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너리티 오케스트라 1
치고지에 오비오마 지음, 강동혁 옮김 / 은행나무 / 2019년 11월
평점 :
절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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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름이 극에 달하던 8월 중순에 <어부들>을 그래도 괜찮은 심정으로 읽어서, 치고지에 오비오마를 한 작품 정도 더 읽어보기로 했었다. 오비오마가 데뷔작으로 쓴 <어부들>로 부커상 최종심까지 올라갔으니 좋은 떡잎을 가졌다고 보고, 몇 년 후에 다시 부커상 최종심까지 기껏 기어 올라갔다가 한 번 더 미역국 벌컥벌컥 마신 <마이너리티 오케스트라>도 뭔가가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던 게 더 솔직한 심정이었겠지. 그리하여 가을 바람 살랑살랑 불어, 내내 입고 다니던 반바지 벗어 빨아 옷장 속에 처박은 9월, 3일에 걸쳐 <마이너리티 오케스트라> 두 권을 읽었다.

  마이너리티 오케스트라. 가련한 것들, 약자들의 합동 울음. 할 수 있는 것이 우는 거밖에 없어서 집단으로 엉엉 우는 거. 이걸 마이너리티 오케스트라라고 제목으로 정했다. 일단 제목부터 조금 궁상스러우니 어떤 방식으로 궁상스러울지 이것도 궁금하다.


  나는 치누아 아체베가 쓴 <모든 것이 산산이 부서지다>에서 처음 ‘치’라는 것을 보았다. 이 치가 나이지리아의 독자 토속 믿음/종교에만 있는지, 사하라 이남의 서쪽 아프리카 전역에 걸친 토속 믿음/종교에 다 있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야 지야시의 빼어난 소설 <밤불의 딸>에서 7대 3백년에 걸쳐 내려오는 가나 여인의 정체성 같은 것도 일종의 ‘치’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도 같아서 해 본 생각이다.

  아체베의 치는 벌써 읽은 지 오래여서 ‘치’라는 것이 있다는 걸 기억하는 수준이라 더 할 말 없다. 오비오마의 <마이너리티 오케스트라>를 읽어보니 이 ‘치’라는 것이 거의 모든 사람에게 깃든 일종의 영spirit이라고 볼 수 있겠는데, 생각보다 자기가 깃든 사람에게 큰 영향을 주지 못한다. 즉, 몸의 주인이 특정 행위를 한다고 결정을 했는데, 이걸 치가 보기에 합당하지 않아 더 좋은/나은 방식의 행위를 하자고 제안을 해도, 주인이 결정을 바꾸지 않기로 했다면 치도 더 이상 방법이 없다는 거다. 그러니까 주인의 의지의 하위 단계에 있는 정도이다. 그저 사람이 가지고 있는 선하고, 합당하고, 제일 좋은 결과를 맺을 수 있는 선택의 가능성을 보는 일, 이 비슷한 걸 ‘치’라고 말할 수 있을까? 아다시피 인간은 최악 비슷하게 좋지 못한 결과를 낼 뿐인 나름대로 최선의 선택을 하면서 사는 법이다. 왜 그럴까? ‘치’의 말 또는 권고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기 때문에. 뭐 이 정도로 넘어가자.

  하나의 치는 한 사람에게만 속하지 않는다. 사람이 죽으면 망자가 나면서부터 죽을 때까지의 모든 경험을 가지고 그를 떠나 잠깐 신계에 들어갔다가, 최고의 신 추쿠의 결정으로 다른 사람의 영 속으로 들어간다. 일종의 윤회를 하는 셈이다. 그리하여 이 책에서도 화자이자 주인공 치논소 솔로몬 올리사의 치는 천년이 넘는 시간 동안 숱한 사람의 영 속에 있었던 치라서, 모든 경험을 통해 이 지역과 토속 종교의 범위 안에서 가장 현명한 선택을 할 수 있는 지혜를 가졌다고 봐도 무방하다. 그러니까 일종의 전지적 관찰자 시점의 역할을 치가 하고 있다. 이 치가 큰 수역인 이모강江변 아버지들의 땅에 있는 우무아히아 부근의 이보족 영들의 세계인 에그부누의 법정에서 길고 길게 진술하는 내용이 이 책의 전문이다. 따라서 진술문이라고 볼 수 있으니 역자 강동혁은 모두 존대어를 사용했다.


  치논소 솔로몬 올리사. 보통 ‘치논소’라 하고, 친한 사람끼리는 ‘논소’라 불리는 주인공은 고아다. 논소의 어머니는 여동생 은카루를 낳다가 죽었고, 아버지는 8개월 전에 세상을 떴다. 아직도 어린 은카루는 밤을 틈타 나이든 남자와 함께 도망해 도시에 가서 살며 그저 아주 가끔 카드 같은 것만 한 장 보내온다. 논소는 완전히 혼자다. 초등학교 시절에는 몸도 크고, 힘도 좋아 여러 친구들과 어울려 놀기도 하고, 어린이들의 나쁜 습관도 있어서 몸이 약한 자미케 같은 아이들을 괴롭히기도 했지만 사춘기를 지나면서 내성적인 성격으로 굳어져, MASSOB 비아프라 주권국가 실현운동에 적극적으로 가담한 ‘엘로추쿠’라는 친구 딱 한 명이 있을 뿐이다.

  논소는 농부다. 닭도 친다. 나름대로 수십 마리의 닭을 정성스레 돌본다. 그래서 책의 표지를 새의 깃털로 장식해 놓은 거다. 지금도 닭을 친다는 건 아니고, 논소의 치가 에그부누의 법정에서 진술하기 7년 전에 그랬다는 거다. 그러니까 이 작품은 논소가 7년간 살아온 삶의 궤적을 보여주는 일이다.

  7년 전, 논소는 농장의 비품을 보충하기 위하여 밴을 타고 근처 읍내수준인 에누구에 갔다. 그곳 닭시장에서 비품 몇 품목과, 자기 인생을 바꾸어 놓은 새끼 거위와 거의 비슷하게 희고 눈부신 깃털의 수탉을 포함해 닭 여덟 마리도 사 짐칸에 싣고 다니는 닭장에 넣었다. 자기 인생을 바꾸어 놓은 새끼 거위? 궁금하지? 작가가 보기에 그렇다는 뜻이고 처음에야 조금 의미가 있지 뭐 그냥 그러니까 넘어가자. 하여간 시장에서 볼일을 다 보고 돌아오는 길에는 벌써 어두컴컴해졌다. 엉망진창인 도로를 조심해서 운전해 이모강의 지류인 아마투강변 상점에서 바나나 한 다발과 파파야와 귤 한 봉지를 더 사고 다시 출발해 슬슬 오던 길에 아마투강 다리 난간에 누가 올라 있는 걸 봤다.

  논소는 즉각 차에서 내려 여자에게 접근했다. 더 가까이 가면 정말로 다리에서 뛰어내릴 수도 있을 거 같아 몇 발짝 앞에 서서, 그러지 마세요, 제발 그러지 마세요, 외쳤다. 논소는 이 순간, 여자의 얼굴에서 깊은 고난의 흔적을 발견했던 거다. 이제 마음이 급하게 된 논소. 그는 자기 차로 급하게 돌아가 닭 두 마리를 꺼내 들고 다시 다리에 접근했다.

  어떻게 되나 보세요. 당신이 이 다리에서 뛰어내리면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는 두 손을 번쩍 들어 닭 두 마리를 강으로 힘껏 던졌고, 닭이 아무리 날갯짓을 해도 결국 아마투강의 급류에 휩쓸려 몇 번 빙글빙글 돌더니 사라져 버렸다.

  이렇게 끝나고 마는 거예요. 아무것도 남지 않아요.

  여자, ‘은달리’는 마음이 바뀌어 논소에게 고마움을 표하고 자기 도요타를 몰고 사라졌다.

  논소가 이때 강 속으로 집어 던진 닭 가운데 한 마리가 바로 “양털처럼 흰 수탉”이 포함되어 있었다. 아까웠겠지? 그래서 즉각 밴을 타고 다리로 가서 강변을 뒤져보았지만 찾은 건 벌써 파리가 꼬이기 시작한 털 빠진 죽은 닭뿐이었다.


  이렇게 사랑의 씨앗이 눈을 튼다. 넉달 후에 겨우 다리 위 여자에 대한 환상에서 벗어나 일상의 행복의 가능성을 발견할 즈음, 유일한 친구 엘로추쿠를 따라 우정상 MASSOB 행진에 참여해 걷다가 운명의 여자와 상봉하고, 다시 만날 약속을 하고, 자기 목숨을 그리 열성적으로 구해주었으니 어찌 사랑의 감정이 생기지 않았으랴, 둘은 금방 사랑에 빠져, 사랑을 만들고, 소위 사랑을 나누게 된다. 즉 할 거 다 했다는 거지 뭐.

  나이지리아. 나이든 사람은 결혼을 해야 하는 게 당연한 시대. 둘이 정식으로 만나기 한두 달 전에 논소는 삼촌한테 결혼을 하라는 말을 이미 들었다. 그래서 결혼 이야기를 꺼냈건만, 사랑하는 은달리는 좀체 확실한 대답을 하지 않는다. 논소가 자신을 부모와 친척에게 보이기 싫을 만큼 누추해서 그런 것 아니냐 항의했고, 그래서 은달리는 자기 가족과의 만남을 주선한다.

  이보족이라고 같은 이보족이 아니다. 비아프라 전쟁 당시 동지의 자식들이라고 하지만 평등, 같지 않다. 세상이 그렇게 공평해? 천만의 말씀. 은달리는 족장의 딸. 우무아히아는 물론이고 수도 아부자까지 이름을 떨치는 부르주아 계급. 이런 집안의 딸이 닭 수십 마리를 치는 농부와 결혼을 해? 할 수도 있겠지. 근데 그걸 쉽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이때 논소의 나이가 20대 초중반, 한 스물넷 됐을까 싶은데, 하긴 그 나이에 안 될 것도 없긴 하다. 은달리도 또래니까 역시 안 될 일 없는 시기. 이미 한 새끼와 연애를 했고, 그 남자가 자기를 버리고 영국으로 도망친 바람에 실연의 깊은 고통을 겪은 상태라 이번에 맺은 인연까지 놓치고 싶지 않은 보상심리도 있었을 터. 논소와의 결혼을 위하여 할 수 있는 모든 걸 해볼 모양이었다.

  은달리가 논소에게 말하기를, 가난? 그건 문제가 안 된단다. 자기 집이 워낙 부자라서 그깟 땅 수만 평을 사주면 한 방에 대농장의 주인이 될 수 있으니. 별 거 없는 집안? 처가가 막강해서 반쪽 친척만 가지고도 비까번쩍하다. 그럼 뭐가 중헌디? 논소가 중졸이라는 거. 이건 대책이 없는 거라고. 은달리는 대학에서 약학을 전공하고 있고, 대학원 과정은 유럽에서 마칠 예정인데, 중졸 남편은 집안에서도, 친척한테도, 부르주아 커뮤니티 안에서도 받아들일 수 없는 것. 그럼에도 은달리는 스스로 그 빌어먹을 커뮤니티에서 뛰쳐나와 결혼을 하겠다는 심정이었다. 그러나 이 말은 들은 논소는 절망한다. 절망하고 또 절망해서 은달리를 만나면 하릴없이 다양하고 격하고 슬픈 섹스만 나눌 뿐.


  이때 논소의 눈앞에 나타난 은인 비슷한 잃어버린 친구. 잊고 살았던 친구 자미케. 작은 키에 퉁퉁한 몸집의 자미케는 작가 오비오마처럼 키프로스에서 대학에 다니고 있단다. 키프로스는 유럽과 터키 중간 정도이고, 좋은 일자리가 넘치고 넘쳐서, 일을 하며 대학에 충분히 다닐 수 있다. 공부만 따라가면 유럽의 대학으로 전학을 가던지, 대학원 과정을 유럽에서 할 수도 있다. 자미케의 말에 의하면 그렇다. 논소는 은달리를 놀라게 해주고 싶었다. 별 문제없이 은달리와 결혼하고 싶은 마음에 땅과 집과, 닭을 모두 팔아 돈을 마련한 논소는 자미케를 통해 1년치 대학 등록금을 납부하고, 기숙사 비용도 지불하고, 키프로스에서의 생활을 위하여 키프로스 은행 계좌를 열고 4천 파운드를 예금했다.

  그리고 이를 은달리에게 말한다. 떠나겠다고. 돌아오자마자 결혼하는 거라고. 은달리는 적극적으로 말리지만 결국 떠나보낼 것임을 알고, 처음으로 논소에게 질내 사정을 허용한다. 독자는 팍, 알아차리지. 은달리가 논소의 아이를 낳겠구나. 아이를 만드는 걸 보니까 논소는 키프로스인지 터키인지에 가서 고생만 오지게 하고 오겠구나. 그리고 이런 불길한 생각은 언제나 들어 맞는다.

  당연히 2부에서 이어지는 본격적인 논소의 불행은 친절한 자미케에서 시작한다. 천부적인 사기꾼. 자미케 때문에 누구는 거지가 되어 나이지리아에 돌아오지도 못한 채 오늘도 키프로스의 황야를 걷고 있다. 누구는 살기 위해 범죄를 저질러 터키 감옥에 갇혀 있고, 누구는 심지어 스스로 목숨을 끊어버리고 말았다. 그걸 논소는 모른다. 하지만 논소의 ‘치’는 안다. 저 멀고 먼 어린 시절, 몸이 약한 뚱보 자미케를 심심풀이로 괴롭히고 때린 논소로 하여금 세상을 저주할 이유를 얻은 자미케라는 것을.

  이렇게 1부는 흥미진진하고 재미있고, 사실 이게 중요한데, 좀 야하게 진행해서 만족한 상태로 2부를 읽게 만들지만, 아이고, 키프로스에서의 고생담이 너무 징글징글맞아 곱게 늙은 나는 학을 질렸다는 얘기 아냐? 물론 그건 내 경우일 뿐, 극점으로 치닫는 묘사를 좋아하시는 분들은 무릎을 칠 수도 있으리. 다 복골복이다. 책을 읽고 자신과 맞고 안 맞고는.

  “마이너리티 오케스트라”가 무엇인지 더 얘기하고 싶지만 독후감이 너무 길어졌다. 1권 134~135페이지에 잘 설명되어 있으니, 도서관 가서 책 찾아 읽으실 분은 직접 확인하시는 것이 좋겠다. 이 책은 품절도 아니고 절판이다. 읽으려면 헌책방이나 도서관을 선택하시라.


  그래도 이 말은 해야겠다. 명색이 제목을 “마이너리티 오케스트라”라고 했으면 약자, 빈자, 무식자를 위한, 무식자에 의한 작품이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작품 내내 약자처럼 보이는 논소는 사실 나이지리아 전 국민의 입장에서 보면 땅과 농장과 집을 가진 중산층이다. 여주인공 은달리에 비해 약자로 보일 뿐이다. 그리하여 마이너리티 오케스트라의 핵심은 계급간 갈등의 효과적으로 제거하는 방법으로 가야 할 것인데, 화자인 논소의 ‘치’는 논소의 신분을 이렇게 말한다.

  “누구나 제 주인이 걸출한 사람들의 가문에 속한다는 것을 즉시 알아차릴 것입니다. (중략) 그는 무슨 과일처럼 나무에서 떨어진 사람들과 같은 등급이 아닙니다! (후략)” (2권 p.126)

  이거 뭥미? 논소 자신이 걸출한 인물이다, 걸출한 사람들을 배출한 가문은 따로 있으며, 보통 사람하고는 애초에 다른 등급의 인간이라는 얘기지? 뭐 이런 후진 치가 있나 그래. 사람들의 집단에서 다른 집단보다 더 ‘훌륭하고 높은’ 등급 또는 계급, 혹은 핏줄이 존재한다는 뜻이지? 어이가 없네.

  말로만 마이너리티 어쩌고 저쩌고 동동 뜨더니, 속은 여전히 봉건제에서 벗어나지 못했네. 누가? 누구기는 누구야, 작가 치고지에 오비오마자. 아니더라도 이 발언의 모든 책임은 작가가 져야 마땅하지.

  근데, 작가가 독자로 하여금 이런 생각을 하게 유도했는지도 몰라. 그러니 직접 읽어보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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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를 도모하는 방식 가운데
김엄지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5년 11월
평점 :
품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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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편소설 아홉 편을 실은 소설집. 읽는데 딱 일주일 걸렸다. 지난 주 화요일에 빌려 이번 주 월요일에 다 읽었으니. 아, 오해하지 마시라. 재미있게 잘 읽었다. 내가 언짢아 하는 요즘 작가들의 비슷비슷한 작품들과 다르게 요사스럽게 매혹적이고, 맹랑하고, 발칙하기도 하고, 우울해도 귀엽게 우울하다.

  이 책이 2015년에 나왔으니 김엄지가 스물일곱 살. 서울에서 태어나 조선대학 문창과를 졸업하고 한양대 대학원에서 철학을 공부하던 시절이었다. 문학과지성사에서 운영하는 『문학과 사회』의 신인문학상을 통해 2010년에 등단했으니 첫 소설집 《미래를 도모하는 방식 가운데》부터 책등에 전통의 빨간 허리띠를 두른, 또는 빨간 빤쓰를 입은 문학과지성사에서 나왔다. 기분 좋았겠는 걸?


  작품집의 맨 앞에 실린 작품이 <돼지우리>. 이 첫 작품. 김엄지 개인사로는 2010년 문학과사상 신인문학상 수상작이며, 데뷔작을 제일 앞에 배치했는데, 정말 기발했다. <돼지우리>에 나오는 돼지우리는 삼겹살과 소주를 파는 돼지고기 집이다. 출연진은 화자 ‘나’와 ‘나’의 친구이며 주인공인 우라라. 그리고 돼지우리 주점의 사장과 사장의 아내이자 주방과 홀 서빙 아줌마. 이렇게 네 명이다. 시작부터 ‘나’와 우라라는 삼겹살에 소주를 마시고 있는 중.

  우라라. 대학 시절에 공부도 잘 했고, 생긴 것도 빠지지 않았다. 근데 조금 골통. 말하는 폼새부터 그랬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입에 달고 다니는 단어가 “떡”. 라라의 말을 그대로 쓰자면 어릴 때, “떡을 먹다가 뒈질 뻔했어. 숨구멍으로 넘어갔거든.” 그때부터 “인절미 콩가루만 봐도 토할 거 같”다.

  이후 라라는 떡의 질감과 향, 목 넘김이 인류가, 좁게 말해 자신이 느낄 수 있는 최악의 것으로 상정했다. 뭐 누구든지 이런 거 하나씩 가지고 있을 듯. 주로 어릴 때 먹은 음식에 관해서라면, 내 경우엔 잘 익은 토마토를 앞니로 베어 물었다가 앞니가 쑥 빠진 경험이 있다. 그리 흔들리지 않은 젖니였는데 뭐에 걸렸는지 아프지도 않지만 잇몸에서 쑤욱, 빠지는 이상망측한 감촉. 그래서 이후 건강, 특히 발기 유지에 그리 좋다는 채소이기도 한 토마토를 한 십년 가까이 먹지 않았다. 귀하게 자란 외동아들 누구는 역시 어릴 때 굴, 그 흐물흐물한 단백질 덩어리를 먹고 체해 밤새 물찌를 싸대는 바람에 나이 먹어 아가씨하고 키스도 못했다는 거다. 아가씨의 혀가 자기 입 속으로 쑤욱 들어오는데 혓바닥의 뭉글뭉글한 감촉이 저기 저 멀리 있던, 어렸을 때 목을 넘어가던 생굴하고 비슷한 거 같아서.

  하여간 우라라는 어릴 때 하마터면 뒈질 뻔한 인절미를 먹었을 때는 안 그랬지만, 가랑이 솜털이 검게 바뀌는 사춘기 시절부터 본격적으로 욕설을 섞은 말을 구사하기 시작했고, 라라가 “떡 됐다.”라고 말했다면 그건 “개 같다.”나 “좆 같다.”와 같이 치명적인 표현이라고.

  정말이다. <돼지우리>의 두번째 문단에 김엄지는 이렇게 말했다.

  “떡이나 개, 가끔은 좆. 라라는 본인의 면접 결과를 늘 그런 식으로 대답했다.” (p.9)

  본인의 면접 결과? 흠. 그러면 ‘나’와 라라는 대학 졸업반이거나 졸업생, 즉 취준생이겠구나. 근데 좀 더 읽어보면 조금 이상하다. 생기기도 잘 생겼고, 욕만 하지 않으면 말도 기막히게 하는데, 거기다 지방대학이지만 공부도 잘해서 당연히 학점도 좋고, 서울에서 굳이 먼데까지 유학을 왔으니 집안도 좀 넉넉한 거 같은데 왜 면접을 볼 때마다 미끄러지느냐는 말이지. 지방 소재 대기업이나 공기업이라면 라라 정도의 ‘지방인재’는 서류 넣자마자 볼 것 없이 그냥 쑥 들어갈 수 있을 것 같건만.

  아무리 ‘나’와 독자가 뜻을 모아 팀을 만들어 앞뒤로 관찰해 보아도, 라라는 애초에 금융기관을 포함한 대기업, 중소기업, 공기업, 기타 등등에 취업할 생각이 아예 없었다고 볼 수밖에 없다. 라라의 주장대로 예의상 면접을 봐준 것에 불과할 뿐.


  면접을 보는 족족 탈락하기만 하는 라라. 아마도 면접장에 가기만 하면 일부러 찐따 짓을 해서 남들에게 나도 회사에 취직하기 위하여 다방면으로 노력했다는 증거를 남기기 위한 행위였지 않았을까 싶다. 라라는 그들의 속에 들어가 정형화된 방식으로 삶을 사는 것에 반대한다는 것이겠지. 아마 생활인의 80퍼센트는 라라하고 비슷한 생각을 하면서 살지도 모른다. 다만 억지로라도 그 짓을 하지 않으면 생계를 이을 수 없고, 장가도 들지 못할 거 같고, 장가를 들지 못하니 어여쁜 마누라와 금쪽 같은 새끼들도 생산해 키울 수 없으니 그저 그렇게, 남들 다 하듯 취직하고, 이후 작품의 출연진들과 마찬가지로 상사 새끼들한테 후진 소리 들어가며 월급 타서 그 돈으로 삶을 이어갈 뿐이지.

  내가 아무 일을 하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나의 “자기만의 방”과 5백 파운드의 연수입이 보장되기만 하면 염병을 한다고 취직을 하고, 드러운 상사 새끼들한테 후진 소리 들으며 직장생활하고, 소주 맥주에 닭 뜯어가면서 드러운 상사 새끼 흉보고, 택시 타고 집에 오면서 택시 안에 토하겠느냐고? 라라도 백 년 전의 여성들처럼 자기만의 방과 연수 5백 파운드가 보장되지는 않았던 모양이지?


  라라는 참 특이하다. 먹는 걸 무진장 좋아한다. 먹으면서 오르가슴을 느낀다. 저 오래 전 원조 포르노처럼 최고의 성감대가 “목구멍 깊숙이” 있어서 그걸 자극해야 오르가슴에 도달할 수 있는데, 바로 그 자극을 위하여 온갖 음식물을 씹고, 넘기는 건 아니다.

  “적극적으로 오르가슴을 느끼고 싶다면 지금 막 조리한 따끈한 육류를 택해야 하며, 급히 먹되 잘 씹을 것. 입과 이빨을 최대한 사용할 것. 입 주변 근육이 조이고 이가 잇몸에 콱콱 박히는 듯한 느낌이 올 즈음부터 목 넘김에 최대한 집중할 것. 입안에 가득한 고기를 한 번에 삼킬 것. 이때 목구멍과 씹힌 고기의 접촉을 온몸으로 느껴야 하는데, 여기서부터는 먹는 자의 테크닉에 따른다는 것이었다.” (p.11)

  아하, 입안 가득한 고기가 죽상 상태가 될 정도로 씹혔을 때 그걸 한 방에 목구멍으로 넘기고, 이때 목구멍 전체의 조직과 음식물의 마찰이 오르가슴을 만들어내는구나! 어째 삽입섹스의 프로세스와 그렇게 많이 다른 것 같지는 않다. 어쨌든 당시 스물두세 살의 라라는 벌써 음식, 특히 고기를 먹으면서 다른 건 몰라도 오르가슴 하나에 대해서는 확실히 도사가 되어 있었다. 그러니 어디 함부로 취직이나 할 수 있겠어?

  뜻이 있으면 길이 있는 법. 님도 보고 뽕도 따고, 개울 치고 가재 잡는 일도 생기는 법이라서, 놀라지 마시라, 라라는 드디어 취직을 했다. 바로 ‘돼지우리’에. 벌써 고용계약서에 서명까지 했다. 한 번 보시라.


  채용 계약서


  1. 한 달 급여 1백만원. 우라라의 신체 변화에 따라 보너스를 지급한다.

  2. 일주일에 세 번 이상 출근한다.

  3. 일주일에 한 번은 삼겹살 외 사장이 추천하는 부위를 먹는다.

  4. 우라라는 돼지가 될 때까지 돼지고기를 먹는다.

  5. 일방적 계약 해지시, 월급과 고깃값의 8배를 보상한다.


  화자 ‘나’와 우라라는 계약서에 라라가 먹는 돼지고기는 무료로 제공한다는 조항이 빠졌음을 발견한다. 당연히 이 조항을 추가하기로 사장과 약속한다.

  사장하고 약속했다고? 그렇다. 이 계약서를 볼 때까지 고깃집 “돼지우리”에 사장이 무대에 나오지 않는다. 드디어 등장한 사장. 돼지 비슷하게 생겼다. ‘나’는 여태 몰랐는데 라라는 알고 있었다. 서빙 아줌마가 사장의 아내인 것을. 서빙 아줌마는 정말 돼지 같이 생겼다. 나중에 보면 꼬랑지도 달렸다. 그냥 꼬리 말고 꼭 “꼬랑지”라고 써야 제 맛인 돼지 꼬리가.

  사장이 보기에 라라야말로 훌륭한 돼지가 될 최고의 자질을 가지고 있단다.

  작품에 관해서는 이쯤에서 그만 두고, 나는 이 작품을 읽는 동안 내내 유쾌했으며, 엽기적 그로테스크한 매력적인 작품이라고도 생각했는데, 내내 머리속에서 떠나지 않았던 영화가 한 편 있었으니, 장피에르 죄네가 감독하고 도미니크 피뇽이 주연한 1991년의 명작 <델리카트슨>. <돼지우리>와 <델리카트슨> 두 편을 읽고 본 사람은 내 의견에 그리 반대하지 않을 듯한데, 물론 내용은 다르지만 풍기는 분위기는 그렇지 않다. 김엄지. 괜찮군. 앞으로 주목해야겠다고 마음먹는다. 근데 왜 도서관에 김엄지 책이 별로 없지? 거 별일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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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rgettable. 2025-11-10 10:4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델리카트슨!! 진짜 명작이죠.. 장 피에르 주네 감독 영화 구하기도 어려웠는데 어째저째 열심히 찾아 봤던 기억이 있어요! 책은 도서관에 한 번 찾아봐야겠어요~

Falstaff 2025-11-11 04:19   좋아요 1 | URL
넵. 서너번 본 거 같습니다. 이 영화 좋다 하시는 분 거의 못 봤는데 반갑습니다! ㅎㅎ

자목련 2025-11-11 11: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김엄지 소설 좋아하는데 Falstaff 님도 읽으셔서 괜히 으쓱합니다 ㅎㅎ

2025-11-11 12: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5-11-18 11: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5-11-18 15: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토끼는 부자다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66
존 업다이크 지음, 김승욱 옮김 / 문학동네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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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8~1980년의 해리 래빗 앵스트롬. 40대 후반, 인생의 최고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다. 래빗에게도 이런 날이 온다. 전작 30대 후반의 래빗이, 마누라는 다른 놈하고 눈 맞아 도망가고, 해고도 당하고, 집은 불에 홀랑 타버린 상태였는데 그새 부자가 됐다고? 로또 한 방 맞은 거 아니냐고? 미국 로또는 우리와 달라 한 번 당첨되면 1조원이 넘는 경우도 왕왕 있다는데. 아니면 인생의 위기를 맞아 이렇게 살 수는 없다, 대오각성을 하고 빨간 손에 쥔 것도 없이 각고의 노력 끝에 드디어 벤자민 프랭클린이 그려진 100달러짜리 지폐를 라면 박스로 몇 박스 모았냐고? 에이, 그럴 리가. 엉망진창으로 살지만 그나마 착한 루저, 해리와 극적으로 화해한 아내 재니스. 때마침 잰의 아버지 프레드 스프링어 씨가 이제 나이가 들어 자기 재산을 자연스럽게 물려 받을 후계자를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했고, 하나밖에 없는 딸 재니스가 물려 받아야 하겠지만 스프링어 모터스를 운영하기에는 예쁜 얼굴에 비해 너무 돌대가리라서 마음에 차지 않는 사위, 해리 앵스트롬한테 수석 판매원의 자리를 주어 경영을 전담하게 했다.

  근데 사위 역시 문제가 있다. 딸 재니스의 바람 상대가 바로 중고차 수석판매원인 그리스 남자 찰리 스태브로스였던 거다. 이제 관계가 완전히 끝났다는 딸 내외의 주장을 곧이곧대로 믿은 건 아니지만 어떻게든 정리가 되겠지, 라는 심정으로 사위를 수석 판매원 자리에 앉혔는데, 이게 웬일, 해리 래빗과 찰리는 일본차 도요타의 판매와 중고차 판매를 전문으로 하는 스프링어 모터스에서 그렇게 쿵짝이 잘 맞는 파트너가 될 줄이야. 사위 입장에서는 바람직하게 장인 스프링어 씨가 5년 전에 의자에 앉은 채 곱게 세상 하직해서(해리의 두 부모도 지난 10년 동안 차례로 세상 떴다), 유언장에 나온 대로, 스프링어 모터스의 지분 50퍼센트는 스프링어 부인이 차지하고, 나머지의 절반씩 뚝 떼어 딸 재니스와 사위 해리가 소유하게 된 거다. 경영은 당연히 세상물정 좀 알고, 사는 것도 좀 배웠다고 주장하는 해리 래빗 앵스트롬이 가졌다. 아무리 사위라도 사위 명의로 25퍼센트의 주권을 건네기는 쉽지 않았을 듯. 물론 래빗이 애초에 원하지 않았지만 살던 집이 불에 홀랑 타버리는 바람에 아내와 화해하자마자 곧바로 처가집에 들어가 늙은 장인, 장모와 함께 살았거든. 그동안 귀염을 받은 모양이지. 래빗 주제에 무슨 대오각성. 하긴 대오각성을 했더라도 작심삼일이었을 터, 칫. (부러워서 그런다, 부러워서!)


  <돌아온 토끼>에서 가출한 동북부의 귀한 집 처자 질의 죽음 때문에 극적으로 사이가 갈라져 “내가 아빠를 죽이고야 말겠어!”라는 악담까지 남긴 래빗의 아들 넬슨은, 그 사이에 10년이 지났으니 이제 대학생이다. 오하이오 주 켄트에 있는 켄트주립대학에서 지리학을 전공하고 있다. 아빠를 닮았으면 키도 크고 잘 생기고 스포츠, 특히 농구도 잘 할 텐데 하필이면 외탁을 하는 바람에 키도 작고, 생기기는 귀엽지만 별로 내세울 것 없이 내성적인 외골수 성격의 넬슨은 잠깐 히피들과 어울리기도 했지만 그것도 오래가지 않았다. 그래도 20대 초반인데, 폭발할 지경의 리비도의 명령으로 연애를 하기는 했는데, 주립대학의 그저 그런 학생들 가운데 한 명을 고르는 대신, 서무과의 타이피스트 프루 양과 교제를 해 프루 양의 뱃속에 자기 씨를 착상시켜버리고 만다. 학교에서도 적응하는 데 어려움을 겪은 넬슨은 이제 일년만 더 공부하면 자기가 원하는 대로 세상을 살기 위하여는 전혀 필요 없을 학사 학위를 딸 수 있는 마지막 학년에, 프루와 사람들이 참하다고 오해하는 맬러니라는 이름의 히피 아가씨와 함께 콜로라도에 놀러가 행글라이딩 같은 걸 즐기다가 돈이 다 떨어질 즈음, 프루 대신 맬러니와 함께 집에 도착하면서 사사건건 서로 얼굴만 보면 복장이 터지는 부자관계의 막을 올린다.

  넬슨은 질의 죽음 이후에 아버지와 정상적인 대화가 불가능하다. 부자간에 서로 이해하려고 하지 않는데 대화는 무슨 대화. 그렇다고 이들이 십년 전 넬슨의 말대로 아빠를, 아들을 진짜로 죽이고 싶어 하는 건 아니다. 오히려 둘 나름대로 아빠한테, 아들한테 인정받고, 될 수 있으면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싶은 것처럼 보이지만, 세상에 그렇게 보이기만 해서는 되는 일이 하나도 없다. 집에 오면서 왜 넬슨은 자기 아이를 임신한 프루 대신 맬러니와 함께 왔을까? 집에 있는 할머니, 부모는 당연히 맬러니가 넬슨의 애인인 줄 안다. 심지어 교회에 열심히 다니는 할머니는 자기 집 안에서 넬슨과 맬러니의 육체적 교접은 절대 용서할 수 없다며, 지하실 또는 봉제실에서 머물게 하겠다고 각오가 대단하다. 아직 모르니까. 넬슨과 맬러니는 그냥 친구.

  왜 맬러니와 함께 왔을까? 맬러니는 콜로라도에서 잠깐 몸을 피해야 하는 상황에 처했던 것. 당시 청춘답게 코카인을 코로 흡입하고, 대마초를 열심히 피우기는 했지만 상대적으로 순한 복용자라서 큰 문제는 아니었을 걸로 보인다. 하여간 어떤 문제인지 책이 끝나지 않을 때까지 이야기가 없으니 우리도 그냥 넘어가자. 두번째로, 넬슨은 자기가 학생이 아닌 서무계 타이피스트와 연애를 하고, 그 아가씨를 임신시켰다는 걸 가족, 특히 아버지한테는 숨기고 싶었다. 세번째로, 임신한 프루 입장에서 넬슨 혼자 집에 보냈다가는 마음이 바뀌어 배째라고 나설 수도 있어서 자기의 절친이며 넬슨하고는 사랑하는 관계가 될 수 없을 것처럼 보이는 맬러니를, 넬슨 감시역으로 동반시키고자 했던 거였다. 이렇게 되면 세 명의 청춘들 입장이 다 정리가 된다. 맬러니는 채식주의자이며, 선불교나 요가 같은 신비주의적 입장을 취하지만 스프링어 집에서는 어른들 눈에 세상 깔끔하고, 화단 가꾸기도 능숙하고, 육류를 제외한 조리와 설거지를 자발적으로 할 줄 아는 참한 아가씨이다. 완고한 할머니조차 며칠이 지나자 맬러니가 넬슨의 짝이었으면 좋겠다고 여길 정도. 그러나 아직 이 집의 할머니와 부모는 여자와 남자가 친구 상태로 머무를 수 있다는 걸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이들의 사고방식은 연애-섹스-결혼-출산과 출산 이후 이혼은 옵션이라는 하이웨이를 연상할 수밖에 없는 전통과 경험 위에서만 존재하니까.

  하지만 넬슨과 맬러니는 정말로 친구다. 연애와 결혼 같은 생각은 하나도 없다. 그렇다고 서로 마리화나를 하고 코카인을 약하게라도 흡입해서 분위기가 삼삼해지면 뭐 그냥 자연이 그렇게 만들었으니까, 구태여 참지 않고 한 번 한다. 이때 얘네들의 나이 23세가량. 때는 1978, 79년이니까 1950년 후반 출생 세대이다. 한국전과 베트남전에 반대하여 대 정부 투쟁을 하다가 둘의 모교인 켄트주립대학에서는 총에 맞아 죽는 학생까지 생겼던 시기와 근 10년 차이가 난다. 그러나 아직 당시를 풍미하던 히피와 자유주의는 사라지지 않았던 시기.


  <토끼는 부자다>에서 해리 래빗이 부자가 된 사연을 말했고, 가장 큰 주제는, 이제 아들 넬슨이 토끼 시리즈의 첫 작품 <달려라 토끼> 당시의 해리 나이가 되었으며, 아버지한테 당당하게는 아닐지언정 자기 생각을 과격하게 도전적으로 표현하기 시작해, 본격적인 갈등의 시절을 맞았다는 것. 넬슨도 아빠 해리와 비슷하게 젊음의 혼돈과 폭풍과 방황의 시절을 보낸다. 물론 조금 다르게. 아버지와 아들이 서로 이해하지 못할 수준으로. 딱 그만큼.

  넬슨은 아버지의 사업체인 스프링어 모터스를 언젠가는 물려받고 싶다. 중고자동차 판매와 도요타 자동차 대리점 사장을 하기 위하여 켄트대학 지리학과 학사 자격증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않는 넬슨은 이제 한 여자의 남편과 한 아이의 아빠 역할, 즉 제대로 된 가장 노릇을 하기 위하여 학교를 때려 치우고 어차피 물려받을 스프링어 모터스에 취직하여 일을 배우는 게 낫다고 주장한다. 여기에 할머니와 엄마, 외갓집 식구들이 동의하는 반면, 아빠는 아들 넬슨이 이깟 대리점 말고 더 큰 무대에서 날개를 피웠으면 하는 마음이 있어서 학위를 얻기 바란다. 넬슨을 채용하여 상당한 급여를 지불하려면 10년 전부터 최상의 파트너였던 아내의 전 불륜상대 찰리 스태브로스를 해고해야 하는데, 그렇게 하기에는 너무 친해졌고, 찰리의 인맥과 판매 실력 없이 대리점을 꾸려가기가 쉽지 않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스프링어 가문의 힘, 75퍼센트의 주권은 기어이 웃으면서 스태브로스를 해고하기에 이르고, 넬슨이 그 자리에 들어와, 기발하지만 성공하지 못할 프로젝트만 펼쳐 놓은 채, 이미 찰리 스태브로스와 함께 플로리다와 아이오와 여행을 떠난 적 있는 맬러니를 데리고 켄트주립대학에 복학해버린다. 즉 계획에 실패하고 다시 학교로 도망했다. 프루가 병원에서 딸을 순산하고 넬슨이 얼른 돌아와 아이의 이름을 지어주기를 바라는 동안에. 어째 하는 짓이 해리 래빗 앵스트롬, 아비를 그렇게 빼 박았는지 원.

  여기에 하나 더. <달려라 토끼>에서 두세달 간 래빗과 동거하던 커다란 몸집의 여자 루스라고 있다. 초장에 한 젊은 커플이 매장에 와서 차를 보고 간다. 저 뒤에 가면 남자가 도요타 차 한 대를 구입한다. 이때 같이 온 아가씨가 아무리 봐도 루스를 닮은 거 아니냐는 말이다. 나이든 정도를 보니 어머나, 해리는 머리칼이 쭈볏 선다. 동시에 뿜어져 나오는 뭐랄까, 그래, 사랑의 감정. 이 아가씨가 혹시 루스와 해리 사이에서 나온 자기 딸 아닐까? 이별 당시 루스는 분명히 임신 상태였고, 헤어졌으며, 곧 나이든 괜찮은 남자와 결혼해 시골에서 농사를 짓는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낳았다거나 임신 중단을 했다는 다른 말은 들어본 적 없다. 물론 신경을 쓰지도 않았지만. 근데 갑자기 나타난, 옛 시절 루스를 꼭 닮은 아가씨를 보니 영낙없이 자기를 닮지 않느냐는 말이지. 그리하여 괜히 이 이야기를 아내 재니스한테 했다가 얻어 터지기만 해서 이름을 모르는 자기 딸과 옛 애인 루스를 찾아 시골지역을 헤매는 에피소드도 등장한다. 이름을 밝히지 않는 아가씨도 왠지 해리가 좋아 다른 차를 사고자 하는 남친을 설득해 결국 도요타를 샀기에 이르고.


  하나만 더?

  이제 중산층 계급에 진입해 안정적으로 정착한 해리와 재니스 부부는, 골프 회원권을 보유해 남편은 골프를 아내는 테니스와 야외 수영을 하며 계급간 우정을 돈독하게 유지하고 있다. 이 가운데서도 당연히 서로 조금씩이나마 좋고 싫고는 있지만 중산층답게 그런 건 결코 드러내지 않는다. 당연히 드러내지 않더라도 서로 모르는 이는 한 명도 없지만.

  원래 속물인 해리는 이 가운데 웹의 젊은 아내 신디한테 미쳐있다. 젊었을 때처럼 무작정 달려들 정도는 아니고 손바닥 만한 삼각형 세 개로 만든 비키니에 싸인 몸을 언젠가는 한 번 이상 해체시켜 관계를 갖겠다는 비 범죄적 희망사항이다. 그런데 그게 이루어질 수도 있다. 때는 1970년대가 막 끝난 1980년. 저 변방 극동아시아의 한 도시에서 몇 백 명이 죽어가던 해, 미국 중산층 세 부부는 비행기를 타고 카리브해의 아름다운 섬에 도착해 시간을 죽이다가 자연스럽게 짝 바꾸기, 소위 스와핑을 시전하는 것. 그러나 순서는 해리의 속셈과 달리 첫날 셀마, 다음날 꿈에도 그리던 젊은 신디로 정해졌지만, 셀마와 잊지못할 의미를 지닌 하룻밤을 지내고 이제 날만 어두워지면 드디어 신디와 어제와는 비교하지 못할 깊은 의미를 지니게 될 것이건만, 그러나 아뿔싸, 몇 천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 또다시 넬슨이, 진통을 시작한 프루를 보고 겁을 덜컥 먹었는지 맬리사를 불러 둘이 함께 켄트대학으로 도망가버리는 바람에 기겁을 한 장모의 호출을 받고 만다.


  이런 내용이다. 시작은 70년대 석유파동부터 달러화 폭락, 일본차의 세계정복, 엔화 강세의 경제현장. 곧이어 변해버린 세대간의 갈등과 단계적으로 속화되는 미국 문화 같은 것.

  매우 재미있다. 그러나 순전히 재미 측면으로 보면 <돌아온 토끼>보다 덜하다. 암만해도 그만큼 드라마틱하지 않기 때문인데 그리하여 오히려 긴박한 사고와 죽음의 장면이 없어서 좋을 수도 있다. 사실 <돌아온 토끼>에서는 갑자기 집에 들어온 흑인 약물남용자 스키터의 행위가 너무 거칠어 알러지 현상이 생길 정도이지 않았나 싶었거든.

  읽어보실 분은 조심하기 바람. 점잖은 분들은 특히 더. 아주 적나라한 장면이 필터 없이 가끔 쏟아진다. 외설과 예술 사이? 아니, 아니. 외설을 포함한 예술 수준. 읽어보시면 안다. 집 책장에 꽂아놓으면 언젠가는 호기심 넘치는 귀댁의 자녀들이 뽑아 읽고 터져버릴 것 같은 리비도를 이기지 못해 얼굴을 붉히고 있을 수 있다. 그런 일이 닥쳐도 너무 걱정 마시라. 사는 일이 다 그런 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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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돌이 2025-11-09 16: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외설과 예술 사이? 아니, 아니. 외설을 포함한 예술 수준. <- 이렇게 눈에 확 들어오는 멋진 평에 그냥 넘어갈 수 있을까요? 없을까요?

Falstaff 2025-11-10 04:25   좋아요 1 | URL
전형적인 미국 속물 백인 쁘띠 부르주아의 삶을 그린 작품입니다. 페미니즘과 가까운 분들은 틀림없이 열 받을 만한 책인데 그래도 괜찮으시겠어요? ㅎㅎㅎ
가능하면 1부 <달려라 토끼>부터 <토끼 돌아오다>을 읽은 다음에 3부 시작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3부는 뭐 그냥 읽어 치운다고 해도 4부 <토끼 잠들다>는 전작 독서가 없으면 확실히 곤란하니 애초에 1부부터 읽어두시는 게 깔끔할 듯합니다.
다시 강조해요! 주인공 해리는 한 작품의 주인공을 맡을 정도로 속물, 이기주의에 자기만 알고, 여자에 환장을 한 바람둥이, 뭐 그런 잡놈 비슷합니다.
 
버지니아 울프 단편선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70
버지니아 울프 지음, 이미애 옮김 / 민음사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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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버지니아 울프와 친하지 못하다. 전형적인 영국 상위 중산층 또는 하위 부르주아 계급인 울프. 이 집단 안에서 이탈하지 않고 정착해 사는 동류들의 의식. 그것이 흐르거나 말거나. 이이의 작품을 읽고 이이의 소설에 동감하고 감동도 하면서 울프를 찬양하는 독자를 나는 부러워한다. 간혹 이이의 내면 묘사가 썩 인상깊기는 한데 여차하면 독자를 혼란에 빠뜨리는 어려운 글쓰기를 양보하지 않는 작가. <올랜도> 같은 작품에서 볼 수 있는 페미니즘적 성취와 표현 방식은 놀라웠지만 <등대로>는 도무지 읽히지 않았다. 평론가들은 <등대로>를 더 높게 평가하는 모양이지만. 근데 양보하고 싶지 않은 건, 나하고 안 맞는 작품을 좋다고 말하기 싫다는 거. 이런 의미에서 한껏 기대하고 도서관에 희망도서 신청해서 읽은 《버지니아 울프 단편선》은 좋지 않다.


  무려 스물세 편의 단편소설을 실었다. 본문이 표지를 포함해 250쪽에서 끝나니까 한 작품당 대강 열 페이지 정도 분량이다. 앞에서 말은 그렇게 했지만 나하고 맞지 않는다고 무조건 안 읽지는 않는다. 그런 책 가운데서도 배울 게 있고, 배울 게 있으면 배운다. 놀랄 만한 것이 있으면 당연히 놀라고, 감탄할 만하면 감탄한다. 근데 이 책에서는 배울 것도, 놀랄 만한 것도, 감탄할 것도 없더군.

  그나마 덜 어렵게 읽어서 마음 편했던 <델러웨이 부인>.

  작가가 장편소설을 처음부터 끝까지 한 방에 일필휘지로 쓰는 건 아닐 터. 숱한 에피소드와 장면과 등장인물을 설정하거나, 작품 속에서 저절로 만들어질 터인데, 먼저 초안이 나오고 이를 수정하는 과정에서 들어내고, 첨가하면서 소설을 완성시키겠지. 근데 특정 에피소드나 장면, 등장인물 같은 것들 이 마치 닭의 갈비뼈 같아서, 버리자니 무지하게 아깝고, 넣자니 마음에 걸리는 경우가 한두 건이 아닐 것이다. 이 작품집 속에 “델러웨이 부인 댁의 파티”를 위한 단편이 네 편 정도 들어 있다. 이것들이 혹시 이런 닭갈비뼈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왜 자꾸 들지?

  당연히 출판사 책 소개글에는 “<델러웨이 부인>의 단초가 되는” 단편들, 즉 델러웨이 가의 파티를 배경으로 하는 단편소설 몇 편을 몇 개 썼고, 이것들을 쓰다보니 장편도 하나 써볼까, 하는 생각이 들어 장편 <델러웨이 부인>을 쓰게 됐다고 읽히게 표현했는데, 장편을 쓰게 되는 단초인지, 아니면 닭 갈비뼈인지, 만 원은 모르겠고, 오천 원 내기라면 닭갈비뼈에 걸겠다. 오천 원이면 얼마야, 꽉 찬 로또가 한 장이다.

  천성이 상것인 내 눈에는, 전형적인 부르주아 집에서 열리는 파티를 위하여 새 드레스를 맞춰 입고, 파티에 누가 참석하고, 초대를 받았느니 받지 못했느니, 제공한 에피타이저와 정찬과 디저트와 리큐어와 와인과 상파뉴, 기타 등등, 기타 등등이, 도무지 아름답게 보이지 않는 거다. 원래 델러웨이 부인과 측근들이 부르주아, 귀족 계급일지는 몰라도 속물 덩어리이기는 하지만, 세상에 속물 아닌 인간 있으면 세 명만 데려와 보라, 하는 심정으로, 그래도 썩 잘 쓴 소설 같아서, 읽기는 읽었는데, 또다시 비슷한 게 자꾸 나타나니까, 멀미나 읽느라 고생했다.


  내가 말은 이렇게 하지만, 그렇다고 버지니아 울프 읽기를 멈추지는 않았다. 이이의 단편소설이 그리 좋지 않았다,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는 뜻이지, 위에서 말한 <등대로>를 빼놓고 사실은 모두 그럴 듯하게 읽었다. 그중에서 <파도>를 아직까지 읽은 울프 가운데 제일 멋있는 작품으로 꼽기도 한다. 그래도 울프 한테 여전히 선뜻 손이 가지는 않는다. 바로 이 책 《버지니아 울프 단편선》 같은 경우를 언제든지 만날 수 있다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이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덮으면서, 속으로 나는 이렇게 지껄였다는 거 아냐.

  “드디어 올 것이 왔군.”

  버지니아 울프의 저작을 포함해서 가끔 어려운 책도 읽어야 하겠지. 만날 쉽고 재미있는 책만 읽을 수는 없다. 굳이 찾아서 고통을 당할 필요는 없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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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25-11-06 07: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falstaff 님, 영국 여자 작가 중에선 누구를 좋아하세요?

Falstaff 2025-11-06 08:02   좋아요 1 | URL
조지 엘리엇이요!

잠자냥 2025-11-06 12: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ㅋㅋㅋ 저도 안 친한데.. 그것참.... 재미가 없어서 손이 안 가요;;ㅎㅎ

Falstaff 2025-11-06 15:33   좋아요 1 | URL
울프 읽으면서 재미 기대하는 인간은 자냥 님하고 쇤네밖에 없을 듯. ㅋㅋㅋ
 
고양이 힘줄로 만든 하프 문학동네포에지 83
강기원 지음 / 문학동네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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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번에 강기원의 《바다로 가득찬 책》을 읽고 필이 팍 꽂혀서 곧바로 《고양이 힘줄로 만든 하프》를 희망도서 신청해 읽었다. 이 시집은 2023년에 문학동네에서 찍었다. 당연히 2020년 이후에 쓴 시를 모은 시집인 줄 알았는데, 천만의 말씀, 이미 출간되었으나 이젠 폐간된 시집을 다시 찍는 출판사의 프로젝트로 18년만에 새로 나온 옛 시집이었다. 그러니까 초판은 2023 – 18 = 2005년, 시인이 마흔여덟 살 무렵에 낸, 아마도 첫 시집일 텐데, 문학동네는 염치도 좋지, 판권지에 자기네 책에 초판 1쇄라고 타이틀을 박았다. 중판 아냐? 적어도 개정판이라고 해야지 말이야.

  첫 시집이었다는 걸 알았으면 내가 희망도서 신청을 했을까? 아무래도 아닌 거 같다. 그러느니 차라리 다른 도서관에 상호대차서비스 신청을 해서 시인의 초판본을 읽는 편을 택하지 않았을까 싶다. 확실히 사람은 게으르면 못쓴다.

  이렇게 타박을 하는 가장 큰 이유는, 이 시집이 전에 읽은 강기원보다 마음에 차지 않았기 때문이다. 시인사에서 2005년에 낸 초판을 찍을 당시 강기원이 시인 짬밥으로 치면 8년밖에 되지 않았지만, 이미 마흔여덟, 시인으로 인생의 절정기를 구가하던 시기라서, 내 주제에 시가 이러하니 저러하니 건방을 떨 수는 없다. 그래서 단지 시들이 어째 내 입맛에 덜 맞았다고만 말할 수밖에.


  시집의 제목 《고양이 힘줄로 만든 하프》가 좀 그로테스크하다. 살아 있는 고양이의 힘줄을 뽑아 그걸로 하프를 만들었을까? 왜 이리 엽기적인 이야기를 하느냐면, 사마천이 쓴 <사기 세가>의 장면 때문이다. ‘요치’라는 작자가 제나라에서 권력을 잡자 제나라 임금 민왕을 죽이는데, “민왕의 힘줄을 뽑고 종묘의 대들보에 하룻밤을 그대로 매달아 죽게 하였다.” 그러니까 사람도 살아있는 채로 힘줄을 뽑아 대들보에 매다는데, 고양이를 그렇게 하지 말라는 법이 없으니까. 사람이라면 재미나 여흥을 위해 능히 그런 짓도 할 수 있는 생명체라서 말이지. 이러저러한 말만 늘어놓지 말고 표제시를 한 번 읽어보자.



  고양이 힘줄로 만든 하프



  내 머리채 휘어잡고 일필휘지 할 분 안 계시나


  뼈의 구멍에 입술을 대고 날숨 불어넣을 이


  방광 가득 바람을 넣어 힘껏 차도 좋을 일


  무늬 없는 등판에 지도를 그려 넣어

  벽에 거는 일은 어때

  오대양 육대주 까맣게 문질러

  밤의 지도를 만들지

  찾을 수 없던 별자리 돋아오르게


  비스듬히 품에 안고 핏줄의 현을 튕기면

  숨겨진 노래 흘러나올까

  고양이 힘줄로 만든 하프처럼 말야


  하지만 다 쓸모없다 여기실 땐

  빈 몸통만으로 토르소를 만드시죠

  사라진 목, 부서진 팔다리로 웃는 토르소를   (전문. p.99)



  어떠셔? 시인이 참 시가 써지지 않았던 모양이지? 오죽하면 자기 머리채를 틀어잡고 시인의 몸을 붓인 양 일필휘지로 시 한 수 써보라 했을까? 그러게 누가 시인더러 시인 하랬나? 자기 좋아 시 쓰기 시작해놓고 괜히 엄살이셔, 그지? 근데 엽기 그로테스크인 건 맞다. 부서진 팔다리로 웃는 토르소라니, 거 참 심했다. 오래전 최승자도 그랬지. 내 팔 다리를 분질러 네 꽃병에 꽂아달라고. 이런 표현은 먼저 쓴 사람이 장땡이다. 그래서 강기원, 1패. 아니면 말고.

  근데 진짜 그로테스크는 시집의 2부에 집중되어 있다. 여성을 주제로 쓴 시들이 밀집해 있지만 그렇다고 구태여 페미니즘 시로 구분할 필요는 없다. 낙태와 어린 자식의 죽음 같은 여성으로의 참담함을 그렸다. 임신중단도 말만 임신중단이 아니라 낙태 수술의 장면을 그린다.

  종이를 찢는다 / 낙태수술중이다 // 아주 잘게, 되도록 잘게 / 마취약이 듣지 않는다 … 사지가 뜯겨나간다 / 작은 손가락, 발가락이 핀셋에 들려 있다 // 주어 동사가 멋대로 섞인다 / 살점 하나라도 남겨선 안 된다 … (<퍼즐> p.45)

  말로만 듣던 장면이다. 연령층에 따라 학교 수업시간에 비슷한 영상을 보여주던 시기도 있었다고 들었는데 시를 읽으며 연상하는 것이 그렇다고 그나마 ‘검열’ 후의 영상보다 덜 충격적인 건 아닐지도 모른다. 어린 아이가 죽어 화장을 하고 따끈한 골분을 든 채 러시아워의 서울을 지나오는 이야기보다 바로 앞 페이지에 실린 이런 시를 읽는 편이 좀 나을 거 같다.



  딸꾹질



  삽날에 물컹한 것이 걸려든다. 썩은 연못을 메우려 마당을 파는 중. 구덩이 안에서 오글거리는 새끼 쥐 여섯 마리. 팔뚝만한 어미가 나무 뒤에서 노려보고 있다. 인부는 우선 그놈을 때려잡는다, 망설임 없이. 삽 뒷등에 터져버린 배에서 흐르는 찐득한 것들. 새끼들의 오디 같은 눈알들 위로 큰 돌이 쿵 던져진다. 마당 한구석 홈통 붙들고 구경하던 아이가 딸꾹질을 시작한다.


  삽날과 바위에 찍히는 꿈에서 겨우 깨어난 아이. 흠뻑 젖은 채 새벽 마당으로 나간다. 돌은 어느새 치워져 있고 연못 있던 자리엔 뒤집힌 흙의 속살이 덮여 있다. 묽은 핏빛으로 떠오르는 태양을 꼼짝 않고 아이는 지켜본다.  (전문. p.39)



  흠. 괜히 소개한 것 같군. 새끼 쥐 보셨나? 아주 오래 전 군불 때던 시절, 불 때지 않는 아궁이가 따듯하니까 겨울이 되면 가끔 쥐가 거기에 새끼를 낳는다. 털도 제대로 돋지 않고 눈도 못 뜨는 분홍색 작고 “귀여운” 생명체. 꼼지락거리는 움직임은 아무리 미물이고, 밤마다 천장을 뛰어다니는 시끄러운 병원균 매개체로 성장할지언정 정말 마음에 쏙 차는 생명체인 것을, 그걸 큰 돌을 쿵 던져 납짝 짜부려뜨려 죽인다고? 아이가 딸꾹질할 만하다. 그걸 보는 어미 쥐는 또 어땠을까? 그러니까 자기를 향해 날아오는 삽등조차 피하지 않고 새끼들하고 한날 한시에 죽는 편을 택했겠지. 에휴, 인용할 생각이 없던 시인데 어떻게 독후감 쓰다 보니 이렇게 됐네 그려.

  원래는 이 시를 제일 먼저 인용할 생각이었다.



  경(經)



  벗은 허물

  뒤돌아보지 않고


  없는 발과

  없는 날개로

  사라진 푸른 뱀아


  내 화사한

  경전아


  봄날

  갈라진

  숲길에 서서


  허물뿐인

  탈피할 수 없는 내가


  너를 읽는다   (전문. p.13)



  경經. 들실 말고 날실. 글. 책. 도리. 불경. 그리고 여성들의 월경. 이 가운데 어느 경을 말하는 것일까? 단, 이 시에서 경이 명사일 경우에 그렇다는 말. 마지막에 “너를 읽는다” 했으니까 명사가 맞다. “너”라고 의인화했으니 월경일 수도 있어서 굳이 선택에 포함시켰다. 시인에게 물어보라고? 물어봤자다. 99퍼센트의 시인은 “당신이 생각하는 경이 맞습니다.”라고 답변할 테니까. 그러니까 어떤 경인지는 독자 마음대로인데, 내 생각엔 글과 책, 그리하여 “시” 아닐까? 만일 이 시집이 시인이 처음 낸 책이라면, 첫 시집의 첫 시의 주제가 자기가 쓰는 것이든, 다른 사람이 쓴 것이든 시라고 생각해도 무방할 것 같아서 의견을 내본다. 불자가 불경을 대하듯 시인이 시를 읽고 쓰겠다는 초심이라 여기면 그럴 듯하다.

  그런데 이 시를 한 번 보자. 조금 불만이 있어서.



  선짓국



  선혈로 공양케 하시다니


  이건 피로 끓인 국이 아니다

  피로만 끓인 것이 아니다

  진흙과 눈물, 짚과 서리, 햇살과 구름, 들판이

  녹아든 한 그릇의 늪


  받아먹어라

  받아마셔라

  들리는 말씀 없어도


  쓰리고 아린 속내 앞에

  침묵으로 엉긴

  뜨겁고 생생한 적신(赤身)


  그 속에 쇠붙이 찌를 수 없어

  함부로 휘저을 수 없어


  두 손으로 뚝배기 받쳐들고

  고개 수그려

  메마른 입술을 댄다


  찬 이마 위로 훅, 끼쳐오는 입김   (전문. p.16)



  선짓국 한 뚝배기 하면서 별 생각을 다 한다고? 그래서 시인 아니냐! 한 목숨, 뜨겁고 생생한 붉은 몸의 공양에 흠을 낼 수 없어 시인은 차마 쇠 젓가락으로 선지 덩이를 찔러 자를 수 없단다. 그래서 두 손으로 받쳐들고, 고개도 수그려, 내 생명의 숨결 훅훅 불어가며 뚝배기를 비우자 훅, 끼치는 입김. 바로 내가 준 입김이 다시 나한테 비릿한 냄새와 더불어 끼쳐온다. 시인이 차마 시로 쓰지 않았지만 이 다음에는 뭐? 그려, 깊은 트림 한 번 끄윽, 해야 제 맛이지. 내 생명의 입김을 주었더니 다시 그게 끼쳐온다고? 그럼 또다시 돌려준다는 의미에서 깊게, 그윽하게, 끄윽.

  이 시에 뭐가 불만이 있느냐고? 2연과 3연. 구태여 그걸 설명을 해야 했나? 한 번 빼 버리고 읽어보시라. 좀 더 독자를 대우해주는 거 같지 않아? 이게 피로(만) 끓인 국이 아니라는 걸 누가 몰라? 적어도 시집을 사 읽던지, 도서관에서 빌려 읽는 독자가? 시를 제대로 배우지도 않고 알지도 못하는 내가 읽기로는 2연과 3연은 뱀 다리 같다. 물론 아니겠지. 그러나 그렇게 읽힌다는 말씀.

  아이고, 오늘도 내가 기원 언니한테 함부로, 심하게 말해버렸네. 그래도 시인의 초기 모습을 볼 수 있어서 의미가 있는 시집이다. 이대로 끝내기 섭섭해서 재미있게 읽은 시 하나 달고 독후감 마친다.



  미하(米蝦)



  눈물이 짠 걸 보면

  나는 소금

  아니, 절여진 무엇


  허공의 항아리

  짜디짠 그

  어둠 속에서


  덜 삭은 눈알로

  바다를 읽는


  굽어진 등도 없이

  모든 다리를 오그리고

  사라져 갈


  쌀새우   (전문. p.59)



  미하, 쌀새우가 뭔지 아시지? 서해, 남해에서 주로 나는 옅은 붉은 색 작은 새우인데 말리면 하얗게 색이 바뀐다. 강기원이 본 쌀새우는 새우젓을 담근 모양이다. 아직 덜 삭아서 그렇지. 새우젓 말고 곤쟁이젓은 아시나? 아주 작은 새우만 골라 곰삭여 만든 젓갈. 인천사람이자 가수인 송창식이 좋아한다고 들었는데, 나 어렸을 때도 자주, 즐겨 먹던, 없어서, 안 줘서 못 먹던 젓갈이다. 민물새우로 만든 토하젓도 일품이고. 이 쌀새우를 보고 다른 건 그리 생각하지 않고 지은 시.

  아휴, 근데 나는 이런 종류의 시는 박백남이 쓴 <홍어>의 두번째 연이 제일 좋다.


  “쏴아쏴아 바닷물 밀려드는 곰소항에서 나는 곰삭은 홍어를 겨자에 찍어먹고 있다 오늘, 묵혀서 썩히면 썩힐수록 제 맛이 살아나는, 때론 몰래 맛보고 싶은 그대, 첫사랑처럼 코 끝이 싸한 맛, 한때 그대가 살았던 수심 깊은 내 가슴의 바다에서 쏴아아 눈물 끌어올려 내 눈자위를 적시고 바삐 사라지는 가오리과의 홍어, 내 어찌 그대 잊고 어디로 가오리까”  (《석류꽃엔 눈물생이 있다》 현대시. 1998. p.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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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5-11-05 09:0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문동에서도 시집 복간본 시리즈가 나오는군요. 문지에서도 ‘시인선R ’이라고 복간본이 종종 나오던데요.
선짓국 먹으면서도 시 생각나는 게 시인 맞습죠… 홍어에 막걸리 먹고 싶네요…(라지만 삭힌 홍어는 아직 못 먹어봤습니다! ㅋㅋ)

Falstaff 2025-11-06 03:46   좋아요 0 | URL
저도 전라도 결혼식에 가서 처음 삭힌 홍어 먹어봤는데요, 질겁을 할 거 같은데 자꾸 거기에 젓가락이 가더라고요. 질색을 하면서도 먹는 게 홍어더랍니다.

얄리얄리 2025-11-05 15:1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시들이 뭔가 섬찟하네요. [딸꾹질]은 저라도 그런 광경보면 속이 안좋았을 것 같고(아무리 쥐가 유해동물이라지만..), ˝선혈로 공양˝이나 ˝모든 다리를 오그리고 사라져 갈 쌀새우˝ 같은 부분도 카프카스럽다고 해야 할까, 그런 느낌이에요.

Falstaff 2025-11-06 03:49   좋아요 0 | URL
죽은 쥐새끼들은 그렇다 치고, 어미쥐는 그리 쉽게 때려죽이지 못했을 겁니다. 아마 시인의 머리속에서 그랬을 겁니다. 사람이 휘두르는 삽에 쉽게 맞을 정도의 짐승이 아니거든요. 강기원 어린/젊은 시절에는 흔한 장면이었을 겁니다.
먹는 걸로 치면 뭐든지, 하물며 산나물일지라도 다른 생명일 터이니 그걸 어쩌겠습니까. 에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