나라 말을 할 줄 알아 UN에서 통번역을 직업으로 했던 멘도사가 이번에도 바르셀로나의 가장 하층 계급 속에서 좌충우돌, 숱한 블랙 유머와 갖은 기발한 발언과, 예상하지 못한 단어들의 폭죽놀이를 벌여낸다. 정신병원 안에서 축구단을 결성해 죽기 살기로 시합을 하다 갑자기 병원장 수그라녜스와, 형사반장 플로레스 경위와, 여학교 교장 수녀의 호출을 받아, 한밤의 기숙사에서 갑자기 사라졌다가 이틀이 지난 새벽 갑자기 등장한 여학생의 비밀을 밝히는 임무를 받는다. 왜? 애초에 이 미친 사내의 전직이 범죄자이자, 미친놈이자, 범죄자들과 형사들을 잇는 명예로운 프락치 또는 스파이, 혹은 이중 배신자였기 때문에.
 <구르브 연락 없다>에서 구르브가 바르셀로나에 처음 등장해 퍼마신 분수 물을 분석해보니 물과 똥으로 구성됐다고 했듯이, 사내에게 수그라녜스 원장이 펩시콜라 한 잔을 주며 5년 만의 외출을 허락한 순간, 미친 사내의 겨드랑에선 축구시합 동안 흘렸던 땀 때문에 지독한 액취를 뿜어내고 있었던 거다. 이후 책이 끝날 때까지 이 미친 사내는 단 한 번의 샤워도 하지 않고, 오히려 온갖 쓰레기와 상한 생선 등 비린내 나는 모든 것의 총합까지 더해져 무지무지한 악취로 인류를 질식시키게 된다. 그것도 모자라 완전히 낡은 600cc 메르세데스를 운전하고 다니는 아름다운 메르세데스의 집에 하루를 묵게 되는데 (헛된 희망은 품지 마시라. 그리 냄새나는 남자와 사랑을 맺을 여자는 없으니까!) 그녀의 부모가 명절 때마다 와서 자는 침대에 글쎄 오줌까지 싸버리는 만행도 불사한다.
 멘도사가 서문에 뭐라고 했느냐 하면, 이런 작품을 쓰기로 하고 주인공을 설정한 다음부터 자신이 한 일은 미친 사내가 하는 짓을 따라가 그대로 적기만 했다는 거다. 사내가 만들어내는 자기 이름이 한 스무 개(조금 과장) 정도 되고, 그것도 작가가 지은 것이 아니라 사내가 특정 상황을 만나 그냥 스스로 이름을 댔다고 하니, 참으로 뻥이기는 하겠지만, 그 정도로 몰두해 작품을 썼다는 뜻이라고 이해하면 될 거다.
 이 책, 재미나고 나온 지도 15년 가까이 됐으니 예전 정가 8,500원이 그대로 적용되어 값도 싸다. 거기서 10% 에누리 받으면 7,650원. 이 정도를 지불하고 하루를 즐길 수 있으면 요새 말로 ‘가성비’는 죽여주는 거 아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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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련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86
아서 밀러 지음, 최영 옮김 / 민음사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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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세기 말의 매사추세츠 세일럼. 이곳에서 젊은 일진 아가씨들 몇 명이 쇼를 벌인다. 그 가운데 애비가일, 열여덟 살의 이 아가씨가 일찍이 완고하고 정직하고 신심 가득한 농부 프록터 씨 집의 하녀로 일한 바 있었다. 이때 마침 부인 엘리자베스가 산후를 맞아 남편을 따뜻하게 대하지 않고 짧지 않은 기간 동안 곁을 멀리했다. 왕성한 혈기를 다스리기 힘들었던 잘 생긴 외모의 프록터 씨는 외양간에서 하녀 에비가일과 정을 통한다. 그러면서 불륜의 와중에 흔히들 그러하듯이 허튼 약속 정도는 흘려버렸겠지. 부인이 이를 알고 하녀를 해고하고 얼마 지나지 않은 상태. 동네 아가씨들과 어울려 한밤중에 숲 속의 한적한 곳에서 노래하고, 밤참을 끓여먹고, 알몸으로 춤을 추다가, 하버드를 졸업했으며 권위의식에 쪄들어 자신의 권위를 위해 그리스도나 하느님의 복음보다는 지옥불과 악마의 현시 같은 설교에 목숨을 건 목사 패리스에게 발각되고 만다. 아가씨들 속에 마침 패리스의 질녀도 섞여 있었는데, 이 아이는 알몸으로 있지 않았지만, 어쨌든 집단 히스테리인지 뭔지 그만 넋을 잃고 마치 악마에 홀린 것같이 거짓으로 시체놀이를 시작하며 세일럼 조용한 농촌 마을에 광기가 덮이기 시작한다. 한 밤중 알몸의 무도, 항아리에서 끓고 있는 마법의 물약처럼 보이는 모종의 수프, 흑인 노예의 주술적 중얼거림, 수프를 끓이던 항아리 속에 개구리 한 마리가 뛰어 들어갔다는 진술, 게다가 순진하기 그지없다고 자기 홀로 생각하던 질녀까지 속한 집단의 행위를, 하느님이나 예수의 말씀 대신 지옥의 유황불에 관해, 교회당에 찬란한 광명을 밝히는 황금촛대에 관해(돈을 거둬 지금 사용하고 있는 백랍의 촛대를 황금으로 바꾸란 뜻이지 뭐.) 신도들에게 설파하던 속된 목사는, 이 모든 것을 종합해 기독교에서 말하는 악마가 지옥에서 땅을 뚫고 솟아 세일럼에 악취 나는 입김을 쏘이기 시작했다고 해석한다. 그리하여 비벌리에서 악마퇴치에 일가견이 있으며 패리스에 비해 신앙적 양식과 인간에 대한 애정이 조금 더 있는 헤일 목사를 초빙하기에 이른다. 헤일 목사가 도착해 애비가일을 비롯, 한밤의 알몸의 무도를 벌인 처녀들과 상담을 하고, 이는 명백한 사탄의 왕림에 의한 사건으로 규정, 본격적인 마녀사냥에 나서게 된다. 혼란을 틈탄 애비가일, 이 맹랑한 아가씨가 사건의 우두머리 격으로, 그녀의 본심은 프록터 씨의 아내 엘리자베스를 마녀로 몰아 죽음에 이르게 하고 그 자리를 꿰차는 것.
 작품을 쓴 때가 1950년대. 매카시 선풍이 극에 달했던 시기. 밀러는 <시련>의 실제 무대였던 매사추세츠의 마녀 사냥 사건을 통해 매카시 열풍과 절묘하게 비틀어 버렸는바, 매카시 일당들도 바보는 아니라서, 희곡을 읽어보자마자, 어떻게 했느냐 하면, 기소해버렸다. 책 뒤에 나오는 작가 연보를 보면, 1953년에 초연했다고 나와 있는 반면, 출간은 언제 했는지 밝히지 않았다. 책 속에 묘사한 것을 볼 때, 초연 후 희곡 출간은 나중에 한 것이 분명하다. 책 속에 초연 당시 관객들의 분위기 같은 것도 적혀 있는 것을 보면. 또, 1690년대 미국 동부지역에서 기독교라는 이데올로기에 함몰된 집단에서 이데올로기란 이름으로 얼마나 야만스러운 일이 발생할 수 있는지 증명한 것을, 1950년대 세계정치에 빗대 이야기하기도 한다. 가령.


 “공산주의 이데올로기를 믿는 나라에서는 약간이라도 중요한 저항 행위는 모조리 자본주의라는 사악한 마녀와 결부되어 있고, 미국에서는 보수적인 견해의 소유자가 아니라면 붉은 지옥과 동맹을 맺고 있다는 비난을 공공연히 받게 된다.” (56쪽)


 내가 너새니얼 호손의 <주홍글씨>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것은 헤스터의 행각이 마땅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개척시대 초기의 답답한 청교도적인 질식 상태의 분위기를 견디기 힘들어서이다. 가톨릭에 의한 핍박을 피해 죽음의 항해를 무릅쓰고 아메리카에 도착한 청교도들은 가톨릭보다 더 지독한 교조적 기독교란 이데올로기를 만들어내고야 만다. 이후 1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까지 미국은 유럽보다 더 숨 막히고, 가식적이고, 보수적인 토양으로 변질된다. 솔직한 의견을 말하자면, 세상에서 빅토리아 시대 문화가 가장 찬란하게 구현되었던 곳이 바로 미국 아니었나? 정신적으로 미국인은 어쩔 수 없이 그들이 쫓겨 온 구대륙 문화에 한 발 꿀리고 들어갔던 거였다. 그 반동으로 구대륙보다 더욱 적극적으로 당시 유행에 휩싸였던 것이고. 물론 지금은 돈의 힘으로 역전이 되긴 했다. 하여간 구대륙보다 더 보수적이고, 고리타분한 구속의 전통이 미국에서 거의 마지막으로 발현되었던 것이, 내가 생각하기에, 바로 메카시즘 아니었나 하는 것. 17세기 말의 기독교는 인간 개인을 옥죄는 확실한 이데올로기였다. <주홍글씨>와 같은 이유로 나는 이 책을 고통스럽게, 아니, 과장하지 않고 말하자면, 힘겹게 읽었다. 이미 내 독후감을 읽으시는 분들은 다들 아시다시피, 유물론자로서 이런 논의를 보는 시점은 시니컬할 수밖에 없으니까. 더구나 가장 우습게 아는 종교적 장치가 바로, 지옥, 내세, 윤회, 등인데 그중 가장 웃긴 것이 바로 지옥과 악마. <시련>의 등장인물들이 가장 중요하게 논의하고, 재판하고, 서로 죽이고, 이런 행위가 지옥과 악마와 관련 된 것이었으니, 이를 어이할꼬. 밀러도 이렇게 이야기한다.


 “기독교 시대 이전까지는 하계(下界)가 결코 인간에게 적대적인 세계로 간주되지 않았으며, 모든 신들이 유용한 존재이고, 이따금 실수를 함에도 불구하고 본질적으로는 인간에게 우호적이었다는 것을 상기해 보면, 그리고 기독교가 인류에게 인간의 무가치함(구원받을 때까지는)을 꾸준히 조직적으로 주입해 온 사실을 보면, 악마란 인간을 채찍질하여 특정한 교회나 교회 국가에 굴복시키기 위해 시대를 막론하고 계속해서 고안되고 사용된 무기로서 필요했다는 것이 분명해질 것이다.” (55쪽)


 지배 이데올로기로서 기독교가 유럽을 중심으로 지구의 절반을 2천년 동안 효과적으로 다스렸던 이면, 저변, 기초적 생각은 인간이야말로 생존해야 할 아무 가치가 없는 죄악 덩어리라는 학습이었다는 의견. 물론 나도 전적으로 동의한다. 유일하고 배타적인 (자기들만의)사랑의 종교. 그러나 밥 잘 먹고 종교에 대한 논의는 더 하기 싫다. 소화 안 된다.
 책 속의 종교판관인 부주지사 댄포스는 이렇게 (기독교적으로 또는 매카시 식으로) 선언한다.


 “마을 사람들은 이 법정을 지지하지 않으면 반대하는 걸로 간주된다는 것이오. 그 중간 입장은 있을 수가 없어요. 지금은 아주 정확한 시기이며, 명백한 때요. 우리는 더 이상 악이 선에 섞여 세상을 미혹하는 어스레한 오후를 살아가는 것이 아니오. 이제, 하느님의 은총으로 빛나는 태양이 떠올랐으며, 광명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들은 필경 그 태양을 찬양할 거요.” (141쪽)


 청교도의 아버지, 필그림 파더들의 정체는 이랬다. 집단과 특정 개인의 이익을 위해 다른 개인의 삶과 생명과 재산을 희생시킬 수 있다는 의식. 현실의 오류를 지적하기 위해 가져온 역사의 한 장면을 읽는 일은 참 여러 가지로 재미있다. 하, 그러고 보니 이처럼 비 기독적인 독후감을 쓰고 있는 이 시간이 안식일 새벽기도 시간이다. 이런 게 인생이지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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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일즈맨의 죽음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18
아서 밀러 지음, 강유나 옮김 / 민음사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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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0년쯤 전에 한 번, 그리고 20년쯤 전에 한 번, <세일즈맨의 죽음>을 읽어보려 했다가 실패했다. 20년쯤 전에 산 책은 아직도 책꽂이에 꽂혀있다. 그 책하고 궁합이 맞지 않아 결국 읽지 못했을까 싶어서 이번엔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18번, 강유나 번역의 책을 골라, 다 읽었다. 이삼십년 전엔 이 드라마가 와 닿지 않아서 끝까지 읽지 못했을지도 몰랐다는 생각이 들었다. 드라마는 소설과 달라 내용을 미리 알아도 책을 읽는데 별 불편함이나 감동의 절감효과가 없다. 그래 간략하나마 스토리를 소개한다.
 60세가 넘은 주인공 윌리 로먼이 샘플이 가득 든 여행가방을 들고 집에 도착하는 장면으로 극은 시작한다. 34년 동안 한 회사에서 세일즈맨으로 일한 윌리. 이젠 늙어 운전도 힘에 겹고, 전엔 봉급과 영업수당을 받았지만 이젠 봉급 없이 수당으로만 생활을 꾸려야 하는데, 도시에 살면서 기본 생활비는 전혀 바뀌지 않았다. 집세, 가전제품 월부금, 보험료 등등. 이를 알고 있는 이웃이자 오랜 친구인 찰리가 수시로 소액을 (못 받을 줄 알고도 빌려)주어 보탬이 되지만, 윌리는 체면상 찰리가 제의하는 직원으로의 채용에는 응할 수 없다. 아들만 둘. 큰 아이는 서른세 살의 비프, 작은 아이도 서른이 넘은 해피. 잘 생긴 외모와 미식축구에 특출났던 비프는 열일곱 살 때까지 지역의 총아였으나 졸업시험에서 수학 F를 받는 바람에 대학에 진학하지도 못하고 인생을 거의 포기, 서부로 가서 주급 25달러의 목동 일을 하다가 딱 오늘 동생과 함께 집에 들른 상태.
 대공황의 끝 무렵을 맞아 가진 것이라고는 예전 시절 화려한 추억과 그때부터 시작한 허풍과 장담과 과대망상과 심각한 우울증. 부자는 날이 밝으면 각기 사장과 전 직장의 사장을 찾아가, 아버지는 뉴욕에서 내근을 하게 해달라고 하고, 비프는 자신에게 1만, 혹은 1만5천 달러를 투자해달라고 요구하기로 하지만, 세상은 언제나 마음먹은 대로 되는 게 없어서, 윌리는 34년간 봉직했던 회사에서 단칼에 해고를 당하고, 비프 역시 말도 꺼내지 못한 채 사장의 만년필만 훔쳐 나온다. 윌리와 비프가 다 계획에 성공할 것을 가정해서 둘째 해피는 고급 레스토랑에서 세 부자의 만찬을 계획하지만, 만찬은 시작도 하지 못하고 부자간 거친 말다툼으로 끝나고 만다.
 그날 밤, 어머니 린다는 만나기만 하면 거짓과, 과거의 기억과, 현재의 삶 때문에 다투기만 하는 세 부자를 견디지 못해 두 아들에게 집에서 떠나줄 것을 요구한다. 그러나 가족은 마음속에 상처를 가득 안고서도 서로를 사랑하는 관계. 거칠게 반항했던 큰 아들 비프가 자신을 바라보고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본 아버지 윌리는, 자신이 아들에게 여전히 사랑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감격해서, 보험금 2만 달러를 떠올리며 집을 나서 차에 올라 전속력으로 죽음을 향해 달려간다.
 난 20대 때도, 30대 때도 이 이야기가 정말 재미없었다. 34년간 봉직한, 심지어 자기 이름을 지어준 직원을 잠깐 고민도 하지 않고 해고해버리는 젊은 사장. 자본주의라는 정글의 법칙이다. 사실 죽음에 이르는 세일즈맨, 윌리를 자세히 관찰해보면 주택부금도 거의 끝나 집도 자기 집이 되는 것이 멀지 않았고, 가전제품의 월부금도 거의 마지막에 달하며, 두 아들 역시 이젠 더 이상 부양의 의무를 지지 않는 상태. 아내와 나, 오직 두 명 먹고 사는 문제만 해결하면 되는데 왜 죽음에까지 이르러야 했을까. 지금 독후감을 쓰고 있는 ‘현재의 나’가 주인공 윌리와 매우 비슷한 상태다. 이젠 아무 빚도 없이 집과 백색가전과 자동차를 보유하고 있으나 수시로 퇴사를 압박받고 있는 늙은 직원. 여기서 나는, 앞으로 당신들 거의 대부분과 마찬가지로, 대한민국의 노동법에 감사를 하고 있고, 해야 한다. 우리나라 기업주에게는 미국과 달리 해고의 자유가 없으니. 나도 두 아들만 키웠고, 아이들은 다 독립해 나갔다. 그러니 좀 비슷하지? 게다가 큰 아이의 신붓감이 어제 인사를 왔잖아? 기특하게도. 나는 요즘엔, 며느리 감이 생기면 시부모가 먼저 전화를 해서 일차 방문해 저희 소개를 좀 해도 될까요? 이리 물어봐야 하는 것이 기본 에티켓인줄 알았더니 그건 아니더라고.
 하여간 지금의 내 상태가 윌리와 좀 덜 비슷했다면, 상대적으로 좀 더 다양하게 이 세일즈맨이 죽음에 이르게 되는 과정을 해석할 수 있을 텐데, 오히려 꽤나 유사한 상황이라 윌리의 유일한 사인을 나는 우울증이라고 볼 수밖에 없었다. 윌리를 감싸고 있는 정서는 과거, 그러니까 윌리가 수당만 한 주에 150 달러를 받던 공황 이전의 시절. 고등학교에서 풋볼 선수로 명성을 떨치던 비프와 잘생긴 외모로 여학생 깨나 울리고 다녔던 해피. 세일즈를 위해 다니던 도시에서 가끔 벌이던 로맨스. 그러나 현실은 비록 몇 번 남지 않았지만, 각종 할부금과 주택융자금, 낡은 집을 유지하기 위한 수선비 등등. 여기에 현실에 낙오된 듯 보이는 두 아들. 심지어 가족들이 보기에도 아버지 윌리에겐 심각한 정신장애가 있는 상태로, 수시로 이미 죽은 형의 모습이 보이기도 해서, 가족 간의 대화에 불쑥 형의 유령이 끼어들기도 하는 단계. 가족은 윌리를 사장에게 보내 뉴욕에서의 내근을 요구하게 만드는 대신 신경정신과 전문의의 상담을 받게 했어야 했던 건 아닐까.
 물론 드라마는 ‘대부분의 정상인’을 모델로 하지 않는다. 정상인이 주인공이면 너도 그렇게 살고, 나도 그렇게 사니 그 속에서 두드러진 사건을 만들어내는 것도 쉽지 않고, 만들어봤자 독자가 재미나게 읽어주지도 않으니까. 내가 윌리라면 어땠을까. 쉬운 해결책. 다 때려치우고 집 팔아서 소도시로 내려간다. 그럼 쥐꼬리만 하지만 연금도 나오고, 뉴욕에서 집 팔고 소도시에 작은 집 산 차액으로 그리 궁상스럽지는 않을 거 같은데. 물론 나는 삶을 이야기하고 있고, 밀러는 문학을 이야기하고 있으니 같을 수는 없다.
 이렇게 독후감의 형식을 빌어 윌리와 그의 가족과 다른 의견을 개진한다고 해서, 이 작품이 별로라는 얘기는 절대 아니다. 오히려 <세일즈맨의 죽음>을 읽고 앞으로 나는 세 명의 극작가, 유진 오닐, 테네시 윌리엄스, 그리고 아서 밀러의 작품을, 찾아 읽지는 않을지언정, 책을 고르다 눈에 띄면 반드시 읽어볼 것이라고 작정했다. 그만큼 재미있고, (10년만 일찍 읽었다면 더욱 그러했겠지만) 공감했고, 남들에게 읽어보라고 권할 만큼 좋은 책이란 생각도 들었다. 다만 내가 윌리였다면 어땠을까, 하는 것일 뿐. 문학적 감정의 과장은 언제나 정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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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알벨루치 2019-01-08 10:2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문학적 감정의 과장은 언제나 정당하다’ 너무 멋진데요 팔스타프님! ㅎ

Falstaff 2019-01-08 10:48   좋아요 1 | URL
ㅎㅎㅎ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