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여행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54
자우메 카브레 지음, 권가람 옮김 / 민음사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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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편 열네 편과 에필로그로 구성한 작품집. 이렇게 말하는 건 의미 없다. 작품 열넷이 조밀하지는 않게, 알게 모르게 엮여 있는 큰 그림을 그린다. 사실 책을 읽을 독자를 위해 이런 것도 알려주고 싶지 않다. 이것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이 열네 편을 한 번에 다 추스려서 카브레의 명작 <나는 고백한다>처럼 장편소설을 만들었을 수도 있고, 에필로그에 썼듯이 “삶의 모든 것은 관계를 맺고 있다는 점”을 드러낸 것으로 볼 수도 있겠다. 열네 편을 각기 독립적인 이야기로 만들었는데 글을 쓰면서 작가는 “숨겨진 혹은 좀 더 명시적인 연결고리를 발견하게 됐고, 모든 것들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말한다. 그래서 이 작품집은, 틀림없이 각각 개별적 이야기이기는 하지만 다 읽은 후에 독자는 앞뒤가 헝클어진 한 묶음의 실타래를 정리한 기분이 들지 않을까 싶다. 나는 그랬다.

  지난 겨울 내내 우리말로 번역한 가사를 읽어가며 다양한 성악가들이 노래한 <겨울 여행>을 들었다. 사흘에 한 곡씩. 그러면 겨울이 간다. 이 책의 제목 《겨울 여행》이 바로 그 <겨울 여행>, 뮐러의 시에 슈베르트가 곡을 붙인 연가곡에서 따왔고, 다만 가사의 번역은 뮐러의 독일어 시가 아닌 카탈루냐어 번역의 중역인 것만 다르다. 이 가운데 1곡 “안녕히”와 마지막 24곡 “길거리 악사”는 처음과 마지막인 만큼 더 중요하게 사용했다.


  제일 앞에 배열한 <사후 작품>의 주인공은 무대공포증을 겪고 있는 최고의 피아니스트 페레 브로스의 리사이틀 장면. 원래 레퍼토리는 슈베르트의 후기 피아노 소나타 세 곡. D.958, D.959, D.960이다. 페레 브로스는 미세하게 맞지 않는 의자의 높이를 조절하고, 손수건을 꺼내 손바닥에 밴 땀을 닦는 김에 먼지 한 톨 없는 건반도 문질러 닦는다. 이어서 셔츠의 소매를 매만지는 브로스의 목은 타고, 혈관 속엔 가시가 떠다니며, 끝없는 걱정으로 심장은 터지기 일보직전이다. 페레 브로스는 피아노 의자에 앉아 벌써 4분 동안이나 손바닥에 스며든 공포를 닦고 있었는데, 그가 고문 수준의 고통을 겪고 있다는 걸 바르셀로나의 아우디토리 극장 3층에 앉은 관객들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 드디어 브로스가 건반을 누르기 시작하고, 연주를 시작하자마자 관객들의 수군거림 속에 퍼진 건 레퍼토리의 마지막 곡 내림나장도, D960이었다. 죽음에 대한 내밀한 성찰이자 내림나장조로 흐느껴 울었다는 한 남자가 쓴 곡.

  42분 13초가 지나 마지막 음의 여운이 사라지자 브로스의 연주인생 처음으로 약 10초 또는 15초간의 고요, 완벽한 적요를 맞이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브로스의 오른쪽 맨 앞줄 7번 객석에 앉은 남자, 세련된 작은 안경에 넓은 이마, 곱슬머리를 한 채 죽은 사람처럼 미동도 하지 않고 그를 똑바로, 비난의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프란츠 슈베르트가.

  그러나 이게 끝이 아니었다. 인터미션이 지나도록 브로스는 연주 중단을 고집했지만 매니저 졸탄 파르도는 연주계의 큰손인 그로스만 부인을 접대한 뒤, 바티칸에서 있을(지도 모르는) 브로스의 비공식 독주회를 섭외당하고 있었으며, 어쩔 수 없이 다시 무대로 나간 브로스의 머리 속에는 슈베르트의 나머지 곡이 아니라 시b, 라, 레b, 시, 도로 진행하는 불협화음의 사라방드, 베토벤과 모차르트의 시절을 살던 피셔의 작품이었다. 시대를 뛰어넘는 전위의 첨단으로 오랜 세월 매장당했던 곡. 브로스가 연주를 시작하자 관객들은 생전 처음 들어보는 곡에 놀라 항의의 표시로 자리에서 일어나기 시작했고, 성격이 조금 느긋한 사람들은 연주를 조금 더 들어보다가, 일어서 있는 이들에게 마음을 진정시키고 좀 더 주의깊게 들어보기를 권했으며, 세번째, 네번째, 다섯번째, 일곱번째 변주로 넘어가자 이게 도대체 누가 쓴 곡인지 나직하게 묻기 시작했다. 쇤베르크보다 더 현대의 작품인 것을 보니 분명히 리게티일 것이라는 추측이 공연장 허공을 배회하기 시작했다.

  이 연주가 끝나고 페레 브로스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영원히 무대를 떠난다.


  이를테면 <사후 작품>이 흥미로운 변주곡의 아리아aria에 해당한다.

  페레 브로스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영원히 무대를 떠나는 바람에 무산된 바티칸 비공식 독주회에 참석할 예정이었던 가우스 주교는 바티칸 박물관에 소장하고 있던 렘브란트의 작품 <철학자>를 복제, 절도했으며, <나는 고백한다>에서 명품 바이올린 비알에 악과 범죄가 뒤따르듯이 명화 <철학자> 역시 몇 건의 비정한 살인사건을 동반하고, 브로스가 마지막으로 연주한 피셔의 사라방드의 기원을 따라 18세기 바흐의 집안으로 시간여행을 마다하지 않는다.

  브로스의 매니저인 줄 알았던 헝가리인 졸탄 파르도도 과거에는 브로스 인생에 기념할 만한 D.960 연주를 할 정도의 피아니스트였지만 중도에 작파하고 음악사로 길을 바꾼 인물이다. 브로스가 아리아를 연주했다면 졸탄 파르도는 25년 전에 자기 성 ‘파르도’도 모른 채 서로 사랑한 마르게리타를, 슈베르트의 무덤 앞에서, 12월 13일 정오에 다시 만나기로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하여, 우산을 쓴 채 기다리고 있었다. 마르게리타는 약혼을 한 상태였으나 자신의 사랑을 확신할 수 없어 빈에 와 졸탄을 만났고, 28일간 열렬히 사랑을 했으며, 후회하지 않을 자신은 없었으나 그래도 결국 약혼자에게 돌아갔다. 약혼자도 사랑했으니까. 졸탄은 비탄에 싸여 마르게리타에게 25년이 지난 후에 이 자리에서 다시 만나자고 제안하는데, 그녀가 결정을 후회하는지 하지 않는지 꼭 알고 싶어서. 물론 졸탄도 사랑을 느껴 결혼을 해 20년간 함께 한 끝에 먼저 아내를 보내건만, 한 번도 살면서 행복한 적이 없었다. 그래서 먼저 죽은 아내에게 미안하고, 죄스럽지만 어떻게 하나. 25년 동안 마르게리타를 잊기 위해 전념을 다해봤어도 얼굴은 점점, 조금씩 점점 잊혀질지언정 25년 후의 12월 13일 정오 슈베르트 무덤 앞에서 만나자는 약속은 절대 지워지지 않았던 것을.

  그리하여 마르게리타는 올까? 온다. 회색 머리칼로 변한 모습으로 전동 휠체어에 앉아. 자신의 장애 때문에 오래 소변을 참지 못하는 아쉬움을 호소하는 곱게 늙은 중년의 장애인. 결혼 2년 만에 이혼하고 혼자 살면서, 졸탄을 잊지 못해 빈을 떠나지 않아, 바로 이웃한 구역에 살았으면서도 한 번도 마주치지 못한, 마주쳤으면 알아볼 수 있었을까 싶은데, 그래서 지난 25년이 더 안타까운 졸탄. 이혼 후 졸탄을 찾아보려 헝가리 페스트 음악원에 가보기도 했지만, 페스트에서는 남학생 전부 졸탄이라는 이름을 쓰는 것 같이 많고 많은 졸탄이 있었으며, 졸탄의 성이 파르도라는 걸 모른 마르게리타는 그저 빈손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이들의 만남은 어떻게 될까? <겨울 여행> 24곡처럼 거리의 늙은 악사가 연주하는 드렐라이어에 맞추어 12월의 빈, 꽁꽁 얼어붙은 마을 변두리 골목을 거리의 늙은 악사와 함께 떠나가고 싶었을까?

  이 마지막 열네 번째 작품 <겨울 여행>의 내용은 정말 신파 자체이다. 그러나 세상에 신파만큼 사람의 가슴을 미어지게 만드는 것이 있을까? 다만 신파 또는 뽕짝으로 사람을 후벼 파려면 그만한 곡조가 받쳐주어야 한다. 자우메 카브레는 그것을 더할 나위 없이 사람 미치게 후벼서 파고, 파고 또 파버린다. 그리하여 마음 속으로는 이건 신파야, 정신 차려, 끊임없이 귀에 대고 속삭이건만 독자는 결국 손을 저으며 그냥 감정의 파도 속에 빠지기로 작정해버린다. 그렇게 만든다. 문장으로. 역자 권가람의 뛰어난 우리말 솜씨로. 권가람. <나는 고백한다> 때부터 알아봤다.


  여기에 하나 더 보태 이야기하자면, 자우메 카브레가 뛰어난 소설가인 동시에 시나리오 작가이기도 해서 작품 속에 적절한 액션과 범죄 장면이 등장하고, 무엇보다 악의 다양한 방식에 집중하는 것 같다. 물론 겨우 <나는 고백한다>와 단편집 《겨울 여행》 이렇게 꼴랑 읽고 하는 말이니 믿을 필요 없지만. 이 책에서도 앞에 말한 것처럼 몇 장면의 암살 씬, 암살이라기보다 잔인한 청부살인과 이 과정에서 살아남았지만 청부인은 제거된 것으로 여기는 살인자도 등장한다. <소피의 선택>과 유사하나 독일군에 의한 유대인 학살과 관련해 더욱 잔인한 또다른 선택의 장면도 나온다. 그런데 청부살인의 배후? 고전음악의 탄탄한 후원자 그로스만 부인의 남편, 그로스만 씨. 이렇듯 제일 앞에 실린 <사후 작품>이라는 아리아를 열세 번 변주한 작품이랄 수도 있고, 아리아고 뭐고 차라리 거대한 푸가로 읽을 수도 있으며, 출판사 책소개에 나온 것처럼 “죽음의 그늘에서 사랑과 아름다움의 연약함을 환기시키는 ‘범성악 대위법’ 작품”이라고 읽을 수도 있겠다.

  문자를 써서 음악을 이야기하고 싶은 사람들은 놓치지 말고 읽어보기 바란다. 카브레만큼 설득력 있게 음악을 이야기하는 작가도 지극히 드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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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moo 2025-04-02 10: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바로 주문 들어갑니다~~
자우메 카브레의 단편집도 있었군요! 닥치고 구매합니다요..ㅎㅎ

Falstaff 2025-04-02 15:52   좋아요 0 | URL
옙! 좋습니다. 탁월한 선택!!

coolcat329 2025-04-03 19:3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 샀어요. 근데 저는 클래식 전혀 모르는데 문제가 될까요?

Falstaff 2025-04-03 20:24   좋아요 0 | URL
전혀 문제 없습니다. 어차피 음악을 문자로 표현하는 건 불가능하니까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