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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복을 비는 마음
김혜진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3년 11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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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생이니까 이 책을 출간한 2023년에 딱 마흔 살. 2019년부터 2022년까지 쓴 여덟 편의 단편소설을 실었으니 서른여섯부터 아홉까지 결과물이다. 삼십대 후반. 이때 이 책에 실린 여덟 편의 이야기를 지을 수 있는 시각과 마음과 솜씨를 가지고 있으려면, 책 속의 이야기가 하나같이 다 허술하고 조금은 비루한 집과 관련한 것들인데, 적지 않은 주거환경의 안달복달, 애달캐달, 전전긍긍을 경험해야 했으리라. 실제로 작가는 2년간 전세 살던 집이 재개발이 되는 바람에 촉박한 시일 안에 이사를 해야 했던 경험이 있었다고 한다. 그곳이 서울인지 아닌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작품(들)을 통해 넘겨 짚으면 서울인 듯한데, 그 야박한 동네에서 한정된 자금으로 적당한 집을 찾아 계약으로 하고, 이사를 해야 하는 것이 어찌 작은 스트레스에 불과할 수 있을까. 김혜진은 이렇게 자기 경험과 경험 속에 있었을 관찰을 바탕으로 집과 집을 둘러싼 삶의 차별과, 집에 깃든 삶의 곡절을 ‘삶의 문장(文章이기도 하고 紋章이기도 한)’으로 자연스러운 이야기를 만들었다.
우리나라에서 전혀 새롭지 않은 차별의 저울 가운데 하나가 집. 집을 소유한 것과 임차한 것의 차이, 아파트 평형의 차이, 아파트와 빌라와 개인주택의 차이, 삶의 장소에 관한 차이, 그리고 차이에서 시작하는 차별. 이런 차이와 차별이라면 새삼스러울 것이 없다. 그러나 단편집 《축복을 비는 마음》이 품고 있는 차이와 차별은 다르다.
제일 앞에 실은 <미애>는 대단위 아파트 단지가 무대다. 미애는 1년 전에 이혼하고 딸 해민을 혼자 키우는 홀어멈. 이혼한 남편한테 아이 양육비 받는 건 애당초 포기했다. 그저 죽어 없어진 걸로 치부하기로 살겠다고 작정을 해버렸다. 한겨울에 보일라가 작동하지 않는 월세방에서 도망치듯 나오긴 했는데, 갈 곳이 없어 마침 지방에 내려간 친구 주희의 임대 아파트가 빈 것을 발견해 주희한테 사정하다시피 해서 석 달만 살기로 했다. 그러니까 주인공 유미애는 석 달 안에 직장을 구해야 하고, 모녀가 살 다른 월세집을 찾아야 하는 형편. 미애는 단지 안에서 주민들이 스스로 만든 독서모임을 찾아간다. 평소 책을 많이 읽지도 않고, 관심도 별로 없어도 무조건 갔다. 그곳에서 송선우라는 여성을 만나고, 친해져, 직장을 알아보아야 하는 낮 시간에 해민이 선우의 집에서 선우의 딸 세아와 함께 지낼 수 있었다. 독서모임의 멤버들, 세아 엄마, 새 월세방을 구하려 해도 돈이 모자라 2백만원을 빌리기 위해 사채업자와 치욕스러운 계약을 해야 하는 미애. 2백만원. 선이자 10만원 떼고 180만원을 받고, 50일 후에 원금과 새로운 이자 포함 260만원을 갚아야 한다. 무려 금리가 연 240%.
임시로 살고 있는 주희네 임대 아파트는 대규모 아파트 단지에 몇 동 되지 않는 소위 임대동이다. 다른 동은 자기 이름으로 등기를 한 버젓한 자가 아파트. 사실 독서모임에서도 가입 자격을 놓고 왈가왈부가 있었던 터. 임대동 주민도 회원으로 가입시킬 것인가, 하는 문제. 그러나 다른 모임도 아니고 독서 모임을 하는 건전한 계급의 배운 여성들은 등기권리증의 소유주 따위의 하잘것없는 문제로 가입자격 운운하는 것조차 기분 나빠 한다. 그래서 임대동 거주인도 아니고 석 달이란 짧은 기간 잠깐 빌붙어 사는 유미애도 회원으로 받아들였다. 기꺼이? 당연히 기꺼이. 그러나 마음 속으로도? 읽어 보시라. 세아 엄마 송선우 역시 미애의 딸 해민이를 자기 딸 세아와 놀게 해주었고, 매일은 아니지만 저녁 시간이 되어서야 세아를 찾으러 온 미애한테 저녁도 먹고 가게 했다. 세아 아빠가 벌써 퇴근해 집에 들어왔어도.
착한 이웃들이지? 착한 이웃인 건 나도 알겠다. 송선우가 사는 아파트. 1207동 708호면 한 층에 여덟 가구(708호니까) 이상이 사는 아파트면 넓지 않는 평형이겠지만 어엿한 내 집이며, 임대동에 잠깐 들어와 사는 유미애에 비하면 적어도 이 아파트 단지 안에서는 확실하게 계급 차이가 나는 건 사실. 살다 보면 아무것도 아닌 작은 일도 생길 수 있지만 그걸 당사자가 크게 생각하면 또 큰 일일 수도 있어서, 늘 책을 가까이하는 건전한 양식을 지닌 사람도 자기도 모르게 마음 깊숙이 숨겨져 있는 사소한, 그러나 당하는 사람한테 치명적일 수 있는 작은 폭력을 쓸 수도 있다. 그게 삶이니까. 이런 것을 포착하는 김혜진의 눈매가, 새롭다고 하기는 어렵지만 나름대로 매섭다.
늙도록 삶에 찌들어 살다가, 어느 동네가 재개발될 예정이라 그곳에 있는 찌그러진 집이나 다가구주택을 가지고 있으면, 재개발 발표가 뜨는 날 당장 대박을 칠 수 있다는 은밀하고 정확한 소식을 듣는다. 그래서 만옥은 적지 않은 돈을 은행에 빌려서 다가구주택 목화맨션의 채 열 평도 되지 않는 101호를 샀다. 재개발만 돼 봐라.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삶은 절대 생각대로 되지 않는 법. 정확한 소식통이 전해준 재개발 뉴스는 확 불타오르다 사그러지고, 다시 타오를 것 같다가는 피시식 꺼져버리기 수차례. 가뜩이나 오래 된 목화맨션은 이제 낡을 대로 낡아버리고 전세 또는 월세로 101호에 들어와 살던 사람들은 거칠게 집을 써버리거나 제때 월세를 내지 않아 만옥의 속을 뒤집어 놓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그러다가 마지막으로 월세로 들어온 인물이 하필이면 장대비가 내리는 한밤에 집을 보러왔던 마흔다섯 먹은 독신녀 순미.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고향을 떠나 맞교대하는 공장의 기숙사에서 3년을 보낸 후 일본으로 건너가 4년 세월을 버틴 이력이 있다. 귀국하고 오래 병원 신세도 졌고, 적당히 사는 편을 택했다. 몇 번 결혼 직전까지 가기도 했지만 다 잘 되지 않아 이제는 혼자 사는 게 익숙하고 편해 다시 남자를 만날 엄두가 나지 않는다는 여성.
이때만 해도 목화맨션이 곧 재개발 지역으로 지정될 것 같았다. 밝은 날 다시 찾아와 월세 계약을 하는 순미와 평소엔 좋아하지도 않고 당뇨가 있어 삼가기도 했던 냉면을 그렇게 맛나게 먹은 기억을 나중까지 가지고 있을 만옥. 이때는 몰랐다. 순미가 목화맨션 101호에서 세 번 계약을 갱신하고, 회사 택시를 운전하는 찬호와 다 늦게 결혼해 살며 그렇게 집안을 깨끗하고 살뜰하게 바꾸어 놓을 지를. 하지만 삶의 발톱은 언제나 날카로운 법. 만옥의 사정은 점점 딱해지고, 남편 승석은 이 세월 동안 뇌혈관계 지병이 조금씩 악화되었으며, 여전히 재개발 발표는 소식이 없었다. 남편은 길게 병원에 입원해야 하는 상황. 달리 돈이 나올 구멍이 없는 만옥은 미안한 마음이야 구름같지만 하는 일이 여간해 잘 되지 않는 순미에게, 집을 팔아야 하겠으니 이사를 좀 가줍사, 말하지 않을 수 없을 지경으로 몰려버렸다. 그 사이에 언니 동생하며 가까이 지냈고, 둘 다 늦은 조촐한 결혼식에 거의 없는 신부측 하객이 되기도 한 중년에 새롭게 맺은, 친구면 친구, 자매면 자매 사이. 이 속에도 삶의 발톱은 파고들 수밖에 없다. 부드럽고 따듯한 목화, 목화 맨션에서도.
이런 이야기들이다. 여덟 편 모두 집과 집을 둘러싼 일에 관한 이야기. 없는 사람들끼리 부딪히며 정을 쌓기도 하고, 허물기도 하고, 결정적일 때 마음과 정말 다르지만 때로는 모질게 해야 할 때도 있는. 누구나 살면서 경험할 수밖에 없는 것들 가운데 중요한 하나. 아니, 어쩌면 제일 중요할 지도 모른다. 사랑보다 더 중요할 지도. 삶이 사랑보다 커도 많이 크다. 그래서 사는 이야기가 사랑 이야기보다 더 아름답고 짠하다. 나는 그렇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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