옆 발자국 문학과지성 시인선 507
조은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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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년 전, 나는 조은의 시집 《따뜻한 흙》을 읽고 “주된 관심사는 탄생과 삶과 죽음의 사이클”이라고 쓰면서 시인의 “삶의 정체는 어떤 이유로 이렇게 우울과 죽음의 색조화장을 하게 되었는지 궁금증을 넘어 이제 의례 그러려니 할 정도가 됐다.”라고 했다. 가난과 비통과 각혈과 죽음과 괴멸. 이 모든 것들, 이제쯤 뒤돌아보니, 시인이 말했듯이, “정신적 경제적 남루함이 발목을 잡는 시간”이었을 듯하다. 아직도 물살이 만만치 않은 강에다 시인은 하나의 디딤돌을 놓듯이 새 시집 《옆 발자국》을 낸다고 했다. 그렇다. 그러고보니 전에 읽은 시집과 새 시집 사이에 15년이란 세월이 누워있다. 여전히 죽음과 이별과 어둠 속에 있어도 조은은 삶 속으로 간다. ‘가기.’ 그것의 흔적을 발자국이라 부른다. 시집의 제목에 들어 있듯, 이번에 발자국을 노래하는 시가 무척 많다. 첫번째 실은 시도 <발자국>이다.


  영혼을 외면했던

  오늘 내 발자국이

  불에 달군 쇠덩이처럼

  위험해 보인다   (p.7, 전문)


  오랜만이기는 하지만 이제 시인의 집에 소꿉친구가 와서 하룻밤을 자고 가기도 한다. 전편에서는 생각지도 못한 사회생활이다. 물론 아무리 소꿉친구라 해도 살면서 같은 생각을 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사람은 비슷하다. 외롭고 외로운 것은



  느끼든, 못 느끼든



  오랜만에 만난 소꿉친구가

  하룻밤 자고 갔다

  어디에 속하든 지능이 가장 높았던

  나의 열등감을 여러 번 자극했던

  친구는 내게 시집 한 권을 선물했다.


  내가 받아 든 시집은

  한 성직자의 베스트셀러

  그동안 쓴 수많은 시 때문에

  그분은 내게

  언제나 밋밋했다


  부르르 떨다 내리는 주먹

  불길한 월식과 일식

  비틀비틀 가는 발자국

  붉은 손자국이 있는 뺨


  그런 것들에 눈길이 가는 나는

  삶을 예찬하는 그분의

  시에 늘 시들했다


  외롭고 외롭다

  그걸 느끼는 내 삶도

  다르게 느끼는 친구의 삶도   (p.12 ~13. 전문)



  아하, 그렇군. 적어도 조은과 내가 같이 느끼는 건 하나 있군. 천주교 수녀가 쓴 시집을 귓등으로라도 쳐다보지 않는다는 거. 다른 성직자도 마찬가지다. 나는 목사, 사제, 중들이 쓴 시는 안 읽는다. 요즘 중이나 신부가 유튜브 같은 데 나와서 인생이 어쩌고저쩌고 하는 꼴이 하여간 내 눈엔 우습다. 지들이 가정을 이루어 봤어? 발갛게 밤을 태워 보기라도 했어? 아이쿠, 삼천포. 하여간 어디를 가더라도 제일 지능이 높았던 시인한테 열등감을 자극하던 동무라니, 시인은 머리만 좋고 나머지는 부족했나보다. 슬픈 일이다. 머리라도 안 좋았으면 열등감이나마 덜 받았을 것을. 쉰을 한참 넘긴 시인이 이제 돌아보니, 201호나 202호나, 수녀가 쓴 시를 좋아하는 여자나, 그걸 시들하게 읽는 여자나, 사는 건 다 외롭단다.

  외롭지만 외롭지 않은 곳이 한 군데 있다. 201호에서 지하로 내려가면 세상만사 다 끝나는 곳. 노인요양병원. 시인의 어머니도 그곳에서 한 생을 마친 것 같다. <어떤 만남, 어떤 이별>에서 외롭지만 외롭지 않은 장면을 읽을 수 있다.


  내 어머니 빈소에도 / 본 적 없는 사람들이 왔다 / 들고 온 꽃바구니를 / 바닥에 놓기도 전에 구슬프게 울었다 / 양복 차림의 남자도 어깨를 들썩였다 // 그가 너무도 슬퍼 보여서 / 상가를 잘못 찾은 거라고 / 빨리 그들을 돌려보내야 한다고 / 우리는 눈길을 주고 받았다 // 죽은 자의 고독을 잘 알았던 / 그들은 어머니의 병원 친구였다 / 늘 푸르렀던 어머니의 잎 잎을 / 자식들이 하나하나 따냈다는 것을 / 그들은 알고 있는 듯했다  (p.16~17. 부분)


  자식들이 어머니의 잎 잎을 다 따낸 것을 그이들이 어떻게 알았을까? 당연하지. 그이들의 잎 잎도 그이들 자식들이 모두 따버렸거든. 그래서 시인도 앞에서 얘기했지 않는가. “외롭고 외롭다 / 그걸 느끼는 내 삶도 / 다르게 느끼는 친구의 삶도”라고.

  조은의 시가 마음에 들기 시작한다. 전에 “조은”이라면 내가 사는 아파트에서 길 건너 있는 “조은 약국” 정도만 알고 있었는데 이제 시인 조은의 이름도 기억하고 싶다. 시도 많이 쉬워졌다. 저번 시집을 읽고 하여튼 로또만큼이나 나한테 맞지 않는 시인이다 싶었는데 생각이 바뀌었다. 그래, 나는 과한 분비, 죽음, 우울, 슬픔, 술주정 같은 거 싫거든. 그런 걸 노래해도 기어이 삶 또는 사는/살아야 하는 이유가 엿보이는 시가 좋거든.

  그 사이에 시인의 아버지도 죽었다.



  어머니의 장례가 끝난 뒤

  아버지가 말했다

  내가 먼저 죽어야 했는데

  너희들한테 미안하구나


  3년 뒤에도 말했다

  아내가 죽은 뒤 3년을 산 남자는

  오래 산다는데

  큰일 났구나


  어머니가 평생 하찮게 여겼던 것만을

  독차지했던 아버지는

  부축 한 번 받지 않고

  무덤까지 갔다    (<눈물> p. 18~19 부분)



  위 시의 앞부분을 보면, 아버지와 나누어 가져야 할 사랑을 어머니가 독점했다고 나온다. 즉 아버지가 어머니를 죽자사자 사랑했다는 것. 그래서 아버지는 어머니가 평생 하찮게 생각하는 것들만 가졌다는데, 그게 무엇인지, 어떤 종류의 것인지 알려줄 만큼 시인은 친절하지 않았다. 어쩌면 독자는 몰라도 좋은 것인지도. 그러니 우리 독자여, 아쉬워도 아니꼬워하지 말자.

  다시 발자국으로 와서, 모르긴 몰라도 종로구 철거중인 산동네에 살고 있는 것 같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이사 나간 반면, 이사 들어온 가구는 없는 동네에 날이 가면 갈수록 종족을 번성시키고 있는 건 당연히 버려진 개들과 고양이. 개는 버림을 받으면 곧바로 적자생존, 작은 개체들은 큰 개체들에게 잡아먹혀버려 중대형 수준으로 체구가 커진다. 사람한테도 상당히 위협적이다. 혹시 외딴 길을 가다 유랑견을 만나면 조심하시라. 절대로 조심해야 한다. 반면 고양이는 그렇지 않다. 자기들끼리 경쟁하고 구역싸움해도 사람한테 여간해 피해를 주지 않는다. 번식기에 야밤이나 새벽을 가리지 않고 애기 울음소리가 듣기 싫을 뿐. 조은은 고양이를 좋아할지언정 고양이 엄마 황인숙처럼 사료와 물을 주지는 않는 것 같다. 지금 한 이야기와 가장 비슷한 시가 이것.



  발자국 옆 발자국



  눈 내린 골목

  고양이 발자국들


  꽃잎 같은 발자국은

  차 밑으로 빈집 대문 아래로 공터로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


  선명한 발자국을 따라가자

  누가 막 놓고 간 물그릇에서

  털장갑 같은 김이 오른다

  작은 플라스틱 그릇엔

  하트 별 보름달 모양의 사료


  거기서 작은 발자국은

  맞은편에서 온 사람의 발자국과 만난다

  둘은 나란히 간다


  잃어버린 고양이를 찾아다니던

  저 사람을 여러 번 본 적 있다


  지난 혹한의 날씨에

  굶주린 어미가 새끼를 입에 물고

  목숨을 걸고

  그의 집으로 들어왔다고 했다   (p. 26~27. 전문)



  시집의 제목 <옆 발자국>은 이 시의 제목에서 왔다. 옆 발자국이 사람의 것이냐, 진짜 발자국이 사람의 것이냐? 4연에서 작은 고양이 발자국은 사람의 발자국과 만나서 나란히 간다. 자국이 나란하다고 걸음까지 나란한 건 아니다. 눈 내리고 추운 겨울 밤. 하여간 고양이와 사람은 같은 방향, 조금은 더 따뜻한 사람의 집 쪽으로 갔다. 내린 눈을 발로 찍어 만든 발자국. 이런 것도 있다.



  겨울 아침



  발등을 덮는 눈 아래

  얼어붙은 작은 발자국들

  수북한 눈 위에

  막 찍힌 발자국들


  인간도 짐승도 싫어하는 자의

  얼음 같은 눈빛도

  녹일

  발자국, 발자국 들


  잔돈을 세어

  수도 요금 전기 요금 가스 요금이 빠져나가는

  은행 잔고를 채우러 가는 아침

  혼자 눈길을 걸어간

  고양이의 길을 본다


  나도 늘 혼자이다

  누군가는 그것이 나의

  약점이라고 말한다


  약점은 때로 장점이어서

  슬픔이나 막막함을

  다른 이가

  같이 겪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이

  위안이 되기도 한다


  발목까지 빠지는 눈길을 되돌아가

  허기졌을 배가 눈 위로 끌린

  새끼고양이의 길을 발로 다져준다   (p.36~37 전문)



  그림 딱 그려진다. 시인이 고양이를 참 좋아한다. 나도 고양이를 좋아해 이 시에 공감하는 것이 아니라, 세월이 흔적을 내 시인 조은이 발목을 잡는 남루함의 구덩이를 건너온 것을 직접 읽을 수 있어 공감했다. “늘 깨어 있으며 눈에 광채를 띄고 세상을 바라보는” 시인 말고, 조금 뒤에서 시간에 닳아 이제 부드러워진 곳을 쓰다듬는 일도 시인에게 마땅하지 않을까?

  어쨌든, 나도 시인의 아버지처럼 죽고 싶다. <얼룩>에서 나오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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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24-09-16 04:4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시집 가지고 있어요.
조은 시인의 산문도 재미있게 읽은 기억이 있습니다.

Falstaff 2024-09-16 09:10   좋아요 0 | URL
산문도 썼군요. 수필이겠지요. ㅎㅎㅎ 시만 쓰면 살기가 팍팍할 겁니다. ^^
 
조반니의 방 열린책들 세계문학 290
제임스 볼드윈 지음, 김지현(아밀) 옮김 / 열린책들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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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후감을 쓰려는데 제임스 볼드윈에 대해 아는 것이 하나도 없다. 잠깐 검색해보자 싶어 위키피디아를 열었더니, 아오, 이게 보통이 아니다. 분량만 가지고 과장을 좀 하자면 톨스토이 급이다. 내가 알고 있던 제임스 볼드윈은 1970년대에 튀르키예의 정치가 불안해지자(쿠데타였겠지 뭐) 파리로 건너간 쥴퓌 리바넬리가 그곳에서 인연을 맺어 수집한 문화계 명사들의 명함 가운데 한 장이 볼드윈의 것이었다는 거, 딱 하나였다. 아마 리바넬리의 책을 읽다가 (틀림없이 이이와 동명이인인) 제임스 볼드윈이 입에 익어 책을 검색했고, <조반니의 방>이란 제목의 책이 도서관에 있어서 관심도서로 보관했다가 읽은 것이리라. 전화기에 깔린 앱에 이 책을 읽은 즉시 매긴 별점은 세 개 반이었다. 지금은? 뭐 고칠 필요 있을까?

  1943년과 44년 사이, 컬럼비아 대학의 학부생 루시엔 카가 나이 많은 동성애자 데이비드 캐머러를 칼로 찔러 죽이는 사건이 벌어졌다. 허드슨 강을 걷다가 캐머러가 카에게 성적으로 접근했고, 이에 격분한 카가 캐머러를 찌른 다음 몸을 강에 버린 일이다. 죽인 후 시신을 버렸는지, 찔렀지만 아직 죽기 전에 버렸는지는 정확하게 쓰여 있지 않다.

  자신이 동성애자이며 이 사실을 주변 소수의 사람에게만 커밍아웃 한 채 상당한 기간동안 이성애자처럼 살아온 제임스 볼드윈은, 내 재주로는 1940년대의 살인사건 당시 살인자 루시엔 카도 동성애자인지는 모르겠지만, 하여간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동성애자 사이에서 살인으로 달음박질하는 치정사건을 구상했던 건지 모른다.

  제임스 볼드윈의 어머니 에마 존스의 가족은 노예 해방 이후 남부의 인종분리와 차별을 피해 흑인들이 북쪽으로 이동한 “대이주” 시절 뉴욕으로 터전을 옮긴 무리의 일환이었다. 1922년, 열아홉 살에 뉴욕 할렘에 도착한 에마는 1924년 8월에 할렘 병원에서 제임스 아서 존스라는 이름의 사생아를 낳는다. 엄마가 아기한테 생물학적 아버지가 누구였는지 알려주었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하여간 제임스는 죽을 때까지 염색체의 반을 물려준 남성에 관해서는 침묵했다. 혼자 벌어 세 살까지 제임스를 키운 엄마는 1927년에 노동자이자 침례교 목사인 데이비드 볼드윈과 재혼해 제임스에게 볼드윈이라는 성을 사용하게 했다. 여전히 젊디젊은 엄마는 가을만 되면 무 뽑듯이 쑥쑥 아이들을 생산해 무려 아홉 명의 자녀를 더 만들어 기어이 두 자리, 열을 채운다.

  이 집의 가장 큰 문제는 아빠였다. 위키피디아에서도 볼드윈 목사의 나이를 정확하게 표기하지 못하고 그냥 “1863년 노예해방 이전에 태어났을 것이다.”라고만 추측한다. 그러면 아내 에마하고 최하 마흔 살 차이. 아무리 젊어도 예순 넷에 장가를 들어 아이 아홉을 더 낳았다고? 안 부럽다, 안 부러워.

  아빠 볼드윈 목사는 또 아내 에마와 같은 나이의 딸, 감옥에서 죽은 아들, 제임스보다 여덟 살이 많은 또다른 아들이 있었다. 하여간 생식력 하나는 끝내주는 목사는 자식 가운데 유일하게 자신의 씨를 받지 않은 제임스와 좋지 않은 관계를 만들었는데, 대가리 커진 제임스와 맞짱 비슷한 광경 바로 앞까지 여러 차례 가기도 했단다. 목사는 제임스가 책을 읽는 것도 싫었고, 공부를 잘해도 싫었고, 백인 아이들과 친구를 먹어도 싫었으며, 영화를 좋아하는 것도 싫었다. 오직 하나, 검둥이답게 열심히 노동하고, 백인을 혐오해야 하며, 백인을 차별시켜야 한다는, 역으로 분리주의자, 인종차별주의자였다. 같은 사막종교이기는 하지만 그나마 기독교라서 좀 괜찮았지, 무슬림 원리주의 쪽이었으면 더 심각할 수도 있었지 않을까? 아니겠지? 아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도 차별이다.

  그리하여? 이 드런 집구석에서 오래 살고 싶은 마음이 들었겠느냐고. 글을 쓰고 싶은데 미국이라는 나라에서 1950년대에 아프리칸 아메리칸이 쓴 소설이 몇 부나 팔리겠냐고.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답이 나오지 않아 제임스 볼드윈이 선택한 것은 구대륙으로 귀환하는 것. 인종차별이 없다고는 할 수 없어도 숱하게 다양한 유색인을 식민지배 해 봐서 미국과 비교하면 상당히 온순한 정도라고 생각했고, 사실이었다. 집에서 뛰쳐나가는 것이 합법이 될 나이가 되어, 스물네 살의 제임스 볼드윈은 1948년에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일을 하며 모은 돈으로 드디어 프랑스행 여객선 삼등실에 몸을 누이게 된다.


  작품은 이렇게 시작한다.

  “내 인생에서 가장 끔찍한 아침을 앞둔 밤. 나는 어둠이 깔린 이곳 남프랑스의 대저택 창가에 서있다.”


  화자 ‘나’의 이름은 데이비드. 피부색은 드러나지 않는다. 흑인일 수 있지만 백인일 수도 있다. 작품 속에서 피부색은 한 번도 거론되지 않는 걸 보면 그냥 '사람'으로 여기는 편이 좋다. 아는 사람만 ‘나’가 동성애자라는 걸 안다. 다른 사람은 이성애자로 알고. 실제로 미국 여성 헬라와 오래 연애를 했다. 연애가 무르익어 청혼을 했고, 결혼은 연애와 아예 다른 이야기니, 스페인에 가서 좀 더 깊이 생각해보겠다는 말을 남기고 헬라가 가버렸다. 이별이란 뜻은 아니다. 말 그대로 시간을 갖고 결심을 하겠다는 것뿐. 그래서 ‘나’ 데이비드는 프랑스에서 돈 몇 푼 없는 백수 미국 청년 신세가 된다.

  ‘나’는 작가 제임스 볼드윈과 마찬가지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자질구레한 일을 열심히 한 덕에 적지 않은 돈을 모았다. 그러나 아버지 계좌에 입금되어 있으며, 아버지는 당연히 미국으로 돌아올 아들을 위해 황금과 반지를 품은 용 파프너처럼 아들의 돈을 지키고 있다. 유럽에 있는 돈의 주인 아들에게도 마찬가지다. 젊은 혈기가 넘쳐 자기 돈을 유럽의 환락을 위해 써버릴 지 누가 아느냐는 말이지.

  프랑스에 오고 두 해가 지났다. 이 사이에 헬라와 연애를 했고, 청혼을 했으며, 헬라는 결혼을 하느냐 마느냐를 결정하기 위하여 몇 달째 스페인에서 편지만 보낼 뿐 돌아오지 않는다. ‘나’도 처음엔 열심히 답장을 썼으나 이젠 점점 짧아지고, 터울도 점점 길어진다. 주머니가 거의 비어 드디어 여관방에서 쫓겨났을 정도로. ‘나’는 다행히 벨기에 태생이지만 미국인인 남자 자크를 알고 지낸다. 가끔 미국 청년들에게 돈을 빌려주기도 하고, 가끔은 냉정하게 거절하기도 하는 동성애자. 그러나 ‘나’에게 자크가 돈을 빌려주지 않을 확률은 별로 없다. 아직 자크의 방에 가본 적이 없어서. 나이든 게이 자크는 동성애자 사이에서 인기가 없다. 게이도 될 수 있으면 젊은 게이를 탐하는 모양이라 그들을 유혹하기 위하여 간혹 큰 돈을 쓰고, 몇 번 관계를 한 다음엔, 버린다. 이런 저런 늙은이한테 버림을 받은 젊은 가난뱅이 게이들은 자기들끼리 더러운 식당에 모여 남창 그룹을 이루기도 하는데 이건 전 세계적으로 공통 같다. 책을 보면 그렇다.

  이렇게 자크한테 1만 프랑을 빌리고 곧바로 자크의 단골 바 겸 식당으로 향한다. 그냥 ‘기욤의 바’라고 하는. 바의 주인 기욤 역시 늙은 게이. 수사가 화려하고 다분히 연극적 단어와 문장을 자유롭게 구사한다. 그의 바에 새로 이탈리아 출신의 게이가 바텐더로 와 있다. 이이의 이름이 조반니. ‘나’가 한 눈에 봐도 매력적이다. 여태 딱 한 번 동성간 성 경험이 있었다. 중학생 시절의 조이. 부모가 여행중일 때 우연히 함께 목욕을 하고, 같은 침대에서 잠을 자다가 서툴게 벌이게 된 사건. 그 행위로 남성성을 잃어버릴 것 같은 고통 때문에 수치스러웠다. 침대에 묻은 흔적 자체가 추악한 행위의 증거가 됐던 일. 그럼에도 조반니한테는 한 눈에 빠지지 않을 수 없는 매력이 넘쳤으니.

  그러나 누군가 지나가면서 ‘나’에게 충고한다.

  “있잖아요, 그는 위험해요. 특히나 당신 같은 청년에게는 굉장히 위험하죠. 괴로워질 거예요. 당신은 무척 불행해질 거예요. 기억하세요. 나는 분명히 말했어요.”

  누굴까? 그와 연애를 경험한 중년? 천사? 아니면 악마?

  기욤과 자크, ‘나’와 조반니는 영업시간이 끝난, 해가 아직 뜨지 않은 새벽에 바에서 나와 택시를 타고 예전에 조반니가 일했던 레알 시장 너머, 마담 클로틸트가 운영하는 값싸고 지저분한 식당에 가 화이트와인과 굴과 레드와인과 코냑을 먹는다. 자크가 ‘나’에게 말한다.

  “그를 사랑해줘. 사랑을 하고 사랑을 받으란 말이야. 세상에 그 외에 중요한 일이 뭐가 있겠나? 그리고 그게 길어야 얼마나 가겠어? 자네 둘 다 남자고 어디로든 마음대로 갈 수 있는데. 길어야 5분일 거야. 장담해. 겨우 5분.”

  정수리까지 술이 오른 이들을 남기고 ‘나’와 조반니는 파리 변두리 나시옹 근처 끔찍한 동네의 꼭대기 하녀가 살던 방, 이제는 조반니가 사는, 조반니의 방으로 든다.


  “그리고 조반니는 오늘 밤과 내일 아침 사이의 어느 시점에 기요틴 위에서 절명”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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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24-09-13 05:4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다음 주 삽질:
월요일. 조은, 《옆 발자국》
화요일. 기욤 로랑, <내 몸이 사라졌다>
수요일. 페트로니우스, <사티리콘>
목요일. 김중혁, 《스마일》
금요일. 리처드 브라우티건, 《완벽한 캘리포니아의 하루》

stella.K 2024-09-13 10:00   좋아요 1 | URL
톨스토이 급이라니 대단한 작가인가 봅니다. 저는 순간 영화배우 알렉 볼드윈을 생각했는데. ㅋㅋ
별이 반 개가 더 붙는 거랑 안 붙는 거랑 그것을 받아들이는 입장은 다른데 알라딘은 섬세하지가 못 해요. 그죠?

근데 다음 주는 거의 매일 리뷰 쓰시나요? 추석도 있는데 하루쯤 쉬시지 않구요. 저야 좋죠. ㅎㅎ 암튼 다음 주도 기대하겠습니다.
좋은 주말, 추석 맞이하십시오.^^

Falstaff 2024-09-14 07:27   좋아요 1 | URL
위키피디아가 미국제니까 미국작가 볼드윈에 대한 자료가 많겠지요. 어딜 감히 톨스토이한테 비비겠습니까, 어림도 없습니다. ㅋㅋㅋ
옙. 다음 주에도 삽질은 계속합니다. 아이들은 내일 왔다 가니까 시간은 널널합니다. ^^

바람돌이 2024-09-13 09:1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임스 볼드윈은 다큐영화 아이 엠 낫 유어 니그로를 인상적으로 봤어요.
Falstaff님 리뷰를 읽다 보니까 뭐랄까 주인공이 게이란 걸 빼면 저기다 여성 팜므파탈 역으로 대체하면 너무 흔한 소설이 되지 않을까 뭐 그런 생각이 드는데요. 제임스 볼드윈 책을 좀 읽어볼까 했었는데 의욕이 피시식 사라지네요. ㅠ.ㅠ

Falstaff 2024-09-14 07:40   좋아요 1 | URL
이 책은 후기 낭만주의 비슷합니다. 벌어서 먹고 살 생각은 하지 않고 돈 떨어지면 어디서 누구한테 돈 좀 쌔벼올 수 있을까를 궁리하는 19세기 룸펜 인텔리겐치아 흉내를 열라 내는데, 파리의 이 게이들은 인텔리겐치아도, 부르주아도 아니면서 그런다는 말이지요. 파리, 런던, 타이페이, 도쿄에서 하는 일이 거의 다 비슷하더라고요.

hnine 2024-09-13 09:4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james baldwin 미국 현대 문학에서 꽤 알려진 작가로 알고 있어요. 오래 전에 sonny’s blue, go tell to the mountain 두 작품 읽었는데 작가에 대한 것은 여기서 자세히 알고 갑니다 ^^

Falstaff 2024-09-14 07:31   좋아요 0 | URL
옙. 한 시절 미국의 유명 작가 가운데 흐지부지 사라진 사람들이 예상 외로 많더군요. 이건 제 생각이고요, 미국 내에선 아직 많이 읽고 있는 지도 모르겠습니다. ^^
 
잘못 걸려온 전화
아고타 크리스토프 지음, 용경식 옮김 / 까치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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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고타 크리스토프는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이 워낙 존재감이 커서 새로 출간하는 책마다 족족 찾아보게 만드는 작가다. 이번엔 제대로 잡았다. 《잘못 걸려온 전화》는 애초에 수상해서 크리스토프의 다른 책을 검색해봤더니 현대문학, 지혜정원을 거쳐 세번째 출판사인 까치로 와 제목을 다시 단 복제품이다. 다시 번역한 것도 아니다. 세 권 다 용경식이 번역했고, 모두 스물다섯 편의 장편소설, 길게 쓴 거 말고 손바닥만해서 손바닥 장掌자를 쓴 초단편, 장편掌篇소설을 실은 것까지 똑같다. 현대문학과 지혜정원에서 낸 책은 140쪽, 까치에서 나온 《잘못 걸려온 전화》는 150쪽으로 페이지 수만 다르다. 가격도 다르다. 현대문학 8천원, 지혜정원 만원, 《잘못 걸려온 전화》 14,500원. 당연히 《잘못 걸려온 전화》는 대단히 널널한 편집으로 아마존 열대우림 파괴에 일익을 담당하고 있다. 한 시절 좌파 선봉에서 사회과학 서적 출판에 열을 올리던 그 까치가 맞다. 근데 성이 “조”씨였나 보다.

  스물다섯 편의 장편소설에 총 페이지 수가 150. 그러면 한 편당 6쪽의 분량이다. 근데 문패가 한 페이지. 한 페이지에 열아홉 줄, 한 줄에 스물여덟 자. 좋다. 하드웨어가지고 시비하지 말자. 근데 별점은 세 개 반 이상은 못쳐주겠다. 이것 가지고도 시비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아고타 크리스토프는 헝가리에서 출생해, “부다페스트에서의 소녀의 죽음”을 목격한 후에 남편과 아이와 함께 오스트리아 국경을 넘고, 스위스로 들어가 살면서 시계공장에 다니며 목구멍이 풀칠을 했다. 5년이 더 흐른 후에 새삼스레 대학에 입학해 프랑스어를 전공하고, 프랑스어로 작품을 쓰기에 이른다. 헝가리 민주화운동이 있던 1956년부터 작가가 된 후에도 크리스토프는 아마도 틀림없이 시간이 날 때마다 어딘가에 끼적이기 시작했을 것이고, 언제부터인가 그것들을 한 노트에 집중하기 시작했을 것이고, 누군가는 나중에 한 작품이 되기 위해 숙성중인 짧은 이야기들을 초단편 모음집으로 내기를 희망했을 터이며, 그래서 책 한 권으로 내 가외수입을 올렸을 것이다.

  이 책 《잘못 걸려온 전화》를 읽으면서 그런 의미로 아쉬웠다. 여차하면 살을 조금 더 붙여 한 편의 작품으로 나올 수 있을 만한 것들이 그저 짧고도 짧은 이야기 하나에 머무르고 있는 것이. 하긴 이 짧은 이야기, 널널하게 만들어도 다섯 페이지 분량이 채 되지 않지만 작품으로 부족한 것이 무엇이냐고 항의할 수도 있다. 당연하지. 짧아도 개별적 작품이다. 독자인 내가 아쉬울 뿐이지.


  작품들은 대개 그로테스크하고 의사 불통의 상태이다. 이미 죽어 있거나, 유령이거나, 죽어가는 상태일 수도 있으며, 커뮤니케이션 도중 혼선으로 인한 각자 오해의 과정에 있을 수도 있다. 애초부터 세상에 선한 것이라고는 없었으며, 있다 해도 다 제각각 바라는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게 내 돈이 됐건, 내 바라지였건, 내 몸이 됐건 간에. 그래서 참 알뜰하게 아고타 크리스토프 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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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유행열반인 2024-09-12 09:1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거 이미 작가의 웅장한 진득한 장편 본 사람들한테야(그리고 벽돌 격파 전문가 팔백작님한테도) 뭐여 입가심거리도 안 되네 하겠지만 아직 이 작가 안 읽어 본 사람들한테는 샘플러 역할은 톡톡히 했다 아닙니까...(이거 사고서 결국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 중고로 삼 ㅋㅋㅋ5500원에 횡재...엄마가 먼저 보시는 중? 이미 보심? 하여간 빌려볼래다 사게 됨요 ㅋㅋㅋ)그러고보니 이 책도 저는 알라딘 우주점에서 9900원에 비교적 헐하게 들여와서 평이 덜 나빴을 수도 있네요. 팔백작님 빌려만 보셔요!!!! 새 책 사보면 별점 하나씩 깎임 ㅋㅋㅋㅋㅋㅋㅋㅋㅋ

반유행열반인 2024-09-12 09:1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근데 조까치 괜찮으세요? ㅋㅋㅋㅋ이제 까치에서 백작님한테 전화온다...거 떼까치 물까치 다 있는데 왜 남의 성 바꿔 이러고 ㅋㅋㅋ갑자기 궁금해져서 까치 검색하고 판매량 순 정렬해보니 비문학 빼곤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이 밥벌이 일등 공신이네요...일위는 .... 소유냐 존재냐 입니다 ㅋㅋㅋ저도 이 출판사 거로 가지고 있는 거 같은데 진짜 개정판 개역판 잘 안 내긴 함 ㅋㅋㅋ사골국 우림 ㅋㅋㅋ그래도 로마제국 쇠망사 같은 벽돌도 우람하게 내줘서 팔백작님이나 저나 신세 많이진 사골국 맛집이니까 조는 빼고 그낭 깢치 라고 합시다....ㅋㅋㅋㅋㅋㅋㅋㅋㅋ

반유행열반인 2024-09-12 09:1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니 근데 왠지 기번 책 민음사나 동서거로 읽으셨다 그러면 할 말 없고 ㅋㅋㅋ공부하기 싫어서 댓글 폭탄하고 갑니다...제몫까지 신나게 읽어주셔유...

Falstaff 2024-09-12 18:41   좋아요 1 | URL
넹.... 민음사, 제일 비싸고 화려하지만 교정, 교열은 우리나라에서 제일 후진 출판사 책으로 읽었습니다. ㅋㅋㅋ
하여간 크리스토프는 세가지 존재를 꼭 읽어야 합니다. 수험생이니까 셤 끝나면 읽어보셔요. ㅋㅋㅋㅋ
 
기억의 기억들
마리야 스테파노바 지음, 박은정 옮김 / 복복서가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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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리야 스테파노바는 따로 바이오그라피를 찾아볼 필요가 없을 듯하다. <기억의 기억들> 자체가 자기 가족 이야기다. 스테파노바는 1972년 모스크바에서 태어나 대학을 졸업하고 성인이 된 후, 1990년대 러시아에서 쿠데타가 일어나자 부모는 독일로 이민을 떠났고, 스테파노바는 모스크바에 남았다. 여기까지 다 책 속에 나온다. 이후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이 벌어지자, 스테파노바는 이에 항의하는 뜻에서 자신도 독일로 이사한다. 울리츠카야도 이때 떠났다. 두 작가가 다 유대인-러시아인이다.

  마리야 스테파노바의 본령은 시인이다. 소설은 아직까지 <기억의 기억들> 하나밖에 없다. 당연히 앞으로 소설도 쓰겠지. 그러나 시인이 쓴 소설임을 감안하시라. 2017년 출간한 작품이며 이 책이 2017~18년도 러시아 최고의 산문에 수여하는 빅-북 상을 받아 2백만 루블(당시 약 3천3백만 원)의 상금을 받았다고 해도 쉽게 읽히지 않는다. 작품은 좋지만 너무 사적인다. 스테파노바 개인의 가계를 그린 듯한데 이름은 전부 애칭, 약칭으로 표기했다. 화자는 당연히 ‘나’ 마샤. 마리야의 애칭/약칭이다. 가계를 기억하는 가장 중요한 도구는 사진.

  작품 초반부터 당신은 당황할 것이다. 나는 당황했다. 당신도 마찬가지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하여간 조심하는 편이 좋다. 보시라.

  “료냐 할아버지는 기술자여서 후방에서 복무했다. 붉은 별 훈장을 받은 또다른 할아버지 콜랴는 전쟁 중 극동에서 복무했다. 전선에서 전투에 참가한 할아버지는 없다.”

  생각하기를, 기술자 료냐 할아버지가 원래 할아버지고, 이 양반이 불귀의 객이 되어 과부가 된 할머니가 새로 시집을 가 콜랴라는 이름의 남편을 두었구나. 어때? 그럴 듯하지? 근데 이게 오산이었다.

  료냐 할아버지는 엄마 나타샤의 아빠인 외할아버지. 콜랴 할아버지는 아빠 미샤의 아빠인 친할아버지다. 우리나라 족보로 생각해보자. 엄마의 엄마인 외할머니는 룔랴. 여기까지, 외할머니 이름까지는 웬만하면 다 알지? 좋다. 그럼 외할머니의 엄마 이름을 아시는 분, 혹시라도 있으면 거수바람. 좋아, 좋아. 모르는 게 당연하지. 이건 아시나? 외할머니의 엄마를 칭하는 호칭은? 모른다. 검색해보면 외증조모라고 나오는데 웃기는 말씀. 그건 외할아버지의 엄마. 내가 바라는 건 외증조모의 안사돈을 어떻게 부르는지 아느냐는 거. 외할머니의 외가를 외진진外陳陳외가라고 한다면 외진진증조할머니가 정답일 듯. 이게 맞다면 마리야, 마샤의 외진진증조할머니가 사라. 20세기 초에 프랑스로 유학을 가서 의학 공부를 한 의사로 그냥 프랑스에서 시집가지 않고 귀국해 혁명 소비에트에서 의사로 일한 신여성이었다. 사라의 부모는 아브람 긴즈부르크와 로쟈 긴즈부르키나. 20세기 초반에 러시아 땅에서 유대인에 대한 대량 학살이 있었던 건 다들 아시지? 당시에 ‘사라 아브라므예브나’라는 이름으로 살아야 했으니 얼마나 팍팍했을꼬?

  외진진증조할머니 사라 아브라므예브나가 젊었을 때, 어렸을 때 찍은 사진이 있다. 파리 소르본 대학 의학 실습실에서 콧수염을 멋들어지게 기른 남학생 사이에서 흰 가운을 입고 찍은 여학생 시절도 있고, 더 어린 사라도 있다. 사라의 시아버지이자 니즈니노브고로드의 의사였던 다비드 프리드만이 찍은 1906년 사진도 있는데 이건 좋은 품종의 주황색 점박이 무늬 사냥개 세터였다. 여기서 조금 놀랐다는 말이지. 1906년에 모스크바에서 동쪽으로 4백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 “컬러 사진”을 찍었다고? 아마 채색사진일 듯하다. 당시에 컬러 사진술이 없던 건 아니지만 그게 시장에 나오려면 한참 더 기다려야 했을 터. 1905년에 (화자 미샤가 “또다른 고조 할아버지라고 부르는) 아브람 오시포비치는 열네 자녀를 두었는데 이 가운데 사라 증조할머니의 사진이 있었고, 사진 속에 어린 사라는 손이 얼어서 빨갛게 보였다고 한다. 유명한 1905년 12월 혁명 시절이었다. 이 사진도 컬러는 아니고 채색 사진이었을 것이다. 세월이 오래 흐르면서, 화자 미샤는 엄마 나타샤, 외할머니 룔랴를 비롯한 무수한 여인들과 함께 앨범을 꺼내 많고 많고 또 많은 사진을 보며 사진 속 할머니, 아주머니, 고모, 이모들에 관해 보고, 듣고, 경험한 이야기를 전해준다. 이게 훗날 미샤가 자신의 가계에 대한 책 <기억의 기억들>의 자료가 될 줄은 열 살이었을 때부터 자기 가족에 관한 소설을 쓰기로 작정했던 미샤 말고는 아무도 몰랐으리.


  근데 왜 이 책이 읽기 쉽지 않느냐고?

  작가는 사진을 보고 있다. 그것을 문장으로 설명한다. 시각을 문자로 옮기는 일. 이건 작가가 원했든 아니든 간에 한 번 더 큰 왜곡이 기다리고 있다. 문장을 독자가 뇌 속으로 옮겨 이를 형상화하는데, 이것이 얼마만큼 작가가 직접 보고 있는 사진과 일치할 것인지, 그건 아무도 모른다. 작가도 모른다. 하지만 작가는 오히려 이 불일치를 의도했을 수도 있다. 의도했다는 건 아니지만. 책의 뒷부분으로 가면 작가는 사진의 현장에 가려 하거나 최소한 가장 가까운 곳까지 접근해 사진의 분위기를 확인 또는 공감하고 싶어한다. 누구 닮았지? W.G. 제발트. 스테파노바도 책 중에서 백 번은 넘게 제발트를 이야기한다. 제발트를 읽은 독자는 누구라도, 작가가 제발트 이야기를 하지 않았더라도, 제발트를 연상하게 된다. 그러나 어법이 다르다. 제발트는 자신이 묘사하고 있는 인물이나 풍경을 독자와 공유한다. 그러면서 넓은 벌판을 독자와 함께 걷거나, 외진 도로를 따라 낡은 승용차를 운전하거나, 언덕에 올라 경치를 조망한다.

  스테파노바는 사진에 등장하는 자신의 가계 구성원을 기억하면서 유대인-러시아인이 20세기를 관통/극복하는 스토리를 부각하기도 하고, 그들이 살던 집, 묻힌 무덤을 답사하기도 한다. 작가는 책을 통해 단 한 장의 사진도 독자와 나누어 감정을 공유하기를 거부한다. 한 세기 내내 학살과 공포, 피해의식 속에 살았던 유대인 집단의 트라우마에 독자는 공감할 수 없다고 단정하는 것 같기도 하다. 적어도 그렇게 오해하게 만든다는 생각이 들게 한다.

  근데 이게 맞을까? 제발트는 유대인이 아니다. 2차 세계대전 말기에 태어났다. 학교에서 보여준 홀로코스트 사진에 충격을 받아 전쟁과 박해는 그가 평생에 걸쳐 탐구해야 했던 과제가 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기회가 닿을 때마다 사라진 사람들의 사진을 독자와 공유한 반면, 당사자의 가족일 수도 있으며 적어도 동족의 한 명인 스테파노바는 굳이 그런 필요를 느끼지 않았던 걸까? 단정하지 말자. 그랬으면 어떻고, 아니면 또 어떤가.

  많고 많은 등장인물과 복잡한 가계도 속에서 미로를 헤매는 것과 비슷하게, 스테파노바의 익숙하지 않은 문장에 길들기도 쉽지 않다. 숱한 독자는 이런 문장을 좋아하여 ‘시적詩的 운율’과 비슷한 말로 이를 칭찬한다. 다만 나는 그렇게 하지 못하겠다. 산문은 산문이고 운문은 운문이다. 물론 운문 비슷한 산문이라는 것도 있으며 그걸 좋아하는 독자의 취향을 존중하긴 하지만, 나는 아니다.

  시적 문장이라고 해서 “시적”이 의미하는 것이 감정이 충만하게 밴, 이런 뜻이 아니다. 오히려 문장은 지극히 건조하다. 작가가 영향받은 것이 틀림없는 프루스트, 제발트 풍이다. 작가가 좋아하는 것처럼 보이는 만델스탐 같은 러시아/소비에트 작가/시인과의 유사점은 내가 읽어보지 않아 모르겠다. 이 정도면 대충 어떤 분위기인지 감이 잡히실 듯.


  작품 자체의 서사로 읽으려면, 그러지 마시라. 애초 시작할 때부터 특별히 말재주가 있는 작가와 더불어 앉아 말로만 설명해주는 사진을 연상하면서, 사진 속 사람과 배경이 어떨 것인지 마리야 스테파노바의 이야기를 듣는다는 “각오”로 첫 페이지를 넘기시기 바란다.

  근데, 만일 W.G 제발트가 <아우스터리츠>를, <토성의 고리>를, <이민자>를 한 권으로 묶어서 6백 페이지 분량으로 출간했으면 어땠을까? 단언하는데, 다른 건 모르겠고, 읽으면서 간혹 사진을 볼 수 있어서 스테파노바보다 훨씬 읽기 편할 것 같다. 달리 이야기해서, 여차하면 스테파노바의 <기억의 기억들>을 지루한 책이라고 여기기 쉽다는 뜻도 될 수 있지 않을까 싶다는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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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러스트
에르난 디아스 지음, 강동혁 옮김 / 문학동네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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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 에르난 디아즈는 1973년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태어나, 두 살 때 군사쿠데타를 피해 스웨덴으로 건너가 열 살까지 살고 다시 귀국해 부에노스아이레스 대학을 졸업한다. 이후 영국 킹스 칼리지를 졸업하고, 다시 뉴욕으로 점프, 뉴욕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 브루클린에 터를 잡아 결혼도 하고 딸도 낳아 키우며 살고 있다. 지금은 컬럼비아 대학의 히스패닉 연구소 부소장으로 재직하고 있다는데 2023년에 편집한 위키피디아의 기록이니까 그런가보다, 하고 지나가자. 이이는 두 권의 소설을 출간했다. 2017년에 발표한 <먼 곳에서>. 데뷔작이 나오자마자 퓰리처상과 펜/포크너상의 최종후보까지 올랐다가 미역국 먹었다. 그럼에도 질스 화이팅Whiting 여사 재단에서 주는 화이팅 상을 수상해 5만 달러의 상금을 받았으니, 으메, 그게 얼마여? 이후 두번째 작품이 2022년에 출간한 <트러스트>이다. 이게 대박. 드디어 미국인의 꿈인 퓰리처 상을 받고, 부커상 최종심에 올라가고, 워싱턴포스트와 뉴욕타임스가 뽑은 2022년 10대 소설에 선정되기도 했으며, 금수강산 옥토낙원의 개 잡아먹는 이야기, 한강이 쓴 <채식주의자>와 더불어 21세기에 발간한 모든 문학 작품 가운데 백 권에도 선정되는 기염을 토했다. 세상에나. 이렇게 읽기 지겨운 소설이 말이지!

  지금 감히 퓰리처상 수상에 빛나는 작품을 “읽기 지겨운 소설”이라고 했느냐고? 그랬다, 어쩔래? 퓰리처상이 아니라 부커상, 노벨상, 책상, 걸상, 밥상, 개근상을 가져와봐라, 눈썹 하나 까딱하는지. 겨우 470쪽밖에 되지 않는 책 한 권 읽는데 3일 걸렸다. 보통 이 정도면 길어야 이틀이면 충분하건만, 이거 진심으로 하는 얘긴데, 소설책이 재미가 없으니까 속도도 나가지 않더라고. 그 정도로 재미없었다. 읽다가 그만 읽을까, 이렇게 많이 망설인 책도 별로 없을 듯. 그러니 당신이 이 책을 정말로 읽겠다고 마음먹는다면, 그러지 않기를 바라는데, 단단히 마음 매조져야 할 것. 뭐, 내 생각이 그렇다는 거다. 독자 리뷰 읽어보면 별 다섯 개 만점으로 다섯 개 다 채운 사람들도 많다. 그러니 내 눈알이 삐어서 재미없게 읽었다고 보시면 틀리지 않을 듯하다. 읽든 말든 마음대로 하시라.


  책은 모두 네 개의 장part으로 되어있다.

  1부 “채권”은 소설가 해럴드 배너가 쓴 소설. 부자 가문의 마지막 후계자 벤저민 래스크의 한평생을 조망했다. 그러니까 소설 속의 소설인 셈. 이걸 한 번 따라가 보자.

  벤저민 래스크의 부계 조상으로 말할 것 같으면, 1662년에 코펜하겐을 떠나 클래스고로 이주했다. 벤저민의 고조 할아버지 대에 와서 식민지에서 생산한 담배 거래를 백 년 이상 점점 크게, 점점 크게 벌이다가 벤저민의 아버지인 솔로몬 벤저민 씨는 담배회사의 지분을 몽땅 사들인 후, 머지않아 미국 동부 연안에서 가장 중요한 담배 무역상으로 등극하기에 이른다. 솔로몬 래스크 씨는 세상에서 가장 좋은 품질의 시가와 시가릴로(얇은 시가), 파이프 담배를 공급했고, 이런 성공은 씨의 탁월한 대화술과 정치적 연줄을 제공하는 능력이 밑받침이 된 것이 물론이다. 성공의 정점에서 씨는 뉴욕 웨스트 17번가에 타운하우스를 건설해 그곳에서 벤저민을 낳는다. 최고의 부호로 이름을 높인 솔로몬 래스크 씨는 쿠바에 작은 별장을 짓고 그곳에서 월동하는 걸 당연하게 생각했고, 아내 윌헬미나는 허드슨강 동안에 여름 별장, 뉴포트에는 오두막을 지어 그곳에서 아들과 오래 묵었다. 그러니까 부부/가족은 여름과 겨울, 일년의 반 동안은 서로 코빼기 구경도 하기 힘들었다는 말이다.

  태도와 지능, 순종적인 성품이 잘 조화된 아이들을 일컫는 단어인 “모범적”인 어린이 밴저민은 단 한 가지, 다른 아이와 어울리기 꺼리는 것만 빼면 어디 한 구석 나무랄 데가 없었다. 외로운 어린 시절을 보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상태로 들어간 기숙학교에서 벤저민은 여전히 무감각한 태도로 전과목에서 두각을 나타낸 영재였다. 기숙학교 졸업반일 때 아버지가 심장마비로 한 방에 훅 갔고, 다음 해 졸업 직전인 5월엔 어머니마저 폐기종으로 숟가락 놨다. 그럼에도 벤저민은 대학에 입학했다. 사람들은 래스크가 특유의 혈통이 벤저민 대에서 끊어진 것으로 봤다. 뉴욕으로 돌아간 벤저민은 거의 대부분 성공을 거둔 분야에서 실패하고 있었다. 그는 선대와 다르게 서툰 스포츠맨이었고, 무감각한 사교가였으며, 열정 없는 술꾼에 냉담한 도박사이자 뜨뜻미지근한 연인이었다. 억눌러야만 하는 욕구도 없는 데다가 담배를 피우지 않는 담배회사의 총수였다. 벤저민한테는 담배사업만큼 재미없는 일이 없어서, 회사 경영을 임원진에 맡겨버린 것도 모자라, 쿠바에 있는 초호화 아버지 별장도 별장 안의 온갖 귀중품과 더불어 현지의 반half 사기꾼 대리인을 통해 홀랑 팔아버렸다.

  그러다가 1907년의 불황이 다가왔다. 성격이 이랬으니 벤저민 래스크는 홀랑 거지가 됐을 거 같지? 천만의 말씀. 장기 유럽 여행 스케쥴을 짜던 벤저민이 갑자기 무슨 냄새를 맡았다. 아버지 별장 판 돈을 비롯해 자기가 가지고 있던 모든 동산current asset을 주식에 투자했었는데, 그걸 한 방에 몽땅 팔아 금채권을 산 거다. 유럽? 거긴 안 가도 돼! 금본위 화폐 시대에 금채권을 확보했으니 이제 기다리는 건 하늘에서 쏟아질 돈벼락뿐이었다. 수많은 은행이 지급불능사태를 맞아 문을 닫건 말건 불황은 벤저민에게 황금알을 쑥쑥 낳아주었고, 그동안 신경쓰지 않은 물려받은 재산도 상당한 규모로 증폭되어 있었다. 자신의 자산을 관리해주고 있던 J.S. 윈슬로 회사의 총수인 윈슬로 2세가 벤저민의 공격적인 투자에 회의를 품자 그동안 불편하지만 긴밀하게 협력해왔던 투자회사를 단박에 해고해버리고 직접 투자에 손을 대기 시작했다.

  벤저민이 보기에 금융계와 투기는 죽을 수 있지만 균 하나 없는 깨끗한 생물이었다. 생각하고, 말하고, 서명하면 끝나는 일. 쓸데없이 다른 사람들과 긴밀한 관계를 만들 필요가 조금도 없는 유일한 무균질 작업. 완전히 자기 성격에 맞는 일이었다. 1907년에 니커보커 신탁회사의 대표 찰스 바니가 자살하자마자 전세계 증시에 공포의 물결이 출렁이기 시작했고, 벤저민은 민첩하게 탄력성을 확보한 기업의 저평가된 자산을 인수해버리기 시작했다. 돈 놓고 돈 먹기의 귀재 J.P. 모건이 벤저민을 지켜보다가 넋을 잃고 그를 저녁식사에 초대했지만, 벤저민은 싹 잘라 거절했을 정도. 이렇게 일이 커지니 아무리 벤저민이라도 직원을 고용할 수밖에. 심부름꾼부터 시작해 타이피스트, 그러다가 이제 제대로 공부한 회계사가 필요했고, 점점 커져 다양한 종류의 인력을 모았다. 초기에 모인 인재 가운데 벤저민이 혐오하는 금융계의 모습을 다양하게 지니고 있던 셸던이란 작자도 있었는데, 그는 어느새 벤저민의 사업을 위한 완전한 대변인으로 변해 있었다. 1914년 취리히 은행가로 출장을 떠난 셸던은 세계대전이 터지는 바람에 그곳에서 발이 묶였다. 이때 그곳에서 명성은 있지만 재산은 없는 올버니의 오랜 명문가 브레보트 댁의 외동따님 헬렌을 알게 된다. 이 헬렌이 몇 년 흘러 10대 후반이 되자 벤저민 래스크와 혼인을 해 헬렌 래스크가 된다.

  브레보트 씨는 심령술, 연금술, 최면술, 강령술 등 다양한 신비주의에 함몰된 인물로 평소에 딸과 긴밀한 유대를 지니기도 했다. 당연히 상당한 정도로 영향을 미쳤겠지. 그래서 그런지 헬렌은 결혼을 하고 1930년대 대공황을 만나, 벤저민이 1907년 당시의 불황 시절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미친 수준의 천재성을 발휘해 지상 최고의 부자가 된 후, 미국의 문화, 특히 음악과 학교, 전시회 등을 위한 활수한 기부를 이어가다가 아빠 브레보트 씨와 비슷한 정신 질환을 앓는다. 헬렌은 자신의 병을 고치기 위하여 반드시 아버지가 입원했다가 행방불명이 된 바로 그 스위스의 병원에 입원하겠다고 고집을 부렸고, 그곳에서 다양한 치료를 받다가, 별로 효과가 없자, 벤저민이 투자한 독일 제약회사가 제안한 주치의의 처치를 받기로 결정한다. 그리고, 독자들이 예상한 바와 같이, 죽는다.

  아내의 죽음 이후로 총기가 빠진 벤저민은 이후 그저 그런 투자가 수준으로 급전직하, 별로 눈에 띄지 않는 평범한 삶 속에 머물기 시작한다.


  이게 삼류 소설가 해럴드 배너가 쓴 작품 “채권”이다. 근데 당시에 이 책을 읽는 거의 모든 미국사람들은 벤저민과 헬렌 래스크가 실재하는 투자 귀재 앤드루와 밀드레드 베벨 부부의 이야기라는 것을 단박에 알아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이 책을, 평소엔 거의 책을 읽지 않는 앤드루 베벨도 읽었다. 절대 불같이 화를 내지 않는 베벨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천문학적인 재산의 힘으로 책을 낸 출판사를 통째로 사버린 후, 작가 배너에게 거액을 주고 평생 저작권 계약을 맺는다. 그리고? 시중에 나도는 책의 전량 회수, 창고에 쌓인 회수품과 재고품 전량 소각. 평생 저작권 계약을 맺을 때 지불한 거액의 계약금은 막강한 변호사 집단에 의한 연속적 소송으로 거덜을 낸다. 소송을 해서 벤저민 측이 져도 상관없다. 배너가 방어하기 위해 변호사를 고용할 것이고 그때마다 거액의 변호사 비용이 들 터이니.

  작가는 그렇게 처리하면 끝이다. 그러면 이왕 퍼져 있는 소설은 어떻게 할까? 앤드루 베벨은 직접 자서전을 쓰기로 한다. 그게 2부. 3부로 들어가면, 자서전을 쓰기 위한 도우미, 한 번도 정식 문학 수업을 받아본 적 없는 글 좀 쓰는 여성 타이피스트 아이다 파르텐자를 고용한다. 이후 오랜 세월이 지나 노년에 접어든 아이다 파르텐자가 뉴욕 웨스트 17번가의 베벨 박물관에 들어 자료를 다시 찾아보며 당시를 회상하는 장면이다.

  마지막 4부는? 투자의 귀재 앤드루 베벨의 아내 밀드레드가 쓴 일기. 이게 “일기”이니 유일하게 사실과 근접한 기록일 터.


  정말 재미없게, 지루하게 읽은 책이지만, 마지막 페이지를 덮는 순간, 별점을 주면 다섯 개 만점에 넷 정도를 주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왜? 앤드루 베벨은 자신이 가진 무소불위의 능력, 돈의 힘으로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믿었고, 진짜로 그렇게 행동을 한 인물이다. 삼류작가 해럴드 배너의 책을 읽고 인생을 무참하게 끝내버렸을 수 있고, 남들이 보이게 베벨이 배너의 조종을 울렸다고 “오해하게 만들었을 수”도 있다. 어떻게 생각하든 그건 독자 마음이다.

  혹시 말이지, 천하 제일의 부자 앤드루 베벨이 뭔가 아내 밀드레드한테 꿀리는 것이 있어서 삼류작가이기는 하지만, 삼류작가이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해럴드 배너를 고용해 신경정신 질환으로 숨을 거두는 아내를 만들어달라고 요구했던 건 아닌가? 재무적으로 거덜을 냈다고 하지만 천문학적인 현금을 가지고 있는 베벨이 그정도 보상을 해주는 건 일도 아니었을 터. 여기저기 내가 그 새끼 손 좀 봤어, 소문이 나게 만드는 건 말 그대로 껌 씹는 수준일 거고. 이미 책을 읽어볼 사람은 다 읽은 다음이니까. 애초에 자서전도 출간할 마음이 없었으면서 그냥 쓰는 흉내만 냈던 거고. 이미 죽은 아내에게 그리도 헌신적인 남편이란 소문만 나게 말이지. 그래서 3류 작가가 쓴 소설 속의 소설 <채권>이 그렇게 재미가 없었던 것일까? 내 생각이 맞다는 건 아니다. 그저 그랬으면 어떨까, 만일 그렇다는 전제로 별점을 주면 네 개 정도이다, 하는 수준일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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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4-09-10 12: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미역국도 어디서 어떻게 마시느냐에 따라다르겠죠? 어떤 상은 후보만으로도 영예가 되기도 하겠죠. 약간의 호불호가 있는 것 같기는 합니다만 그래도 작가가 난 사람이긴 한가 봅니다. ㅋ

Falstaff 2024-09-10 18:33   좋아요 1 | URL
이 양반 꽤 인기 있는 모양이더라고요. 같은 언어가 아니라 함부로 이야기하고 있는 지도 몰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