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츠먼의 변호인 묘보설림 17
탕푸루이 지음, 강초아 옮김 / 글항아리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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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오. 탕푸루이가 타이완에서 엔지니어 아버지, 공무원 엄마 사이의 아들로 태어난 1982년 9월에 나는 대한민국 충청남도 연무읍 육군 제2훈련소에서 박박 기고 있었으니 거 참. 아, 미리 이야기하고 시작하는 편이 좋겠다. e마트에서 파는 넙치회 안주로 쐬주 한 병 까고 얼마 지나지 않았다. 그리하여 오늘은 취중 독후감을 써야겠다. 웬만하면 안 쓰고 그냥 자빠져 자려고 했는데, 자꾸 독후감 쓰는 걸 미루면 나중에 코피 나는 걸 잘 알아서, 흐르는 눈물을 훔치며 쓸 수밖에. 이까짓 것이 뭐라고 책 읽었으면 그만이지 죽어라 독후감을 쓰고 염병을 하는지 나도 참 팔자소관인 거 안다, 알아. 그러니 뭐라 하지 마시라.

  탕푸루이는 국립 중칭中正대학 법학과를 졸업하고 다시 푸젠輔仁대학 재정경제법학대학원에서 석사를 한 후 2010년에 변호사 자격증을 땄다. 그러나 법학과는 관계없이 학부 2학년 때 영상창작에 뜻을 두어 커뮤니케이션 대학원에 지원했지만 장렬하게 물을 먹고, 자신으로서는 제2 지망이랄 수 있는 변호사 자격을 취득한 것이니 적어도 소부르주아 집안의 자제였던 것 같다. 완전히 짐작이다. 보통 집안 아이들은 쉽게 선택하기 힘든 과정이라 그렇지 않을까 생각해본 것뿐이다.

  5년 동안 변호사 일을 하다가 (갑자기 미쳤는지, 갑자기는 아니겠지만) 타이완 정부 장학금으로 캘리포니아 예술대학에 들어가 영화연출로 석사를 받고, 시나리오 작가와 영화감독으로 경력을 쌓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오늘 독후감을 쓰는 <바츠먼의 변호인>을 발표해 타이완의 문학상을 쓸어 담았다. 그러니 타이완 예술계의 기린아라고 해도 크게 틀린 말은 아니겠다.


  <바츠먼의 변호인>은 크게 봐서 ①타이완 사회에서의 약자 계급 차별과 ②사형제도 폐지/유지에 관한 이슈를 다루고 있다.

  1911년에 중화민국을 수립한 장개석 정권은 40년대 완전히 폭망해 그때까지 자기들이 수집한 중국의 온갖 문화재를 배에 싣고 타이완으로 후퇴했다. 이때 본토에서 섬으로 밀려난 사람들의 대부분은 한족漢族이었다. 이들은 타이완의 선주민들을 변두리로 쫓아내고 섬에 정착한다. 이 과정에, 타이완을 하나의 독립한 국가로 본다면, 이주해 온 한족과 나라 안 다수를 차지하는 상대적 소수인 선주민 사이에 갑과 을, 우량과 불량 비슷한 계급의 차별이 발생하는데, 한족의 정착 초기에 다수의 선주민을 탄압할 수밖에 없었다고 하더라도, 그건 한족들이 그렇게,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 생각할 뿐이었고, 선주민들의 앙가슴에는 못이 박혀도 보통 깊게 박힌 게 아니었겠지? 그런데 이런 게 날이 가고 해가 가면서 조금씩이라도 해소가 되어야 마땅할 터이지만 아예 사용하는 언어까지 달랐던 이민족을, 한족은 자신들도 본토에서 쫓겨온 주제에, 타이완 경제의 3D 산업을 담당할 천민 취급 비슷하게 했던 모양이다.

  (여기서 다시 한번 주위 환기. 그렇다는 게 아니라 책을 읽어보니까 그러지 않았나 싶은 거다.)


  타이완의 제일 북쪽 꼭대기에 있는 지룽基隆시. 나 대학 졸업하고 초년 봉급쟁이 할 때 수입import구매 담당이었는데 당시 타이완의 무역항 가운데 하나가 지룽시였다. 물론 가오슝이 제일 큰 무역항이었지만 우리나라로 오는 배는 지룽, 키룽Keelung이라 했었고, 이곳이 더 유리해 잘 기억하고 있는 동네다. 아이고, 당시에 이과 출신이 무역한다고 신용장, 적하보험, 선하증권 이딴 거 열라 공부했던 기억이 새롭네. 공부 잘한다고 사수한테 귀염 좀 받았건만 다 옛 이야기다.

  이 지룽시가 1960년대 이전부터 근해어업, 원양어업 할 것 없이 타이완의 어업 중심지로 자리잡았으나, 60년대 들어 세계 3위권의 수산업으로 명성을 떨칠 즈음해서 갑자기 닥친 문제가 선원 인력이 턱없이 부족했던 거였다. 그리하여 타이완 정부는 주로 북부지역인 화둥華東 지역의 선주민 가운데 가장 많은 인구를 차지했던 아미족族 사람들을 데려와 어선의 어부로 투입하기 시작했다. 당연히 장시간 노동에 낮은 임금이었겠지. 안전에 관한 의식이 없던 때이니까 작업중 사고는 선주 측에서 나 몰라라 했을 것이고. 당시 3세계의 크지 않은 기업체 생각하면 아주 딱일 듯하다.

  이 가운데 1971년에 화롄현 위라진鎭에서 아들 하나 들쳐 업은 아내와 함께 지룽에 도착한 젊은 가장이 있었으니 이름이 ‘퉁서우중’이었다. 그리고 세월이 흘렀다.


  그때부터 11년이 흐른 1982년 9월 18일. 퉁서우중은 온몸이 피투성이가 되어 피 묻은 칼을 옆구리에 차고 늦은 밤에, 폐선박의 목재를 써서 지은 21평 건물에 열네 명이 사는 집으로 들어왔다. 그는 얼마 전에 어부 일을 하다 사고로 바다에 빠져 죽은 사촌동생의 뒷일을 논의하다가 열을 받아 술을 과하게 마셨고, 도무지 화를 다스리지 못하여 수박 써는 칼을 품고 선박회사에 갔다가, 때마침 사무실에서 나오는 회계부장의 가슴과 목을 무지막지한 칼로 썩, 베어 버렸다. 선뜩한 기운을 느꼈는지 회계부장의 뒤를 쫓아 나오던 다른 한 사람도 퉁서우중의 눈에 띄자 마자 역시 가슴과 목을 스윽, 그어버렸던 거였다. 목과 가슴을 베었으니 피가 보통 튀었겠느냐는 말이지. 그리하여 저승야차의 모습을 하고 집에 도착해, 방에 들어오지는 않고 벽에 철퍼덕 기대 앉았는데, 이때 아들 퉁바오쥐는 난생 처음 피냄새를 원 없이 맡을 수 있었으며, 아이의 인생에서 범죄란 조금도 낯선 일이 아니게 되었다. 그러나 나중에, 아주 나중에 알게 되지만, 퉁바오쥐는 소외당하고 핍박 받으며 온갖 사고에 노출되었으면서도 전혀 보상도 받지 못하는 아미족의 일원으로써 아버지 퉁서우중을 한 명의 영웅 비슷하게 생각했을 수도 있었는데, 이건 아들 퉁바오쥐만 그랬던 것이 아니라 당시 바츠먼 부락에 살던 아미족 사람들 대부분 그렇게 여겼던 모양이다.

  퉁서우중이 날 선 수박 써는 칼을 휘둘렀음에도 칼에 베인 선박회사 회계부장과 다른 한 명은 기적적으로 목숨을 보전해 퉁선생은 살인이 아니고 살인미수 죄를 적용받아 최종 10년 징역형을 받고 출소했다. 당시 판사는 술에 취하여 심신미약 상태였고, 산지부락 출신 선주민이라 생각하는 것 자체가 야만스러운데 거기다가 친족의 사고로 충격을 받아 저지른 사고여서 형량을 줄였다고 판결했다. 즉 산골 출신 선주민, 쉽게 말해 인디언이라서 천성이 무식하고 험해 그 거친 기질을 감안해 좀 봐줬다는 얘기다.

  퉁서우중의 형기 중, 이제 살림을 꾸려야 하는 아내 마제는 애초에 건강하지 않은 체질이었음에도 먹어야 사니까 새우가공공장에 들어가 새우 껍데기 까는 일을 했다. 1982년 혹은 83년임에도 타이완에서는 붉은 고무장갑이 없었는지 직원들이 맨손으로 껍데기를 깠는데, 건강 체질이 아닌, 즉 체내 저항력이 부족한 마제는 조직염과 패혈증에 감염되어 고통스럽게 삶을 접고 만다. 이제 식구 중에 하나 남은 건 아들 퉁바오쥐.


  삶이 자신을 버리는 거 같으면 오히려 독해진다. 퉁바오쥐는 스스로 동정하는 것을 거부하고 아미족 커뮤니티의 보살핌 속에 어떻게 생활을 해가면서도 시간만 나면 동네 성당 창고에 몰래 들어가 공부하는데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게 이 지긋지긋한 바츠먼 부락을 뜰 수 있는 유일한 길인 것을 아는 바에야. 반드시 이곳을 뜨고 말 테다. 그리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으리. 근데 그게 쉽게 되는 거야? 웃기지? 하지만 퉁바오쥐는 정말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퉁바오쥐가 아무리 열라 공부했다 하지만 타이완 부모 역시 자식 교육에 관한 한 우리나라 부모한테 꿀리고 싶어하는 마음이 1도 없는 족속이라 쉽게 대학에 입학할 수는 없었다. 그리하여 최고의 대학은 아니고 서열 10위 정도 하는 학교의 법학과에 “원주민 특별 전형”으로 입학했고, 학교에 다니면서 놀라운 순발력과 법학 지식으로 타이완 법대생 가운데 이름을 떨쳤는데, 이때 알게 된 사람이 천칭쉐. 명성 드높은 고관 집안의 딸이자 훗날 타이완에서의 사형 철폐를 끝까지 주장하는 법무부 장관이 될 인물이었다. 퉁바오쥐는 대학을 졸업하고 타이페이 법원의 법정 변호사로 일하면서 다시 천칭쉐를 만나게 된다.

  두 명의 청춘이 20년이 흘러 40대가 되어 법정변호사-법무부장관으로 만나게 되는 것은 타이완의 산골 부락민 아미족이 아니라, 아미족 대신 원양어선을 타고 어부일을 하기 위하여 인도네시아에서 해외취업을 온 젊은 청년 압둘아들이 자기가 일한 배의 선장이자 퉁바오쥐의 어릴 적 친구 정펑췬의 집에 찾아가 정펑췬과 그의 아내를 칼로 찔러 죽이고, 두 살도 되지 않은 딸까지 욕실에서 물에 빠뜨려 질식시켜 죽인 사건 때문이었다.

  뭔가 말이 되지? 40년 전 아미족 선원 퉁서우중의 살인사건과 현재의 인도네시아 이주노동자 압둘아들의 살인사건. 퉁서우중은 살인미수라 10년형을 받았지만 압둘아들은 1심에서 이제 두 살박이 유아를 포함한 세 명을 살인한 죄과로 사형을 선고받고, 2심에서 법정 변호인 퉁바오쥔을 만나게 된다.  여기에 사형만은 집행하지 않고 싶어하는 사형폐지론자 법무부 장관이자, 젊은 시절 퉁바오쥔의 맞수 천칭쉐. 지금은 사형 폐지 또는 감형이라는 같은 목표를 가지게 된. 그럴 듯하지?

  작품을 쓴 탕푸루이를 높게 평가하는 건, 결국은 악당 그 자체인 천칭쉐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게 도대체 어떤 이유인지 말할 수는 없겠지? 결국 다 그렇게 사는 거다, 하고 끝맺는 탕푸루이. 미국에서 영화를 공부하지 않았어도 이렇게 만들 수 있었을까? 아쉬운 건 (할리우드 식으로)꼭 유머 코드를 삽입해야 한다는 강박이 좀 있는 것 같았다는 거. 그렇다고 작가한테 이메일까지 보낼 정성은 없고 말씀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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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돌이 2025-10-02 05:5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제가 아는 건 별로 없지만, Falstaff님 독후감을 기다리는 분들이 많을 거라는 건 압니다!! 일단, ‘아오’가 나오면 재밌는 얘기를 해 주실 것 같아서 기대하게 되는데, 부담이 되실 테니 내색은 안 할게요ㅎㅎ

Falstaff 2025-10-02 06:51   좋아요 1 | URL
에이, 설마 제 잡글 기다리시는 분이 계실까요. 곰돌이 님처럼 만날 읽어주시는 몇 안 되는 분들이 그래서 더 고마운 것입지요. ‘아오‘가 그렇습니까? ㅎㅎㅎ 조심해서 써야겠습니다.

얄리얄리 2025-10-02 15:0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요 며칠 Falstaff님 개인에 대한 정보(?)를 얻게된 재미도 있습니다. 얼마 전에 [경세통언]에서 달착륙 이야기에도 슬쩍 밝히시고, 오늘은 훈련소 이야기도 쓰셔서.. ㅎㅎㅎ

오늘 독후감도 잘 봤습니다. 정독은 못하지만 매일 재미있는 말씀 기다리는 저 같은 사람들 있으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Falstaff 2025-10-02 15:59   좋아요 0 | URL
그 정도야 뭐 개인정보라 할 게 있겠습니까.
걍 책 읽기 좋아하는 술꾼입니다. 젊은 때 희망대로 쪼옥 살고 있습죠. ㅋㅋㅋㅋ
 
고르디우스의 매듭을 자르면 위픽
전혜진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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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혜진은 1980년에 나서 인하대 수학과를 졸업하긴 했지만 수학 말고도 여러 관련 학문에 관심이 많았다고 한다. 졸업한 후에는 IT 소설 편집, 프로그래밍 등의 일을 했고, 현재 본업은 공무원이라는데 주민센터에서 대민지원을 하는 공무원 말고 IT 관련 일을 하는 것처럼 보인다. 여기저기 뒤져 나온 것이니 해당 정보를 쓴 시기에 그랬다는 거고, 아직도 나라의 녹을 먹고 사는 지는 모르겠다. 위키피디아에는 순서대로 만화가, 작가라고 했고, 중요한 작품으로 <월하의 동사무소>를 들었다. <월하의 공동묘지> 말고 <월하의 동사무소>.

  나는 전혜진이라는 이름이 입에 딱 붙어서, 전에 제법 읽은 작가인 줄 알았지만 이 책을 읽은 다음에 아무리 지난 독후감을 찾아보고, 메모장까지 뒤져봐도 전혜진이라는 이름이 없다. 즉, 이 책이 처음 읽는 전혜진이라는 얘긴데, 왜 이런 일이 생겼을꼬, 구글 검색을 하자마자 단박에 알아냈다. 아하, 내가 아는 전혜진은 작가 전혜진이 아니라 연기자 전혜진이었구나.


  위즈덤하우스의 위픽 시리즈는 여러 번 얘기했듯이 절대 내돈내산 안 하고, 대신 도서관에서 눈에 띄면, 굳이 이 시리즈를 독파하는 게 아니라 그저 눈에 띄면, 단숨에 읽기 수월하다는 이유로 얼른 주워드는 시리즈이다. 당연히 좋은 작품도 있고, 아닌 것도 있어서 소위 복불복이다. 예전엔 ‘복불복’을 ‘복골복’이라 했었는데 아마 강호동, 이승기 나오는 TV 오락프로 <1박2일> 이후 ‘복불복’으로 고정된 거 같다. 그럼 이 책은 복일까, 불복일까? 내 취향엔 불복.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가정. “가장 불행한”이란 말이 적당하지는 않지만, 가장 불행한 가정 가운데 한 가정이라고 하면 비슷한 수준의 집구석에서 유일하게 아직 살아 있는 딸이 주인공이다.

  지극히 가부장적인 아버지와 복종적인 어머니 사이의 딸 신은정. 41세. 크지 않은 회사의 총무업무를 총괄하는 차장 직급의 회사원. 그러나 어려서부터 폭력적이고 손끝에 물 한 방울 묻히지 않는 걸 당연하게 여긴 아버지 덕분에 산전수전 다 겪은 인물. 집안 살림은 나 몰라라 하면서도 어머니가 별의 별 일을 다 해 돈을 가져오면 그걸 홀딱 가져다 써버리는 것도 모자라, 손버릇이 지극히 나빠 은정이한테는 아직 너무 어려서 안 그랬는데 자기 아내는 하구 한 날 복날 개 패듯이 두드려 패던 인간. 수없이 말했듯 우리나라 소설에 등장하는 거의 모든 아버지하고 어쩌면 같아도 이렇게 같을 수가 있을꼬? 그런데 그 중에서도 으뜸이다.

  엄마가 돈을 꿍쳐, 아버지가 벌어온 돈을 따로 모아놓은 것이 아니고, 자기가 번 돈의 일부를 조금씩 모아 웬만큼 되었을 때, 집에 두었다가 아버지 눈에 띄었다면 그날로 없어질 것이 뻔하니, 부산 사는 듬직한 오라버니한테 맡겨, 은정이 대학 갈 때 학비로 써달라고 부탁했다. 그리고 얼마 안 있어 엄마는 드런 세상 떠서 갈 길 갔다. 장사를 치르고 돌아오면서 중학교에도 들어가지 않은 은정이한테 아버지가 하는 말씀이:

  “얘, 배고프다. 얼른 밥 차려라.”

  이랬던 인간이다. 그리고 몇 년 흘러, 은정이가 대구 살았던 거 같은데, 아버지 꼴이 얼마나 보기 싫었는지 죽자사자 공부해서 서울에 있는 대학에 시험을 쳐, 합격증을 보여주니까, 웃기고 있네, 해버렸다. 그리하여 은정이는 그동안 숨기고 있던 자기 대학 학비를 외삼촌이 가지고 있다니까, 아버지는 갑자기 눈알을 굴리면서 광채를 뿔뿔 날리더니 네 에미 그 도둑년이 내 돈 훔쳐서 친정집에 보낸 거라고, 얼른 가서 가져와야겠다고 기가 나 악을 써댔단다. 그래서 거의 처음으로 은정이가 바득바득 서울에 있는 대학을 다녀야겠다고 우기니까, 부엌에 가서 칼을 가져오더니, 설마 자기 진짜 딸한테 겁이나 주려고 그랬겠지, 은정은 이렇게 믿고 있었지만, 아버지 새끼는 부엌칼을 두 번 휘둘렀고, 처음 그었을 때는 아슬아슬하게 눈을 피해 광대 쪽의 살점을 써억, 베어 버렸다. 곧이은 칼부림은 휘둘러 생긴 열상이 아니라 칼에 찔려 생긴 창상/자상이었는데, 은정의 몸 어딘고 하니, 오른쪽인지 왼쪽인지, 책에 나오지만 벌써 잊어서 유감으로, 가슴 한 복판을 나름대로 푹, 찔렀으나 심장과 폐와 기타 중요 장기를 보호하기 위해 자리 잡은 갈비뼈에 탁 걸려 그리 넓지 않게 피부만 쪽 찢어지는 수준이었다.

  한 순간에 눈이 돌아 친딸을 죽여버리려고 그런 거다. 부엌칼로 갈비뼈도 부러뜨리지 못하는 보잘것없는 완력만 소유한 비리비리한 남자, 아빠 새끼한테 도망쳐 마음 좋은 외삼촌한테 의지해 서울의 대학 기숙사에 들어갔건만, 이 아빠 새끼는 기숙사에 가서 난동 비슷하게 부리려다 사감과 경비한테 쫓겨나고, 과 사무실에 가서 난리 치다가 역시 관계자와 경비한테 쫓겨났다. 그래도 이후 다양한 방식으로 은정의 삶을 난장판으로 만들어버린다. 학교 졸업하고 취직을 해서도 마찬가지다. 사글세 주인집에 가서 벌써 죽은 은정이 엄마가 오늘낼 하는 바람에 갑작스럽게 수술을 받아야 하니 보증금의 반만 빼달라고 구라를 쳐 받아가는 등, 막강, 최강의 악마를 닮은 아버지였다. 내가 입이 닳도록 말했듯 소설에서는 선하고 아량 넓고 기타 등등 그럴듯한 아버지 보기가 하늘에서 별을 따는 것보다 힘들다니까. 그런 아버지는 소설 말고 시에서나 가끔 꼬라지가 보이긴 한다.

  근데 전혜진의 단편 <고르디우스의 매듭을 자르면>에서는 나이든 남자가 하나 더 등장한다. 은정이가 다니는 회사에서 새롭게 낙하산 타고 떨어진 상무새끼. 온갖 꼰대질을 해, 41세를 먹은 현재까지 비혼을 유지하고 있는 은정에게 자기 친구의 돌싱 조카하고 소개팅을 하라고 아우성치는 갑질 마왕.

  전혜진의 특징은, 이 와중에 놀랍게도 악역을 맡은 아줌마도 한 명 등장한다는 거. 은정이 503호 사는데, 502호에는 레즈비언 커플이 산다. 두 집 여자들이 다 지극히 개인 생활을 중시하는 터라 그저 눈으로만 인사 정도 하고 지나던 사이였다가, 회식날 늦게 귀가하는데 502호 현관을 한 아줌마가 발로 차고, 문 열라고 소리치고, 욕설을 퍼붓고, 두드리고, 별 난리를 죽여서 현관문이 다 우그러져 아예 교체를 해야 할 수준으로 만들어 놓았다. 힘도 좋지. 그림을 그리는 것 같는 집주인 지수 말고 동거인 혜나의 엄마가 쳐들어와 지수더러 네가 내 딸을 꼬드겨 신세 망쳐 놓았다고 바락바락 떠드는 장면. 나중에 알고 보니, 자기 딸을 데려가려면 키운 값 4억원을 달라고 했단다.

  그러니까 전혜진의 적enemy은 나이든 모든 남자와 나이든 약간의 여자다. 엄마쪽 사람들은 다 선한 인간이고 아빠쪽 인간들은 악당들만 모여 있어서 다 빵에 가 있는지 아빠 말고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다. 직장에서도 상무로 대표하는 나이든 상사 새끼들은 뭐든 자기 뜻대로만 하려고 하는 등, 어려운 말로 해서 안하무인眼下無人이다. 나이든 남자 새끼들 모두, 나이든 여자 년들 조금은 낡은 사고방식을 버리지 않으려 하고 선한 젊은 사람들을 다양한 방식으로 착취하기 위해 전력을 다 한다.


  그것 참. 나이 처먹은 나쁜 새끼들하고 나이든 나쁜 년들이 그렇게 많았구나!

  이 독후감을 일년 중 가장 아름다운 달, 10월 들어 첫날 업로드 할 것 같은데, 첫 리뷰부터 우울한 이야기를 올리게 되어 무진장 유감이다. 새끼들이 삼십, 사십대가 되도록 끝없이 삶에 참견하며, 강요하고, 부모의 권리에 악착 같은 늙은 인간들에 대한 한 바탕 욕설. 이게 이 작품의 주제로 읽힌다.

  그럼 다음 번엔, 삼십, 사십대가 되어도 드러운 부모로부터, 죽어 마땅한 개 같은 부모한테 독립하지 못하고 핍박을 당하면서도 좁은 공간에서 스스로 이탈하려 하지 않는 한국형 히키코모리와 그들에 의하여 벌어지는 일탈, 범죄, 부모를 향한 폭력 같은 것을 탐구해보는 것이 어떨까? 일본 젊은 작가들은 이런 현상에 관해 탐구를 꽤 진행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우리나라에선 어째 보기 드문 거 같아 제안해 보는 거다. 물론 아주아주 소수, 지극히 적은 소수의 젊은이겠지. 그래도 개 같은 아빠 새끼들, 개 같은 엄마 년들 보다 많을까, 적을까? 누가누가 더 많을까? 그거 은근히 궁금하네 그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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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목련 2025-10-01 09:4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덕분에 이 책은 패스하겠습니다.
예소연의 <소란한 속삭임>도 읽어주세요 ㅎㅎ

Falstaff 2025-10-01 19:43   좋아요 0 | URL
예소연... 아직 한 편도 안 읽어본 작가인데요. ㅎㅎㅎ 눈에 띄면 탁 읽어보겠습니다. 자목련 님이 추천하시니 그냥 넘어갈 수 없지요!!

Falstaff 2025-10-03 14:44   좋아요 0 | URL
덕분에 좋은 단편 읽었습니다. ㅎㅎㅎ 앞으로도 추천해주세요!

yamoo 2025-10-01 10:1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런 책을 읽고 독후감에 별 3개까지 주셨네요!
폴스타프님의 책에 대한 인내력은 정말 대단하신거 같습니다. 저같으면 중간에 읽다가 제대로 던져버렀을거 같네요..ㅎㅎ

Falstaff 2025-10-01 19:45   좋아요 0 | URL
이거 단편이예요. 인내심까지는요 뭘 ^^;; 벌써 시간이 지나 읽은 당시 감정은 잘 기억나지 않고요, 그때 북플 보니까 별 셋이라 그냥 그거 보고.... ㅎㅎㅎ

꼬마요정 2025-10-01 10:1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어쩐지 작가가 공무원이라 공무원 일상을 잘 그렸던 거군요. 그나저나 인구 수 측면에서 히키코모리보다는 개 같은 부모가 더 많을 것 같습니다. 안타깝습니다. 요새도 특수청소 관련해서 고독사나 젊은이들이 쓰레기집 만드는 현상 연구하는 분들 있고 관련해서 소설도 있어서 몇 년 지나면 한국형 히키코모리도 연구대상에 들지 않을까 싶네요.

<월하의 동사무소> 오컬트물인데 제법 재미있습니다^^

Falstaff 2025-10-01 19:48   좋아요 1 | URL
다행입니다. 세대가 갈수록 조금씩 더 좋아지고 있다는 것으로 이해하겠습니다. 그래야 뭐라도 발전이 있는 거 아니겠어요. 그냥 궁금해서 해본 말인데 괜히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분들이 있을까봐 조금 캥겼답니다. ㅎㅎ
<월하의 동사무소>가 정말 있군요! ㅋㅋㅋㅋ
 
바움가트너
폴 오스터 지음, 정영목 옮김 / 열린책들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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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7년 2월에 태어난 폴 오스터는 2024년 4월, 77세 때 폐암 합병증으로 죽는다. 반면 작품의 주인공 시모어 티컴세 바움가트너는 1947년 11월 출생이다. 독자는 S.T. 바움가트너가 폴 오스터의 페르소나라고 단정하면서 읽게 되고, 상당 부분 그렇게 읽는 것이 합당하기도 하지만, 바움가트너와 오스터 사이에 적지 않은 다름이 있다는 걸 염두에 두어야 한다. 바움가트너는 역사의 격변에 따라 폴란드/오스트리아-헝가리/소비에트/우크라이나 지역이었으며 지배국의 발음대로 각각 스타니스와부프, 슈타니슬라우, 스타니슬라비우, 스타니슬라프, 최종적으로는 이바노프란키우스크라고 불리는 고장 출신이다. 반면에 오스터는 유대 폴란드 출신이라기도 하고 유대 오스트리아 출신이라 하기도 한다. 당시 동유럽의 국경이 하도 어지러운 시절이라서. 중동부 유럽에 살던 유대인 출신이니 무수하게 많은 친척들이 나치 절멸 수용소에서 학살당한 것은 맞겠지만 원래 태생부터 픽셔니스트의 별을 타고난 폴 오스터가 죽어가면서 갑자기 환골탈태, 자기 이야기를 썼다고 믿지는 마시라. 이 작품 역시 전적으로 픽션이다. 픽션인 순간 이런 사소한 차이는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

  심지어 작중 바움가트너 교수는 첫사랑이자 첫 아내이자 유일한 아내인 애나가 10년 전에 죽은 이후 비록 숱한 과부와 노처녀들을 섭렵했지만 어쨌든 계속 독신을 유지하면서 애나를 그린 순정의 사나이지만, 폴 오스터는 첫 아내와 결혼해 7년 만에 이혼하고, 이혼하자마자 둘째 아내 시리와 결혼해서 죽을 때까지 시리의 보살핌을 받았다. 바움가트너 선생은 평생 무자식 상팔자의 은혜를 입은 반면, 오스터는 첫 결혼에서 아들 하나, 두번째 결혼에서 딸 하나를 낳은 다복한, 다복했는지 시끄럽기만 했는지는 몰라도, 하여튼 그랬다.


  노 작가의 “마지막 작품”이라는 타이틀과, 역시 같은 시기를 살다 인생의 끝자락에 닿은 노 학자 바움가트너를 등장시켜 자신을 둘러싼 가족과 10년 전에 죽은 사랑하는 아내, 얼마 남지 않았지만 두번째 결혼으로 시작할 새로운 생활에 대한 기대 같은 것을 담담하게 그려 놓은 것이, <바움가트너>를 읽으면서 독자를 조금 더 센티멘탈하게 만들어 놓았을 수도 있다.

  폴 오스터는 평생, 결과는 비극으로 끝나지만 선택할 당시엔 언제나 최선의 것을 선택한 생을 이제 다 지난 시점에서, 새삼 뒤로 돌아가 자신이 다른 선택을 했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했을 수도 있고, 삶을 접는 단계에 이르러 지난 세월을 파노라마처럼 한 번 펼쳐놓고 싶었을 수도 있다. 그런데 이른바 글 좋은 작가가 자신의 지난 시절을 풀어놓은 작품들을 보면, <바움가트너> 역시 마찬가지지만, 살면서 명성을 제법 누려 콧대가 높아질 대로 높아진 인물이나, 이미 악마처럼 거만한 권위가 목까지 가득 찬 인간들은, 자신들이 때에 따라 아주 작은 실수는 했을지언정, 언제나 정의롭겠다고, 옳은 방향으로만 행위하려 했다고 주장한다. 저 가슴 깊이 숨겨놓은 말로 드러내면 쪽팔려 죽을 것 같이 수치스러웠고, 지금도 그걸 생각할 때마다 수치스러운 일을 솔직하게 톡 까놓는 노 작가의 마지막 작품을 나는 읽어본 적 없다. 나는 작가가 아니라서 내 가슴 속의 그런 수치는 얇은 나무 상자 속에 든 나와 함께 화장로에 들어가 활활 타 없어질 것이다. 작가라도 마찬가지지, 폴 오스터, 필립 로스처럼 마지막 작품 또는 유작 비슷한 책에서까지 나 자신을 분식할 것 같지는 않다. 차라리 최후의 순간까지 생까는 게 훨씬 낫다고 생각하는 족속이라.


  까딱하면 폴 오스터의 페르소나로 읽을 수 있는 시모어 티컴세 바움가트너 선생이 얼마나 늙었냐고?

  먼저 색다른 이름을 알아보자. 바움가트너. Baumgartner. Baum은 ‘나무’, Gartner는 ‘정원사’. 즉 나무 정원사라는 이름이다. 이렇게 명사 두 개를 합해서 자신의 가족 성을 만드는 사람들은 대부분, 거의, 글쎄 차라리 이렇게 말하는 게 낫겠는데, 많은 가족이 유대인이다. S.T. 바움가트너가 1947년생. 아무리 유대인이라도 ‘시모어’라는 이름은 너무 올드해서 촌스러운 이름이다. 그리하여 바움가트너는 어린 시절부터 자신을 시모어 대신 ‘사이’라 불러달라고 해서, 일흔 살이 넘은 나이가 되어도, 새로 전력회사 계량기 검침원으로 입사한 그리스계 청년 에드 파파도풀로스조차 바움가트너 선생에게 ‘사이’라고 부른다. 당연히 선생이 그렇게 부르라 청했지만. 두번째 이름 ‘티컴세’는 미국 정부를 상태로 부족의 운명을 걸고 죽을 때까지 전투를 치룬 아메리카 선주민 추장의 이름이다. 아버지는 사이가 티컴세와 같이 최후의 순간까지 용감한 남자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에서 티컴세를 아들의 이름 가운데에 넣었는데, 바움가트너는 이게 폼이 났던 모양이다. 이렇게 S.T. 바움가트너가 된다.

  양장점 3세대인 유대인 아버지는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젊은 유대 처녀를 얻어 아들 시모어와 누이동생 나오미를 만들고 살다가 시모어가 오하이오에서 전액 장학금으로 대학에 다닐 당시 죽었다. 역시 제대로 양장 기술을 배운 어머니가 계속 양장점을 운영해 살았는데, 오스터의 아버지가 오스터가 16세든가 그때 사라진 건 비슷하지만 바움가트너 씨는 폐에 혈전이 뭉쳐 딱 1분 만에 세상 하직한 것과 다르게, 함께 잘 살고 있지는 못했던 아내와 이혼해 엄마-아들-딸의 연대에서 찢어져 나갔다.

  바움가트너의 생애를 통틀어 유일한 아내였으며 평생을 걸쳐 사랑했던 아내 애나는 단단한 몸에 거의 모든 스포츠에 능해서, 작품을 시작할 당시엔 9년 반 전에 휴가 차 간 케이프코드 해변에서 파도를 맞으러 늦은 오후에 바다에 달려 들어갔다가, 하필이면 괴물 같은 파도와 마주치는 바람에 등이 부러져 죽었다. 늦은 시간이고 파도가 높아지는 시간이라서, 바움가트너는 애나에게 그만 하고 숙소로 돌아가자고 했으나, 애나는 그저 바라보며 웃더니 바움가트너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벌써 파도를 향해 뜀박질을 시작해버렸고, 그는 그저 읽던 책으로 눈길을 던질 뿐이었다. 수영을 워낙 잘하는 애나였으니까. 여태 불행은 모두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였으니까.

  이 사건이 있고 10년 이상이 훌쩍 지난 다음, 한 사람이 추운 겨울에 1천킬로미터를 운전해서 바움가트너를 보러 오겠다고 하는 일이 벌어진다. 애나 때는 바다에 들어가지 말라고 자기가 만류하는 말이 끝나기도 전에 사고를 당하기 위하여 애나가 바다로 뛰어 들어갔지만, 십몇 년 후에는 상대가 뉴저지 바움가트너의 집으로 출발하려면 일주일 이상이 남아, 그러지 말고 차라리 기차를 타고 오라고 설득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적 여유가 있으나, 애나의 유작을 검토할 목적으로 오고자 하는 대학원생은 더 이상 바움가트너 선생에게 경제적 부담을 주는 것을 완강하게 사양한다. 대학원생의 안전을 위하여 더 이상 철도여행을 권유한다면, 애나의 유작 검토 계획마저 없던 일이 될 수도 있을까? 아마 그럴 것 같다. 학생을 위하여 이미 차고와 지하실 공사를 마쳤고, 정원까지 직업을 정원사로 바꾼 저 그리스 출신의 옛 검침원 파파도폴로스에게 용역을 주어 깔끔하게 마친 상태. 학생으로서도 부담을 더 주는 것은 진심으로 바라지 않았을 것이다. 기차를 타고 오면 교수가 렌터카를 빌려주겠다고 제의했을 정도이니 내가 학생이라도 차마 제안을 받아들일 수 없었을 듯.


  이런, 다른 말만 했다. 바움가트너는 늙었다.

  서재에서 키르케로그에 관한 논문을 쓰고 있다가, 인용해야 하는 책을 아래층에 두고 온 기억이 났고, 동시에 오전 10시에 누이에게 전화하겠다고 약속한 것도 떠올랐다. 그래서 불편한 다리로 아래층에 내려오니까 뭔가 타고 있는 콕 쏘는 냄새가 난다. 아차, 아까 아침식사용으로 달걀 두 개를 삶았는데 세 시간이 지난 지금까지 삶고 있는 거다. 물은 당연히 다 졸았고, 계란도 이미 산소결합을 끝내 까맣게 타버렸으며, 언제라도 화재가 날 수 있는 상황이라 바움가트너는 냄비용 장갑이나 행주 말고 그냥 맨손으로 냄비를 들어올리다가, 아 뜨거, 손을 데 버리고, 냄비는 부엌 돌 바닥, 타일 위에 쨍그랑, 아주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찬물을 틀고 수도꼭지 아래 손을 대고 한 3~4분 있으니까, 이런 생각이 들었다. 부엌에서 뭘 하려고 했더라?

  이때 전화가 온다. 아차, 열시에 나오미한테 전화했어야 하는데. 그 새를 참지 못하고 전화를 했구먼.

  그러나 아니다. 미지의 남자 목소리. 앞에서 말한 전기회사 계량기 검침원. 오늘 아침 9시에 온다고 해놓고 아직 도착을 못해 사과를 하고 곧바로 오겠단다. 그러자마자 초인종. 미국 택배회사 UPS 직원 몰리다. 지난 5년간 1주에 두세번씩 방문해 바움가트너 선생에게 즐거움을 선사하는 환하게 밝은 표정의 흑인 30대 여성. 몰리를 잠깐 만날 수 있는 기쁨을 위하여 바움가트너는 1주에 두세번 책을 구입해 포장도 뜯지 않고 지역 도서관에 책을 기증하는 걸, 몰리는 모른다.

  다시 전화가 울린다. 이번엔 나오미겠지. 또 아니다. 9년 반 동안 일주일에 한 번씩 와서 집안 살림을 깨끗하게 유지시켜 준 라틴계 플로레스 여사의 딸 로지타이다. 플로레스 여사 일이 아니라 목수 아버지 플로레스 씨가 늘 하던 원형 톱을 작동하다가 손가락 두 개를 잘라버린 사고를 당해, 플로레스 여사와 함께 병원에 가느라고 오늘 집에 올 수 없단다. 아휴, 이렇게 안타까울 수가. 바움가트너는 로지타에게 지금 의술로 잘라진 손가락은 얼마든지 다시 붙일 수 있으니 슬퍼하지 말라고 위로하며 전화를 끊는다.

  그리고 또다시 초인종. 계량기 검침원 에드 파파로풀로스. 친절한 거구이며 부상으로 은퇴한 마이너리그 야구선수 출신인 에드와 함께 계량기가 있는 지하실로 내려가다가 바움가트너는 계단에서 사정없이 미끄러져 넘어진다. 냄비에 덴 손이 아파 손잡이를 잡고 내려가기가 불편해서 생긴 사고다. 어깨와 팔꿈치, 그리고 다른 곳보다 무릎이 너무 아프다. 에드가 다친 부위 역시 무릎이라서 동물이건 식물이건 생명을 손으로 다루는데 천부적 자질이 있는 것 같은 에드는 (그래서 바움가트너의 주례로 결혼한 다음에 정원사가 됐겠지만) 교수를 부축해 소파에 누이고, 일단 돌아갔다가 자기 일을 마친 시간에 얼음 한 봉지를 사와 얼음찜질까지 해준다.

  그러니 쉽게 말해서 바움가트너, 인생 다 살았다. A와 B를 해야 한다면, A를 잊고 A를 해야 할 때 B를 하거나, 같은 과정을 거쳐 B를 해야 할 때 A를 하거나, 둘 가운데 하여간 어떤 것을 해야 할 때 둘 다 잊는 일이 잦아졌다. 글을 쓰기 위해 저절로 숱한 단어가 파바박 떠올랐던 건 이미 오래 전 이야기, 지금은 단어 하나를 생각하기 위해 5분, 10분, 30분, 한 시간, 세 시간, 하루 꼬박 궁리나 고민을 해도 떠오를까 말까 한다. 침대에서 일어날 때 뼈마디의 움직임이 마치 그리스grease를 치지 않은 조인트처럼 삐걱거린다. 정말 삐걱 거리는 소리가 들린다는 말이다.

  이렇게 살다가 이제 자신의 힘으로 움직일 수 없는 단계가 오면 양로원으로 가리라, 마음먹은 시모어 티모세 바움가트너. 그는 평생의 사랑이자 아내 애나를 생각하고 또 생각한다. 그리고 애나의 작업을 인정해온 프린스턴대 영화학과 교수 주디스 포이어를 아끼다가, 연모의 정을 품다가, 사랑으로 진전하여 일흔이 넘은 나이에 조심스럽게, 아주 조심스럽게 청혼하려 시도해보기도 한다. 현명하지만 불행한 결혼생활 경험이 있는 두 아들의 어머니 주디스가 다정하게 거절을 해서 실망하기는 해도.

  그렇게 세상의 말년을 지내는 시모어 티모세 바움가트너. 소설을 읽는 일은 어느 만큼은 관음증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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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로 가득 찬 책 - 제25회 김수영 문학상 수상 시집 민음의 시 137
강기원 지음 / 민음사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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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근(馬根)



  말의 남근?

  법명의 내력이야 알 수 없어도

  스님의 민머리를 뵐 때마다

  참으로 불경한 생각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네

  부도를 바라보며

  남근을 떠올렸던

  천진한 노(老)시인의 푸른 눈빛이 생각나네


  장엄하나 벙어리인 책들이

  성처럼 쌓여 있는

  오후의 도서관


  용마(龍馬)도 천마(天馬)도 있다지만

  그들의 높은 날개보다

  오늘은

  본 적 없는

  말의 뿌리를 잡아 보고 싶은 거네

  그 거대한 근

  온몸으로 받아들여

  반쪽 아닌 온통으로

  개안(開眼)하고 싶은 거네

  하나 되고 싶은 거네   (전문. p.13~14)



  하, 이제 큰일났다. 강기원, 이 57년 닭띠 여사님 때문에 큰일났다. 시를 읽지 않았으면 모를까, 일단 읽었으니 앞으로 산에 들어 내가 좋아하는 서산 개심사나 안성 청룡사에 갈 때마다 혹시 박박 깎은 중대가리 보면, 여태까지는 그럴 때마다 저 대가리에 포마드 바를 일이 혹시 있을까, 이렇게 생각했었는데, 이젠 강기원의 이 시 때문에, 거참, 중대가리 볼 때마다 마근, 말자지가 생각나지 않겠느냐 하는 거. 가뜩이나 말, 하면 생각나는 나랏말씀이 ‘말궁뎅이’ 아니면 ‘말자지’라서 이제 중대가리 볼 때마다 수말의 생식기, 그게 사람의 것과 비슷하게 생겼다는 가정하에 말하자면 그렇다는 말씀인데, 생식기 가운데서도 껍데기 없는 대가리, 절 근처에 세운 부도의 뚜껑하고 영락없이 닮은 그 대가리를 떠올리지 않기도 힘들게 생겼다. 혹시 강기원은 수컷 인간의 생식기 대가리를 일컫는 말, ‘거북이 대가리’ 귀두龜頭를 앞으로 ‘중 대가리’ 승두僧頭라고 부르자 주장하는 건 설마 아니겠지? 

  근데 시인은 “거대한 근”, 이이가 마침맞게 받은 김수영 문학상에 이름을 빌려준 김수영 시인의 시집 문패처럼 “거대한 뿌리”를 본 적은 없지만 잡아보고 싶다는 거다. 근데 정말로 콱 잡았다. 김수영 문학상 받았으면 그걸로 됐다. 이제 시인이라면 다 받고 싶어하는 김수영 문학상을 받았으니 온통으로 개안한 셈 치면 안 될까? 그게, 말의 생식기 뿌리가 워낙 굵직해서 한 손으로 움켜 쥘 수는 없을 터, 두 손으로 꽉 잡아야 놓치지 않을 거야. 하여간 이 시를 안 읽었으면 모를까, 읽었으니 앞으로 우짜냐?


  《바다로 가득 찬 책》이 두번째 시집으로 알고 있다. 전에 《은하가 은하를 관통하는 밤》을 읽었는데, 그때 처음 읽은 강기원의 에로티시즘이 딱 내 수준에 맞았다. 그래서 꼭 다시 읽어볼 시인으로 꼽고 있었다가 언제나 말썽인 게으름 때문에 차일피일하다 결국 고른 책이 《보고 싶은 오빠》 진주 출신 시인의 시집이었다. 이거 참. 그이 시엔 도무지 적응이 안 되던데 말씀이야. 뭐 살다 보면 이런 일도 있고 저런 일도 있는 것이지. 그래 이번에는 도서관 개가실 딱 들어가는 순간부터 오늘은 얄짤없이 강기원의 시집을 고르는 거야, 마음먹고 곧바로 시집 서가로 직진해 집어 들고 나온 거였다.

  강기원은, 아닐지 모르는데 전적으로 《바다로 가득 찬 책》에 실린 시를 읽고 추리해보면 첫번째 시집과 이 시집 사이에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자궁적출을 해 시인 왈 돌계집, 그러니까 더 이상 생산할 수 없는 석녀石女가 되었다. 개인사는 그냥 넘어가자. 세상에 개인사 없는 개인은 하나도 없으니. 그래서 이이의 에로티시즘에 관해 말을 조금 더 보태, 앞의 시 <마근(馬根)> 바로 앞에 실린 시를 인용한다.



  위대한 암컷



  한때 그녀는 명소였다


  살아 있는 침묵

  하늘을 낳고 별을 낳고 금을 낳는

  신화였으므로

  범람하는 강이며 넘치지 않는 바다

  빛 없이도 당당한 다산성이었으므로

  바람의 발원지

  바람을 재우는 골짜기

  제왕도 들어오면 죽어야 나가는

  무자비한 아름다움이었으므로

  요람이며 무덤

  영혼의 불구를 치유하는 성소

  꺼지지 않는 지옥 불이었으므로

  만물을 삼키고 뱉어 내는 소용돌이의 블랙홀

  곡신(谷神), 위대한 암컷이여


  여전히 그녀는 명소다

  수많은 자들의 탐험이 있었으나

  영원히 밝혀지지 않을

  은밀한 문   (전문. p.12)



  이게 시집의 앞에서 두번째 실린 시다. 그래서 처음에 읽을 때는 이 시 역시 강기원 표 에로티시즘 비슷하게 읽었다가, 저 뒤로 가서 누군가의, 아마 시인 본인의 경험인 듯한 자궁적출과 ‘돌계집’의 장면을 읽고 난 다음에, 혹시 이 시도 그것과 연결하여 읽어야 마땅하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었다. 당연히 오해일 수 있다. 그러나 다시 읽어 보시라. 그녀는 신화’였고’ 다산성’이었으며’ 무자비한 아름다움, 요람이며 무덤, 치유의 성소, 꺼지지 않는 지옥불’이었다.’ 즉 지금은 아니다. 그러다 마지막 연에 가서 그럼에도 “여전히 그녀는 명소”임과 동시에 “영원히 밝혀지지 않을 / 은밀한 문”임을 주장한다. 지금은 아니고 비록 과거에 그랬지만 그래도 여전히 “수많은 자들의 탐험이” 있었어도 밝혀내지 못한 “은밀한 문”으로 존재하는 “위대한 암컷” 여성이다.

  어떠셔? 재밌지? 이게 시 읽는 재미다. 시인이 어떤 것을 주장하기 위해 시를 썼건, 하여간 꿈보다 해몽이라고 시를 해석하는 독자가 대빵인 거. 따라서 <위대한 암컷>을 읽은 내 소감이 정답이라고 조금도 주장하지 않을 것이니 각자 알아서 생각하시라.

  아무리 그래도 강기원은 역시 에로틱한 시가 최고다. 예를 들어보라고? 좋다.


  복숭아


  사랑은…… 그러니까 과일 같은 것 사과 멜론 수박 배 감…… 다 아니고 예민한 복숭아 손을 잡고 있으면 손목이, 가슴을 대고 있으면 달아오른 심장이, 하나가 되었을 땐 뇌수마저 송두리째 서서히 물크러지며 상해 가는 것 사랑한다 속삭이며 서로의 살점 뭉텅뭉텅 베어 먹는 것 골즙까지 남김없이 빨아 먹는 것 앙상한 늑골만 남을 때까지…… 그래, 마지막까지 함께 썩어 가는 것…… 썩어갈수록 향기가 진해지는 것…… 그러나 복숭아를 먹을 때 사랑은 생각하지 않는 것이 좋다   (전문. p.15)


사소한 유감은 마지막 말, “그러나 복숭아를 먹을 때 사랑은 생각하지 않는 것이 좋다”는 사족 같은 느낌이 든다는 건데, 뭐 독자가 그렇게 읽었다는 거고, 이렇게 쓰는 거야 엄연히 시인의 권리이니 불만은 없다. 그렇다는 것이지 뭐. 사소한 유감에도 불구하고 이 시 정말 괜찮다. 이은상의 시조 <사랑>하고 비슷한 거 같지 않나?


  탈대로 다 타시오 타다 말진 부대마소 / 타고 다시 타서 재 될 법은 하거니와 / 타다가 남은 동강은 쓸 곳이 없소이다  (부분)


  이런 예스런 느낌의 현대적, 강기원식 발언. 아오, 말한 것처럼 저 사족 비슷한 느낌만 없었어도 이거 콱 외워버리고 말았을 텐데.

  그렇다고 내가 말한 에로틱한 시만 있는 것도 아니다. 1980년대 중앙일보던가 마구 헷갈리는데, 신춘문예에 <멸치>라는 시가 당선된 적이 있다. 정초에 <멸치>를 읽으면서 하여간 시인이란 참 특별한 시각을 갖고 있는 사람이나 하는 것이구나, 라고 생각한 기억이 있다. 같은 사물을 보더라도 다중적인 필터로 보는 능력. 강기원도 주변의 아무렇지도 않은 사물을 보고 이런 노래를 지었다.



  고무장갑



  너는

  파충류의 영(靈)을 가졌다

  탈피 후에도

  줄지도 늘지도 않는다

  하루에도 수십 번

  네 속을 드나든다

  불륜은 용감한 법

  너와 만날 때

  나는 가장 뻔뻔해져

  어디든 가리지 않는다

  욕실이든 주방이든

  이목구비 지워진 얼굴처럼

  지문 없는 손가락으로 버무리는

  가면의 시간들


  백주에도

  붉디붉은 손이다, 욕망이다

  너는   (전문.  p.65)



  이쯤 되면 이 분홍색, 아니면 붉은색 고무장갑이 주방용, 욕실용인지, 분홍색 아니면 붉은색 콘돔인지 헛갈릴 정도지만 그냥 주방용, 욕실용 일반 고무장갑으로 생각하고, 이걸 하루에도 수십번씩 착용하는 시인, 주부, 아내, 누군가의 딸, (2006년에 만 49세니까)어쩌면 할머니 또는 외할머니, 특히 강기원이면 아주 합당한 시.

  나는 가면 갈수록 이 시인이 좋아진다.

  아까, 이 독후감 쓰는 중간에 잠깐 검색해서 이제는 문학동네에서 다시 찍은 이이의 첫번째 시집 《고양이 힘줄로 만든 하프》를 희망도서 신청했다. 대박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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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유행열반인 2025-09-29 19: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마 스님 법명 맑은(말 근) 일건데 짓궂은 사람 눈에만 스님 머리 보면 뾰로롱 하는 거래요!!!!!

Falstaff 2025-09-30 03:40   좋아요 1 | URL
법명이 ˝맑은˝ 아니라는 데 천원 겁니다. 짓궂은 거 아니고요 재미난 거 좋아하는 사람 눈에 뾰로롱 하는 겁니다, ㅋㅋㅋㅋ.
 
어부들 은행나무 세계문학 에세 23
치고지에 오비오마 지음, 강동혁 옮김 / 은행나무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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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6년, 남서부 나이지리아의 아쿠레에서 이보족 가정의 열두 자녀 가운데 n번째로 태어났다. 이보족,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작가가 역시 비아프라 공화국의 대외협력 장관을 지내기도 한 치누아 아체베. 그리고 아체베의 문학적 딸이라는 별칭을 얻기도 한 나이지리아의 전형적 부르주아 인텔리겐치아인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 이 두 명은 1960년대 나이지리아 독립 초기에 발발했던 이보족 분리독립을 위한 소위 비아프라 내전을 심각하게 다루어, 내가 읽기로는, 문학적으로 성공했다. 나는 이보족의 분리독립 내전을 좀 고깝게 보는 인종이지만, 그렇다고 하우사족과 요르바족이 잘했다고도 절대 여기지 않는다. 아체베와 아디치에의 비아프라는 1960년대 초 이야기이고, 오비오마의 <어부들>은 이후 30여년이 흐른 1996년 3월에 욜라에서 발생한 유혈 분파주의 폭동 시절을 지나고 있다.

  그저 작품이 그 시절을 지나고 있다 뿐이지 이 책이 분파주의 유혈 폭동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지는 않다. 치고지에 오비오마는 열두 자녀 전부 비슷한 과정을 거쳤는지는 모르지만 자라면서 키프로스, 튀르키예를 경유해 미국의 미시간 대학에서 문예창작 석사학위를 취득했으니 물론 부모의 헌신적인 교육열과 나이지리아의 부정부패와 군부에 반대하는 의식이 있어서 가능했겠지만, 수도도 아니고 지방도시인 아쿠레에서 외국으로 공부하러 보낼 수 있을 정도의 중산층 가족이었을 것이다. 더군다나 당시는 전 세계적으로 산아제한을 적극 권장하던 시기임에도 무려 열두 아이를 낳아 키울 수 있었으니 말이지. 오비오마는 첫 작품 <어부들>에 이어 <마이너리티 오케스트라>, <시골로 가는 길> 등을 연달아 발표해 첫 두 작품으로 2015년과 2019년에 부커상 최종심까지 올라 유명세를 탔다. 네브래스카-링컨 대학의 영문과 교수를 하다가 지금은 조지아 대학 영문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오비오마에게 일곱 형제와 네 누이가 있었다고 하니 부모는 8남4녀를 두었다. 오비오마가 어린 시절에 여덟 명의 형제 가운데 두 명이 지독하게 싸운 적이 있었단다. 당시 치고지에는 이 싸움의 가장 비극적인 결말을 상상했고 그게 아마도 나이 들어서까지 머리에 남았던 모양이다. 이후 튀르키예를 거쳐 미국에서 공부하던 2012년에 자신이 상상하던 형제간 싸움의 최악의 결과와 그것에 이어지는 이야기를 소설로 써서 제목을 <어부들>이라고 했다.

  미리 말해두는 바, 나는 독후감에서 작품 속에 등장하는 다섯 형제 가운데 맏이와 둘째가 싸운다는 것까지 만 입에 올릴 뿐, 가장 비극적 결과와 사건 후에 벌어질 또다른 이야기에 관해서는 말하지 않을 것이다. 작품을 읽고 채점을 한다면 비록 만점은 주지 못하겠지만 읽는 재미가 있어서 뒤에 읽을 분들에게 조금의 힌트도 주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스포일러는 아무리 작아도 없느니 못하다. 나도 책을 읽으며 내용이 궁금해 책을 제일 뒤 페이지로 넘겨 미리 결말을 읽어버릴까, 하던 때가 있었음에랴.


  아구 가족. 나이지리아 중앙은행 아쿠레 지점에 근무하는 아버지 제임스, 어머니는 가정주부 파울리나 아구. 작가 오비오마와 마찬가지로 이보족이다. 아쿠레에서는 수도 욜라와 달리 부족간 갈등이 별로 없거나 아예 없다. 은행원 가족이라서 상대적으로 부유한 집안 살림 때문에 거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동네의 가난한 아이들한테 따돌림을 받는 것뿐. 형제들은 그래도 자신들을 굳이 멀리하지 않는 또래들인 유독 가난한 카요테, 반귀머거리 토비, 맏이의 친구 솔로몬 등과 어울려 뒷마당에서 축구를 하며 놀았다. 비록 이웃 의사네 집으로 공이 날아가 창문이 와장창 깨지는 바람에 축구도 오래 가지는 못했지만. 이제 별로 놀 것이 없다. 스트리트 파이터 게임기는 아이들 학교 성적이 떨어지자마자 아버지가 벌써 압수해 어디로 숨겨놓아 도무지 찾을 수 없다.

  아버지가 숨겨놓은 게임기를 찾는다고? 감히?

  오랜 세월 다양한 부족간의 다툼과 전쟁이 있었던 아프리카에는 한 가족 집단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가장 강력한 힘을 보유한 수컷 가장을 중심으로 하는 연대를 필요로 해서, 아구 가족 역시 수컷 가장인 아버지는 거의 무한정한 권한을 갖고 있었고, 만약 필요하다고 생각하면 자식들을 “구에르돈”이라 칭하는 가죽 몽둥이 혹은 채찍을 사용해 체벌하는 것이 당연했다. 다른 대륙에서도 마찬가지였지만 아프리카만큼 씨족, 부족, 종족 간 다툼이 치열하고 오래 지속한 지역이 (라틴 아메리카를 제외하고) 거의 없어서 좀 덜 그랬을 뿐이다. 그런데 아버지가 따로 보관하기로 결정한 게임기를 자식들이 감히 집안을 뒤져서 찾으려 한다고?

  작품을 시작하는 시간적 배경은 1996년 1월. 두 달 전에 아버지가 아쿠레에서 1천킬로미터 떨어진 욜라 지점으로 발령을 받아 아버지 혼자 떠났기 때문이다. 저 앞에서 말한 것처럼 96년 3월에 욜라에서 발생한 유혈 분파주의 폭동 때 수백명의 이보족 사람들이 학살을 당했는데, 이때 아버지는 간신히 살아남을 수 있었다. 1천킬로미터면 평양에서 부산까지 거리 정도? 당시 나이지리아의 교통, 이라기보다 도로 사정이 좋지 않아 먼 길을 운전해 다닐 수 없어서 두 주일에 한번 꼴로 아버지는 토요일에 와서 일요일에 다시 떠났다.


  아버지가 주말 부부를 선택하자마자, 1월 18일에 둘째 아들 보자가 생일을 맞아 약 한 달간 맏형 이켄나와 같은 나이가 됐다. 엄마는 분명히 자식들 모아놓고 너희 모두 같은 젖을 먹고 자랐다고 했음에도 이켄나에게 젖을 물리지 않았는지 출산 후 딱 한 달 만에 둘째 보자를 임신했다. 거참. 아니면 틀림없이 삼신 할매의 축복이다. 그러니까 첫째 이켄나와 둘째 보자가 한 살 터울. 셋째 오벰베와 작중 화자 벤저민이 한 살 차이. 아래로 터울을 두고 다섯째 아들 데이비드가 있고, 막내가 한 살짜리 누이 은켐이다. 당연히 이켄나의 친구이면 어영부영 보자의 친구이기도 한데, 이 가운데 한 명이 솔로몬. 소년들이 심리적, 도덕적으로 성장해가는 작품, 그러나 지극한 비극이 생기는 “썩어가는 밀알”을 제공하는 등장인물이다. 솔로몬이 제안한다. 이제 더 놀 것이 없으니 오미알라 강에 가서 낚시를 하자고.

  책의 제일 마지막 페이지에 아쿠레 마을의 약도가 그려져 있는데, 약간 남쪽에서 동서로 흐르는 강이다. 그리 크지 않은 강처럼 보인다. 아쿠레에 처음 정착한 최초의 정주민에게는 물고기와 식수를 공급하던 오염되지 않은 강이었지만, 아쿠레 마을 주민들에게 이미 오래 전에 버려진 강이었다. 약도에는 폐수를 방출하는 공업단지나 공장이 없어서 혹시 강의 상류에 오염원을 흘려보내는 곳이 있을까 싶기도 하다. 하여간 책에는 애초에 사람들이 강을 숭배했으나 유럽 식민주의자들이 성경을 소개한 이후에 강을 사악한 곳으로 보기 시작했다고 한다. 아마도 작품 속에 자주 소개되는 치누아 아체베의 <모든 것이 산산이 부서지다>에 자주 나오듯, 기독교의 시선으로, 강을 대상으로 하는 토속 신앙을 우상숭배로 몰았던 것 같다. 더구나 1995년에 한 여자의 훼손된 시신이 발견된 이후 거의 완벽하게 버려진 상태였다.

  아직 너무 어린 데이비드를 제외한 형제 네 명과 솔로몬, 카요데, 토비 등은 당연히 이런 금기를 무시하고 강에 가 스스로 어부가 되었다. 아이들이 그럴 수 있지. 나 어렸을 때도 부모 허락 받지 않고 한강에 가서 놀다가 고종사촌 명희누나가 고자질하는 바람에 비 오는 날 먼지 나게 두드려 맞은 적 있는 걸 뭐. 다 그러면서 크는 것이지.

  그런데 다 저녁때가 되어 집에 돌아오는 길에, 하루는 동네의 이름난 미친 남자 아불루와 만나는 일이 벌어진다. 아불루는 가끔 사람들에 대해 거의 저주 수준으로 가장 불운한 예언을 퍼붓는 버릇이 있는 것 같다. 그가 맏이 이켄나에게 말한다. 말이 짧아 ‘이켄나’를 ‘이케나’로 부르면서.


  이케나, 너는 네가 죽을 날에 새처럼 매일 것이다. 네 혀는 굶주린 짐승처럼 네 입에서 비어져 나올 것이며 다시는 네 입속으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너는 두 손을 들어 공기를 쥐려 하겠지만 그러지 못할 것이다. 너는 그날 말을 하려고 입을 열겠지만 말이 네 입안에서 얼어붙을 것이다.

  이케나, 너는 붉은 강에서 헤엄칠 것이나 다시는 그 강물에서 떠오르지 못할 것이다. 네 생명은…


  이때 하필이면 비행기가 날아 그가 말한 뒷말을 보자만 들을 수 있었다. 그건 이랬다.

  “너는 어부의 손에 죽을 것이다.”


  형제가 강에서 돌아오다 이웃집 과부 아주머니 이야보에게 낚시대를 어깨에 짊어진 것을 들켰고, 아주머니는 이 사실을 친한 엄마한테 고자질했으며, 이야기를 듣고 기겁을 한 엄마는 아버지한테 보고해, 형제는 가죽 채찍 구에르돈으로 엉덩이에 자국을 내게 만든다. 체벌을 다 끝낸 후 엄하지만 기본적으로 천성이 따듯하고 아이들을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아버지는 엉덩이에 검붉은 멍이 든 아들들을 모아놓고 진심으로 말한다.

  “내가 너희에게 바라는 모습은 좋은 꿈을 낚는 어부, 가장 큰 고기를 잡기 전까지는 쉬지 않는 어부들의 집단이 되는 것이다. 나는 너희가 거대 조직이 되기를, 위협적이고 막을 수 없는 어부들이 되기를 바란다.”

  이후 전형적인 가부장적 가족의 맏아들 답게 더없이 동생들을 아끼고, 보호하려 모든 힘을 다하던 이켄나는 한 순간에 바뀌어 버렸다. 남동생 모두가 어부이며, 자신은 어부의 손에 죽음을 맞이한다는 저주를 믿게 된 후. 그리하여 아이들이 많아 바람 잘 날 없는 이 행복한 가정에 불화와 싸움과 불행이 깃들게 되니, 어떤 모습으로 변해가는지는 직접 확인하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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