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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디오스
후안 까를로스 오네띠 지음, 김현균 옮김 / 창비 / 2008년 5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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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네티O’Nety 가문은 스페인과 아프리카 사이, 지브롤터 최남단에 위치한 영국령의 아일랜드 또는 스코틀랜드 출신 영국인 가문이었는데 이름을 이탈리아 식으로 오네띠Onetti로 바꾸고 우루과이 가는 배에 오른다. 그의 손자 가운데 한 명인 카를로스는 브라질 귀족 가문의 딸 오노리아 보르헤스와 결혼해 순서대로 아들, 아들, 딸을 낳아 이름을 라울, 후안, 레이철이라 했다. 셋 중에 가운데 후안 카를로스 오네티 보르헤스가 오늘 소개하는 책 <아디오스>를 쓰고, 9년 여 전에 내가 읽은 <조선소>를 쓴 우루과이의 소설가이다. 생몰은 1909년~1994년.
우루과이 몬테비데오에서 출생해 21세 때 사촌 마리아 아말리아와 첫번째 결혼을 하고 부에노스아이레스로 가서 로이터 통신사에서 일했다. 46세 때인 1955년에 귀국해 저널리즘 일을 하다 시립도서관장에 올랐다. 이때 라틴아메리카는 전반적으로 독재체제가 유행할 때라 반체제작품을 문학상 수상자로 선정하는 심사위원의 한 명으로 지목돼 잠깐 나랏밥도 자시고(보람찬 빵생활도 하시고) 이런 체제에 염증을 느껴 1974년,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스페인으로 날아가 정착해 1994년 마드리드에서 죽었다.
<조선소>에서 보듯이 사람이 좀 염세적이었지 않나 싶은데 여든다섯까지 살았다. 자신도 그렇게 오래 살 줄은 몰랐다고 나중에 한 마디 했단다.
<아디오스Los Adioses>는 1953년작. 즉 아르헨티나에서 쓴 중편소설이다. 책은 프롤로그, 본문, 에필로그로 되어 있다. 놀랍게도 프롤로그는 안또니오 무뇨스 몰리나가 썼다. 재미있는 책 <폴란드 기병>과 <리스본의 겨울>을 쓴 작가. 독자가 책을 헤매면서 읽는 걸 방지하기 위하여, 본문이 110페이지 조금 넘는 수준이니까 분량을 확보해준다는 의미도 포함해 몰리나의 서문을 프롤로그라는 이름으로 붙여 파는 모양이다. 사실 나 같은 보통의 독자가 한 방에 읽으면 약간 멀미가 날 수도 있겠다. 프롤로그가 책을 읽는데 도움이 되는 건 사실이다. 오네티도 당대의 라틴 아메리카 작가답게 다분히 붐문학적 구성을 따라 작품을 쓰는 작가라서.
몰리나의 프롤로그를 보면, 헨리 제임스의 <나사의 회전>이 이 작품에 큰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 <나사의 회전>은 한 부유한 지방 저택에 입주한 가정교사와 아이들, 그리고 출몰하는 유령들이 엮는 ㅆㄴㄹ,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인데, <아디오스>는 아르헨티나 국가대표 농구팀 센터를 지내면서 농구 최강국 미국과 결승전에서 맞짱을 떠 영광의 준우승 경험이 있는 남자가 나이들어 결핵에 걸려 아르헨티나 산악지방에 있는 요양소 부근의 호텔과 별장에서 점점 병이 심해지는 내용이다.
스토리만 크게 보면 그렇다는 말. 병자들이 모인 지역이라는 폐쇄성, 결코 밝은 색채를 띨 수 없는 의사와 간호사, 호텔 호스티스, 정류장 인근에서 술집과 우체국을 겸하는 잡화점 주인, 스물다섯 살 처녀들만 네 명이 죽은 별장을 관리하는 부동산 중개인. 구성부터 좀 우중충.
그러나 산 속에 자리해 맑은 공기, 상쾌한 바람, 아름다운 자연. 이건 오네티가, 몇번째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르헨티나 산악지역으로 신혼여행 갔던 지역을 기억해서 작품의 배경으로 깔았다고 한다.
중편소설이지만 줄거리 소개가 좀 길다. 인상깊게 읽은 작품이라서. 물론 독자마다 감상을 다를 터이니 감안하시옵고.
결핵요양원이 있는 산골 이야기는 토마스 만의 <마의 산>에서 충분히 익숙하다. 그러나 이곳은 아르헨티나의 산촌. 들어가면 걸어서 퇴원하는 예가 거의 없는 요양원으로 한스 카스트로프가 7년을 보낸 다보스 플라츠 근방의 국제요양원과는 여러가지로 비교하기 힘들다. 1930년대 유럽과 라틴아메리카 수준, 부르주아 전용과 일반 시민 전용 요양소의 차이 정도. 그리하여 <아디오스>의 요양원, 숙소로 사용하는 호텔의 환자, 숙박객, 휴양객, 의사, 간호사, 종업원들은 절대로 알프스 중턱의 국제요양원과 인근 소도시에 사는 환자와 철학자가 나누는 신학, 철학, 과학, 인문학적 대화를 나눌 엄두도 내지 못한다. 그래서? <마의 산>보다 쉬운 착한 소설이라는 뜻이다.
하지만 <마의 산>보다 착하다는 것이지 결코 만만하지 않다. 후안 오네티의 문장과 구성이 쉽게 읽히게 하지 않는다. 그래도 내 마음에 딱 들었다. 무엇보다 문장과 구성과 분위기가 내 스타일. 작품의 화자는 요양원과 호텔으로 가는 정류장 옆의 잡화점 주인. 술도 팔고, 별정우체국도 겸한다. 그러니 환자들에게 오는 편지는 전부 이곳을 거쳐야 하고, 이건 마음만 먹으면 편지 몇 통 정도는 수신자에게 전해주지 않고 ‘나’가 펴 보고 불태워버릴 수도 있다는 뜻. 시간적 배경이 1938년이니 이 정도 행위는 라틴아메리카에서는 보통 인정되는 범위에 드는 일이었을 지도 모른다. ‘나’는 이 휴양지에 들어와 산지 15년차. 12년 전에는 한쪽 폐를 절단하는 수술을 받았다. 정말 얼마 되지 않는 생존자 가운데 한 명이다. 이곳은 폐결핵 환자들의 요양지로 알려진 코르도바주의 산악도시 코스킨을 모델로 한 가상 지역.
작품을 시작하면 키가 크고 햇볕에 그을리지 않은 흰 피부에 확신 없이 움직이는 길쭉한 손을 지닌 남자가 느릿하고 소심하고 꿈뜬 모습으로 가게에 들어온다. 오늘 버스를 타고 도시에서 들어온 남자. 비슷한 얼굴을 15년 간 보며 살아온 ‘나’가 그를 보니 병을 고치지 못할 것이고, 병을 고치겠다는 일말의 의지도 찾아볼 수 없었다. 마흔 살 언저리쯤 됐나? 큰 키에 떨 벌어진 어깨를 가지고 있지만 구부정한 자세. 틀림없이 중병은 아닐 것이다. 가망이 전혀 없지 않더라도 병을 고치지 못할 사람. 이제 ‘나’는 이런 사람은 척 보면 안다. 이이가 전직 국가대표 농구선수.
더 높은 지역의 구식 호텔에 짐을 푼 농구선수는 수도행 기차가 들르는 날이면 편지 두 통을 주머니에 넣고 버스를 타거나 걸어서 시내에 나가 우체국에서 직접 편지를 부친다. ‘나’가 운영하는 별정우체국을 믿지 않아서가 아니라, 아마도 자신이 누구한테 편지를 보내는지 알리지 않고 싶기 때문일 것. 그러면 뭐해? 그들의 답신이 ‘나’의 별정우체국에 도착하는 것을. 답신 역시 두 통이 온다. 한 통은 여자가 쓴 것임이 틀림없이 녹색의 동글동글하고 큼직한 글씨체. 다른 한 장은 주소를 타이프한 봉투.
의사 군스는 농구선수에게 걷는 것을 금하라고 했다. 그러나 아직 상태가 나쁘지 않는 농구선수는 그 말을 들을 생각이 없는 듯하다. 결혼할 생각인 남자 간호사와 호텔의 키 큰 호스티스 레이나의 말을 듣고 알았는데, 농구선수는 호텔 말고 숲 속에 있는 작은 산장을 통째로 빌렸다고 한다.
사실 이건 조금 나중의 이야기기는 한데 일어난 일을 일일이 다 말할 수 없어서 처음부터 본론으로 갔다. 농구선수한테 손님이 왔다. 당연히 여자. 농구선수만큼은 아니지만 키가 크고 아들로 보이는 아이를 하나 데려왔다. 한 가족으로 보인다. 근데 처음에 선글라스를 쓴 키 큰 여자가 도착했을 때는 아이에 대해 아무 말도 없다가 나중에 갑자기 아이가 보이는 거다. 그러니 선글라스를 쓴 키 큰 여자는 틀림없이 농구선수의 아내거나 연인일 터.
아르헨티나에서는 한여름인 크리스마스와 새해 전야의 파티. 이때 전혀 병색이 없는 어린 여성이 산골 휴양지에 도착해 보잘것없는 무도회장으로 꾸민 ‘나’의 잡화점으로 들어와 춤도 추지 않고 한 자리에 앉아 있다. 누구를 기다리는 모습. 도시에서 떠나기 전에 전보를 쳤지만 기다리라 한 남자는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고. 여자는 몰랐겠지. 전보가 도착하려면 이틀 이상 걸린다는 걸. 그래서 ‘나’는 파티가 끝난 새벽 여자, 차라리 소녀를 구식 호텔에 데려다 준다. 이 여자도 농구선수를 찾아온 손님이다.
독자가 읽기로, 선글라스를 낀 키 큰 여자는 겨울에, 어린 여자는 여름에 농구선수를 찾아온 것 같은데? 하여간 농구선수는 어린 여자를 포르투갈 처녀들의 방갈로로 데려가 한 주일을 지낸다. 그리고 어린 여자는 도시로 돌아간다.
문제는 위에서 말한 것이 전부 화자 ‘나’의 내레이션이라는 거. ‘나’는 확신에 차서 말하지만 어디까지나 왜곡이 많고 ‘나’가 본 것에만 ‘나’의 해석으로 진술했던 내용이다. 그러니 여태 ‘나’의 진술을 믿고 따라간 독자는 당연하게도 ‘나’와 함께 왜곡, 잘못된 해석으로 미끄러졌던 것.
그런데 독후감을 쓰는 나는 이제 진짜 딜레마에 빠진다.
이 책이 왜 특별한지를 말하고자 하면 책의 뒷부분, 호텔에서 이들을 직접 서빙했던 호스티스 레이나와 남자 간호사의 말을 들어야 하는데, 그걸 소개하면 흥미로운 책의 결정적 스포일러가 드러나지 않을 수 없다. 나도 본문을 읽기 전에, 워싱턴 주립대 교수였던 볼프강 A. 루칭이 쓴 이 책의 에필로그를 먼저 읽은 걸 후회하고 있어서 뒷부분과, 농구선수와 두 여자의 관계를 거의 언급하지 않았다. 그걸 알면 ‘충격적인 결말’이 시시해지고 말 터이니까.
그래서 바라건대, 본문이 겨우 110페이지 조금 넘어가고, 프롤로그와 에필로그를 합쳐도 150페이지에 불과한 중편소설이라 직접 읽고 판단하시는 것이 좋겠다.
다만 이 책이 1953년에 나온 것이고 루칭 교수도 에필로그를 53년에 썼을 터, 그이의 에필로그 속에 든 여성차별적 의견/표현이 언짢을 수 있으니 조금 너그럽게 읽어야 하실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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