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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14일
에리크 뷔야르 지음, 이재룡 옮김 / 열린책들 / 2022년 10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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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 10개월 전에 에리크 뷔야르의 2017년 공쿠르 상 수상작품인 <그날의 비밀>을 읽었다, 라고 기억한다. 왜 이런 식으로 말하는가 하면, 뷔야르의 책을 읽기는 읽은 거 같은데 어떤 책이었는지 제목도 기억나지 않고, 당연히 작품의 내용이나 스토리도 기억나지 않았다. 당시에 쓴 독후감을 뒤져보니까 히틀러 집권 당시부터 2차 세계대전까지를 아우르면서도 짧은 작품이었다. 어렴풋하게 기억난다. 독일을 지탱하던 거대기업 바스프, 바이엘, 아그파, 오펠, IG 파르벤, 지멘스, 알리안츠, 텔레풍겐이 히틀러에 협조하지 않을 수 없었던 배경을 흥미롭게 읽은 (어렴풋한)기억. 솔직하게 그것 말고는 전혀 생각나지 않는다. 주인공도 없고, 처음부터 끝까지 등장해 서사를 이끄는 등장인물도 없는 작품이며 불과 140쪽의 짧은 분량으로 공쿠르상을 거머쥐었던 책 <그날의 비밀>. 뷔야르라는 이름이 문득 떠올라 그의 다른 작품을 골랐으니, 1789년 7월 14일, 바스티유 감옥이 함락되는 순간을 눈 앞에 그린 <7월 14일>이다.
귀족들의 저택이 밀집해 모인 파리 생탱투안 지역에서도 단연 명성을 떨친 호화 별장 폴리 티통, 앙시앙레짐 말기에 가장 호화롭고 사치스러운 장식, 그리고 정원에 속한 숲으로 유명한 곳. 이 저택은 또한 인류 역사상 최초로 두 명의 인간을 바구니에 태운 열기구가 이륙한 역사의 현장으로도 유명세를 떨친 바 있었으니, 왕립 채색벽지 제조공장 소유자 장바티스트 레베용이 머무는 곳이었다. 프랑스 역사에 등장한 숱한 멍청이 왕들 가운데서도 손꼽히는 우둔한 군주 루이16세의 배우자 앙투아네트는 방에 환상적인 그림이 그려졌거나 반짝반짝 빛나는 원색의 벽지를 선호했는데, 이 바람에 다른 왕족과 귀족들도 자기들 방을 왕비의 그것과 가장 비슷하게 치장하고 싶어해 장바티스트 레베용의 금고에는 밑에 깔린 금화가 납짝 짜부러졌다는 전설이 전해져 내려온다. (구라다, 구라.)
1789년 4월 23일. 프랑스 최고 수준의 부르주아 장바티스트 레베옹은 이 와중에 무진장한 현금을 쏟아내는 왕립 채색벽지 제조공장의 노동자 임금을 일당 20솔에서 15솔로 삭감하겠다고 발표한다. 15솔이면 충분하게 먹고, 살고, 아이들 키울 수 있을 것이며 계속 20솔을 받는다면 얼마 가지 않아 노동자들이 사업주인 자신보다 더 부유하게 살 거라고 엄살을 부리면서. 얼핏 생각하면 그깟 5솔, 이렇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무려 25%의 임금삭감을 의미한다. 게다가 1789년에는 대기근이 들어 민중들은 유래가 없이 굶주리고 있는 와중에 당연히 밀 가격 역시 하루가 다르게 폭동하고 있던 때였다. 굶주린 사람들이 도시로 몰려드는 바람에 파리 시민 60만 가운데 8만 명이 아무런 수입이 없이 살고 있어, 임금을 깎는다 하더라도 15솔의 일당을 받기 위한 노동력은 쌔고 쌘 것은 사실이었다.
여기에 악덕 기업주 레베옹이 하는 꼴을 유심히 관찰하고 있던 초석 공장 소유주 앙리오가 있었으니, 앙 사장 역시 나도 임금을 인하하겠다고 나발을 불어대, 파리 시민들이 폭발하는 건 시간 문제였다. 세상의 “거의” 모든 혁명은 배고픔 위에서 벌어진다.
4월 27일 오후 파리 시민들은 대규모로 그레브 광장에 집결해 “부자들에게 죽음을!”이라고 외치며 빵값을 2수로 인하하라고 요구하기 시작했다. 거참. 몇 온스의 빵값을 2수로 하라는 이야기인지는 책에 나오지 않는다. 그러니까 독자에겐 이런 가격은 의미 없다. 그러거나 말거나 시민들은 레베옹과 앙리오의 허수아비를 만들어 화형식을 해버렸으니 두 사장님은 등골 깨나 저렸을 듯. 그리고는 곧바로 앙리오의 저택에 난입해 눈에 띄는 호화 장식물들을 몽땅 파괴하다가, 어라, 이걸 깨서 부술 것이 아니라 들고 나가 유대인이 운영하는 전당포에 가져가면 다만 몇 루이는 받을 거 아냐, 각성하는 1인이 있었고, 난입한 군중이 그가 뭔가를 품 속에 넣고 사라지는 것을 본 다음부터는 본격적으로 약탈을 저지르기 시작했던 거였다.
다음날인 4월 28일. 사실상 이 날을 기점으로 프랑스혁명을 시작했다고 보는데, 앙리오의 저택을 털었던 어제의 용사들이 다시 모여 이제 새롭게 가장 화려한 별장인 폴리 티통으로 쳐들어갔다. 대문을 두드려 부수고 정원을 관통해 저택에 들어가보니, 화려함과 사치스러움이 굶주림에 다 죽어가던 시민들 눈에 혐오감을 유발해, 어제의 용사들은 어제의 활약보다 더 사납고, 용맹스럽게 기물을 파괴하고, 수정 샹들리에를 추락시켰으며, (진짜 책에 나온 것에 의하면) 대리석으로 꾸며진 벽난로 앞에 똥을 싸지르기도 하는 등 온갖 망나니 짓을 하면서도, 유감없이 골족의 후예의 진면목을 발휘해 거의 남김없이 귀중품을 싹쓸이해버렸다. 이제 시민들은 사람들이 많이 모이면 어디까지 사고를 칠 수 있는지 알고 싶어하는 주체할 수 없는 호기심까지 발동해 화려무비한 별장 폴리 티통은 반나절도 되지 않아 거의 폐허 수준에 도달했고, 이제야 출동해 도착한 기마대가, 아직도 이게 혁명의 시작이 아니라 당연히 폭동일 뿐이라고 여겨 군중을 향해 무차별 사격을 감행, 3백명이 넘는 사람을 한 순간에 불귀의 객으로 만들었으며 이보다 조금 더 많은 부상자를 발생시켰고, 그것도 모자라 주동자라고 아무렇게나 판단한 몇몇 사람들을 광장으로 몰고 가 목매달았다. 이 일이 프랑스 혁명 시기에 1792년 8월 10일 튈르리 궁전 습격을 제외하고 사상자를 가장 많이 발생시킨 일이라고 한다.
에리크 뷔야르는 당시 티통 별장에서 레베옹 사장이 당한 약탈 내역은 모두 정확하게 기록된 반면에 상퀼로트들 중 죽고 부상당한 피해자가 몇 명이나 되는지는 아무도 모른다고 비꼬았다. 뷔야르는 정말 몰랐겠지. 원래 약자들은 그런 거다. 이 시절 이후 2백 년이 훨씬 더 지난 다음에 불과 몇 년 전에 독립한 식민지 아메리카 합중국이 세계 최대의 권력국가가 되고, 마흔한 번째 대통령에 당선한 조지 워커 부시가 테러와의 전쟁을 천명하면서 무슬림 국가 이라크를 침공해 소이탄을 퍼부을 때도 미국 병사들은 사망자, 중상자, 하다못해 경상자들에 관해서는 누가, 언제, 어디서, 어떻게, 무엇을 하다가 피해를 입었는지 확실하게 기록하고 영웅의 반열에 올렸지만, 대량학살을 피할 수 없었던 이라크 사람들은 몇 몇이나 죽었는지도 아무도 몰랐던 것처럼. 원래 약자들은 다 그런 거다. 프랑스가 알제리와 인도차이나에서 저질렀던 살육에서도 이하동문이고.
그래도 정신 차리지 못한 부르봉 왕가는 뫼동 숲 서쪽의 진흙 바탕에 토대를 둔 석회암 건물, 베르사유 궁전에 퍼질러 앉아 프랑스에서 가장 좋은 산물들만 소비하며 왕국을 파산 직전까지 몰고 갔다. 루이 16세, 이 우둔한 왕은 파리에서 유혈사태가 있었지, 그게 얼마나 심각한지는 전혀 모르고 있었을 지도 모른다. 앙투아네트 왕비가 뿌리는 내탕금만 따지더라도 연간 50만 리브르의 적자를 기록했다는 건 그래도 알고 있어서 당장 적자를 메꾸기 위해 다른 건 몰라도 일 하나는 똑부러지게 한다고 이름을 낸 네케르를 재무총감에 임명했고, 네케르는 감투를 쓰자마자 가장 확실하고 빠른 해결책인 대규모 징세를 시작했다. 문제는 당시에 부르주아와 귀족들한테는 세금을 걷지 않았다는 거. (진짜인지 아닌지 모른다. 하여간 이 책에서 뷔야르가 그렇게 썼다.) 그러니 이 와중에 며칠 후에 상퀼로트가 될 민중들의 고혈을 더 짜내고자 했으니 혁명이 일어나지 않으면 오히려 더 이상했을 광경. 징세정책은 5월 4일에 열린 삼부회에서 민중들을 일컫는 제3 신분이 수락을 해야 시행할 수 있었는데 네케르는 거만한 태도로 난해한 전문용어로 핵심은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이미 사태파악이 끝난 제3 신분은 딱 눈치를 채고 6월 17일에 국민의회를 선포했고,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린 루이 16세는 6월 20일 왕명으로 국민의회의 결정을 무효로 만들었으니 불이 붙은 들판에 기름을 확 끼얹은 듯했겠지.
잊지 말자 6.25, 6월 25일이 오자 이제야 사태의 심각성을 알아차린 왕은 귀족(제2 신분)과 사제(제1 신분)들에게 3신분과 합류하라고 호소해, 가톨릭 사제들과 귀족들이 왕의 명을 따라 화해하는 체스처를 하면서도 당시 유력한 귀족 아르투아 백작 등을 중심으로 용병들을 파리로 불러들이기 시작했다. 이를 눈치로만 아는 왕은 그래도 7월 11일에 재무총감 네케르를 해임했지만 용병을 믿는 마음이 굳세 강경책으로 돌아섰는데, 이미 거대한 물결은 멈출 도리가 없었다. 7월 12일에 젊은 말더듬이 변호사, 윽, 변호사가 말을 더듬었다고? 하여간 변호사 데물랭이 카페 문전의 탁자에 올라가 지금 궁전과 귀족들이 “애국자들의 성 바르텔레미를 준비하고 있다”고 매우 충동적인 연설을 하면서 사태는 급진전하는데, ‘성 바르텔레미’로 말할 것 같으면 1572년 8월 24일,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의 밤에 가톨릭에 의한 신교, 즉 위그노 교도들에 대한 학살을 일컫는 것으로, 지금 왕족, 귀족, 부르주아들이 민중들을 학살할 준비를 하고 있노라, 프랑스 민중들이 가슴 속에 품고 있는 역린逆鱗을 건드렸다는 말이다.
그리하여 다음날, 7월 13일에 파리 시내 곳곳에 바리게이트를 설치, 거의 파리를 점령했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은 상퀼로트들은 밤새 축제와 비슷한 해방의 하루를 보냈고, 드디어 7월 14일의 새벽 여명을 맞았던 것이니, 이 책 <7월 14일>, 너, 바스티유여, 기다려라! 드디어, 드디어, 개봉박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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