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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일 가까운 장애인 화장실이 어디죠? ㅣ 연극과인간 중국현대희곡총서 31
천스안 지음, 김우석 옮김 / 연극과인간 / 2024년 3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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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년에 북경에서 태어나 시인, 소설가, 극작가, 연출가, 역자 등 다양한 예술분야에서 활약하고 있는 중국 신세대 예술인. 다섯 권의 단편소설집을 출간했고, 다양한 극작품을 쓰고 연출했다. 극본 리딩 공연인 “외침(聲囂: 소리와 분노) 연극제”의 발기인이며 예술연출을 담당하고 있다. (출처:천쓰안 홈페이지)
천쓰안陳思安
표지를 열면 속지에 제목 <제일 가까운 장애인 화장실이 어디죠?>가 쓰여 있고 줄을 바꿔 영어로 괄호치고 (Be seen)이라 했는데, “Be seen”이 영어제목이란 뜻인가 싶기도 하다. “보이라” 또는 “드러내라” "알리라." 그런데 굳이 적극적으로 보이거나 드러낼 것까지는 아닌 수준으로. 다른 말로 할 수도 있겠다. “숨기지 마라”나 “감추지 마라”. 무엇을? 자신이 장애가 있고 그래서 비장애인과 다르다는 것을. 속지 아래 작은 글씨로 또 이렇게 밝혔다.
모노드라마 / 실화를 기반으로 함
역자 해설에 의하면, 2022년에 연극제작자 션루쥔이 우연히 장애인 인플루언서 자오홍청(趙紅程)의 다큐멘터리를 본다. 자오는 ‘착한 누이 훌륭한 청즈(程子)’라는 이름으로 동영상 플랫폼에서 활동하며 장애인인 자신의 “연애와 결혼, 일과 학업 등에 관한 영상을 소개하며 웨이보에 32만, 빌리빌리에 9만의 팔로워를 보유한 성공적인 인플루언서”라 한다. 연극 제작자이니까 션루쥔은 당연히 유명 장애인의 이야기를 연극으로 재창조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을 것이다. 그는 이 뜻을 자오홍청에게 전했고, 토의 끝에 자오홍청 본인이 직접 무대에 올라 자신의 이야기를 모노드라마로 공연하기로 엄지손가락에 인주 묻혀 계약서 서명란에 꾹 눌렀다.
그리하여 중국에서 “청년 예술가” 그룹의 뛰어난 일원인 천쓰안에게 희곡을 위탁했고, 천쓰안은 자오홍청과의 인터뷰를 거쳐 그것을 토대로 한 편의 모노드라마를 만들었다. 천쓰안이 좋은 소설가이기도 한 것이, 모노드라마 대본만 읽으면서도 매우 좋은 문장을 사용한다는 것을, 별로 좋지 않은 감식안을 가지고 있는 독자도 알아차릴 수준으로 만들 수 있었을 것 같다. 게다가 극작, 연출가를 겸하고 있으니 사실 애초 최상의 조건을 지닌 인터뷰어였을 터. 천쓰안은 오직 자오홍청을 위한 작품을 하나 만들었다. 내용마저 자오홍청이 나고, 한 살 때 소아마비에 걸려 다리를 쓰지 못했으며, 다른 사람들처럼 똑바로 서고, 걷고, 뛰고, 산에도 오르는 꿈을 이루기 위해 모진 고통을 수반하는 척추만곡과 다리교정 수술을 받았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코 휠체어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된 것을 이해하는 과정. 이 속에서 대학과 대학원을 졸업한 뒤 운 좋게 회사에 취직을 하고, 직장에서 만난 연인과 함께 살며, 놀랍게도 섹스도 즐기면서, 이제 세상 속에서, 비록 여러가지로 불편하지만, 장애인이라는 정체성을 갖고, 세상을 향해, 나는 이렇다, 스스로 드러내는 장, 그게 연극의 무대가 될 수도 있고, 강연회의 연단이 될 수도 있는데, 장소야 아무러면 어떤가, 하여간 단 위에서 자오홍청, 그저 한 장애인이 세상의 모든 장애인이 하고 싶은 말, 당신들이 듣고 싶은 말이 아니라, 장애인이 하고 싶은 말을 드러내는(Be seen) 작업이다.
첫 장면은 자오홍청, 청즈程子가 강연회장으로 간다. 휠체어를 타고 가니 아무래도 교통 시간이 많이 걸리는 교통약자일 수밖에. 그래서 시간을 넉넉하게 잡고 출발한다. 청즈가 타고다니는 휠체어는 시속 25킬로미터로 여덟 시간을 연속으로 달릴 수 있는 최신형이다. 즉 2백 킬로미터를 쉬지 않고, 마라톤 선수보다 훨씬 빨리 주파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의 거대 도시에서는 시간 안에 고층 건물 속 약속장소에 도착하는 것이 쉽지 않다.
집을 나선다. 인도를 지나 지하철역 장애인용 엘리베이터를 이용해 13호선에서 7호선으로 환승한다. 역에서 나가는 장애인 엘리베이터를 통해 지상으로 올라가 바글바글한 인파를 뚫고 행사가 열리는 건물에 도착하는 것까지는 그리 어렵지 않다. 이제 문제가 시작된다.
건물의 일반 엘리베이터 타는 일. 청즈의 다리는 상당히 가늘다. 오랜 시간 움직이지 않아 근육을 하도 많이 상실해서 그렇다. 엄마는 이걸 가리기 위하여 늘 바지만 입혔지만, 머리 커지고, 직장에 다니며 독립한 다음에 친구 룰루가 거의 강요하다시피 해서 치마를 입기 시작했는데, 정작 입어보니 신세계였다. 특히 방광을 비우는 일이 훨씬 간단해졌다. 여름엔 훨씬 시원했으며 보기에도 생각하지 못했을 정도로 여성스럽다.
그건 그거고 빌딩의 엘리베이터 문 가까이 청즈의 휠체어가 서 있다. 20층에서 내려오는 엘리베이터 숫자판의 숫자가 점점 작아지자 갑자기 두 발로 뛸 수 있는 사람들이 휠체어 근처로 몰려든다. 그러다 숫자가 기어이 1로 바뀌고, 문이 열리자마자 몰려온 사람들이 우르르르 네모난 상자 안으로 밀려들어간다. 아직 문이 열린 상태. 조금의 공간이 있지만 전동 휠체어가 낄 공간을 부족해 보인다. 청즈는 입가에 기꺼운(듯한) 미소를 보이며 먼저 올라가라고 한다. 정말로 엘리베이터가 올라가고 이제 청즈는 자기 휠체어를 엘리베이터 문 바로 앞에 착 붙여버린다. 잠깐 후 늘씬한 다리를 가진, 허벅지가 청즈의 눈높이 정도에 달하는 여성이 와서 서고, 그 여자가 열일곱 번이나 청즈를 내려다본다. 신경쓰지 않는 척하던 청즈가 갑자기 위를 쳐다봐 시선이 마주치니 여자는 어색한다. 어색한 김에 한 마디 한다.
“다리가 참 가느시네요…….”
청즈가 고개를 끄덕이며 웃는 얼굴로 대답한다.
“네. 다 열심히 운동한 결과랍니다.”
여자는 이제서야 깜짝 놀라서, 아, 하고 자기 입을 막은 채 칭즈의 다리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무슨 말을 하려고 하지만 때마침 엘리베이터 문이 열려 휠체어는 금속 상자 안으로 들어간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그 여자를 찾으러 두리번거리지만 여자는 엘리베이터를 타지 않았다. 부지불식간에 큰 실수를 했다고 생각해서 다음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갈 모양이다.
세상의 거의 모든 비장애인은 장애인을 보면 더욱 친절을 베풀어주어야 한다는 강박에 싸이고는 한다. 그렇게 교육을 받았으니까. 진짜 속마음으로는 장애인들을 비하하고 열등한 인간으로 생각하는 지도 모르지만 하여간 겉으로는 그렇게 보이고, 실제로 친절하게 행동한다. 물론 대부분 친절한 행위의 근본은 장애인이 결코 받고 싶어하지 않는 동정심에서 시작하겠지만.
그러나 청즈, 자오홍청은 결국 알아낸다. 세상에 장애라는 이름의 병은 없다는 것을.
나는 원래 이렇게 태어난 거야. 내가 노력해서 바꿀 수 없는 것에 집착하면 불행해지는 것 말고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는 것도 알아차린다. 장애인의 병은 장애가 아니라 “마음에 박혀서, 뿌리를 내리고, 싹을 틔워서, 나의 피와 살을 빨아먹으면서 조금씩 자라나”는 의식이었다. 이것을 몸 속에서 끝까지 철저하게 뽑아내지 않는다면 장애를 극복해 일어날 수 있든 없든, 영원히 진정한 자유를 얻을 수 없는 병이란다.
위에 쓴 것 말고도 장애인과 장애에 관하여 다양한 생각거리를 제공하는 작품이다. 장애인이 아니라면 입에 올리기 쉽지 않고, 여차 조금이라도 핀트가 다른 곳으로 박히면 심란한 비난을 각오해야 할 것들을 자오홍청은 천쓰홍의 글을 빌려 자근자근하게 그러나 심각하게 호소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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