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세통언 2 - 어리석은 세상을 깨우치는 이야기
풍몽룡 지음, 김진곤 옮김 / 아모르문디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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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0편의 단편소설 혹은 채집해 수록한 민담, 채집해서 풍몽룡이 다시 쓴 민담 가운데 열두 편을 실은 경세통언의 두번째 책. 작가 풍몽룡 자신이 명말청초 시기의 선비로 공부에 힘을 쏟았으나 쉽게 과거 급제하지 못해 차곡차곡 나이만 들어가는 긴 학생시절을 겪어서 그런지 책 속에도, 저 옛 시절 주 문왕을 도와 상나라 주왕을 척살하고 천하를 제패하는데 큰 힘을 쏟아 제나라의 패왕으로 임명되었으나, 아들로 하여금 제나라를 꾸려나가게 하고 자신은 주나라의 신하로 160살까지 헌신한 강태공, 이이 만큼은 아니더라도 하여간 오래 공부하다 다 늙어 과거 급제한 사람들 이야기가 줄곧 나온다.

  작품의 공간은 장강 이남이 압도적으로 많다. 물론 북경을 비롯한 북쪽 지방일 수도 있어도 그쪽에서 사건을 벌이다가 결국 장강 이남, 때로는 회계 지역 등 옛 오월 땅에서 결말을 맺는다. 그러면 이 민담 혹은 소설들을 읽으며 스토리들이 눈에 익은 이유를 조금은 짐작할 수 있을 터. 남송 시대 이후 장강 이남에서 발달한 예술 형태, 곡曲. 즉 연극 또는 차이니즈 오페라라고 부르는 극의 이야기와 비슷한 것이 많다. 중국의 곡에 관해 알지 못하여 함부로 발언하지 못하겠지만 장강 유역 특히 남송의 수도였던 난징에서 가까운 쑤저우 근방에서 곡이 발달해, 남곡과 북곡의 장점을 취한 곤곡이 유래한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러니 당연히 옛 초나라 땅, 더 세분해서 오왕 부차와 월왕 구천이 세상 둘도 없는 드라마를 만든 오와 회계의 백성들 이야기를 많이 담은 것이 오히려 자연스럽다.


  작품 가운데 <옥당춘이 왕경륭과 재회하다>가 단연 눈에 들어왔다.

  들어가기 전에 한 말씀드리자면, 풍몽룡이 16세기에서 17세기 중반까지 산 사람이다. 그리하여 지금 “단연” 눈에 들어왔다고 해도, 이것이 저 먼 시절, 춥고 추운 동짓달 밤에 화롯가에 모여 앉아 밤 구워 까먹으며 할머니의 옛 이야기를 듣던 수준에서 재미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현대 단편소설의 플롯이나 작법을 포기하지 않고 책을 읽으려면 아예 첫 장도 열지 않는 편이 낫겠다.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이 주인공의 이름 “옥당춘.” 어? 옥당춘玉堂春? 혹시 옥단춘玉丹春 아냐? 우리나라 조선 후기에도 <옥단춘전>이라는 작품이 있어, 나 어린 시절에 모친께서 고등학교 국어교사를 하시는 바람에 책꽂이에 “한국고전문학전집”이란 책 한 질이 있어서, 거기서 읽은 적 있다. 벌써 50년 너머의 오랜 기억이라 기억이 까마득하지만 하여간 <옥단춘전>을 읽었고, 그때 <춘향전>과 많이 비슷하다는 거에 깜짝 놀랐던 것까지 떠올랐다. 근데 풍몽룡이 《경세통언》에 실은 <옥당춘…>하고는 얼마나 비슷할까? 아쉽게 그 정도까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세월이 얼만데.

  중국에서는 정원화라는 기생이 있어서, 거지꼴이 된 서생을 뒷바라지해 과거 급제하게 도와주어 서생의 인생역전을 하게 만든 이야기가 있던 모양이다. <옥당춘…>에서도 주인공 옥당춘이 남주인공 왕경륭을 도와 과거 급제하게 만들어주기는 하는데 여러가지로 우리나라 옥단춘, 중국의 정원화와 다르다. 우리나라 이야기에서 남주인공 이혈룡이 옥단춘을 만났을 때 이미 이혈룡은 거지 중에서도 상거지이며, 동문수학했던 김모의 지시에 의하여 동네 건달한테 칼 맞아 대동강 물속에서 물고기 밥이 되기 바로 전 신세였던 것에 비해, <옥당춘…>의 남주인공 왕경륜은 장강 이남의 은퇴 고관이자 거부의 막내 아들로 북경에 남아 재산을 정리하다가 장안 제일의 기녀 옥당춘의 귀밑머리를 풀어주며 많고 많은 북쪽 재산을 거덜내는 것으로 시작한다. 즉 처음엔 옥당춘으로 하여금 남주인공 왕경륜의 불행, 그것도 큰 불행의 발화점이 되게 만들었다. 이후 집안 호적에서도 파버린 형국이 된 왕경륜이 죽을 고생을 하다가 결국 다시 아버지 앞에서 싹싹 빌고 공부에 전념해 과거에 급제하고, 그동안 악독한 기생어미가 옥당춘을 돈 많은 장사꾼에게 팔아버려 저 산서성으로 보낸 것을 알고, 그곳으로 어사 발령이 나자마자 옥당춘의 누명을 벗겨준 다음, 두번째 아내인지 첩자리인지 하여간 다시 부부의 연을 이어간다는 이야기이다. 아마도 첩 자리였을 것.

  옥당춘은 처음엔 왕경륜을 홀려 집안의 재산을 홀딱 빼먹는 데 큰 역할을 하지만 어느새 사랑이 깊어져 빈털터리가 된 왕경륜에게 집으로 돌아갈 여비와 함께 다시 공부를 해 과거를 볼 수 있게 각오를 다지게 만든다.

  이런 스토리라인, 전혀 새롭지 않지? 여기서 왕경륜이 작품 속 이야기와 다르게, 고향에 내려가기 전에 아이 하나를 만들었고, 훗날 과거에 급제하여 이름을 날리고 있음에도, 아이를 들쳐 업은 옥당춘이 나타나 나리, 옛 정을 생각하시어 아이나 키우게 돌보소서, 하는 애원을 겉으로는 안타까운 척하면서도 안면몰수하고 입 싹 닦는다면 그게 <미워도 다시 한번>의 원형이 될 터이다. 실제로 이런 이야기가 생각보다 많다. 우리나라에서도 많지만 중국의 극에서는 훨씬 더 많다. 딱 과거 보러 가는 선비와 기녀 뿐만 아니라, 서생과 기녀, 서생과 몸과 마음이 활수한 시골 처녀 같은 경우도 많다. 8할이 <미워도 다시 한번> 스타일이고, 8할 중에 반 이상이 기녀 또는 처녀가 한 많은 귀신이 되어 다시 선비 앞에 나타난다. 2할이 <옥당춘…>, 우리나라 <옥단춘전>이나 <춘향전> 같은 해피엔드다.

  그래도 이렇게 뻔한 이야기가 재미있다. 왜 이렇게 여러가지 버전의 이야기로 만들었을까? 재미있으니까. 안 그러면 뭐하러 애써가며 다시 쓰고, 조금 바꿔서 또 다시 썼겠는가. 사는 게 다 그렇지 뭐.


  이왕 여기까지 왔으니 《경세통언》 마지막 3권까지 가야겠다. 한 달 후에 읽을 예정. 오늘 도서관에 희망도서 신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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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울의 책 민음사 외국문학 M
E. O. 키로비치 지음, 이윤진 옮김 / 민음사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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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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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작 드라큘라의 고향 루마니아 트란실바니아의 남쪽, 퍼거라슈라는 작은 마을에서 1964년에 태어난 용띠 남자. 집안 족보가 조금 현란해서 루마니아-헝가리-독일 핏줄이 골고루 섞인 DNA를 타고났는데, 아다시피 특히 포유류의 경우에는 여러 형질이 복합될수록 보다 우월한 결과물이 탄생하는 경우가 많아, 키로비치 역시 일찍이 부쿠레슈티 대학에서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일간지와 TV 방송국 등에서 다방면에서 활동하다가 1991년 첫번째 장편소설 <대학살>을 발표해 일약 스타덤에 오르는 기염을 토한다. 루마니아에서 열 편의 범죄, 서스펜스 소설을 발표한 후 2012년에 영국으로 터를 옮겨 첫번째 영어 장편소설 <거울의 책>을 발표해 단숨에 세계적 대중 소설 작가의 반열에 올랐다.

  무슨 말씀이냐 하면, 이 책이 루마니아 태생의 작가가 쓴 소설로 분류되어, 하필이면 도서관 서가 889번, 동유럽 도서 가운데 자리를 잡고 있어서 나로 하여금 오랜 세월 소비에트 연방의 종속국 일원이었던 동유럽 문학 특유의 정서를 기대하게 만들었으나, 결론은 버킹검, 미국 뉴저지주 프린스턴 대학 인근에서 발생한 저명한 독신 심리학 교수의 피살 사건을 다룬 범죄, 추리 소설이었다. 물론 루마니아에서 나서 반백년 가까이 루마니아에서 산 키로비치가 뉴저지와 뉴욕을 무대로 한 추리물을 근사하게 썼다는 게 기념할 만하고, 얼마나 그럴 듯했느냐 하면 이 작품을 각색해 영화 <슬리핑 독>을 찍기도 할 정도였는데, 읽는 동안 즐긴 건 맞지만, 애초에 기대했던 ‘루마니아 작품’은 아니어서, 루마니아 출신 작가를 읽으려 했던 기대와 달라, 약간, 아주 조금, 이게 뭥미, 했던 거였다. 뉴욕을 무대로 하는 범죄, 추리물은 굳이 루마니아 출신 작가가 쓴 작품이 아니더라도 무지하게 많아서. 얼마 전 세상을 뜬 폴 오스터를 필두로 해서 말이지.


  30년 전에 프린스턴 대학 심리학과에 세계적으로 이름이 난 조지프 와이더 교수가 재직하고 있었다. 1987년에 사건이 생기기 전까지 와이더 교수는 프린스턴의 거장들 가운데 한 명으로 가히 프로메테우스 같은 존재, 즉 춥고 아둔한 인류에게 불을 가져다 준 영웅 비슷한 숭앙을 받았다는 말이다. 당연히 이런 평가는 심리학과와 심리학 관련 학과의 학생들의 것이었 뿐, 그만큼 동료, 경쟁자, 아무 상관 없지만 질투심 많은 다른 전공 교수한테는 질시와 미움의 적일 수도 있었겠지?

  이이의 제자 가운데 로라 베인스라는 이름의 여학생이 있었다. 학생이면 그냥 학생이지 뭐하러 ‘여학생’이라고 성별을 밝히느냐고? 프린스턴 대학은 주로 미국의 동해안, 그러니까 대서양에 인접한 도시 출신으로 어려서부터 영어유치원을 비롯해 국영수 특별과외를 망라할 수 있는 중산층 이상의 자제들이 주로 입학한 학교였는데(빌어먹을 수시 입학 전형이라니), 로라 베인스는 (동부 출신이 듣기에)중부 사투리를 유창하게 구사하는 지방 출신이었지만 큰 키와 늘씬한 외모, 굽슬굽슬한 헤어 스타일의 전형적 미인이면서, 조지프 와이더 교수의 총애하는 수제자였던 바였다. 어려서부터 육상과 수학에 두각을 나타냈던 고등학교 시절 약간 천재과에 속했다. 뜀박질을 유난히 잘 했으나 나이가 어정쩡해 곧 있을 올림픽에 미국 대표로 선발하기에는 조금 모자랐고 4년 후 다음 올림픽 때에는 전성기가 지날 것 같아, 이름을 내지 못하고 그냥 즐기기 위해 뜀박질을 하는 건 전혀 의미가 없어서 육상은 포기했다. 대신 수학으로 말할 거 같으면, 세계 수학 올림피아드에 연속 출전해서 출전할 때마다 따박따박 입상을 했으며, 프린스턴에 오기 전에 시카고 대학에서 이미 수학 석사 학위를 딴 상태였다. 그러다가 심리학에 관심을 두어 저명한 와이더 교수에게 석사 입학 신청을 했고, 와이더 교수가 입학 허가는 물론이고 수학적 자질을 높이 사 유난히 총애하기에 이르렀다. 심지어 뉴저지 인근의 자기 저택에도 무시로 출입할 수 있는 복제 열쇠를 줄 정도이니 로라를 처음 칭할 때 ‘여학생’이라 칭함이 마땅하지 않겠느냐 하는 거다. 맞지? 필립 로스를 필두로 여러 작품 속에 이 비슷한 이야기 나온다. 그럼 <거울의 책>에서 대학원생 로라 베인스와 조지프 와이더 교수도? 안 알려줌.


  작품은 1987년 가을, 영문과 혹은 문창과 대학원생인 리처드 플린이 살고 있는 2인용 숙소의 빈 방에 로라 베인스가 입주하면서 시작한다. 1부는 창작으로 포기한 리처드 플린이 오랜 세월 광고 에이전시에 다니다가 어떤 계기가 생겼는지 1987년에 있었던 비극적인 사건을 실명 그대로 소설로 쓴 것이 큰 줄거리다. 그리하여 1부는 리처드 플린의 일방적 주장이라고 생각해야 마땅하다. 실제로 리처드와 리처드보다 서너 살 많은 로라가 서로 진심으로 사랑을 했고, 그리하여 당연히 수시로, 시간 날 때마다 훌떡 벗고 섹스를 했는지는 읽는 사람이 이해하기 나름이다. 그러나 당연히 1부가 끝나고 2부에 접어들어 웬만큼 진도가 나가기 전까지 독자는 리처드 플린의 주장이 사실일 거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어서, 2부 이후에 로라 웨스트레이크로 이름을 바꾼 로라 베인스가 서로 사랑한 적도, 섹스한 적도 없다고 주장할 때 미국 심리학계에서 큰 명성을 쌓은 로라의 주장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게 만든다.

  그러니까 쉽게 말해서 작품 속 등장인물의 주장을 책이 끝나는 순간까지 믿지 말라는 거다. 다 자기 입장에서, 자기가 기억하는 근 30년 전 사건에 대하여 진술할 뿐이니까. 거기다가 당연히 의도적인 거짓말까지 보태서 말이지.

  예를 들어 1969년 7월에 아폴로 11호를 타고 달에 도착해 닐 암스트롱이 첫 인류의 발자국을 찍은 TV 생방송을 봤다, 라고 하면, 이게 어디까지 진실일까? 아직 열 살을 꽉 채우지 못한 나는 분명이 TV 브라운관으로 흑백으로 송출 받은 화면을 본 기억이 있다. 이게 7월 20일 혹은 날짜 변경선 때문에 21일에 있었던 닐 암스트롱의 달 착륙 생방송이었을까? 아니면 역사적 사건이니 만큼 이후 줄기차게 재방송한 화면의 한 순간이었을까? 이때 공포한지 얼마 되지 않아 외우지 못하면 담임선생이 회초리로 손바닥을 때리던 국민교육헌장을 달달 외우고 있었을까? 염병할 국민교육헌장 때문에 손바닥을 맞지 않은 건 확실하지만 달 착륙 화면은 진짜 암스트롱이 달에 내렸을 때인지, 이후 재방송인지 모르겠다. 마찬가지로 <거울의 책>에 등장하는 진술인들은 전적으로 자기 주장에 의하여 30년 전의 사건을 진술할 뿐 아무도 진실 여부를 보증할 수 없다.

  리처드 플린이 아름다운 대학원생 누나이자 훗날의 저명한 심리학자 로라 웨스트레이크, 30년 전의 로라 베인스와 서로 진하게 사랑했으며, 로라는 동시에 자신의 지도 교수인 미혼남자 조지프 와이더와도 깊은 사이여서 그것을 심하게 질투했다는 것을 다중에게 증언하지 못하고 암에 걸려 죽고 만다. 그러니까 1부의 주된 내용, 리처드 플린이 죽기 전에, 이 사건에 대한 소설을 쓰지 못하면 차마 눈을 감지 못할 거 같아서 말 그대로 죽을 힘을 다 해 쓰고 곧바로 죽어버린 소설, 그것도 완결판이 아니라 1부 격에 해당하는 분량을 읽은 피터 카츠라는 이름의 출판 에이전시가 완결편을 찾거나, 그게 안 된다면 전직 기자였던 존 켈러에게 뒷부분을 이어 쓰게 만들어 책을 출판하고 싶어하면서 자연스럽게 사건을 파헤치게 된다. 그리고 켈러의 사건 추적은 사건 당시 관계 형사였던 은퇴한 전직 경찰 로이 프리먼이 결국 사건을 30년 만에 해결하면서 대단원을 맞는다. 물론 대단원 이후에 전혀 쓸데없는 에필로그가 첨부되긴 하지만.


  그러면 도대체 어떤 사건이냐고? 좋다. 아주 드물게 화끈하게 알려드린다.

  1987년, 주식시장은 곤두박질치고, 이란 콘트라 사건으로 레이건 대통령의 자리가 흔들거리던 해의 마지막 기간, 12월 21일. 미국은 연말 크리스마스 시즌을 앞두고 조금은 들뜬 상태였으며, 다양한 인종과 관습이 뒤섞인 바빌론과 비슷한 상태인 프린스턴 대학가도 마찬가지였는데 그날과 22일 사이에 프린스턴 대학의 저명한 심리학과 교수 조지프 와이더는 자신의 저택 안에서 야구 배트로 뒤통수를 얻어맞았고, 이 와중에도 범인에게 저항하려다 두 팔의 뼈까지 부러지는 부상을 당한 채로 죽음을 맞았다. 집안에는 서랍 등을 뒤진 흔적이 있지만 바닥에 널린 문서를 제외하고는 팔목에 찬 고가의 손목시계와 손가락의 보석 반지와 서랍 속 현금 같은 건 일체 없어지지 않았음에도 사건은 침입한 강도에 의한 살인으로 발표되고, 끝내 범인이 누구인지 모른 채 미제 사건으로 종결하고 만다.

  30년이 흐른 후, 이 소설을 영화로 만든 <슬리핑 독스>에선 백인인 러셀 크로우가 연기하지만, 은퇴한 흑인 형사 로이 프리먼이 끝내 범인을 찾아내니까 완벽한 종결이라 할 수 없기는 하다. 이게 결말이다. 당연히 누가 범인인지는 밝힐 수 없다. 재미있는 작품이다. 그러나 앞에서 말했듯이 내가 이 책을 선택할 때 기대했던 “루마니아 출신 소설가”의 스타일이 아니라서 조금 그랬지만.

  이 책의 본문이 472페이지에서 끝난다. 근데 재미있는 스토리라 훌훌 넘어가는 것도 있지만, 하도 신묘한 경지의 조판 때문에 순식간에 다 읽어버릴 수 있다. 한 페이지에 큰 글자체로 열아홉 줄밖에 담지 않아 절대 활자 수가 적기도 하다. 나는 이런 조판이 싫다. 그저 페이지 수 늘리느라 열일 하는 출판사가 곱게 보이지 않는다. 이거 내가 꼰대가 되어 그런 거 맞지? 아마존 열대 우림도 좀 살리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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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돌이 2025-09-23 09: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슬리핑 독스>를 얼마 전에 봐서인지 반갑네요. 러셀 크로우의 연기도 좋고 잘 봤어요. 저는 줄거리에서 큰 의미는 없지만 러셀 크로우가 술을 들이키는 장면이 꽤 인상 깊더라고요! 참고 참다가 마신 자의 그 표정이 너무 리얼해서요.ㅎㅎ 책으로 보면 역시 더 다채롭고 재밌을 것 같네요!

Falstaff 2025-09-24 03:46   좋아요 1 | URL
책에서는 여주인공 로라가 매력적이더라고요. 팜파탈이라고 볼 수도 있는데 대개 팜파탈이 죽여주긴 하잖아요. ㅎㅎㅎ

카스피 2025-09-23 17: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흠,역시 자본주의 논리탓인지 아무래도 판매를 위해서는 루마니아작가도 역시나 미국을 배경으로 해야하니 좀아쉅네요

Falstaff 2025-09-24 03:46   좋아요 0 | URL
이것도 쓰고, 저것도 쓰고 그러는 것이겠지요.

꼬마요정 2025-09-24 10:4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 재밌겠습니다. 루마니아 배경 궁금한데 미국이라니… 나름 익숙하겠어요. 재밌겠습니다. ㅎㅎㅎ

Falstaff 2025-09-24 16:12   좋아요 0 | URL
아오, 재미만 가지고 얘기하자면 정말 좋습니다. ㅎㅎㅎ
 
진주 범우문고 281
존 스타인벡 지음, 이성호 옮김 / 범우사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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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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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제 쉽게 구할 수 있는 존 스타인벡의 번역 ‘소설’은 다 읽은 셈이다. 또는 다 읽은 것 같다. 이렇게 한 작가를 몽땅 읽어버리면 서운하다. 좋아하는 작가라서 하나하나 읽다가 더 찾을 수 없는 순간을 맞았고, 이제 이 작가를 읽으려면 전에 읽은 작품을 다시 읽는 수밖에 없어서. 웬만하면 그래서 특정 작가의 작품을 악착같이 찾아 읽으려 하지 않는데 어떻게 그렇게 됐다. 아쉽다.


  범우사의 “범우문고”는 경제적인 가격과 다양한 레퍼토리를 소개하는 전통적 의미의 ‘문고판’ 책이기는 하지만 획일적인 표지와 경제적이기만 한 종이질과 옛 번역으로 인해 21세기 들어 경제적 풍요를 경험한 세대에게 거의 외면 받는 수준으로 격하된 거 같다. 세월이 변하면 책도 변해야 하겠지만 어딘지 좀 쓸쓸한 데가 있다. 예전 삼중당이나 삼성문화재단에서 낸 문고판 책들에 깊은 추억을 갖고 있는 시니어들은 문고판 책이 드물어지는 게 서운하기도 할 듯. 뭐 어쩌랴. 사는 게 다 그런 걸.

  이 책도 번역을 이성호 선생이 했다. 이성호는 1938년 포천 내촌에서 출생해 국립서울사범학교(서울사대)를 졸업하고 여러 대학을 거쳐 한양대 영문과 명예교수로 말년을 지내고 있다. 이 책의 초판 1쇄가 2014년. 76세의 선생이 직접 번역을 했을까, 아니면 전에 어느 매체에 번역 발표한 것을 문고판으로 만든 초판이라는 뜻일까? 왜 시비하느냐 하면, 이런 문장 때문에 그렇다. 주인공 키노가 사는 가난한 집을 묘사하는 장면이다.

  “키노는 눈을 뜨자 먼저 환하게 밝아 오는 구형矩形의 문 쪽으로 눈길을 돌리고…” (p.19)

  초판이 나온 2014년에 구형矩形의 문을 “직사각형 모양의 문”으로 읽는 젊은 독자는 없을 것이다. 95퍼센트 이상이 어떻게 문을 ‘공ball’처럼 생기게 만들 수 있었을까? 라고 생각할 듯하다. 교수의 시절에는 그저 한자로 설명해주면 만사가 끝났겠지만 지금 독자들은 아예 한자어를 배우지 않기 때문에 어림도 없다. 동음이의어로 생각할까봐 나도 꼴같지않은 독후감을 쓸 때 궁리가 복잡할 정도이다. 비단 구형矩形의 문 하나가 아니라 묘사 자체도 다분히 예스럽다. 나 정도의 세대는 이런 예스런 표현이 반갑기도 하고 그렇겠지만 젊은 독자는 곤혹스러울 수 있다. 범우문고는 안타깝게도 이렇게 새 세대에 의하여 잊혀지고 마는 모양이다. 한 시절엔 날개를 펼쳐 곧 하늘로 박차 오를 것 같은 독수리 문양의 범우사凡友社, 라면 독자가 환장을 하던 시대가 있었는데.


  시대는 20세기 초반 정도. 무대는 멕시코만을 접한 원주민 어부들의 작은 마을과 인근 읍내.

  스토리는 단선적이다. 그래서 본문만 129페이지 정도의 분량이지만 단편소설로 분류하는 것이 타당하겠다. 초기부터 사회주의적 요소가 많이 깔린 작품을 많이 발표한 존 스타인벡은 캘리포니아에서 낳고 자라고 대학도 스탠포드를 다녀 많은 작품을 캘리포니아의 도시와 농촌, 농장을 무대로 한다. 근데 <진주>는 멕시코만이라 했고, 아예 멕시코 빈촌으로 잡았다. 1947년 그의 나이 마흔다섯에 발표한 작품. 아마도 평생동안 FBI의 요주의 인물 파일에 (빨갱이로) 이름을 올렸을 스타인벡답게 처음부터 특히 소작농과 인부들의 생활상과 노동쟁의 같은 것에 관심을 쏟았는데, <진주>는 물론 그런 요소가 완전히 없다고는 하지 못하겠지만, 4백년간 백인의 지배와 학대를 받은 멕시코 원주민에게 갑자기 큰 보물이 생긴 후에 벌어진 불행을 그렸다. 쉽게 얘기해서, 없는 동네, 없어도 그냥 없는 게 아니라 미주알이 찢어지게 가난한 사람들만 사는 동네의 역시 가난한 한 집구석에 난데없이 로또가 당첨된 상황. 당시 빈민들이 무슨 돈이 있어서 로또를 살까? 작은 보트를 타고 바다로 나가 진주 잡이를 하는 것이 먹고 사는 방편인 사람들인데 주인공 키노가 갈매기 알만큼이나 크고 아름답고, 흠 없는 완벽, 그런 진주를 발견한 후일담이다.


  키노는 아내 쥬아나(아마 ‘후아나’가 맞는 표기일 듯)와 젖을 떼지 않은 아들 코요티토와 가난하지만, 대다수 마을사람들처럼 자신이 가난하다는 의식도 별로 없이 그저 행복하게 살고 있는 젊은 아빠이자 남편이다. 젊고 건장하고 준수한 청년. 온화하면서도 한 번 성질이 나면 사납게 돌변한다. 젊은이들이 다 그렇지 뭐. 총명한 눈이 반짝이고 코 밑에는 짧은 수염이 났다.

  이 동네 사람들은 날이 밝으면 대개 옥수수 케이크와 책에서는 그냥 “용설란주龍舌蘭酒’라고 쓴 풀케 한 잔으로 아침을 때운다. 관습적으로 늘 하는 말은 대화가 아니라서 이 부부 사이에도 아침을 먹으며 아무런 말이 없다. 그러나 서로를 사랑하는, 세상에 사랑할 것이라고는 서로간, 둘밖에 없다는 걸 너무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이 하는 방식의 사랑을 하는 부부는 따듯한 눈길을 교차하며, 해먹 속에서 달게 자고 있는 아들 코요티토를 부드러운 눈길로 보고 있었다.

  이때 코요티토가 누워 있는 해먹에서 조금씩 움직이고 있는 무엇을 발견한다. 대들보에서 해먹을 메어 놓은 줄을 따라 기어 내려오는 전갈 한 마리. 전갈을 발견하자마자 키노는 엄지와 검지로 잡아 손바닥에 올려 으깨 죽이려 손을 내밀어 보았지만, 전갈은 짧은 찰나의 순간에 아이의 어깨 위로 떨어지면서 코요티토의 보드라운 피부에 독을 찌르고 말았다. 분노한 키노는 맨손으로 전갈을 집어 들고 그대로 손으로 터뜨려 죽인 다음 바닥에 던져 바로 짓이겼으나 이때도 코요티토의 몸에는 전갈의 독이 퍼지고 있었다. 쥬아나는 전갈이 아이의 몸에 가까이 다가왔을 때부터 낮은 목소리로 주문을 외우다가 더 급박한 순간이 되니 아베마리아를 불렀으나 결국 첫아이의 어깨에 독침을 쏘았고, 독기가 급격하게 퍼져 아이가 악을 쓰며 울기 시작하고, 어깨와 목과 관절이 부으려 하자, 허약하지만 인내심이 강하고 단호한 성격의 쥬아나는 순식간에 암사자로 변해 머뭇거리지 않고 아이의 어깨에 작게 뚫린 구멍에 입을 맞추어 독을 빨아내 그걸 뱉은 다음에 다시 빨고, 뱉기를 멈추지 않았다.


  의사는 오지 않을 것이다. 이 초가마을이 생긴 이후 의사가 가난한 마을에 직접 발을 디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아무도 의사를 기대하지 않았고, 기대할 수도 없었다. 이때 암사자 엄마 쥬아나가 외쳤다.

  “그러면 우리가 의사에게 갑시다.”

  이리하여 키노와 아이를 안은 쥬아나, 키노의 형 쥬안(후안) 토머스, 비만한 형수와 네 조카를 선두로 많은 동네 사람들로 이루어진 행렬이 읍내 의사의 저택으로 향했다. 읍내에서 가장 부유한 주민 가운데 한 명인 의사. 그는 젊은 시절 잠깐 지내본 파리로 돌아가 남은 세월을 최고의 문명도시를 향유하는 부르주아로 사는 헛꿈을 꾸고 있는 작자. 문지기가 원주민이 전갈에 물린 아이를 데리고 왔다고 보고했고, 의사는 무시한다.

  “인디언 놈들이 벌레에 물린 것을 치료해준다니, 내가 할 일이 없나? 내가 의사야. 수의사가 아니란 말이야. 돈이나 있나? 돈이나 갖고 있는지 물어봐.”

  키노의 주머니에 돈은 없고, 팔지 못하고 남은 허접한 진주 예닐곱 개만 들어 있다. 이걸 가지고 다시 의사에게 갔다 온 문지기는, 의사는 외출 중이요. 중환자에게 왕진 가셨소, 하고 말하며 슬며시 문을 닫는다. 무리는 어쩔 수 없어서 아픈 코요티토를, 그러나 엄마가 독을 빨아주어 그랬는지 조금 낫는 듯한 아이를 데리고 다시 가난한 사람들만 사는 동네로 터덜터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이튿날, 키노와 쥬아나 부부는 아이를 햇볕에 가리기 위하여 숄로 덮은 후에 할아버지 때부터 자기한테까지 내려온 카누에 올라 진주조개를 잡으러 바다로 간다. 아이가 아프더라도 일을 멈출 수는 없다. 먹고 살아야 하니까. 보통보다 조금 늦은 시간에 바다로 나간 부부. 키노가 바다 속으로 잠수했고, 그날은 무슨 일인지 여태 한 번도 찾아보지 않은 바위 사이 깊은 곳에 눈이 갔는데, 여태 한 번도 보지 못한 커다란 굴이 조금 입을 벌리고 있었다. 커다란 굴 속에 여태 한 번도 보지 못한 은은한 빛이 밝지 않은 바다 속임에도 빛나고 있었던 거였다. 급하게 굴을 따 다시 카누에 올라 굴의 속을 헤쳐보니, 앞에서 말한 갈매기 알만큼 커다랗고, 아무런 흠이 없으며, 아름다운 색을 반사하는, 여태 한 번도 보지 못한 보물을 건져 올린 것이었다.

  갑작스런 행운에 경악을 금치 못한 키노와 쥬아나는 환호성을 울렸고, 이들의 카누 옆에서 작업하던 동료 어부들이 다가와 이 소식을 알았다. 작은 동네. 키노와 쥬아나가 급하게 작업을 마치고 서둘러 뭍으로 나와 집에 도착하기도 전에 키노가 굉장한 크기의 역대급으로 아름다운 진주를 캤다는 소식을 마을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이튿날이 되자 읍내에서도 진주 이야기를 하거나 그걸 어떻게 자기 손에 넣을까를 궁리하는 사람이 하나, 둘, 넷, 여덟, 열여섯, 서른둘, 기하급수적으로 생기기 시작했으니.

  진주는 폭력과 야만의 시절, 폭력과 야만의 장소에서 놀라운 속도로 키노 가정의 행운에서 악운으로 바뀌고 있던 거였다. 전갈의 독처럼.

  이렇게 작품은 시작한다. 어떻게 되는 지는 읽어보시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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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moo 2025-09-22 13: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상하게 저는 스탁인백 소설이 재밌는지 모르겠더라구요. 문학 덕후들로부터 재밌다고 추천받아 읽었는데 영~ 대표적인 예가 <분노의 포도>... 문제가 뭘까요?? 다시 읽어볼까 생각중입니다~
스타인백 책 모을 때(그래두 7권 모음) 범우문고본으로 소장하고 있긴 하지만 읽지 않아 얼른 처분해야 할 듯합니다..ㅎㅎ

Falstaff 2025-09-23 04:00   좋아요 0 | URL
문제는 무슨 문젭니까. 그냥 야무님하고 스타인벡이 맞지 않는 거예요. ㅎㅎㅎ 사시다가 야무님이 읽고 싶을 때가 되면 그때 한 번 들춰보고, 그래도 마음에 안 들면 또 두었다가 나중에 읽으시면 되지 않을까요? 저도 그런 작가들 있습니다!
 
핸드폰 - 옛날 방식으로 쓴 열세 편의 이야기
잉고 슐체 지음, 노선정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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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잉고 슐체. 구 동독 드레스덴에서 1962년에 출생한 임인년 범띠 아저씨. 이이의 라이브러리를 보면 1995년에 출간한 데뷔작인 <33가지 행복한 순간>으로 초장부터 독일문학의 기린아로 부상했다는데, 아직 우리나라에 번역 출간되지 않았다. 이 작품은 지금 독후감을 쓰는 《핸드폰》에 자주 인용되는 것을 보아 (데뷔작이니 당연하겠지만) 작가의 작품 세계에도 상당히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거 같다. 과장해서 말하자면 《핸드폰》에 <33가지 행복한 순간>이 101번 정도 등장한다.

  나는 <새로운 인생>, <아담과 에블린> 그리고 <심플 스토리> 이렇게 세 작품을 읽어보았다. 즉 잉고 슐체를 알기 시작한 것이 겨우 10년밖에 되지 않았고 작품은 당시 구 동독 출신 작가들과 비슷하게 독일의 재통일 이후 동독 출신 사람들의 갖가지 열등감, 피해의식, 급변하는 환경 속에서 맞게 되는 혼란, 자본주의 속에서의 불안감 등에 관한 작품이었다고 기억한다. 21세기 들어 당시 동독 및 동유럽 출신 작가들이 이런 작품들을 쓰기 시작했고, 그게 우리나라에 2000년대 후반들어 본격적으로 번역되기 시작했는데, 얼핏 생각나는 사람들로 두샨 코바셰비치, 페터 슈나이더, 토마스 브루시히 등인데 우연히도 이들의 작품들이 전부 문학과지성사에서 나온 대산세계문학전집 시리즈에 들어 있다. 일일이 책장 뒤지기 싫어서 대산전집 모아 놓은 책장만 둘러봐도 이렇다는 뜻이다. 내 서재 검색하면 작품 읽고 쓴 독후감도 구경하실 수 있다.


  2007년에 라이프치히 도서전 상을 받은 《핸드폰》에서는 독일 재통일 이후 구, 서독 부르주아들이 서쪽, 특히 서베를린으로 쫓겨갔지만 당시 그들의 여행가방 속에 자신들이 동쪽 베를린에서 살던 주택 등의 부동산에 대한 소유 권리증 같은 것을 챙겨 갔고, 재통일이 되자마자 이들은 통일 독일의 법정으로 몰려가 동쪽 베를린에 있는 자기 소유의 주택 등 부동산에 관한 소유권을 인정해달라는 소송을 진행했다. 우리나라도 한국전쟁 당시 비슷한 일이 있었음에도 일정 기간 거주한 사람들의 거주권이 소유권을 우선한다는 판결이 나기도 했으나, 독일은 얄짤없이 원래 소유자의 권리를 인정했다. 예니 에르펜베크의 작품 <그곳에 집이 있었을까> 같이 한 부동산이라 하더라도 정당한 절차를 걸쳐 소유권을 얻은 사람이 둘 이상인 경우도 있다. 이런 경우는 다음으로 하고, 통일 당시 주된 골치거리는, 서독에 앉아 소유권을 주장, 인정받은 집 주인이 몇십년 동안 같은 건물에 살고 있던 거주인에게 언제까지 방을 빼달라고 요구하는 일이 도처에서 벌어졌다는 거다. 이미 낡은 건물을 대대적으로 보수하거나 아예 철거해서 새로운 건물을 짓겠다는 건데, 물론 살고 있던 사람한테 적지 않은 이주비를 약속해서 많은 철거민들이 건물을 비워주기는 하지만, 특별한 이유가 있는 주민들은 끝까지 이주하지 않고 건물 안에서 버티는 일도 잦았다.

  그럼 한 건물에 몇 가구 남지 않게 되고, 빈 집에는 처음엔 부랑자, 노숙인들이 점거하며 매우 불결하고 위험한 환경을 조성하기도 했다. 케이트 블란쳇이 주인공 오케스트라 지휘자 리디아 타르로 출연하는 영화 <타르>에서 타르가 린치를 당하는 건물을 기억하시나? 전형적인 베를린 구 동독의 아파트 지역이다. 가끔 이런 경우보다 나은 건물은 세계 각국의 예술인들이 거의 빈 집이라 월세가 아예 없지는 않지만 무지하게 저렴한 이런 건물에 모여 한 커뮤니티를 이루는 일도 생긴다. 그래서 한때 세계의 젊은 각종 예술인들의 집합지이기도 했다.


  3부로 구성된 책 《핸드폰》의 1부 첫 작품이 <핸드폰>이다. 이 작품의 배경이 바로 동 베를린 지역이었던 한 아파트의 리모델링 작업 도중에 끝까지 버티고 이주하지 않은 가정을 그리고 있다. 서베를린 지역에 살면서 단 한 번도 자기 건물에 입주해 사는 사람 앞에 모습을 보이지 않은 건물주는 주인공 가족에게 2십만 마르크의 이주 위로금을 제시했건만, 화자 ‘나’는 그 돈 갖고 괜찮은 아파트를 얻을 수 없다고 판단했거나, 지금까지 산 아파트에 무진장 정이 들어 만일 이곳을 버리고 떠난다면 남은 평생을 끔찍한 노스텔지어 속을 헤매다 죽을 것 같거나, 그것도 아니면 조금만 버티면 2십만이 아니라 잘하면 30만 마르크도 나올 거 같아서 버텼다.

  왜 버텼건 간에 세상에 자기 마음대로 되는 일은 정말로 하나도 없는 법이라서, 다행스럽게 건물을 때려부수고 다시 짓는 건 아니지만 자기 집만 내버려둔 채 나머지 빈집에서 각종 공사를 벌이느라 벽을 허물고 페인트를 벗겨내고 천장을 뜯어 버리니 세상에나, 이 건물에 그렇게 많은 쓰레기와 먼지가 쏟아질 지는 꿈에도 몰랐다. 이들은 푄 바람이 부는 뜨거운 여름에도 창문을 비닐로 여러 겹 둘러쳐 먼지가 들어오지 않게 해야 하는 건 물론이고, 하다못해 계단 내려갈 때에도 (올라올 때는 아무래도 위험이 덜한 편이니까) 발에 뭐가 밟히는지 한 발자국 내디딜 때마다 확인해야 했는데, 이게 하루이틀이면 모르겠지만 한달 두달을 넘어 한해 두해에 육박하니, 애초 건물주가 20만을 주겠다고 할 때 왜 넙죽 받지 않고 버텼느냐, 이제 부부싸움 하는 것도 넌더리가 나는 수준이다.

  뭐 대강 감 잡히시지? 이런 스타일은 아까 앞에서 이름을 나열한 작가들의 작품 속에서도 다양한 모습으로 등장한다. 그러니 새롭지 않아서, 통일 이후 구 동독 출신 소설가로 혜성같이 등장한 기린아 잉고 슐체가 《핸드폰》의 부제를 무엇으로 정했느냐 하면,

  “옛날 방식으로 쓴 열세 편의 이야기.”

  여기서 “옛날 방식”이란 것이 언젯적 “옛날”이냐는 건데, 중세 트리스탄과 이졸데 당시도 아니고 가르강튀아도 아니고, 니벨룽겐의 노래 시절도 아니고 심지어 독일 문학의 할아버지 추밀고문관 괴테 시절도 아니라, 우리가 여전히 익숙하게 읽는 단편소설 양식인 발단, 전개, 갈등, 절정, 결말 식의 구조를 갖춘 작품을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 전공자가 아닌 내 생각이라는 뜻이다. 망신당할 수 있으니 다른 데 가서 써먹지 마시란 얘기다. 근데 이런 작품이 어제 독후감을 쓴 수전 손택, 세계적으로 명성이 떠르르한 에세이스트, 평론가, 운동가 등등의 소설보다 훨씬 읽기가 수월하고 심지어 재미있다. 물론 여기서 ‘재미’라고 해도 독일 문학이 유구한 전통을 이어온 “재미없는 독일 소설” 입장에서 재미있다고 하는 거니까 정말 재미있다고 오해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2부로 접어들면 여섯 편이 실려 있는데, 주로 여행가서 생긴 일, 본 것들과 자잘한 에피소드를 썼다. 2007년에 도서상을 받은 책이라면 이이의 나이가 겨우 마흔다섯 왔다갔다 할 텐데, 글쎄, 조금 빨리 작가의 티를 내고 있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진짜 자신이 무슨 행사를 빌미로 어떤 지역을 누구와 가서 무엇을 본 것을, 당연히 허구를 보태 자잘하거나 굵직한 에피소드를 보태 소설로 쓴 것이 많다. 자신의 생활 근처에서 글감을 발견하고 거기에 거짓을 섞어 작품을 쓴 것이 소설이지만 애초부터 나는 소설가이고, 어떤 곳에 갔고, 마치 보고서를 쓰듯 해야 했을까? 하긴 뭐 다 작가 마음이다. 그게 마음에 들지 않으면 독자는 안 읽으면 된다. 괜히 까탈 혹은 심술 부리지 말고. 기어이 끝까지 단어 하나 빼지 않고 몽땅 읽은 다음에 작가한테 심술부리는 나 같은 독자한테 뭐라 그래? 맞다, 진상. 어느새 나도 진상 독자 가운데 한 명이 되었는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렇게 되지 않기에는 내가 너무 오래 이이의 작품들을 좋아했는지도 모른다.

  또다시 잉고 슐체의 작품이 번역되어 시장에 풀린다면 나는 여전히 기꺼운 마음으로 그의 책을 선택할 것이다. 물론 구입하는 대신 도서관에 희망도서신청을 하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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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5-09-19 11:2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독일 통일 후 거주권을 무시하고 구 소유권에 손 들어줬다는게 저는 충격입니다. 와 그게 가능했다고요? 독일에서? 아무래도 제가 독일의 자본주의를 과소평가했나봅니다. ㅠㅠ

Falstaff 2025-09-20 03:28   좋아요 0 | URL
소유권은 인정했는데요, 일정 기간 한 곳에 산 사람들의 거주권 역시 싹 무시하지는 않고 가구 면적 당 일정 금액을 이주비 형식으로 지원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정권이 바뀌면서 서류가 복잡해지는 와중에 가끔은 합법적 소유자가 두 명 이상이 될 경우도 있어서 매우 복잡하고 긴 법정 다툼과 조정도 있었던 걸로 알고 있습니다.
 
나, 그리고 그 밖의 것들
수잔 손택 지음, 김전유경 옮김 / 이후 / 2007년 7월
평점 :
절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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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전 손택은, 1932년, 중국 톈진에서 리투아니아 유대인 밀드레드 제이콥슨 양의 태에 폴란드계 유대인이자 미국인인 잭 로젠블렛의 씨톨이 착상해, 이듬해 1월에 미국땅 뉴욕에서 수전 로젠블렛Susan Rosenblatt이라는 이름으로 태어났다. 잭 로젠블랫씨는 수전이 다섯 살이던 1937년에 지병인 결핵으로 일찌감치 숟가락 놨고, 어머니는 7년 동안 과부로 살다가 미 육군 대위 네이선 손택과 결혼해서 전남편과의 사이에서 나온 두 딸에게 ‘손택’이라는 이름을 갖게 했다. 손택 씨가 정식으로 아이들을 입양하지 않았지만 하여간 쓰겠다는데 뭐 어떻게 하겠어? 이런 개인사가 《나, 그리고 그 밖의 것들》에 다양한 방법으로 드러난다. 간혹 마구 얽힌 채로. 아버지가 미군 장교였는데 결핵에 걸려 일찌감치 죽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고, 무역에 관심이 있는데 특히 중국 골동품 수집에 관심을 쏟았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소설이라는 장르에서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다.

  손택은 에세이와 평론가로 더 알려져 있는 걸로 알고 있다. 이렇게 얘기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나는 손택의 저작에 관하여 무식하다. 자신은 스스로를 소설가로 생각했다고 하는데 그건 본인 생각이다. 어떻게 보면 사회운동가라고 부르는 게 더 정확해 보이기도 한다. 실천적인 당대의 지식인이었던 것 같다. 관심분야도 상당히 많은데 굳이 위키피디아를 베끼지 않겠다. 관심있으면 직접 검색해보시라.


  소설가라고 불리고 싶었던 작가는, 소설가로도 상당한 성과를 냈다고 이 책의 역자 김전유경은 주장하지만, 책을 읽어보니까 그냥 한 시절 반짝 한 정도 아닐까 싶다. 하늘의 숱한 별 가운데 잠깐 반짝이고 곧 사라지는 무수한 별 가운데 그냥 하나. 그러니 수전 손택이 정말 소설가이고 싶었다면, 소설 말고 에세이, 평론, 영화, 공연기획, 사진, 사회운동 등 다양한 쪽으로 열심히 활동한 것이 결과적으로 탁월한 선택이었을 것 같다. 그쪽으로 명성을 쌓는 것이 삼십 년 정도 잊히지 않는 소설가가 되는 것보다 더 쉬웠을 듯해서.

  소설집 《나, 그리고 그 밖의 것들》에 실린 여덟 편의 소설은 실험적이다. 독자들이 오해하기 쉬운 것이, 평론이나 역자가 책 뒤에 쓴 해설에 “실험적”이라고 해 놓으면, 독자는 책의 내용을 이해하지 못했거나, 이해할 수 없었던 표현을 읽고, 그것이 내가 문학적 수양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지레짐작하기 쉬운 현상이다. 천만의 말씀. 물론 그럴 수도 있지만, 만일 독자가 약간의 독서력만 있다면 대부분 이런 작품은 작가가 별 비전 없는 실험, 자기만의 방에 틀어박힌 전위에 집중하고 있어서 작가 스스로 소통을 포기하고 있기 때문이란 걸 눈치챌 수 있다.

  그럼 수전 손택의 실험 소설은? 실험을 칭하면서 속으로 그냥 자기 이야기와 주장을 펼 뿐이다. 이야기와 주장을 하기 위하여 꼭 실험적 장치가 필요할 거 같지 않은데도 불구하고. 그건 뭐 작가의 권리이니 뭐라고 할 수 없지만, 읽고나서 그게 적절한 실험이었는지 부적절한 삽질이었는지 판단하는 건 또 독자의 판단이니 작가나 평론가는 입 떼지 말라. 나는 손택의 책이 실험인지 멋부리기인지, 아니면 둘 다인지 잘 모르겠다. 속마음은 있지만 내가 미쳤냐, 어떻게 생각하는지 솔직하게 밝히게. 지구상에 손택의 열렬지지자만 모아도 서울은 모르겠고 부산 인구 정도는 될 터인데, 그이들한테 딱밤 한 방씩만 맞아도 해골 뽀사지겠다.


  처음엔 잘 읽었다. 굳이 스토리를 소개하고 싶을 정도는 아니지만 지금 무엇을 이야기하고자 하는지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자유. 개인을 통제하는 모든 외압에서의 자유. 이를테면 불문율, 종교, 도덕, 학업, 독박육아, 규제에서 벗어나는 일. 이런 걸 주장하는 걸로 읽혔는 바, 읽으면서, 이런 걸 이런 식으로 주장하려면 차라리 논문이나 연설문이나, 에세이를 쓰는 게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멈출 수 없었다. 뒤쪽으로 가면 점점 자신의 유년시절부터 웬만큼 나이든 시절까지 조금의 자전적 경험을 채용, 변형해 독자에게 구경시켜주고 있고, 자신이 1999년에 발표한 소설 <미국에서 In America>에서 불거진 표절 논란을 염두에 두었는지, ‘차용’ ‘인용’ 문제에 천착하기도 한다.

  차용, 인용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이 책을 읽기 위하여는 사실 적지 않은 서양 문학 독서량이 필요할 거 같다. 작가와 작품, 가끔가다가 작중 등장인물이 작품 속에서 툭 튀어나오는 경우가 드물지 않은데 친절하지 않은 역자 김전유경과 출판사 편집부 직원들은 지금 독자를 헛갈리게 하는, 또는 헛갈려야 마땅하다는 것도 모른 채 지나치게 하는 문구가 무엇을 인용하는지 각주를 붙여놓지 않았다.

  책 속에 <중국 여행 프로젝트>라는 단편이 있는데, 뭐 이 작품이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수전 손택은 글쓰기와 대화를 비롯한 의사소통의 유구한 역사를 만드는 핵심 요인 가운데 하나가 이미 누군가 말한 내용을 다시 가져오는 인용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특히 중국의 경우에는 인용문, 인용문이 속에 누군가의 말을 또 인용한 것이 있으니 그걸 재인용이라고 한다면, 인용과 재인용, 또다시 재인용… n번의 인용까지 가능하지만, 그건 읽는 사람이 알고 있어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러니 이미 발표한 적이 있는 구절을 조금 변형하는 정도야 뭐 당연한 거라고, 꼭 집어서 이야기하지는 않지만 그렇게 읽힌다. 책을 읽을 때는 몰랐지만 읽고나서 위키피디아 보니까 글쎄 1999년에 표절 시비가 있었지 않았겠어? 그것도 모르고, 동양사람이 공자왈, 맹자왈 하는 게 서양사람한테 뭐가 중헌디? 괜히 혼자 잠깐 궁리했지 뭐야?

  이 책 읽고 곧바로, 정말 10분도 넘지 않아 독일민주공화국 드레스덴 출신 소설가가 옛 방식으로 쓴 단편소설집을 읽기 시작했는데, 아이구, 얼마나 깔끔하게 잘 읽히는지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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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5-09-18 20:3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부산인구정도 되는 사람들에게 딱밤맞을 각오로 이런 글 쓰시는 Falstaff님 멋지십니다. ^^ 저도 손택의 팬이지만 문학은 아니던데요. ㅎㅎ

Falstaff 2025-09-19 05:18   좋아요 1 | URL
유명 작가가 쓴 작품이 마음에 들지 않을 때는 조금 곤란합니다. 읽는 팬들의 마음이 좋지 않을 테니까요. 하지만 제대로 이해도 못했으면서 이름값에 눌려 내 감상을 왜곡시킬 수는 없잖습니까. 소통은 힘들어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