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차오 사전 1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44
한사오궁 지음, 심규호.유소영 옮김 / 민음사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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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은 민음사에서 “모던 클래식” 시리즈로 냈다가 시리즈를 접는 바람에 세계문학전집 444, 445번으로 갈아탔다. 모던 클래식 시절엔 한소공 작 <마교사전>이었다. 당시 읽어볼까 망설였었다. 이제 세계문학전집으로 다시 나온 걸로 보아 민음사가 이 작품에 나름대로 자신이 있다는 말이 아닐까? 이렇게 믿고 도서관에 희망도서 신청해 읽었다. 진작에 읽을 걸 그랬다. 명작은 아니더라도 재미있다. 표음문자를 사용하는 거의 유일한 나라, 넓은 땅과 다양한 민족, 무시무시한 번식력을 지닌 나라. 이 가운데 저 동정호洞庭湖 남쪽, 즉 후난성湖南省 멱라강 인근 마차오(馬橋)라는 산골 벽촌의 작은 마을 사람들이 사용하는 사투리와 주민들의 삶을 그린 “소설” 즉 허구다. 그 사람들이 사용하는 언어의 다양한 의미에 천착하지만 픽션인 만큼 어느정도 작가가 왜곡한 것일 수도 있으며, 주민들의 삶 역시 마찬가지. 그렇지만 작가가 풀어내는 구라를 그대로 믿고 따라가는 것도 나쁘지 않은 독법일 것이다.

  요새 내가 민음사를 영 같지 않게 보는 이유 가운데 하나.

  마차오 마을에 관한 내력을 소개하는 중에 이런 대목이 있다.

 

 “건륭 58년, 마차오푸에 마싼바오라는 자가 한 친척 집 잔치에서 갑자기 정신착란을 일으켰다. 그는 자신이 인간 어머니와 신견(神犬) 사이에서 태어난 진명천자(眞命天子)의 환생으로 연화태조 (蓮花太祖)인 자신은 연화국을 세워야 한다고 했다. (중략) 1959년 음력 정월 18일, 진간총병 (鎭竿總兵) 안투(몽골인), 부장 이싸나(만주인)가 병사 800명을 두 길로 나누어 진압에 나섰다.” (p.29~30)


  건륭 58년이면 조선 정조 시절로 1793년이다. 그때 일어난 반란을 중화인민공화국 시절인 1959년에 마오저뚱 시절에 진압했다고? 그럼 연화국의 존속기간이 1959-1793+1= 167년이란 얘기 아냐? 그럼 하나의 왕조로 봐도 되겠네? 내가 문제 삼는 것은 쪼잔하게 숫자 오타 하나가 아니다. 모던 클래식에서 낸 <마교사전>을 보면 확실히 이 내용을 다시 쓰긴 했지만, 한자어의 우리말 발음을 중국어 발음으로 고쳤을 뿐 내용은 전혀 손을 대지 않았다는 거다. 그러니까 말만 중판 또는 개정판이지, 공역한 역자 심규호나 유소영, 그리고 민음사에서 편집 일을 해 먹고 사는 자들은 그냥 날로 먹겠다는 듯, 어느 놈팽이 하나 꼼꼼하게 읽어보지 않았다는 뜻이다. 중판을 찍으면서! 개 잡아먹은 데 가서 곡하고 재배할 인간들.

  게다가 초반에 읽으면서 내가 지금 중국 후난성 찌그러진 작은 마을에서 쓰는 언어와 사람 사는 인류학적 이야기를 왜 궁금해하지? 라는 의심이 들기도 했다. <일야서>를 재미있게 읽어 한사오궁에게 호감을 갖고 있었으며, 만일 중국 독자라면 이 책 역시 흡족할 수 있겠지만 굳이 다른 나라 사람인 내가 읽을 필요가 있을까? 자꾸 이런 잡생각이 들기도 했던 걸 숨기지 않겠다. 다른 독자라도 크게 다르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런 단계만 극복하면 <마차오 사전>도 한사오궁, 중국 현대문학에서 한 획을 긋고 있는 문사의 필봉에 감탄하면서 읽을 수 있다. 표의문자가 한 단어 속에 품고 있는 다양한 의미, 그래서 글자 하나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심지어 많은 사람들의 목숨이 오락가락했던 유구한 역사를 지닌 집단이라 문자/언어에 대한 심각성이 다른 어느 나라 인종들보다 막중하리라는 건 분명하다. 거기다 언어로 먹고 사는 작가의 직업적 사색까지 보태졌으니 언어/문자에 관심있는 사람이라면 이 책을 읽어보는 일 역시 마땅하리라 싶다. 다만 요즘 학교에서 한문을 가르치지 않아 한자어에 멀미를 일으킬 확률이 높다. 괜히 정말로 읽었다가 욕이나 한 태배기 하지 마시고 신중히 생각하시기 권한다.


  촌사람들 사는 이야기야 채만식, 이기영, 이무영, 이문구 등을 보유한 우리나라 사람들한테 특별한 게 없으니 그냥 넘어가고 문자, 단어가 갖고 있는 색다른 이야기 몇 개만 풀어보자. 이 책을 읽은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제일 앞에서 이야기할 초나라 굴원의 고사. 초나라 궁에서 문서를 담당하는 그리 대단하지는 않았던 일을 하던 굴원이 머리를 산발하고 맨발로 멱라강변을 유랑하며 다니다가 시대를 탄하며 <어부漁夫>에서 이렇게 읊었다.

  “세상 모든 것이 탁한데 나만 홀로 맑고, 사람들이 모두 취했거늘 나만 홀로 깨어있네.”

  그리고 비가 갠 멱라강 흙탕물 속으로 퐁당 빠져 드런 한 세상, 접었다.

  세상에 이런 오만이라니. 세상 사람들은 굴원屈原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며, 심지어 우리나라 만화가 고우영도 <십팔사략十八史略>에서 굴원의 죽음을 추모했지만 평소에 나는 이이를 조금 한심스럽게, 많이는 오만방자한 인간의 전형으로 보기도 했다. 현대 중국인인 한사오궁은 마차오 사람들의 의견이라는 전제로 기원전 278년에(민음사의 연표는 도무지 믿지 못하겠으니 이걸 워쪄?) 굴원이 혼자 깨 있어 그 대가로 오히려 혼자 죽었으니 이 아니 어리석으냐고 주장한다. 즉 깰 성醒, ‘깨 있음’이 ‘어리석음’과 같은 의미로도 쓰인다는 거다. 중국에서도 마차오 사람들을 제외한 모든 중국인 가운데 ‘깨다’의 의미인 ‘성醒’에 좋지 않은 의미가 들어 있는 경우는 없다고 한다.

  이 ‘성醒’자와 같이 어울려 우리에게 늘 경각심을 주는 단어 ‘각覺.’ 두 글자를 합해 각성覺醒이라는 단어를 늘 사용하고 있어서 ‘각覺’이 좋은 글자인 줄만 알았다. 그런데 ‘각覺’은, 당연히 마차오 마을에 국한해서 하는 말이지만, “멍청함을 의미해 아둔하고 어리석고 혼란스러운 상태”를 가리키기도 한다. 그 사람들의 철학으로는 “깨어남이란 우둔함이며, 잠을 잔다는 것은 총명함을 의미”하니까. 한사오궁은 중국 현대사의 난관, 대약진운동, 반우파운동, 문화혁명 같은 것을 몸으로 겪으며 고달프고 소란스러운 역사 속에서 생존하려면 마차오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깬 상태를 말하는 성醒이나 각覺만큼 어리석은 단어를 또 발견하기도 쉽지는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저 먼 시절 굴원처럼 스스로 멱라강에 투신할 생각이라면 모르겠지만 말이지.


  다른 하나는 2권 198쪽에 나오는 ‘연상憐相’, 가련한, 슬픈 모습이다. 이걸 마차오 사람들은 ‘아름답다’라는 말로 쓴단다. 마차오에는 아름답다(미려:美麗)라는 말이 없다. 이에 한사오궁은 중국어 표현에서 아름다울 미美 자는 ‘연憐’과 인연이 많다고 주장한다. 가슴이 아플 정도로 아름다운 것, 연민의 정을 느낄 정도로 아름다운 모습. 이게 ‘연상憐相’이라니. 일본인 가와바타 야스나리도 슬플 비悲를 심미적 감각에 서린 아름다움으로 사용한 적이 많다고. 이 짧은 챕터를 읽으며 반가웠다.

  오래전 맬컴 라우리가 쓴 <화산 아래서>의 독후감에서 “오랜 세월 아리고 가슴 저며왔던 단어 ‘슬픔’의 진정한 의미와 ‘슬픔’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그만 잊어버려왔던 것은 아니었는가?”라고 멋을 한껏 부리며 썼던 적이 있었던 거다. 그러니 내가 이 챕터 ‘연상憐相’이 반가웠지 않았겠느냐는 말이지. 그래, 슬픈 것이 늘 아름다운 건 아니지만, 오히려 대부분의 슬픔은 궁상맞겠지만, 아름다운 건 거의 슬프다는 말이지. 그래서 연憐이건, 비悲건, 애哀건 간에, 한사오궁이건 가와바타건 간에 호모 사피엔스의 정서는 늘 통하는 것이겠지.


  우리나라 사람들이 만나면 자주 쓰는 말이 있다. “밥 먹었어?”

  마차오 마을 사람들도 늘 이렇게 인사한다. “밥 먹었어?”

  사람들은 밥을 먹었건 안 먹었건 간에 “예, 먹었습니다.”라고 대답하는 것이 상례. 우리나 마차오 사람들이나 다 그렇다. 그런데 만약 마차오 식이 아니라 곧이 곧대로 “밥 먹었니?” 라고 물었는데 “아니요, 안 먹었어요.”라고 대답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우리나라 같으면 “그래, 그렇구나.”하고 심상하게 지나갈 것 같다. 나는 일단 그렇게 물어봤으니 그걸로 끝난 거니까. 하지만 마차오 사람들은 조금, 아니, 많이 다르다. 어떻게 다른 지는 직접 확인해보시라. 2권 106쪽에 “밥을 먹다, 봄날의 용법”에 나온다. 재미있다. 웃음도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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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olcat329 2024-10-29 07: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넘 재밌어요. 이 책은 제목만 보고 무슨 내용인지 전혀 궁금하지도 않았거든요. 요즘 한자를 유심히 보곤 하는데 이 책 참 흥미롭습니다.
굴원이 강에 투신해 죽은 사실도 처음 알았네요.
민음사 유툽에서 책 광고는 참 열심히 하던데 문학전집의 퀄리티에도 좀 더 신경써주면 좋겠네요.
저도 동감하는 부분입니다.

Falstaff 2024-10-29 07:43   좋아요 1 | URL
한자에 관심이 있는 분은 무지 재미있을 듯해요. 저 촌동네 사람들 사는 모습도 잔잔하고요. ㅎㅎㅎ
민음사는 박맹호 사장의 유지를 이어가지 못하는 것처럼 보여 잠 아쉽습니다. 이제 저는 상당히 많이 포기했습니다. 의례 그러려니.... ㅋㅋㅋ

stella.K 2024-10-29 10:0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모던 클래식 표지 디자인도 예쁘던데 안 나오는군요. 민음사도 범우사나 동서문화사 꼴 나는 거 아닌가 싶기도 하네요. 그나마 요즘은 표지 디자인도 좀 바꾸고 자구책을 찾는 것 같기도한데 좀 미약하죠?
근데 학교는 이제 한문이란 과목이 없어졌군요. 그건 아닌 거 같기도한데. 근데 저는 왠지 팔님 리뷰 읽는데 점점 읽을 자신없다 쪽으로 빠져드는 것 같습니다. ㅎㅎ

Falstaff 2024-10-29 11:43   좋아요 1 | URL
모던 클래식 시리즈는 책등 글씨를 흰 색으로 써서, 눈 침침해지니까 이제 책꽂이에 꽂힌 책이 뭔지도 모르겠습니다.
민음사가 세계문학 시리즈를 5백번까지 내기로 오래전에 결정을 했다는데, 얼른 시리즈 끝내려고 예전 작품들을 막 올리고 있나... 이런 의심도 들더라고요. 원래 취지에 맞게 세대별로 번역해야 한다는 건 이제 개가 물어갔습니다. ㅋㅋㅋㅋ

유수 2024-10-30 09: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요새 학교에서는 한문을 안 가르치는군요. 저는 그럼 한문이 들어있던 마지막 교과과정 수료자 쯤 될는지. 아무튼 그래서 접으라고? 아니야.. 욕하면서 읽을까? 오락가락하다가 마지막 문단 보니까 너무 궁금해져서 책 담아둡니다ㅋㅋ 욕은 저한테 할거니까요 ㅋㅋ 읽다 보니 일자무식이어도 호모사피엔스의 정서 믿고 가보라는 말씀 같이 느껴지기도 하고 ㅋㅋㅋ
재밌는 책 이야기 너무 잘 읽고 갑니다.

Falstaff 2024-10-30 16:32   좋아요 1 | URL
우리말에 한자가 하도 많이 있어서 좀 알고 지내자는 의미로 가벼운 한문은 배웠으면 좋겠는데 아무래도 첫 시기라서 혼돈기가 필요하겠지요. 저도 한글전용에는 찬성합니다. 그런데 좀 천천히 했으면 더 좋지 않았을까 하는 심정이었고 지금도 그렇습니다.
ㅎㅎㅎ 늘 재미있게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아트풀
앨리 스미스 지음, 이상아 옮김 / 프시케의숲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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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앨리 스미스는 2011년에 나온 다섯번째 작품인 <데어 벗 포 더>를 읽은 후에 독특한 문장과 구성에 홀딱 반해서 연달아 <호텔 월드>, <우연한 방문객>을 읽고 좋아한 적이 있다. 비록 이후 사계절 시리즈의 첫 작품인 <가을>이 별로 탐탁하지 않았지만, 하여간 이름만 갖고 기꺼이 작품을 선택할 수 있는 작가 가운데 한 명으로 꼽는 데는 주저하지 않았다. <가을> 이후 조금 머뭇거리는가 싶다가 벌써 3년의 세월이 후딱 지나갔다. 그리고 눈에 보인 신간 <아트풀>. 놀랍게도 <데어 벗 포 더>를 출간한 다음 해인 2012년에 나온 것을 12년만에 번역한 책이다. 2022년 작품인 <이어지는 이야기: Companion Piece>가 2024년에 번역, 출간한 걸 보면 꽤 오래 걸린 셈이다. 왜 그랬을까? 뭘 알겠느냐만, 읽어보고 추리는 할 수 있었다. 소설인 듯 소설 아닌 듯, 그러나 소설인 작품. 즉 대중성 측면, 쉬운 얘기로 하자면, 팔릴 거 같지 않은 책이다. 전문가적 소양을 가진 다른 분들은 모르겠지만 내가 읽어본 감상을 말하자면 그렇다. 책 표지 사진은 영국에서 발간한 원서의 표지 사진과 같다. 근데 작품과 썩 어울려 보이지는 않는다. 어디까지나 보는 사람 마음에 따라 다른 것이니 믿으실 필요는 없다.

  이 책은 2012년 초에 앨리 스미스가 옥스포드 대학에서 돈 많은 유대인 출판업자 바이덴펠트를 초빙교수로 모셔오는 것을(옥스포드에서 가장 규모가 큰 장학기금을 공동 설립했으니 이 정도야 성의표시에 불과하긴 하겠지만.) 기념하기 위한 강연회에 참가한 적이 있는데, 이때 작가는 네 가지 주제, ①시간On Time, ②형식On Form, ③경계On Edge, ④제안 및 반영On Offer & On Reflection이었으며, 당시 강연을 위해 작성한 자료에 스토리를 담아 소설 작품으로 만든 것이 <아트풀>이다. 그리하여 네 부part로 구성된 소설도 마찬가지로 시간, 형식, 경계, 그리고 제안 및 반영이란 제목을 달고 있다.


  두 명의 인물이 있다. 죽은 연인을 그리워하는 여자. 그리고 이 여자 앞에, 옆에 심지어 같은 침대 위에 아직도 있는 것 같은 바로 그 죽은 연인. 여기서 잠깐. 작가 앨리 스미스는 커밍 아웃을 한 레즈비언이다. 이 죽은 연인을 남자라고 생각할 이유는 1도 없다. 작가가 레즈비언이니까 죽은 연인도 여자겠거니 생각할 이유 역시 1도 없다. 그냥 연인으로 여기자. 이 연인이 죽기 전에 강연을 했는데 그걸 위한 자료가 우연히 시간, 형식, 경계, 제안 및 반영으로 되어 있을 뿐. 이 강연이 유럽의 비교문학을 다룬 것. 따라서 전체의 반을 넘어서는 분량을 시공 초월한 유럽 각지, 심지어 (라틴 포함)아메리카까지 시인, 소설가의 작품을 인용, 비교하고 있어서, 스미스가 자료로 쓴 작품을 몽땅은 아닐지언정 웬만큼 읽어보지 못한 독자들은, 아마, 독립감 좀 느낄 걸? 아니면 자만심이 좀 상할 수도 있고.

  책 제목 아트풀Artful이 뭐냐 하면, 사전적 의미로 기교적인, 교묘한, 교활한, 잔재주 좋은 정도로 생각할 수 있는데, 그건 아니고, 찰스 디킨스가 쓴 <올리버 트위스트>의 조연 가운데 한 명인 잭 도킨스의 별명 ‘아트풀 다저’에서 가지고 왔다. 즉 <올리버 트위스트>를 읽지 않은 독자는 초장부터 김이 새면서 앞 문단에서 말한 독립감, 그리고 자만심에 스크래치가 갈 수밖에 없다. 아트풀 다저가 누군데? <올리버 트위스트>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데? 괜히 묻지 마시고 얼른 이 책을 덮어 버리고 <올리버 트위스트>를 읽은 다음에 다시 오시라. 그러면 그걸로 끝나냐고? 천만의 말씀. 내 경우엔 외국 사람이 쓴 시는 읽지 않는다. 근데 소설만큼 많은 시인이 등장하고, 시 구절, 그리고 외국시를 읊을 때 빠지지 않는 두운, 각운 같은 걸 무수하게 이야기하건만, 두운 각운을 더듬더듬 감각이라도 할 수 있게 원시도 첨부했으면 도움이 되겠으나, 애써 우리말로 번역한 시에서 우리나라 독자들이 어떻게 우리글로 번역한 시를 다시 뇌 속에서 영어로 바꾸어 두운, 각운을 알아채고, 그것도 모자라 거 참 귀신이 곡을 할 만큼 절묘하구나, 경탄할 수 있겠느냐는 말이지. 예를 들어서 영국(미국? 아 몰라, 몰라!)에 윌리스 스티븐스라는 시인이 있는 모양이다. 그가 이런 시를 썼겠다:



  나는 테네시에 병을 두었다.

  둥근 병을 언덕 위에 두었다.

  병은 제멋대로 펼쳐진 황무지가

  언덕을 둘러싸게 했다.


  황무지가 그것을 향해 솟아올라

  주변으로 뻗어나갔다, 더는 야생이 아니었다.

  병은 땅 위에서 둥글었고

  키가 크고 공기가 드나드는 항구였다.


  병은 모든 곳을 지배했다.

  병은 광택이 죽고 닳아 있었다.

  새나 수풀을 선뜻 내어주지 않았다.

  테네시의 다른 무엇과도 같지 않았다.



  이렇게 인용하고 앨리 스미스가 말하기를,

  “시는 그 경계를 넓혀 그 자체의 형식적인 요구사항에서 벗어나 음절적으로나 운율에 대해 우리가 기대하는 관점에서 형식이 수행해야 할 역할을 자체적으로 거부한다. ‘수풀’을 위한 운율은 어디에 있을까? 그런 건 없다. ‘황무지’를 위한 운율도 없다. ‘테네시’와 유일하게 운율이 맞는 것은 ‘테네시’이다. ‘언덕’도 마찬가지이다. 이 시에서 운율은 ‘공기air’와 ‘모든 곳everywhere’을 ‘닳아 있었다hare’와 연결시킨다.”

  어떠셔? 읽을 만하셔? 무엇을 말하려는 지는 알겠다. 운율이 그리 중요하지 않은 시도 있다는 거겠지. 하필 이 시를 셰익스피어하고 견주어서 ‘쥐랄’이지만. 아니, 그건 내가 저 유라시아 대륙의 동쪽 끄트머리에 있는 작은 땅의 일개 독자이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할 수 있는 거다. 서쪽 끄트머리 섬나라 지식인은 이것을 타당하게 생각할 수도 있는 거니까.


  하여간 소설의 반이 넘는 분량을 이렇게 나처럼 독립감과 자만심에 상처를 입으면서 (말이 그렇다는 거지 실제로는 이 상처가 별로 크지 않다. 돈 주고 산 책이 아니라 도서관에서 빌려 읽었거든.) 인내심 함양의 시간을 견디어야 한다. 그리고 여기에 보태는 이야기, 이야기들.

  죽은 연인이 실제로, 아직도 자신의 옆에 있다고, 정말로 눈에 보이는 환시를 심각하게 겪고 있는 화자. 갑자기, 난데없이 삶에서 사라진 것처럼 보이는 연인. 칫. 그러나 생각해보라. 삶이란 얼마나 하찮은 것인지. 태어나기 전의 아무것도 없음과 죽은 이후 아무것도 없음의 무한대라는 거대함에 비하면. 그러나 그건 철학자의 이야기이고 당장 연인을 상실한 여자는 비어있음을 견디지 못해, 상점에서 소소한 물건을 훔치고, 집안에서 중요한 부품을 내다 버리고, 그걸 죽은 연인이 한 행위라고 덤태기를 씌워버린다. 호텔 로비에서 술도 마시지 않았으면서 난리를 죽이기도 하고. 뭐 그렇다는 거다. 스코틀랜드, 더 크게 영국의 대표적인 모더니스트이기도 한 앨리 스미스가 이이 특유의 그럴 듯한 허구를 만들어내는 것까지는 참 좋은데, 암만해도 소양이 부족한 극동의 독자한테 너무 전문적인 비교문학적 자료를 팽개쳐버린 느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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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하수 2024-10-28 21:2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럼에도 끝까지 읽으셨네요~~^^
저 같았음 그냥 팽개쳐버렸을 듯해요.
앨리 스미스 ... <가을> 읽다가 팽개쳤는데 다시 돌아가지지가 않아요.
몹시 지루하더라구요!

Falstaff 2024-10-29 05:53   좋아요 1 | URL
저도 <가을>이 별로더라고요. 근데 전작들은 꽤 좋지 않았나요? <데어 벗 포 더>, <우연한 방문객>, <호텔 월드> 다 마음에 들었다가 가을에서 확 얹혀 버렸습니다.
저는 좀 더 스미스를 읽어보겠습니다. ^^
 
꽃피는 노트르담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50
장 주네 지음, 성귀수 옮김 / 문학동네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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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년 전 이이가 쓴 <도둑 일기>를 읽고, 그게 내가 읽은 주네의 첫번째 작품이었는데, 지금은 그때 책 읽고 어떤 기분이 들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지만, 이후 여기저기 기웃거리면서 조금씩 이이와 관련한 이야기를 들어보니까, 나는 전혀 경험하지 못한 다른 세상의 것들을 작품으로 만들어 그런 텍스트를 처음 접한 (나 같은) 독자들은 이색적인 경험을 한 것처럼 느낄 수 있었겠다, 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면 <꽃 피는 노트르담>은 읽지 않는 것이 좋았을 것을 그랬다. <도둑 일기>와 근접한 거리에 있는 <꽃 피는 노트르담>을 읽으니, 이젠 색다른 바도 없고, 주네의 표현법은 <도둑 일기>에 비해 훨씬 더 노골적이라 사드 후작의 책을 읽는 기분까지 들었는데, 그게 무슨 말이냐 하면, 야하거나, 차라리 음란하지도 않고, 읽어주기 드러웠다는 말이다.

  1942년의 프랑스 파리. 말은 비시 괴뢰정부가 통치했다지만 실제로는 독일 나치 군대가 점령하고 있던 시절이다. 이때 장 주네는 절도혐의로 체포되어 파리 근교에 있는 프렌 교도소에 미결수 신분으로 들어가 있었다. 내가 10년 전에 읽었을 때도 책의 제목이 <도둑 일기>더니 이번에도 절도, 도둑질을 해 교도소에 들어가 어떤 판결이 떨어질 지 노심초사하는 장 주네. 레지스탕스 하다가 사형당하는 걸 바랄 지 모르지만 시민들이 전부 다 레지스탕스면 그것도 좀 재미없으니 누군가는 이렇게 악역도 해줘야 사람 사는 꼴이 난다. 장 주네는 이 교도소에서 젊은 사형수를 기리는 시를 쓴 바 있다. 프랑스의 사형은 장 가뱅과 알랑 들롱이 주연을 한 1973년 영화 <암흑가의 두 사람>에서도 단두대 형을 원칙으로 한다. 아무리 전시라도 아무나 사형에 처할 수 있나 어디. 그럼에도 단두대의 인정 없는 칼날에 목이 달아난 인간은, 당연히 살인범이었는데, 장 주네가 시를 써서 넋을 기린 사형수를 이번엔 별명으로 “꽃피는 노트르담”이라고 붙여 그를 애도하는 소설을 쓴 것이 바로 이 작품이다. 장 주네의 첫번째 소설이기도 하다.

  훗날 이 작품을 장 콕토가 읽더니, 흠, 거 참 괜찮은 젊은 작가로구먼, 칭찬을 해주어 주네의 창작에 본격적인 모터를 달아주었다고 하는데, 콕토, 뭐 유유상종이니까 그렇다고 치자.


  장 주네는 자신이 “꽃피는 노트르담”이라고 별명을 지어줄 살인범을 만들기 위하여 작품의 초장부터 초를 친다. 그리하여 네 명의 진짜 살인범을 작품 첫 장부터 소개하기에 이른다:

  오이겐 바이트만. 독일인으로 프랑스에서 여성 두 명과 남성 여섯 명을 살해하고 금품을 갈취한 죄로 1939년에 공개 처형된 인물이다. 이 공개처형 당시 최고의 드라큘라 가운데 한 명이었던 크리스토퍼 리도 구경을 가 장 주네의 말에 의하면 신문지상에 “자동식자기로 무한 증식된 아름다운 얼굴”이 뎅거덩 떨어지는 장면을 목격했다. 그때 리의 나이 열일곱 살이었단다.

  바이트만의 살인 조금 앞서 정부를 살해한 검둥이 “태양 천사”

  조금 후에 애인 에스코데로를 살해하고 천 프랑 가까운 돈을 탈취했다가 스무 살(주네의 오류. 실제로는 스물다섯 살) 생일을 맞아 목이 달아난 군인 모리스 필로르주. 필로르주는 단두대에 목을 디민 상태에서도 형 집행자한테 깐죽거리려다가 입도 떼기 전에 1톤의 칼날이 떨어졌는데, 여기서 주목. 애인의 이름이 “에스코데로” 남자 이름이다. 그러니까 필로르주는 널리 알려진 장 주네와 비슷한 성적 취향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꽃피는 노트르담>을 대표하는 건 절도, 살인 같은 범죄라기보다 남성간 동성애를 다룬 퀴어 문학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주인공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하여간 타이틀롤을 맡은 “꽃피는 노트르담”의 모델이 바로 모리스 필로르주라고 봐도 무방할 듯하다.

  마지막으로 반역을 위한 반역을 저질렀다가 총살당한 앳된 해군 소위.

  이렇게 네 명의 사형수를 거론하면서 이들의 사형집행 모두가 아름답고 음침한 꽃들이 경이롭게 피어난 것이라고 주장한다. 화자 장 주네는 프렌 교도소 내에서 신문과 잡지에 실린 사형수들의 사진을 오려 20여 장을 모은다. 그리고 빵을 씹어 밀가루의 끈기를 이용해 풀을 만든 다음 벽에 매달린 생활수칙 보드 뒷면에 붙여놓고 시간 날 때마다 그들의 공허한 눈빛을 보면서 흥분한다.

  “이제는 죽은 몸인 저 살인자들은 그럼에도 나에게로 와주었다. 애도의 별들 하나씩 나의 감방으로 떨어져 그때마다 내 가슴 몹시 뛰고, 내 가슴은 두방망이질한다. 두방망이질이 도시의 항복을 알리고자 둥둥거리는 북장단이기나 한 듯 말이다. 이어서 열이 오른다. 감방 위로 독일 비행기 지나다니고 아주 가까이 떨어지는 폭탄 소리가 들리는 가운데, 몇 분간 온몸 뒤트는 경련으로 시달리던 그때 그 고열 못잖다.”

  사드 후작하고 정말 비슷하지? 조국 프랑스의 수도 파리가 함락되려고 독일 폭격기에서 폭탄이 떨어지는 것처럼 살인범들의 사진을 보면 흥분을 하고, 더럽고 거칠고 이와 벼룩이 들끓는 모포 밑에서는 경직된 성기가 정액의 분출을 사납게 요구하는 광경. 아오, 이거 참. 어디 읽어주겠느냐는 말이지, 드러워서. 이이가 하녀 주네의 사생아로 태어난 지 7개월만에 버려져 고아원에서 컸다가 열 살 때 처음 도둑질을 해 소년원에 들어간 이후, 앵벌이, 거지, 소매치기, 절도, 마약 등등 어떻게 보면 생존을 위한 작은 범죄를 저지르는 환경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했다. 혹시 동성애도 몸을 팔아먹고 살기 위한 방편으로 시작했다가 습득한 성적 취향으로 발전했을 수도 있지 않을까? 이 방면에 대해서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한다. 완전히 짐작일 뿐이다.


  사형수들에 대한 열광은 그러나 얼마 가지 않는다. 저 뒤에 1937년 7월 7일 밤에 보지라르가 12번지 아파트 3층에 사는 예순일곱 살의 동성애자 라공 씨의 집에서, 라공의 연장이 말을 듣지 않는 바람에 돈을 벌지 못하게 되자 파란 넥타이로 목을 졸라 살해해버렸다가 1942년에 체포당한 1920년생, 장 주네보다 열 살 아래의 연인이자 본명 아드리앵 바이용이 목이 달아나는 컷에서 한 번 더 나올 뿐.

  이 작품은 장 주네가 감방 안에서 썼다. 당연히 외부에 나갈 수 없는 고립된 장소.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음을 감안하면 문학적 소질을 가진 작가는 감방 안에서 오직 상상력 하나로 소설을 썼을 것이다. 그러니 서사는 연대기적 성격을 갖기가 힘들었을 것인데, 그것을 주네는 자신의 인격을 쪼개는 방식으로 다양화했다. 화자인 장 주네는 감방 안에서 모든 걸 총괄하고, 그의 도플갱어 격인 디빈이라는 인격체를 만들어냈다. 디빈. Divine. 신성한 “여자.” 주네가 남자인데 도플갱어 디빈은 여자? 그렇다. 애인을 먹여 살리기 위하여 남자한테 여성역할로 몸을 파는, 그러니까 바텀 역할을 하는 남자. 스스로 자신을 여성, ‘마짜’라고 인식한다. 같은 마짜를 만나면 거의 여성의 대화를 하고.

  “마짜?” 사드가 쓴 <…120일>을 보면 공작, 주교, 법원장, 징세청부인이 저 깊은 산 속 외딴 성으로 환락을 좇아 갈 때 여덟 명의 소녀와 여덟 명의 소년, 그리고 거대한 페니스를 달고 다니는 네 명의 마장(馬藏: 남색용 남자)을 데리고 간다. 이 마장을 사드 전문가이자 이 책을 번역한 성귀수는 ‘마짜’라고 한 것 같다. 그런데 “꽃피는 노트르담” 아드리앵 바이용은 탑과 바텀을 가리지 않는 작자. 역시 주네의 도플갱어 디빈의 애인 가운데 한 명이다. 171센티미터, 71킬로그램, 계란형 얼굴, 금발, 푸른 눈, 가무잡잡한 피부, 건강한 치아, 발기시 24센티미터, 굵기 10센티미터. 별 게 다 나오지? 뒤에 가면 ‘세크 고르기’라는 흑인 애인도 하나 생기는 데 신장 177cm, 88kg, 발기시 28cm, 굵기 14cm. 뭐 그렇다는 거다.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그냥 그렇다는 건 아니고, 굵기가 14면, 이게 어디여? 대가리여, 줄기여? 혹시 작대기여? 14면 직경이 4.6cm 거든. 아무것도 아닌 거 같은데 책상 서랍 속에서 자 꺼내 직경 4.6cm가 얼마나 되는 지 한 번 보시하고, 글쎄.

  더 이야기하려니까 좀 머뭇거려진다. 뭘 더 말씀드릴까? 남자 셋이서 하는 거? 방법? 체위? 아이고, 이쯤에서 접는 게 좋겠는데, 아니 그렇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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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24-10-25 04: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음 주 삽질:
월요일. 앨리 스미스, <아트풀>
화요일. 한사오궁, <마차오 사전>
목요일. 안현미, 《미래의 하양》
금요일. 앨러스데어 그레이, <가여운 것들>

잠자냥 2024-10-25 07:2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래도 샀으니까 저는 일단 읽는 걸로….😭

Falstaff 2024-10-25 07:42   좋아요 1 | URL
그런 경우가 한두권입니까. 저도 읽다가 덮은 책만 골라도 한 리어카는 될 듯하네요. ㅋㅋ

stella.K 2024-10-25 10: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헉, 정말요? 팔님은 손에 드시는 책마다 다 읽으시는 줄 알았어요. 저는 유독 별 4개가 많은 건 그냥 읽고 좋았던 것만 쓰지 안 좋은 건 힘들어서 안 쓰거든요. 물론 몇권 읽지도 않지만... 근데 팔님은 안 그러시잖아요. ㅋ
주네 유명한가 보던데 그렇지 않나 봅니다. 참고하겠습니다.^^

Falstaff 2024-10-26 06:00   좋아요 1 | URL
아, 그럼요. 올해만 해도 다 못읽고 덮은 책이... <먼고 해밀턴>하고 두 권짜리 <번화>, 그리고 또 뭐 있었나... 아마 한 권 정도 더 있을 겁니다. 701호나 702호나 다 비슷하다니까요.
장 주네, 유명합니다. 저하고 안 맞는 쪽으로요. ㅋㅋㅋㅋㅋㅋ

그레이스 2024-10-28 09: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뒷부분 보니까 안읽어도 될듯요^^

Falstaff 2024-10-28 19:02   좋아요 1 | URL
ㅎㅎㅎ 사람마다 취향이 다르니까 뭐라 하기는 그런데, 저는 권하지 못하겠습니다.
 
결혼 계약 을유세계문학전집 136
오노레 드 발자크 지음, 송기정 옮김 / 을유문화사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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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치산>: 오노레 드 발자크. 이 진정한 골통 보수 꼰대가 노래하는 뽕짝에서 19세기 프랑스의 위대한 낭만주의가 싹을 트는 것이렸다? 당대에 누가 있어 인간의 마음에 도사린 본성을 이렇게 노골적으로 드러낼 수 있었느냐는 말입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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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으로부터 멀리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47
피터 케리 지음, 황가한 옮김 / 민음사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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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터 케리는 부커 상을 두 번 받은 화려한 경력을 자랑하는 오스트레일리아의 대표 작가이다. 나도 이이의 책은 <오스카와 루신다>, <켈리 갱의 진짜 이야기> 이렇게 두 작품을 읽어봤다. 장편 속의 디테일한 에피소드를 참 재미있게 묘사해 읽는 맛이 있으나 아쉽게도 나하고는 별로 맞지 않았다. <오스카와 루신다> 독후감에도 썼다시피, 무수하게 많은 재미난 에피소드를 다 합친 ‘작품’으로는 나를 흥분시키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런 것을 작가와 독자의 합이라고 그러는 거 아닌가 싶다.

  미리 이야기해버리면 김이 조금 빠지겠지만 이왕 말 나온 김에 계속 이어가자면, <집으로부터 멀리> 역시 마찬가지다. 아주 흥미로운 두 가지 이야기를 두 명의 화자를 통해 꾸려가는데, 잘 나가다가 난데없이 세상에 이런 우연이 있나, 싶은 마음이 들어 그만 김이 새버렸다. 그 우연이 뭐냐고? 뜸 좀 들인 다음 차차 이야기하겠다.


  멜버른에서 백여 킬로미터 떨어진 작은 도시 배커스마시 토박이 아이린이 첫번째 화자이다. 아이린은 아버지의 귀여운 새앙쥐로 유아기와 청소년기를 보낸, 촌동네 수준에서 유복한 집안의 둘째이자 막내딸이었다. 사춘기를 지나 이제 어엿한 그러나 눈에 띌 정도로 미인은 아닌 자그마한 여성으로 컸을 때, 아이린은 160센티미터가 채 되지 않는 작고 사랑스러운 청년한테 청혼을 해 아버지가 기함을 하게 만들었다. 1940년대 기준으로 보통 수준의 키인 159센티미터였던 언니 베벌리는 유명 호주풋볼(미식축구보다 더 거친 오스트레일리아만의 스포츠) 선수, 근육질 거구의 남자와 약혼과 파혼을 거듭하다가 결국 서른 시간의 진통 끝에 큰 아이를 출산했지만, 두고두고 동생 아이린한테는 도움이 되지 않을 존재였다.

  작고 사랑스러운 청년이 어떻게 아이린의 짝이 됐느냐 하면, 청년의 이름이 티치 봅스였는데, 이제 아이린의 집안 사정이 좋아지자 어머니가 아버지한테 포드를 사달라고 이야기했고, 아버지도 속으로 은근히 바라는 바였는지 흔쾌하게 허락을 해, 차 세일즈맨 와일드 댄, 댄 봅스를 불러 구매협상을 했던 것이 연분의 시작이었다. 댄 봅스는, 우리나라에서 차 사면 세일즈맨이 바닥 깔개 해주고, 유리 필름 해주듯이, 당시에 포드를 사면 면허를 딸 때까지 운전 교습을 해주겠다고 일종의 끼워팔기를 했고, 이 조건으로 운전교습을 해줄 자기 아들 티치 봅스를 빅토리아주 절롱에서 배커스마시로 오게 했던 거였다. 그렇게 작고 사랑스러운 티치가 아이린의 집에 하숙을 하기 시작했으나, 정작 차를 사달라고 했던 어머니가 갑자기 세상을 뜨는 바람에 포드 구입은 갑자기 어영부영하기 시작했고, 티치도 이 와중에 슬그머니 짐을 싸 절롱으로 돌아가기도 좀 야박한 거 같고, 이 집에 그냥 머물자니 그것도 좀 어색해, 가족 가운데 그나마 운전을 배울 여유가 있는 유일한 사람인 아이린한테 교습을 해주면서 찌리릿 또는 파바박, 다들 아시지? 전기가 통했던 거다. 그런데 아이린이 운전에 소질이 있어도 보통 소질이 있는 게 아니었다. 원래 운전은 앉아서 버티는 힘이 있어야 하는 거란다. 이건 땅덩이가 워낙 큰 오스트레일리아 기준이다. 이에 맞게 딱 바라진 엉덩이를 가지고 있는 아이린은 여기에 놀라운 순간 판단력까지 지녀 티치도 감탄할 정도였다나? 하여간 이들은 아이린이 운전면허증을 딴 날 결혼을 했고, 160킬로미터 떨어진 워러걸까지 아이린이 직접 운전을 해 첫날밤을 치룬 다음, 베언즈데일로 이사를 갔다.

  시아버지짜리 댄 봅스가 문제적 인물 가운데 한 명인데, 댄 봅스, ‘위험한 댄’이 아이린한테 어떻게 했는지 모르겠지만, 아이린은, 결혼 전이겠지, 배커스마시 친정집 현관에 있는 코트걸이 앞에서 위험한 댄, 존경하는 시아버지 댄 봅스 씨한테 오지게 따귀를 날린 적도 있다. 이후 아이린은 시아버지 댄이 남도 아닌데 남보다 못한, 남도 아니면서 남보다 더 못하면 뭐야? 웬수로 여기기 시작했다. 댄은 심지어, 오스트레일리아에서는 상상도 하지 못하게, 아들 며느리가 신혼살림을 시작한 하숙집이나 셋방에 쳐들어와 침실 바로 옆방에 침대를 깔고 드르렁 드르렁 코를 골기도 했으니 며느리 입장에서 웬수 맞지? 티치가 베언즈데일에서 차 세일즈맨을 하며 근근이 모은 돈으로 처가가 있는 베커스마시로 돌아가 자기가 직접 포드 딜러를 해보고자 했을 때도 위험한 댄은 온갖 것을 고물 차에 싣고 와 그걸 아들에게 떠 안기고 몇 푼을 요구하기도 했다. 어쩌면 아들 하는 일에 사사건건 그렇게 어깃장을 놓기만 하는지 읽는 독자도 참 얄미울 정도다. 그러다가 혹시 나중에 아버지가 며느리 아이린이 모르는, 이들을 위한 큰 뒷바라지를 준비하는 건 아닐까? 이런 생각을 할 찰나, 결코 이 비슷한 미덕을 한 번도 보여주지 않은 댄은, 몇 년 전 사부인이 그랬듯이 갑자기 급사해버리면서 저 세상으로 가면서까지 부부의 앞길을 콱 막아버린다. 진짜 이런 웬수도 없다 싶다.

  무슨 일이냐 하면, 이때는 아이린과 티치 봅스 사이에서 딸 이디스와 아들 로리가 제법 자랐을 1954년이었는데, 베커스마시의 딜러 상점을 위하여, 또는 상점을 시작하면서 광고 비슷한 효과를 내려고 오스트레일리아에서는 가장 인기가 높은 자동차 랠리, 사실은 랠리도 아니면서 혹독한 오스트레일리아를 일주하는 대회 “레덱스 테스트”에 참가했을 때였는데, 시아버지, 위험한 댄도 같은 경기에 출전하면서 다양한 사달을 만들었던 거다. 작가 피터 캐리가 아이린과 티치의 체구를 작게 설정한 건, 다른 참가 차량은 메인 드라이버와 코드라이버 두 명이 탑승하지만, 이들의 제너럴 모터스 차에는 운전을 할 부부와 지도를 읽을 네비게이터 윌리 박후버, 이렇게 세 명이 탈 것이기 때문이었다. 셋이 타긴 하는데 중량으로 치면 다른 차의 두 명과 비슷해서 연비와 차의 부담에 차이를 없앨 수 있었다.


  그러면 이제 새로이 등장하는 윌리 박후버에 관해 이야기해야 하리라. 어려서부터 스릴을 느끼기 위해 경솔한 짓을 했던 것 같다. 우스운 짓을 하다가 2층에서 떨어져 어깨에 큰 흉터가 생기기도 했을 정도로. 장로교 목사의 아들이지만 좀 분방하게 성장해 육체적으로 애덜리나 캐이니그에게 끌린 것도 이런 욕망 때문 아니었을까 싶다. 둘은 십대 시절에 연애를 시작해, 당연히 섹스를 했고, 그때만 해도 적당한 성교육이 미흡했던 시절이라 덜컥 임신을 해버렸다. 이 시절 윌리는 더없이 만족한 직장인 도서관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함께 일하던 지도 전문가 사서인 서배스천이 도움, 쉽게 말하자면 적지 않은 돈을 주고, 알선도 해주어 임신중절 수술을 받았다. 그러나 임신은 한 번만 하고 마는 게 아니라서, 애덜리나는 다시 아이를 갖게 됐고, 윌리 역시 적법한 나이가 됐으니 목사 아버지한테 이실직고하고 결혼서류에 인감도장을 눌러 찍었다. 여기까지는 하나도 이상하지 않다.

  이들 부부에게는 매디슨이라는 이름의 남자 간호사 흑인 친구가 있었다. 미국인이었다. 나중엔 의사 공부를 해서 정식으로 의사가 된다. 그건 나중 일이고, 이제 애덜리나가 진통을 하기 시작해 분만실에 들어가 아들을 낳았는데, 마음이 급한 윌리가 의사를 만나는 순간, 의사는 심각한 얼굴을 한 채 애덜리나와 아이를 보여주었고, 아이는 누가 봐도, 흑인이었다. 대경실색한 윌리. 그는 그 길로 고향 애들레이드에서 도망쳐버렸다. 세상에. 죽도록 사랑했던 아내 에덜리나가 나의 둘도 없는 절친 매디슨의 아이를 낳다니. 그는 완벽하게 타지인 배커스마시로 와 나름대로 정착했다. 초등학교 교사로 일하면서 맬버른의 라디오 방송 “디지의 라디오 퀴즈쇼”에 출연해 소소하게 출연료도 받았다. 그러나 아이의 양육비, 아내의 생활비 같은 건 물론이고 단 한 번의 연락도 하지 않고, 모든 우편물도 거부하며 틀어박혀 살고 있었다. 아이린과 티치 봅스 가족이 옆집에 이사오기 전까지는.

  윌리가 봅스 부부를 만났을 때는, 바로 옆집에 사는 이웃이니까 안 만날 수도 없는 노릇이긴 하지만, 학교에서 유난히 말썽을 부리는 베넷 에지의 발목을 잡고 2층 교실의 창문 밖으로 대롱대롱 매다는 바람에 정직을 당해 처벌 심사를 받고 있던 중이었다. 당시엔 유급 정직이었으나 나중에 무급으로 떨어지다가 결국엔 해고를 당하고 말지만. 하여간 봅스 부부와 친해지면서 윌리의 지도 읽는 재주와 오스트레일리아의 지리적 특성에 대한 놀라운 지식을 유심히 관찰한 티치 봅스가 그를 위대한 랠리인 레덱스 테스트에 네비게이터로 초대하면서 윌리는 소설의 두번째 화자가 될 자격을 얻었다.

  좋다. 확 말해버리겠다. 윌리는 박후버 목사의 적자, 독일인의 후예, 즉 백인이 아니었다. 잉글랜드 목장주가 오스트레일리아 선주민 여성을 강간해 나은 아이로 백호주의를 외쳤던 정부가 강제로 선주민한테 빼앗아 가 목사에게 보낸 거였다. 반 흑인, 반 백인이며 흰 쪽을 많이 탁한 아이를 굳이 흑인이라 할 필요를 느끼지 않아 정말 라인강변에서 이민 온 백인으로 키워진 흑백. 그러면? 뭐긴 뭐야, 애덜리나가 낳은 흑인 아이도 윌리의 아들이었던 것이지.

  여기서 오스트레일리아의 선주민 약탈과 학살, 즉 다른 형태의 식민지배 문제가 대두된다. 그리고 어쩌면 이 문제가 소설에서 가장 하고 싶었던 이야기일 수도 있다. 그것을 위하여 작가 피터 캐리는 윌리를 자신의 진짜 고향, 저 중서부 지역의 황량하기 그지없는 목장지대로 보내야 했고, 그 방법으로 레덱스 테스트의 네비게이터로 만들었을 수도 있다. 하여간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은 결과 드디어 윌리는 자신의 원래 터전을 찾아가는 기적을 만드는데, 이거 세상에 이런 우연이 또 있을 수 있을까 싶은 거다. 다른 곳도 아니고 오스트레일리아 대륙에서 말이지. 차라리 대천 앞바다 모래사장에서 와이셔츠 단추를 찾는 게 더 빠르지 않을까? 이거 하나만 아니라면 정말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책이다.

  작고 아름답고 착한 티치 봅스? 이 남자가 위험한 댄의 아들이잖은가. 작고 착한 티치 봅스의 변신을 보는 것도 작은 즐거움 가운데 하나일 수도 있다. 세상 사는 게 다 그렇지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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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24-10-24 06:04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원주민/이민자 갈등을 포함한 오스트레일리아의 대표작으로 패트릭 화이트 작품 <전차를 모는 기수들>을 권한다. 패트릭 화이트는 작품의 품질에 비해 우리나라에서는 유독 안 읽히는 작가, 작품 아닐까 싶어 아쉽다. 심지어 노벨 문학상 수상자인데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