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아무렇지도 않게 맑은 날 ㅣ 문학과지성 시인선 230
진동규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9년 10월
평점 :
.
1945년 전북 고창에서 나 전북대 국문과와 전주대 미술교육과를 졸업해 국어와 미술 교사로 일한 조금 특별한 쌤이었다. 학부를 두 번 다녀서 그런가, 시인 등단은 33세였던 1978년 “시와 의식”을 통해서 했다. 한국예술인단체총연합회 전주지부 회장을 아직도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다. 그래서 그런지 전주 일대, 즉 전북지방에 대한 애착이 가득한 시들을 많이 쓴 거 같다. “~거 같다.”라고 표현한 건 《아무렇지도 않게 맑은 날》이 내가 처음 읽은 진동규의 시집이기 때문이다.
독후감을 쓰려고 시집을 검색해보니 오래 전 TV 드라마 <시크릿 가든>에서 주연을 했던 현빈이 이 시집을 들고 몇 컷을 찍은 적이 있나 보다. 몇 명이 그림을 보고, 현빈이 가지고 다니면서 읽었으니 꽤 좋은 시집인가비여? 해서 사 읽었더니, 생짜 초보한테는 그리 만만하지 않았을 터. 우짤꼬? 막 복잡한 한자가 쓰여 있기도 하고, 이미 천몇백년 전에 죽은 왕의 이름도 나오고, 어질어질 했겠지. 나 초등학교 5학년 때 담임 상병욱선생께서 부여 사람이었는데 쌤을 통해 처음으로 견훤이라는 인물을 알았다. 문경군 가은 사람으로 고려의 장수였다가 후백제를 세워 초대 황제로 등극한 천하장사. 한 때는 왕건도 벌벌 떨게 만든 맹장, 용장, 지장이지만 덕장이 아니라서 결국 왕건에게 귀화한 인물. 이 정도로 알고 있었다.
후백제가 주로 터를 잡았던 것이 완주군 일대. 삼국시대에는 완주에서 문경까지 곳곳의 벌판에서 아주 활발하게 전투가 벌어진 곳이다. 그래 진동규가 전주시 덕진연못에서 연꽃을 보고 이런 노래를 지었다.
눈썹 끝에 연꽃 피는
― 德津採蓮
젊은 장수 견훤은 반월성 짓고 눈 지그시 앉아 눈썹 끝자리쯤 해서 연못을 팠습니다. 말 한마디 없이 해낸 일이고 보면 그 속 헤아릴 수야 없겠습니다만, 선화 공주랑 배 띄우고 놀았던 서동의 미륵사 연뿌리 옮기어 꽃피게 하였던 것을 보면 글쎄, 아마도 무왕 대에 현신하지 않은 미륵을 당신은 꼭 보리라 믿었던 것 아닌가 싶습니다.
야심찬 대왕님 그때 반월성은 흔적도 없고 아스라한 세월의 눈썹 끝자리 철 찾아 연꽃 흐드러지게 피고 지고 그러는 걸 보면 고개 숙이는 그대 진정 선화 공주이려니 싶어 가슴 두근거리고 그럽니다. (전문. p.11)
德津採蓮은 덕진채련. 덕진(연못)에서 연꽃을 따다, 라는 뜻이다. 훗날 백제의 무왕이 되는 젊은 서동이 역시 훗날의 선덕여왕의 여동생 선화공주가 그리 예쁘다는 말을 듣고 서라벌로 잠입해 들어가 동네 꼬마들에게 군것질거리 마를 주고 노래를 지어 부르게 했으니, “선화공주님은 밤마다 서동을 남몰래 방으로 끌고 들어가 얼레리 꼴레리.” 이것도 하루 이틀이지, 결국 선화공주는 서동을 따라가 훗날 무왕의 비가 되었으나, 막강한 남편 무왕이 문경 근방의 벌판에서 조국 신라와의 전투에서 용감하게 전사해버려 졸지에 과부가 되어 버릴 줄은 꿈에도 몰랐지.
진동규는 옛 백제땅이며, 조선을 개국한 이성계의 전이 있는 전주를 왔다갔다 하다 덕진연못에 들러 때마침 활짝 핀 연꽃을 보며 그곳에 지었다 하는 반월성과 덕진연못의 주인 견훤과, 무왕, 선화공주 모두를 불러모았던 거다. 옛 왕조의 왕들과 왕비를 불렀으니 시인의 가슴이 두근거릴 수밖에.
진주 출신 가운데 애매한 사람이 있다. 정여립鄭汝立. 인망이 높은 이이를 흠모해 주위에 사람이 많았다는데, 그러면 몸 조심을 좀 해야지. 금강 상류인 전북 진안에 죽도라고 있었다. 그곳에 서실을 차리고 대동계를 모았다. 당시 선비들이 자발없이 뜀박질하지 않고 근사하게 할 수 있는 스포츠가 국궁 말고 거의 없었다. 그래서 활을 쏘며 지화자, 관중이요, 웃고 노래하고 술 마셨을 터. 선조 때 기축옥사로 화를 입은 정여립의 집 건너마을 이름이 ‘댁건너’란다. 당연히 ‘댁’은 정여립 영감 댁을 말하겠지. 대수리는 다슬기의 방언이고. 그럼 제목은 이해가 되렸다.
댁건너 대수리를 잡습니다.
― 月岩撈摸
살던 집은 텃자리까지 파버렸습니다. 그 이웃까지 뒤집어 파서 앞내 끌어 휘돌아 가게 하였습니다. 깊고 깊은 소를 만들어버렸지만 그때 그 집 주인이 반역했다고, 그래서 전주천 물이 거꾸로 흐른다고, 북으로 흐른다고 소문내고 그런 속셈 알 만한 사람은 다 압니다.
댁건너 마을 사람들은 上竹陰 下竹陰하면서, 서방바우 각시바우 애기바우 그 피울음을, 상댁건너 하댁건너 점잖던 자기 마을 이름 위에 불러보기도 해보지만, 어떻게 변명 말씀 한번 엄두를 못내고 죽어 지내왔습니다.
그 집 뒷산 월암에 달이 뜨면 댁건너 사람들은 월암 아래 소에 들어 대수리를 잡는답니다. 관솔불들을 밝히고, 주춧돌 기둥뿌리 항아리 깨진 것, 뭐 그 집 주인 뼛속까지 빨아 먹고 자란 대수리들을 잡는답니다. 일삼아 잡아내고 그런답니다. (전문. p.12)
서인이 동인의 씨를 말리려고 정여립과 관련한 인물들은 남자, 여자,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모두 도륙을 낸 모양이다. 그게 이 동네 댁건너 사람들까지도 피해가 갔겠지. 근데 “전주천 물이 거꾸로 흘러 북으로 흐른다는 소문”이 무엇인고? 정여립이 난을 일으켜, 전주천의 물이 한강까지 올라가면, 지리학에 전혀 배움이 없어서 금강이 어떻게 한강수로 흘러가는지는 관계하지 않고, 겨울이 올 때 한강이 꽝꽝 얼 것이고, 이때 말에 오른 정여립이 전라와 경상에 있는 자기 지지군을 모아 한양으로 짓쳐 올라가 왕상을 도륙낸다는 유언비어를 말한다. 이런 야만의 시절이었으니 어찌 정여립이 명을 보전할 수 있었겠는가. 다 억울한 죽음이고 한낮 정치싸움이었을 뿐인 것을. 하긴 요즘 보면 큰 정당 하나 완전히 골로 갈 것 같긴 하다만. 역사는 흐른다? 큭큭큭.
이렇게 시집의 1부는 진동규가 터 잡고 사는 전라북도 전주시를 중심으로 주변 지역의 역사를 노래하고 있다. 명색이 한국예술인단체총연합회 전주지부 회장을 역임했으니 당연히 할 일을 한 것일 수도 있고. 김유정문학관장을 지낸 전상국도 그의 소설집 《굿》에서 김유정에게 두 편을 헌정한 적이 있으니 같은 맥락으로 보면 될 것이다.
생활인으로서의 진동규. 내내 개인주택에 살다가 편한 아파트로 이사를 한 모양이다. 개인주택에는 별 생각도 못한 공간에 완전히 잃어버린 기억 속의 예상치 못한 물건들도 어딘가에 모아져 있다. 정말 상상도 못한 것들. 직업이 교사이고 시인이었으니 당연히 발표하지 않은 원고도 있고, 그리다 남은 캔버스도 있고 그랬겠지.
불꽃
아이들 편하다고
아파트를 얻어가는데
이사 옮길 때마다 웬만한 것들
눈 딱 감고 버리고 그랬는데
토요일 한나절을 또 불 처지른다
학교 다닐 때 썼던 원고 뭉치도 나오고
용머리 고개 호리꾼 시절도 나온다
다락에 쌓아둔 그림 속에서는 지난 겨울
쥐 한 가족이 살림을 차리고 갔다
내 자화상 어깻죽지를 새김질해서
새끼랑 키우고 나간 모양이다.
꽃 피고 낙엽 지고
눈 쌓이던 동네 고샅 고샅
한 귀퉁이씩 다 새겨놓았다
싸잡아 내친 캔버스가 텃밭 한 귀
얼키고설키며 내 키를 넘는다
이렇게 활활 타는 불꽃이면
얼마나 후련한 것을
안 풀리던 세월
지글지글 기름을 태우며 떠난다
너울거리며 너울거리며 간다 (전문. p.44~45)
쉬운 시라서 척 읽으면, 탁 알겠다. 그냥 이사하면서 별의 별 거 다 나왔고, 그 중에 버릴 건 버리고, 쓰레기봉투에 담으려면 봉투 값이 아까울 것들은 아예 마당 귀퉁이에서 태워 버렸는데, 얼마나 많았던지 불길이 키를 넘는 모습. 태우는 마음이 좋기도 힘들다. 물건만 타는 게 아니고 거기에 묻은 누추한 시절의 짠한 추억까지 타버리는 거라서. 한번쯤 겪어 보셨을 테니 이해하실 듯.
근데 이 시집은 시인 근처에 사는 독자는 재미나게 읽겠는데, 나처럼 떨어져 있는 사람한테는 좀 실감이 덜 날 정도로 전라북도 전주와 완주 근방에 (아이 씨, 이렇게 쓰면 까칠한 분이 영어로 한다고 한 마디 안 하시려나) 전주와 완주 근방에 오리엔티드 되어 있다. 1부에서는 지형과 그곳에 담긴 역사. 뒤로 가면 사람들, 1999년 현재 鵲村(작촌) 조병희 선생처럼 살아 있는 사람도 있고 이미 가버린 삼례의 김춘식 씨, 이평 아전을 했던 판소리의 보존자 신재효 선생 등등.. 6부로 가면 예전에 있었지만 지금은 볼 수 없는 것들까지. 참 알뜰하게 모았다.
그렇다고 이 시집 하나 들고 전주와 완주 거리를 어슬렁거릴 수도 없는 거잖아? 왜 안 돼? 한 번 해볼까? 아서라, 기름값 엄청 올랐더라. 연금생활자 주제에… 쩝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