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울의 책 민음사 외국문학 M
E. O. 키로비치 지음, 이윤진 옮김 / 민음사 / 2017년 9월
평점 :
절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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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작 드라큘라의 고향 루마니아 트란실바니아의 남쪽, 퍼거라슈라는 작은 마을에서 1964년에 태어난 용띠 남자. 집안 족보가 조금 현란해서 루마니아-헝가리-독일 핏줄이 골고루 섞인 DNA를 타고났는데, 아다시피 특히 포유류의 경우에는 여러 형질이 복합될수록 보다 우월한 결과물이 탄생하는 경우가 많아, 키로비치 역시 일찍이 부쿠레슈티 대학에서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일간지와 TV 방송국 등에서 다방면에서 활동하다가 1991년 첫번째 장편소설 <대학살>을 발표해 일약 스타덤에 오르는 기염을 토한다. 루마니아에서 열 편의 범죄, 서스펜스 소설을 발표한 후 2012년에 영국으로 터를 옮겨 첫번째 영어 장편소설 <거울의 책>을 발표해 단숨에 세계적 대중 소설 작가의 반열에 올랐다.

  무슨 말씀이냐 하면, 이 책이 루마니아 태생의 작가가 쓴 소설로 분류되어, 하필이면 도서관 서가 889번, 동유럽 도서 가운데 자리를 잡고 있어서 나로 하여금 오랜 세월 소비에트 연방의 종속국 일원이었던 동유럽 문학 특유의 정서를 기대하게 만들었으나, 결론은 버킹검, 미국 뉴저지주 프린스턴 대학 인근에서 발생한 저명한 독신 심리학 교수의 피살 사건을 다룬 범죄, 추리 소설이었다. 물론 루마니아에서 나서 반백년 가까이 루마니아에서 산 키로비치가 뉴저지와 뉴욕을 무대로 한 추리물을 근사하게 썼다는 게 기념할 만하고, 얼마나 그럴 듯했느냐 하면 이 작품을 각색해 영화 <슬리핑 독>을 찍기도 할 정도였는데, 읽는 동안 즐긴 건 맞지만, 애초에 기대했던 ‘루마니아 작품’은 아니어서, 루마니아 출신 작가를 읽으려 했던 기대와 달라, 약간, 아주 조금, 이게 뭥미, 했던 거였다. 뉴욕을 무대로 하는 범죄, 추리물은 굳이 루마니아 출신 작가가 쓴 작품이 아니더라도 무지하게 많아서. 얼마 전 세상을 뜬 폴 오스터를 필두로 해서 말이지.


  30년 전에 프린스턴 대학 심리학과에 세계적으로 이름이 난 조지프 와이더 교수가 재직하고 있었다. 1987년에 사건이 생기기 전까지 와이더 교수는 프린스턴의 거장들 가운데 한 명으로 가히 프로메테우스 같은 존재, 즉 춥고 아둔한 인류에게 불을 가져다 준 영웅 비슷한 숭앙을 받았다는 말이다. 당연히 이런 평가는 심리학과와 심리학 관련 학과의 학생들의 것이었 뿐, 그만큼 동료, 경쟁자, 아무 상관 없지만 질투심 많은 다른 전공 교수한테는 질시와 미움의 적일 수도 있었겠지?

  이이의 제자 가운데 로라 베인스라는 이름의 여학생이 있었다. 학생이면 그냥 학생이지 뭐하러 ‘여학생’이라고 성별을 밝히느냐고? 프린스턴 대학은 주로 미국의 동해안, 그러니까 대서양에 인접한 도시 출신으로 어려서부터 영어유치원을 비롯해 국영수 특별과외를 망라할 수 있는 중산층 이상의 자제들이 주로 입학한 학교였는데(빌어먹을 수시 입학 전형이라니), 로라 베인스는 (동부 출신이 듣기에)중부 사투리를 유창하게 구사하는 지방 출신이었지만 큰 키와 늘씬한 외모, 굽슬굽슬한 헤어 스타일의 전형적 미인이면서, 조지프 와이더 교수의 총애하는 수제자였던 바였다. 어려서부터 육상과 수학에 두각을 나타냈던 고등학교 시절 약간 천재과에 속했다. 뜀박질을 유난히 잘 했으나 나이가 어정쩡해 곧 있을 올림픽에 미국 대표로 선발하기에는 조금 모자랐고 4년 후 다음 올림픽 때에는 전성기가 지날 것 같아, 이름을 내지 못하고 그냥 즐기기 위해 뜀박질을 하는 건 전혀 의미가 없어서 육상은 포기했다. 대신 수학으로 말할 거 같으면, 세계 수학 올림피아드에 연속 출전해서 출전할 때마다 따박따박 입상을 했으며, 프린스턴에 오기 전에 시카고 대학에서 이미 수학 석사 학위를 딴 상태였다. 그러다가 심리학에 관심을 두어 저명한 와이더 교수에게 석사 입학 신청을 했고, 와이더 교수가 입학 허가는 물론이고 수학적 자질을 높이 사 유난히 총애하기에 이르렀다. 심지어 뉴저지 인근의 자기 저택에도 무시로 출입할 수 있는 복제 열쇠를 줄 정도이니 로라를 처음 칭할 때 ‘여학생’이라 칭함이 마땅하지 않겠느냐 하는 거다. 맞지? 필립 로스를 필두로 여러 작품 속에 이 비슷한 이야기 나온다. 그럼 <거울의 책>에서 대학원생 로라 베인스와 조지프 와이더 교수도? 안 알려줌.


  작품은 1987년 가을, 영문과 혹은 문창과 대학원생인 리처드 플린이 살고 있는 2인용 숙소의 빈 방에 로라 베인스가 입주하면서 시작한다. 1부는 창작으로 포기한 리처드 플린이 오랜 세월 광고 에이전시에 다니다가 어떤 계기가 생겼는지 1987년에 있었던 비극적인 사건을 실명 그대로 소설로 쓴 것이 큰 줄거리다. 그리하여 1부는 리처드 플린의 일방적 주장이라고 생각해야 마땅하다. 실제로 리처드와 리처드보다 서너 살 많은 로라가 서로 진심으로 사랑을 했고, 그리하여 당연히 수시로, 시간 날 때마다 훌떡 벗고 섹스를 했는지는 읽는 사람이 이해하기 나름이다. 그러나 당연히 1부가 끝나고 2부에 접어들어 웬만큼 진도가 나가기 전까지 독자는 리처드 플린의 주장이 사실일 거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어서, 2부 이후에 로라 웨스트레이크로 이름을 바꾼 로라 베인스가 서로 사랑한 적도, 섹스한 적도 없다고 주장할 때 미국 심리학계에서 큰 명성을 쌓은 로라의 주장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게 만든다.

  그러니까 쉽게 말해서 작품 속 등장인물의 주장을 책이 끝나는 순간까지 믿지 말라는 거다. 다 자기 입장에서, 자기가 기억하는 근 30년 전 사건에 대하여 진술할 뿐이니까. 거기다가 당연히 의도적인 거짓말까지 보태서 말이지.

  예를 들어 1969년 7월에 아폴로 11호를 타고 달에 도착해 닐 암스트롱이 첫 인류의 발자국을 찍은 TV 생방송을 봤다, 라고 하면, 이게 어디까지 진실일까? 아직 열 살을 꽉 채우지 못한 나는 분명이 TV 브라운관으로 흑백으로 송출 받은 화면을 본 기억이 있다. 이게 7월 20일 혹은 날짜 변경선 때문에 21일에 있었던 닐 암스트롱의 달 착륙 생방송이었을까? 아니면 역사적 사건이니 만큼 이후 줄기차게 재방송한 화면의 한 순간이었을까? 이때 공포한지 얼마 되지 않아 외우지 못하면 담임선생이 회초리로 손바닥을 때리던 국민교육헌장을 달달 외우고 있었을까? 염병할 국민교육헌장 때문에 손바닥을 맞지 않은 건 확실하지만 달 착륙 화면은 진짜 암스트롱이 달에 내렸을 때인지, 이후 재방송인지 모르겠다. 마찬가지로 <거울의 책>에 등장하는 진술인들은 전적으로 자기 주장에 의하여 30년 전의 사건을 진술할 뿐 아무도 진실 여부를 보증할 수 없다.

  리처드 플린이 아름다운 대학원생 누나이자 훗날의 저명한 심리학자 로라 웨스트레이크, 30년 전의 로라 베인스와 서로 진하게 사랑했으며, 로라는 동시에 자신의 지도 교수인 미혼남자 조지프 와이더와도 깊은 사이여서 그것을 심하게 질투했다는 것을 다중에게 증언하지 못하고 암에 걸려 죽고 만다. 그러니까 1부의 주된 내용, 리처드 플린이 죽기 전에, 이 사건에 대한 소설을 쓰지 못하면 차마 눈을 감지 못할 거 같아서 말 그대로 죽을 힘을 다 해 쓰고 곧바로 죽어버린 소설, 그것도 완결판이 아니라 1부 격에 해당하는 분량을 읽은 피터 카츠라는 이름의 출판 에이전시가 완결편을 찾거나, 그게 안 된다면 전직 기자였던 존 켈러에게 뒷부분을 이어 쓰게 만들어 책을 출판하고 싶어하면서 자연스럽게 사건을 파헤치게 된다. 그리고 켈러의 사건 추적은 사건 당시 관계 형사였던 은퇴한 전직 경찰 로이 프리먼이 결국 사건을 30년 만에 해결하면서 대단원을 맞는다. 물론 대단원 이후에 전혀 쓸데없는 에필로그가 첨부되긴 하지만.


  그러면 도대체 어떤 사건이냐고? 좋다. 아주 드물게 화끈하게 알려드린다.

  1987년, 주식시장은 곤두박질치고, 이란 콘트라 사건으로 레이건 대통령의 자리가 흔들거리던 해의 마지막 기간, 12월 21일. 미국은 연말 크리스마스 시즌을 앞두고 조금은 들뜬 상태였으며, 다양한 인종과 관습이 뒤섞인 바빌론과 비슷한 상태인 프린스턴 대학가도 마찬가지였는데 그날과 22일 사이에 프린스턴 대학의 저명한 심리학과 교수 조지프 와이더는 자신의 저택 안에서 야구 배트로 뒤통수를 얻어맞았고, 이 와중에도 범인에게 저항하려다 두 팔의 뼈까지 부러지는 부상을 당한 채로 죽음을 맞았다. 집안에는 서랍 등을 뒤진 흔적이 있지만 바닥에 널린 문서를 제외하고는 팔목에 찬 고가의 손목시계와 손가락의 보석 반지와 서랍 속 현금 같은 건 일체 없어지지 않았음에도 사건은 침입한 강도에 의한 살인으로 발표되고, 끝내 범인이 누구인지 모른 채 미제 사건으로 종결하고 만다.

  30년이 흐른 후, 이 소설을 영화로 만든 <슬리핑 독스>에선 백인인 러셀 크로우가 연기하지만, 은퇴한 흑인 형사 로이 프리먼이 끝내 범인을 찾아내니까 완벽한 종결이라 할 수 없기는 하다. 이게 결말이다. 당연히 누가 범인인지는 밝힐 수 없다. 재미있는 작품이다. 그러나 앞에서 말했듯이 내가 이 책을 선택할 때 기대했던 “루마니아 출신 소설가”의 스타일이 아니라서 조금 그랬지만.

  이 책의 본문이 472페이지에서 끝난다. 근데 재미있는 스토리라 훌훌 넘어가는 것도 있지만, 하도 신묘한 경지의 조판 때문에 순식간에 다 읽어버릴 수 있다. 한 페이지에 큰 글자체로 열아홉 줄밖에 담지 않아 절대 활자 수가 적기도 하다. 나는 이런 조판이 싫다. 그저 페이지 수 늘리느라 열일 하는 출판사가 곱게 보이지 않는다. 이거 내가 꼰대가 되어 그런 거 맞지? 아마존 열대 우림도 좀 살리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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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돌이 2025-09-23 09: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슬리핑 독스>를 얼마 전에 봐서인지 반갑네요. 러셀 크로우의 연기도 좋고 잘 봤어요. 저는 줄거리에서 큰 의미는 없지만 러셀 크로우가 술을 들이키는 장면이 꽤 인상 깊더라고요! 참고 참다가 마신 자의 그 표정이 너무 리얼해서요.ㅎㅎ 책으로 보면 역시 더 다채롭고 재밌을 것 같네요!

Falstaff 2025-09-24 03:46   좋아요 1 | URL
책에서는 여주인공 로라가 매력적이더라고요. 팜파탈이라고 볼 수도 있는데 대개 팜파탈이 죽여주긴 하잖아요. ㅎㅎㅎ

카스피 2025-09-23 17: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흠,역시 자본주의 논리탓인지 아무래도 판매를 위해서는 루마니아작가도 역시나 미국을 배경으로 해야하니 좀아쉅네요

Falstaff 2025-09-24 03:46   좋아요 0 | URL
이것도 쓰고, 저것도 쓰고 그러는 것이겠지요.

꼬마요정 2025-09-24 10:4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 재밌겠습니다. 루마니아 배경 궁금한데 미국이라니… 나름 익숙하겠어요. 재밌겠습니다. ㅎㅎㅎ

Falstaff 2025-09-24 16:12   좋아요 1 | URL
아오, 재미만 가지고 얘기하자면 정말 좋습니다. 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