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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 힘줄로 만든 하프 ㅣ 문학동네포에지 83
강기원 지음 / 문학동네 / 2023년 12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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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번에 강기원의 《바다로 가득찬 책》을 읽고 필이 팍 꽂혀서 곧바로 《고양이 힘줄로 만든 하프》를 희망도서 신청해 읽었다. 이 시집은 2023년에 문학동네에서 찍었다. 당연히 2020년 이후에 쓴 시를 모은 시집인 줄 알았는데, 천만의 말씀, 이미 출간되었으나 이젠 폐간된 시집을 다시 찍는 출판사의 프로젝트로 18년만에 새로 나온 옛 시집이었다. 그러니까 초판은 2023 – 18 = 2005년, 시인이 마흔여덟 살 무렵에 낸, 아마도 첫 시집일 텐데, 문학동네는 염치도 좋지, 판권지에 자기네 책에 초판 1쇄라고 타이틀을 박았다. 중판 아냐? 적어도 개정판이라고 해야지 말이야.
첫 시집이었다는 걸 알았으면 내가 희망도서 신청을 했을까? 아무래도 아닌 거 같다. 그러느니 차라리 다른 도서관에 상호대차서비스 신청을 해서 시인의 초판본을 읽는 편을 택하지 않았을까 싶다. 확실히 사람은 게으르면 못쓴다.
이렇게 타박을 하는 가장 큰 이유는, 이 시집이 전에 읽은 강기원보다 마음에 차지 않았기 때문이다. 시인사에서 2005년에 낸 초판을 찍을 당시 강기원이 시인 짬밥으로 치면 8년밖에 되지 않았지만, 이미 마흔여덟, 시인으로 인생의 절정기를 구가하던 시기라서, 내 주제에 시가 이러하니 저러하니 건방을 떨 수는 없다. 그래서 단지 시들이 어째 내 입맛에 덜 맞았다고만 말할 수밖에.
시집의 제목 《고양이 힘줄로 만든 하프》가 좀 그로테스크하다. 살아 있는 고양이의 힘줄을 뽑아 그걸로 하프를 만들었을까? 왜 이리 엽기적인 이야기를 하느냐면, 사마천이 쓴 <사기 세가>의 장면 때문이다. ‘요치’라는 작자가 제나라에서 권력을 잡자 제나라 임금 민왕을 죽이는데, “민왕의 힘줄을 뽑고 종묘의 대들보에 하룻밤을 그대로 매달아 죽게 하였다.” 그러니까 사람도 살아있는 채로 힘줄을 뽑아 대들보에 매다는데, 고양이를 그렇게 하지 말라는 법이 없으니까. 사람이라면 재미나 여흥을 위해 능히 그런 짓도 할 수 있는 생명체라서 말이지. 이러저러한 말만 늘어놓지 말고 표제시를 한 번 읽어보자.
고양이 힘줄로 만든 하프
내 머리채 휘어잡고 일필휘지 할 분 안 계시나
뼈의 구멍에 입술을 대고 날숨 불어넣을 이
방광 가득 바람을 넣어 힘껏 차도 좋을 일
무늬 없는 등판에 지도를 그려 넣어
벽에 거는 일은 어때
오대양 육대주 까맣게 문질러
밤의 지도를 만들지
찾을 수 없던 별자리 돋아오르게
비스듬히 품에 안고 핏줄의 현을 튕기면
숨겨진 노래 흘러나올까
고양이 힘줄로 만든 하프처럼 말야
하지만 다 쓸모없다 여기실 땐
빈 몸통만으로 토르소를 만드시죠
사라진 목, 부서진 팔다리로 웃는 토르소를 (전문. p.99)
어떠셔? 시인이 참 시가 써지지 않았던 모양이지? 오죽하면 자기 머리채를 틀어잡고 시인의 몸을 붓인 양 일필휘지로 시 한 수 써보라 했을까? 그러게 누가 시인더러 시인 하랬나? 자기 좋아 시 쓰기 시작해놓고 괜히 엄살이셔, 그지? 근데 엽기 그로테스크인 건 맞다. 부서진 팔다리로 웃는 토르소라니, 거 참 심했다. 오래전 최승자도 그랬지. 내 팔 다리를 분질러 네 꽃병에 꽂아달라고. 이런 표현은 먼저 쓴 사람이 장땡이다. 그래서 강기원, 1패. 아니면 말고.
근데 진짜 그로테스크는 시집의 2부에 집중되어 있다. 여성을 주제로 쓴 시들이 밀집해 있지만 그렇다고 구태여 페미니즘 시로 구분할 필요는 없다. 낙태와 어린 자식의 죽음 같은 여성으로의 참담함을 그렸다. 임신중단도 말만 임신중단이 아니라 낙태 수술의 장면을 그린다.
종이를 찢는다 / 낙태수술중이다 // 아주 잘게, 되도록 잘게 / 마취약이 듣지 않는다 … 사지가 뜯겨나간다 / 작은 손가락, 발가락이 핀셋에 들려 있다 // 주어 동사가 멋대로 섞인다 / 살점 하나라도 남겨선 안 된다 … (<퍼즐> p.45)
말로만 듣던 장면이다. 연령층에 따라 학교 수업시간에 비슷한 영상을 보여주던 시기도 있었다고 들었는데 시를 읽으며 연상하는 것이 그렇다고 그나마 ‘검열’ 후의 영상보다 덜 충격적인 건 아닐지도 모른다. 어린 아이가 죽어 화장을 하고 따끈한 골분을 든 채 러시아워의 서울을 지나오는 이야기보다 바로 앞 페이지에 실린 이런 시를 읽는 편이 좀 나을 거 같다.
딸꾹질
삽날에 물컹한 것이 걸려든다. 썩은 연못을 메우려 마당을 파는 중. 구덩이 안에서 오글거리는 새끼 쥐 여섯 마리. 팔뚝만한 어미가 나무 뒤에서 노려보고 있다. 인부는 우선 그놈을 때려잡는다, 망설임 없이. 삽 뒷등에 터져버린 배에서 흐르는 찐득한 것들. 새끼들의 오디 같은 눈알들 위로 큰 돌이 쿵 던져진다. 마당 한구석 홈통 붙들고 구경하던 아이가 딸꾹질을 시작한다.
삽날과 바위에 찍히는 꿈에서 겨우 깨어난 아이. 흠뻑 젖은 채 새벽 마당으로 나간다. 돌은 어느새 치워져 있고 연못 있던 자리엔 뒤집힌 흙의 속살이 덮여 있다. 묽은 핏빛으로 떠오르는 태양을 꼼짝 않고 아이는 지켜본다. (전문. p.39)
흠. 괜히 소개한 것 같군. 새끼 쥐 보셨나? 아주 오래 전 군불 때던 시절, 불 때지 않는 아궁이가 따듯하니까 겨울이 되면 가끔 쥐가 거기에 새끼를 낳는다. 털도 제대로 돋지 않고 눈도 못 뜨는 분홍색 작고 “귀여운” 생명체. 꼼지락거리는 움직임은 아무리 미물이고, 밤마다 천장을 뛰어다니는 시끄러운 병원균 매개체로 성장할지언정 정말 마음에 쏙 차는 생명체인 것을, 그걸 큰 돌을 쿵 던져 납짝 짜부려뜨려 죽인다고? 아이가 딸꾹질할 만하다. 그걸 보는 어미 쥐는 또 어땠을까? 그러니까 자기를 향해 날아오는 삽등조차 피하지 않고 새끼들하고 한날 한시에 죽는 편을 택했겠지. 에휴, 인용할 생각이 없던 시인데 어떻게 독후감 쓰다 보니 이렇게 됐네 그려.
원래는 이 시를 제일 먼저 인용할 생각이었다.
경(經)
벗은 허물
뒤돌아보지 않고
없는 발과
없는 날개로
사라진 푸른 뱀아
내 화사한
경전아
봄날
갈라진
숲길에 서서
허물뿐인
탈피할 수 없는 내가
너를 읽는다 (전문. p.13)
경經. 들실 말고 날실. 글. 책. 도리. 불경. 그리고 여성들의 월경. 이 가운데 어느 경을 말하는 것일까? 단, 이 시에서 경이 명사일 경우에 그렇다는 말. 마지막에 “너를 읽는다” 했으니까 명사가 맞다. “너”라고 의인화했으니 월경일 수도 있어서 굳이 선택에 포함시켰다. 시인에게 물어보라고? 물어봤자다. 99퍼센트의 시인은 “당신이 생각하는 경이 맞습니다.”라고 답변할 테니까. 그러니까 어떤 경인지는 독자 마음대로인데, 내 생각엔 글과 책, 그리하여 “시” 아닐까? 만일 이 시집이 시인이 처음 낸 책이라면, 첫 시집의 첫 시의 주제가 자기가 쓰는 것이든, 다른 사람이 쓴 것이든 시라고 생각해도 무방할 것 같아서 의견을 내본다. 불자가 불경을 대하듯 시인이 시를 읽고 쓰겠다는 초심이라 여기면 그럴 듯하다.
그런데 이 시를 한 번 보자. 조금 불만이 있어서.
선짓국
선혈로 공양케 하시다니
이건 피로 끓인 국이 아니다
피로만 끓인 것이 아니다
진흙과 눈물, 짚과 서리, 햇살과 구름, 들판이
녹아든 한 그릇의 늪
받아먹어라
받아마셔라
들리는 말씀 없어도
쓰리고 아린 속내 앞에
침묵으로 엉긴
뜨겁고 생생한 적신(赤身)
그 속에 쇠붙이 찌를 수 없어
함부로 휘저을 수 없어
두 손으로 뚝배기 받쳐들고
고개 수그려
메마른 입술을 댄다
찬 이마 위로 훅, 끼쳐오는 입김 (전문. p.16)
선짓국 한 뚝배기 하면서 별 생각을 다 한다고? 그래서 시인 아니냐! 한 목숨, 뜨겁고 생생한 붉은 몸의 공양에 흠을 낼 수 없어 시인은 차마 쇠 젓가락으로 선지 덩이를 찔러 자를 수 없단다. 그래서 두 손으로 받쳐들고, 고개도 수그려, 내 생명의 숨결 훅훅 불어가며 뚝배기를 비우자 훅, 끼치는 입김. 바로 내가 준 입김이 다시 나한테 비릿한 냄새와 더불어 끼쳐온다. 시인이 차마 시로 쓰지 않았지만 이 다음에는 뭐? 그려, 깊은 트림 한 번 끄윽, 해야 제 맛이지. 내 생명의 입김을 주었더니 다시 그게 끼쳐온다고? 그럼 또다시 돌려준다는 의미에서 깊게, 그윽하게, 끄윽.
이 시에 뭐가 불만이 있느냐고? 2연과 3연. 구태여 그걸 설명을 해야 했나? 한 번 빼 버리고 읽어보시라. 좀 더 독자를 대우해주는 거 같지 않아? 이게 피로(만) 끓인 국이 아니라는 걸 누가 몰라? 적어도 시집을 사 읽던지, 도서관에서 빌려 읽는 독자가? 시를 제대로 배우지도 않고 알지도 못하는 내가 읽기로는 2연과 3연은 뱀 다리 같다. 물론 아니겠지. 그러나 그렇게 읽힌다는 말씀.
아이고, 오늘도 내가 기원 언니한테 함부로, 심하게 말해버렸네. 그래도 시인의 초기 모습을 볼 수 있어서 의미가 있는 시집이다. 이대로 끝내기 섭섭해서 재미있게 읽은 시 하나 달고 독후감 마친다.
미하(米蝦)
눈물이 짠 걸 보면
나는 소금
아니, 절여진 무엇
허공의 항아리
짜디짠 그
어둠 속에서
덜 삭은 눈알로
바다를 읽는
굽어진 등도 없이
모든 다리를 오그리고
사라져 갈
쌀새우 (전문. p.59)
미하, 쌀새우가 뭔지 아시지? 서해, 남해에서 주로 나는 옅은 붉은 색 작은 새우인데 말리면 하얗게 색이 바뀐다. 강기원이 본 쌀새우는 새우젓을 담근 모양이다. 아직 덜 삭아서 그렇지. 새우젓 말고 곤쟁이젓은 아시나? 아주 작은 새우만 골라 곰삭여 만든 젓갈. 인천사람이자 가수인 송창식이 좋아한다고 들었는데, 나 어렸을 때도 자주, 즐겨 먹던, 없어서, 안 줘서 못 먹던 젓갈이다. 민물새우로 만든 토하젓도 일품이고. 이 쌀새우를 보고 다른 건 그리 생각하지 않고 지은 시.
아휴, 근데 나는 이런 종류의 시는 박백남이 쓴 <홍어>의 두번째 연이 제일 좋다.
“쏴아쏴아 바닷물 밀려드는 곰소항에서 나는 곰삭은 홍어를 겨자에 찍어먹고 있다 오늘, 묵혀서 썩히면 썩힐수록 제 맛이 살아나는, 때론 몰래 맛보고 싶은 그대, 첫사랑처럼 코 끝이 싸한 맛, 한때 그대가 살았던 수심 깊은 내 가슴의 바다에서 쏴아아 눈물 끌어올려 내 눈자위를 적시고 바삐 사라지는 가오리과의 홍어, 내 어찌 그대 잊고 어디로 가오리까” (《석류꽃엔 눈물생이 있다》 현대시. 1998. p.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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