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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이 세상의 거대한 꿩이다
헤르타 뮐러 지음, 김인순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8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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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르타 뮐러는 루마니아 중서부 지역의 소도시 니츠키도르프에서 독일계 소수민족 신분, 즉 북부 체코에 사는 독일인을 일컫는 주데텐 독일인을 제외하고, 동남부 유럽 지역에서 생활하는 독일인을 가리키는 바나트 슈바벤 Banat Schwabian 신분의 1953년생 뱀띠 여사님이다. 니츠키도르프는 2021년 12월 현재 인구가 1,500명도 되지 않는 작은 도시이지만 독일인들이 많이 모여 살아 독일어만 사용하고도 크게 어려움이 없었던 모양이다. 당연히 루마니아 사람들은 다중이 모인 곳에서 자기들 모국어로만 대화하는 이들을 아니꼽게 바라보았겠지만. 뮐러 가족이 언제부터 루마니아에서 살았는지는 찾을 수 없었다. 할아버지는 현지의 부유한 농부이자 상인이었다고 한다. 동구에서 부자로 살았다는 건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나라가 소비에트의 위성국가로 전락한 다음에 집구석이 거덜났다는 것을 의미한다. 전쟁 중에 나치군의 SS 대원으로 활약한 아빠는 공산주의 치하에서 트럭 운전을 해야 했고, 엄마 카타리나 기온은 전쟁이 끝나고 소련의 점령지역에 거주하던 독일인을 강제로 수용하던 우크라이나 소재 노동수용소에서 5년을 견뎌 1950년에 22세의 나이로 해방을 맞았다.
작품 속 방앗간 주인 빈디시의 아내 카타리나 역시 소련의 강제수용소에서 생존해 돌아온 여성으로 설정했는데, 당시 소련 치하의 노동수용소는 비참하기 이를 데 없어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죽어 나간 곳이었다. 작품 속 생활력 강한 빈디시의 아내는 수용소 첫해는 추위와 굶주림을 견뎌냈지만 이후 굶어죽지 않기 위하여 차례로 경비원의 철제 침대를 찾아가 감자를 먹었고, 의사의 철제 침대를 찾아가 사흘 동안 탄갱에 들어가지 않아도 되는 질병증명서를 얻었으며, 사토장이 즉 무덤파는 인부의 철제침대에 들은 대가로 마을 초상집에서 가져온 고기를 먹을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늙은 러시아 여인의 집에 가서 노파를 돌보다가 초록색 트럭을 타고 수용소에서 해방된다. 물론 그동안 카타리나의 생명과도 같았던 겨울 외투, 털 담요, 털조끼, 털양말을 각기 빵 열 조각, 다시 빵 열 조각, 설탕 한 그릇, 옥수수 가루 한 그릇을 받고 팔아 텅 빈 위장을 달랬다.
1950년에 마을에서 빈디시와 카타리나가 만났다. 빈디시는 러시아에서 죽은 바르바라와 결혼할 생각이었고 카타리나는 전사한 요제프와 결혼하려 했지만, 이제 희망은 결코 이루어질 수 없어서, 빈디시와 카타리나는 마을의 공동묘지에서 무덤들 사이, 예배당 뒤편 풀밭에서 만리장성을 쌓고 결혼했다. 빈디시는 카타리나가 소련에서 살아나오기 위하여 자기 몸을 허락했다는 이야기를 들었고, 살기 위하여 어쩔 수 없었다는 건 알지만 그래도 기분 나쁜 건 기분 나쁜 것이라, 자주는 아니고 아주 가끔 소련에서 있었던 일을 입에 올려 카타리나의 속을 뒤집어 놓는다. 이건 죽음 앞에서 사실 아무것도 아닌 거였는데 세상에 비밀이 없는 법이라서 동네 한 아줌마한테 이야기를 들은 무남독녀 외동딸 아말리에도 “엄마는 소련에서 창녀짓을 했잖아.”라고 식탁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는 바람에 엄마의 기가 넘어가게 한 적도 있다.
그렇다고 빈디시가 아내를 미워하거나 탐탁치 않게 여기는 건 아니다. 무뚝뚝한 시골 사람들, 남자도 그렇고 여자도 마찬가지인 루마니아의 시골 사람들답게 아무 생각없이 그냥 떠오르는 대로 툭툭 말을 던져놓고, 그 말이 듣는 이의 가슴에 어떤 상처를 줄 것인지 전혀 고려하지 않는 성격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빈디시의 아내도 그렇다. 2년 전에 자궁적출 수술을 받은 후에 빈디시가 좀 집적거리려 할 때마다, “의사가 하지 말라고 했어. 당신 좋으라고 내 방광을 혹사시키고 싶지 않아.”라며 싹 돌아눕는 거다. 빈디시가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건 아닌 거 같은데, 하여간 아내가 몰인정한 인간인 건 맞다고 생각한다.
세월은 아마 1970년대 초중반 정도일 것으로 보인다. 당시 루마니아는 경제적으로 그리 여유도 없으며, 정치적으로는 차우세스쿠의 독재가 극을 달려 니콜라예 차우세스쿠 공산당 서기장은 국가의 아버지, 그의 아내 엘레나 차우세스쿠는 국가의 어머니를 칭하면서 당시 국제 독재자 연합 가운데서도 아주 효율적으로 국민을 억압하고 세뇌하던 시기였다. 이에 염증을 느끼던 독일계 소수민족 주민 가운데 많은 사람들은 루마니아를 떠서 조국 독일, 이 가운데 주로 서부 독일로 가기 위하여 공산주의 체제 특유의 길고 길며, 복잡하디 복잡한 행정절차를 밟고 있었다. 빈디시 가족도 마찬가지였다. 방앗간을 하고 있는 빈디시는 소위 기름칠이라고 칭하는 뇌물을 이장과 경찰서장, 우체국장, 신부 등등에게 돌렸는데 주로 밀가루 몇 자루 씩이었다. 하루는 이장 집에 역시 잘 빻은 밀가루 두 포대를 실어다 주고 밤늦게 집에 들어갔는데, 방 안에서 뭔가 낑낑대는 소리가 나 이게 무슨 일이지 싶어 슬쩍 문을 열어 보니 남편이 내려다보는지도 모르고 카타리나는 침대에서 열심히 자위를 하고 있다가, 남편을 보자 별로 놀라지도 않고 동작을 멈추었다. 빈디시는 자기 손길과 몸을 거부하며 혼자 열심히 즐기며 살고 있는 아내를 통해, 세상의 종말을 본 듯한 그리고 빈디시 자신의 종말을 맞은 듯했지만, 그렇다고 뭐라 하기도 참 거시기해서 그저 “방광이 어떠니 하더니 바로 이거였다는 말이지, 귀부인 마나님.”하고 말았고, 그러거나 말거나, 속으로는 조금 켕기기는 했지만, 아내는 곧바로 그르렁거리며 잠에 빠져버리고 말았다. 에휴, 카타리나, 나이들어 힘든데 백 번 잘했다. 그짓을 뭐 복잡하고 힘들게 해, 혼자 간단하게 해결해버리고 말지. 하지만 문제는 있다. 내가 두 아이 키우면서 둘 다 사춘기를 맞이하는 기념으로 자기 방 하나씩 주면서 딱, 말했다. 너네 방에서는 너네 마음대로 해. 근데 자위하다가 들키면 그건 자위할 자격도 없는 것들이야. 짤짤이 면허 취소시켜야 해! 카타리나야 너도 조심 좀 하지 그랬니. 아무리 남편이라도 쪽팔린 건 쪽팔린 거잖아. 입장 바꿔도 마찬가지고. 그리고 이왕이면 손가락이라도 좀 씻고 잤으면 좋았을 걸.
동네 야간경비원도 독일인이다. 조금 모자란 듯. 그는 절대 독일로 가지 않을 사람이다. 그냥 살던 루마니아 작은 도시에 머물러 여생을 보낼 심사인 것이 틀림없다. 그가 방앗간 앞 벤치에 앉아 꾸벅꾸벅 졸더니 이내 얕은 잠에 들었다. 빈디시가 벤치에 앉아 말을 붙혔더니 야간경비원은 빵을 씹으면서 나지막이 말한다. “인간은 이 세상의 거대한 꿩이야.” 이이의 아내가 한 시절 빵가게 주인과 살과 뼈가 타는 불륜관계를 저질렀던 모양이다. 그러다가 먼저 죽었다.
“인간은 이 세상의 거대한 꿩이야. 나는 집사람을 전부 용서했어. 빵가게 주인 일도 용서했고 도시에서 한 짓도 용서했어. 그러나 이렇게 빨리 세상을 떠나다니 그것 하나만은 도저히 용서할 수 없어.”
아내가 살았을 때 동네에서는 빵집 주인이랑, 그것도 모자라 틈만 나면 도시에 나가서도 뼈와 살을 불태웠던 모양인데 그걸 용서한 거하고, 자기 혼자 내비두고 빨리 죽은 건 참 용서하기 힘든 것이, 어떻게 인간이 세상의 거대한 꿩인 것과 연결이 되는지 이건 책이 끝날 때까지 모르겠다.
좀 모자란 야간경비원. 근데 특히 서양 소설에서는 이렇게 조금 모자란 사람이 놀랍게도 세상의 지혜를 많이 알고 있다. 많아도 정말 많이 알고 있다. 당시 해외 이주 서류에 경찰서장의 확인이 필요한 주민등록등본을 요구하는 건 이해가 가는데, 성당 주임신부가 발행한 세례증은 왜 필요한 지 모르겠다. 이 시절 루마니아에서는 당연히 해주어야 할 대민對民 서비스도, 우리나라 1960~70년대가 딱 그랬듯이, 맨입에 되는 게 없었다. 근데 경찰서장과 신부는 취향도 신기하지, 주민등록은 우체국이 문 닫은 시간에 우체국 안에 매트리스를 깔고 경찰서장이 그 위에서 여자한테만 서명을 해준다고 하고, 언제나 서장의 입에서는 독하고 드러운 술냄새가 풀풀 난다는 놀라운 정보를 전해준다. 가톨릭 성당의 신부는 정상적으로 성당 안에서, 다만 성당은 성당 건물인데 사제관에 놓인 신부의 철제침대 위에다 마을 사람들의 세례증을 전부 펼쳐놓고 그걸 찾아야 한다는데 신부 역시 남자는 안 되고 여자하고만 서류를 찾는단다. 빈디시 생각으로는 아내 카타리나가 우크라이나, 당시엔 소련이었던 곳에서 살아남기 위하여 비슷한 일을 했던 터라 한 번만 더 눈 질끈 감으면 될 거 같았지만, 현명한 바보 야간경비원이 하는 얘기가, 자네 아내는 나이가 너무 많아 자격 요건을 충족시킬 수 없네. 딸내미 아말리에는 좋을 거야.
아말리에? 세상에나. 아직 어린 아이를 어떻게. 야간경비원은 한 번 더 훈수를 둔다. “걸을 때 앞 발꿈치가 벌어지면 이미 경험을 한 거야.” 아직 시간은 좀 남았다. 당장 급한 건 아니니까 빈디시는 아말리에의 걸음걸이를 유심히 살펴보기 시작한다. 자기 짐작으로는 모피가공사의 아들이자 유리 기술자로 저 높은 산 위에 지은 공장에 다니는 루디와 그렇고 그런 사이라 애초에 벌써 처녀가 아니라 짐작하고 있지만 혹시 또 알아? 이 말을 아내에게 했더니, 아내는 딸 아말리에가 확실히 숫처녀인 것으로 믿고 있다. 아말리에가 처녀가 아니면 세상에 누가 또 처녀란 말이야! 그러나 물론 몇 달 후이지만 아말리에가 우체국 외출 준비를 하다가 아버지 앞에서 핸드백이 열리며 뭔가 반짝이는 것이 떨어졌다. 엄마가 묻는다.
“그게 뭐니?”
“아무것도 아냐. 그냥 약.”
“무슨 약?”
“어떻게 될지 모르잖아.”
무슨 약은 무슨 약. 위대한 1960년대에 여성 해방을 이루는 기폭제 역할을 했던 피임약이지. 아니나 다를까, 시간이 조금 지나 아말리에는 적어도 겉으로는 아무렇지도 않게 우체국의 매트리스 위에서 주민등록등본에 경찰서장의 서명을 받아오고, 덤으로 목에 검붉은 키스마크도 찍어 온다. 며칠 후에는 성당 사제관에도 가서 신부가 시키는대로, 그 엄숙하고 친절하고 부드러운 지시사항, “립스틱을 지워라.”, “슬립을 벗어라.” 그리고 당연히 립 서비스겠지만 “넌 참 예쁜 사과 두 개를 가지고 있구나.”에 이어 “두 다리로 내 등을 감아봐라.”에 고스란히, 아무 말도 않고 착착 일을 수행한다.
20년 전에는 엄마가 배고픔과 소련에서 탈출하기 위하여 몸을 허락했고, 이제는 딸이 루마니아에서 탈출하기 위하여 공권력을 대표하는 경찰서장과, 신의 권력을 대표하는 가톨릭 사제에게 육체를 허여하고야 만다. 뭔가를 탈출하기 위해 필요한 희생일 뿐이다. 살기 위한 것. <함락된 도시의 여자: 1945년 봄의 기록> 독후감에서 말한 적 있다. 생존하기 위해서라면, 그게 다른 이에게 해가 되지 않는다면 못할 일은 없다, 라고. 그래, 살기 위한 것 앞에서 부끄러운 일이란 없는 거다.
그런데, 이 일이 있기 바로 전에, 발끝을 벌리고 걷는 아말리에를 보고 난 후, 이제 아말리에 차례인 것을 눈치 챈, 적어도 강하게 짐작하기 시작한 아빠 빈디시가 사람들이 이제 아말리에 차례라고 말하는 소리가 듣기 싫어 장엄미사에도 참석하지 않고 집에 틀어박힌 채 눈을 감고,
“인간은 이 세상의 거대한 꿩이야.”
라고 말한 것은 무슨 뜻일까?
딱 10년 전에 헤르타 뮐러의 <숨그네>를 읽었다. 지금은 어떤 내용인지 전혀 기억나지 않고 오직 읽기가 매우 힘들었다는 것만 어렴풋하다. 당시 뮐러가 2009년 노벨문학상 수상자라고 해 문학동네에서 광고를 많이 해 그만큼 기대가 컸건만 어째 그리도 합이 맞지 않는 것처럼 읽히던지. 그래서 오래 헤르타 뮐러를 멀리하고 지냈다가 도서관 서가에 꽂혀 있어도, 주저하면서 골랐다. 그런데 지금은? 매력적이다. 부사와 형용사를 과감하게 생략한 건조하고 짧은 문장으로 주인공 빈디시 일가와 마을 주민들의 상황, 독재정권과 사회주의적 재분배라는 이름의 착취 같은 것을 실감나게 이야기한다.
진작 읽어볼 것을 그랬다. 앞으로 좀 더 파보아야 하리라.
* 불인정과 저항의 날이 왔다. 누군가는 환호하고 누군가는 또다시 분노를 품고 광장으로 갈 거다. 당신들 좋은 대로 하라. 다만 죽음과 폭력의 망령이 광장에서 춤추게 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품은 울분을 세상에 대고 밤새도록 토로하며 조금이나마 위안을 받았으면 좋겠다. 그 선에서 말았으면 좋겠다. 이게 괜한 걱정이면 더욱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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