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란 쿤데라가 말입죠, 현대 체코 문학을 대표하는 거장 가운데 한 명이라고요? 천만의 말씀을요. 특별히 이 <정체성>이란 소설을 읽어보니까 처음부터 저 끝까지 아주 전형적인 프랑스 현대소설을 읽는 거 같더라고요. 당연하다고요? 아무럼요, 헤헤헤. 소설을 프랑스 언어로 쓰면 이 작가는 프랑스 소설가인 거 아니겠습니까. 제가 뭘 알겠습니까만, 첫 장을 넘기자마자 노르망디 해변 작은 도시의 어느 호텔 식당에서 웨이트리스들이 10년 전에 실종된 사람이 아직도 소식이 없는 “끔찍한” 상황에 관하여 조잘대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게 어디서 “본” 거 같다고 팍팍 신호가 옵니다. 소년 하나가 피아노 교습을 받으면서 피아노 교사에게 끊임없이 잔소리를 듣지요. 보통속도로 노래하듯이 치란 말이야, 보통속도로. 염병. 전문 피아니스트도 아니고 이제 피아노 교습을 받는 아이가 어떻게 보통의 속도로 연주하면서 마치 노래하듯이 하냐고요. 이 소년이 피아노 교습을 받는 장소가 해변 가 마을의 한 건물입니다. 이때 어디선가 살인 사건이 벌어지고 소년은 발딱 일어나 창가로 가서 바깥을 내다봅니다. 왜 이 장면이 생각났을까요? 잔-모로와 장 폴 베르몽도가 주인공을 하는 영화이자 마르그리뜨 뒤 라스의 짧은 소설 <모데라토 칸타빌레>의 첫 장면입니다. 이거나 그거나 실종자 또는 살인사건에도 불구하고 해변의 호텔식당이나 피아노 교습소는 권태와 일상이 뚝뚝 떨어지거든요. 그래서 뒤 라스가 생각났는지도 모르겠습니다요. 아, 이렇게 쓰니 참 좋군요. 역시 잘난 척하는 건 참 행복하고 근사한 일입니다. 듣는 분이야 재수 없을지 모르지만 말입니다.


 단체로 스키 여행을 갔는데, 밤마다 거창한 파티로 일정이 끝나는 일종의 단합대회 격이었다. 그런데 누군가의 실수로 딱 하루 스키 강사, 장-마르크를 파티에 초대했고, 장-마르크는 거기서 다섯 살 난 아들이 죽자(아이를 불행하게 잃은 부부가 흔히들 그렇듯이) 이혼해버리고 지금은 혼자 사는 돌씽, 샹탈한테 한 눈에 반해버린다. 그래서 다음날은 초대도 받지 않았는데도 그냥 파티에 쳐들어가 이미 온 몸이 달아오른 샹탈의 손을 잡고 연회장을 빠져나와 어두컴컴한 긴 복도에 기대 진하고 진한 키스를 한다. 물론 상당한 양의 침도 튀어가며(으~ 냄새).
 지금 독후감을 읽으며 누군가는 내가 ‘으~ 냄새’ 한 것에 비실비실 웃을 수도 있고, 또 다른 누군가는 꼭 침 냄새 이야기를 해서 분위기를 깨야 하는지 시비를 거실 분도 있고, 나잇살이나 먹은 것들이 아무리 진한 키스를 한다고 해도 그렇지 어찌 십대 아이들처럼 키스하면서 입술 주변에 침을 바르느냐고 이들의 아마추어리즘에 혀를 찰 수도 있다. 다들 옳으신 말씀이신데, 하여간 으~ 냄새, 한 건 나름대로 다 이유가 있으니 궁금하시면? 맞다, 직접 읽어보시라. 물론 얇은 책 전체로 보면 아주, 아주, 아주 사소한 것이긴 하지만.
 하여간 침 튀기며 제대로 키스를 한 장-마르크와 샹탈은 그길로 동거에 들어간다. 샹탈의 아파트에서, 샹탈과 장-마르크의 현금 수입이 5대 1 정도. 그러니까 의식주의 거의 대부분은 샹탈의 소유, 아울러 그녀의 수입에 의존한다고 해도 절대 틀린 말이 아니다. 하지만 문제는 42쪽. 이 부분을 작가는 괄호를 쳐서 이렇게 썼다.
 “(그녀는 그보다 네 살 위였다)”
 이 책, 중고책 산 거다. 중고책 티를 아주 제대로 내서, 정말로 책갈피 사이에 연애편지 네 번 접은 거, 아주 얇은 종이에 손으로 파란 볼펜, 붉은 볼펜 섞어서 여자가 남자에게 보내는 편지, 글씨가 예쁜 거 보니까 얼굴도 예쁘다는 환상을 가지고 있지는 않지만, 그 편지글을 여기다가 그대로 옮겨버릴까, 잠깐 생각했다가, 적어도 편지 쓸 때는 이게 진심이었을 것이란 진리에 도달해, 그들의 사랑 또는 연애의 순결을 위해 그냥 찢어, 박박 찢어, 휴지통에 버렸다.
 왜 이 순간에 중고책이란 걸 밝히느냐 하면, 여자가 네 살 위인데 역자 이재룡은 남자가 여자한테 하는 대사는 반말, 여자가 남자한테 하는 대사는 존댓말. 이렇게 번역했다. 그러나, 누군가 혹은 누구들한테 쌍코피가 터졌음이 분명해서, 이제 표지 바꿔 새로 쿤데라 전집으로 개정판이 나온 거 보니까 둘 다, 서로 말 놓고 편하게 대화하더라. 재밌다. 그럼, 그럼. 요새 거기서 자유로운 남자들, 거의 없다.
 서로가 서로를 오해하기 위한 최선의 방법은, 자신이 어떤 것을 바라고 있거나, 특별한 행위를 상대에게 할 때 행위의 목적을 정확하게 알리지 않는 것. 즉, 서로가 서로를 사랑하며(사랑? 요새 한 근에 얼마야?) 굳게 신뢰하고 있어서, 자신이 바라는 것, 또는 특별한 행위(이를테면 선물을 한다든지, 안 하던 짓을 한다든지 하는 것)의 목적을 “꼭 말로 해야 알까” 싶어서 당연한 듯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상대방이 알아주기 바라는 것이다. 이런 커플은 거의 틀림없이 탈난다. 언어와 문자는 왜 만들었는데. 서로 대화하라고. 말을 해서 자기가 원하는 거, 하고 싶은 거, 이런 것들에 관해 정확한 단어와 문장을 써서 분명하게 이해하라고 있는 것이다. 난 부부 간에, 회사 조직에서 제일 한심한 경우가 “그걸 꼭 말로 해야 아니?” 이렇게 주장하는 인간들이다. 말로 해야 안다. 내 생일이니까, 남편새낀 내가 한 달 전에 킹 크랩 먹고 싶다고 한 거 분명히 기억하고 있을 거야. 공정상 좀 문제가 있는 거 아니까 기술1팀이 알아서 조치를 해주겠지. 염병들을 해라, 염병을.
 다시 한 번 강조. 꼭 말로 해야 안다. 명심하시고 인생 사시라.
 장-마르크보다 네 살 많은 샹탈. 그녀가 장-마르크를 기다리다 한 카페에 들렀는데, 젊고 좀 거칠게 느껴지는 웨이터들에게 약간 불쾌한 일을 당해 카페에서 나와 심신이 어수선한 상태에서 장-마르크를 만난다. 얼굴에 홍조를 띈 것을 알게 된 장-마르크, “무슨 일이 있었지? 웬일이야?”하고 묻는다.
 “아무 일도 없어요.”
 “뭐라고? 아무 일이 없었다니? 당신이 몰라보게 달라졌잖아.”
 “잠을 설쳤어요. 거의 한숨도 자지 못했어요. 그리고 아침 나절에 좋지 않은 일이 있었어요.”
 “나쁜 일이라니? 왜?”
 “그냥 그랬어요. 아무것도 아닌 일로.”
 “말해 봐”
 여기서 샹탈이 카페 이야기, 거기 남자새끼들 얘기를 제대로 다 했으면 이 소설은 생기지도 않았고, 당연히 난 이 책을 읽을 필요도 없었을 텐데, 밀란 쿤데라, 기어이 중고책이라도 내 주머니에서 돈을 빼가느라 샹탈로 하여금 이렇게 대답하게 만든다.
 “남자들이 더 이상 나를 돌아보지 않아요.”
 처음부터 이 커플은 샹탈이 네 살 위다. 애초부터 장-마르크는 샹탈에게 젊은이의 싱그러운 예쁨이나 탄력 있는 육체를 원하지 않았다. 나이 들어 원숙해 오히려 더 아름다운 모습에 반한 것이지.
 순진한 장-마르크. 샹탈의 이 말이 진심이라고 오해해서, 서로간의 의사 불통이 계속 엉뚱한 일을 만들어내고, 엉뚱한 일은 당연히 생각하지도 못했던 결과를 초래하는 오해의 연속과 불행으로 초대하는 인생극, 즉 코미디 한 편을 만들어낸다. 하지만 샹탈은 기껏 장-마르크가 머리 굴려가며 벌인 촌극을 절대 이해하지 않고, 장-마라크 역시 샹탈이 이해하지 않는 것을 이해하지 않으며…….


 제가 말입죠, 그래도 양심이란 것이 조금, 아주 조금 있어서 책 얘기는 여기서 말아야 하겠습니다. 겨우 177쪽에 불과합니다. 민음사가 페이지 분량을 늘리는 놀라운 편집기술을 펼쳐 177쪽까지 늘여놓은 거라서 사실 맘 먹고 읽으려면 반나절이면 충분합니다. 그래서 줄거리, 이 소설의 특징과 상징 또는 메타포에 관해 더 주절대면 예의가 아닐 것이라서 말입니다. 그런데 말씀이지요, 마지막에 가면 쿤데라 특유의 장난끼가 도진다는 힌트를 드리는 건 괜찮을 거 같습니다. 거의 언제나 쿤데라, 이 영감이 특유의 상징을 빙자한 장난으로 자신의 작품을 근사하게 포장하는 습관이 있잖습니까. 뭔 말씀이냐 하면, 책의 앞부분에선 현대 프랑스 소설에서 읽은 듯한 기시감을 느낄 수 있다면, 마지막 부분에선 성인판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한 장면 같기도 하단 것이지요. 무슨 뜻이냐고요? 에이, 그걸 어찌 가르쳐드릴 수 있겠습니까. 수고스럽겠지만 책 사서 읽어보세요. 재미나고 짧아서 부담 없이 읽다가, 심하게 부담 느끼면서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실 거니까요. 새로 찍은 이런 표지의 책을 사셔요. 이 책에선 얘기한대로 샹탈(이름 참 색다르죠?)이 연하 애인이자 동거남 장-마르크한테 편하게 대사합니다. 새 책은 이렇게 생겼습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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