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 힘줄로 만든 하프 문학동네포에지 83
강기원 지음 / 문학동네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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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번에 강기원의 《바다로 가득찬 책》을 읽고 필이 팍 꽂혀서 곧바로 《고양이 힘줄로 만든 하프》를 희망도서 신청해 읽었다. 이 시집은 2023년에 문학동네에서 찍었다. 당연히 2020년 이후에 쓴 시를 모은 시집인 줄 알았는데, 천만의 말씀, 이미 출간되었으나 이젠 폐간된 시집을 다시 찍는 출판사의 프로젝트로 18년만에 새로 나온 옛 시집이었다. 그러니까 초판은 2023 – 18 = 2005년, 시인이 마흔여덟 살 무렵에 낸, 아마도 첫 시집일 텐데, 문학동네는 염치도 좋지, 판권지에 자기네 책에 초판 1쇄라고 타이틀을 박았다. 중판 아냐? 적어도 개정판이라고 해야지 말이야.

  첫 시집이었다는 걸 알았으면 내가 희망도서 신청을 했을까? 아무래도 아닌 거 같다. 그러느니 차라리 다른 도서관에 상호대차서비스 신청을 해서 시인의 초판본을 읽는 편을 택하지 않았을까 싶다. 확실히 사람은 게으르면 못쓴다.

  이렇게 타박을 하는 가장 큰 이유는, 이 시집이 전에 읽은 강기원보다 마음에 차지 않았기 때문이다. 시인사에서 2005년에 낸 초판을 찍을 당시 강기원이 시인 짬밥으로 치면 8년밖에 되지 않았지만, 이미 마흔여덟, 시인으로 인생의 절정기를 구가하던 시기라서, 내 주제에 시가 이러하니 저러하니 건방을 떨 수는 없다. 그래서 단지 시들이 어째 내 입맛에 덜 맞았다고만 말할 수밖에.


  시집의 제목 《고양이 힘줄로 만든 하프》가 좀 그로테스크하다. 살아 있는 고양이의 힘줄을 뽑아 그걸로 하프를 만들었을까? 왜 이리 엽기적인 이야기를 하느냐면, 사마천이 쓴 <사기 세가>의 장면 때문이다. ‘요치’라는 작자가 제나라에서 권력을 잡자 제나라 임금 민왕을 죽이는데, “민왕의 힘줄을 뽑고 종묘의 대들보에 하룻밤을 그대로 매달아 죽게 하였다.” 그러니까 사람도 살아있는 채로 힘줄을 뽑아 대들보에 매다는데, 고양이를 그렇게 하지 말라는 법이 없으니까. 사람이라면 재미나 여흥을 위해 능히 그런 짓도 할 수 있는 생명체라서 말이지. 이러저러한 말만 늘어놓지 말고 표제시를 한 번 읽어보자.



  고양이 힘줄로 만든 하프



  내 머리채 휘어잡고 일필휘지 할 분 안 계시나


  뼈의 구멍에 입술을 대고 날숨 불어넣을 이


  방광 가득 바람을 넣어 힘껏 차도 좋을 일


  무늬 없는 등판에 지도를 그려 넣어

  벽에 거는 일은 어때

  오대양 육대주 까맣게 문질러

  밤의 지도를 만들지

  찾을 수 없던 별자리 돋아오르게


  비스듬히 품에 안고 핏줄의 현을 튕기면

  숨겨진 노래 흘러나올까

  고양이 힘줄로 만든 하프처럼 말야


  하지만 다 쓸모없다 여기실 땐

  빈 몸통만으로 토르소를 만드시죠

  사라진 목, 부서진 팔다리로 웃는 토르소를   (전문. p.99)



  어떠셔? 시인이 참 시가 써지지 않았던 모양이지? 오죽하면 자기 머리채를 틀어잡고 시인의 몸을 붓인 양 일필휘지로 시 한 수 써보라 했을까? 그러게 누가 시인더러 시인 하랬나? 자기 좋아 시 쓰기 시작해놓고 괜히 엄살이셔, 그지? 근데 엽기 그로테스크인 건 맞다. 부서진 팔다리로 웃는 토르소라니, 거 참 심했다. 오래전 최승자도 그랬지. 내 팔 다리를 분질러 네 꽃병에 꽂아달라고. 이런 표현은 먼저 쓴 사람이 장땡이다. 그래서 강기원, 1패. 아니면 말고.

  근데 진짜 그로테스크는 시집의 2부에 집중되어 있다. 여성을 주제로 쓴 시들이 밀집해 있지만 그렇다고 구태여 페미니즘 시로 구분할 필요는 없다. 낙태와 어린 자식의 죽음 같은 여성으로의 참담함을 그렸다. 임신중단도 말만 임신중단이 아니라 낙태 수술의 장면을 그린다.

  종이를 찢는다 / 낙태수술중이다 // 아주 잘게, 되도록 잘게 / 마취약이 듣지 않는다 … 사지가 뜯겨나간다 / 작은 손가락, 발가락이 핀셋에 들려 있다 // 주어 동사가 멋대로 섞인다 / 살점 하나라도 남겨선 안 된다 … (<퍼즐> p.45)

  말로만 듣던 장면이다. 연령층에 따라 학교 수업시간에 비슷한 영상을 보여주던 시기도 있었다고 들었는데 시를 읽으며 연상하는 것이 그렇다고 그나마 ‘검열’ 후의 영상보다 덜 충격적인 건 아닐지도 모른다. 어린 아이가 죽어 화장을 하고 따끈한 골분을 든 채 러시아워의 서울을 지나오는 이야기보다 바로 앞 페이지에 실린 이런 시를 읽는 편이 좀 나을 거 같다.



  딸꾹질



  삽날에 물컹한 것이 걸려든다. 썩은 연못을 메우려 마당을 파는 중. 구덩이 안에서 오글거리는 새끼 쥐 여섯 마리. 팔뚝만한 어미가 나무 뒤에서 노려보고 있다. 인부는 우선 그놈을 때려잡는다, 망설임 없이. 삽 뒷등에 터져버린 배에서 흐르는 찐득한 것들. 새끼들의 오디 같은 눈알들 위로 큰 돌이 쿵 던져진다. 마당 한구석 홈통 붙들고 구경하던 아이가 딸꾹질을 시작한다.


  삽날과 바위에 찍히는 꿈에서 겨우 깨어난 아이. 흠뻑 젖은 채 새벽 마당으로 나간다. 돌은 어느새 치워져 있고 연못 있던 자리엔 뒤집힌 흙의 속살이 덮여 있다. 묽은 핏빛으로 떠오르는 태양을 꼼짝 않고 아이는 지켜본다.  (전문. p.39)



  흠. 괜히 소개한 것 같군. 새끼 쥐 보셨나? 아주 오래 전 군불 때던 시절, 불 때지 않는 아궁이가 따듯하니까 겨울이 되면 가끔 쥐가 거기에 새끼를 낳는다. 털도 제대로 돋지 않고 눈도 못 뜨는 분홍색 작고 “귀여운” 생명체. 꼼지락거리는 움직임은 아무리 미물이고, 밤마다 천장을 뛰어다니는 시끄러운 병원균 매개체로 성장할지언정 정말 마음에 쏙 차는 생명체인 것을, 그걸 큰 돌을 쿵 던져 납짝 짜부려뜨려 죽인다고? 아이가 딸꾹질할 만하다. 그걸 보는 어미 쥐는 또 어땠을까? 그러니까 자기를 향해 날아오는 삽등조차 피하지 않고 새끼들하고 한날 한시에 죽는 편을 택했겠지. 에휴, 인용할 생각이 없던 시인데 어떻게 독후감 쓰다 보니 이렇게 됐네 그려.

  원래는 이 시를 제일 먼저 인용할 생각이었다.



  경(經)



  벗은 허물

  뒤돌아보지 않고


  없는 발과

  없는 날개로

  사라진 푸른 뱀아


  내 화사한

  경전아


  봄날

  갈라진

  숲길에 서서


  허물뿐인

  탈피할 수 없는 내가


  너를 읽는다   (전문. p.13)



  경經. 들실 말고 날실. 글. 책. 도리. 불경. 그리고 여성들의 월경. 이 가운데 어느 경을 말하는 것일까? 단, 이 시에서 경이 명사일 경우에 그렇다는 말. 마지막에 “너를 읽는다” 했으니까 명사가 맞다. “너”라고 의인화했으니 월경일 수도 있어서 굳이 선택에 포함시켰다. 시인에게 물어보라고? 물어봤자다. 99퍼센트의 시인은 “당신이 생각하는 경이 맞습니다.”라고 답변할 테니까. 그러니까 어떤 경인지는 독자 마음대로인데, 내 생각엔 글과 책, 그리하여 “시” 아닐까? 만일 이 시집이 시인이 처음 낸 책이라면, 첫 시집의 첫 시의 주제가 자기가 쓰는 것이든, 다른 사람이 쓴 것이든 시라고 생각해도 무방할 것 같아서 의견을 내본다. 불자가 불경을 대하듯 시인이 시를 읽고 쓰겠다는 초심이라 여기면 그럴 듯하다.

  그런데 이 시를 한 번 보자. 조금 불만이 있어서.



  선짓국



  선혈로 공양케 하시다니


  이건 피로 끓인 국이 아니다

  피로만 끓인 것이 아니다

  진흙과 눈물, 짚과 서리, 햇살과 구름, 들판이

  녹아든 한 그릇의 늪


  받아먹어라

  받아마셔라

  들리는 말씀 없어도


  쓰리고 아린 속내 앞에

  침묵으로 엉긴

  뜨겁고 생생한 적신(赤身)


  그 속에 쇠붙이 찌를 수 없어

  함부로 휘저을 수 없어


  두 손으로 뚝배기 받쳐들고

  고개 수그려

  메마른 입술을 댄다


  찬 이마 위로 훅, 끼쳐오는 입김   (전문. p.16)



  선짓국 한 뚝배기 하면서 별 생각을 다 한다고? 그래서 시인 아니냐! 한 목숨, 뜨겁고 생생한 붉은 몸의 공양에 흠을 낼 수 없어 시인은 차마 쇠 젓가락으로 선지 덩이를 찔러 자를 수 없단다. 그래서 두 손으로 받쳐들고, 고개도 수그려, 내 생명의 숨결 훅훅 불어가며 뚝배기를 비우자 훅, 끼치는 입김. 바로 내가 준 입김이 다시 나한테 비릿한 냄새와 더불어 끼쳐온다. 시인이 차마 시로 쓰지 않았지만 이 다음에는 뭐? 그려, 깊은 트림 한 번 끄윽, 해야 제 맛이지. 내 생명의 입김을 주었더니 다시 그게 끼쳐온다고? 그럼 또다시 돌려준다는 의미에서 깊게, 그윽하게, 끄윽.

  이 시에 뭐가 불만이 있느냐고? 2연과 3연. 구태여 그걸 설명을 해야 했나? 한 번 빼 버리고 읽어보시라. 좀 더 독자를 대우해주는 거 같지 않아? 이게 피로(만) 끓인 국이 아니라는 걸 누가 몰라? 적어도 시집을 사 읽던지, 도서관에서 빌려 읽는 독자가? 시를 제대로 배우지도 않고 알지도 못하는 내가 읽기로는 2연과 3연은 뱀 다리 같다. 물론 아니겠지. 그러나 그렇게 읽힌다는 말씀.

  아이고, 오늘도 내가 기원 언니한테 함부로, 심하게 말해버렸네. 그래도 시인의 초기 모습을 볼 수 있어서 의미가 있는 시집이다. 이대로 끝내기 섭섭해서 재미있게 읽은 시 하나 달고 독후감 마친다.



  미하(米蝦)



  눈물이 짠 걸 보면

  나는 소금

  아니, 절여진 무엇


  허공의 항아리

  짜디짠 그

  어둠 속에서


  덜 삭은 눈알로

  바다를 읽는


  굽어진 등도 없이

  모든 다리를 오그리고

  사라져 갈


  쌀새우   (전문. p.59)



  미하, 쌀새우가 뭔지 아시지? 서해, 남해에서 주로 나는 옅은 붉은 색 작은 새우인데 말리면 하얗게 색이 바뀐다. 강기원이 본 쌀새우는 새우젓을 담근 모양이다. 아직 덜 삭아서 그렇지. 새우젓 말고 곤쟁이젓은 아시나? 아주 작은 새우만 골라 곰삭여 만든 젓갈. 인천사람이자 가수인 송창식이 좋아한다고 들었는데, 나 어렸을 때도 자주, 즐겨 먹던, 없어서, 안 줘서 못 먹던 젓갈이다. 민물새우로 만든 토하젓도 일품이고. 이 쌀새우를 보고 다른 건 그리 생각하지 않고 지은 시.

  아휴, 근데 나는 이런 종류의 시는 박백남이 쓴 <홍어>의 두번째 연이 제일 좋다.


  “쏴아쏴아 바닷물 밀려드는 곰소항에서 나는 곰삭은 홍어를 겨자에 찍어먹고 있다 오늘, 묵혀서 썩히면 썩힐수록 제 맛이 살아나는, 때론 몰래 맛보고 싶은 그대, 첫사랑처럼 코 끝이 싸한 맛, 한때 그대가 살았던 수심 깊은 내 가슴의 바다에서 쏴아아 눈물 끌어올려 내 눈자위를 적시고 바삐 사라지는 가오리과의 홍어, 내 어찌 그대 잊고 어디로 가오리까”  (《석류꽃엔 눈물생이 있다》 현대시. 1998. p.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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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5-11-05 09:0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문동에서도 시집 복간본 시리즈가 나오는군요. 문지에서도 ‘시인선R ’이라고 복간본이 종종 나오던데요.
선짓국 먹으면서도 시 생각나는 게 시인 맞습죠… 홍어에 막걸리 먹고 싶네요…(라지만 삭힌 홍어는 아직 못 먹어봤습니다! ㅋㅋ)

Falstaff 2025-11-06 03:46   좋아요 0 | URL
저도 전라도 결혼식에 가서 처음 삭힌 홍어 먹어봤는데요, 질겁을 할 거 같은데 자꾸 거기에 젓가락이 가더라고요. 질색을 하면서도 먹는 게 홍어더랍니다.

얄리얄리 2025-11-05 15:1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시들이 뭔가 섬찟하네요. [딸꾹질]은 저라도 그런 광경보면 속이 안좋았을 것 같고(아무리 쥐가 유해동물이라지만..), ˝선혈로 공양˝이나 ˝모든 다리를 오그리고 사라져 갈 쌀새우˝ 같은 부분도 카프카스럽다고 해야 할까, 그런 느낌이에요.

Falstaff 2025-11-06 03:49   좋아요 0 | URL
죽은 쥐새끼들은 그렇다 치고, 어미쥐는 그리 쉽게 때려죽이지 못했을 겁니다. 아마 시인의 머리속에서 그랬을 겁니다. 사람이 휘두르는 삽에 쉽게 맞을 정도의 짐승이 아니거든요. 강기원 어린/젊은 시절에는 흔한 장면이었을 겁니다.
먹는 걸로 치면 뭐든지, 하물며 산나물일지라도 다른 생명일 터이니 그걸 어쩌겠습니까. 에휴...
 
쇄골에 천사가 잠들고 있다
핑크 지저인 3호 지음, 곽윤미 옮김 / 지만지드라마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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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극작가 이름이 핑크 지저인 3호라고? 그렇다. 1982년생이니까 우리나라 김지영씨하고 동갑이다. 일본 교토에서 출생해 교토의 대표적인 학교 도시샤대학 미학예술과를 졸업하고, 흥미롭게도 장례지도사 직업에 종사, 천 명 이상의 죽은 자들 장례를 도왔다. 연극판에서 뜻이 맞는 핑크 지저인 3남매를 조직해 이 가운데 3호를 맡아 지금까지 극작가와 연출가로 활약하고 있다. 본명은? 밝히지 않았다.

  근데 지저인? 지저地底. 땅 아래, 땅 속, 땅 밑이라는 뜻. 거기에 있는 건 저승 또는 관, 아니면 시신. 크게 말해 죽음의 영역이다. 지저인 3호야 전직이 장례지도사, 속칭으로 ‘염쟁이’였으니까 그렇다고 치고, 다른 핑크 지저인 두 명도 같은 직업이었을까? 그건 모르겠고, 하여간 이들이 몰두하는 작업이 “삶과 죽음에 육박하는 작품”이라고 작가 소개에 나와 있다. 이걸 매년 두 편 정도 만들어 공연한다고.

  전년에 이미 센다이 단편 희곡상 대상을 단독 수상한 이력이 있는 핑크 지저인 3호는 이 작품 <쇄골에 천사가 잠들고 있었다>로 2019년에 극작가협회 신인 희곡상을 받았다. 출판사 지만지드라마가 이 책을 출간한 건 아마도 작년, 2024년 늦봄에 우리나라에서 공연을 했기 때문일 것으로 보인다. 핑크 지저인 3호도 한국에서 공연을 할 줄은 꿈에도 몰랐고, 직접 서울에 와 무대를 보고 꿈이 이루어진 기분이 들 정도로 감동했다고 이 책의 ‘작가의 말’에 썼다.


  2015년에 이슬람국가 ISIL이 일본인 민간군사회사 사장, 즉 무기판매상 유카와 하루나를 인질로 잡은 사건이 있었(단)다. 일본에서는 유카와라는 사람이 자기 이익을 위하여 정부에서 극구 만류하는 시리아 지역에 들어가 인질로 잡힌 일을, 개인이 일본 전체에 큰 “폐를 끼친” 인물로 여겼다. 이때 그를 구하기 위해 저널리스트인 고토 겐지라는 사람이 또 시리아에 갔다가 두 명 다 처형된 사건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아프가니스탄에서 전쟁이 한참일 때 들어가지 말라는 무슬림 극단주의 지역에 제 발로 기어 들어가 포교활동 하다 참수당한 기독교 원리주의자들이 있었다. 이것과 비슷한 경우라고 생각하면 많이 다르지 않겠다. 우리나라는 일본과 달리 개인 자격으로 구출하기 위해 아프가니스탄에 다시 들어간 사람도 없었고, 같은 교회 신자/관계자/책임자/목사/전도사/장로/권사/집사도 한 명 없었지만.

  이때 핑크 지저인 3호는 장례지도사 경험이 제법 있는 작가로 처형당한 유카와를 연상하면서, 마치 납관 작업을 하듯 이 작품을 썼을 것이다.


  무대는 농구선수 출신이자 전직 체육교사였던 기리노 겐토 씨 집의 마당이다. 시기는 2015년 한여름인 7월 30일 밤과 10년 전 2005년 6월과 7월 두 달 사이. 두 시기를 왔다갔다 한다.

  현재 시점에는 집주인 기리노 겐토 씨가 죽어 장례식을 마치고 참례를 했던 사람들이 기리노 씨 댁의 집에 모여 애도를 겸한 식사를 하고 있다. 물론 조문객들은 집 안에 있을 뿐, 이 가운데 마당으로 나와 극에 참여하는 사람은 고인의 아내 기리노 교코 한 명이다. 겐토가 죽어 염을 하고 입관을 했을 때, 입관, 일본말로 납관이라고 하는 모양인데, 납관을 한 이는 장례지도사 초년병인 사카모토 도루. 죽은 기리노 씨의 외아들 요시오의 하나밖에 없는 절친이다. 요시오는 현재 행방불명. 그가 사라지기 전, 그러니까 10년 전에, 아버지가 죽으면 납관은 네가 해달라고 부탁해, 그걸 들어주었다. 물론 부탁을 하고 곧장 우정에 금이 가기는 했지만 그때는 그랬다는 거다.


  요시오의 누나가 한 명 있다. 기리노 가즈에. 도루가 짝사랑했던 사람. 가즈에의 친구 유카는 장례지도사. 극의 성격이 확고해지는 데 유카의 역할이 작지 않다.

  무대인 기리노 댁이 있는 곳은 교토부 우지시 마키시마 동쪽 우지가와강변의 주택가. 새로 넓직한 도로가 뚫렸다. 촌에 큰 길이 뚫리면 제일 먼저 동네 술꾼들이 결딴난다. 술에 잔뜩 취해 전에 늘 다니던 길 생각만 하고 그저 터덜터덜 갈 길 가다가, 시속 80km 규정속도로 달리는 차에 치어 염라대왕 전에 서게 되는 것. 예전에는 술 취해 집에 가다 죽을 일은 정말 잔뜩 취해 돌다리를 건너다 동네 누렁이가 푸짐하게 싸놓은 개똥을 밟아 미끈덩, 다리 아래 거꾸로 처박혀 죽는 일 말고는 없었는데 이게 웬 일이니?

  아, 그렇다고 겐토가 개똥 밟아 다리에 떨어져 죽었거나 차에 치어 죽은 건 아니다. 그냥 죽었다. 우지가와 강변의 수풀을 터전 삼아 살던 고양이들이 사달이 났다. 고양이들은 길 건너다 뒤돌아 가지 않는다고 들었다. 그리하여 하루에도 한 두 마리씩 로드 킬을 당했는데, 험한 꼴로 죽은 고양이의 뒤처리를 아무 소리도 하지 않고 묵묵히 하는 유일한 사람이 장례지도사 유카였다. 험한 죽음과 이의 뒤처리. 고양이와 유카. 책의 제일 앞에 실은 ‘작가의 말’에서 ISIL에 의하여 인질로 잡혔다가 처형당한 무기판매상 유카와와 그를 구하러 갔다가 같이 죽임을 당한 저널리스트 고토. 원혼을 달래는 의미를 포함해 이 일을 희곡으로 만든 핑크 지저인 3호. 이렇게 연극이 만들어진다.

  이걸 알아챘다면, 이야기는 어쨌든 행방불명된 유시오 역시 비슷한 부류의 일원이 될 것임도 눈치챌 수 있다. 그러면 애초 배경인 기리노 댁의 지붕에 여러 색의 페인트가 흉하게 뿌려져 있으며, 담장엔 “죽어!”, “자업자득”이라거나 심지어 “일본의 치부”를 비롯한 욕설이 가득한 낙서가 쓰여 있는 이유도 이해가 된다. 무기판매상 유키와와 고토를 국가에 큰 폐를 끼친 인물로 지탄했던 사람들이니까.

  “죽어!”가 욕이라고? 전 스케이트 국가대표이자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이상화의 남편 강남이 그러는데, 일본에서 제일 세고 거친 욕이 “죽어!”란다.


  요시오. 크로스드레서. 여자의 옷에 집착하고 메이크업까지 한 채 학교에 갔다가 왕따를 당했다. 이건 그냥 취향이지 신경정신적 병이거나 동성애 등 성 소수자에 포함되지 않는 것으로 안다. 내 생각이 틀릴 수도 있다. 하여간 학교 성적도 좋지 않아 체육교사로 근무한 아버지 겐토한테도 인정받지 못한 그냥 보통의 남자. 요시오한테 접근한, 좋은 의도로 가까이 지내게 된 미도리카와 다쿠지. 이이의 직업이 전쟁 저널리스트이다. 다쿠지는 직업상 숱하게 사진을 찍어댄다. 요시오하고 친해지자 한참 어린 요시오에게 일회용 카메라를 선물하면서 더욱 친밀한 관계가 되고, 어느날 다쿠지는 전쟁 취재를 위해 사라진다. 요시오도 함께 사라지고 행방불명, 사실상 죽었다.

  요시오 죽기 전에 먼저 죽은 사람이, 주인공의 한 명인 도루의 짝사랑 상대인 요시오의 누나 가즈에. 차에 치어 죽어가는 고양이를 구하기 위하여 달려갔다가, 더 빨리 달려오는 차에 치어 그 자리에서 죽는다. 가즈에가 더 불쌍하지만, 가즈에를 짝사랑한 도루의 상실도 대단했다. 이때 도루에게 다가와 위로의 말을 해준 이가 선배 장례지도사가 될 유카. 유카가 도루의 목과 어깨 사이의 뼈, 쇄골에 움푹 파인곳을 손가락으로 살짝 찌르면 말한다.

  “너의, 쇄골에, 가즈에가, 잠들고, 있습니다.”


  가즈에가 도루의 쇄골에서 잠들고 있었듯, 10년 후 이미 죽어 혼령이 된 요시오 역시 도루의 쇄골에 잠들어 있을 수도 있다. 마찬가지로 민간군사회사 사장 유카와 하루나와 저널리스트 고토 겐지 역시 핑크 지저인 3호의 쇄골에서 잠들고 있었을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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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5-11-04 09:5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 책 제목도 일단 좀 그렇고 ㅋㅋㅋㅋ 내용 살펴보니까 장례지도사, 고양이 이런 키워드가 등장해서 에이... 뻔한다 싶어서 패스했는데요. 이런 내용이군요. ㅎㅎ

Falstaff 2025-11-04 11:26   좋아요 1 | URL
그래도 네 췌장을 먹을래 보다 낫지 않나요? ㅋㅋㅋ
 
경세통언 3 - 어리석은 세상을 깨우치는 이야기
풍몽룡 지음, 김진곤 옮김 / 아모르문디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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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편 40편이 실린 《경세통언》 세 권을 다 읽었다.

  명말청초 17세기 사람이다. 19세기도 아니고, 18세기도 아닌 17세기 전반부에 쓴 작품. 풍몽룡의 3언, 즉 《유세명언》, 《경세통언》, 《성세항언》 120편의 단편을 세 책으로 나눈 것 가운데 제2 언. 풍몽룡이란 이름만 듣고 누군지 잘 모르시겠지? <동주열국지>를 쓴 사람이라면 이해가 빠를 듯.

  풍몽룡의 3언, 120편의 단편 ‘소설’ 모두 다 저자가 직접 만들어낸 허구는 아니다. 중국, 특히 장강을 중심으로 한 현 장쑤성과 장강 주변의 민담을 발굴, 평생 과거 시험에 응시했다가 미역국만 착실하게 자신 문인으로의 저자가 시詩, 사詞, 그리고 곡曲을 보태 소설의 형식으로 다시 만들었다. 즉, 소설화한 옛날 이야기 모음집이라고 생각하면 간단하다.

  풍몽룡의 출생지가 강소성 소주부, 즉 소주. 일찍이 위진魏晉, 즉 조조의 후예 조씨의 나라 위와 조씨의 씨를 말리고 황제 자리에 오른 사마 씨의 나라 진晉. 이 사마씨의 진나라에서는 역설적으로 사마 성을 가진 사마 씨들이 서로 눈빛만 마주쳤다하면 도륙을 내는 바람에 금세 멸망해 동쪽으로 도망가 다시 세운 나라를 동진東晉이라 일컫는데, 한 백 년 정도 유지하던 사마씨의 나라였다. 소주가 이 동진 부근에 있어서, 《경세통언》의 이야기들도 이 시기부터 당, 송, 원, 명대를 배경으로 전해온 민담이 대부분이다. 물론 이전 즉 동주東周시대의 것도 있기는 하지만 드물다.


  《경세통언》 세 권을 다 읽은 소감을 이야기하자면, 1권은 제법 재미있게 읽었으나 그 재미라는 것이 2권에 와서 확실하게 반감되는 것을 느꼈다. 비슷한 내용과 플롯을 연달아 읽으면서 재미를 유지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3권까지 가면 확실하게 재미 적다.

  책은 민담에서 시작한 것 답게, 남자가 첩을 얻거나 바람을 피우는 건 마땅하지는 않지만 그럴 수도 있는 법인 반면 혼인한 여성의 경우에는 목숨이 왔다갔다하는 큰일날 일이라서, 주로 유부녀의 혼외정사와, 남자의 편력에 의한 패가망신 같은 사건으로 “세상을 깨우치는 이야기”가 흔하다. 남녀상열지사의 표현도 17세기 시각에서는 대단히 선정적이었겠다. 물론 지금은 중딩들도 안 읽을 수준이지만.

  다들 읽어보셨을 <삼국지>나 <수호지> 같은 것도 오래 전 번역에서는 다분히 도교적 시각으로 쓰인 것이 많다. 심지어 일본에서는 애니메이션으로 만들기도 했던 <봉신연의> 같은 건 애초 주인공 격인 강태공이 신선 가운데서도 대단한 공력을 지닌 신선이고, 악역인 달기는 꼬랑지 아홉 개 달린 백여우로 그렸으며, 강태공이 사용하는 무기들도 네이팜탄과 다연장포를 연상시킨다. 《경세통언》, 특히 3권에서는 유달리 이 신선과 요괴들이 많이 등장하고, 심지어 동진 시대를 무대로 하는 작품에 나오는 요괴의 개과천선한 아들 하나는 몇 백 년 후에 서쪽 천축국으로 경전을 가지러 떠나는 중 삼장법사를 등 위에 태워 함께 다녀오면 곱게 하늘로 오를 수 있다는 것까지 나온다. 이런 것이 책 한 권에 한두 편이면 흥미 있을 지 모르겠지만, 억울하게 죽어 귀신이 되어 복수하는 거, 신선이 꿈에 나타나 누가 범인일지 가르쳐 주는 거, 신선 팀과 요괴 팀이 맞짱을 떠 당연히 착한 신선이 백대 영으로 이기는 거, 이런 것들이 잦아 나중엔 질리게 되더라는 말씀.


  그렇다고 이 《경세통언》을 포함한 풍몽룡의 3언을 읽을 필요가 없다는 건 아니다. 당시에도 아마 이 책은 “어리석은 세상을 깨우치는 이야기”라는 타이틀을 단 흥미 위주의 소설이었을 듯하다. 그러니 후세인들도 풍선생의 유지를 좇아 바쁜 세상 살면서 조금 한갓진 시간을 보내려 할 때, 책장에서 이 책을 뽑아 들고 한 편, 또는 두 편 정도 읽고 난 다음, 훗날을 기약하면서 책갈피를 꽂고 다시 책장에 올려 놓으면 그것으로 충분할 터. 즉, 가벼운 마음으로 잠깐 재미있는 시간을 보내기에 맞춤하다는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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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에 만나요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지음, 송병선 옮김 / 민음사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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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유작. 작년에 마르케스가 남긴 마지막 작품이 나왔다고 잠깐 장안의 화제가 되었던 기억이 나기는 한다. 그럼 그때 왜 안 읽고 지금에서야 읽었을까? 그것도 작품이나 작가를 특정하고 고른 것이 아니라 이리저리 서가 사이를 빈둥거리다가 고른 얇은 책이었으니. 왜 얇은 책? 희망도서가 입고되기 직전. 내 회원증으로 세 권, 아내 회원증으로 두 권. 이 가운데 두 권이 벽돌이라 또다른 벽돌을 한 권 더 고르면 두 주에 벽돌 세 권과 ‘안 벽돌’ 세 권을 해치우기가 쉽지 않을 수도 있어서, 의도적으로 ‘안 벽돌’을 고르고 있던 중에 눈에 들어왔다.

  나는 유작이나 유고집 미발표작품 같은 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이 책도 그래서 작년에 고르지 않았을 수 있다. 유고집은 작가가 평생 이 작품을 발표할까 말까 고민하거나 발표하기에는 수준이 너무 낮은 졸작이라고 생각해온 B급 작품일 경우가 많다. 유작은 작가의 입장에서 완성하지 않은 작품일 때가 많고. 그래서 유작이나 유고집이 대박인 경우를 나는 별로 보지 못했다.

  가르시아 마르케스는 2008년, 81세 때 자신이 150페이지 분량의 짧은 ‘연애 소설’을 쓰고 있다고 밝혔다 한다. 이미 1999년 콜롬비아 시사 주간지 《캄비오》에 작품의 1장을 발표했다고 했으니 벌써 9년 동안 작품을 들고 쓰거나 수정 중이라는 거였다. 이 이야기는 무려 40페이지에 육박하는 부록 가운데 “편집자의 말”에 나오는 건데, 책의 프롤로그로 붙어 있는 마르케스의 두 아들 로드리고와 곤살로 가르시아 바르차의 이름으로 하는 말을 듣자면, 노년의 마르케스는 기억력에 상당한 문제가 있어 이들의 아버지 가르시아 마르케스가 오래 수정을 했으나 “기억은 내 원자재이자 도구야. 그게 없으면 아무것도 없지.”라고 말하던 아버지는 결국 “이 책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어. 없애 버려야 해.”라고 마지막으로, 그러니까 최후 결정을 했다고 한다. (p.7~8)

  이 최후 결정과 부록으로 실린 편집자의 말은 서로 모순된다. 편집자는 2004년 7월에 마르케스의 최종 수정이 끝났다 말했다고 주장한다. 그럴 수 있다. 작가가 어느 한 쪽에만 말한 내용을 다른 쪽이 모를 수도 있고, 같은 말을 듣는 사람이 자기 입장에 가깝거나 이익이 되게 해석했을 수도 있다. 그렇다고 법정에 가서 다툴 마음까지는 나지 않으면 뭐 속으로 한 번 째려보고 끝나는 거지. 근데, 만일 정말로 마르케스가 2004년 7월에 최종 수정이 끝났다고 변호사나 공증인한테 언질을 주었다면, 왜 책은 2023년, 20년 후에나 출간되었을까?

  프롤로그라는 타이틀을 달고 두 아들이 하는 말과 편집자의 말을 합해보면, 이 작품은 결국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가 출판을 포기한 작품인데, 작가가 출판을 포기했거나 말거나, 편집자와 두 아들이 다른 마르케스 열광자 및 책이 나오면 떡고물이라도 조금 집어 잡수실 수 있는 인사들의 격려에 힘입어, 세계 각지에 산포되어 있는 마르케스 숭앙자에게 마르케스가 출판하기 원하지 않았던 작품을 읽어볼 기회를 준 책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이 말이 악의적으로 들리겠지만, 이건 서로 얼굴을 마주보지 않고 건조한 단어만 가지고 의사소통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것도 결국 사는 일이다. 진정으로 출판하지 않기를 바랐으면 원고를 없애버렸겠지. 작가 역시 조금은 출판하고 싶은 미련이 “틀림없이” 있었을 거라고 추측한다. 사는 게 다 그렇지 뭐.

  나는 이 책이 나오기 전에 이미 늙은 마르케스가 쓴 소설 <내 슬픈 창녀들의 추억>을 읽고 그의 노년 작품에 실망하고 있었던 터라서 별로 기대를 하지 않았다.


  <8월에 만나요>는 연애소설이다. 근데 사실 연애까지는 아니고 카리브해를 낀 라틴 아메리카 사람의 시선에서 보면 당연히 중장년인 46세의 유한여성 AMB, 아나 막달레나 바흐가 매년 한 차례, 절정의 피서기 8월 16일이 되면 처음엔 모터보트, 후엔 여객선으로 타고 섬으로 들어와 이미 예약한 택시를 타고, 시장에 들러 예약한 꽃 파는 아주머니한테 글라디올러스 한 다발을 사서, 예약한 호텔에 가 체크인을 한 후, 어머니가 묻힌 공동묘지에 가서 글라디올러스를 헌화한 후, 호텔에서 밤을 보내고 다음날 아침에 다시 예약한 택시로 선착장에 가 타고 온 여객선을 다시 타서 집에 가는 행로가, 이 여성 아나 막달레나 바흐의 일년 중 1박2일의 루틴이었다.

  아버지는 피아노 선생이자 40년 동안 지방 음악원의 지휘자였고, 어머니는 몬테소리 초등교육에 혁혁한 공을 세운 유명한 교사로 자기 기질을 관리할 지성과 능력을 딸 AMB에게 물려주었다. 이들 사이에 하나 있는 아들은 수도로 진출해 국립 오케스트라 1st 첼로의 수석으로 일하고 있다. 어려서부터 모든 악기를 연주할 수 있는 재능이 있었는데 첼로를 선택했을 뿐이었다. 아나 막달레나 역시 모든 악기에 재능을 가지고 있었지만 악기 연주에 별로 관심이 없고 맨발의 가르델 수도회에 들어가기를 꿈꾸다 이루지 못해 대학에서 예술과 문학을 공부했다. 학교에서 도메니코 아마리스를 만나 사랑을 하고, 약속을 하고, 성당에서 혼배성사를 한 날의 늦은 밤까지 자기의 어느 성감대라도 손을 대 본 남자는 없었다. 맨발의 수도회 입회 희망자였으니 어떤 면에서 당연했을 수도 있겠지. 이후 딸을 낳고 살아온 28년 동안 남편 외의 어느 남자와도 한 침대에 올라본 적이 없다. 말 그대로 사랑하는 남자와 더할 수 없이 화목한 가정생활을 영위하는 중이다. 정말? 아니, 일단 말로는 그렇다는 거다.


  어머니는 투병 중, 숨이 넘어가기 불과 3일 전에 왜 이 섬에다 묻어달라고 했을까? 육지에서 모터보트를 네 시간이나 타고 와야 도착하는 가난한 섬. 해변에는 어업이나 불법행위를 해서 먹고 사는 빈민촌이 밀집해 있고, 이 벨트를 뚫고 언덕 쪽으로 올라가야 호텔과 방갈로 등 본격적인 휴양지가 나오는 전형적인 카리브해의 한철 휴양지. 어머니를 매장하기 위하여 처음 섬에 도착해 매장을 한 다음, 호텔 방에 들어 창을 열고 일망무제로 펼쳐지는 바다를 보는 순간 막달레나는 어머니가 왜 이곳에 묻어달라고 했는지 이해했다고, 오해했다.

  섬. 이곳이 “유일하게 외로움을 느낄 수 없는 고독한 장소”라는 것을. 그리고 그 자리에서 매년 8월에 이곳으로 돌아와 어머니 묘소에 평소 어머니가 좋아한 글라디올러스 한 다발을 헌화하겠다고 결심했다. 글라디올러스는 섬에 어울리지 않는 비싼 꽃이지만, 오래 전에 백인 한 명이 이 꽃을 좋아하여 섬에 구근을 가져와 저렴한 인건비로 작지 않은 농장에서 길렀던 모양이다. 그래서 이 섬에서는 글라디올러스를 그리 비싸지 않은 가격으로 살 수 있던 것.

  글라디올러스가 왜 이 섬에서는 싸게 살 수 있었을까? 다른 섬에서는 볼 수도 없을 만큼 비싼데 하필이면 이 섬에서 집중 재배되는 건 무슨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게 아닐까? 독자의 의심도 함께 커진다.


  그건 그거고. 아나 막달레나가 46세였던 8월26일. 택시를 타고, 시장에서 글라디올러스 한 다발을 사서, 이제는 낡은 호텔 2층의 203호에 짐을 푼 다음, 어머니 묘소에 가서 헌화했다. 이제 일정이 끝났다. 남은 것은 저녁을 먹고, 내일 아침 배에 오를 때까지 가져 온 브램 스토커의 <드라큘라>를 읽기만 하면 된다. 먼저 저녁을 먹기로 한다.

  호텔의 레스토랑에 들어 간단하게 샌드위치를 주문한다. 옆 테이블에는 브랜디 한 병과 술잔만 하나 올려놓은 남자가 혼자 앉아 있다. AMB가 그걸 보고 자신이 마시는 유일한 술인 얼음과 진토닉을 한 잔 주문한다. 자연스럽게 시선이 마주치고, 남자가 AMB의 자리에 합석한다. 기다리는 사람도 있었고 중요한 일도 있었지만 지금은 아니라는 남자. 일정 끝났다는 말을 어렵게도 한다. 스페인계 미국인 토목기사라고 하지만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즉, 믿기지는 않는다. AMB의 책을 언뜻 보더니 브램 스토커 말고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의 <드라큘라>로 주제를 바꾼다. 반갑다. 독자인 나도 제일 좋아하는 <드라큘라>가 프랜시스 코폴라의 것이라서. 내 마음도 알아차린 AMB는 남자를 자기 방으로 초대한다. 2층 203호예요. 계단 오른쪽에. 문 두드리지 말고 그냥 들어오세요.

  먼저 서둘러 방에 들어 옷을 바닥에다 훌훌 벗어던진 다음 욕실에서 샤워할 시간까지는 없을 것 같아 성기와 겨드랑이 그리고 부어오른 발가락만 얼른 씻는다. 몸에 타월을 두드리자마자 방문을 두드리는 남자. 문 밖에 그가 서 있다. AMB는 말 없이 그를 끌었고, 서둘러 그의 몸에서 옷을 벗겨냈고, 침대로 밀어버린 후에 자기가 위로 올라가 즐겼다. 남편 도메니코 아마리스의 것 말고 다른 남자의 신체 어느 부문이라도 자기 몸의 한 부분 속으로 들어온 첫번째 경험이었다.

  조금 후 또다시 AMB가 시도해 한 번 더 했고, 새벽이 밝아올 즈음, 남자의 몸을 한 번 더 더듬을 때, 남자는 자신이 자는 척하는 걸 AMB도 눈치채게 함으로써 거절해, AMB는 오랜만에 숙면에 빠져들었다. 늦게 잠을 깨 정신차려보니, 바닥에 아무렇게나 벗어놓은 자기 옷이 가지런히 개켜져 탁자 위에 올려져 있었다. 그리고 <드라큘라> 책에 끼어 있는 무엇? 미국 화폐 20달러였다.


  하룻밤의 대가로 받은 20달러. 몇 년도의 일인지 몰라 20달러가 얼마만큼의 가치를 지녔는지 감이 잡히지 않지만, 자칭 토목기사라는 남자가 46세의 여자를 사서 하룻밤 내내 즐긴 대가로 적정하다고 여긴 값이겠지. 생전 처음 남자를 만나 유혹하고, 자기가 주도적으로 즐긴 결과로 아나 막달레나 바흐는 돈을 받았으니, 그리하여 훗날 자기 딸에다 대고 자기 딸한테 “창녀야!”라고 말하게 될 지도 모르고, 자기 스스로 모멸스러운 창녀가 된 듯한 느낌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이후 AMB는 매년 8월 섬에 올라 어머니 산소에 성묘할 때마다 꼬박꼬박 남편 아닌 남자의 몸을 탐하게 된다. 여태까지는 그냥 모르고, 알려 하지 않고 살던 일상을 캐면서. 예를 들어 남편은 음악을 배우러 오는 여대생들의 유혹에서 자유로웠을까? 그리하여 혼인의 순결을 지켰을까? 이렇게 시작한 숙고는 점점 확장해, 자신처럼 맨발의 가르델 수도회에 들어가고자 해서 결국 들어가고야 마는 딸의 몸은 정결할까? 세상이 복잡해지고 만다.

  <내 슬픈 창녀들의 추억>보다는 괜찮았지만, 재미있었더라도,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위대한 대표작들과 비교하는 건 족탈불급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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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olcat329 2025-11-01 07:5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8월에 만나요‘가 이런 의미였군요. 저도 미공개 유작 이런 건 별로 읽고 싶지 않더라구요. 근데 또 폴스타프님 입장에선 가르시아 마르케스면 또 그냥 넘어가기 힘드셨으리라 생각이 드네요. 이미 다른 주요작품 다 읽으셨으니.
족탈불급의 작품이지만 폴님 글 너무 재미나게 읽었습니다. ‘20달러‘가 이 소설에서 여주인공의 삶을 바꾸는 중요한 기폭제가 된 게 아닌가 싶어요.

Falstaff 2025-11-02 03:38   좋아요 1 | URL
ㅎㅎㅎ 옙. 다른 작가도 아니고 마르케스인데 어떻게 그냥 지나가겠습니까. 기대하지 않는다면 읽으실 만할 겁니다. 늘 재미있게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굿
전상국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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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가운 이름이다. 전상국. 소싯적에 좋아했던 작가이다. <아베의 가족>, <우상의 눈물>, <외등> 같은 작품들. 재미난 이야기도 들었다. 사실 소설 쓰는 사람들이 가슴 속에 맺힌 게 많다고 하는데 이 ‘맺힌 것’이 도가 지나쳐 “열등감”으로 진화해, 이 열등감을 만회하기 위해 독하게 글을 쓰는 작가가, 지금은 아니고, 오래 전에는 많았다고 한다. 남자의 경우에 ‘키’ 머리 꼭대기부터 발바닥 사이의 길이에 따라 열등감이 폭발하는 경우가 가끔 있다. (간혹 이 길이 말고 다른 길이 문제로 열폭하는 인간도 꽤 있다.) 주로 키가 작은 사람들이 키 큰 것들에 대한 반발로 독해지는 경향이 있다. 이래서 나온 말이, 작은 고추가 맵다는 거. 소설판에서는 주로 최씨가 많았다. 최일남과 최인호 등. 근데 웃기게도 전상국도 이 키에 콤플렉스를 느껴 대학 시절에 연애도 별로 안 하고 소설만 죽자사자 썼던 모양인데, 이이의 경우에는 자신의 큰 키에 그렇게 열등감을 느꼈다고 한다. 전상국에게 직접 들은 건 아니고, 전상국에게 직접 들었다고 주장하는 어떤 술꾼한테 들은 거다. 그러니 정말이라고 내세우지는 않겠지만 웃기기는 좀 웃기다. 이이가 예전에 교육방송에 출연한 적이 있어서 봤다. 키가 크긴 하다. 1940년생이니 지금 여든다섯, 그 시절 키로 생각하면. 우리집 꼰대는 전상국한테 막내 삼촌 뻘이어도 180cm이었건만 전혀 열등감 없이 살다 가시던데 말이지.

  이 양반이 강원도 홍천 사람이다. 공부 잘해서 고등학교는 춘천으로 유학해 춘천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은 1차 대학 시험에 떨어져 2차로 경희대학 국문과를 다녔다. 짐작하건데 이이가 경희대를 간 이유가 모르긴 해도, 경희대학이 성균관대학보다 성동역에서 더 가까웠기 때문일 거 같다. 조금이라도 집에 더 빨리 가기 위하여. 성동역이 어딘지 모르시지? 당시 전차 종점이 있었고, 경춘선 열차가 출발했던 역으로 북악산 기슭 정릉에서 발원하는 ‘쎄느강’변의 제기동에 있었다. 달구지를 끌고 다니던 황소가 오줌누는 장면이 일품이었는데.


  소설집 《굿》은, 작가 전상국 스스로 자신의 생애 마지막 소설집이라고 밝혔다. 이 책에 실린 아홉 편의 중단편은 그의 나이 75세부터 82세까지의 작업이다. 말 그대로 노익장의 결실. “작가의 말”을 통해 그는 작가로 살면서 “전업작가”가 아니었던 것에 ‘열없음’을 가지고 살았던 듯하다. 사실 아무것도 아님에도. 마치 키가 큰 것에 열등감을 느껴 더 열심히 글을 쓴 것과 비슷하게, 마지막 소설집에 실릴 작품을 쓰면서 전업작가가 아닌 열없음을 지우려 글 쓰는 일에 더욱 미쳤었다고 한다.

  그렇구나. 그의 70대. 미칠 정도로 글을 써서 기어이 백조의 노래를 마지막 소설집으로 상재했구나 싶었다. 노장이 그렇게 열심히, 치열하게 쓴 작품들인 줄 모르고, 거 참 노인네가 여전하네, 이런 심정으로 읽고 만 독자가 조금 부끄러워졌다. 그런 줄도 모르고. 도서관 신작 도서 전시대에 놓인 책을 보고, 작가가 전상국이라서, 예전에 발표했던 작품 가운데 몇 편을 묶어 책을 냈겠지, 제멋대로 생각해 거들떠보지도 않았던 책. 이래봬도 내가 전상국은 좀 읽었거든, 하면서.


  그렇다고 이이의 모든 작품이 다 좋았던 것은 아니다.

  처음 세 편의 단편소설. <춘천 아리랑>, <봄봄하다>, <가을하다>는 각각 김유정의 <동백꽃>과 <봄봄>에, 저자의 스승이었던 황순원의 <소나기>에 헌정하는 작품으로, 각기 원작의 뒷이야기, 그러니까 후일담이다.

  <동백꽃>과 <봄봄>의 여자 주인공은 우연히도 같다. 점순이. 근데 <동백꽃>의 점순이는 마름의 딸이라 절대로 소작인의 아들인 ‘나’한테 시집올 수 없어서 서울은 아니고 남양주의 그럴싸한 집으로 시집가고, <봄봄>의 점순이는 데릴사위하고 어떻게 될 듯한데 어떻게 된다는 것까지 얘기할 수 없어서, 나도 안타깝다. 단편소설에서 더 힌트를 주는 건 바람직하지 않을 터.

  <소나기>에 헌정한 <가을하다>는? 입 닦겠다. 직접 읽어보시라고.

  이 세 편이 마음에 들지 않은 건, 원작이 셋 다 말 그대로 불후의 명작임에는 틀림없지만, 그것이 쓰여진 시대에 쓰였기 때문에 불후의 명작인 것이지, 지금 시대에 다시 나올 필요도 없고, 이렇게까지 말하면 과하게 매정하겠지만, 나와서도 안 되는 거 아냐? 그런데 나왔다. 전상국이 지금 김유정기념사업회 명예회장을 맡고 있어서 그랬을까? 쓰는 김에 평소 존경했던 은사 황순원까지 슬쩍 끼워 넣어서?

  게다가 <봄봄하다>와 <가을하다>에서 만든 단어 “봄봄하다”와 “가을하다”가 과하게 많이 나오는 느낌. “봄봄하다”와 “가을하다”의 어감이 정말 좋다. 그래서 내 생각을 말하자면 이런 고급의 단어는 진짜로 가끔, 아주 드물게 나와야지, 과하게 자주 쓰면 오히려 단어가 독자에게 선물하는 신선과 청량, 신비스러움이 천하게 보이고 느껴질 위험이 있다는 거다.


  나머지 여섯 작품에 관해서 내 주제에 어떻더라, 말할 처지가 아니다.

  (그래도 뚫린 입이고, 달린 손이니 자판 좀 더 두드려보자.)

  이이가 1940년생. 열 살 때 한국전쟁이 발발해 그해 여름에서 가을까지 같은 마을 사람들이 바로 어제까지 한 두레에서 모내고, 피뽑고, 추수하던 사이에서 오늘 밤엔 서로 죽이고 죽는, 같은 하늘 이고 살 수 없는 원수 사이로 변하는 걸, 어린 시절에 두 눈으로 보았던 세대이다. 대개 이 시절에 겪은 일, 본 책, 들은 노래는 평생 간다. 딱 이때 전상국과 비슷한 연배는 사람이 어떻게 갑자기 야수로 변할 수 있는지, 사람이 사람을 찔러 죽이고, 생으로 땅에 묻어 죽이고, 대나무로 꿰어 죽이는지 보고 만 것이었다. 이건 이들의 평생에 걸친 상처가 될 수밖에. 이 가운데 불행하게도 작가가 된 사람들은 끊임없이 자기 상처를 드러내고, 덧나고, 다시 소독약을 바르며 세월을 죽였으리라.

  젊은 시절 책 좀 읽을 때, 우리나라에 한국전쟁이 없었어도 소설가들은 소설을 쓸 수 있었을까? 이야기거리가 있었을까? 이런 생각을 했던 기억이 있다. 내전은 벌써 30년, 4.19가 불과 20년 전. 근데 각 사건을 다룬 작품의 양과 질은 아예 비교가 불가능할 정도로 차이가 많았다. 그땐 몰랐지. 알아도 심각하게 알지는 않았던 거 같다. 혁명은 절대로 전쟁만큼은 참혹하지도 않고, 살육이 넘치지도 않고, 비극적이지도 않다는 것을. 이 시절을 견딘 작가들은 결코 내전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팔자를 타고 났다.


  전상국도 생애 마지막 소설집 《굿》에서도 한국전쟁에 관한 상처는 여전하다. 다만 이제 상처를 극복하자는 의지가 눈에 띈다. 유일한 중편소설이자 표제작인 <굿>이 대표적이다. 강원도 산골 깡촌 부귀리에서 무려 67년만에 , 67년 전에 부귀리에서 동네 사람들이 쇠스랑으로 찔러 죽인 리 인민위원회 위원장 최용호가 돌아오면서 작품이 시작한다. 죽은 사람이 살아서 돌아왔다고? 예수야? 아니다. 그때 그렇게 죽은 최용호의 아들 최준성이 언젠가는 부귀촌에 묻혀 있는 아버지 최용호의 유골을 파 좋은 자리에 정식으로 매장하고, 오랜 해원굿 한 판을 하기 위해 이름도 죽은 아버지의 이름으로 개명을 해버렸던 거였다. 그리하여 최용호의 아들 최용호가 돌아왔다.

 해원解怨, 원통한 마음을 푼다고? 그렇다. 하지만 죽은 최용호가 그리도 원통하게 죽었나? 죽을 만큼의 잘못을 저지르기라도 했을까?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최용호는 인민위원회 위원장을 하면서 다른 건 다 건너뛰고, 백 살이 넘어 아직 살아 있는 장영팔의 아들을 인민군에 들여보내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모르게 하고, 전쟁 터지기 바로 며칠 전에 휴가 나온 국방군 일등병 정대수를 잡아 당국에 넘겨 자작고개에서 재판 없이 살해당하게 만들기도 했다. 물론 그렇게 될 줄 몰랐다. 그저 포로로 잡혀 북으로 끌려갈 줄만 알았다.

  그렇게 서로 죽고 죽이던 시절. 죽은 최용호의 아들 최용호는 쇠스랑에 찔려 죽은 아버지와, 목숨을 구하기 위하여 사람들이 일러준 대로 야반도주한 조부모와 어머니. 그리고 아버지 최용호에 의하여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인 정대수의 유골까지 다 모아, 인근 주민 사람들을 다 불러놓고 양지바른 곳에 다시 정식으로, 거창하게 매장함으로써 진정한 해원을 이루고자 한다. 아들 최용호가 굿의 주인이자 박수 무당이 되어.

  내가 뭘 알겠는가마는, 작가의 연륜과 글을 써온 내력을 싹 무시하고 읽어봐도, 잘 쓴 중편이다. 한 거장이 스스로 인생의 마지막 작품집이라고 선언한 소설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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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moo 2025-10-30 10: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상국 작가의 마지막 소설집이군요! 전상국 소설을 읽은지가 언제인지 까마득합니다. 그래도 2000년대 이후 작가보다 훨씬 좋았다는 인상입니다. 다만 한국전쟁을 겪은 작가들은 그 상처에서 벗어날 수 없는 한계도 있어 좀 아타까운 느낌입니다.

Falstaff 2025-10-30 16:53   좋아요 0 | URL
저도 아휴, 얼마나 오랜만에 읽은 전상국인줄 모르겠네요. ㅎㅎㅎ 뭐 그때나 지금이나 작가들은 나름대로 다들 진지하고 시대를 고민하고 있겠지요. 그렇게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