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머타임 J. M. 쿳시 자전소설 3부작
J. M. 쿳시 지음, 왕은철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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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존 쿳시의 자전소설 3부작”


  출판사 문학동네가 내놓는 광고 포인트다. “자전소설.” 소설가가 자신의 자서전을 소설 형식으로 쓴 글을 일컫는 말. 여기서 우리가 더 무게를 두어야 할 점은 “자전”보다 “소설”, 즉 허구, 있을 법해서 타당한 거짓말이라는 것이 되어야 하리라. 이 자전소설 3부작은 <소년 시절>, <청년 시절> 그리고 <서머타임>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나는 앞선 <소년 시절>과 <청년 시절>은 읽지 않았다. 자전이라고 하면 이제 세상을 거의 살아 자신의 생을 돌아본 작품이어야 할 터이지만 <서머타임>의 주요 시간적 공간은 1972년부터 75년, 넓게 봐도 1970년대, 존 맥스웰의 삼십대 시절이다.

  1940년에 남아프리카공화국 케이프타운에서 변호사 아버지와 교사 어머니, 네덜란드 이민자와 폴란드계 독일 이민자 사이에서 태어났고, 2차세계대전 당시 아버지는 이탈리아에서 복무한 적이 있으며, 남동생도 하나 있다는 것도 다 자전소설의 내용과 같다. 실생활이 <서머타임>의 내용과 결정적으로 다른 것이 쿳시는 1963년에 스물세 살 때 결혼해 66년과 68년에 아들과 딸을 낳고, 1980년에 이혼했지만, 작품 속에서는 내놓고 단정한 바는 없으나 누가 보더라도 변호사 하다가 자격증 박탈당한 아버지와 함께 꾀죄죄한 농가에서 사는 괴팍한 독신남이다. 그러니 애초에 이 책이 진짜 쿳시의 자전소설이라고 오해할 이유는 하나도 없다. 이렇게 내놓고 거짓말하는 것이 작가의 권리이기도 하니 뭐라고 하지도 말자.


  쿳시는 이 책, 2009년 작품에서 본인 J.M. 쿳시는 2009년에 죽었고, 이 “위대한 작가” 적어도 “유명한 작가”를 연구하는 빈센트 씨가 1972년부터 75년까지, 쿳시가 <어둠의 땅>을 출간하여 작가로 이름을 낼 무렵, 미국에서 전과자 신분으로 돌아온 (남아공 사람들이 보기엔) 돌이킬 수 없는 루저 시절의 쿳시에 관한 책을 쓰고 싶어한다. 그리하여 빈센트는 당시 독신남 쿳시와 혼외 관계였던 줄리아, 훈훈한 어린 시절을 함께 보낸 사촌누이 마르곳, 고등학교 방과후 교사시절 학부모 아드리아나, 케이프타운 대학 영문과 교수자리에 쿳시와 함께 지원하여 면접을 보아 친분을 쌓은 마틴, 1976년경 잠깐 관계를 맺었던 소피와 각각 캐나다, 남아프리카공화국, 브라질, 다시 남아프리카공화국, 그리고 파리에서 인터뷰를 하고, 그것을 기록한 것이 이 책 <서머타임>이다. 당연히 인터뷰는 무슨 인터뷰. 30대 시절을 돌아보며 시절을 스스로 윤색한 내용이지.

  이 책을 집필하던 시기 쿳시의 나이 예순아홉. 10년 전에 부커상을, 6년 전 10월에 이미 노벨문학상을 받아 쿳시의 이름이 전세계에 떠르르했던 시기. 아프리카에 사는 유럽계 백인, 소위 아프리카너들의 일원처럼 진정한 아프리카 사람이라 인식한 적이 있는지 의심스러운 쿳시는 이미 오스트레일리아로 이민을 했고, 채식주의를 시작해 <엘리자베스 코스텔로>도 출간했다. 자전소설 3부작이 될 <소년 시절>은 12년 전에, <청년 시절>도 7년 전인 2002년에 발표했다.

  독후감이 왜 이렇게 삐딱한 지는 아시지? 나는 늙은 작가가 자기를 되돌아보며 지난 시절의 자신을 변호하거나 변명하는 걸 좋게 보지 않는다. 그냥 죽을 것이지 무슨 미련이 있어 당시에는 이랬느니, 저랬느니. 좀 궁상맞아 보이지 않나?


  그래서 <서머타임> 속에서 J.M. 쿳시는 기회가 날 때마다 자기 하고 싶은 이야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이 책은 온전히 쿳시에 의하여 쓰였고, 등장인물 모두 쿳시가 하고 싶은 말을 대변하고 있다고 봐도 무방하다. 등장인물의 대사 속에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하고 있으니까. 가령:


  “내가 가장 바라는 게 뭔지 알아요? 우리가 사후에, 각자 잘못한 이들에게 사과할 기회를 갖는 거예요. 난 사과할 게 정말 많아요.” (p.78)


  젊은 날의 쿳시와 간통행각을 벌이던 시기에 관해 인터뷰를 하던 줄리아가 인터뷰어 빈센트에게 한 말이다. 세상 거의 모든 사람이 똑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거 아냐? 그냥 잘못한 사람들에 관한 미안함을 품은 채 묻히면 되는 것이지 굳이 이렇게 글로 써서 세계만방에 고하느냐고. 물론 이런 작가가 하나 둘이 아니지만 나는 왜 이걸 견디지 못할까, 또는 우습게 알까?

  브라질 사람으로 앙골라 루안다에서 살다가 난민으로 남아프리카에 와서 과부가 된 아드리아나의 입을 통해 쿳시는 자신을 평한다.


  “그가 정말로 위대한 작가인가요? 내 생각에는 위대한 작가가 되려면 (중략) 위대한 사람이 되어야죠. 그런데 그는 위대한 사람이 아니었어요. 그는 작은 사람이었어요. 중요하지 않고 작은 사람이었어요.” (p.306)


  이것 참 묘하게 읽힌다. 적어도 작가로는 자신이 위대한 작가였다고? 설마 아니겠지. 또는, 작가로의 평판에 미치지 못하는 인간 쿳시에 관한 변명으로 읽을 수도 있고.

  쿳시가 미국에서 강사 비슷하게 있다가 68운동과 1970년 뉴욕주립대에서 있었던 교수 난입사건에 연루되어 비자를 갱신하지 못하고 처자식들과 함께 남아공으로 돌아온 후에 곤궁한 생활을 했던 건 잡아낼 수 있겠다. 이때 가족들은 쿳시 가문의 농장에서 가까운 곳에 정착했다고 하는데, 사정을 보면 차로 한 여덟 시간 정도 걸리는 거리에 있는 거 같다. 쿳시는 케이프에서 아버지와 함께 낡은 농가주택에서 살고. 흠. 그러니까 줄리아하고는 유부남녀들 간의 치정 간통 사이였던 건 맞겠네. 작품 속에서는 독신남과 유부녀로 분식을 하고. 좀 치사하지 않나? 같은 픽션이라면 자신을 유부남, 줄리아를 독신녀로 할 수도 있었을 텐데. 그러니까 나는 이 책이 어떻게 하면 젊은 시절의 과오와 자신이 미안해 할 수밖에 없는 광경에 대한 변명으로 밖에 읽히지 않는다는 거다.

  좋아, 좋아. 다 그런 거지 뭐. 이왕 줄리아와의 간통이 나왔으니까 말인데, 이들의 침대에서 있던 웃긴 일이 있어 소개한다. 역시 간통중인 줄리아의 남편 마크가 더반에 사는 불륜녀와 함께 공무를 빙자한 여행을 떠난 시기에 쿳시를 안방 침대에 초대한다. 이미 상습적으로 혼인의 침대를 점령해온 쿳시는 이날 엉뚱하게 슈베르트의 현악오중주 D.956을 녹음한 카세트 테이프를 들고 와서 플레이를 시킨 다음에 전희도 없이 그냥 작업에 들어갔다.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2악장 아다지오에 집중해보라고. 이 음악 자체가 섹스라고 중얼거리며 나름대로 열심이었는데, 문제는 줄리아.


  “멍청이가 아닌 바에야 누가 사랑에 빠져 있는 여자한테 죽은 작곡가에게서, 빈의 바가텔렌마이스터에게서 섹스에 관해 배우라고 주문하겠어요? (중략) 그는 침실로 제3의 존재를 끌고 들어와요. 프란츠 슈베르트가 서열 1위, 사랑의 거장이 되죠. 존은 서열 2위, 거장의 제자이자 실행자가 되죠. 그리고 나는 서열 3위. 섹스-음악을 연주하는 악기가 되죠. 내 생각에 이것이 존 쿳시에 대해 당신이 알 필요가 있는 모든 걸 얘기해주는 것 같아요.” (p.130~131)


  그것 참. 지금 독후감을 쓰고 있는 노트북 메모리에 슈베르트의 D.956이 저장되어 있다. 전곡 연주하는데 50분 가까이 드는 긴 곡으로 자주는 아니지만 걸으면서 간혹 듣는 곡이다. 근데 이게, 이 중에서 아다지오 악장을 통해 섹스를 배울 수 있다고? 아니고, 왜 이런 훌륭한 정보를 일찍 알지 못했을꼬?

  굳이 믿을 필요는 없겠지. 슈베르트는 결코 바가텔렌마이스터, 소품이나 작곡하는 소품 거장이 아니었다. 오히려 실내악곡을 어떻게 하면 대편성에 버금가게 큰 규모로 만들 수 있을까를 고민하던 젊은이였지. 근데 한 번 생각해보시라. 환장한다. 나른하게 느린 아다지오를 틀어놓고 전희도 없이 기어 올라가더니, 음악에 집중해봐, 헥헥, 섹스를 배울 수 있을 거야, 헥헥, 하는 벌거벗은 남자를. 쿳시가 이랬단다. 영낙없는 왕재수 아냐?


  쿳시의 자전소설을 믿을 필요 없다. 그는 천생 픽셔니어fictioneer다. 자신의 일기나 메모에서조차 객관적 진실이 아닌 픽션을 쓰는 작가, 거짓말쟁이. 그런 운명, 별자리를 타고난 인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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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4-11-27 15:4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쿳시의 추락, 페테르부르크의 거장 등 여러 권 읽었고, 나름 좋았는데, 갑자기 정떨어지네요. ㅠ
불쌍한 슈베르트 !

Falstaff 2024-11-27 16:29   좋아요 1 | URL
저 역시 <추락>부터 쿳시를 읽기 시작했는데, 처음부터 하여튼 뭔가가 캥키더라고요. 그래서 그런지 쿳시를 만족한 상태로 마지막 페이지를 넘겨본 적이 없답니다. 거 참.
이런 게 작가-독자의 합이 아닌가 싶기도 하고 뭐 그렇습니다.
ㅎㅎㅎ 슈베르트. 세월이 가면 갈수록 더 좋아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