쇄골에 천사가 잠들고 있다
핑크 지저인 3호 지음, 곽윤미 옮김 / 지만지드라마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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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극작가 이름이 핑크 지저인 3호라고? 그렇다. 1982년생이니까 우리나라 김지영씨하고 동갑이다. 일본 교토에서 출생해 교토의 대표적인 학교 도시샤대학 미학예술과를 졸업하고, 흥미롭게도 장례지도사 직업에 종사, 천 명 이상의 죽은 자들 장례를 도왔다. 연극판에서 뜻이 맞는 핑크 지저인 3남매를 조직해 이 가운데 3호를 맡아 지금까지 극작가와 연출가로 활약하고 있다. 본명은? 밝히지 않았다.

  근데 지저인? 지저地底. 땅 아래, 땅 속, 땅 밑이라는 뜻. 거기에 있는 건 저승 또는 관, 아니면 시신. 크게 말해 죽음의 영역이다. 지저인 3호야 전직이 장례지도사, 속칭으로 ‘염쟁이’였으니까 그렇다고 치고, 다른 핑크 지저인 두 명도 같은 직업이었을까? 그건 모르겠고, 하여간 이들이 몰두하는 작업이 “삶과 죽음에 육박하는 작품”이라고 작가 소개에 나와 있다. 이걸 매년 두 편 정도 만들어 공연한다고.

  전년에 이미 센다이 단편 희곡상 대상을 단독 수상한 이력이 있는 핑크 지저인 3호는 이 작품 <쇄골에 천사가 잠들고 있었다>로 2019년에 극작가협회 신인 희곡상을 받았다. 출판사 지만지드라마가 이 책을 출간한 건 아마도 작년, 2024년 늦봄에 우리나라에서 공연을 했기 때문일 것으로 보인다. 핑크 지저인 3호도 한국에서 공연을 할 줄은 꿈에도 몰랐고, 직접 서울에 와 무대를 보고 꿈이 이루어진 기분이 들 정도로 감동했다고 이 책의 ‘작가의 말’에 썼다.


  2015년에 이슬람국가 ISIL이 일본인 민간군사회사 사장, 즉 무기판매상 유카와 하루나를 인질로 잡은 사건이 있었(단)다. 일본에서는 유카와라는 사람이 자기 이익을 위하여 정부에서 극구 만류하는 시리아 지역에 들어가 인질로 잡힌 일을, 개인이 일본 전체에 큰 “폐를 끼친” 인물로 여겼다. 이때 그를 구하기 위해 저널리스트인 고토 겐지라는 사람이 또 시리아에 갔다가 두 명 다 처형된 사건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아프가니스탄에서 전쟁이 한참일 때 들어가지 말라는 무슬림 극단주의 지역에 제 발로 기어 들어가 포교활동 하다 참수당한 기독교 원리주의자들이 있었다. 이것과 비슷한 경우라고 생각하면 많이 다르지 않겠다. 우리나라는 일본과 달리 개인 자격으로 구출하기 위해 아프가니스탄에 다시 들어간 사람도 없었고, 같은 교회 신자/관계자/책임자/목사/전도사/장로/권사/집사도 한 명 없었지만.

  이때 핑크 지저인 3호는 장례지도사 경험이 제법 있는 작가로 처형당한 유카와를 연상하면서, 마치 납관 작업을 하듯 이 작품을 썼을 것이다.


  무대는 농구선수 출신이자 전직 체육교사였던 기리노 겐토 씨 집의 마당이다. 시기는 2015년 한여름인 7월 30일 밤과 10년 전 2005년 6월과 7월 두 달 사이. 두 시기를 왔다갔다 한다.

  현재 시점에는 집주인 기리노 겐토 씨가 죽어 장례식을 마치고 참례를 했던 사람들이 기리노 씨 댁의 집에 모여 애도를 겸한 식사를 하고 있다. 물론 조문객들은 집 안에 있을 뿐, 이 가운데 마당으로 나와 극에 참여하는 사람은 고인의 아내 기리노 교코 한 명이다. 겐토가 죽어 염을 하고 입관을 했을 때, 입관, 일본말로 납관이라고 하는 모양인데, 납관을 한 이는 장례지도사 초년병인 사카모토 도루. 죽은 기리노 씨의 외아들 요시오의 하나밖에 없는 절친이다. 요시오는 현재 행방불명. 그가 사라지기 전, 그러니까 10년 전에, 아버지가 죽으면 납관은 네가 해달라고 부탁해, 그걸 들어주었다. 물론 부탁을 하고 곧장 우정에 금이 가기는 했지만 그때는 그랬다는 거다.


  요시오의 누나가 한 명 있다. 기리노 가즈에. 도루가 짝사랑했던 사람. 가즈에의 친구 유카는 장례지도사. 극의 성격이 확고해지는 데 유카의 역할이 작지 않다.

  무대인 기리노 댁이 있는 곳은 교토부 우지시 마키시마 동쪽 우지가와강변의 주택가. 새로 넓직한 도로가 뚫렸다. 촌에 큰 길이 뚫리면 제일 먼저 동네 술꾼들이 결딴난다. 술에 잔뜩 취해 전에 늘 다니던 길 생각만 하고 그저 터덜터덜 갈 길 가다가, 시속 80km 규정속도로 달리는 차에 치어 염라대왕 전에 서게 되는 것. 예전에는 술 취해 집에 가다 죽을 일은 정말 잔뜩 취해 돌다리를 건너다 동네 누렁이가 푸짐하게 싸놓은 개똥을 밟아 미끈덩, 다리 아래 거꾸로 처박혀 죽는 일 말고는 없었는데 이게 웬 일이니?

  아, 그렇다고 겐토가 개똥 밟아 다리에 떨어져 죽었거나 차에 치어 죽은 건 아니다. 그냥 죽었다. 우지가와 강변의 수풀을 터전 삼아 살던 고양이들이 사달이 났다. 고양이들은 길 건너다 뒤돌아 가지 않는다고 들었다. 그리하여 하루에도 한 두 마리씩 로드 킬을 당했는데, 험한 꼴로 죽은 고양이의 뒤처리를 아무 소리도 하지 않고 묵묵히 하는 유일한 사람이 장례지도사 유카였다. 험한 죽음과 이의 뒤처리. 고양이와 유카. 책의 제일 앞에 실은 ‘작가의 말’에서 ISIL에 의하여 인질로 잡혔다가 처형당한 무기판매상 유카와와 그를 구하러 갔다가 같이 죽임을 당한 저널리스트 고토. 원혼을 달래는 의미를 포함해 이 일을 희곡으로 만든 핑크 지저인 3호. 이렇게 연극이 만들어진다.

  이걸 알아챘다면, 이야기는 어쨌든 행방불명된 유시오 역시 비슷한 부류의 일원이 될 것임도 눈치챌 수 있다. 그러면 애초 배경인 기리노 댁의 지붕에 여러 색의 페인트가 흉하게 뿌려져 있으며, 담장엔 “죽어!”, “자업자득”이라거나 심지어 “일본의 치부”를 비롯한 욕설이 가득한 낙서가 쓰여 있는 이유도 이해가 된다. 무기판매상 유키와와 고토를 국가에 큰 폐를 끼친 인물로 지탄했던 사람들이니까.

  “죽어!”가 욕이라고? 전 스케이트 국가대표이자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이상화의 남편 강남이 그러는데, 일본에서 제일 세고 거친 욕이 “죽어!”란다.


  요시오. 크로스드레서. 여자의 옷에 집착하고 메이크업까지 한 채 학교에 갔다가 왕따를 당했다. 이건 그냥 취향이지 신경정신적 병이거나 동성애 등 성 소수자에 포함되지 않는 것으로 안다. 내 생각이 틀릴 수도 있다. 하여간 학교 성적도 좋지 않아 체육교사로 근무한 아버지 겐토한테도 인정받지 못한 그냥 보통의 남자. 요시오한테 접근한, 좋은 의도로 가까이 지내게 된 미도리카와 다쿠지. 이이의 직업이 전쟁 저널리스트이다. 다쿠지는 직업상 숱하게 사진을 찍어댄다. 요시오하고 친해지자 한참 어린 요시오에게 일회용 카메라를 선물하면서 더욱 친밀한 관계가 되고, 어느날 다쿠지는 전쟁 취재를 위해 사라진다. 요시오도 함께 사라지고 행방불명, 사실상 죽었다.

  요시오 죽기 전에 먼저 죽은 사람이, 주인공의 한 명인 도루의 짝사랑 상대인 요시오의 누나 가즈에. 차에 치어 죽어가는 고양이를 구하기 위하여 달려갔다가, 더 빨리 달려오는 차에 치어 그 자리에서 죽는다. 가즈에가 더 불쌍하지만, 가즈에를 짝사랑한 도루의 상실도 대단했다. 이때 도루에게 다가와 위로의 말을 해준 이가 선배 장례지도사가 될 유카. 유카가 도루의 목과 어깨 사이의 뼈, 쇄골에 움푹 파인곳을 손가락으로 살짝 찌르면 말한다.

  “너의, 쇄골에, 가즈에가, 잠들고, 있습니다.”


  가즈에가 도루의 쇄골에서 잠들고 있었듯, 10년 후 이미 죽어 혼령이 된 요시오 역시 도루의 쇄골에 잠들어 있을 수도 있다. 마찬가지로 민간군사회사 사장 유카와 하루나와 저널리스트 고토 겐지 역시 핑크 지저인 3호의 쇄골에서 잠들고 있었을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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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5-11-04 09:5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 책 제목도 일단 좀 그렇고 ㅋㅋㅋㅋ 내용 살펴보니까 장례지도사, 고양이 이런 키워드가 등장해서 에이... 뻔한다 싶어서 패스했는데요. 이런 내용이군요. ㅎㅎ

Falstaff 2025-11-04 11:26   좋아요 1 | URL
그래도 네 췌장을 먹을래 보다 낫지 않나요? 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