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안 - 쑤퉁 장편소설
쑤퉁 지음, 문현선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12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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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년 반 만에 쑤퉁을 다시 읽는다. 당시 <쌀>을 읽으면서 나는 이후 또 쑤퉁을 읽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세상이 마음먹은 대로 되는 건 아니라서 그 말을 지키지 못하고 다시 읽는다. 전에 50~60년대 초반에 출생한 중국 작가들의 작품을 읽은 첫 감정이 별로 좋지 않았다. 옌롄커와 위화 그리고 쑤퉁까지. 어린 시절에 대기근과 문화혁명, 대약진운동 같은 큰 사건에 대해 듣고, 직접 목격하기도 하고, 어쩌면 가족이 피해 당사자가 되었을 수도 있었을 터이니 좀 독해져 있었을 수도 있겠다. 처음 읽은 옌롄커의 <풍아송>, 처음 읽은 쑤퉁의 <쌀>은 도무지 즐겁게 읽을 수 없을 정도로 내용이 거칠어 두 번은 읽지 못할 작가라고 단정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나라 독자는 중국 작가에 비해 참 곱게 늙어가는 거 같았다.

  그러다 어찌어찌 옌롄커를 다시 읽게 되었는데, 그건 옌롄커보다 조금 선배 작가들, 다이허우잉과 모옌 같은 이들의 작품이 그래도 중국 소설을 더 읽어보는 것이 좋겠다고 옆구리를 찌르는 거 같은 느낌을 주었기 때문이라고도 할 수 있을 듯. 이제는 옌롄커, 위화, 쑤퉁은 물론이고 류전윈, 거페이 등, 추천을 받으면 서슴없이 읽는다. 그게 확장되어 타이완 소설까지 이젠 막 읽는다. 하필 쑤퉁을 다시 찾는 데 근 9년이 걸린 것은, 도서관 서가의 쑤퉁 책 위에 먼지가 너무 쌓여 손 대기가 거시기해서. 이번엔 마음잡고 물휴지 한 장 가지고 들어가 앞뒤, 위아래 박박 닦고 대출해 읽었다. <하안>이 그나마 먼지가 덜 두껍게 쌓여서 고른 거다. 다른 이유는 없다.


  도저한 장창(長江)의 지류인 진췌강(金雀江)은 위키피디아 검색을 해봐야 일본술 사케 하나만 나올 뿐이라서 진짜 있는 강인지 허구의 강인지 당췌 모르겠지만 동정호 남쪽의 후난성 일대를 흐르는 강처럼 보인다. 이 진췌강을 따라 여러 선대船隊가 오르내리며 펑황진, 유팡진, 마차오진의 물자를 보급하고 생산물을 다른 고장으로 보냈다. 그리하여 크게 양분하면 각 진 그러니까 뭍에 사는 사람들과 진췌강을 오가며 배위에 삶의 터전을 잡은 물 사람들로 나눌 수 있어서 쑤퉁은 물 사람들을 하河, 진 사람들을 안岸이라 칭해 작품의 제목을 <하안河岸>이라 했으리라.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지만 중국사람들도 크게 다르지 않아, 뭍에 사는 사람들은 뱃사람들 알기를 우습게 알고, 천하게 알고, 막 대해도 괜찮지는 않지만 큰 허물은 아닐 것들로 생각했다. 그건 프롤레타리아가 계급투쟁에 성공해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확립한 공화국 수립 이후에도 이하동문으로 작품의 시간적 배경이 1960년대부터 70년대 초반으로 보이는데 그때 역시 뭍에서 정치적, 사회적 문제로 밀려난 불가촉 천것들의 향, 소, 부곡 정도로 여겼던 것 같다.


  시간을 저 앞으로 당겨 대 일본 전쟁 시기에 이 동정호 이남 후난성 부근에는 이름난 열사가 있었으니 덩사오샹. 덩 열사에 관한 이야기는 여러 말이 있단다. 이것들을 섞어 (내가) 스토리를 만들어보자면 이렇다.

  펑황진에서 크게 장의사를 하던 집안의 아름다운 외동따님으로 태어나 어려서부터 계급의식이 강해 가난함을 좋아하고 부유함을 경멸해 흙투성이 농투성이를 사랑했다. 남자를 따라 산골로 시집을 가니 하는 일도 마땅하지 않았고 사람들도 자신을 은근히 따돌리는 거 같아서 아들 하나 들쳐업고 집안에 불을 확 싸지른 다음에 친정 펑황진으로 돌아왔다. 이때 전쟁이 한창이어서 진췌강 일대가 온통 붉은 피로 물들었을 때, 덩사오샹은 진췌강 유격대를 위하여 총기와 탄약을 운반하는 책임을 맡았다. 사람이 죽으면 큰 관 속에 시신과 총기 그리고 총알을 함께 넣어 묻은 다음, 유격대 대원에게 관이 들은 새 묫자리를 알려주면 대원들이 알아서 총과 총알을 가져간다. 거의 완벽한 방법이다.

  그러다 한 번은 겨우 총 세자루를 운반해야 하는 명이 떨어져 큰 보따리에 아들과 함께 총을 넣고 길을 떠나 유팡진에 있는 정자까지 짊어지고 갔다. 하지만 운이 다했는지 정자에는 일본 장교와 중국인 유지가 장기를 두고 있었다. 정보가 샌 거다. 자기의 생명은 끝났음을 눈치챈 덩사오샹은 조금도 굽히지 않고 재판을 요구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총살을 요구한 것도 일언지하에 거절당해 교수형에 처해지게 됐다. 대신 자루 속 아들은 마차오진으로 보내달라고 유언했는데 이것 역시 확답을 하지 않았다.

  덩사오샹은 목매달려 죽고, 이를 안타까이 여긴 동족 한 명이 아들을 버들광주리에 담아 진췌강에 띄워 보내 며칠 후 정말로 마차오진의 게으름뱅이 낚시꾼 펑라오쓰의 그물에 걸린다. 펑이 광주리를 열어보니 광주리 바닥에 커다란 잉어가 반짝이는 등짝으로 부레옥잠 한 덩어리를 받치고, 이 위에 아이가 앉아 벙긋 웃고 있었다. 그래서 아이 엉덩이에 물고기 모양의 몽고반점이 생겼다고. 펑라오쓰가 예전에 수적질을 해먹고 살던 불한당이라 자기가 키울 수 없어 마차오진의 고아원에 맡겨 놓았다.

  드디어 일본군이 물러가고 해방을 맞아, 정부 요원이 덩사오샹 열사의 후손을 찾아 고아원에 왔는데, 누가 누군지 알아야지? 그래 펑라오쓰를 데려와 덩사오샹과 닮아 보이는 사내 아이를 데려왔더니 펑은 아이들의 엉덩이를 훌떡 까놓고 몽고반점이 가장 물고기처럼 생긴 아이를 손가락잘하며 저 아이가 덩사오샹 열사의 아들이 분명하다 했으니 이이가 바로, 주인공은 아니고, 주인공 쿠둥량의 아버지 쿠원쉬안이다. 죽을 때까지 자신이 덩사오샹 열사의 아들로 알았던 이.


  어린 쿠원쉬안은 정부에 의하여 발탁되어 공부도 엘리트 코스를 따라 했고, 열사의 아들답게 총명해 머리도 똑똑한데다가 마음도 넓어 덩 열사가 죽은 현장인 정자에 추모비도 세운 유팡진에서 공직생활을 시작한다. 열사의 아들이라 출세길은 따논 당상. 그리하여 현에서 가장 아름다운 아가씨이자 진의 공작 선동대이며 지방방송국의 메인 앵커이기도 한 차오리민과 결혼해 외동아들 쿠둥량을 낳았고, 진의 서기로 진급했다. 서기는 공산당 직급이지만 오히려 진의 장보다 더 강한 세력을 쥔 자다. 지역 공산당의 최고 자리이니 당연하다. 이런 사람이 매사 정확하고 올바르게 민원을 처리하는 등, 물론 사소한 부정이야 아주 없지는 않았겠지만, 늘 인자하게 진의 인민을 보살폈으니 존경을 받지 않기도 힘들었다. 다만 한 가지, 배꼽 아래 달린 돌출물 관리가 좀 미흡했다. 중화인민공화국이 예수교를 믿지 않아서 다행이지, 어떻게 십계명 가운데 일곱번째 계명만 골라서 어기는지, 이웃의 아내는 전부 자기 것인 줄 알았다니까? 아무리 사람이 좋아도 이런 판국에 더 높은 기관에 민원이 올라가겠어, 안 올라가겠어? 아마도 이것 때문이지 않을까 싶다.

  어느 해에 드디어 지구 조사단이 파견 나와 아버지가 정말로 덩사오샹의 아들인지 조사하기 시작했다. 제일 큰 의문은, 아버지가 해적질 하던 펑라오쓰와 배 타고 창녀질을 하던 논다니 사이의 사생아였다는 거. 이건 보고서에 기록하지는 않았지만 유팡진 전체에 널리 퍼져나갔다. 아버지는 창문 없는 별실이 있는 여관에서 석달을 조사받은 후에 완전히 기력이 빠져 집으로 왔고, 그날로 진 서기 자리는, 집에 와서 아버지와 장기를 두곤 하던 아버지의 부하직원이자 선전부장 자오춘탕이 맡았다. 자오춘탕에게 두 여동생이 있었는데 둘 다 아버지가 홀딱 해치웠단다. 자오춘탕도 모르지는 않았던 듯.

  이날로 어머니는 끌과 망치로 대문에 영광스럽게 빛나던 “열사가문”이란 붉은 명패를 순식간에 때려 부수고 아들 쿠둥량에게 소리친다.

  “오늘부터는 꼬리 내리고 사람답게 살아! 놀이란 놀이는 무조건 금지야!”


  공산당 서기의 외아들이었으니 위세가 어땠을지 말로 하면 입 아프겠지?

  다음날 아침 학교 가는 길에 이웃집 우라이쯔, 치라이쯔 형제와 애들 누나를 만나 조금의 다툼이 있었다. 근데 그애들 누나가 쿠둥량의 얼굴에 냅다 침을 뱉아 버렸다. 세상이 변한 걸 아이들도 금세 알아버린 것. 이제 쿠둥량은 당 서기의 아들이 아니라 ‘헛방귀’로 불리기 시작했다. 무슨 말을 해도 헛방귀, ‘말로만’이라는 뜻이다. 아무도 진지하게 듣지 않을 것이고, 어떤 말도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뜻. 그리고 그건 점점 사실이 된다.

  위에서 명령이 떨어졌다. 전직 유팡진 당서기 쿠원쉬안은 샹양 선대의 7호선을 맡아 지내라고. 이렇게 쿠원쉬안과 쿠둥량은 아내이자 엄마인 차오리민과 떨어져 진췌강 위의 뱃사람으로 살아야 했다.

  이제 새롭게 부각하는 것은 유팡진 사람들 즉 출신성분과 계급, 극좌 이데올로기가 문화혁명이라는 광풍을 초래한 뭍사람들과, 그것에 소외당하고 존엄성도 잃어버린 인간들이 모인 공간인 진췌강 사람들의 대립, 대립까지는 아니고 차별화해서 사는 모습을 그리는데 역점을 둔다. 당연히 13세부터 26세까지의 쿠둥량이 주인공이니 사랑 이야기까지 포함해서.

  재미있다. 대립과 분노와 투쟁과 발전에 전력하는 뭍(岸) 사람들과 이에 소외되었지만 보살핌과 협력과 배려의 커뮤니티를 만들어 사는 강(河) 사람들의 다름에 공감하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을 듯. 남우세스럽지만 내 경우를 들어보자면, 은퇴를 하니 무엇보다 경쟁하지 않고 시험 치룰 이유 없이 사는 것 만 가지고도 강 위로 나온 것 같은 기분이다. 땅을 버리고 강에 오르니 좋고 편하다. 그저 조용히 살다가 가면 바랄 것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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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5-12-19 11:1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니 도서관 직원들 책에 쌓이 먼저 안 털어내나요? 어떻게 이용객이 털어야하는 건가요? 아쉬운 사람이 우물 파라 이건가요? 참... 저의 경우는 경쟁하고 시험 치르는 게 싫어서 사회로 못 나가긴 했죠. ㅎㅎ 속편하게 사는 게 장땡이죠. 좋아 보이십니다. ^^

Falstaff 2025-12-19 15:21   좋아요 1 | URL
털어내도 매일 할 수 없어서 결국엔 종이에 눌어 붙게 되더군요. ㅎㅎㅎ
물론입니다. 속 편한 세상이 장땡입죠. ^^

yamoo 2025-12-19 11: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새 부쩍 별5개가 종종 출현하네요...저는 중국이나 일본 소설은 별로 찾아 읽지 않은 편인데...별5개는 좀 고민이 되네요.. 것두 재밌다니...일단 찜해놔야 겠습니다..ㅎㅎ

Falstaff 2025-12-19 15:22   좋아요 0 | URL
동아시아 3국 가운데 아마도... 아닙니다. 우리나라 수준이 제일 높습니닷! ㅋㅋㅋㅋ
함 읽어 보셔요. 생각보다 괜찮을 수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