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잘 모르겠어 문학과지성 시인선 499
심보선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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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난한 시집. 난 어제도 잘 모르겠고 오늘도 잘 모르겠고, 내일 읽어도 이 시집 <오늘은 잘 모르겠어>는 잘 모를 거 같다. 에잇, 다짜고짜 시집의 표제 시 먼저 읽어보자.



 오늘은 잘 모르겠어



 당신의 눈동자
 내가 오래 바라보면 한 쌍의 신(神)이 됐었지
 
 당신의 무릎
 내가 그 아래 누우면 두 마리 새가 됐었지

 

 지지난밤에는 사랑을 나눴고
 지난밤에는 눈물을 흘렸던 것으로 볼 때
 어제까지 나는 인간이 확실했었으나


 오늘은 잘 모르겠어

 눈꺼풀은 지그시 닫히고
 무릎은 가만히 펴졌지

 

 거기까지는 알겠으나

 

 새는 다시 날아오나


 신은 언제 죽나


 그나저나 당신은…… (전문 28~29쪽)


 

 이게 뭐 좋다거나 시집의 핵심이 된다거나 해서 인용하는 게 아니라, 비교적 짧아 전문을 옮길 수 있는 몇 안 되는 작품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지지난밤에는 우리 둘이 서로 사랑을 해 몸을 섞었고, 지난밤에는 눈물을 흘려, 감정이 있는 사람이었던 것 같은데, 지금은 그것도 다 사라져 내가 사람인지 아닌지 잘 모르겠고, 아 이 다음부터가 문젠데, “눈꺼풀은 지그시 닫히고 / 무릎은 가만히 펴”진 상태가 과연 어떤 자세인지 헷갈린다. 일반적으로 생각해서 눈꺼풀이 지그시 닫히면서 동시에 무릎을 가만히 편다면, 이거 어떻게 본격적으로 야한 자세를 취하기 전에 흔히 시작하는 포즈? 이 상태에서 가만히 가만히, 소토 보체, 펴진 무릎만 옆으로 세우면 완전히 자세 나오는 거 아냐? 좋다, 그렇게 감안하고 다시 읽으면, 시인도 거기까진 알겠단다. 근데 새는 다시 날아오기는 하나? 신은 언제 죽지? 여기서 말하는 신이 뭐지? 세상 온 종교에서 말하는 신, 즉 하느님을 말하는 것인지, 시의 첫 부분에서 얘기했듯이 내가 오래 바라보던 당신의 두 눈알을 말하는 것인지 흠, 잘 모르겠다. 여기서 한 발 더 뗀다. 그나저나 당신은, 언제 죽나? 즉, 최종적으로 알고 싶었던 것이, 당신이 언제 죽는지 하는 거야? 즉, 한때 서로 사랑을 나누던 우리가 해체되어 이제 언제 당신이 죽어버리는지 그걸 오늘은 잘 모르겠다는, 것. 설마 이건 아니겠지.


 그러나 내가 읽기에 시집의 전반은 주로 외로움이나 그리움, 각운을 맞춰 “움”으로 끝나지만 엄연히 “외로움”과 “그리움”은 다르다는 걸 강조하면서, 이 두 가지 주제가 번갈아가며 등장한다. 

 

 “형은 어쩌면 신부님이 됐을 거야. / 오늘 어느 신부님을 만났는데 형 생각이 났어. / 나이가 나보다 두 살 많았는데 / 나한테 자율성이랑 타율성 외에도 / 신율성이라는 게 있다고 가르쳐줬어. // 신의 계율에 따라 사는 거래. // 나는 시율성이라는 것도 있다고 말해줬어. / 시의 운율에 따라 사는 거라고. / 신부님이 내 말에 웃었어. / 웃는 모습이 꼭 형 같았어.” (후략. <형> 69쪽)

 무려 다섯 쪽에 달하는 긴 시의 말미에 가면, 시인의 형은 존재하지 않는다. 있지도 않은 형을 만들어 가상의 형에게 자신의 외로움과 시를 쓰는 일 등 자신의 마음을 쏟아낼 수 있는 인격에 대한 그리움, 또한 그래서 그리움의 대상이 존재하지 않는 데에 대한 외로움까지 참 기막히게 노래하기도 한다.

 

 (전략) “왜 형은 애초부터 없었던 거야? / 왜 형은 태어나지도 죽지도 않았던 거야? / 왜 나는 슬플 때마다 둘째가 되는 거야? // 형, // 응?” (같은 시. 73쪽) 

 마지막에 여기까지 읽게 되면 독자는 대책 없이 얻어터진 뒤통수를 감싸 안을 수밖에.


 물론 언짢은 것도 없지는 않다.


 “나는 멀어지는 시인의 뒷모습을 대고 속삭였죠. / 잘 아시겠지만 우리는 시인이랍니다. / 오늘 우리가 응시한 것들 중에 / 적어도 개와 아이는 움찔했겠지요. / 하지만 선량한 우리는 늘 말하죠. / 무서워하지 말아요. 우리는 시인이랍니다.” (중략. 94~95쪽)


 “나는 소원을 빌기 위해 얼굴이 빨개졌답니다. / 나는 문득 늙은 청소부에게 소리치고 싶었지요. / 어이, 아저씨, 금요일에 나는 인간이고 싶었어요! / 나는 화들짝 깨어난 그에게 말하겠지요. / 놀라지 말아요. 나는 시인이랍니다.” (후략. <나는 시인이랍니다> 부분 96쪽)


 시인에겐 자신이 시인이라는 것이 벼슬이다. 이 시 바로 다음에 나오는 작품이 <나는 이제 시인이 아니랍니다>인데 그것도 자신이 시인이 아님을 주장하여 진짜 시인임을 강조하는 것으로 읽히는 건 어쩔 거야. 뭐 크게 틀린 일은 아니지만 시인은 아직도 자신이 시인이기 때문에 선하고, 엉뚱하고, 취한 듯 취하지 않은 듯한 것도 당연하다는 주장. 뭐 이딴 거, 다들 잘난 맛에 사는 거니까 마음이 넓은 독자들이 이해해주자. 물론 난 이미 까질 대로 까져서, 시인들의 이런 특권 주장을 들으면 저절로 가운데 손가락 하나만 위로 치켜지는 현상을 금할 수 없다. (불민한 내 경우에 국한해서 얘기하자면) 실생활에서 엮인 시인들은, 이놈이나 저년이나 어찌 그리 하나같이 못됐는지, 아휴!
 혹시 시인은 헤르마프로디토스라서 그들끼리만 서로 이해할 수 있다고, 그리하여 ‘우리 시인들은 그렇다’라고 말하는 거 아냐? 난 그렇게 읽히는데, 만일 옹졸한 내 생각이 맞다면 이렇게 말하리라. “가식 떨지 마!” (이 문단의 첫번째와 세번째 문장은 로베르토 볼라뇨, <야만스러운 탐정들>, 열린책들 2012. 262쪽에 나오는 걸 변형했다.)

 읽는 사람에 따라 (당연히!) 다르겠지만 내가 제일 재미나게 읽은 시는 무지하게 긴 시 두어 개 이후에 나오는 시집의 마지막 작품 <리던던시>. Redundancy, 사전 상 해석에 의하면 듣기만 해도 살벌한 ‘정리해고’는 아니겠고 ‘불필요한 중복’이란 뜻도 있는데 이건가? 아닌가? 제목이 어떤 의미를 갖고 있던 그건 별개로 하고 일단 읽어보시라.



 리던던시


 이 살픈 머을에 나 훈저 가하 모아 구름우에 망실히 사녀리메. 저 눞인 해롬우에 요살은 가루 눠고 묘살은 세루 눠요. 온 새랑이 서모 삮여 무릍 아훔 닐째 머하면 동념을 아지라지메. 뚜렁 서랑 꾸렁 마랑 옵고 만시나니 이 웊에 까막이 아이닐꼬나. 어뮈여, 우라 잠아에 꾸암만 옵고 만시나니 저 섶에 기럭이 아이닐꼬나. 고오면 가옵구 서오면 서롭다구 어모하모 거오룩지메. 아라리 던던시롬, 아라리 던던시랑, 저니어어는 보자하굼 저 너어어믄 자자하굼. 살픈 달옴 우방지에 다슴마듬 모초록안 오도록히 설펴가메, 이러부낭 저러부낭 삼은 삼답헤 삼다지요. 이러부낭 저러부낭 검은 겁답헤 검다지요. 길세 웊 언닥지난 걔 실을 기리기리 달퍼가메. 한아리에 무유쁜 살믄 꾸암에 누고누벼 모덤 잩게 다홈 모덤 잩게 눈가마메. 어뮈여, 어뮈여. 훈저 사라가겐 훈저 주거가메. 완옥히 주거 아라리 던던시 온눈에 나라가메.“   (전문)


 어떠셔? ‘리던던시’가 Redundancy 맞는 거 같은가? 난 잘 모르겠다. 마지막 문장에 ‘아라리 던던시’란 말이 나와 제목마저 헷갈리게 만든다. 그거 보면 제목 ‘리던던시’는 'Redundancy'라고 오해하라 지어 놓은 거 같다. 아니다. 하여간 이 노래는 어찌 보면 고려 가사 같고 어찌 보면 구강구조 또는 혀의 근육에 문제가 있는 사람이 뭔가를 얘기하는 거 같다. “아라리 던던시롬, 아라리 던던시랑”은 분명히 고려가사에 나오는 후렴구 비슷하지만 무슨 뜻인지는 시인만 알고 있을 듯하다. 우리나라 언어가 신기한 것이(외국어도 같은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렇게 시를 써놔도 시인이 노래하는 것이 적어도 어떤 분위기인지는 대강 잡힌단 건데, 이걸 보고 이심전심이라 해야 하나 아니면 언어의 공명共鳴이라 해야 하나. 이것도 잘 모르겠다.
 내가 굳이 구강구조나 혀 근육 이상으로 보는 것도, 이 시 앞의 앞에 나오는 장시長詩 <마치 혀가 없는 것처럼>에서 쇠구조물로 혀를 구강 아래에 가둬둔 채로 발음하는 시인의 실험적 언어 탐구를 소개하고 있기 때문이다. 거기서 시인은 이렇게 얘기하고 있다.


 “마음은 여전히 혀의 통상적 사용법을 ‘상상적으로’ 작동시킨다. / 그때 마음의 조음 알고리즘에서 벗어난 혀의 소리는 / 격렬한 전투에서 칼과 방패가 부딪칠 때 나는 불꽃 튀는 마찰음이 아니라 / 저능아의 늘어진 혀, 돼지의 구겨진 혀, 광인의 날뛰는 혀가 내는 소리로 폄하된다. // 결국 시를 자음과 모음으로 분절하고 / 숫자와 집합으로 변형한 후 재조합하는 것은 / 억눌린 혀를 장애가 아니라 재료의 한계로 취급한다는 뜻이다. / 내 뜻이 통한다면 그러한 한계 안에서 시를 읽는 이는 / 장인적 주의력과 집중력을 발휘하여 소리들을 일일이 세공하듯 만들어낼 것이다.” (부분. 222쪽)

 

 

 심보선이 시 속에서 철사 등의 금속을 이용해 구강, 특히 혀의 움직임을 구속한 그림


 이 부분을 읽지 않았다면 모를까 읽은 바에 <리던던시>가 혀를 구속한 상태 아니면 구강구조의 변형으로 인해 소리들을 세공하듯 만들어낸 시가 아니라고 누가 장담할 수 있겠는가 말이다. 물론 딱 읽어보면 고려가요 비슷한 형태로 시를 써서, 독자로 하여금 절대로 진정한 의미를 알지 못하게 하면서 미지의 단어가 주는 이미지만으로도 시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걸, 후렴구를 섞어 음감까지 줘가며 강조한 것으로 읽히지만. 혹시 이거 라틴 아메리카의 아몰랑 주의 작가 훌리오 코르타사르처럼 새로운 언어를 창조하려는 수작질?
 하여간 색다른 시인이다. 앞으로 계속될지 아닐지는 모르겠으나 일단 이이의 다른 시집 몇 권 더 찾아보는 것도 흥미 있을 듯.
 근데 이 사람 시는 왜 이렇게 긴 거야? 아예 논문 비슷한 것도 있고 말씀이야. 아무래도 조만간 소설을 쓰지 않을까, 그래야 자기가 하고 싶은 얘길 더 정확하게 전달할 수 있지 않을까, 내가 다 조바심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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