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상소설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73
미하일 조셴코 지음, 백용식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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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수보로프 박물관에서 외관장식 담당 예술가이자 모자이크 작가로 일하던 우크라이나 출신 아버지와 러시아인 어머니 사이에서 1894년에 태어나 거의 64년을 살다가 63세로 죽은 러시아 작가, 동화작가, 풍자작가. 1953년에 직접 쓴 자서전에서는 상트페테르부르크 출생이라 했지만 우크라이나 폴타바에서 낳았다고 주장하는 전문가도 득시글거린다 한다. 그까짓 것 알 필요 없으니 궁금해하지 마시라. 미하일 미하일로비치 조셴코는 하여튼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성장해 상트페테르부르크 대학 법학과에 입학했지만 등록금을 제때 내지 못해 제적을 당하고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한다. 전선에서 방독면을 쓰지 않은 채 독일군이 살포한 독가스를 흠뻑 마셨고, 당연히 호흡기 부상을 당해 돌아와 러시아 혁명을 눈 앞에서 지켜본다. 혁명 후 내전시기에 붉은 군대에 입대해 활약해보려 했지만 전에 당한 부상이 또 문제를 일으켜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집으로 돌아온다.

  이후 문학에 뜻을 두어 나름대로 풍자문학에 이름을 떨치기도 했으나 예술도 당의 논리에 순응해야 한다는 1946년 즈다노프 독트린이 발표된 즉시 본격적인 비판을 받아, 저 유명한 1938년 앞뒤로 스탈린에 의하여 저질러진 무지막지한 숙청도 무탈하게 견뎌낸 조셴코는, 즉각 극심한 빈곤에 시달리기 시작한다. 결국 스탈린이 죽은 후인 1958년이나 되어서 연금을 받기 시작했지만 그러면 뭐해, 몇 달 지나지 않아 7월 22일에 그만 숟가락 놨는데.


  《감상소설》 역시 풍자문학으로 봐야 하지 않을까 싶다. 초판 출간이 1927년. 이미 소비에트는 스탈린 시대로 접어들었다. 이런 시절에 함부로 펜을 놀렸다가는 쥐도 새도 모르게 골로 가는 일쯤 각오해야 마땅하다. 내 생각으로 조셴코 역시 일찍이 레닌 시대부터 함부로 입을 놀렸다가는 날 샌다는 걸 알아채고 일찌감치 우회작전을 펴지 않았나 싶다. 《감상소설》 초판 서문에는 이 책에 나오는 작품들을 신경제정책과 혁명이 절정일 때 썼다고 말한다. 이어서 계속 주접을 떨기를:

  “독자들은 진실한 혁명적 내용, 거대한 주제, 지구적 과업과 영적 페이소스, 한마디로 충만하고 고상한 이념을 작가에게 요구할 권리가 있다. (중략) 작가는 마음속 깊이 아픔을 느끼며, 이 감상소설집에는 영웅적인 것이 많지 않다는 사실을 미리 알려주는 바이다.”

  즉 주변에서 볼 수 있는 평범한 서민들의 일상 에피소드를 통해 혁명과 사랑의 음모를 소비에트적 감성과 유머감각에 입각해 묘사하려 한다. 사실 이 길 말고는 없었을 것이다. 볼셰비키라는 토착적 공산주의 체제, 세상에서 가장 권위적이고 중앙집권적인 독재체제에서 작가가 진지하게 현상을 해석하고 문제를 제기하고자 하면 언젠가는 자신의 심장에 스스로 총알을 박아 넣든지, 즐거운 마음으로 면회 없는 10년 유배형을 받을 각오를 해야 했던 시절이니까. 실제로 조셴코와 뜻을 같이했던 “세라피온 형제회” 회원들은 훗날 모스크바와 레닌그라드의 정식 소비에트 작가로 활동하면서 1937년부터의 ‘대숙청’ 시기를 다른 작가들에 비해 그나마 덜 희생당하며 지났으니 그것도 틀린 방법은 아니었을 터. 조셴코는 실제로 처남 부부가 체포되자 처조카를 데려와 양육하고 이 시기에 작가동맹 레닌그라드 지부의 간부회 임원으로 선출되며 이듬해는 심지어 “노동의 붉은 기치” 훈장까지 받는다.


  이런 시절에 아무리 풍자 작품이라 하더라도 책을 출간하는 일에는 담대한 각오가 있어야 했나 보다. 조셴코는 중판 서문에 난데없이 이 책 《감상소설》은 사실 콜렌코로프라는 소부르주아 가정 출신의 우익에 속한 작가가 썼으며 그는 현재 개조되고 있는 중이라고, 개조가 된 후에 작가들 사이에서 주목할 위치를 차지할 것이라 말한다. 자기는 그저 진짜 작가 콜렌코로프의 집필을 지도해주었다고.

  3판 서문에서는 한술 더 떠서, 조셴코는 주로 맞춤법상의 오류를 교정하고 이데올로기를 바로잡는 것만 했으며, 작업을 콜렌코로프의 것이라 당연히 원고료 전부를 이반 바실리예비치 콜론코로프가 받았다고 적는다.

  4판 서문은 놀랍게도, “신경쇠약, 이념적 동요, 큰 모순과 멜랑콜리, 이 모든 것은 ‘발탁된 책임자’인 콜렌코로프의 몫으로 돌려야 했다. 작가 자신, 즉 그런 건강하지 못한 사람들의 아들이자 형제인 조셴코는 오래전에 이 모든 것을 극복하였다. 현재 그에게는 모순이 없다.”라고 하며, “무방비 상태의 작가에게 주먹을 쳐들기 전에 이 복잡한 정황들을 기억해주시기를 훌륭하신 비평가들께 간청드리는 바”라고 하는데, 행여 이런 서문(들)가지고 정말 콜렌코로프라는, 조셴코한테 지도를 받은 작가가 있어서 그가 이 책 《감상소설》을 썼다고 생각하는 독자는 없을 듯하다. 이 모든 것들도 몽땅 다 풍자라고 해야 마땅할 듯하다. 쉽고 간단하게 말해서, 이런 책을 썼지만 괜히 삐딱하게 읽어서 나를 골로 보내지 말라는 애교쯤으로 보는 것이 마땅하지 않을까 싶다.

  참 살기 힘든 시절을 보낸 건 이해한다.


  1927년에 출간한 《감상소설》에는 여섯 단편이 들어 있었던 것처럼 보인다. 이 책에는 여섯 단편과 함께 “첫 소설”이란 부제로 두 작품을 더 실었다. 전부 화자인 “작가”가 작품을 쓰게 된 동기와 등장인물의 배경 같은 것을 먼저 설명하고, 이야기, 초판 서문에서 말한 대로 주변의 별스럽지 않은 서민을 등장시켜 혁명과 사랑의 음모를 묘사한다. 막판에 가면 결론으로, “그게 다 사람 사는 것이지 뭐.”

  《감상소설》의 초판이 나온 다음해, 미하일 불가코프는 <거장과 마르가리타>를 집필하기 시작한다. 왜 난데없이 불가코프를 입에 올리느냐 하면, 1927년과 28년이면 같은 시대인데, 아무리 풍자소설과 모더니즘 소설이 차이가 난다고 해도 그렇지 어떻게 이렇게 스타일이 다를 수 있을까, 턱이 떨어질 정도라서. 《감상소설》의 단편, 좋다 ‘풍자단편’이라 하자, 이 풍자단편이 나온 시기를 모른 채 읽고 있는 독자에게, 지금 읽고 있는 소설이 언제 쓰인 것 같나요? 하고 물어보면, ‘혁명’이나 비슷한 단어만 없으면 푸시킨 시절 같은 걸요, 라고 대답할 것 같다. 잘 봐주면 디킨스까지?

  물론 이건 조셴코 탓이 아니다. 이 정도를 쓰고 나서도 세 번이나 서문을 고쳐 써야 할 만큼 몸을 사려야 했던 시기였으니. 다만 아무리 좋게 읽으려 해도 문제는 스타일이다, 내게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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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14일
에리크 뷔야르 지음, 이재룡 옮김 / 열린책들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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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년 10개월 전에 에리크 뷔야르의 2017년 공쿠르 상 수상작품인 <그날의 비밀>을 읽었다, 라고 기억한다. 왜 이런 식으로 말하는가 하면, 뷔야르의 책을 읽기는 읽은 거 같은데 어떤 책이었는지 제목도 기억나지 않고, 당연히 작품의 내용이나 스토리도 기억나지 않았다. 당시에 쓴 독후감을 뒤져보니까 히틀러 집권 당시부터 2차 세계대전까지를 아우르면서도 짧은 작품이었다. 어렴풋하게 기억난다. 독일을 지탱하던 거대기업 바스프, 바이엘, 아그파, 오펠, IG 파르벤, 지멘스, 알리안츠, 텔레풍겐이 히틀러에 협조하지 않을 수 없었던 배경을 흥미롭게 읽은 (어렴풋한)기억. 솔직하게 그것 말고는 전혀 생각나지 않는다. 주인공도 없고, 처음부터 끝까지 등장해 서사를 이끄는 등장인물도 없는 작품이며 불과 140쪽의 짧은 분량으로 공쿠르상을 거머쥐었던 책 <그날의 비밀>. 뷔야르라는 이름이 문득 떠올라 그의 다른 작품을 골랐으니, 1789년 7월 14일, 바스티유 감옥이 함락되는 순간을 눈 앞에 그린 <7월 14일>이다.


  귀족들의 저택이 밀집해 모인 파리 생탱투안 지역에서도 단연 명성을 떨친 호화 별장 폴리 티통, 앙시앙레짐 말기에 가장 호화롭고 사치스러운 장식, 그리고 정원에 속한 숲으로 유명한 곳. 이 저택은 또한 인류 역사상 최초로 두 명의 인간을 바구니에 태운 열기구가 이륙한 역사의 현장으로도 유명세를 떨친 바 있었으니, 왕립 채색벽지 제조공장 소유자 장바티스트 레베용이 머무는 곳이었다. 프랑스 역사에 등장한 숱한 멍청이 왕들 가운데서도 손꼽히는 우둔한 군주 루이16세의 배우자 앙투아네트는 방에 환상적인 그림이 그려졌거나 반짝반짝 빛나는 원색의 벽지를 선호했는데, 이 바람에 다른 왕족과 귀족들도 자기들 방을 왕비의 그것과 가장 비슷하게 치장하고 싶어해 장바티스트 레베용의 금고에는 밑에 깔린 금화가 납짝 짜부러졌다는 전설이 전해져 내려온다. (구라다, 구라.)

  1789년 4월 23일. 프랑스 최고 수준의 부르주아 장바티스트 레베옹은 이 와중에 무진장한 현금을 쏟아내는 왕립 채색벽지 제조공장의 노동자 임금을 일당 20솔에서 15솔로 삭감하겠다고 발표한다. 15솔이면 충분하게 먹고, 살고, 아이들 키울 수 있을 것이며 계속 20솔을 받는다면 얼마 가지 않아 노동자들이 사업주인 자신보다 더 부유하게 살 거라고 엄살을 부리면서. 얼핏 생각하면 그깟 5솔, 이렇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무려 25%의 임금삭감을 의미한다. 게다가 1789년에는 대기근이 들어 민중들은 유래가 없이 굶주리고 있는 와중에 당연히 밀 가격 역시 하루가 다르게 폭동하고 있던 때였다. 굶주린 사람들이 도시로 몰려드는 바람에 파리 시민 60만 가운데 8만 명이 아무런 수입이 없이 살고 있어, 임금을 깎는다 하더라도 15솔의 일당을 받기 위한 노동력은 쌔고 쌘 것은 사실이었다.

  여기에 악덕 기업주 레베옹이 하는 꼴을 유심히 관찰하고 있던 초석 공장 소유주 앙리오가 있었으니, 앙 사장 역시 나도 임금을 인하하겠다고 나발을 불어대, 파리 시민들이 폭발하는 건 시간 문제였다. 세상의 “거의” 모든 혁명은 배고픔 위에서 벌어진다.


  4월 27일 오후 파리 시민들은 대규모로 그레브 광장에 집결해 “부자들에게 죽음을!”이라고 외치며 빵값을 2수로 인하하라고 요구하기 시작했다. 거참. 몇 온스의 빵값을 2수로 하라는 이야기인지는 책에 나오지 않는다. 그러니까 독자에겐 이런 가격은 의미 없다. 그러거나 말거나 시민들은 레베옹과 앙리오의 허수아비를 만들어 화형식을 해버렸으니 두 사장님은 등골 깨나 저렸을 듯. 그리고는 곧바로 앙리오의 저택에 난입해 눈에 띄는 호화 장식물들을 몽땅 파괴하다가, 어라, 이걸 깨서 부술 것이 아니라 들고 나가 유대인이 운영하는 전당포에 가져가면 다만 몇 루이는 받을 거 아냐, 각성하는 1인이 있었고, 난입한 군중이 그가 뭔가를 품 속에 넣고 사라지는 것을 본 다음부터는 본격적으로 약탈을 저지르기 시작했던 거였다.

  다음날인 4월 28일. 사실상 이 날을 기점으로 프랑스혁명을 시작했다고 보는데, 앙리오의 저택을 털었던 어제의 용사들이 다시 모여 이제 새롭게 가장 화려한 별장인 폴리 티통으로 쳐들어갔다. 대문을 두드려 부수고 정원을 관통해 저택에 들어가보니, 화려함과 사치스러움이 굶주림에 다 죽어가던 시민들 눈에 혐오감을 유발해, 어제의 용사들은 어제의 활약보다 더 사납고, 용맹스럽게 기물을 파괴하고, 수정 샹들리에를 추락시켰으며, (진짜 책에 나온 것에 의하면) 대리석으로 꾸며진 벽난로 앞에 똥을 싸지르기도 하는 등 온갖 망나니 짓을 하면서도, 유감없이 골족의 후예의 진면목을 발휘해 거의 남김없이 귀중품을 싹쓸이해버렸다. 이제 시민들은 사람들이 많이 모이면 어디까지 사고를 칠 수 있는지 알고 싶어하는 주체할 수 없는 호기심까지 발동해 화려무비한 별장 폴리 티통은 반나절도 되지 않아 거의 폐허 수준에 도달했고, 이제야 출동해 도착한 기마대가, 아직도 이게 혁명의 시작이 아니라 당연히 폭동일 뿐이라고 여겨 군중을 향해 무차별 사격을 감행, 3백명이 넘는 사람을 한 순간에 불귀의 객으로 만들었으며 이보다 조금 더 많은 부상자를 발생시켰고, 그것도 모자라 주동자라고 아무렇게나 판단한 몇몇 사람들을 광장으로 몰고 가 목매달았다. 이 일이 프랑스 혁명 시기에 1792년 8월 10일 튈르리 궁전 습격을 제외하고 사상자를 가장 많이 발생시킨 일이라고 한다.

  에리크 뷔야르는 당시 티통 별장에서 레베옹 사장이 당한 약탈 내역은 모두 정확하게 기록된 반면에 상퀼로트들 중 죽고 부상당한 피해자가 몇 명이나 되는지는 아무도 모른다고 비꼬았다. 뷔야르는 정말 몰랐겠지. 원래 약자들은 그런 거다. 이 시절 이후 2백 년이 훨씬 더 지난 다음에 불과 몇 년 전에 독립한 식민지 아메리카 합중국이 세계 최대의 권력국가가 되고, 마흔한 번째 대통령에 당선한 조지 워커 부시가 테러와의 전쟁을 천명하면서 무슬림 국가 이라크를 침공해 소이탄을 퍼부을 때도 미국 병사들은 사망자, 중상자, 하다못해 경상자들에 관해서는 누가, 언제, 어디서, 어떻게, 무엇을 하다가 피해를 입었는지 확실하게 기록하고 영웅의 반열에 올렸지만, 대량학살을 피할 수 없었던 이라크 사람들은 몇 몇이나 죽었는지도 아무도 몰랐던 것처럼. 원래 약자들은 다 그런 거다. 프랑스가 알제리와 인도차이나에서 저질렀던 살육에서도 이하동문이고.


  그래도 정신 차리지 못한 부르봉 왕가는 뫼동 숲 서쪽의 진흙 바탕에 토대를 둔 석회암 건물, 베르사유 궁전에 퍼질러 앉아 프랑스에서 가장 좋은 산물들만 소비하며 왕국을 파산 직전까지 몰고 갔다. 루이 16세, 이 우둔한 왕은 파리에서 유혈사태가 있었지, 그게 얼마나 심각한지는 전혀 모르고 있었을 지도 모른다. 앙투아네트 왕비가 뿌리는 내탕금만 따지더라도 연간 50만 리브르의 적자를 기록했다는 건 그래도 알고 있어서 당장 적자를 메꾸기 위해 다른 건 몰라도 일 하나는 똑부러지게 한다고 이름을 낸 네케르를 재무총감에 임명했고, 네케르는 감투를 쓰자마자 가장 확실하고 빠른 해결책인 대규모 징세를 시작했다. 문제는 당시에 부르주아와 귀족들한테는 세금을 걷지 않았다는 거. (진짜인지 아닌지 모른다. 하여간 이 책에서 뷔야르가 그렇게 썼다.) 그러니 이 와중에 며칠 후에 상퀼로트가 될 민중들의 고혈을 더 짜내고자 했으니 혁명이 일어나지 않으면 오히려 더 이상했을 광경. 징세정책은 5월 4일에 열린 삼부회에서 민중들을 일컫는 제3 신분이 수락을 해야 시행할 수 있었는데 네케르는 거만한 태도로 난해한 전문용어로 핵심은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이미 사태파악이 끝난 제3 신분은 딱 눈치를 채고 6월 17일에 국민의회를 선포했고,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린 루이 16세는 6월 20일 왕명으로 국민의회의 결정을 무효로 만들었으니 불이 붙은 들판에 기름을 확 끼얹은 듯했겠지.

  잊지 말자 6.25, 6월 25일이 오자 이제야 사태의 심각성을 알아차린 왕은 귀족(제2 신분)과 사제(제1 신분)들에게 3신분과 합류하라고 호소해, 가톨릭 사제들과 귀족들이 왕의 명을 따라 화해하는 체스처를 하면서도 당시 유력한 귀족 아르투아 백작 등을 중심으로 용병들을 파리로 불러들이기 시작했다. 이를 눈치로만 아는 왕은 그래도 7월 11일에 재무총감 네케르를 해임했지만 용병을 믿는 마음이 굳세 강경책으로 돌아섰는데, 이미 거대한 물결은 멈출 도리가 없었다. 7월 12일에 젊은 말더듬이 변호사, 윽, 변호사가 말을 더듬었다고? 하여간 변호사 데물랭이 카페 문전의 탁자에 올라가 지금 궁전과 귀족들이 “애국자들의 성 바르텔레미를 준비하고 있다”고 매우 충동적인 연설을 하면서 사태는 급진전하는데, ‘성 바르텔레미’로 말할 것 같으면 1572년 8월 24일,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의 밤에 가톨릭에 의한 신교, 즉 위그노 교도들에 대한 학살을 일컫는 것으로, 지금 왕족, 귀족, 부르주아들이 민중들을 학살할 준비를 하고 있노라, 프랑스 민중들이 가슴 속에 품고 있는 역린逆鱗을 건드렸다는 말이다.

  그리하여 다음날, 7월 13일에 파리 시내 곳곳에 바리게이트를 설치, 거의 파리를 점령했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은 상퀼로트들은 밤새 축제와 비슷한 해방의 하루를 보냈고, 드디어 7월 14일의 새벽 여명을 맞았던 것이니, 이 책 <7월 14일>, 너, 바스티유여, 기다려라! 드디어, 드디어, 개봉박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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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복을 비는 마음
김혜진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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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3년생이니까 이 책을 출간한 2023년에 딱 마흔 살. 2019년부터 2022년까지 쓴 여덟 편의 단편소설을 실었으니 서른여섯부터 아홉까지 결과물이다. 삼십대 후반. 이때 이 책에 실린 여덟 편의 이야기를 지을 수 있는 시각과 마음과 솜씨를 가지고 있으려면, 책 속의 이야기가 하나같이 다 허술하고 조금은 비루한 집과 관련한 것들인데, 적지 않은 주거환경의 안달복달, 애달캐달, 전전긍긍을 경험해야 했으리라. 실제로 작가는 2년간 전세 살던 집이 재개발이 되는 바람에 촉박한 시일 안에 이사를 해야 했던 경험이 있었다고 한다. 그곳이 서울인지 아닌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작품(들)을 통해 넘겨 짚으면 서울인 듯한데, 그 야박한 동네에서 한정된 자금으로 적당한 집을 찾아 계약으로 하고, 이사를 해야 하는 것이 어찌 작은 스트레스에 불과할 수 있을까. 김혜진은 이렇게 자기 경험과 경험 속에 있었을 관찰을 바탕으로 집과 집을 둘러싼 삶의 차별과, 집에 깃든 삶의 곡절을 ‘삶의 문장(文章이기도 하고 紋章이기도 한)’으로 자연스러운 이야기를 만들었다.

  우리나라에서 전혀 새롭지 않은 차별의 저울 가운데 하나가 집. 집을 소유한 것과 임차한 것의 차이, 아파트 평형의 차이, 아파트와 빌라와 개인주택의 차이, 삶의 장소에 관한 차이, 그리고 차이에서 시작하는 차별. 이런 차이와 차별이라면 새삼스러울 것이 없다. 그러나 단편집 《축복을 비는 마음》이 품고 있는 차이와 차별은 다르다.


  제일 앞에 실은 <미애>는 대단위 아파트 단지가 무대다. 미애는 1년 전에 이혼하고 딸 해민을 혼자 키우는 홀어멈. 이혼한 남편한테 아이 양육비 받는 건 애당초 포기했다. 그저 죽어 없어진 걸로 치부하기로 살겠다고 작정을 해버렸다. 한겨울에 보일라가 작동하지 않는 월세방에서 도망치듯 나오긴 했는데, 갈 곳이 없어 마침 지방에 내려간 친구 주희의 임대 아파트가 빈 것을 발견해 주희한테 사정하다시피 해서 석 달만 살기로 했다. 그러니까 주인공 유미애는 석 달 안에 직장을 구해야 하고, 모녀가 살 다른 월세집을 찾아야 하는 형편. 미애는 단지 안에서 주민들이 스스로 만든 독서모임을 찾아간다. 평소 책을 많이 읽지도 않고, 관심도 별로 없어도 무조건 갔다. 그곳에서 송선우라는 여성을 만나고, 친해져, 직장을 알아보아야 하는 낮 시간에 해민이 선우의 집에서 선우의 딸 세아와 함께 지낼 수 있었다. 독서모임의 멤버들, 세아 엄마, 새 월세방을 구하려 해도 돈이 모자라 2백만원을 빌리기 위해 사채업자와 치욕스러운 계약을 해야 하는 미애. 2백만원. 선이자 10만원 떼고 180만원을 받고, 50일 후에 원금과 새로운 이자 포함 260만원을 갚아야 한다. 무려 금리가 연 240%.

  임시로 살고 있는 주희네 임대 아파트는 대규모 아파트 단지에 몇 동 되지 않는 소위 임대동이다. 다른 동은 자기 이름으로 등기를 한 버젓한 자가 아파트. 사실 독서모임에서도 가입 자격을 놓고 왈가왈부가 있었던 터. 임대동 주민도 회원으로 가입시킬 것인가, 하는 문제. 그러나 다른 모임도 아니고 독서 모임을 하는 건전한 계급의 배운 여성들은 등기권리증의 소유주 따위의 하잘것없는 문제로 가입자격 운운하는 것조차 기분 나빠 한다. 그래서 임대동 거주인도 아니고 석 달이란 짧은 기간 잠깐 빌붙어 사는 유미애도 회원으로 받아들였다. 기꺼이? 당연히 기꺼이. 그러나 마음 속으로도? 읽어 보시라. 세아 엄마 송선우 역시 미애의 딸 해민이를 자기 딸 세아와 놀게 해주었고, 매일은 아니지만 저녁 시간이 되어서야 세아를 찾으러 온 미애한테 저녁도 먹고 가게 했다. 세아 아빠가 벌써 퇴근해 집에 들어왔어도.

  착한 이웃들이지? 착한 이웃인 건 나도 알겠다. 송선우가 사는 아파트. 1207동 708호면 한 층에 여덟 가구(708호니까) 이상이 사는 아파트면 넓지 않는 평형이겠지만 어엿한 내 집이며, 임대동에 잠깐 들어와 사는 유미애에 비하면 적어도 이 아파트 단지 안에서는 확실하게 계급 차이가 나는 건 사실. 살다 보면 아무것도 아닌 작은 일도 생길 수 있지만 그걸 당사자가 크게 생각하면 또 큰 일일 수도 있어서, 늘 책을 가까이하는 건전한 양식을 지닌 사람도 자기도 모르게 마음 깊숙이 숨겨져 있는 사소한, 그러나 당하는 사람한테 치명적일 수 있는 작은 폭력을 쓸 수도 있다. 그게 삶이니까. 이런 것을 포착하는 김혜진의 눈매가, 새롭다고 하기는 어렵지만 나름대로 매섭다.


  늙도록 삶에 찌들어 살다가, 어느 동네가 재개발될 예정이라 그곳에 있는 찌그러진 집이나 다가구주택을 가지고 있으면, 재개발 발표가 뜨는 날 당장 대박을 칠 수 있다는 은밀하고 정확한 소식을 듣는다. 그래서 만옥은 적지 않은 돈을 은행에 빌려서 다가구주택 목화맨션의 채 열 평도 되지 않는 101호를 샀다. 재개발만 돼 봐라.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삶은 절대 생각대로 되지 않는 법. 정확한 소식통이 전해준 재개발 뉴스는 확 불타오르다 사그러지고, 다시 타오를 것 같다가는 피시식 꺼져버리기 수차례. 가뜩이나 오래 된 목화맨션은 이제 낡을 대로 낡아버리고 전세 또는 월세로 101호에 들어와 살던 사람들은 거칠게 집을 써버리거나 제때 월세를 내지 않아 만옥의 속을 뒤집어 놓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그러다가 마지막으로 월세로 들어온 인물이 하필이면 장대비가 내리는 한밤에 집을 보러왔던 마흔다섯 먹은 독신녀 순미.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고향을 떠나 맞교대하는 공장의 기숙사에서 3년을 보낸 후 일본으로 건너가 4년 세월을 버틴 이력이 있다. 귀국하고 오래 병원 신세도 졌고, 적당히 사는 편을 택했다. 몇 번 결혼 직전까지 가기도 했지만 다 잘 되지 않아 이제는 혼자 사는 게 익숙하고 편해 다시 남자를 만날 엄두가 나지 않는다는 여성.

  이때만 해도 목화맨션이 곧 재개발 지역으로 지정될 것 같았다. 밝은 날 다시 찾아와 월세 계약을 하는 순미와 평소엔 좋아하지도 않고 당뇨가 있어 삼가기도 했던 냉면을 그렇게 맛나게 먹은 기억을 나중까지 가지고 있을 만옥. 이때는 몰랐다. 순미가 목화맨션 101호에서 세 번 계약을 갱신하고, 회사 택시를 운전하는 찬호와 다 늦게 결혼해 살며 그렇게 집안을 깨끗하고 살뜰하게 바꾸어 놓을 지를. 하지만 삶의 발톱은 언제나 날카로운 법. 만옥의 사정은 점점 딱해지고, 남편 승석은 이 세월 동안 뇌혈관계 지병이 조금씩 악화되었으며, 여전히 재개발 발표는 소식이 없었다. 남편은 길게 병원에 입원해야 하는 상황. 달리 돈이 나올 구멍이 없는 만옥은 미안한 마음이야 구름같지만 하는 일이 여간해 잘 되지 않는 순미에게, 집을 팔아야 하겠으니 이사를 좀 가줍사, 말하지 않을 수 없을 지경으로 몰려버렸다. 그 사이에 언니 동생하며 가까이 지냈고, 둘 다 늦은 조촐한 결혼식에 거의 없는 신부측 하객이 되기도 한 중년에 새롭게 맺은, 친구면 친구, 자매면 자매 사이. 이 속에도 삶의 발톱은 파고들 수밖에 없다. 부드럽고 따듯한 목화, 목화 맨션에서도.


  이런 이야기들이다. 여덟 편 모두 집과 집을 둘러싼 일에 관한 이야기. 없는 사람들끼리 부딪히며 정을 쌓기도 하고, 허물기도 하고, 결정적일 때 마음과 정말 다르지만 때로는 모질게 해야 할 때도 있는. 누구나 살면서 경험할 수밖에 없는 것들 가운데 중요한 하나. 아니, 어쩌면 제일 중요할 지도 모른다. 사랑보다 더 중요할 지도. 삶이 사랑보다 커도 많이 크다. 그래서 사는 이야기가 사랑 이야기보다 더 아름답고 짠하다. 나는 그렇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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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24-11-29 04:4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다음 주 독후감:
월요일. 에리크 뷔야르, <7월 14일>
화요일. 미하일 조센코, 《감상소설》
수요일. 마크 설리번, <진홍빛 하늘 아래>
목요일. 유진 오닐, <잘못 태어난 자를 위한 달>
금요일. 요한 하위징아, 《중세의 가을》

다섯 2024-11-30 08:5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예전에는 삶보다 사랑이 더 위대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제는 삶이 사랑보다 커도 많이 커다는 말에 동감입니다. 리뷰 잘 읽었습니다^^

Falstaff 2024-11-30 15:37   좋아요 0 | URL
ㅎㅎㅎ 암만해도 제일 중요한 건 사는 일이더군요. 잘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
 
제일 가까운 장애인 화장실이 어디죠? 연극과인간 중국현대희곡총서 31
천스안 지음, 김우석 옮김 / 연극과인간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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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6년에 북경에서 태어나 시인, 소설가, 극작가, 연출가, 역자 등 다양한 예술분야에서 활약하고 있는 중국 신세대 예술인. 다섯 권의 단편소설집을 출간했고, 다양한 극작품을 쓰고 연출했다. 극본 리딩 공연인 “외침(聲囂: 소리와 분노) 연극제”의 발기인이며 예술연출을 담당하고 있다. (출처:천쓰안 홈페이지)

 

천쓰안陳思安


  표지를 열면 속지에 제목 <제일 가까운 장애인 화장실이 어디죠?>가 쓰여 있고 줄을 바꿔 영어로 괄호치고 (Be seen)이라 했는데, “Be seen”이 영어제목이란 뜻인가 싶기도 하다. “보이라” 또는 “드러내라” "알리라." 그런데 굳이 적극적으로 보이거나 드러낼 것까지는 아닌 수준으로. 다른 말로 할 수도 있겠다. “숨기지 마라”나 “감추지 마라”. 무엇을? 자신이 장애가 있고 그래서 비장애인과 다르다는 것을. 속지 아래 작은 글씨로 또 이렇게 밝혔다.

  모노드라마 / 실화를 기반으로 함

  역자 해설에 의하면, 2022년에 연극제작자 션루쥔이 우연히 장애인 인플루언서 자오홍청(趙紅程)의 다큐멘터리를 본다. 자오는 ‘착한 누이 훌륭한 청즈(程子)’라는 이름으로 동영상 플랫폼에서 활동하며 장애인인 자신의 “연애와 결혼, 일과 학업 등에 관한 영상을 소개하며 웨이보에 32만, 빌리빌리에 9만의 팔로워를 보유한 성공적인 인플루언서”라 한다. 연극 제작자이니까 션루쥔은 당연히 유명 장애인의 이야기를 연극으로 재창조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을 것이다. 그는 이 뜻을 자오홍청에게 전했고, 토의 끝에 자오홍청 본인이 직접 무대에 올라 자신의 이야기를 모노드라마로 공연하기로 엄지손가락에 인주 묻혀 계약서 서명란에 꾹 눌렀다.

  그리하여 중국에서 “청년 예술가” 그룹의 뛰어난 일원인 천쓰안에게 희곡을 위탁했고, 천쓰안은 자오홍청과의 인터뷰를 거쳐 그것을 토대로 한 편의 모노드라마를 만들었다. 천쓰안이 좋은 소설가이기도 한 것이, 모노드라마 대본만 읽으면서도 매우 좋은 문장을 사용한다는 것을, 별로 좋지 않은 감식안을 가지고 있는 독자도 알아차릴 수준으로 만들 수 있었을 것 같다. 게다가 극작, 연출가를 겸하고 있으니 사실 애초 최상의 조건을 지닌 인터뷰어였을 터. 천쓰안은 오직 자오홍청을 위한 작품을 하나 만들었다. 내용마저 자오홍청이 나고, 한 살 때 소아마비에 걸려 다리를 쓰지 못했으며, 다른 사람들처럼 똑바로 서고, 걷고, 뛰고, 산에도 오르는 꿈을 이루기 위해 모진 고통을 수반하는 척추만곡과 다리교정 수술을 받았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코 휠체어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된 것을 이해하는 과정. 이 속에서 대학과 대학원을 졸업한 뒤 운 좋게 회사에 취직을 하고, 직장에서 만난 연인과 함께 살며, 놀랍게도 섹스도 즐기면서, 이제 세상 속에서, 비록 여러가지로 불편하지만, 장애인이라는 정체성을 갖고, 세상을 향해, 나는 이렇다, 스스로 드러내는 장, 그게 연극의 무대가 될 수도 있고, 강연회의 연단이 될 수도 있는데, 장소야 아무러면 어떤가, 하여간 단 위에서 자오홍청, 그저 한 장애인이 세상의 모든 장애인이 하고 싶은 말, 당신들이 듣고 싶은 말이 아니라, 장애인이 하고 싶은 말을 드러내는(Be seen) 작업이다.


  첫 장면은 자오홍청, 청즈程子가 강연회장으로 간다. 휠체어를 타고 가니 아무래도 교통 시간이 많이 걸리는 교통약자일 수밖에. 그래서 시간을 넉넉하게 잡고 출발한다. 청즈가 타고다니는 휠체어는 시속 25킬로미터로 여덟 시간을 연속으로 달릴 수 있는 최신형이다. 즉 2백 킬로미터를 쉬지 않고, 마라톤 선수보다 훨씬 빨리 주파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의 거대 도시에서는 시간 안에 고층 건물 속 약속장소에 도착하는 것이 쉽지 않다.

  집을 나선다. 인도를 지나 지하철역 장애인용 엘리베이터를 이용해 13호선에서 7호선으로 환승한다. 역에서 나가는 장애인 엘리베이터를 통해 지상으로 올라가 바글바글한 인파를 뚫고 행사가 열리는 건물에 도착하는 것까지는 그리 어렵지 않다. 이제 문제가 시작된다.

  건물의 일반 엘리베이터 타는 일. 청즈의 다리는 상당히 가늘다. 오랜 시간 움직이지 않아 근육을 하도 많이 상실해서 그렇다. 엄마는 이걸 가리기 위하여 늘 바지만 입혔지만, 머리 커지고, 직장에 다니며 독립한 다음에 친구 룰루가 거의 강요하다시피 해서 치마를 입기 시작했는데, 정작 입어보니 신세계였다. 특히 방광을 비우는 일이 훨씬 간단해졌다. 여름엔 훨씬 시원했으며 보기에도 생각하지 못했을 정도로 여성스럽다.

  그건 그거고 빌딩의 엘리베이터 문 가까이 청즈의 휠체어가 서 있다. 20층에서 내려오는 엘리베이터 숫자판의 숫자가 점점 작아지자 갑자기 두 발로 뛸 수 있는 사람들이 휠체어 근처로 몰려든다. 그러다 숫자가 기어이 1로 바뀌고, 문이 열리자마자 몰려온 사람들이 우르르르 네모난 상자 안으로 밀려들어간다. 아직 문이 열린 상태. 조금의 공간이 있지만 전동 휠체어가 낄 공간을 부족해 보인다. 청즈는 입가에 기꺼운(듯한) 미소를 보이며 먼저 올라가라고 한다. 정말로 엘리베이터가 올라가고 이제 청즈는 자기 휠체어를 엘리베이터 문 바로 앞에 착 붙여버린다. 잠깐 후 늘씬한 다리를 가진, 허벅지가 청즈의 눈높이 정도에 달하는 여성이 와서 서고, 그 여자가 열일곱 번이나 청즈를 내려다본다. 신경쓰지 않는 척하던 청즈가 갑자기 위를 쳐다봐 시선이 마주치니 여자는 어색한다. 어색한 김에 한 마디 한다.

  “다리가 참 가느시네요…….”

  청즈가 고개를 끄덕이며 웃는 얼굴로 대답한다.

  “네. 다 열심히 운동한 결과랍니다.”

  여자는 이제서야 깜짝 놀라서, 아, 하고 자기 입을 막은 채 칭즈의 다리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무슨 말을 하려고 하지만 때마침 엘리베이터 문이 열려 휠체어는 금속 상자 안으로 들어간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그 여자를 찾으러 두리번거리지만 여자는 엘리베이터를 타지 않았다. 부지불식간에 큰 실수를 했다고 생각해서 다음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갈 모양이다.

  세상의 거의 모든 비장애인은 장애인을 보면 더욱 친절을 베풀어주어야 한다는 강박에 싸이고는 한다. 그렇게 교육을 받았으니까. 진짜 속마음으로는 장애인들을 비하하고 열등한 인간으로 생각하는 지도 모르지만 하여간 겉으로는 그렇게 보이고, 실제로 친절하게 행동한다. 물론 대부분 친절한 행위의 근본은 장애인이 결코 받고 싶어하지 않는 동정심에서 시작하겠지만.

  그러나 청즈, 자오홍청은 결국 알아낸다. 세상에 장애라는 이름의 병은 없다는 것을.

  나는 원래 이렇게 태어난 거야. 내가 노력해서 바꿀 수 없는 것에 집착하면 불행해지는 것 말고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는 것도 알아차린다. 장애인의 병은 장애가 아니라 “마음에 박혀서, 뿌리를 내리고, 싹을 틔워서, 나의 피와 살을 빨아먹으면서 조금씩 자라나”는 의식이었다. 이것을 몸 속에서 끝까지 철저하게 뽑아내지 않는다면 장애를 극복해 일어날 수 있든 없든, 영원히 진정한 자유를 얻을 수 없는 병이란다.


  위에 쓴 것 말고도 장애인과 장애에 관하여 다양한 생각거리를 제공하는 작품이다. 장애인이 아니라면 입에 올리기 쉽지 않고, 여차 조금이라도 핀트가 다른 곳으로 박히면 심란한 비난을 각오해야 할 것들을 자오홍청은 천쓰홍의 글을 빌려 자근자근하게 그러나 심각하게 호소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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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4-11-28 10:4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참 열심히 사는 사람 같네요. 팔뚝에 문신도 세기고. 젊은 사람답네요.
장애자와 비장애자가 자연스럽게 융화하면 좋을텐데 말이죠...

Falstaff 2024-11-28 15:27   좋아요 1 | URL
표정도 강단있을 거 같습니다. 모든 갈등이 전부 융화되면 좋겠습니다만... 저는 비관적 세계관을 가지고 있어서리 영.....
 
서머타임 J. M. 쿳시 자전소설 3부작
J. M. 쿳시 지음, 왕은철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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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존 쿳시의 자전소설 3부작”


  출판사 문학동네가 내놓는 광고 포인트다. “자전소설.” 소설가가 자신의 자서전을 소설 형식으로 쓴 글을 일컫는 말. 여기서 우리가 더 무게를 두어야 할 점은 “자전”보다 “소설”, 즉 허구, 있을 법해서 타당한 거짓말이라는 것이 되어야 하리라. 이 자전소설 3부작은 <소년 시절>, <청년 시절> 그리고 <서머타임>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나는 앞선 <소년 시절>과 <청년 시절>은 읽지 않았다. 자전이라고 하면 이제 세상을 거의 살아 자신의 생을 돌아본 작품이어야 할 터이지만 <서머타임>의 주요 시간적 공간은 1972년부터 75년, 넓게 봐도 1970년대, 존 맥스웰의 삼십대 시절이다.

  1940년에 남아프리카공화국 케이프타운에서 변호사 아버지와 교사 어머니, 네덜란드 이민자와 폴란드계 독일 이민자 사이에서 태어났고, 2차세계대전 당시 아버지는 이탈리아에서 복무한 적이 있으며, 남동생도 하나 있다는 것도 다 자전소설의 내용과 같다. 실생활이 <서머타임>의 내용과 결정적으로 다른 것이 쿳시는 1963년에 스물세 살 때 결혼해 66년과 68년에 아들과 딸을 낳고, 1980년에 이혼했지만, 작품 속에서는 내놓고 단정한 바는 없으나 누가 보더라도 변호사 하다가 자격증 박탈당한 아버지와 함께 꾀죄죄한 농가에서 사는 괴팍한 독신남이다. 그러니 애초에 이 책이 진짜 쿳시의 자전소설이라고 오해할 이유는 하나도 없다. 이렇게 내놓고 거짓말하는 것이 작가의 권리이기도 하니 뭐라고 하지도 말자.


  쿳시는 이 책, 2009년 작품에서 본인 J.M. 쿳시는 2009년에 죽었고, 이 “위대한 작가” 적어도 “유명한 작가”를 연구하는 빈센트 씨가 1972년부터 75년까지, 쿳시가 <어둠의 땅>을 출간하여 작가로 이름을 낼 무렵, 미국에서 전과자 신분으로 돌아온 (남아공 사람들이 보기엔) 돌이킬 수 없는 루저 시절의 쿳시에 관한 책을 쓰고 싶어한다. 그리하여 빈센트는 당시 독신남 쿳시와 혼외 관계였던 줄리아, 훈훈한 어린 시절을 함께 보낸 사촌누이 마르곳, 고등학교 방과후 교사시절 학부모 아드리아나, 케이프타운 대학 영문과 교수자리에 쿳시와 함께 지원하여 면접을 보아 친분을 쌓은 마틴, 1976년경 잠깐 관계를 맺었던 소피와 각각 캐나다, 남아프리카공화국, 브라질, 다시 남아프리카공화국, 그리고 파리에서 인터뷰를 하고, 그것을 기록한 것이 이 책 <서머타임>이다. 당연히 인터뷰는 무슨 인터뷰. 30대 시절을 돌아보며 시절을 스스로 윤색한 내용이지.

  이 책을 집필하던 시기 쿳시의 나이 예순아홉. 10년 전에 부커상을, 6년 전 10월에 이미 노벨문학상을 받아 쿳시의 이름이 전세계에 떠르르했던 시기. 아프리카에 사는 유럽계 백인, 소위 아프리카너들의 일원처럼 진정한 아프리카 사람이라 인식한 적이 있는지 의심스러운 쿳시는 이미 오스트레일리아로 이민을 했고, 채식주의를 시작해 <엘리자베스 코스텔로>도 출간했다. 자전소설 3부작이 될 <소년 시절>은 12년 전에, <청년 시절>도 7년 전인 2002년에 발표했다.

  독후감이 왜 이렇게 삐딱한 지는 아시지? 나는 늙은 작가가 자기를 되돌아보며 지난 시절의 자신을 변호하거나 변명하는 걸 좋게 보지 않는다. 그냥 죽을 것이지 무슨 미련이 있어 당시에는 이랬느니, 저랬느니. 좀 궁상맞아 보이지 않나?


  그래서 <서머타임> 속에서 J.M. 쿳시는 기회가 날 때마다 자기 하고 싶은 이야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이 책은 온전히 쿳시에 의하여 쓰였고, 등장인물 모두 쿳시가 하고 싶은 말을 대변하고 있다고 봐도 무방하다. 등장인물의 대사 속에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하고 있으니까. 가령:


  “내가 가장 바라는 게 뭔지 알아요? 우리가 사후에, 각자 잘못한 이들에게 사과할 기회를 갖는 거예요. 난 사과할 게 정말 많아요.” (p.78)


  젊은 날의 쿳시와 간통행각을 벌이던 시기에 관해 인터뷰를 하던 줄리아가 인터뷰어 빈센트에게 한 말이다. 세상 거의 모든 사람이 똑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거 아냐? 그냥 잘못한 사람들에 관한 미안함을 품은 채 묻히면 되는 것이지 굳이 이렇게 글로 써서 세계만방에 고하느냐고. 물론 이런 작가가 하나 둘이 아니지만 나는 왜 이걸 견디지 못할까, 또는 우습게 알까?

  브라질 사람으로 앙골라 루안다에서 살다가 난민으로 남아프리카에 와서 과부가 된 아드리아나의 입을 통해 쿳시는 자신을 평한다.


  “그가 정말로 위대한 작가인가요? 내 생각에는 위대한 작가가 되려면 (중략) 위대한 사람이 되어야죠. 그런데 그는 위대한 사람이 아니었어요. 그는 작은 사람이었어요. 중요하지 않고 작은 사람이었어요.” (p.306)


  이것 참 묘하게 읽힌다. 적어도 작가로는 자신이 위대한 작가였다고? 설마 아니겠지. 또는, 작가로의 평판에 미치지 못하는 인간 쿳시에 관한 변명으로 읽을 수도 있고.

  쿳시가 미국에서 강사 비슷하게 있다가 68운동과 1970년 뉴욕주립대에서 있었던 교수 난입사건에 연루되어 비자를 갱신하지 못하고 처자식들과 함께 남아공으로 돌아온 후에 곤궁한 생활을 했던 건 잡아낼 수 있겠다. 이때 가족들은 쿳시 가문의 농장에서 가까운 곳에 정착했다고 하는데, 사정을 보면 차로 한 여덟 시간 정도 걸리는 거리에 있는 거 같다. 쿳시는 케이프에서 아버지와 함께 낡은 농가주택에서 살고. 흠. 그러니까 줄리아하고는 유부남녀들 간의 치정 간통 사이였던 건 맞겠네. 작품 속에서는 독신남과 유부녀로 분식을 하고. 좀 치사하지 않나? 같은 픽션이라면 자신을 유부남, 줄리아를 독신녀로 할 수도 있었을 텐데. 그러니까 나는 이 책이 어떻게 하면 젊은 시절의 과오와 자신이 미안해 할 수밖에 없는 광경에 대한 변명으로 밖에 읽히지 않는다는 거다.

  좋아, 좋아. 다 그런 거지 뭐. 이왕 줄리아와의 간통이 나왔으니까 말인데, 이들의 침대에서 있던 웃긴 일이 있어 소개한다. 역시 간통중인 줄리아의 남편 마크가 더반에 사는 불륜녀와 함께 공무를 빙자한 여행을 떠난 시기에 쿳시를 안방 침대에 초대한다. 이미 상습적으로 혼인의 침대를 점령해온 쿳시는 이날 엉뚱하게 슈베르트의 현악오중주 D.956을 녹음한 카세트 테이프를 들고 와서 플레이를 시킨 다음에 전희도 없이 그냥 작업에 들어갔다.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2악장 아다지오에 집중해보라고. 이 음악 자체가 섹스라고 중얼거리며 나름대로 열심이었는데, 문제는 줄리아.


  “멍청이가 아닌 바에야 누가 사랑에 빠져 있는 여자한테 죽은 작곡가에게서, 빈의 바가텔렌마이스터에게서 섹스에 관해 배우라고 주문하겠어요? (중략) 그는 침실로 제3의 존재를 끌고 들어와요. 프란츠 슈베르트가 서열 1위, 사랑의 거장이 되죠. 존은 서열 2위, 거장의 제자이자 실행자가 되죠. 그리고 나는 서열 3위. 섹스-음악을 연주하는 악기가 되죠. 내 생각에 이것이 존 쿳시에 대해 당신이 알 필요가 있는 모든 걸 얘기해주는 것 같아요.” (p.130~131)


  그것 참. 지금 독후감을 쓰고 있는 노트북 메모리에 슈베르트의 D.956이 저장되어 있다. 전곡 연주하는데 50분 가까이 드는 긴 곡으로 자주는 아니지만 걸으면서 간혹 듣는 곡이다. 근데 이게, 이 중에서 아다지오 악장을 통해 섹스를 배울 수 있다고? 아니고, 왜 이런 훌륭한 정보를 일찍 알지 못했을꼬?

  굳이 믿을 필요는 없겠지. 슈베르트는 결코 바가텔렌마이스터, 소품이나 작곡하는 소품 거장이 아니었다. 오히려 실내악곡을 어떻게 하면 대편성에 버금가게 큰 규모로 만들 수 있을까를 고민하던 젊은이였지. 근데 한 번 생각해보시라. 환장한다. 나른하게 느린 아다지오를 틀어놓고 전희도 없이 기어 올라가더니, 음악에 집중해봐, 헥헥, 섹스를 배울 수 있을 거야, 헥헥, 하는 벌거벗은 남자를. 쿳시가 이랬단다. 영낙없는 왕재수 아냐?


  쿳시의 자전소설을 믿을 필요 없다. 그는 천생 픽셔니어fictioneer다. 자신의 일기나 메모에서조차 객관적 진실이 아닌 픽션을 쓰는 작가, 거짓말쟁이. 그런 운명, 별자리를 타고난 인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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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4-11-27 15:4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쿳시의 추락, 페테르부르크의 거장 등 여러 권 읽었고, 나름 좋았는데, 갑자기 정떨어지네요. ㅠ
불쌍한 슈베르트 !

Falstaff 2024-11-27 16:29   좋아요 1 | URL
저 역시 <추락>부터 쿳시를 읽기 시작했는데, 처음부터 하여튼 뭔가가 캥키더라고요. 그래서 그런지 쿳시를 만족한 상태로 마지막 페이지를 넘겨본 적이 없답니다. 거 참.
이런 게 작가-독자의 합이 아닌가 싶기도 하고 뭐 그렇습니다.
ㅎㅎㅎ 슈베르트. 세월이 가면 갈수록 더 좋아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