옆 발자국 문학과지성 시인선 507
조은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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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년 전, 나는 조은의 시집 《따뜻한 흙》을 읽고 “주된 관심사는 탄생과 삶과 죽음의 사이클”이라고 쓰면서 시인의 “삶의 정체는 어떤 이유로 이렇게 우울과 죽음의 색조화장을 하게 되었는지 궁금증을 넘어 이제 의례 그러려니 할 정도가 됐다.”라고 했다. 가난과 비통과 각혈과 죽음과 괴멸. 이 모든 것들, 이제쯤 뒤돌아보니, 시인이 말했듯이, “정신적 경제적 남루함이 발목을 잡는 시간”이었을 듯하다. 아직도 물살이 만만치 않은 강에다 시인은 하나의 디딤돌을 놓듯이 새 시집 《옆 발자국》을 낸다고 했다. 그렇다. 그러고보니 전에 읽은 시집과 새 시집 사이에 15년이란 세월이 누워있다. 여전히 죽음과 이별과 어둠 속에 있어도 조은은 삶 속으로 간다. ‘가기.’ 그것의 흔적을 발자국이라 부른다. 시집의 제목에 들어 있듯, 이번에 발자국을 노래하는 시가 무척 많다. 첫번째 실은 시도 <발자국>이다.


  영혼을 외면했던

  오늘 내 발자국이

  불에 달군 쇠덩이처럼

  위험해 보인다   (p.7, 전문)


  오랜만이기는 하지만 이제 시인의 집에 소꿉친구가 와서 하룻밤을 자고 가기도 한다. 전편에서는 생각지도 못한 사회생활이다. 물론 아무리 소꿉친구라 해도 살면서 같은 생각을 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사람은 비슷하다. 외롭고 외로운 것은



  느끼든, 못 느끼든



  오랜만에 만난 소꿉친구가

  하룻밤 자고 갔다

  어디에 속하든 지능이 가장 높았던

  나의 열등감을 여러 번 자극했던

  친구는 내게 시집 한 권을 선물했다.


  내가 받아 든 시집은

  한 성직자의 베스트셀러

  그동안 쓴 수많은 시 때문에

  그분은 내게

  언제나 밋밋했다


  부르르 떨다 내리는 주먹

  불길한 월식과 일식

  비틀비틀 가는 발자국

  붉은 손자국이 있는 뺨


  그런 것들에 눈길이 가는 나는

  삶을 예찬하는 그분의

  시에 늘 시들했다


  외롭고 외롭다

  그걸 느끼는 내 삶도

  다르게 느끼는 친구의 삶도   (p.12 ~13. 전문)



  아하, 그렇군. 적어도 조은과 내가 같이 느끼는 건 하나 있군. 천주교 수녀가 쓴 시집을 귓등으로라도 쳐다보지 않는다는 거. 다른 성직자도 마찬가지다. 나는 목사, 사제, 중들이 쓴 시는 안 읽는다. 요즘 중이나 신부가 유튜브 같은 데 나와서 인생이 어쩌고저쩌고 하는 꼴이 하여간 내 눈엔 우습다. 지들이 가정을 이루어 봤어? 발갛게 밤을 태워 보기라도 했어? 아이쿠, 삼천포. 하여간 어디를 가더라도 제일 지능이 높았던 시인한테 열등감을 자극하던 동무라니, 시인은 머리만 좋고 나머지는 부족했나보다. 슬픈 일이다. 머리라도 안 좋았으면 열등감이나마 덜 받았을 것을. 쉰을 한참 넘긴 시인이 이제 돌아보니, 201호나 202호나, 수녀가 쓴 시를 좋아하는 여자나, 그걸 시들하게 읽는 여자나, 사는 건 다 외롭단다.

  외롭지만 외롭지 않은 곳이 한 군데 있다. 201호에서 지하로 내려가면 세상만사 다 끝나는 곳. 노인요양병원. 시인의 어머니도 그곳에서 한 생을 마친 것 같다. <어떤 만남, 어떤 이별>에서 외롭지만 외롭지 않은 장면을 읽을 수 있다.


  내 어머니 빈소에도 / 본 적 없는 사람들이 왔다 / 들고 온 꽃바구니를 / 바닥에 놓기도 전에 구슬프게 울었다 / 양복 차림의 남자도 어깨를 들썩였다 // 그가 너무도 슬퍼 보여서 / 상가를 잘못 찾은 거라고 / 빨리 그들을 돌려보내야 한다고 / 우리는 눈길을 주고 받았다 // 죽은 자의 고독을 잘 알았던 / 그들은 어머니의 병원 친구였다 / 늘 푸르렀던 어머니의 잎 잎을 / 자식들이 하나하나 따냈다는 것을 / 그들은 알고 있는 듯했다  (p.16~17. 부분)


  자식들이 어머니의 잎 잎을 다 따낸 것을 그이들이 어떻게 알았을까? 당연하지. 그이들의 잎 잎도 그이들 자식들이 모두 따버렸거든. 그래서 시인도 앞에서 얘기했지 않는가. “외롭고 외롭다 / 그걸 느끼는 내 삶도 / 다르게 느끼는 친구의 삶도”라고.

  조은의 시가 마음에 들기 시작한다. 전에 “조은”이라면 내가 사는 아파트에서 길 건너 있는 “조은 약국” 정도만 알고 있었는데 이제 시인 조은의 이름도 기억하고 싶다. 시도 많이 쉬워졌다. 저번 시집을 읽고 하여튼 로또만큼이나 나한테 맞지 않는 시인이다 싶었는데 생각이 바뀌었다. 그래, 나는 과한 분비, 죽음, 우울, 슬픔, 술주정 같은 거 싫거든. 그런 걸 노래해도 기어이 삶 또는 사는/살아야 하는 이유가 엿보이는 시가 좋거든.

  그 사이에 시인의 아버지도 죽었다.



  어머니의 장례가 끝난 뒤

  아버지가 말했다

  내가 먼저 죽어야 했는데

  너희들한테 미안하구나


  3년 뒤에도 말했다

  아내가 죽은 뒤 3년을 산 남자는

  오래 산다는데

  큰일 났구나


  어머니가 평생 하찮게 여겼던 것만을

  독차지했던 아버지는

  부축 한 번 받지 않고

  무덤까지 갔다    (<눈물> p. 18~19 부분)



  위 시의 앞부분을 보면, 아버지와 나누어 가져야 할 사랑을 어머니가 독점했다고 나온다. 즉 아버지가 어머니를 죽자사자 사랑했다는 것. 그래서 아버지는 어머니가 평생 하찮게 생각하는 것들만 가졌다는데, 그게 무엇인지, 어떤 종류의 것인지 알려줄 만큼 시인은 친절하지 않았다. 어쩌면 독자는 몰라도 좋은 것인지도. 그러니 우리 독자여, 아쉬워도 아니꼬워하지 말자.

  다시 발자국으로 와서, 모르긴 몰라도 종로구 철거중인 산동네에 살고 있는 것 같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이사 나간 반면, 이사 들어온 가구는 없는 동네에 날이 가면 갈수록 종족을 번성시키고 있는 건 당연히 버려진 개들과 고양이. 개는 버림을 받으면 곧바로 적자생존, 작은 개체들은 큰 개체들에게 잡아먹혀버려 중대형 수준으로 체구가 커진다. 사람한테도 상당히 위협적이다. 혹시 외딴 길을 가다 유랑견을 만나면 조심하시라. 절대로 조심해야 한다. 반면 고양이는 그렇지 않다. 자기들끼리 경쟁하고 구역싸움해도 사람한테 여간해 피해를 주지 않는다. 번식기에 야밤이나 새벽을 가리지 않고 애기 울음소리가 듣기 싫을 뿐. 조은은 고양이를 좋아할지언정 고양이 엄마 황인숙처럼 사료와 물을 주지는 않는 것 같다. 지금 한 이야기와 가장 비슷한 시가 이것.



  발자국 옆 발자국



  눈 내린 골목

  고양이 발자국들


  꽃잎 같은 발자국은

  차 밑으로 빈집 대문 아래로 공터로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


  선명한 발자국을 따라가자

  누가 막 놓고 간 물그릇에서

  털장갑 같은 김이 오른다

  작은 플라스틱 그릇엔

  하트 별 보름달 모양의 사료


  거기서 작은 발자국은

  맞은편에서 온 사람의 발자국과 만난다

  둘은 나란히 간다


  잃어버린 고양이를 찾아다니던

  저 사람을 여러 번 본 적 있다


  지난 혹한의 날씨에

  굶주린 어미가 새끼를 입에 물고

  목숨을 걸고

  그의 집으로 들어왔다고 했다   (p. 26~27. 전문)



  시집의 제목 <옆 발자국>은 이 시의 제목에서 왔다. 옆 발자국이 사람의 것이냐, 진짜 발자국이 사람의 것이냐? 4연에서 작은 고양이 발자국은 사람의 발자국과 만나서 나란히 간다. 자국이 나란하다고 걸음까지 나란한 건 아니다. 눈 내리고 추운 겨울 밤. 하여간 고양이와 사람은 같은 방향, 조금은 더 따뜻한 사람의 집 쪽으로 갔다. 내린 눈을 발로 찍어 만든 발자국. 이런 것도 있다.



  겨울 아침



  발등을 덮는 눈 아래

  얼어붙은 작은 발자국들

  수북한 눈 위에

  막 찍힌 발자국들


  인간도 짐승도 싫어하는 자의

  얼음 같은 눈빛도

  녹일

  발자국, 발자국 들


  잔돈을 세어

  수도 요금 전기 요금 가스 요금이 빠져나가는

  은행 잔고를 채우러 가는 아침

  혼자 눈길을 걸어간

  고양이의 길을 본다


  나도 늘 혼자이다

  누군가는 그것이 나의

  약점이라고 말한다


  약점은 때로 장점이어서

  슬픔이나 막막함을

  다른 이가

  같이 겪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이

  위안이 되기도 한다


  발목까지 빠지는 눈길을 되돌아가

  허기졌을 배가 눈 위로 끌린

  새끼고양이의 길을 발로 다져준다   (p.36~37 전문)



  그림 딱 그려진다. 시인이 고양이를 참 좋아한다. 나도 고양이를 좋아해 이 시에 공감하는 것이 아니라, 세월이 흔적을 내 시인 조은이 발목을 잡는 남루함의 구덩이를 건너온 것을 직접 읽을 수 있어 공감했다. “늘 깨어 있으며 눈에 광채를 띄고 세상을 바라보는” 시인 말고, 조금 뒤에서 시간에 닳아 이제 부드러워진 곳을 쓰다듬는 일도 시인에게 마땅하지 않을까?

  어쨌든, 나도 시인의 아버지처럼 죽고 싶다. <얼룩>에서 나오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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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24-09-16 04:4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시집 가지고 있어요.
조은 시인의 산문도 재미있게 읽은 기억이 있습니다.

Falstaff 2024-09-16 09:10   좋아요 0 | URL
산문도 썼군요. 수필이겠지요. ㅎㅎㅎ 시만 쓰면 살기가 팍팍할 겁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