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정
산도르 마라이 지음, 김인순 옮김 / 솔출판사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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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생, 적어도 서른 살 넘어서는 헝가리 말로 작품을 쓴 헝가리 작가. 이 책의 번역은 독문학자 김인순이 했다. 중역본이란 얘기다. 하긴 우리나라에 헝가리 어 전공하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되겠나. 마음 넓은 독자들이 이해해주자. 게다가 헝가리라면 19세기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으로 오스트리아 황제가 헝가리 왕을 겸직한데다가, 산도르 마라이의 조상이 작센에서 이주해온 독일인이면서도 19세기에 있었던 헝가리 독립운동에서는 적극적인 헝가리 독립군 편을 들었는데, 그러면서도 집구석에선 또 독일어를 사용했단다. 이런 이유로 이왕이면 영어 중역보다 독문학자가 독일어 버전을 번역한 것이 조금은 더 바람직하겠지. 다 좋다. 소비에트가 헝가리를 점령하는 바람에 자유로운 창작활동에 대단한 장애물이 생기자 유럽 각지와 미국에서 망명생활을 하다가 89세에 캘리포니아에서 자살로 생을 마감한 작가, 이런 것도 다 좋은데(작가 스스로가 평소부터 ‘지나치게 오래 사는 건 분별없는 짓이다’라고 주장했다니까 279쪽, 역자해설), 아시다시피 헝가리는 성을 먼저 쓰고 이름을 나중에 쓴다, 그래서 ‘산도르’라고 불러야 할 거 같지만 역자 해설 보면 줄창 ‘마라이’라고 칭하는 것이 무척 신경 쓰이고 헷갈리는 거, 이거 어쩔겨? (구글 검색하면 '마라이'가 성姓이고 '산도르'가 이름이다)
 좋아. 시작하기 전에 이 정도 구라를 풀었으면 일단 됐고, 책 이야기로 들어가면, 마라이가 1942년에 발표한 소설 <열정>이 1989년 이탈리아에서 다시 발행된 다음부터 폭발하기 시작해서, 물론 광고문구 특유의 과장이 큰 역할을 하겠지만, 거의 최고 수준의 20세기 작가로 추앙을 받고 있다고 한다. 심지어 책 뒤표지 보면, “이미 고인이 된 거장巨匠을 20세기 문학에 선물했다. 우리는 앞으로 토마스 만, 카프카, 로베르트 무질과 나란히 이 거장 산도르 마라이를 거론할 것이다.”라고 어마어마하게 뻥을 쳐놓았다. 대단하지?
 근데, 정가 11,000원으로 솔 출판사에서 나온 이 책, 웬만하면 한 번씩 읽어보심이 어떠하실지. 합스부르크 왕가의 마지막 황제인 프란츠 요제프와 친밀한 관계를 이룬 헝가리의 막강한 귀족 가문의 외아들 헨릭. 말이 쉬워 귀족이지 이 정도면 수준이 귀족 중에서도 저 꼭대기, 가문대대로 정승판서 안 한 조상 없는 그런 집안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근데 이런 집안의 외아들 헨릭은, 얘네 헝가리 아빠하고 프랑스 엄마 사이에 극복하기 힘든 성격상 차이가 있어서 그랬는지 아주 어려서부터 자신의 곁에 누군가 절대적으로 믿을 수 있는 사람이 없으면 신체적, 그리고 당연히 정신적 공황상태로 빠지는 경향이 있었다. 소년기엔 열여섯 살 위의 유모 니니가 없으면 당장 체온이 급상승하고 정말 며칠 안으로 짧은 생을 마칠 것 같은 위험한 지경에 이르다가, 저 헝가리 벌판에서 열차를 삼박사일 타고 파리를 거쳐 북부 해안까지 유모 니니가 달려오자 금방 병에서 낫는 놀라운 회복력을 보인 적도 있다. 물론 전적으로 믿을 필요는 없겠지. 그 일화는 소년기에 접어들어 사관학교에 입학한 다음에 절친한 친구, 진정한 우정으로 운명(난 분명히 ‘운명’이라고 했지 ‘죽음’이라고는 안 했음!)이 이들을 갈라놓을 때까지 형제보다 더 가까운 정을 나누는 폴란드 출신의 가난한 귀족 집안의 자제 콘라드와의 친교가 헨릭에게 얼마나 중요한 요소인지를 강조하기 위한 연출일 확률이 높기는 하다. 하여간 책의 주인공 헨릭이란 캐릭터가 그렇다는 말씀.
 헨릭. 놀라운 인물이다.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여 용감하지도 않고 비겁하지도 않게 전투에 임하면서 오직 하나, 자신은 살아남아야 한다는 목적을 어떻게 해서든지 달성하고, 전쟁이 끝난 다음에 저 헝가리 촌구석, 자신의 영지, 자신의 저택에 칩거하기를 무려 41년 43일째에 이른 구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퇴역 장군. 이제 아흔한 살이 된 니니와 여전히 함께 살며, 노파에게 오늘 41년 만에 손님이 올 터이니 저녁식사를 준비해줄 수 있느냐고 물으면서 소설은 시작한다. 이 집안에서 벌어진 모든 사건, 모든 자그마한 소란 등을 온전하게 기억하고 있는 니니. 비록 한쪽 눈은 백내장으로 하얀 막에 싸여 보이지 않지만, 나머지 하나, 구름 한 점 없는 가을 하늘 같은 파란 눈을 초롱이면서 기꺼이 41년 전, 저택에서 있었던 마지막 만찬과 비슷하게 식탁을 차리겠노라 응한다.
 한 인간이 41년이 넘도록 넓은 영지와 저택 안에서 전화나 TV, 라디오조차 설치하지 않고, 오직 사색과 가끔가다 사냥으로만 소일하며, 많고 많은 주어진 시간을 다 바쳐  깊은 숙고를 거듭했으니, 어찌 이 인간을 우리는 ‘도사’ 또는 ‘신선’으로 칭하지 못할까. 모르긴 몰라도 이 양반 죽은 다음에 화장하면 몸에서 사리 같은 건 좋이 나오리라. 실제로도 소년 헨릭은 이미 일흔다섯 살의 오늘 낼, 하는 노인으로 늙어갔다. 그건 그와 필생의 우정을 나눈 콘라드도 마찬가지. 둘이 동갑이니까. 말은 오늘 낼 한다고 썼지만, 이들은 나이에 비하면 놀라울 정도의 건강을 유지하고 있는 상태다. 이쯤에서 스포일러 하나 꽝. 41년 전, 이들 사이에 비극적인 일이 생겨 콘라드가 장교직을 사임하고 해외로 떠나게 됐는데, 두 사람 다 당연히 비극적인 일의 당사자이며, 헨릭은 틀림없이 콘라드가 생을 마감하기 전에 한 번은 자신을 방문할 것을 믿어 평생 영지와 저택을 떠나지 않았고, 콘라드 역시 자신이 죽음의 부드러운 손길을 받기 전에 언젠가는 한 번 헨릭을 방문할 수밖에 없는 운명임을 잊지 않아, 둘 다 그때를 위해 어떻게 해서든지 생존해 있는 것은 물론이고 서로가 서로를 만났을 때를 위하여 보통 이상의 건강을 유지하고 있는 것.
 그러니까 다시 말하면 이런 이상 상태의 생명유지와 건강은, 이들이 만난 다음이면 급격하게 쇠퇴할 수 있다는 전제다. 오직 하나, 둘이 언젠가 만나 41년 전에 있었던 비극에 대한 비밀, 바꿔서 얘기해 진실을 밝히면, 그 일 한 번으로 더 이상 생을 이어갈 목적이나 이유가 소멸된다는 뜻. 그럴 만큼 41년을 묵힌 진실은 두 인물한테는 절대적이다.
 나는 당연히 저 먼먼 시절의 비극적인 일에 관해서 그게 어떤 일이었는지 조금도 귀띔해주고 싶지 않다. 다만, 41년을 저 광활한 헝가리의 영지와 저택에서 인생을 관조하고 한 사건을 집중해 사색한 헨릭, 그의 묵은 사색이 중첩하여 인간과 인간이 가질 수 있는 감정에 관한 놀라운 성찰을 읽을 수 있는 것 하나만 가지고도 이 책을 선택하는 이유일 수 있다는 점만 강조하겠다. 거기다가 전편을 걸쳐 차분하게 펼쳐지는 아름다운 문장들까지.
 책을 읽고 산도르 마라이의 다른 저작들을 검색해봤지만 거의 다 절판 아니면 품절이다. 매우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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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17-12-01 09: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회사의 어떤 분이 이 책 한 번 읽어보라고 하셨는데... 중고 서점에서 이 책 발견하고는 살까말까 하다 결국 관뒀거든요. ㅋㅋㅋ 근데 폴스타프 님이 읽어보라고 하니 사올걸 하는 후회가... ㅋㅋㅋㅋㅋ (도서관에도 있더라고요. 빌려봐야겠습니다)

Falstaff 2017-12-01 10:06   좋아요 2 | URL
옙. 도서관에 있는 책, 괜히 사실 필요 없습지요. ㅎㅎㅎ
근데 좋은 회사 다니시네요. 전 회사에서 누군가에게 이 책 읽어봐라, 이렇게 권할 직원이 안 보여요. ㅠㅠ 하긴 원래 중원의 고수는 죽림에 묻혀 있는 것이지만요. ㅋㅋ

레삭매냐 2017-12-01 16: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중역본이군요. 하긴 우리나라에서 헝가리말을
번역할 인재가 없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듭니다.

부리나케 검색해 보니 근처 중고서점에 구판버전
으로 중고책이 있다고 하네요. 커피 한 잔 값보
다 싸다고 하니 바로 달려 가서 땡낄까 고민 중
입니다.

다른 책들도 거의 다 살 수가 없네요.

Falstaff 2017-12-01 16:53   좋아요 0 | URL
저도 이 책을 추천받아 읽어본 건데, 하도 오래 전이라 추천해준 사람(또는 믿을 만한 매체)인지 기억나지 않네요.
나름대로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중고책이면 읽어보세요. 마라이의 대표작이라 하더라고요. 저 사는 동네도 중고서점이 있는데 책이 별로 없어서요. ㅠㅠ

레삭매냐 2017-12-01 17:30   좋아요 0 | URL
오옷 중고서점에 산도르 마라이의 책이
세 권이나 있다고 하네요. 가서 쓸어와야
겠습니다.

Falstaff 2017-12-03 12:11   좋아요 0 | URL
지금쯤이면 마라이는 다 건지셨겠군요. ^^
저도 한번 책방 뒤져봐야겠습니다.

sprenown 2017-12-02 09: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장철인데 묵은 김장김치 같은 책인가 봐요. 3년묵은 묵은지도 아니고 41년 깊은 맛! 게다가 체코도 아니고 헝가리..김치는 항아리에 묻어둬야 아삭하면서 깊은맛이 나는 법!

Falstaff 2017-12-03 12:13   좋아요 0 | URL
ㅎㅎ 맞습니다. 깊은 맛이 나는 소설이더군요.
작가의 다른 책도 얼른 중쇄를 찍었으면 좋겠는데 힘들 거 같아 아쉽네요.

2017-12-02 10: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12-03 12: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그런데 그런데 실천문학 시집선(실천시선) 206
박순원 지음 / 실천문학사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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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때 무크지 <실천문학>을 열라 읽던 시기가 있었다. 창간호부터 85년까진가 86년까진가는 일년에 한 번씩 나오다 세월 좋아지니 분기 간으로 발행했다. 그러다가 흐지부지, 실천문학사가 흐지부지 했다는 게 아니라, 잡지만 사놓지 내가 읽기를 흐지부지 했다는 말씀. 하도 오랜만에 실천문학사가 만든 시집을 읽으니 이런 생각도 들었다.
 박순원. 재미난 시인이다. 시집 <그런데 그런데>만 국한해서 생각한다면(난 이이의 책은 이거 말곤 읽어본 것이 없으니 당연한 얘기지만), 지금은 지방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시를 쓰는데, 김소월과 김수영을 읽다가 대단히 흠모하게 되어 아예 그들의 시 부분을 통째로 슬쩍 가져오는 지경에 이르렀고(김소월과 김수영의 조각을 가져왔다고 이이에게 표절의 굴레를 씌우는 작자는 시 독자도 아니고, 심하게 얘기하면 인간도 아니다), 술 한 번 마셨다 하면 1차, 2차, 3차, ……, n차 까지 무궁한 괘도를 돌며, 노래방에선 방영순, 이라고 쓰니까 누군지 모르시겠지? 서울 시스터즈 멤버 ‘방실이’, 하니까 아하? 그려, 이 언니가 히트시킨 <서울 탱고>를 악을 쓰며 노래하고, 지금이야 훨씬 나이가 더 들었지만 마흔네 살 땐 “꽃잎을 뜯어 먹고 / 지금 죽을까 // 내가 죽으면 아내는 / 미망인이 되어 / 미망이 되어 / 아니지 // 아니지 재혼하겠지 / 어린아이 둘을 데리고 / 슬픔에 겨워 겨워 울먹이고 / 까무러쳤다 일어나” 틀림없이 새로 시집갈 거라고 노래했고, 아직도 수퍼마켓에서 팔고 있는 아이스크림 이름을 줄줄이 꿰고 있는데 그중에서 ‘서주 아이스주’를 제일 좋아하며, 가끔가다가 군대 시절, 중학교 시절을 되돌아보며 시를 쓰는 인간이다. 그러나 역시 시인이 돋보이는 건, 세상을 농담 속에 담아내는 매운 솜씨. 한 번 보실래?



 풀



 수컷 한 마리 암컷 한 마리에게
 눈길을 준다 배시시 웃는 암컷
 수컷 다가간다 뭐라고 뭐라고 떠들자
 암컷 고개를 끄덕인다 반팔쯤 사이를
 두고 수컷을 따라간다
 풀이 눕는다
 바람보다 먼저 눕는다


 즐거운 곳에서는 날 오라 하여도
 아들 하나와 딸 하나가 함께 노래한다
 아빠 힘내세요 우리가 있잖아요
 즐거운 곳에서는 날 오라 하여도
 집에 있는 암컷 한 마리 머리를 긁적이며
 수첩에 뭘 적고 있다  (전문)



 읽는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난 이 시를 읽으며 배꼽을 잡았다. 누구나가 알 수 있듯이 분명한 김수영 코스프레. 1연 앞쪽에선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가 마지막 두줄에서 감을 잡고, 2연에 접어들어 수컷이 ‘나’ 또는 시인 박순원, 암컷은 ‘나’ 또는 박순원의 아내. 다 읽고 다시 1연으로 돌아와 한 번 더 읽어보니 좀 에로틱한 “풀이 눕는다 / 바람보다 먼저 눕는다”도 그렇고, 한 집에 오글조글한 가정의 약간 궁상스런 살림의 모습 같은 것도, 김수영의 직업이 원래 양계장 주인이니 사람을 암컷 수컷으로 나눈 것도 다 김수영 코스프레다. 근데 하나도 이상하지 않다. 김수영의 원 시 <풀>에서 우리는 얼마나 비장하게 “풀이 놉는다 / 바람보다 (더 빨리) 눕는다”를 외웠는가. 그것이 한 반 백년 지나니 이렇게 재미나게 변주된다.
 박순원의 시들을 읽자니 사물을 관찰, 자신의 눈을 통해 들어와 뇌를 한 바퀴 돌아서 손끝이 두드리는 자판에 의해 PC 화면에 뜨는 글자들의 모음(組)으로의 시는 가끔가다가, 아니, 자주 비관적이고 끔찍하고, 극히 소심하지만 벗어나지 못하는 굴레 같은 걸 포착하기도 한다. 지하철 환승역인 <교대역>, 열차에서 무수하게 쏟아지는 인간들과 다시 꾸역꾸역 객차로 들이밀어지는 인간들을 보는 시인은 순간적으로 김밥 옆구리 터지는 걸 보고, 김밥 옆구리 터지는 소리를 들으며, “그리고 단호하게 문을 닫아 모든 상황을 봉합하고 다시 출발하는 지하철을 볼 때 나는 실제로 옆구리가 터진 김밥을 보지는 못했지만 설사 내 옆구리가 터진다고 하더라고 심한 농담쯤으로 여기며 다시 천천히 출발할 힘을 얻”기도 한다. (<교대역> 부분. 67쪽)
 서울에 살거나 서울에 살았던 사람 가운데 교대역에서 환승해 출퇴근을 해본 사람들은(물론 신도림역 환승의 아수라판은 더 하지만) 아시리라. 나도 그 가운데 하나였거니와(그거 지겨워서 지방살이 한지 30년 가깝다), 그걸 경험하면서 김밥 옆구리 터지는 걸 보고, 그러면서도 다시 출발할 힘을 얻는 인간은 시인이 되는 거고, 객차 안의 땀내, 겨드랑 냄새, 남녀 사타구니에서 폴폴 새나오는 (참 여러 가지 오묘한) 냄새, 구취, 방귀냄새에 어질어질한 머리통을 견뎌내며 드디어 객차탈출을 성공한 순간 완벽하게 아무 생각 없이, 사무실에 도착할 수 있을까 말고는 진짜 아무런 상상도 하지 못하는 인간은 기껏해야 독자가 되는 거다. 어쨌든 옆구리 터지는 세밀화는 바로 앞 쪽에 나오는 시에선 또 이렇게 변한다.



 나는 개를 기르지 않지만



 지나가다 어떤 강아지에서 체념의 표정을 읽을 때가 있다 대부분의 강아지는 명랑하지만 간혹 시무룩한 강아지를 만나기도 한다 주인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일부러 낑낑거리며 불쌍한 척 슬픈 척 연기를 하는 강아지도 있다


 강아지는 체념이라는 말을 모르기 때문에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체념이라는 말을 아는 내가 보기에 그것을 분명 체념의 표정이었다 나도 체념이라는 말을 알지 못했다면 모든 것을 단념해야 하는 이 상황과 이 처참한 기분을 뭐라고 해야 할지


 나는 낙지의 표정을 읽을 수는 없지만 산낙지로 연포탕을 끓일 때 마지막으로 크게 한번 몸을 뒤트는 것 그것이 체념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전문. 66쪽)



 체념에 관한 고찰, 정도로 읽어 무방한데, 여기선 김밥 옆구리 터지는 소리 대신에, 펄펄 끓는 물에 낙지를 산 채로 퐁당 빠뜨려 살짝 익혀 먹는 연포탕. 여기다 흥부네 집구석 지붕 위에 있던 바로 그 박을 쪼개 박 속을 벅벅 긁어 나온 하얀 살을 미리 폭 끓이면 조금 더 비싼 박속 낙지탕, 또는 박속 연포탕이 되는데, 어쨌거나 공통적인 레시피는 반드시 살아있는 낙지를 펄펄 끓는 육수에 산 채로 빠뜨려야 한다는 거. 낙지는 물론 알지 못하겠지만 이런 방식으로 죽는 일이 비단 낙지한테만이 아니라 일찍이 유방을 도와 천하를 통일한 한나라 한신도 같은 방법으로 죽은 건 물론이거니와, 앙드레 말로의 <정복자들> 읽어보면, 현대 중국사에서도 수백 명을 펄펄 끓는 물에 빠뜨려 죽이는 처형이 나오니, 이같이 죽어가는 낙지들에게 조금 위안이 될…, 지금 무슨 얘길 하고 있는 거야? 하여간 뜨거운 육수에 빠진 낙지의 마지막 꿈틀거림이 체념이라고 박순원은 주장하고 있는 거다. 술꾼은 술꾼인 모양이다. 시집 읽어보면 배가 나와서 발톱 깎기가 매우 어려운 경지에 올랐다고 하니(내 그 곤란함을 알지, 흐흐) 시인이 진짜 술꾼인 건 분명하다. 별로 마시지도 않으면서 술꾼입네 하는 유사술꾼들은 도저히 흉내 못내는 단계에 이르렀으니, 짐작하건데 맥주, 양주, 고량주, 막걸리 등은 다 빼고, 안 마셨다 치고, 1년에 소주만 한 500병 마시는 수준, 아닐까?
 삶의 주변에 있는 모든 것, 최고급과 고급의 단계가 아닌 인간들의 친숙한 사물을 재료로 해서, 과거 파시스트에 의하여 불편했던 시기의 소년시대 경험부터 최근 시인 친구들의 사는 모습까지, 코미디와 대중적인 비유와, 노래 가사와, 대리운전기사의 짜증까지 두루 섞어 만든 익숙한, 그러나 구경하기 힘들었던 시들.
 근데 그거 아셔? 이 책에 <그런데 그런데>란 시가 나오지 않는 거. 그런데, <그런데 그런데>가 시집 넘기자마자 처음 나오는 시에 들어 있다는 거. 진짜? 진짜라니까. 엣다, 기분이다. 읽어보시라.



 아라비안나이트



 나는 그런데가 좋다 그리고도 그렇고 그러나도 그저 그렇고 그러므로는 딱 질색이다 그런데 그런데야말로 정겹고 반갑다 누가 손가락으로 나를 딱 짚으며 이렇게 묻는다 그런데 너는? 나는 이렇게 대답한다 그야 나야 물론 그런데 순딩이 같은 그리고는 개성이 없다 그러나는 까칠하다 그러므로는 고지식하다 그러니까는 촌스럽다 특히 끝의 두 글자 니까가 마음에 안 든다 그런데는 두루뭉술하면서도 날렵하게 빠져 다닌다 그랜저 같다 그런데와 함께라면 어디든 갈 수 있다 그런데 말이지 천연덕스럽게 자기가 가고 싶은 쪽으로 말머리를 돌린다 그러므로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나는 어떤 이야기 속에서 천 개가 넘는 그런데를 본 적이 있다 안 가본 데가 없고 황홀하기 그지없었다 그런데는 아주 짧게 짜증도 낼 수 있다 그런데?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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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밀란 쿤데라가 말입죠, 현대 체코 문학을 대표하는 거장 가운데 한 명이라고요? 천만의 말씀을요. 특별히 이 <정체성>이란 소설을 읽어보니까 처음부터 저 끝까지 아주 전형적인 프랑스 현대소설을 읽는 거 같더라고요. 당연하다고요? 아무럼요, 헤헤헤. 소설을 프랑스 언어로 쓰면 이 작가는 프랑스 소설가인 거 아니겠습니까. 제가 뭘 알겠습니까만, 첫 장을 넘기자마자 노르망디 해변 작은 도시의 어느 호텔 식당에서 웨이트리스들이 10년 전에 실종된 사람이 아직도 소식이 없는 “끔찍한” 상황에 관하여 조잘대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게 어디서 “본” 거 같다고 팍팍 신호가 옵니다. 소년 하나가 피아노 교습을 받으면서 피아노 교사에게 끊임없이 잔소리를 듣지요. 보통속도로 노래하듯이 치란 말이야, 보통속도로. 염병. 전문 피아니스트도 아니고 이제 피아노 교습을 받는 아이가 어떻게 보통의 속도로 연주하면서 마치 노래하듯이 하냐고요. 이 소년이 피아노 교습을 받는 장소가 해변 가 마을의 한 건물입니다. 이때 어디선가 살인 사건이 벌어지고 소년은 발딱 일어나 창가로 가서 바깥을 내다봅니다. 왜 이 장면이 생각났을까요? 잔-모로와 장 폴 베르몽도가 주인공을 하는 영화이자 마르그리뜨 뒤 라스의 짧은 소설 <모데라토 칸타빌레>의 첫 장면입니다. 이거나 그거나 실종자 또는 살인사건에도 불구하고 해변의 호텔식당이나 피아노 교습소는 권태와 일상이 뚝뚝 떨어지거든요. 그래서 뒤 라스가 생각났는지도 모르겠습니다요. 아, 이렇게 쓰니 참 좋군요. 역시 잘난 척하는 건 참 행복하고 근사한 일입니다. 듣는 분이야 재수 없을지 모르지만 말입니다.


 단체로 스키 여행을 갔는데, 밤마다 거창한 파티로 일정이 끝나는 일종의 단합대회 격이었다. 그런데 누군가의 실수로 딱 하루 스키 강사, 장-마르크를 파티에 초대했고, 장-마르크는 거기서 다섯 살 난 아들이 죽자(아이를 불행하게 잃은 부부가 흔히들 그렇듯이) 이혼해버리고 지금은 혼자 사는 돌씽, 샹탈한테 한 눈에 반해버린다. 그래서 다음날은 초대도 받지 않았는데도 그냥 파티에 쳐들어가 이미 온 몸이 달아오른 샹탈의 손을 잡고 연회장을 빠져나와 어두컴컴한 긴 복도에 기대 진하고 진한 키스를 한다. 물론 상당한 양의 침도 튀어가며(으~ 냄새).
 지금 독후감을 읽으며 누군가는 내가 ‘으~ 냄새’ 한 것에 비실비실 웃을 수도 있고, 또 다른 누군가는 꼭 침 냄새 이야기를 해서 분위기를 깨야 하는지 시비를 거실 분도 있고, 나잇살이나 먹은 것들이 아무리 진한 키스를 한다고 해도 그렇지 어찌 십대 아이들처럼 키스하면서 입술 주변에 침을 바르느냐고 이들의 아마추어리즘에 혀를 찰 수도 있다. 다들 옳으신 말씀이신데, 하여간 으~ 냄새, 한 건 나름대로 다 이유가 있으니 궁금하시면? 맞다, 직접 읽어보시라. 물론 얇은 책 전체로 보면 아주, 아주, 아주 사소한 것이긴 하지만.
 하여간 침 튀기며 제대로 키스를 한 장-마르크와 샹탈은 그길로 동거에 들어간다. 샹탈의 아파트에서, 샹탈과 장-마르크의 현금 수입이 5대 1 정도. 그러니까 의식주의 거의 대부분은 샹탈의 소유, 아울러 그녀의 수입에 의존한다고 해도 절대 틀린 말이 아니다. 하지만 문제는 42쪽. 이 부분을 작가는 괄호를 쳐서 이렇게 썼다.
 “(그녀는 그보다 네 살 위였다)”
 이 책, 중고책 산 거다. 중고책 티를 아주 제대로 내서, 정말로 책갈피 사이에 연애편지 네 번 접은 거, 아주 얇은 종이에 손으로 파란 볼펜, 붉은 볼펜 섞어서 여자가 남자에게 보내는 편지, 글씨가 예쁜 거 보니까 얼굴도 예쁘다는 환상을 가지고 있지는 않지만, 그 편지글을 여기다가 그대로 옮겨버릴까, 잠깐 생각했다가, 적어도 편지 쓸 때는 이게 진심이었을 것이란 진리에 도달해, 그들의 사랑 또는 연애의 순결을 위해 그냥 찢어, 박박 찢어, 휴지통에 버렸다.
 왜 이 순간에 중고책이란 걸 밝히느냐 하면, 여자가 네 살 위인데 역자 이재룡은 남자가 여자한테 하는 대사는 반말, 여자가 남자한테 하는 대사는 존댓말. 이렇게 번역했다. 그러나, 누군가 혹은 누구들한테 쌍코피가 터졌음이 분명해서, 이제 표지 바꿔 새로 쿤데라 전집으로 개정판이 나온 거 보니까 둘 다, 서로 말 놓고 편하게 대화하더라. 재밌다. 그럼, 그럼. 요새 거기서 자유로운 남자들, 거의 없다.
 서로가 서로를 오해하기 위한 최선의 방법은, 자신이 어떤 것을 바라고 있거나, 특별한 행위를 상대에게 할 때 행위의 목적을 정확하게 알리지 않는 것. 즉, 서로가 서로를 사랑하며(사랑? 요새 한 근에 얼마야?) 굳게 신뢰하고 있어서, 자신이 바라는 것, 또는 특별한 행위(이를테면 선물을 한다든지, 안 하던 짓을 한다든지 하는 것)의 목적을 “꼭 말로 해야 알까” 싶어서 당연한 듯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상대방이 알아주기 바라는 것이다. 이런 커플은 거의 틀림없이 탈난다. 언어와 문자는 왜 만들었는데. 서로 대화하라고. 말을 해서 자기가 원하는 거, 하고 싶은 거, 이런 것들에 관해 정확한 단어와 문장을 써서 분명하게 이해하라고 있는 것이다. 난 부부 간에, 회사 조직에서 제일 한심한 경우가 “그걸 꼭 말로 해야 아니?” 이렇게 주장하는 인간들이다. 말로 해야 안다. 내 생일이니까, 남편새낀 내가 한 달 전에 킹 크랩 먹고 싶다고 한 거 분명히 기억하고 있을 거야. 공정상 좀 문제가 있는 거 아니까 기술1팀이 알아서 조치를 해주겠지. 염병들을 해라, 염병을.
 다시 한 번 강조. 꼭 말로 해야 안다. 명심하시고 인생 사시라.
 장-마르크보다 네 살 많은 샹탈. 그녀가 장-마르크를 기다리다 한 카페에 들렀는데, 젊고 좀 거칠게 느껴지는 웨이터들에게 약간 불쾌한 일을 당해 카페에서 나와 심신이 어수선한 상태에서 장-마르크를 만난다. 얼굴에 홍조를 띈 것을 알게 된 장-마르크, “무슨 일이 있었지? 웬일이야?”하고 묻는다.
 “아무 일도 없어요.”
 “뭐라고? 아무 일이 없었다니? 당신이 몰라보게 달라졌잖아.”
 “잠을 설쳤어요. 거의 한숨도 자지 못했어요. 그리고 아침 나절에 좋지 않은 일이 있었어요.”
 “나쁜 일이라니? 왜?”
 “그냥 그랬어요. 아무것도 아닌 일로.”
 “말해 봐”
 여기서 샹탈이 카페 이야기, 거기 남자새끼들 얘기를 제대로 다 했으면 이 소설은 생기지도 않았고, 당연히 난 이 책을 읽을 필요도 없었을 텐데, 밀란 쿤데라, 기어이 중고책이라도 내 주머니에서 돈을 빼가느라 샹탈로 하여금 이렇게 대답하게 만든다.
 “남자들이 더 이상 나를 돌아보지 않아요.”
 처음부터 이 커플은 샹탈이 네 살 위다. 애초부터 장-마르크는 샹탈에게 젊은이의 싱그러운 예쁨이나 탄력 있는 육체를 원하지 않았다. 나이 들어 원숙해 오히려 더 아름다운 모습에 반한 것이지.
 순진한 장-마르크. 샹탈의 이 말이 진심이라고 오해해서, 서로간의 의사 불통이 계속 엉뚱한 일을 만들어내고, 엉뚱한 일은 당연히 생각하지도 못했던 결과를 초래하는 오해의 연속과 불행으로 초대하는 인생극, 즉 코미디 한 편을 만들어낸다. 하지만 샹탈은 기껏 장-마르크가 머리 굴려가며 벌인 촌극을 절대 이해하지 않고, 장-마라크 역시 샹탈이 이해하지 않는 것을 이해하지 않으며…….


 제가 말입죠, 그래도 양심이란 것이 조금, 아주 조금 있어서 책 얘기는 여기서 말아야 하겠습니다. 겨우 177쪽에 불과합니다. 민음사가 페이지 분량을 늘리는 놀라운 편집기술을 펼쳐 177쪽까지 늘여놓은 거라서 사실 맘 먹고 읽으려면 반나절이면 충분합니다. 그래서 줄거리, 이 소설의 특징과 상징 또는 메타포에 관해 더 주절대면 예의가 아닐 것이라서 말입니다. 그런데 말씀이지요, 마지막에 가면 쿤데라 특유의 장난끼가 도진다는 힌트를 드리는 건 괜찮을 거 같습니다. 거의 언제나 쿤데라, 이 영감이 특유의 상징을 빙자한 장난으로 자신의 작품을 근사하게 포장하는 습관이 있잖습니까. 뭔 말씀이냐 하면, 책의 앞부분에선 현대 프랑스 소설에서 읽은 듯한 기시감을 느낄 수 있다면, 마지막 부분에선 성인판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한 장면 같기도 하단 것이지요. 무슨 뜻이냐고요? 에이, 그걸 어찌 가르쳐드릴 수 있겠습니까. 수고스럽겠지만 책 사서 읽어보세요. 재미나고 짧아서 부담 없이 읽다가, 심하게 부담 느끼면서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실 거니까요. 새로 찍은 이런 표지의 책을 사셔요. 이 책에선 얘기한대로 샹탈(이름 참 색다르죠?)이 연하 애인이자 동거남 장-마르크한테 편하게 대사합니다. 새 책은 이렇게 생겼습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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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만스러운 탐정들 1
로베르토 볼라뇨 지음, 우석균 옮김 / 열린책들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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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5년 11월, 조실부모하고 삼촌 댁에서 커온 열일곱 살 대학 초년생 가르시아 마데로. 자기는 시를 쓰고 싶은데 어려서부터 조카 뒷바라지 해온 삼촌의 희망을 거스를 수 없어 법학을 전공하고 있는 이 책의 주인공 가운데 한 명. 아, 책 이야기 들어가기 전에 먼저 흰소리 한 방.
 나 중학생 시절이었을 때, 숱한 놈팡이들의 마음의 고향, 미아리 텍사스 바로 옆, 유장하게 흐르는 세느 강가에 위치한, 북쪽으로 창을 내 가을부터 봄까지 시베리아 바람이 그치지 않았던 언덕박이 아르센 루팡 중학교의 국어교사 중에는 시인이 다른 학교에 비해서 유별나게 많았다. 소위 말하는 등단 시인. 당연히 시집을 몇 권씩 낸 분도 있었지만 그러면 뭐해, 그분들 이름도 기억 못하는 걸. 그중 참으로 인자하시어 학생들이 졸거나 말거나, 수업시간에 당대 청소년들에겐 참으로 교육적이었던 잡지 플레이보이를 돌려보거나 말거나 전혀 신경 안 쓰고 그냥 수업만 진행하던 시인께서 한 분 계셨는데, 소위 말하는 전위적인 시를 쓰셨다. 요새 우리가 흔히 읽을 수 있는' 과도한 감상과 추상적 단어, 암호화' 등은 당시 전위 시에 비하면 이도 나지 않은 상태라고 말할 수 있겠다. 시에다 그림도 그리고 줄도 죽죽 긋고, 시를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쓰기도 하고, 이제 대가리 커서 생각해보면 그게 1920년대 앙드레 브르통으로 대표하는 초현실주의에서 시작한 한 경향에 크게 영향을 받은 듯하다(난 초현실주의 문학작품을 지독하게 싫어하는 1인). 이상李箱이 노래하길, 십삼인의 아해가 도로로 질주하고, 이랬다. 이 노래를 읽고 추상이나 반논리反論理라고 하지 초현실주의에 입각한 전위라고는 얘기하지 않는다. <오감도> 정도는 전위에 들어가지도 못한다는 말씀. 내가 아는 것이 짧아 전위시인이라고 일컫는 사람들의 시를 기억하는 것이 없어 샘플로 그런 시를 소개하지 못하는 것이 아쉽다. 근데 1975년 멕시코엔 이런 전위적인 시를 쓰고자 하는 시인들이 모여 한 그룹을 만들었으니, 이름하여, 내장內臟사실주의.
 982쪽에 이르는 장편소설 가운데 거의 맨 앞부분에 등장하는 내장사실주의자들. 많아봐야 스무 살을 갓 넘긴 젊은이들이 전위적인 시를 쓰기 위해 모여 동인잡지를 딱 한 번 만들고나서 역사의 저편으로 사라지는 젊디젊은 시인들의 그룹, 이라 읽기에는 조금 무리. 그것보다는 ‘시인 지망생들’이 젊음의 치열한 통과과정을 거쳐 성인이 되고, (당연히 시인도 되고 계속 글을 쓰지만) 저 멀리 멕시코에서 1920년대부터 시작한 전위적 작가들을 포함한 (거의)모든 전위시인들은, 이 책 <야만스러운 탐정들>의 70% 이상을 바쳐 적나라하게 보여주듯이, 20세기 말까지도 결국 그(전위의) 뜻을 실어 펴지 못한다. 신시新詩 또는 新文學으로의 전위문학, 전위시를 허용하지 않고 결국은 시인들의 펜을 꺾게 만드는 당대의 시절을 볼라뇨는 ‘야만’이라고 칭했던 것. ‘탐정’은 뭐냐고? 그건 당신들이 찾아내시라.
 난 이 책을 읽으면서야 ‘내장사실주의’라는 것이 한 번 거론이 됐다는 걸 알 정도의 형광등이었다. 앞부분에 나오는 내장사실주의를 읽고, 책을 끝내자마자 재빨리 인터넷을 열고 우리나라에 한 때 열광적으로 거론이 되던 ‘후장사실주의’를 검색해봤다. 대한민국의 ‘후장사실주의’는 멕시코의 내장사실주의와는 달리 특정한 장르의 문학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마치 시의 작법이 다른 박목월, 조지훈, 박두진을 일컬어 그냥 <청록파>라고 부르듯, 이제부턴 전적으로 내 생각일 따름인데, ‘후장사실주의’라는 이름으로 정지돈을 비롯한 몇몇 문인들이 뭉쳐서 우리 ‘후장사실주의’라고 부르자, 해서 생긴 모임으로 이해한다. 여기서 ‘후장’은 항문을 일컫는 말이라서, 볼라뇨가 2003년에 간부전으로 죽지만 않았다면 ‘내장사실주의’를 능가하는 ‘후장사실주의’를 생각하지 못한 자신의 한계를 통탄했으리라. 혹시 알아, 정말로 땅을 치고 엉엉 울었을지?
 여기까지 쓴 것을 한 번 쓱 읽어보니까, 그냥 그런 소설책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다는 것이 솔직한 심정이다. 그러나 정말로 읽어보면 얘기가 달라진다. 책을 이끌고 가는 중요한 인물은 1975년에 법학과 프레시맨이었던 가르시아 마데로와 칠레 출신 불법체류자 알베르토 벨라노, 역시 칠레 태생의 싸움 잘하는 내장사실주의자들의 대장격인 울리세스 리마, 그리고 (이것 또한 전적으로 내 생각인데) 1920년대 반골시라는 이름의 전위시인으로 이름이 높았던 노인 아마데오 살바티에라. 이들의 베아트리체, 젊은 1950년대 생 청춘들이 죽어라고 찾아다니는 원조 여류 전위시인 세사레아 티나헤로까지, 여섯 명의 등장인물이 벌이는 유랑과 사랑, 방황, 그리고 몰락의 과정을 다양한 인물의 시각으로 그려낸다.
 움베르토 에코는 <로아나 여왕의 신비한 불꽃>에서 진짜 시인은 스물 살이 되면 펜을 던져버리고 아프리카로 무기를 팔러 떠난다고 했다. 근데 여기서 진짜로 그런 인간이 나온다. 스무 살 쯤에 조국 칠레도 싫고, 멕시코도 싫어 유럽으로의 밀항에 성공을 하고, 거기서도 실컷 방황을 한 다음, 누구는 또다시 텔아비브로, 누구는 콩고민주공화국을 거쳐 당시 내란의 최고조에 달했던 라이베리아로 떠난 인물. 누가 생각난다고? 맞습니다. 랭보. “진짜 시인은 스무 살이 되면 아프리카로 장사하러 떠난다”는 말이 참 심금을 울려 평생 읽지 않던 외국 번역시 <지옥에서 보낸 한 철>까지 읽었잖습니까? 이런 인간이 정말로 등장한다.
 오늘 좀 정신 사납게 독후감을 썼는데, 한 시절을 풍미했던 전위시인들의 모임, 내장사실주의자들이 어떻게 몰락해 가는지, 그걸 내장사실주의자를 바라보거나 같이 살거나, 아니면 하룻밤 같이 자 본 사람들의 시선으로, 아주 간혹 그 사람들의 입으로 직접 시인하는 과정을 그린 비극.
 근데 이거 비극 맞아? 비극인데 가끔 이렇게 웃겨도 괜찮은 거야?

 

 여태 난 이 로베르토 볼라뇨하고는 궁합이 맞지 않는다고 단언하며 살았다. 근데 이런 작품이 있을 줄이야. 이래서 함부로 가타부타 떠들고 다니는 거 아니다. 아, <2666>을 읽어봐? 말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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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잘 모르겠어 문학과지성 시인선 499
심보선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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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난한 시집. 난 어제도 잘 모르겠고 오늘도 잘 모르겠고, 내일 읽어도 이 시집 <오늘은 잘 모르겠어>는 잘 모를 거 같다. 에잇, 다짜고짜 시집의 표제 시 먼저 읽어보자.



 오늘은 잘 모르겠어



 당신의 눈동자
 내가 오래 바라보면 한 쌍의 신(神)이 됐었지
 
 당신의 무릎
 내가 그 아래 누우면 두 마리 새가 됐었지

 

 지지난밤에는 사랑을 나눴고
 지난밤에는 눈물을 흘렸던 것으로 볼 때
 어제까지 나는 인간이 확실했었으나


 오늘은 잘 모르겠어

 눈꺼풀은 지그시 닫히고
 무릎은 가만히 펴졌지

 

 거기까지는 알겠으나

 

 새는 다시 날아오나


 신은 언제 죽나


 그나저나 당신은…… (전문 28~29쪽)


 

 이게 뭐 좋다거나 시집의 핵심이 된다거나 해서 인용하는 게 아니라, 비교적 짧아 전문을 옮길 수 있는 몇 안 되는 작품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지지난밤에는 우리 둘이 서로 사랑을 해 몸을 섞었고, 지난밤에는 눈물을 흘려, 감정이 있는 사람이었던 것 같은데, 지금은 그것도 다 사라져 내가 사람인지 아닌지 잘 모르겠고, 아 이 다음부터가 문젠데, “눈꺼풀은 지그시 닫히고 / 무릎은 가만히 펴”진 상태가 과연 어떤 자세인지 헷갈린다. 일반적으로 생각해서 눈꺼풀이 지그시 닫히면서 동시에 무릎을 가만히 편다면, 이거 어떻게 본격적으로 야한 자세를 취하기 전에 흔히 시작하는 포즈? 이 상태에서 가만히 가만히, 소토 보체, 펴진 무릎만 옆으로 세우면 완전히 자세 나오는 거 아냐? 좋다, 그렇게 감안하고 다시 읽으면, 시인도 거기까진 알겠단다. 근데 새는 다시 날아오기는 하나? 신은 언제 죽지? 여기서 말하는 신이 뭐지? 세상 온 종교에서 말하는 신, 즉 하느님을 말하는 것인지, 시의 첫 부분에서 얘기했듯이 내가 오래 바라보던 당신의 두 눈알을 말하는 것인지 흠, 잘 모르겠다. 여기서 한 발 더 뗀다. 그나저나 당신은, 언제 죽나? 즉, 최종적으로 알고 싶었던 것이, 당신이 언제 죽는지 하는 거야? 즉, 한때 서로 사랑을 나누던 우리가 해체되어 이제 언제 당신이 죽어버리는지 그걸 오늘은 잘 모르겠다는, 것. 설마 이건 아니겠지.


 그러나 내가 읽기에 시집의 전반은 주로 외로움이나 그리움, 각운을 맞춰 “움”으로 끝나지만 엄연히 “외로움”과 “그리움”은 다르다는 걸 강조하면서, 이 두 가지 주제가 번갈아가며 등장한다. 

 

 “형은 어쩌면 신부님이 됐을 거야. / 오늘 어느 신부님을 만났는데 형 생각이 났어. / 나이가 나보다 두 살 많았는데 / 나한테 자율성이랑 타율성 외에도 / 신율성이라는 게 있다고 가르쳐줬어. // 신의 계율에 따라 사는 거래. // 나는 시율성이라는 것도 있다고 말해줬어. / 시의 운율에 따라 사는 거라고. / 신부님이 내 말에 웃었어. / 웃는 모습이 꼭 형 같았어.” (후략. <형> 69쪽)

 무려 다섯 쪽에 달하는 긴 시의 말미에 가면, 시인의 형은 존재하지 않는다. 있지도 않은 형을 만들어 가상의 형에게 자신의 외로움과 시를 쓰는 일 등 자신의 마음을 쏟아낼 수 있는 인격에 대한 그리움, 또한 그래서 그리움의 대상이 존재하지 않는 데에 대한 외로움까지 참 기막히게 노래하기도 한다.

 

 (전략) “왜 형은 애초부터 없었던 거야? / 왜 형은 태어나지도 죽지도 않았던 거야? / 왜 나는 슬플 때마다 둘째가 되는 거야? // 형, // 응?” (같은 시. 73쪽) 

 마지막에 여기까지 읽게 되면 독자는 대책 없이 얻어터진 뒤통수를 감싸 안을 수밖에.


 물론 언짢은 것도 없지는 않다.


 “나는 멀어지는 시인의 뒷모습을 대고 속삭였죠. / 잘 아시겠지만 우리는 시인이랍니다. / 오늘 우리가 응시한 것들 중에 / 적어도 개와 아이는 움찔했겠지요. / 하지만 선량한 우리는 늘 말하죠. / 무서워하지 말아요. 우리는 시인이랍니다.” (중략. 94~95쪽)


 “나는 소원을 빌기 위해 얼굴이 빨개졌답니다. / 나는 문득 늙은 청소부에게 소리치고 싶었지요. / 어이, 아저씨, 금요일에 나는 인간이고 싶었어요! / 나는 화들짝 깨어난 그에게 말하겠지요. / 놀라지 말아요. 나는 시인이랍니다.” (후략. <나는 시인이랍니다> 부분 96쪽)


 시인에겐 자신이 시인이라는 것이 벼슬이다. 이 시 바로 다음에 나오는 작품이 <나는 이제 시인이 아니랍니다>인데 그것도 자신이 시인이 아님을 주장하여 진짜 시인임을 강조하는 것으로 읽히는 건 어쩔 거야. 뭐 크게 틀린 일은 아니지만 시인은 아직도 자신이 시인이기 때문에 선하고, 엉뚱하고, 취한 듯 취하지 않은 듯한 것도 당연하다는 주장. 뭐 이딴 거, 다들 잘난 맛에 사는 거니까 마음이 넓은 독자들이 이해해주자. 물론 난 이미 까질 대로 까져서, 시인들의 이런 특권 주장을 들으면 저절로 가운데 손가락 하나만 위로 치켜지는 현상을 금할 수 없다. (불민한 내 경우에 국한해서 얘기하자면) 실생활에서 엮인 시인들은, 이놈이나 저년이나 어찌 그리 하나같이 못됐는지, 아휴!
 혹시 시인은 헤르마프로디토스라서 그들끼리만 서로 이해할 수 있다고, 그리하여 ‘우리 시인들은 그렇다’라고 말하는 거 아냐? 난 그렇게 읽히는데, 만일 옹졸한 내 생각이 맞다면 이렇게 말하리라. “가식 떨지 마!” (이 문단의 첫번째와 세번째 문장은 로베르토 볼라뇨, <야만스러운 탐정들>, 열린책들 2012. 262쪽에 나오는 걸 변형했다.)

 읽는 사람에 따라 (당연히!) 다르겠지만 내가 제일 재미나게 읽은 시는 무지하게 긴 시 두어 개 이후에 나오는 시집의 마지막 작품 <리던던시>. Redundancy, 사전 상 해석에 의하면 듣기만 해도 살벌한 ‘정리해고’는 아니겠고 ‘불필요한 중복’이란 뜻도 있는데 이건가? 아닌가? 제목이 어떤 의미를 갖고 있던 그건 별개로 하고 일단 읽어보시라.



 리던던시


 이 살픈 머을에 나 훈저 가하 모아 구름우에 망실히 사녀리메. 저 눞인 해롬우에 요살은 가루 눠고 묘살은 세루 눠요. 온 새랑이 서모 삮여 무릍 아훔 닐째 머하면 동념을 아지라지메. 뚜렁 서랑 꾸렁 마랑 옵고 만시나니 이 웊에 까막이 아이닐꼬나. 어뮈여, 우라 잠아에 꾸암만 옵고 만시나니 저 섶에 기럭이 아이닐꼬나. 고오면 가옵구 서오면 서롭다구 어모하모 거오룩지메. 아라리 던던시롬, 아라리 던던시랑, 저니어어는 보자하굼 저 너어어믄 자자하굼. 살픈 달옴 우방지에 다슴마듬 모초록안 오도록히 설펴가메, 이러부낭 저러부낭 삼은 삼답헤 삼다지요. 이러부낭 저러부낭 검은 겁답헤 검다지요. 길세 웊 언닥지난 걔 실을 기리기리 달퍼가메. 한아리에 무유쁜 살믄 꾸암에 누고누벼 모덤 잩게 다홈 모덤 잩게 눈가마메. 어뮈여, 어뮈여. 훈저 사라가겐 훈저 주거가메. 완옥히 주거 아라리 던던시 온눈에 나라가메.“   (전문)


 어떠셔? ‘리던던시’가 Redundancy 맞는 거 같은가? 난 잘 모르겠다. 마지막 문장에 ‘아라리 던던시’란 말이 나와 제목마저 헷갈리게 만든다. 그거 보면 제목 ‘리던던시’는 'Redundancy'라고 오해하라 지어 놓은 거 같다. 아니다. 하여간 이 노래는 어찌 보면 고려 가사 같고 어찌 보면 구강구조 또는 혀의 근육에 문제가 있는 사람이 뭔가를 얘기하는 거 같다. “아라리 던던시롬, 아라리 던던시랑”은 분명히 고려가사에 나오는 후렴구 비슷하지만 무슨 뜻인지는 시인만 알고 있을 듯하다. 우리나라 언어가 신기한 것이(외국어도 같은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렇게 시를 써놔도 시인이 노래하는 것이 적어도 어떤 분위기인지는 대강 잡힌단 건데, 이걸 보고 이심전심이라 해야 하나 아니면 언어의 공명共鳴이라 해야 하나. 이것도 잘 모르겠다.
 내가 굳이 구강구조나 혀 근육 이상으로 보는 것도, 이 시 앞의 앞에 나오는 장시長詩 <마치 혀가 없는 것처럼>에서 쇠구조물로 혀를 구강 아래에 가둬둔 채로 발음하는 시인의 실험적 언어 탐구를 소개하고 있기 때문이다. 거기서 시인은 이렇게 얘기하고 있다.


 “마음은 여전히 혀의 통상적 사용법을 ‘상상적으로’ 작동시킨다. / 그때 마음의 조음 알고리즘에서 벗어난 혀의 소리는 / 격렬한 전투에서 칼과 방패가 부딪칠 때 나는 불꽃 튀는 마찰음이 아니라 / 저능아의 늘어진 혀, 돼지의 구겨진 혀, 광인의 날뛰는 혀가 내는 소리로 폄하된다. // 결국 시를 자음과 모음으로 분절하고 / 숫자와 집합으로 변형한 후 재조합하는 것은 / 억눌린 혀를 장애가 아니라 재료의 한계로 취급한다는 뜻이다. / 내 뜻이 통한다면 그러한 한계 안에서 시를 읽는 이는 / 장인적 주의력과 집중력을 발휘하여 소리들을 일일이 세공하듯 만들어낼 것이다.” (부분. 222쪽)

 

 

 심보선이 시 속에서 철사 등의 금속을 이용해 구강, 특히 혀의 움직임을 구속한 그림


 이 부분을 읽지 않았다면 모를까 읽은 바에 <리던던시>가 혀를 구속한 상태 아니면 구강구조의 변형으로 인해 소리들을 세공하듯 만들어낸 시가 아니라고 누가 장담할 수 있겠는가 말이다. 물론 딱 읽어보면 고려가요 비슷한 형태로 시를 써서, 독자로 하여금 절대로 진정한 의미를 알지 못하게 하면서 미지의 단어가 주는 이미지만으로도 시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걸, 후렴구를 섞어 음감까지 줘가며 강조한 것으로 읽히지만. 혹시 이거 라틴 아메리카의 아몰랑 주의 작가 훌리오 코르타사르처럼 새로운 언어를 창조하려는 수작질?
 하여간 색다른 시인이다. 앞으로 계속될지 아닐지는 모르겠으나 일단 이이의 다른 시집 몇 권 더 찾아보는 것도 흥미 있을 듯.
 근데 이 사람 시는 왜 이렇게 긴 거야? 아예 논문 비슷한 것도 있고 말씀이야. 아무래도 조만간 소설을 쓰지 않을까, 그래야 자기가 하고 싶은 얘길 더 정확하게 전달할 수 있지 않을까, 내가 다 조바심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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