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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 ㅣ 범우문고 281
존 스타인벡 지음, 이성호 옮김 / 범우사 / 2014년 12월
평점 :
품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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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쉽게 구할 수 있는 존 스타인벡의 번역 ‘소설’은 다 읽은 셈이다. 또는 다 읽은 것 같다. 이렇게 한 작가를 몽땅 읽어버리면 서운하다. 좋아하는 작가라서 하나하나 읽다가 더 찾을 수 없는 순간을 맞았고, 이제 이 작가를 읽으려면 전에 읽은 작품을 다시 읽는 수밖에 없어서. 웬만하면 그래서 특정 작가의 작품을 악착같이 찾아 읽으려 하지 않는데 어떻게 그렇게 됐다. 아쉽다.
범우사의 “범우문고”는 경제적인 가격과 다양한 레퍼토리를 소개하는 전통적 의미의 ‘문고판’ 책이기는 하지만 획일적인 표지와 경제적이기만 한 종이질과 옛 번역으로 인해 21세기 들어 경제적 풍요를 경험한 세대에게 거의 외면 받는 수준으로 격하된 거 같다. 세월이 변하면 책도 변해야 하겠지만 어딘지 좀 쓸쓸한 데가 있다. 예전 삼중당이나 삼성문화재단에서 낸 문고판 책들에 깊은 추억을 갖고 있는 시니어들은 문고판 책이 드물어지는 게 서운하기도 할 듯. 뭐 어쩌랴. 사는 게 다 그런 걸.
이 책도 번역을 이성호 선생이 했다. 이성호는 1938년 포천 내촌에서 출생해 국립서울사범학교(서울사대)를 졸업하고 여러 대학을 거쳐 한양대 영문과 명예교수로 말년을 지내고 있다. 이 책의 초판 1쇄가 2014년. 76세의 선생이 직접 번역을 했을까, 아니면 전에 어느 매체에 번역 발표한 것을 문고판으로 만든 초판이라는 뜻일까? 왜 시비하느냐 하면, 이런 문장 때문에 그렇다. 주인공 키노가 사는 가난한 집을 묘사하는 장면이다.
“키노는 눈을 뜨자 먼저 환하게 밝아 오는 구형矩形의 문 쪽으로 눈길을 돌리고…” (p.19)
초판이 나온 2014년에 구형矩形의 문을 “직사각형 모양의 문”으로 읽는 젊은 독자는 없을 것이다. 95퍼센트 이상이 어떻게 문을 ‘공ball’처럼 생기게 만들 수 있었을까? 라고 생각할 듯하다. 교수의 시절에는 그저 한자로 설명해주면 만사가 끝났겠지만 지금 독자들은 아예 한자어를 배우지 않기 때문에 어림도 없다. 동음이의어로 생각할까봐 나도 꼴같지않은 독후감을 쓸 때 궁리가 복잡할 정도이다. 비단 구형矩形의 문 하나가 아니라 묘사 자체도 다분히 예스럽다. 나 정도의 세대는 이런 예스런 표현이 반갑기도 하고 그렇겠지만 젊은 독자는 곤혹스러울 수 있다. 범우문고는 안타깝게도 이렇게 새 세대에 의하여 잊혀지고 마는 모양이다. 한 시절엔 날개를 펼쳐 곧 하늘로 박차 오를 것 같은 독수리 문양의 범우사凡友社, 라면 독자가 환장을 하던 시대가 있었는데.
시대는 20세기 초반 정도. 무대는 멕시코만을 접한 원주민 어부들의 작은 마을과 인근 읍내.
스토리는 단선적이다. 그래서 본문만 129페이지 정도의 분량이지만 단편소설로 분류하는 것이 타당하겠다. 초기부터 사회주의적 요소가 많이 깔린 작품을 많이 발표한 존 스타인벡은 캘리포니아에서 낳고 자라고 대학도 스탠포드를 다녀 많은 작품을 캘리포니아의 도시와 농촌, 농장을 무대로 한다. 근데 <진주>는 멕시코만이라 했고, 아예 멕시코 빈촌으로 잡았다. 1947년 그의 나이 마흔다섯에 발표한 작품. 아마도 평생동안 FBI의 요주의 인물 파일에 (빨갱이로) 이름을 올렸을 스타인벡답게 처음부터 특히 소작농과 인부들의 생활상과 노동쟁의 같은 것에 관심을 쏟았는데, <진주>는 물론 그런 요소가 완전히 없다고는 하지 못하겠지만, 4백년간 백인의 지배와 학대를 받은 멕시코 원주민에게 갑자기 큰 보물이 생긴 후에 벌어진 불행을 그렸다. 쉽게 얘기해서, 없는 동네, 없어도 그냥 없는 게 아니라 미주알이 찢어지게 가난한 사람들만 사는 동네의 역시 가난한 한 집구석에 난데없이 로또가 당첨된 상황. 당시 빈민들이 무슨 돈이 있어서 로또를 살까? 작은 보트를 타고 바다로 나가 진주 잡이를 하는 것이 먹고 사는 방편인 사람들인데 주인공 키노가 갈매기 알만큼이나 크고 아름답고, 흠 없는 완벽, 그런 진주를 발견한 후일담이다.
키노는 아내 쥬아나(아마 ‘후아나’가 맞는 표기일 듯)와 젖을 떼지 않은 아들 코요티토와 가난하지만, 대다수 마을사람들처럼 자신이 가난하다는 의식도 별로 없이 그저 행복하게 살고 있는 젊은 아빠이자 남편이다. 젊고 건장하고 준수한 청년. 온화하면서도 한 번 성질이 나면 사납게 돌변한다. 젊은이들이 다 그렇지 뭐. 총명한 눈이 반짝이고 코 밑에는 짧은 수염이 났다.
이 동네 사람들은 날이 밝으면 대개 옥수수 케이크와 책에서는 그냥 “용설란주龍舌蘭酒’라고 쓴 풀케 한 잔으로 아침을 때운다. 관습적으로 늘 하는 말은 대화가 아니라서 이 부부 사이에도 아침을 먹으며 아무런 말이 없다. 그러나 서로를 사랑하는, 세상에 사랑할 것이라고는 서로간, 둘밖에 없다는 걸 너무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이 하는 방식의 사랑을 하는 부부는 따듯한 눈길을 교차하며, 해먹 속에서 달게 자고 있는 아들 코요티토를 부드러운 눈길로 보고 있었다.
이때 코요티토가 누워 있는 해먹에서 조금씩 움직이고 있는 무엇을 발견한다. 대들보에서 해먹을 메어 놓은 줄을 따라 기어 내려오는 전갈 한 마리. 전갈을 발견하자마자 키노는 엄지와 검지로 잡아 손바닥에 올려 으깨 죽이려 손을 내밀어 보았지만, 전갈은 짧은 찰나의 순간에 아이의 어깨 위로 떨어지면서 코요티토의 보드라운 피부에 독을 찌르고 말았다. 분노한 키노는 맨손으로 전갈을 집어 들고 그대로 손으로 터뜨려 죽인 다음 바닥에 던져 바로 짓이겼으나 이때도 코요티토의 몸에는 전갈의 독이 퍼지고 있었다. 쥬아나는 전갈이 아이의 몸에 가까이 다가왔을 때부터 낮은 목소리로 주문을 외우다가 더 급박한 순간이 되니 아베마리아를 불렀으나 결국 첫아이의 어깨에 독침을 쏘았고, 독기가 급격하게 퍼져 아이가 악을 쓰며 울기 시작하고, 어깨와 목과 관절이 부으려 하자, 허약하지만 인내심이 강하고 단호한 성격의 쥬아나는 순식간에 암사자로 변해 머뭇거리지 않고 아이의 어깨에 작게 뚫린 구멍에 입을 맞추어 독을 빨아내 그걸 뱉은 다음에 다시 빨고, 뱉기를 멈추지 않았다.
의사는 오지 않을 것이다. 이 초가마을이 생긴 이후 의사가 가난한 마을에 직접 발을 디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아무도 의사를 기대하지 않았고, 기대할 수도 없었다. 이때 암사자 엄마 쥬아나가 외쳤다.
“그러면 우리가 의사에게 갑시다.”
이리하여 키노와 아이를 안은 쥬아나, 키노의 형 쥬안(후안) 토머스, 비만한 형수와 네 조카를 선두로 많은 동네 사람들로 이루어진 행렬이 읍내 의사의 저택으로 향했다. 읍내에서 가장 부유한 주민 가운데 한 명인 의사. 그는 젊은 시절 잠깐 지내본 파리로 돌아가 남은 세월을 최고의 문명도시를 향유하는 부르주아로 사는 헛꿈을 꾸고 있는 작자. 문지기가 원주민이 전갈에 물린 아이를 데리고 왔다고 보고했고, 의사는 무시한다.
“인디언 놈들이 벌레에 물린 것을 치료해준다니, 내가 할 일이 없나? 내가 의사야. 수의사가 아니란 말이야. 돈이나 있나? 돈이나 갖고 있는지 물어봐.”
키노의 주머니에 돈은 없고, 팔지 못하고 남은 허접한 진주 예닐곱 개만 들어 있다. 이걸 가지고 다시 의사에게 갔다 온 문지기는, 의사는 외출 중이요. 중환자에게 왕진 가셨소, 하고 말하며 슬며시 문을 닫는다. 무리는 어쩔 수 없어서 아픈 코요티토를, 그러나 엄마가 독을 빨아주어 그랬는지 조금 낫는 듯한 아이를 데리고 다시 가난한 사람들만 사는 동네로 터덜터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이튿날, 키노와 쥬아나 부부는 아이를 햇볕에 가리기 위하여 숄로 덮은 후에 할아버지 때부터 자기한테까지 내려온 카누에 올라 진주조개를 잡으러 바다로 간다. 아이가 아프더라도 일을 멈출 수는 없다. 먹고 살아야 하니까. 보통보다 조금 늦은 시간에 바다로 나간 부부. 키노가 바다 속으로 잠수했고, 그날은 무슨 일인지 여태 한 번도 찾아보지 않은 바위 사이 깊은 곳에 눈이 갔는데, 여태 한 번도 보지 못한 커다란 굴이 조금 입을 벌리고 있었다. 커다란 굴 속에 여태 한 번도 보지 못한 은은한 빛이 밝지 않은 바다 속임에도 빛나고 있었던 거였다. 급하게 굴을 따 다시 카누에 올라 굴의 속을 헤쳐보니, 앞에서 말한 갈매기 알만큼 커다랗고, 아무런 흠이 없으며, 아름다운 색을 반사하는, 여태 한 번도 보지 못한 보물을 건져 올린 것이었다.
갑작스런 행운에 경악을 금치 못한 키노와 쥬아나는 환호성을 울렸고, 이들의 카누 옆에서 작업하던 동료 어부들이 다가와 이 소식을 알았다. 작은 동네. 키노와 쥬아나가 급하게 작업을 마치고 서둘러 뭍으로 나와 집에 도착하기도 전에 키노가 굉장한 크기의 역대급으로 아름다운 진주를 캤다는 소식을 마을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이튿날이 되자 읍내에서도 진주 이야기를 하거나 그걸 어떻게 자기 손에 넣을까를 궁리하는 사람이 하나, 둘, 넷, 여덟, 열여섯, 서른둘, 기하급수적으로 생기기 시작했으니.
진주는 폭력과 야만의 시절, 폭력과 야만의 장소에서 놀라운 속도로 키노 가정의 행운에서 악운으로 바뀌고 있던 거였다. 전갈의 독처럼.
이렇게 작품은 시작한다. 어떻게 되는 지는 읽어보시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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