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핸드폰 - 옛날 방식으로 쓴 열세 편의 이야기
잉고 슐체 지음, 노선정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1년 5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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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고 슐체. 구 동독 드레스덴에서 1962년에 출생한 임인년 범띠 아저씨. 이이의 라이브러리를 보면 1995년에 출간한 데뷔작인 <33가지 행복한 순간>으로 초장부터 독일문학의 기린아로 부상했다는데, 아직 우리나라에 번역 출간되지 않았다. 이 작품은 지금 독후감을 쓰는 《핸드폰》에 자주 인용되는 것을 보아 (데뷔작이니 당연하겠지만) 작가의 작품 세계에도 상당히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거 같다. 과장해서 말하자면 《핸드폰》에 <33가지 행복한 순간>이 101번 정도 등장한다.
나는 <새로운 인생>, <아담과 에블린> 그리고 <심플 스토리> 이렇게 세 작품을 읽어보았다. 즉 잉고 슐체를 알기 시작한 것이 겨우 10년밖에 되지 않았고 작품은 당시 구 동독 출신 작가들과 비슷하게 독일의 재통일 이후 동독 출신 사람들의 갖가지 열등감, 피해의식, 급변하는 환경 속에서 맞게 되는 혼란, 자본주의 속에서의 불안감 등에 관한 작품이었다고 기억한다. 21세기 들어 당시 동독 및 동유럽 출신 작가들이 이런 작품들을 쓰기 시작했고, 그게 우리나라에 2000년대 후반들어 본격적으로 번역되기 시작했는데, 얼핏 생각나는 사람들로 두샨 코바셰비치, 페터 슈나이더, 토마스 브루시히 등인데 우연히도 이들의 작품들이 전부 문학과지성사에서 나온 대산세계문학전집 시리즈에 들어 있다. 일일이 책장 뒤지기 싫어서 대산전집 모아 놓은 책장만 둘러봐도 이렇다는 뜻이다. 내 서재 검색하면 작품 읽고 쓴 독후감도 구경하실 수 있다.
2007년에 라이프치히 도서전 상을 받은 《핸드폰》에서는 독일 재통일 이후 구, 서독 부르주아들이 서쪽, 특히 서베를린으로 쫓겨갔지만 당시 그들의 여행가방 속에 자신들이 동쪽 베를린에서 살던 주택 등의 부동산에 대한 소유 권리증 같은 것을 챙겨 갔고, 재통일이 되자마자 이들은 통일 독일의 법정으로 몰려가 동쪽 베를린에 있는 자기 소유의 주택 등 부동산에 관한 소유권을 인정해달라는 소송을 진행했다. 우리나라도 한국전쟁 당시 비슷한 일이 있었음에도 일정 기간 거주한 사람들의 거주권이 소유권을 우선한다는 판결이 나기도 했으나, 독일은 얄짤없이 원래 소유자의 권리를 인정했다. 예니 에르펜베크의 작품 <그곳에 집이 있었을까> 같이 한 부동산이라 하더라도 정당한 절차를 걸쳐 소유권을 얻은 사람이 둘 이상인 경우도 있다. 이런 경우는 다음으로 하고, 통일 당시 주된 골치거리는, 서독에 앉아 소유권을 주장, 인정받은 집 주인이 몇십년 동안 같은 건물에 살고 있던 거주인에게 언제까지 방을 빼달라고 요구하는 일이 도처에서 벌어졌다는 거다. 이미 낡은 건물을 대대적으로 보수하거나 아예 철거해서 새로운 건물을 짓겠다는 건데, 물론 살고 있던 사람한테 적지 않은 이주비를 약속해서 많은 철거민들이 건물을 비워주기는 하지만, 특별한 이유가 있는 주민들은 끝까지 이주하지 않고 건물 안에서 버티는 일도 잦았다.
그럼 한 건물에 몇 가구 남지 않게 되고, 빈 집에는 처음엔 부랑자, 노숙인들이 점거하며 매우 불결하고 위험한 환경을 조성하기도 했다. 케이트 블란쳇이 주인공 오케스트라 지휘자 리디아 타르로 출연하는 영화 <타르>에서 타르가 린치를 당하는 건물을 기억하시나? 전형적인 베를린 구 동독의 아파트 지역이다. 가끔 이런 경우보다 나은 건물은 세계 각국의 예술인들이 거의 빈 집이라 월세가 아예 없지는 않지만 무지하게 저렴한 이런 건물에 모여 한 커뮤니티를 이루는 일도 생긴다. 그래서 한때 세계의 젊은 각종 예술인들의 집합지이기도 했다.
3부로 구성된 책 《핸드폰》의 1부 첫 작품이 <핸드폰>이다. 이 작품의 배경이 바로 동 베를린 지역이었던 한 아파트의 리모델링 작업 도중에 끝까지 버티고 이주하지 않은 가정을 그리고 있다. 서베를린 지역에 살면서 단 한 번도 자기 건물에 입주해 사는 사람 앞에 모습을 보이지 않은 건물주는 주인공 가족에게 2십만 마르크의 이주 위로금을 제시했건만, 화자 ‘나’는 그 돈 갖고 괜찮은 아파트를 얻을 수 없다고 판단했거나, 지금까지 산 아파트에 무진장 정이 들어 만일 이곳을 버리고 떠난다면 남은 평생을 끔찍한 노스텔지어 속을 헤매다 죽을 것 같거나, 그것도 아니면 조금만 버티면 2십만이 아니라 잘하면 30만 마르크도 나올 거 같아서 버텼다.
왜 버텼건 간에 세상에 자기 마음대로 되는 일은 정말로 하나도 없는 법이라서, 다행스럽게 건물을 때려부수고 다시 짓는 건 아니지만 자기 집만 내버려둔 채 나머지 빈집에서 각종 공사를 벌이느라 벽을 허물고 페인트를 벗겨내고 천장을 뜯어 버리니 세상에나, 이 건물에 그렇게 많은 쓰레기와 먼지가 쏟아질 지는 꿈에도 몰랐다. 이들은 푄 바람이 부는 뜨거운 여름에도 창문을 비닐로 여러 겹 둘러쳐 먼지가 들어오지 않게 해야 하는 건 물론이고, 하다못해 계단 내려갈 때에도 (올라올 때는 아무래도 위험이 덜한 편이니까) 발에 뭐가 밟히는지 한 발자국 내디딜 때마다 확인해야 했는데, 이게 하루이틀이면 모르겠지만 한달 두달을 넘어 한해 두해에 육박하니, 애초 건물주가 20만을 주겠다고 할 때 왜 넙죽 받지 않고 버텼느냐, 이제 부부싸움 하는 것도 넌더리가 나는 수준이다.
뭐 대강 감 잡히시지? 이런 스타일은 아까 앞에서 이름을 나열한 작가들의 작품 속에서도 다양한 모습으로 등장한다. 그러니 새롭지 않아서, 통일 이후 구 동독 출신 소설가로 혜성같이 등장한 기린아 잉고 슐체가 《핸드폰》의 부제를 무엇으로 정했느냐 하면,
“옛날 방식으로 쓴 열세 편의 이야기.”
여기서 “옛날 방식”이란 것이 언젯적 “옛날”이냐는 건데, 중세 트리스탄과 이졸데 당시도 아니고 가르강튀아도 아니고, 니벨룽겐의 노래 시절도 아니고 심지어 독일 문학의 할아버지 추밀고문관 괴테 시절도 아니라, 우리가 여전히 익숙하게 읽는 단편소설 양식인 발단, 전개, 갈등, 절정, 결말 식의 구조를 갖춘 작품을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 전공자가 아닌 내 생각이라는 뜻이다. 망신당할 수 있으니 다른 데 가서 써먹지 마시란 얘기다. 근데 이런 작품이 어제 독후감을 쓴 수전 손택, 세계적으로 명성이 떠르르한 에세이스트, 평론가, 운동가 등등의 소설보다 훨씬 읽기가 수월하고 심지어 재미있다. 물론 여기서 ‘재미’라고 해도 독일 문학이 유구한 전통을 이어온 “재미없는 독일 소설” 입장에서 재미있다고 하는 거니까 정말 재미있다고 오해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2부로 접어들면 여섯 편이 실려 있는데, 주로 여행가서 생긴 일, 본 것들과 자잘한 에피소드를 썼다. 2007년에 도서상을 받은 책이라면 이이의 나이가 겨우 마흔다섯 왔다갔다 할 텐데, 글쎄, 조금 빨리 작가의 티를 내고 있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진짜 자신이 무슨 행사를 빌미로 어떤 지역을 누구와 가서 무엇을 본 것을, 당연히 허구를 보태 자잘하거나 굵직한 에피소드를 보태 소설로 쓴 것이 많다. 자신의 생활 근처에서 글감을 발견하고 거기에 거짓을 섞어 작품을 쓴 것이 소설이지만 애초부터 나는 소설가이고, 어떤 곳에 갔고, 마치 보고서를 쓰듯 해야 했을까? 하긴 뭐 다 작가 마음이다. 그게 마음에 들지 않으면 독자는 안 읽으면 된다. 괜히 까탈 혹은 심술 부리지 말고. 기어이 끝까지 단어 하나 빼지 않고 몽땅 읽은 다음에 작가한테 심술부리는 나 같은 독자한테 뭐라 그래? 맞다, 진상. 어느새 나도 진상 독자 가운데 한 명이 되었는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렇게 되지 않기에는 내가 너무 오래 이이의 작품들을 좋아했는지도 모른다.
또다시 잉고 슐체의 작품이 번역되어 시장에 풀린다면 나는 여전히 기꺼운 마음으로 그의 책을 선택할 것이다. 물론 구입하는 대신 도서관에 희망도서신청을 하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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