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운 배 - 제21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개정판
이혁진 지음 / 한겨레출판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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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강대 경제학과를 졸업한 작가? 심지어 큰 회사 사장까지 지낸 경영인 출신 소설가는 봤어도 경제학과 나온 소설가는 처음인 듯하다. 하여간 1980년 안동에서 나서 학교 졸업하고, 몇 년 직장생활을 하다가 뜻한 바가 있어 때려 치우고 글을 쓴 거 같다. 2016년, 그의 나이 서른여섯 살에 장편소설 <누운 배>로 한겨레문학상을 받으면서 작가가 됐고, 이 <누운 배>를 읽어보면 작가 스스로 조선회사에서 근무하지 않았으면 쓰기 힘들었을 터라, 글을 쓰기로 작심하기 전에 직장생활을 몇 년 했을 거라고 짐작한 것뿐이다. 뭘 정확하게 아는 게 아니고. 책 뒤편 ‘작가의 말’에 “이 이야기는 소설로 썼으며 그렇게 읽혔기를 바란다.”라고 말했다. 픽션이다. 작가가 바란 대로 픽션으로 읽었다.


  작품은 주인공이자 화자 ‘나’가 스물아홉부터 서른두 살까지 3년 동안 근무하는 중국에 있는 한국의 조선회사를 무대로 하는데 말 그대로 젊은 시절이다. 한참 팔팔하고, 기세좋고, 정의롭고 전망과 성장을 무엇보다 중요하게 생각하는 시절. 자신만만해서 자기의 능력치를 실제보다 높게 보는 것이 습관이 되어 자존감이 한참 높을 때. 지금 나쁜 의도로 이야기하는 거 아니다. 그 시절에 그렇지 못한 젊음은 젊음도 아니다.

  나는 책을 읽으며 이혁진의 데뷔작임에도 불구하고 이야기를 조밀하고 탄탄하게, 그것도 별로 과장 없이 탄탄하게 지을 줄 아는 것이 놀라웠다. 그냥 직진하는 용맹정진. 선체 총 길이 2백미터, 높이 24미터, 폭 32미터의 거대하고 흰 절벽이자 자동차와 트럭 6천7백대를 싣고 대서양을 왕복할 대형 수송 선박 2002호선. 이 절벽이 쓰러지면서 시작한다. 진수, 대형 선박의 건조(dry시키는 거 말고 배를 짓는)과정에서 ①사전적 의미로는 처음 물에 띄우는 일이지만 ②공정상 선박의 방수처리가 완료되면 도크에 띄워놓고 내외의 장비나 부품 등 의장을 설치하는 단계를 말하는데, 이 진수식이 끝나고 의장 부두에 서 있던 배가 슬슬 기울어지는 걸 발견한 작업자/기사가 이를 상부에 보고해 전사적으로 난리가 난다. 하다못해 생산과 기술, 설계 기타 등등과 전혀 관계가 없는 경영기획팀에서 근무하는 졸병 기사인 ‘나’한테도 야밤에 전화가 와서 득달같이 택시 타고 회사로 들어오라는 명령이 떨어진다. 진수식 했다고 술이나 진탕 걸쳤으면 어쩔 뻔했어? 다행히 맨정신이라 헐레벌떡 택시 잡아타고 곧바로 의장 부두에 도착하니 벌써 사장, 임원, 부장, 과장, 기감 등 수십명이 집결해 있고, 그냥 눈으로 봐도 배가 조금 기우뚱해 있는 상태였다. 무슨 조치를 취할 단계는 이미 지나서 그냥 눈 뜨고 배가 자빠지는 걸 봐야만 하는, 조선 회사가 배를 짓자마자 물에 자빠지는 현장을 목격해야 하는 조선 회사 임직원들. 팀장이 지시를 내린다. 명단이 적힌 종이를 주면서 아직 집에 있는 임원들한테 전화 또는 직접 찾아가 빨리 회사로 들어오라 하라고. 사장 나와 있는데 아무리 한밤중이라도 눈에 안 띄면 찍힌다. 여차하면 잘릴 수도 있다. 그러나 새벽 1시 38분, 2002호는 완전 전복되고 만다. 이때 ‘나’는 입사하고 1년이 되지 않았던 시점. 전에 잡지사 기자 생활을 하다 때려치우고 중국으로 온 것.

  배가 자빠졌고, 사장 명에 의해 경영기획팀이 보험 처리를 수명受命했다. 이거 처음부터 중요한 지점이다. 배가 어디 한두 푼인가. 이런 중요한 일을 이사, 상무, 전무가 아닌 부과장급의 팀장에게 맡기면, 회사의 자금 운용에 막대한 영향을 줄 수 있는 중대한 일을 맡은 팀장이, 성공만 했다 하면 대박날 거 같지? 눈치를 보니까 오팀장도 알고 있는 거 같다. 성공해봐야 자긴 별거 없다고. 오히려 망쪼만 아니면 다행인 것을. 오팀장이 짬밥을 조금 더 먹었다면 스스로 자기 보스인 홍이사를 찾아가, 아이고 이사님, 제 능력으로는 도저히 하지 못할 일이니 이사님께서 진두지휘 하시고 저는 뒤에서 열심히 따까리나 하겠습니다, 꼬랑지 팍 내렸을 거다. 성공하는 것이 실패보다 더 불리해질 수 있는데 이런 일이 대표적이다. 주인공인 ‘나’는 아무나 대장해도 상관 말고 보험 실전만 충실하게 익힐 절호의 찬스. ‘나’에게는 다행스럽게도 한국 해상보혐에서 거의 최고급으로 보이는 보험사정 능력자 홍소장을 만나 별의 별 거짓 문서 작성에 몇날 며칠 날밤을 새우게 된다. 공명을 저리 가라 할 정도의 놀라운 순발력과 지식과 판단력을 갖춘 사정인 홍소장은, 선박 전복이 기본적으로 작업 불량으로 인한 것임을 알고 있으면서도 선박 건조보험을 적용해 선박은 자연재해, 천재지변, act of god에 의하여 생긴 사고로 선가 전부를 보상받을 수 있는, 적어도 전부 비슷하게 받아낼 수 있는 유리하고 또 유리한 국면을 만들어낸다.

  그래서? 오팀장은 내 예상대로 날개를 다는 대신 진급에서 누락하고 ‘나’는 다른 부서로 발령난다.


  재미있겠지? 재미있을 수 있다.

  나는 아니었다. 나도 ‘나’ 문기사였다가 문대리로 승진하고 사표내는 ‘나’처럼 기획팀에서 뼈가 굵었고 10년이 넘게 팀장으로 일했고, 나중에 “당신이 희망퇴직을 희망하는 것이 회사가 희망하는 바”라는 말을 들었으며, 그동안 회사가 나를 필요로 했지만 이제는 내가 회사를 필요로 하니 그런 줄 알아라, 하고 또 10년 가까이 버티다 정년을 맞았다. 그래서 보험사정, 경영회의, 예산편성 등의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실로 지긋지긋할 때가 많았고, 우리나라 기업만 그런 것도 아니고 전세계의 무지 많은 기업들이 ‘나’가 일한 조선회사와 그리 다르지 않다는 걸 충분히 이해하고 있어서 정년을 끝내고 회사를 나오며 다시는 이곳에서 있었던 일을 생각하지도 않겠다고 각오를 했지만, 당연히 실제로 그렇게 될 리 없다는 것도 알고는 있었는데, 비록 업종은 다르다고 하나, 조직생활을 다시 구경하는 것이 아주 징글징글해서, 읽는 내내 지겨웠다. 내가 말하는 지겹다는 지루하다는 뜻과 달리 이해해주었으면 좋겠는 바, 보기 싫은 광경이 자꾸 눈에 띌 때의 기분과 유사한 상태를 그냥 ‘지겹다’라고 표현했다.

  이혁진이 글을 진지하게, 삼십대 초반의 경험답게 정의로운 관점으로 쓴 것이 마음에 들기는 했지만 이런 의미에서 지겨움을 극복하게 만들 정도는 아니었다. 그래서 오히려 작가에게 미안하다. 지난 35년 간의 직장생활을 돌이켜보면 사는 거 별 거 아니다. 아무것도 연연해 할 필요 없다. 그러나 말미에 하준구 고문의 말처럼 “지나고 나면 다 좋은 것만, 좋았던 것만 남”지는 않는다. 이런 보살은 소설에만 존재하는 지도 모른다. 나무아미타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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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25-03-28 05: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음 주 독후감:
월요일. 선충원, 《여덟 마리 말 그림》
수요일. 자우메 카브레, 《겨울 여행》
금요일. 헤르타 뮐러, <인간은 이 세상의 거대한 꿩이다>

그레이스 2025-03-28 09: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
재밌을것 같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렇군요! 폴스타님은 그러실수도 있겠네요.
어쨌든 관심 책입니다.

Falstaff 2025-03-28 15:49   좋아요 0 | URL
넵. 저도 기대하고 읽었는데 그만.... -_-;;

stella.K 2025-03-28 10: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광인 한때 열풍이어서 읽다 덮었던 기억이 나네요. 연애 소설은 당췌 제 취향이 아니라. ㅠ
근데 묘사는 잘하는 것 같긴하더라고요.

Falstaff 2025-03-28 15:51   좋아요 1 | URL
다른 책 읽으셨군요. 근데 왜 호기심이 생기지 않을까요? ㅋㅋㅋ 일단은 올해 안에는 이혁진을 더 안 읽는 걸로...

yamoo 2025-03-28 10:3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사랑의 이해> 작가의 데뷔작. 드라마 보고 작가의 원작을 읽을 생각이 샥 가셨습니다. 이 작가의 데뷔작이 다른 작품보다 훨씬 좋다고 얘기는 들었어도...아직 읽어 볼 요량이 없는 작가입니다.

근데 스타프 님, 이혁진 작가 데뷔작을 읽으셨으니 <사랑의 이해>도 읽으시고 독후감 남겨주시면 하는 맘이 있습니다. 이거 굉장히 이상한(?) 작품...드라마 보니 그렇더라구요..ㅎㅎ

Falstaff 2025-03-28 15:52   좋아요 0 | URL
드라마로도 만든 작품이 있군요. 흠. 돈 좀 만졌겠군요. ㅋㅋㅋ
언젠가 읽을 지 모르지만 하여간 당분간은 아닙니다. ^^

han22598 2025-03-29 12:3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직장생활 3년......일,이년은 적응하고 내일 해내느라 정신없었는데, 일을 잘하고 못하고는 상관없이...직장생활하는게 무슨 의미가 있나 싶어서지기 시작했어요. 도대체...머하러 이러고 사는지..생각하다 이곳으로 왔더니만. 별거 없다는 말이 왜케 위안이 되는지...ㅎㅎ 감사해요

Falstaff 2025-03-29 16:06   좋아요 0 | URL
정말 별거 없는데, 사실 쉽지 않은 이야기입니다. 회사 안의 무수한 미친 연놈들 다 무시하면서 살 수도 없고, 언젠가 나도 미친놈이 된 거 아닌가 싶기도 하고요. 뭐 사는 게 다 그렇지요. ㅎㅎㅎ
그나마 조금이라도 위안이 되셨다니 고맙습니다. 지지고 볶으면서도 그래도 직장 덕에 아이들 키워 독립시켰고, 누옥도 하나 장만했고, 넉넉하지 않지만 연금 받으면서 살고 있으니, 에휴, 그것도 고맙다면 고마운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