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극의 일인자 - 김성민 희곡집
김성민 지음 / 연극과인간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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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극작가 김성민이 극단 ‘피오르’의 대표라는데, 2004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희곡 당선한 중견 극작가이고, 이러저러한 상을 받았다는 수상 경력 이외의 바이오는 찾기 힘들다. 같은 이름을 한 인사들도 참 많다. 극작가, 작가, 소설가, 만화가, 화가, 연극인, 심지어 몇 년 전에 잘 나가다가 마약 복용이 들통나 TV에서 퇴출당하고 스스로 삶을 거둔 전직 연기자 김성민까지.

  《비극의 일인자》를 읽은 다음이면, 특히 제일 뒤에 실린 <마지막 물방울 너는 영원해>를 읽고 김성민을 검색하면, 이 극작가가 여성이라는 걸 알고 뭥미? 할 수도 있다. 나는 그랬다.


  세 편의 작품을 실은 희곡집. 표제작 <비극의 일인자>는 2012년 문화체육관광부가 시행하는 창작팩토리 대본공모에 당선한 것을 필두로 2013년 공연예술창작산실 우수작품제작 지원에 선정되고, 2014년 공연예술창작산실 우수작품”재공연”지원작품에 다시 선정되었단다.

  <비극의 일인자>는 마치 부조리극처럼 읽힌다. 2012년 작품이니 소설가 한강보다 훨씬 앞서 우리나라의 극작가 고일봉 씨가 “세계에서 가장 권위 있는 문학상인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결정”된 시기, 고일봉과 고일봉의 (죽은)아내, 고일봉씨의 처음 모습일 수도 있고 그럴 것 같은 젊은 작가, 젊은 작가의 아내, 고일봉 씨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는 작가의 첫사랑 등이 출연한다.

  하여간 고일봉 씨가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결정되어 아직 스톡홀름으로 가는 비행기에 오르기 전. 각 매체의 기자들이 고일봉의 집에 들이닥쳐 인터뷰를 하려 하지만 고일봉은 특별히 할 말도 없다. 서둘러 취재를 마친 기자들이 빠져나가자, 이미 죽은 고일봉의 아내의 노래소리가 들려오고, 드디어 부부가 만난다. 노벨문학상이라는 큰 성취를 이룬 작가가 옛 시절을 회상하는 것일 수도 있고, 회한을 드러내는 것일 수도 있겠다. 연출가가 어떻게 극을 만드느냐에 따라 다양하게 변주할 수 있을 듯. 이 작품이 부조리극이라고 주장하는 게 아니라, 부조리극처럼 연출하는 것도 상당히 그럴 듯하지 않겠느냐는 의견이다.


  두번째 순서로 실린 <숲 없는 숲>은 귀신들의 난장판이다. 약자로 ㅆㄴㄹ. 귀신 씨나락 까먹는 얘기.  말이 그렇다는 거다. 죽음과 탄생. 아이를 원하는 처녀와 농부. 출산 행위가 아니라 아이를 낳고 싶은, 인간의 가장 오랜 본능을 잇고 싶어하는 처녀의 소원을 들어주려 저승 명부 순서를 뒤바꾸는 저승사자. 저승의 염라대왕급은 아니지만 대신 급의 판관들, 이런 이들이 등장해 삶과 죽음과 생명의 연속, 즉 근본적으로 “삶”의 의미에 대하여 생각해보게 한다. 말이 그렇다는 거다. 여차하면 나처럼 ㅆㄴㄹ 정도로 읽을 수도 있다. 극작가 김성민에게 미안한 이야기지만 <숲 없는 숲>은 공연을 해도 보러 가지는 않았을 거 같다.

  그런데 사실, 연극의 대본인 희곡을 읽고 근본적으로 “삶의 의미”에 대한 것이라는 말보다 쉽게 이야기할 수 있는 표현도 없다. 연극 자체가 삶의 의미에 관한 다양한 도구라서. 수다한 연극과 희곡을 보고 읽으면서, 삶의 의미에 대한 작품이라고 하면 2 곱하기 2는 4라고 하는 것만큼이나 하품나는 말일 터이다. 그러니까 이런 독후감을 쓰는 게 사실은 면목 없는 일이다.

  노르웨이 소설가 프로데 그뤼텐의 <닐스 비크의 마지막 하루>에서도 주인공인 뱃사람 닐스가 입센의 연극을 보고 “3막에 걸친 연극이 펼쳐지는 동안, 그는 조명 아래 비추어지고 있는 것이 바로 자기 자신의 삶이라고 생각했다.”라고 말한다. 그래, 연극이 바로 그거라니까? 삶의 의미에 관한 것. 자기 삶이 아니라면 유사 이래로 그렇게 많은 관객이 공감을 했겠느냐고.


  제일 뒤에 실린 <우주의 물방울 너는 영원해>는 왕년의 잘 나가는 연극배우이자 지금은 늙어 서울 변두리의 룸살롱에서 기타 반주해주고 받는 팁으로 먹고 사는 악사 일봉의 이야기. 그렇다. 일봉 씨가 또 나온다.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결정된 극작가 고일봉 씨가 아니라, 왕년의 연극배우 일봉 씨. 남성의 로망, 우뚝 선 봉우리 한 개, 일봉 씨. 제대로 서는지 아닌지는 확인한 바 없지만 젊었던 한 시절엔 꽤 대단했던 거 같다. 아무리 연극판에서 날고 뛰어도 TV 조연으로 한 번 뜨는 것보다 훨씬 배고팠던 시절이니까 그냥 알아서 판단해도 좋을 듯. 일봉씨가 평생 사랑했던, 그러나 연극 배우들의 생활에 비추어, 그리 호강시켜주지는 못했던, 호강? 호강 비슷한 것도 바라지 않았으니 그저 크게 불편함 없이 살게 해주지도 못한 아내 화수는 지금 뇌경색으로 오늘 내일 한다.

  이들 사이에서 태어나 한참 예쁠 때 사고로 죽은 아들 동수. 화장해서 산골을 하지 않고 매장을 했다. 당시엔 죽은 아들 생각나면 한 번씩 둘러보겠다고 했겠지. 이제 화수가 자기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아들 무덤에 한 번 가보고 싶어 한다. 그래서 일봉씨 부부와 일봉의 친구 만수, 만수의 아들이자 일봉이 악사로 일하는 룸살롱 웨이터 병만, 이렇게 넷이, 화수의 휠체어를 산꼭대기까지 밀어, 밀어 나중엔 병만이 화수를 들쳐 업고 동수의 무덤에 가, 무덤의 풀이나마 한 번 쓰다듬고 내려온다. 화수는 죽고, 일봉은 월세방에서 쫓겨나고, 월세방에는 새로 신혼부부가 와서 자리를 잡고, 그렇게 삶은 이어진다.


  이런 작품들. 내가 좋아하지 않는 쪽. 죽음, 귀신, 사후세계, 영적 교류 같은 4차원적 이야기들이라 그냥 훅훅 읽었다. 이런 책 읽으면 괜히 극작가한테도 미안한 기분이 든다. 김성민 씨, 미안합니다. 이렇게밖에 쓰지 못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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멜랑콜리아 은행나무 세계문학 에세 24
미르체아 커르터레스쿠 지음, 백승남 옮김 / 은행나무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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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루마니아 부크레슈티에서 태어난 미르체아 커르터레스쿠는 1956년생 잔나비띠라서 그런지 문학적으로 재주가 많다. 시인, 장편, 단편 소설가, 문학평론가에 에세이스트로 명함을 박았다. 부쿠레슈티 대학을 졸업하고 같은 학교에서 루마니아 어문학 교수로 재직했는데, 흔히 “헤르타 뮐러와 함께 루마니아의 대표작가”라 불리는 거 같다. 헤르타 뮐러는 루마니아에서 성장했지만 끝까지 독일인 정체성을 고수한 독일 작가 아닌가? 뭐 좋다. 그러거나 말거나 내가 신경 쓸 일은 아니다.

  커르터레스쿠의 《멜랑콜리아》를 작품집, 그러니까 중단편소설 모음집으로 보아야 할까, 프롤로그, 3부로 이루어진 본문, 그리고 에필로그로 구성된 장편소설로 읽어야 할까? 이것부터 헛갈린다. “출판사 제공 책 소개”는 “루마니아 차우셰스쿠 독재 체제에 시와 음악과 소설로 저항한 ‘80년대 세대’ 작가로서 루마니아 포스트모더니즘 이론을 정립한 미르체아 커르터레스쿠의 단편집 《멜랑콜리아》(Melancolia, 2019)” 딱 단편집이라고 못박았다. 그러면 책 표지나 하여간 독자가 읽기 시작하기 전에 어디다 단편집이라고 좀 적어주면 덧나나? 무슨 평론가도 아니고 하다못해 문학 강의 한 번 들어본 적도 없는 생짜 아마추어 필부가 장편소설인 줄 알고 읽게 만들면 어떻게 하느냐는 말이지.

  근데 다 읽고나서 보니까, 굳이 이 책을 작품집, 단편집이라 생각할 필요도 없지 않을까 싶었다. 본문격인 “멜랑콜리아”는 다섯 살 아이가 주인공인 <다리>, 여덟 살 먹은 소년인 주인공을 하는 <여우> 그리고 열다섯 살 청소년 ‘이반’이 주인공인 <껍데기>로 구성되어 있는데, <껍데기>에서 인간의 성장과정을 곤충의 탈각脫殼, 변태變態 단계로 보려 애쓰기 때문에 다섯 살과 여덟 살의 아이/소년 관점 역시 한 인간이 성장, 즉 탈각하는 순간의 포착이라 해도 무리가 없기 때문이다. 곤충의 경우에는 완전 변태, 불완전 변태, 알-애벌레-(번데기)-성충의 단계를 거치지만 인간은 시도 때도 없이 각 개인의 차이에 따라 숱하게 변태 또는 탈각의 과정을 가진다는 주장도 뭐 타당하겠지. 물론 가장 큰 탈각, 변태의 과정은 사춘기가 아닐 수 없을 것이고.

  하지만 “루마니아 포스트모더니즘 이론을 정립한” 미르테아 커르터레스쿠는 쉽게 읽히지 않는다. 예를 들어 한국외국어대학 루마니아어과 교수인 역자 백승남이 이 말을 들으면 실소를 금하지 못하겠지만, 다섯 살 아이가 “주인공”인 <다리>는 결코 다섯 살 아이의 시선으로 본 세계가 아니다. 이 작품이 아이가 혼자 집에 있는 몇 시간 동안의 “집”이라는 공간과 아이의 세계를 묘사했으나, 시각은 63세 나이든 작가의 것이다. 당연히 여덟 살 소년이 주인공인 <여우>도 마찬가지이고 <껍데기>역시 같다. 커르터레스쿠가 자신의 연구실에 박혀 자신의 혹은 남성 일반의 저 유소년과 사춘기 시절을 “포스트모던”하게, 멜랑콜리하게, 그리고 아무리 정신 똑바로 차리고 읽어도 작가가 주장하는 것을 정확하게 받아들이지 못할 방식으로 애매하게, 몽롱하게, 지극한 방식의 은유로 펼쳐낸다. 그리하여 독자는 책을 읽기 전에 마음을 단단히 가져야 마땅하다.

  만일 나처럼 《멜랑콜리아》를 장편소설로 읽는다면, 본문의 1부 격인 <다리>에서 다섯 살 먹은 주인공 ‘아이’가 아무도 없는 자기 집에서 무슨 생각을 하는 지 한 번 볼까?


  시작부터 파격적이다. “어느 날 아침에 엄마는 장을 보러 나가 돌아오지 않는다.” 다른 독자는 모르겠고 나는 처음부터 죽여줬다. “허물처럼 벗어던진 브래지어가 / 나무의자 등허리에 걸려있고 / 사랑은 나가 돌아오지 않는다.” 제목은 잊었다. 최승자의 시 첫 구절인데 아마 시집 《즐거운 일기》에 실렸지 않나 싶다. 하여간 “엄마는 몇 주, 몇 달, 몇 년, 많은 날이 지나갔지만 돌아오지 않았다.” 그런데, 나중에 <다리>를 다 읽으면 이 구절을 왜 썼는지 이해가 가지만 처음엔 그렇구나, 하면서 읽을 수밖에 없다. 아이는 오래 전부터 시간 감각을 잃었다는 것. 그리하여 몇 주, 몇 달, 몇 년 동안 정말로 돌아오지 않았다는 것을, 엄마는 영원히 아이와 이별한 것으로 이해할 수밖에 없는데, 그러나 그건 그냥 보통의 사람들이 하는 생각이고, 아이 입장에서는 몇 주, 몇 달, 몇 년의 시간이 흐른 것 같은, 오래오래,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른 다음에야 엄마가 커다란 장바구니를 들고 아파트 현관문을 열 수도 있는 거다. 물론 영원한 아듀일 수도 있는 거고. 이걸 커르터레스쿠의 작품을 처음 읽는 독자가 알아차릴 방법은? 없다. 그냥 당하면 된다. 당해야 하고 당할 수밖에 없다.

  이제 집은? 텅 빈 상태. 아이는 자신 혼자 있는 집에서 탐험을 시작한다. 자신의 새로운 인생에 슬프고 이상한 매력을 느끼면서. 그리고 아이답게 이런 상태에 쉽게 익숙해진다. 사실은 엄마한테 단단히 주의를 들었겠지. 집밖으로 나가지 말라고. 그렇다고 나가지 않을 수 없다. 당연히 나갈 수 없는 상태이지만. 그리하여 아이는 집 밖으로 나갈 방법을 만들어낸다. 먼저 발코니. 문 밖으로 가지가 무성한 미루나무의 꼭대기가 있는 곳. 미루나무 너머로는 벽돌을 쌓아올린 공장이 있고, 공장 꼭대기는 반원형 둥근 창문에 사람의 그림자가 보인다. 쿠이드라트 고무공장. 둥근 창문의 꼭대기에서 담배를 피우던 노동자. 아이는 그곳과 연결하는 투명한 다리를 만든다. 그리고 이 투명하고 딱딱하지 않은, 아이가 마음먹은 대로 구부러지기도 하는 다리를 타고, 마치 수영장의 미끄럼틀처럼, 그러나 너무 빠르지 않는 속도로 아이가 원하는 장소까지 미끄러질 수 있다.

  이름하여 “하늘의 다리.” 저 먼 기억 속의 나. 최인훈의 <하늘의 다리>를 나는 제목만 보고 이 다섯 살 아이가 생각하는 바로 그 다리를 연상했었다. 최인훈의 다리는 배꼽 아래, 엉덩이를 지탱하는 한 쌍의 이동 기관인 것을 알고 나는 내 다리를 탁, 쳤고.


  아이는 엄마가 집에 돌아오지 않은 때부터 자기 방, 자기 침대 대신 엄마의 방에서 엄마의 침대에서 자기 시작했다. 독자는 또다시 엄마가 완전히 집을 나가 다시는 돌아오지 않은 것으로 이해한다. 하여간 엄마 방의 엄마 침대에서 잔다는 건, 엄마의 모든 장소에 무엇이 있는 지 뒤져볼 권리가 있다는 것과 같은 의미일 수도 있다. 이건 여덟 살이 된 소년 이야기 <여우>와 열다섯 살 사춘기 청소년 이반의 이야기 <껍데기>에서도 이하동문이다. 엄마의 방, 장 안에서 발견한 엄마의 소유물. 그곳에서 엄마인 여성의 여성용품을 처음 볼 수도 있고, 만져 보기도 하고, 냄새 맡아볼 수도 있다. 엄마와 한 남자와 아이였다가 소년이었다가 사춘기 청소년이 된 한 남자 아이의 지난 시절을 확인할 사진첩을 들출 수도 있고.

  그것 말고도 아이가 보기엔 집이 평생에 걸쳐 탐험할 온갖 모험이 가득한 곳이다. 향수를 불러 일으키는 오래된 라디오. 노란 진공관 불빛이 흐르고, 집안의 가장 큰 공간을 차지하면서 언제나 같은 노래가 흘러나오는. “언제나 같은” 노래라니까 혹시 라디오가 아니라 오디오일 수도 있지만 아이가 보기엔 그게 그거다. 이 라디오가 아이가 살아가야 할 밀봉되고 텅 빈 아파트 내부에서 유일하게 소리로 혼란스러움을 만드는 소중한 물건이다. 아이가 라디오를 듣는 것이 “마치 잔혹하고 매혹적인 멜랑콜리아의 우상을 경배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 순간, 나는 생각한다. 아이가 라디오 하나 듣는 거 가지고 별 말장난을 다 하네.


  커르터레스쿠의 포스트모던한 문장은 수시로 이렇게 과하다. 나처럼 장편소설로 《멜랑콜리아》를 읽는다면 십 년이 지나 이 아이가 사춘기를 맹렬하게 앓고 있는 열다섯 살의 시인 지망생 청소년 이반으로 성장해서 자신의 베아트리체인 도라를 알게 되는데, 소년이 소녀를 바라보는 광경에 이런 묘사가 등장한다.

  “소녀의 머리 타래는 소녀 자신의 삶이자 의지처럼 보였고 정오의 형이상학적인 태양 아래에서 떨리고 뒤엉키고 반짝거리고 있었다.” (p.182)

  여태 살면서 정오의 형이상학적 태양을 한 번도 보지 못한 나는 도무지 이 문장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게 어떤 태양이지? 뭐 이 문장만 그런 게 아니고, 다섯 살 아이가 주인공이라고 분명히 역자이자 한국외국어대학 루마니아어과 교수인 백승남이 그랬는데, 이 아이가 라디오를 듣는 일이 “잔혹하고 매혹적인 멜랑콜리아의 우상을 경배하는 것” 같다고?

  좋아, 좋아. 처음 읽으면 멋있게 보일 수도 있고, 그럴 듯하고, 폼도 나고, 후까시 잡는 것 같기도 하고 뭐 그렇다. 근데 폼 나는 후까시도 한두번, 삼세번이지, 시도 때도 없이 폼 나는 후까시로 도배되어 있으니 내가 질리겠어, 안 질리겠어? 폼 나는 후까시도 좋고, 포스트모던도 좋고, 눈부신 은유의 행렬도 좋고, 환상과 몽환, 의식의 흐름도 좋은 데, 그런 거 다, 적당할 때 좋은 법. 아니면 이 모든 걸 수용하는 내 그릇이 작아서. 하여간 둘 가운데 하나다.

  나는 말했다. 이 책 읽기 전에 마음 단디 먹으라고. 허투루 듣고 읽은 다음에 내 욕하지 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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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moo 2025-10-23 11:0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크헉! 책 타이틀이 <멜랑콜리아>...갑자기 욘 포세의 트라우마가..!!

근데 진짜 정오의 형이상학적인 태양이 어떤지 저도 한 번도 못봐서뤼...
문학적 형용이라면...유치하기 짝이없는 표현이네요..ㅎㅎ

Falstaff 2025-10-23 16:17   좋아요 0 | URL
전 아직 욘 포세 작품을 딱 하나 읽었습니다. 11월 20일에 업로드 할 <보트 하우스>인데요, 아휴, 저는 스칸디나비아 소설은 잘 맞지 않더라고요.
ㅋㅋㅋ 형이상학적 태양. 이런 건 정말 가끔 나와야 제대로 빛을 발하는데 밝은 보라를 함부로 쓴 그림처럼 자주 나오면 못봐줍니다. ㅋㅋㅋ

잠자냥 2025-12-02 11: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각은 63세 나이든 작가의 것이다.˝ ㅋㅋㅋㅋㅋㅋㅋ 저만 그렇게 느낀 게 아니라서 반갑습니다.
어휴..... 이 짧은 책이 왜 이렇게 안 읽힌데요? 전 이 작가 책 또 안 읽을 것 같아요.
이번에 노문상 후보로 종종 올라오는 작가라 해서 한번 읽어봤는데 그냥 앞으로는 패스하기로........
 
돌아온 토끼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65
존 업다이크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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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여년 전에 존 업다이크의 <달려라 토끼>를 읽을 당시, 틀림없이 나는 책을 오독했다. 작가의 의도를 단단히 오해한 채 그저 문장과 문단의 합이 드러내는 일차적 풍경만 흡수했을 뿐, 스토리와 표현을 통해서 작가가 보여주고자 하는 것에 별로 관심이 없었다. 이렇게 판단할 수밖에 없다. 왜 그랬을까? 당시가 내가 먹고사는 경력에서 제일 좋지 않은 시기였던 것 같은데, 그때 성격이 좀 삐딱해져 있었을 수도 있겠다. 그러니까 별 생각 없이 보이는 것만 가지고 혼자 흥분했을 뿐, 행간에 교묘하게 설치한 진짜 메시지를 놓쳐 버린 것이 분명하다. 그리하여 존 업다이크는 처음 읽는 순간 나로부터 토끼처럼 뛰어 달아났다. 하지만 이후에 계속 책을 읽으면서 많은 작가들이 업다이크를 인용하고, 찬양하고, 비난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와, 당시에 내가 업다이크를 잘못 읽은 것이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점점 더 하게 되었다. 이럴 때 업다이크의 나이든 토끼들이 다시 우리나라 서점가로 뛰어 들어왔다.

  어쨌거나 <달려라 토끼>에 제대로 적응을 하지 못했던 건 사실. 아무래도 그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어서 이번에도 새로운 토끼 셋 가운데 <돌아온 토끼> 한 권만 희망도서 신청을 해서 읽기 시작했고, 읽는 중간에 토끼 4부작, 이번에 들어온 두 번째 토끼인 <토끼는 부자다>를 다시 희망도서 신청했다. 그것을 읽으면 마지막 토끼 역시 희망도서 신청을 하지 않을까 싶은데, 그렇게 되겠지 뭐.

  존 업다이크의 토끼 시리즈. 1부 <달려라 토끼>가 1960년. 2부 <돌아온 토끼>는 1971년, 3부 <토끼는 부자다>가 1981년, 그리고 마지막 4부 <토끼 잠들다>가 1990년. 이렇게 30년 간 10년 터울로 네 편을 발표했다. 주인공 해리 앵스트롬도 발표 시기에 따라 각 열 살 정도의 세월을 보낼 것 같다. 2부에서는 확실히 더 나이가 들어 30대 중반. 3부를 읽으면 알게 되겠지.


  첫 작품인 <달려라 토끼>의 주인공 해리 래빗 앵스트롬. 1950년대에 그럭저럭 먹고 사는 미국 중류 가정의 1남 1녀 가운데 장남. 그저 흔히 주변에 널려 있는 무지하게 평범한 청년이고, 사고 뭉치다. 사병으로 징집 당해 한국전쟁에 투입될 예정이었지만 텍사스 훈련소에서 박박 구르는 동안 전쟁이 끝나 미국 밖으로는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고 제대했다. 전쟁에 투입되지 않은 게 진심으로 다행이지만 한편으로 생각하면 남들 다 갔다 왔는데 혼자 전투 경험이 없는 게 조금은 서운한 생각이 들기도 하는 사고뭉치. 아내 재니스의 실수로 둘째 아이인 딸이 익사하는 사고를 당해 젊은 아빠가 급 흥분, 하여간 온갖 일탈을 하고 다니는 “어렴풋한 기억”만 남아 있다. 해리-재니스 커플은 딸의 사고 이후 임신과 출산에 대해 조금 복잡하고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거 같다. 그럴수록 이들의 섹스 라이프는 더 소원해졌다. 나도 비슷한 경우에 관해 많이 들어봤다. 해리-재니스는 여전히 한 침대에서 자기는 하지만 별로 느낌도 없고, 해리가 달고 다니는 작대기에 여간해 뼛기운, 골기骨氣도 생기지 않는다.

  그래봐야 30대 중반. 해리가 그렇다고 다른 여자를 만나고 다니는 것도 아니다. 성격이 워낙 착해, 아니, 착한 것 보다는 거절을 하지 못하는 쪽이라서, 어떤 여자가, 어이 래빗, 있는 거 아니까 한 번만 주라, 하면, 갖고 있는 거 안다니까, 안 줄 수 없어 한 번 주는 스타일. 그나마 이런 일도 거의 없다.

  1부에서 열라 달리기만 했던 해리, 헤럴드 앵스트롬은, 2부에 와서 먹고 살기 위하여 식자植字기술을 배워 아버지 다니는 베리티 인쇄소에서 식자공을 하고 있다. 아침부터 오후까지 일해 돈 벌고, 퇴근길에 역시 아빠와 선술집에 들러 맥주 한두 병 마시는 것을 루틴으로 하고 있으니 청소년 고등학생 시절에 아무리 펜실베이니아주 브루어시의 잘 나가는 농구스타 출신이었지만 이제 배 둘레에 두툼하지는 않지만 한 주먹씩 되는 지방층을 두르게 되었다. 술 한잔 한 다음 각기 반대방향으로 버스를 타고 귀가하면, 이제 열두 살, 세 달 후에 열세 살이 되는 아들 넬슨과 놀아주고, 숙제도 봐주고, 저녁 먹고 설거지하면 어느 새 잘 시간이다. 그럼 주로 서로 등을 맞대고 누워 각자 알아서 자든가, 누구 한 명이 상대의 등을 바라보고 누워 배우자의 허리, 누웠기 때문에 오목해진 허리와 골반 사이의 공간에 한쪽 팔을 올려놓고 잠을 청한다. 아주 가끔은 둘 가운데 한 명이 다른 한 명 위에 올라가긴 했겠지. 설마 아주 안 하고 살았겠어? 근데 다른 부부도 결혼 14년차면 대개 이렇게 살지 않나?


  아내 재니스 앵스트롬. 결혼 전 이름 재니스 스프링어의 아버지는 브루어 시내에서 제일 잘 나가는 중고차 판매점을 하다가, 이제는 토요타 자동차 대리판매권도 얻어 매장이 더 커졌다. 매장 직원으로 그리스계 비혼남 스태브로스와 30년간 스프링어 씨를 보필한 경리 밀드레드 크루스트가 있었는데, 밀드레드가 이제 나이 들어 부인병이 심각하지는 않지만 중한 수준이어서 급한 일이 아니면 출근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스트링어 씨는 딸 재니스를 긴급 호출해 밀드레드의 자리를 메꾸었고, 이게 처음엔 임시직으로 시작했으나, 이젠 없으면 곤란할 지경, 가끔, 일주일에 적어도 한두 번은 야근을 불사해야 할 판이었다.

  정말? 설마.

  사장, 직원, 경리. 세 명으로 구성되는 판매점에 사장은 당연히 퇴근 시간 땡, 치면 곧바로, 심지어 시간과 관계없이 퇴근해버릴 것이고, 그러면 남는 건 키는 작지만 옆으로 암팡진 체격에 등까지 털이 굽슬굽슬하고, 영업경력 십수년에 사근사근한 대화법을 완벽하게 장착한 친절한 그리스인 남자와, 부부 사이 금슬에 문제가 있는 30대 유부녀 딱 둘만 남으니, 엑스터시를 가장 잘 캐치할 초절정의 욕구를 가슴과 아랫배에 품고 있는 인간들 둘 사이에 이제 남은 건 첫번째 교통사고와, 이후 연달아 이어질 연쇄충돌, 그리고 차고를 같이 쓰는 사태. 이 정도는 예감할 수 있겠지? 그렇다. 그렇게 된다.

  해리는 섹스에 그리 관심이 없어서, 아닌가? 재니스와의 섹스에만 관심이 없어서 그런가? 하여간 그리하여 조금도 재니스를 의심해본 적이 없다. 하고 한날 늙은 서기 밀드레드의 서류 오기를 바로잡느라 밤늦게 일하다 가야 하니 아들, 이제 하나 남은 자식인 넬슨하고 저녁 먹고, 숙제 봐주고, 씻긴 후에 재우라고 전화한 다음에 주로 셔터 내린 매장 사무실에서, 이 책에서 가장 흔하게 나오는 방식대로 쓰자면, “박고, 박히는” 일을 홍홍홍홍 콧소리를 내며 즐긴다는 걸, 우리의 토끼, 해리 앵스트롬은, 몇 년째 파킨슨병에 시달려 침대에 누워있는 어머니로부터 듣는다. 꼼짝도 못하는 시어머니가 어떻게 며느리 바람 피우는 걸 아느냐고? 브루어는 그렇게 큰 도시가 아니거든. 벌써 시내에서 재니스하고 스태브로스가 그렇고 그런 사이라는 걸 모르는 인간은 해리 한 명밖에 없다니까?

  해리가 생각하기에 뭐 그럴 수도 있는 거다. 자기가 안 해주면, 만족을 위하여 다른 놈이 대신해주면 내 기분은 좋지 않지만 그게 더 마땅한 일일 수 있지 뭐. 재니스가 그리스인이랑 환한 낮에 하는 사랑이 최고라고 고백하니까, 해리는 이렇게 말한다.

  “알았어. 그 새끼하고 계속 만나라고 했잖아. 딱 한 가지만. 아이가 모르게 해줘.”

  결국 재니스는 남편하고 아들이 외출한 사이에 옷보따리를 싸서 집에 딱 한 대 있는 해리 명의로 산 차에 싣고 그리스인 스태브로스의 아파트로 옮겨버렸다. 해리에게, “사랑한다”는 짧은 편지만 남긴 채. 쉽게 말해 남편하고는 정신적인 사랑만, 애인하고는 육체적인 사랑만 하겠다는 말이지 뭐.


  바로 다음 날로 재니스의 가출은 전 브루어 시에 소문이 퍼졌다. 심지어 해리의 직장인 베리티 인쇄소에까지. 때는 1969년. 아폴로 11호가 드디어 달에 인간의 첫 발을 내려 놓을 딱 그때 재니스가 떠났고, 이제 매스컴은 흑인 폭동과 베트남전 반대 시위로 꽉 채워진다. 베리티 인쇄소에도 니그로가 두 명 있다. 오전 열한시부터 술에 쩔어 있는 판즈워스와 뷰케넌. 이 가운데 뷰케넌이 해리에게 접근해 시내에 있는 흑인 전용 선술집에 초대한다. 거기 가면 괜찮은 방법으로 뭉쳐 있는 액체를 쏟아내는 방법이 생길 수도 있다면서. 거기서 여러 니그로를 만나지만 해리의 인생에 크게 영향을 줄 니그로는 그리 크지 않은 덩치를 한 베트남 참전용사 스키터. 그리고 코네티컷 부르주아 가족의 일원이었던 만 18세 성인이지만 그렇다고 가출소녀라고 부르지 않을 이유가 없는 백인 질 펜들턴 양.

  처음엔 질이 해리를 따라온다. 흑인 공동체가 질을 발견해 마약도 거의 끊게 해주고, 그동안 먹여주고, 재워주고, 대신 상호 동의 하에 한 번씩 하면서 데리고 있다가, 흑인들과 있는 것보다 백인하고 함께 사는 것이 좋을 것이라 판단해 때마침 마누라가 도망한 해리한테 떠넘겼다고 보는 게 정확하다. 근데 질은 동부의 비싼 사립학교에 다녀, 상상 이상으로 양질의 교양과 언행을 익힌 건 물론이고 해리의 아들 넬슨한테도 선한 영향을 끼친다. 다만 해리에게도 질을 먹여주고 재워주는 반대급부로 자신의 몸을 내주는데, 해리가 아주 안 하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처음엔 머뭇거렸다가, 소위 유사성행위로 만족하다가, 나중에는 활발하지는 않지만 하긴 한다. 아무래도 10년 전 어린 딸이 죽은 후에 사용하는 걸 거의 포기하는 바람에 용불용설에 의하여 장비 상태가 좋지 않게 된 모양이다.

  해리와 넬슨, 그리고 질이 상당히 건전한 팀을 이루어 지내고 있던 것도 잠시. 니그로 베트남 참전 용사이자 그곳에서 가져온 PTSD 때문에 틀림없이 정신적으로 맛이 간 흑인 해방 그룹의 일원인 스키터가 가세한다. 스키터는 집에 오자마자 아마도 작은 커뮤니티의 권력을 장악한 것으로 보인다. 먼저 한 일이 질과의 섹스. 베트남전과 흑인해방에 정신병적으로 집착해 자신이 새로 재림한 흑인 예수라고 하는 등 확실히 미친 놈이다. 이 스키터가 나오는 장면 때문에 읽다가 질린다. 한두 번이면 족할 것을, 업다이크가 너무 과하게 많은 분량을 할애해, 거친 단어와 묘사를 쏟아낸다. 멀미날 정도로.

  백인 주택가에 흑인이 들어와 백인 여자를 올라타는 모습을 창문을 통해 동네 청소년소녀들이 라이브 관람하고, 그걸 부모한테 보고하는 일이 생겨 동네문제가 되지만, 자유주의자인 존 업다이크나 해리 앵스트롬은 전혀 개의하고 싶지 않다. 그러다 아이 교육 때문에 미쳐있는 백인 남자 둘이 해리의 집에 불을 싸질러버렸고, 죽이고 싶던 흑인은 도망쳐 목숨을 구했지만 스키터에 의하여 다시 마약 중독 상태가 되어버린 질은 연기에 질식해 죽어버린다. 이 사고 와중에 질을 구해내지 못했다는 이유로 아들 넬슨은 여태 좋은 관계를 유지한 아버지 해리와 완전히 멀어지게 된다.


  이렇게 해서, 아내는 다른 남자와 눈이 맞아 도망가고, 집은 홀랑 불에 타 파킨슨병에 걸려 누워있는 엄마가 온 종일 누워 계신 아빠 집으로 들어가고, 아들하고는 완전히 돌이킬 수 없는 삐딱선을 타게 된 위기의 해리. 이를 어찌하리오.

  존 업다이크의 단어와 문장과 문단이 격하다. 아마, 거의 틀림없이 페미니즘에 관심이 있거나, 페미니스트거나, 페미니즘 공부를 하고 있는 분은 적어도 두 페이지마다 한 번 정도는 구토유발 요인이 눈에 들어올 것이다. 그럴 소지가 있는 분은 아예 첫 장도 열어보지 않는 것이 좋다. 본문에서 말했다시피 가장 흔하게 출몰하는 단어가 삽입섹스를 비속어적으로 표현하는 “박다, 박히다.” 다분히 프로이트 식으로 관통 당하는 소극적 행위의 대상자인 여성을 비하하는 표현이라 주장할 수 있을 터인데, 이것 말고도 다른 표현도 무진장 들어 있다.

  진보를 자청하는 분들도 읽는 데 조심하는 게 좋다. 주인공 해리는 베트남전을 지지한다. 전쟁에 찬성한다는 말이 아니라, 자동차 뒷유리에 미국 국기 스티커를 달고 다니는 인간이라서, 비록 공화당 닉슨한테 투표하지는 않았지만, 일단 벌어진 전쟁에서 미국이 물러나기를 원하지 않는다. 근데 이게 존 업다이크의 의견이라고 단정할 이유는 하나도 없다. 아울러 해리가 베트남전에 반대하지 않지만, 집에서 흑인을 내보내라는 백인 미국 남자의 협박 가득한 요구를 비웃음 담긴 답변 하나로 간단하게 해치우는 걸 보면 적어도 상당한 수준의 자유주의 성향을 띄기도 한다. 돌아온 대가가 그들에 의한, 해리의 집에 대한 방화와 질의 죽음이기는 하지만.

  하고 싶은 이야기는, 자신이 견지하고 있는 특정 주의나 성향을 꿋꿋하게, 흔들림 없이 유지하면서 책을 읽고 싶은 분은 아예 안 읽는 것이 낫다는 말이다. 내 생각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읽는 편이 훨씬 좋을 거 같지만, 한편으로는 기껏 읽고나서 입에 거품 무는 건 별로 보고 싶지 않다는 거.





별점 5는 과하고 4는 박하다. 4.6 정도가 좋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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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5-10-22 09: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작가들이 업다이크 찬양하는 거 보고 <달려라 토끼>를 폴스타프 님이 읽으셨던 비슷한 때 읽었는데요, 그때 감상은 폴스타프 님하고 비슷했어요...그래서 이번에 나온 나머지 토끼 시리즈도 읽을까말까 고민하고만 있었는데 이 리뷰 읽으니 업다이크 한번 더 도전해봐야겠습니다.

Falstaff 2025-10-22 15:15   좋아요 0 | URL
감당하기 쉽지 않은 건 여전한데요, 그새 세월에 조금 더 닳아서 그런가 이젠 읽을 만하더라고요. 도서관 가셔요!

yamoo 2025-10-22 10:0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업다이크...유명한 작품 두 개 읽어봤는데 재미가 없더라구요...
달려라 토끼...이거 읽어봤는데...50여 페이지 읽고 덮었고, 리처드 포스터의 <독립기념일>도 초반부 읽다가 덮었습니다. 내년에 한 번 더 읽어보고 여전히 재미없으면 손절해야 겠습니다. 토끼시리즈는 하도 유명하고 평이 좋아서 시도를 좀더 해 본 후 결정해야 할 듯해요.ㅎㅎ

Falstaff 2025-10-22 15:16   좋아요 0 | URL
아무리 좋다 해도 독자하고 맞지 않으면 그걸로 끝이지요 뭐. 포스터의 <독립기념일>은 재미있게 읽었는데 그래서 고른 후속작 <스포츠라이터>가 염병이었던 기억이 납니다. ㅎㅎ

건수하 2025-10-22 14:0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잠재적 독자를 위한 세심한 배려 감사합니다 :)

Falstaff 2025-10-22 15:19   좋아요 1 | URL
토끼 시리즈가 이번이 초역이 아니라 전에 장왕록 선생(서강대 교수했던 고 장영희 선생의 아버지) 번역이 있었답니다. 당시 업다이크의 단어들이 하도 난장판이라 장 선생이 어떻게 번역할까 장고에 장고를 거듭해, 너무 심하다 생각한 장면은 그냥 삭제를 해버렸다는 뒷말도 있더군요. <토끼는 부자다>는 이 책보다 훨씬 순한 맛입니다만, <돌아온 토끼>는 마음 잡고 읽으셔야 할 겁니다. ㅎㅎㅎ

페넬로페 2025-10-22 16:1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여기에서 토끼가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가요?
상징하는 것이 있을 것 같아요.
시리즈가 4권이라 마음 잡고 시작해야겠어요.

Falstaff 2025-10-22 16:20   좋아요 2 | URL
<달려라 토끼>에서 나오는데요, 이렇습니다.
˝너무 키가 커서 토끼 같아 보이지 않지만, 하얀 얼굴의 폭, 파란 홍채의 창백함, 입에 담배를 찔러 넣을 때 짧은 코 밑(인중이겠지요?)이 신경질적으로 파닥거리는 모습˝
때문에 붙은 별명이랍니다. 또 1부에서는 참 열라 뛰어다니기도 합니다. ㅋㅋ

yamoo 2025-10-22 17:26   좋아요 2 | URL
저도 궁금했었는데...ㅎㅎ
 
독한 사랑 - 에밀 졸라 단편선 북커스 클래식
에밀 졸라 지음, 박명숙 옮김 / BOOKERS(북커스)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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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졸라의 작품집. 단편소설의 틀을 가진 것도 있고, 혹시 초안 또는 초안을 위한 메모나 스케치 아닐까 싶은 손바닥 소설도 있다.

  올해 초에 글항아리에서 나온 소설집 《방앗간 공격》에 실렸던 단편 <수르디 부인>이 이 책에도 들어 있다. 그건 한 두어 페이지 읽다가 말았다. 졸라의 단편집이 또 나온다면 이제는 그냥 패스해버리고 말아야겠다. 이건 그냥 내 생각일 뿐, 당신이 이 책을 읽던 말던 그건 알아서 하시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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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곳 창비시선 343
문태준 지음 / 창비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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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또 같은 생각하면서 시집을 골랐다. 문태준. 아마 이이가 나보다 많이 위일 거야. 이름이 태준, 이태준을 생각해서 그랬나? 아니면 박태준? 이 시집이 세번째 읽는 문태준의 시집인데 처음엔 그랬을지언정 두번째, 세번째는 아니다. 정말로 한참 꼰대 시인인 걸로 기억해서, 이제 이이 시를 읽으면 얼마나 더 읽을꼬, 하는 심정으로 골랐을 수도 있다. 전에 쓴 독후감을 지금 다시 읽어보니 이렇게 말했더군.

  “1950년에 경북 김천에서 태어났다고, 시집을 다 읽을 때까지 잘못 알았다. (중략) 난 문태준의 생년이 1950년 범띠인 줄 알았다. 그렇게 알고도 시를 읽는 데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근데 1, 2년이 아니고 20년을 잘못 읽었다. 1970년생이다.”

  하, 이것 참. 처음엔 몰라서 그랬다 치고, 난 두 번째 미쳤던 거였다. 여전히 나보다 꼰대인 줄 알았다.

  얼마나 꼰대 같길래 그러느냐고? 한 번 읽어보실텨?



  빈집


  주인도

  내각(來客)도 없다

  겨울 아침

  오늘의 첫 햇살이

  흘러오는

  찬 마루

  쪽창 낸 듯

  볕 드는 한쪽

  몸을 둥글게 말아

  웅크린

  들고양이

  여객(旅客)처럼

  지나가고

  지나가는

  집 (전문. p.13)


  그렇지? 요즘 시를 누가 이렇게 써? 이이 말고. 70년 개띠가 쓴 시라고 읽기 힘들겠지? 나도 서가 앞에서 시집을 훑어보고, 거 참 꼰대 시군. 종알거리고 나서 골랐다는 거 아냐. 시의 스타일도 좀 보시라고. 사람의 흔적이 거의 사라진 시골 폐가 비슷한 빈집에 그래도 햇살도 들고, 고양이도 여행객처럼 드나드는 모습을 스케치한 정물화. 2012년 2월에 낸 시집이니 시는 2011년, 문태준이 41세 때 썼으렸다? 그래, 그래. 스타일에 관해서는 이쯤에서 그만 두자. 그냥 이런 스타일을 유지하는 드문 시인이라고만 여기면 되겠다.


  요즘에는 만 89세, 즉 구순을 넘겨 사는 노인이 적지 않은데 21세기 초만 해도 그렇지 않았다. <어머니는 찬 염주를 돌리며>를 감안해보면 이 시에 등장하는 구순 넘은 할머니가 시인의 외할머니로 보인다. 이미 영혼은 반쯤 천국에 가 있는 살아 있는 보살. 자연 가까운 상태의 할머니도 스케치했다.



  구순의 입과 입술에는


  내 옆집 구순(九旬)의 입과 입술에는 작은 언덕이 하나 느릿느릿 움직여갔습니다

  구붓하게 걸어갈 때 큰 귀가 풀잎처럼 떠 있었습니다

  숨이 가쁘고 지난해 풀벌레 소리가 났습니다

  가끔 어떤 속말에는 잔물결처럼 웃고 이내 허물어지듯 손을 내저었습니다

  앉아도 꽤 여럿이 앉을 긴 의자에 혼자 앉았습니다

  흐릿한 빛이 지나가는지 슬며시 눈을 감았다 떴습니다

  두어번 물어도 그렇지, 그렇지,라고만 나직이 말했습니다

  구순의 입과 입술에는 저 먼 계곡처럼 무른 구름더미가 가득하였습니다.  (전문. p.14)


  뭐 이렇게 사는 거지. 다음 시에서 구순의 할머니는 드디어 명명(明明)한 겨울 하늘로 올라가 명명(冥冥)한 저승으로 가면 그걸로 끝이지. 아무리 명명明明하게 올라가봐라, 그곳은 단위가 어떻게 됐든 10의 600제곱 공간의 영하 273도 차디차고 명명冥冥한 어둠 속일 터이다. 그걸 모르거나 의례상 “사슴벌레, 작은 새, 여덟살 아이와 구순의 할머니, 마른 풀, 양떼와 초원, 사나운 이빨을 가진 짐승들이 모두 다 알아온 가장 단순한 노래를 읊조릴” 수 있는 것이겠지. 인생 뭐 별 거냐, 그냥 모르고 넘어가는 게 대빵이다.


  누구나 몸에 돌을 하나 이상 담고 다닌다. 치사하게 담석, 신장석, 췌장석 같은 질환을 이야기하는 거 아니다. 예컨대 <돌과의 사귐>에 나오는 이런 것들. 어제보다 조금 더 닳아진 돌, (몸의)아래로 안쪽으로 내려서는 돌. 눈을 감겨놓고 귀를 닫아놓은 돌, 후일 물속 깊이 잠길 돌. 소낙비 내리고 눈보라 치는 날 발아래서 주워올려 가만히 꼭 쥐고만 있을 돌들. 이런 걸 흔히 “맺힘”이라고도 하고, 기억이라고도 하고 드물게는 지독한 사랑병이라고도 하는 모양이다. 하여간 뭐가 됐든 당신 가슴, 당신의 대뇌, 아니면 당신의 생식기에도 이런 돌 하나 들어있는 줄 누가 알아? 그런데 이게 생각지도 못하게 다른 모습으로 새겨질 수도 있었네?



  주먹밥


  찔레나무에 막 새순이 돋아나면 풋풋한 산의 냄새가 울라오면 주먹밥 두어 덩이를 들고 산나물을 뜯으며 봄 산에 살았네 산등성이 넘고 넘어 갔네


  허기가 지면 빙빙 틀어앉을 줄도 모르는 봄뱀 독사의 새끼처럼 덤불 아래 퍼지르고 앉아 간도 안 친 주먹밥을 먹었네 송글송글 뚫린 몸으로 그 큰 주먹밥이 다 들어갔네


  반그늘을 툭툭 털고 일어나 숨이 조금씩 가빠지는 봄 산을 그녀는 넘고 넘었네  (전문. p.47)



   뭐가 돌이냐고? 나물 캐러 산을 둘 넘어 간 처자한테는 주먹밥이 돌이고, 이 처자를 앙가슴에 담고 사는 총각한테는 처자가 돌이겠지. 누군가는 다른 누군가한테 돌이 될 수 있는 법이니까. 내 돌은 누구냐고? 안 알려줌. 세종임금, 전봉준, 신채호? 그래, 그렇게 알고 있으면 편하겠다.



  불만 때다 왔다



  앓는 병 나으라고

  그 집 가서 마당에 솥을 걸고 불만 때다 왔다

  오고 온 병에 대해 물어 무엇하리,

  지금 감나무 밑에 감꽃 떨어지는 이유를

  마른 씨앗처럼 누운 사람에게

  버들 같은 새살은 돋으라고

  한 계절을 꾸어다 불만 때다 왔다  (전문. p.67)


  앓는 병을 결국 고치지 못했던 모양이다. 진짜 병일 수도 있고, 마음 속 갈증일 수도 있겠다. 다른 시 몇 수 읽어보면 진짜 병인 것도 같은데 시인들이 시에 쓴 걸 도무지 믿을 수 있어야지. 물어봐도 대답 안 해줄 확률이 95퍼센트는 넘을 거고. 담배가게 아가씨한테 사랑 고백하러 갔다가 괜히 담배 한 갑도 아니고 (그땐 “까치담배”라고 불렀지) 담배 두 개비하고 성냥 한 통 사가지고 온 거구의 막내 외삼촌 생각이 나네. 결국 말 한 마디 못하고 산악회에서 만난 은행원하고 결혼해 딸 둘 낳고 살다가 일흔 살, 만 69세에 눈 감았다. 잔뜩 술에 취해 지하철 1호선 타면 가죽 손잡이를 비틀어 가볍게 툭, 끊어버리던 기운 센 천하장사. 그래도 오래 살지 못하는 게 인생인 걸 뭐.

  다음에 또 서가에서 문태준 만나면, 50년 범띠가 아니라 70년 개띠 시인이란 걸 꼭 기억해야지, 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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