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그리고 그 밖의 것들
수잔 손택 지음, 김전유경 옮김 / 이후 / 2007년 7월
평점 :
절판


.

  수전 손택은, 1932년, 중국 톈진에서 리투아니아 유대인 밀드레드 제이콥슨 양의 태에 폴란드계 유대인이자 미국인인 잭 로젠블렛의 씨톨이 착상해, 이듬해 1월에 미국땅 뉴욕에서 수전 로젠블렛Susan Rosenblatt이라는 이름으로 태어났다. 잭 로젠블랫씨는 수전이 다섯 살이던 1937년에 지병인 결핵으로 일찌감치 숟가락 놨고, 어머니는 7년 동안 과부로 살다가 미 육군 대위 네이선 손택과 결혼해서 전남편과의 사이에서 나온 두 딸에게 ‘손택’이라는 이름을 갖게 했다. 손택 씨가 정식으로 아이들을 입양하지 않았지만 하여간 쓰겠다는데 뭐 어떻게 하겠어? 이런 개인사가 《나, 그리고 그 밖의 것들》에 다양한 방법으로 드러난다. 간혹 마구 얽힌 채로. 아버지가 미군 장교였는데 결핵에 걸려 일찌감치 죽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고, 무역에 관심이 있는데 특히 중국 골동품 수집에 관심을 쏟았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소설이라는 장르에서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다.

  손택은 에세이와 평론가로 더 알려져 있는 걸로 알고 있다. 이렇게 얘기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나는 손택의 저작에 관하여 무식하다. 자신은 스스로를 소설가로 생각했다고 하는데 그건 본인 생각이다. 어떻게 보면 사회운동가라고 부르는 게 더 정확해 보이기도 한다. 실천적인 당대의 지식인이었던 것 같다. 관심분야도 상당히 많은데 굳이 위키피디아를 베끼지 않겠다. 관심있으면 직접 검색해보시라.


  소설가라고 불리고 싶었던 작가는, 소설가로도 상당한 성과를 냈다고 이 책의 역자 김전유경은 주장하지만, 책을 읽어보니까 그냥 한 시절 반짝 한 정도 아닐까 싶다. 하늘의 숱한 별 가운데 잠깐 반짝이고 곧 사라지는 무수한 별 가운데 그냥 하나. 그러니 수전 손택이 정말 소설가이고 싶었다면, 소설 말고 에세이, 평론, 영화, 공연기획, 사진, 사회운동 등 다양한 쪽으로 열심히 활동한 것이 결과적으로 탁월한 선택이었을 것 같다. 그쪽으로 명성을 쌓는 것이 삼십 년 정도 잊히지 않는 소설가가 되는 것보다 더 쉬웠을 듯해서.

  소설집 《나, 그리고 그 밖의 것들》에 실린 여덟 편의 소설은 실험적이다. 독자들이 오해하기 쉬운 것이, 평론이나 역자가 책 뒤에 쓴 해설에 “실험적”이라고 해 놓으면, 독자는 책의 내용을 이해하지 못했거나, 이해할 수 없었던 표현을 읽고, 그것이 내가 문학적 수양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지레짐작하기 쉬운 현상이다. 천만의 말씀. 물론 그럴 수도 있지만, 만일 독자가 약간의 독서력만 있다면 대부분 이런 작품은 작가가 별 비전 없는 실험, 자기만의 방에 틀어박힌 전위에 집중하고 있어서 작가 스스로 소통을 포기하고 있기 때문이란 걸 눈치챌 수 있다.

  그럼 수전 손택의 실험 소설은? 실험을 칭하면서 속으로 그냥 자기 이야기와 주장을 펼 뿐이다. 이야기와 주장을 하기 위하여 꼭 실험적 장치가 필요할 거 같지 않은데도 불구하고. 그건 뭐 작가의 권리이니 뭐라고 할 수 없지만, 읽고나서 그게 적절한 실험이었는지 부적절한 삽질이었는지 판단하는 건 또 독자의 판단이니 작가나 평론가는 입 떼지 말라. 나는 손택의 책이 실험인지 멋부리기인지, 아니면 둘 다인지 잘 모르겠다. 속마음은 있지만 내가 미쳤냐, 어떻게 생각하는지 솔직하게 밝히게. 지구상에 손택의 열렬지지자만 모아도 서울은 모르겠고 부산 인구 정도는 될 터인데, 그이들한테 딱밤 한 방씩만 맞아도 해골 뽀사지겠다.


  처음엔 잘 읽었다. 굳이 스토리를 소개하고 싶을 정도는 아니지만 지금 무엇을 이야기하고자 하는지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자유. 개인을 통제하는 모든 외압에서의 자유. 이를테면 불문율, 종교, 도덕, 학업, 독박육아, 규제에서 벗어나는 일. 이런 걸 주장하는 걸로 읽혔는 바, 읽으면서, 이런 걸 이런 식으로 주장하려면 차라리 논문이나 연설문이나, 에세이를 쓰는 게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멈출 수 없었다. 뒤쪽으로 가면 점점 자신의 유년시절부터 웬만큼 나이든 시절까지 조금의 자전적 경험을 채용, 변형해 독자에게 구경시켜주고 있고, 자신이 1999년에 발표한 소설 <미국에서 In America>에서 불거진 표절 논란을 염두에 두었는지, ‘차용’ ‘인용’ 문제에 천착하기도 한다.

  차용, 인용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이 책을 읽기 위하여는 사실 적지 않은 서양 문학 독서량이 필요할 거 같다. 작가와 작품, 가끔가다가 작중 등장인물이 작품 속에서 툭 튀어나오는 경우가 드물지 않은데 친절하지 않은 역자 김전유경과 출판사 편집부 직원들은 지금 독자를 헛갈리게 하는, 또는 헛갈려야 마땅하다는 것도 모른 채 지나치게 하는 문구가 무엇을 인용하는지 각주를 붙여놓지 않았다.

  책 속에 <중국 여행 프로젝트>라는 단편이 있는데, 뭐 이 작품이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수전 손택은 글쓰기와 대화를 비롯한 의사소통의 유구한 역사를 만드는 핵심 요인 가운데 하나가 이미 누군가 말한 내용을 다시 가져오는 인용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특히 중국의 경우에는 인용문, 인용문이 속에 누군가의 말을 또 인용한 것이 있으니 그걸 재인용이라고 한다면, 인용과 재인용, 또다시 재인용… n번의 인용까지 가능하지만, 그건 읽는 사람이 알고 있어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러니 이미 발표한 적이 있는 구절을 조금 변형하는 정도야 뭐 당연한 거라고, 꼭 집어서 이야기하지는 않지만 그렇게 읽힌다. 책을 읽을 때는 몰랐지만 읽고나서 위키피디아 보니까 글쎄 1999년에 표절 시비가 있었지 않았겠어? 그것도 모르고, 동양사람이 공자왈, 맹자왈 하는 게 서양사람한테 뭐가 중헌디? 괜히 혼자 잠깐 궁리했지 뭐야?

  이 책 읽고 곧바로, 정말 10분도 넘지 않아 독일민주공화국 드레스덴 출신 소설가가 옛 방식으로 쓴 단편소설집을 읽기 시작했는데, 아이구, 얼마나 깔끔하게 잘 읽히는지 말이지.


.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바람돌이 2025-09-18 20:3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부산인구정도 되는 사람들에게 딱밤맞을 각오로 이런 글 쓰시는 Falstaff님 멋지십니다. ^^ 저도 손택의 팬이지만 문학은 아니던데요. ㅎㅎ

Falstaff 2025-09-19 05:18   좋아요 1 | URL
유명 작가가 쓴 작품이 마음에 들지 않을 때는 조금 곤란합니다. 읽는 팬들의 마음이 좋지 않을 테니까요. 하지만 제대로 이해도 못했으면서 이름값에 눌려 내 감상을 왜곡시킬 수는 없잖습니까. 소통은 힘들어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