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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보스를 찾지 않는다 ㅣ 일루저니스트 illusionist 세계의 작가 16
오타비오 카펠라니 지음, 이현경 옮김 / 들녘 / 2009년 11월
평점 :
품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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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오타비오 카펠라니를 위키피디아 검색해봐도 이탈리아어로 된 거밖에 없어 구글번역을 시켰더니, 이거 뭐, 진정한 구글번역이라서 도무지 어느 한 구석 가져올 것이 없다. 시칠리아 카타니아 출생의 1969년생. 근데 어떻게 나보다 더 늙어 보여? 어쨌거나 고대의 고귀한 시칠리아 피라이니토의 카펠라니Cappellani di Pirainito 가문 출신이란다. 그러니까 가족 조상이 귀족이었다는 것인데, 그게 뭐 어쨌다고?
이 책을 고른 건, 다른 때처럼 이탈리아 서가를 어슬렁거리다가 마음에 딱 차는 역자의 이름을 보고 골랐다. 이현경. 이탈로 칼비노, 프리모 레비, 주세페 토마시 디 람페두사, 움베르토 에코 등을 우리말로 번역하고 이탈리아 대사관 주관의 제1회 번역문학상과 이탈리아 국가 번역 문학상을 받은 이. 이 역자 덕분에 특히 칼비노를 읽을 수 있었다. 이현경이 번역했으면 기대에 어긋날 리가 없다 싶어서.
그리고 이 책이 들녘의 ‘일루저니스트 세계의 작가’ 시리즈 가운데 한 권이라는 점도. 벌써 10여 년이 흘러 이제 시리즈의 많은 책들이 품절, 절판되었지만 이 시리즈를 통해 읽은 책이 제법 있다.
출판사의 책 소개를 읽어보면, “소설 형식의 새로운 패러다임”이니 “조직보다 자아가 먼저인 21세기형 패밀리의 탄생”이니 말이 많은데, 물론 틀린 말처럼 읽히지는 않지만 이것보다는 마지막 단정인 “대중문화 코드에 기반을 둔 블랙 유머”라는 표현이 딱 와 닿는다. 즉 어떻게 말을 하던 간에 <아무도 보스를 찾지 않는다>는 대중소설이라는 점. 그게 어떻냐고? 재미있다는 뜻이다. 심지어 마피아 패밀리 이야기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도 이 책은 특히 뒤로 가면 갈수록 끌리는 맛이 있었다. 역시 패밀리 이야기는 죽고, 죽이고, 깔끔하게 죽이고, 그것도 폼나게 죽이는 장면이 나와야 제 맛이지.
가장 중요한 주인공은 돈 루 쉬오르티노. 시칠리아 출신의 이탈리아계 미국인. 뉴욕의 암흑세계를 대표하는 대부들 가운데 한 명. 뉴욕이 워낙 커서 한 명의 대부가 지배하는 건 불가능하다. 돈 루와 또다른 이탈리아 출신의 ‘존 라 브루나’와 더불어 뉴욕을 거의 양분하고 있는 밤의 실력자. 하지만 라 브루나와 더불어 늙어가 이제는 은퇴를 생각할 수밖에 없는 노인이다. 이 바닥에서 뼈가 굵은 만큼 현명하고, 자존감이 강하지만, 세대 차가 많이 나는 손자 루 쉬오르티노 주니어에 대한 사랑이 좀 과하다.
돈 루는 손자 루에게 끊임없이 강조한다. 누구한테나 존경받는 사람이 되라고. 하지만 그것을 즐기지는 말라면서 꼭 필요한 순간에만 힘을 사용하라고. 젊은 루가 더 젊었던 시절에 시내 한가운데 간이식당에서 자잘한 일 때문에 얼굴이 박살나 돌아온 적이 있었다. 이때 할아버지는 껄껄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이런 바보녀석. 멍청한 놈 같으니! 드디어 널 이렇게 만든 놈을 손 봐줄 때가 왔구나. 하지만 지금 당장 그놈을 죽이면 안 돼. 이번엔 그냥 넘어가자. 시대가 변했거든. 한 가지 명심할 게 있어. 그런 놈들은 말이다, 슬픈 눈빛으로 죽여야 돼. 네가 놈을 죽이는 걸 슬퍼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두에게 보여주어야 한다는 말이다.”
돈 루의 철학에 의하면 보스가 되는 건 지배하고 장악한다는 뜻이다. 상납금도 마찬가지. 상납금은 지불하는 게 아니고 거두어들이는 행위를 말한다. 돈 루는 오직 자신이 권력을 장악하는 데 방해되는 자들만 살해했다. 거기서 벌어들인 돈은 다시 투자해 사업을 키우고, 날로 커지는 사업 덕택에 지역 사람들 모두 행복하고 삶에 만족할 수 있었다. 그들을 괴롭히는 다른 세력들로부터 철저하게 보호해주었으니까. 물론 경찰과 FBI의 견해는 이것과 조금 다르기는 하지만. 이제 자금의 흐름이 문제였다. 날이 가면 갈수록 자금 운용이 투명해져 거두어들인 돈을 어떻게 합법적으로 보일 수 있을까, 하는 돈세탁이 가장 큰 문제였다. 이때 돈 루의 시야에 들어온 것이 LA를 중심으로 하는 영화산업. 대규모의 자금이 흘러 들어오는 영화산업 이야말로 돈세탁을 하는 데 그만이었다. 그래서 돈 루는 손자 루를 LA로 보내 친구들이 만든 무비 스쿨에 가담하게 해 스타쉽 영화사를 차려(아마도 인수해서) 대표 자리에 앉혔다.
어디에나 한 명의 골통은 있다. 스타쉽에서는 감독 레오나르드 트랜트. 이탈리아 출신 영화감독이다. 그러나 이탈리아 정체성을 버리기 위하여 남자 이름에 의례 붙는 알파벳 ‘o’를 떼어버려 레오나르도가 아니라 레오나르드라는 이름을 선택한 골통 감독은 노골적으로 시오르티노 가문이 어떻게 돈세탁을 하고 있는지 자기가 알고 있다고 협박하기에 이른다. 자기도 CG를 사용해 영화를 만들고 싶으니 CG회사를 하나 차리자는 조건을 디밀면서. 너무 길어져 중간을 뚝 떼고 말하자면, 이 영화사의 복도에서 폭발 사건이 터진다. 할아버지는 돈 루를 즉각 LA에서 시칠리아의 카타니아로 보내 손자를 카타니아의 거물 살 스칼리에게 보호해줄 것으로 기대한다.
할아버지 돈 루는 전화 한 통을 받는다. 맞수 존 라 브루나. 자기가 사람 한 명을 보낼 터이니 스타쉽 영화사의 비어버린 사장 자리에 좀 앉히면 안 되겠느냐고. 돈 루는 즉각 라 브루나의 부탁을, 말 그대로 흔쾌하게 받아들인다. 어차피 누가 와도 새 사장은 라 브루나의 바지사장일 뿐이니 하다못해 신문배달 소년이나 성냥팔이 소녀가 와도 아무 문제가 없다는 것쯤은 뻔히 알고 있다.
시칠리아 카타니아의 대부 가운데 한 명인 살 스칼리는? 할아버지 돈 루 덕분에 뉴욕에서 ‘스칼리 아마레티’ 제과점 체인을 열어 갈퀴로 돈을 긁었다. 아마테리는 시칠리아 식 과자를 말하는데 ‘살 삼촌’이라 불리는 살 스카리는 영화 <나 홀로 집에>에서 나오는 키 작은 악당 조 페시와 아주 흡사한 외모를 지녔고, 하는 짓도 좀 그렇다. 근데 돈 루가 손자를 맡기기에 살 삼촌이 이제는 너무 커져 버렸다. 뉴욕에서라면 감히 돈 루 앞에서 얼굴도 제대로 들지 못하겠지만 전통적인 지역 마피아가 딱 자리를 잡고 있는 시칠리아에서야 아무리 돈 루일지언정 살 삼촌을 가볍게 대할 수 없는 처지. 살 삼촌은 뽀대를 잡기 위해 손자 루에게 그냥 밥을 먹여줄 수는 없고, 아마테리 과자의 광고를 위한 영어 카피를 뽑으라고, 과자점 2층에 작은 사무실 하나를 내주었을 뿐이다.
살 스칼리 수하에 건달 세 명이 있다. 투치오, 누치오, 눈치오. 이름 같은 건 사실 알 필요 없지만, 하여간 이 가운데 한 명이 전직 마피아 패밀리인 고지식한 노인이 운영하는 가게에 들어가 노인 역시 당연한 질서라고 여기는 상납금을 받으려다가 우연히 현장에서 마주친 경찰관의 얼굴에 총을 갈겨 죽여버린 사건이 터진다.
딱 이때를 맞추어 뉴욕에서는 존 라 브루나가 바지사장 프랭크 에라에게 카타니아 출장을 명령하고, 돈 루 역시 살 삼촌이 자기 손자 루한테 당연하고도 마땅한 대우를 해주지 않는다는 것이 신경쓰여 전설의 칼잡이이자 돈 루 쉬오르티노의 충실한 경호원인 ‘협죽도’ 그러나 이제는 늙은 노장 핍피노와 함께 카타니아로 돌아오니 어찌 한 탕 칼부림, 총부림이 벌어지지 않으리오. 하지만 특히 이런 잘 쓴 대중 폭력 소설이야말로 함부로 스토리를 이야기했다가는 욕이나 푸짐하게 얻어 터지기 마련이라, 그걸 뻔히 알고 있는 내 입에서 더 이상의 말이 나오기를 기대하지 마시라. 우짰든 개.봉.박.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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