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의 잔해를 줍다 은행나무 세계문학 에세 26
제스민 워드 지음, 황근하 옮김 / 은행나무 / 202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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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7년 캘리포니아 버클리에서 태어나 세 살 되던 해에 가족의 원래 고향인 미시시피 덜레일로 이사해 청소년 시절까지 보낸 제스민 워드. 중등학교 시절에 학교에서 왕따를 당해 미시시피주와 겨우 천여 명이 사는 고향 덜레인은 워드에게 애증의 장소가 되었다고 한다. 가족 가운데 유일하게 대학에 진학한 워드는 스탠포드에서 영문학학사, 미디어 석사. 몇 년 지나 2005년에 다시 미시간 대학에서 문예창작 석사를 취득했다. 바로 이 해, 2005년 8월에 미국 남동부 해상에 허리케인 카트리나가 발생했다. 플로리다를 관통한 1등급 허리케인 카트리나는 멕시코 만에 머무르면서 하루만에 초대형 급인 5등급 허리케인으로 몸집을 키운 후 드디어 미시시피 강을 따라 북상한다. 이 영향으로 뉴올리언스와 인근 지역을 온통 물바다로 만들었으니, 카르리나 양이 호수의 제방을 무너뜨려 버렸기 때문이었다.

  이때 숱한 사망자와 실종자 그리고 이재민이 발생해 수만명이 뉴올리언스 돔 경기장과 컨벤션 센터 등에 수용되었는데, 지금도 기억하거니와 전기와 용수 등의 문제로 고생 깨나 했다는 내용의 방송을 연일 송출했었다. 왜 이렇게 상세하게 기억을 하느냐면, 2005년에 내가 빌어먹고 살던 회사의 당시 회장이 겨우 14세에 미국에서 대학을 졸업한 파키스탄계 미국인 수재였는데, 회장으로 부임하자마자 갑자기 흡혈귀로 변신해 모든 지역의 인원감축, 급여 동결, 복지 프로그램 취소와 더불어 극단적인 원가절감을 강조, 직원 전체, 말로만 직원 전체가 아니라 진짜로 모든 직원을 들들 볶아대고 있던 찰나, 뉴올리언스의 수퍼돔과 컨벤션 센터의 참상과 이에 따른 인종간 갈등 등의 방지를 위하여 전세계 법인이 솔선해 모금을 하자고 제안했기 때문이다. 인원감축과 급여동결, 복지 취소, 그리고 달달 볶는 원가절감으로 파김치가 되어 버린 직원들한테 뭐? 태평양 건너 멀고 먼, 얼굴을 봐도 누가 누군지 구분도 못할 사람들을 위해 돈을 모아 달러로 바꿔 보내주자고? 걔네들 천조국 국민 아냐? 그 회장새끼도 자기가 파키스탄 출신이라는 핸디캡 때문에 더 지랄을 했던 것인지 모른다. 아직도 그렇게 생각한다. 회장새끼 아니었으면 좋은 마음으로 모금에 응했을 것인데 사는 게 뭐 그렇지.

  게다가 각 국에서 가장 큰 이익을 내지만 인당 인건비가 가장 높은 우리나라 법인을 철수하겠다고 날이면 날마다 엄포를 뻥뻥 쳐대던 와중에 피 같은 돈을 주고 싶은 마음이 나겠느냐고? 정말 우리나라가 직원의 인당 인건비가 제일 높았을까? ‘생산직 직원 인건비’는 그렇다. 일본, 타이완, 이탈리아, 미국보다 높은 임금을 받았다. 임원 인건비는 아니다. 2005년에는 확실하다. 아마 지금도 그럴 것 같다.

  하여간 2005년 워드가 미시간 대학에서 석사를 받고 얼마 되지 않아 카트리나가 상륙해 이이의 고향땅을 결딴냈고, 소식을 듣자마자 차를 몰고 달려갔건만 제방을 무너뜨려 온 천지가 물바다가 되어 그저 발만 동동 굴러댈 수밖에 없었다. 이 작품은 미시시피 인근의 가상 흑인 거주 마을 부아소바주에 카트리나가 오기 전 열흘, 당일, 그리고 다음날까지 12일 동안의 흑인 가족 이야기이다. 따라서 작가의 체험담이 아니고 전적으로 픽션으로 읽어야 마땅하다. 물론 작가의 가족이나 이웃, 주변사람들이 하는 말을 다 채록해서 참고했겠지만 하여간 그렇다는 거다.


  로즈와 클로드 바티스테 부부는 연년생으로 랜들, 스키타, 그리고 주인공인 외동딸 에쉬를 낳아 없는 살림이지만 흑인 커뮤니티 부아소바주 마을에서 만족하며 살았다. 삼남매가 연년생 비슷한 터울이었다가 이후에 태기가 없었는데, 에쉬가 여덟 살이 되자 늦게 아이가 들어섰고, 엄마는 막내 아들 주니어를 출산한 직후 즉시 병원으로 옮겼지만 안타깝게도 그걸로 끝이었다.

  처음엔 아빠가 주니어의 기저귀를 갈아주고, 분유를 타 먹이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위로 삼남매에게 이런 것들을 가르쳐주고 주니어를 키우게 했다. 그러니 막둥이한테 두 형과 누나와는 엄마 비슷한 관계일 수밖에. 아빠도 열심히 산다. 홀아비가 된 이후에 술이 더 늘어 알코올의존 성향이 짙어져 일상생활에 지장을 받을 정도이지만 어떻게 해서라도 돈을 벌고, 부아소바주로 향해 온다는 카트리나에 대비하기 위하여 애를 쓴다. 그러나 역시 문제는 “일생생활에 지장을 받을 정도”의 술. 가족은 빈곤에서 벗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고, 집은 40년 만의 5등급 허리케인을 버틸 만큼 튼튼하지 않은데, 그나마 하나 있는 벌이 수단인 트럭도 이제는 수리하지 못할 정도로 낡아 버렸다. 게다가 고물 트럭을 이용해 집을 보수하려다가 허리케인이 오기 전날 한 번에 아버지가 손가락 세 개를 날려버렸으니 이를 어쩔꼬.

  맏아들 랜들은 농구실력이 뛰어나다. 자기 생각으로는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대학에 가야 하는데, 국영수 공부해서 대학 가는 건 꿈도 꿀 수 없어서 농구 특기생이 유일한 방법이다. 그러기 위해 여름 농구 캠프에 들어가야 하지만 입회비가 문제다. 얼른 보면 집안일엔 관심 없고 오직 농구 하나에만 몰두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천만에. 집안에 조금이라도 문제가 생기면 주니어는 랜들의 등에 딱 달라붙어 떨어질 줄 모르고, 랜들 역시 한 순간이나마 막둥이를 품에서 내려놓을 생각이 없다.

  둘째 스키타. 엄마를 닮은 랜들처럼 키가 크지는 않지만 단단한 근육으로 뭉친 소년. 얼핏 보면 아빠나 형제, 누이보다 자기가 돌보는 ‘차이나’라는 이름의 맹견 흰색 핏불테리어를 더 소중하게 여기는 것처럼 보인다. 차이나가 초산으로 새끼를 분만하는 것이 작품의 첫 장면이다. 말이 핏불테리어지, 이게 보통 맹견이 아니라서 주인이 아니면 누구라도 공격하는 본능을 지니고 있다. 그래서 가족 누구도 차이나와 차이나의 주인인 스키타를 함부로 하지 않는다. 꼭 그래서 만은 아니고 스키타 역시 고집불통에 사나운 성정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집안 돌아가는 걸 식구 가운데 누구보다 훤히 꿰뚫고 있는 건 가족 아무도 모른다.

  셋째가 주인공이자 외동딸 에쉬. 얘만 형제 가운데 공부에 소질이 있다. 지금은 그리스 신화, 이 중에서도 메데이아에 관해 열심히 뇌활동을 하고 있다. 열두 살 때 랜들 오빠의 친구이고, 아직도 자주 집에 놀러 오는 매니 오빠가 자신의 몸을 만졌고, 기분이 좋았다가 나빠졌다가 다시 좋아져 그냥 내버려둬 첫 경험을 했다. 이후에도 매니 오빠가 좋다. 다른 남자애들도 에쉬에게 접근했다. 에쉬는 거절하는 귀찮음보다 허락하는 간편한 방법을 택해 상당히 많은 남자애들과 숲 덤불 속으로 향했다. 이 사이에 매니 오빠는 자기 마음도 알아주지 않고 다른 여자애와 애인 사이가 됐고, 그랬음에도 불구하고 가끔 에쉬를 범했으며, 특히 최근 다섯 달 동안엔 매니 오빠하고만 했는데 어느덧 열다섯 살이 된 에쉬가 덜컥 임신을 해버리고 말았다.

  막둥이 주니어. 이제는 좀 컸다. 그래도 식구 가운데 제일 작다. 미국 남부의 집을 보면 집과 땅 사이에 공간을 띄운다. 해충이나 독사 같은 것들의 침입을 막기 위해서 그렇게 만들었다. 이 틈 사이에 주로 잡동사니 같은 것을 집어넣고는 하는데, 이것 가운데 하나를 꺼내 오기에 주니어의 체구가 아주 딱이다. 주니어 역시 그곳이 자기 아지트로 생각해 무슨 섭섭한 일이라도 있으면 얼른 그곳으로 내뺀다. 대여섯 살 정도의 소년이라 틈만 나면 밖에 나가 놀려 하지만 막둥이는 역시 막둥이. 집에서 그나마 귀여움을 독차지하고 당연히 식구 모두의 보살핌을 받는다.

  그리고 차이나. 새끼를 다섯 마리나 낳았다. 한 마리는 씨를 준 수컷의 주인 로키에게 주어야 하고, 나머지 가운데 한 마리 정도만 주인 스키타가 키울 것이다. 다른 새끼들은 팔아서 큰형 랜들의 농구 캠프 가입비로 쓸 예정이지만 안타깝게도 생각대로 되지는 못한다. 그래서 랜들의 대학 입학도 물 건너 간다. 날 때부터 맹견, 그리고 투견. 어렸을 때는 투견장에서 지기도 했지만 조금 큰 다음 부터는 적수가 없었다. 지금은 출산한 직후라서 투견장에 세우는 건 무리. 그러나 소설에 투견이 일단 나왔다 하면 개싸움 장면이 빠질 수 없는 법. 작가 제니스 워드는 투견장에서 맞상대하는 수컷 개가 사람이 생각하기에 수컷으로 가장 악독한 방법으로 차이나를 공격하지만 그것을 극복하고 승리하는 장면을 연출한다. 당연히 실제 상황에서는 전혀 가능하지 않는 장면이나 픽션이니까 넘어가자. 그럼에도 마음 약한 독자가 읽기에 부담이 될 만큼 잔혹한 장면을 글 좋은 솜씨로 묘사하고 있으니 각오하고 읽으시라.


  그리고 드디어 상륙하는 5등급 초대형 허리케인 카트리나. 멕시코만에서 5등급으로 몸집을 키운 다음 미시시피에 상륙할 당시는 3등급, 조금 약해졌다고 위키피디아에 쓰여 있지만 그딴 거 중요하지 않다. 역대급의 피해를 주고, 많은 사상자, 실종자, 재해민이 발생한 건 틀림없는 사실이니까.

  게다가 제방이 터져 쏟아지는 물은 바티스테 가족의 집을 무너뜨리고 침수시켜 버린다. 거실에 모여 있다가, 다락방으로 올라가고, 천장을 뜯어 지붕까지 올라간 아빠, 형제자매, 차이나와 새끼들. 범람한 물은 이제 튼튼하지 못한 집 전체를 기울이고, 더 지붕에 머물렀다가는 여지없이 가족 전부 물귀신이 되고 말 처지. 그러나 크게 걱정하지 마시라. 미국 소설이다. 미국 소설에서 가족은 함부로 죽지 않는 법이니까. 그렇지만 이 어려움 속에서 적어도 손실 하나 정도는 있어야겠지? 그렇다. 손실이 없지는 않다. 그리고 그건 당신이 생각하는 것이 맞다.

  한 가지 더 붙이자면, 미국 소설에서 빠뜨릴 수 없는 것. 가족애. 여기까지 이야기했으니 할 말 다 했다. 그래도 재미있으니 읽어도 후회하지 않을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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