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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으로부터 멀리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47
피터 케리 지음, 황가한 옮김 / 민음사 / 2024년 8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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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터 케리는 부커 상을 두 번 받은 화려한 경력을 자랑하는 오스트레일리아의 대표 작가이다. 나도 이이의 책은 <오스카와 루신다>, <켈리 갱의 진짜 이야기> 이렇게 두 작품을 읽어봤다. 장편 속의 디테일한 에피소드를 참 재미있게 묘사해 읽는 맛이 있으나 아쉽게도 나하고는 별로 맞지 않았다. <오스카와 루신다> 독후감에도 썼다시피, 무수하게 많은 재미난 에피소드를 다 합친 ‘작품’으로는 나를 흥분시키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런 것을 작가와 독자의 합이라고 그러는 거 아닌가 싶다.
미리 이야기해버리면 김이 조금 빠지겠지만 이왕 말 나온 김에 계속 이어가자면, <집으로부터 멀리> 역시 마찬가지다. 아주 흥미로운 두 가지 이야기를 두 명의 화자를 통해 꾸려가는데, 잘 나가다가 난데없이 세상에 이런 우연이 있나, 싶은 마음이 들어 그만 김이 새버렸다. 그 우연이 뭐냐고? 뜸 좀 들인 다음 차차 이야기하겠다.
멜버른에서 백여 킬로미터 떨어진 작은 도시 배커스마시 토박이 아이린이 첫번째 화자이다. 아이린은 아버지의 귀여운 새앙쥐로 유아기와 청소년기를 보낸, 촌동네 수준에서 유복한 집안의 둘째이자 막내딸이었다. 사춘기를 지나 이제 어엿한 그러나 눈에 띌 정도로 미인은 아닌 자그마한 여성으로 컸을 때, 아이린은 160센티미터가 채 되지 않는 작고 사랑스러운 청년한테 청혼을 해 아버지가 기함을 하게 만들었다. 1940년대 기준으로 보통 수준의 키인 159센티미터였던 언니 베벌리는 유명 호주풋볼(미식축구보다 더 거친 오스트레일리아만의 스포츠) 선수, 근육질 거구의 남자와 약혼과 파혼을 거듭하다가 결국 서른 시간의 진통 끝에 큰 아이를 출산했지만, 두고두고 동생 아이린한테는 도움이 되지 않을 존재였다.
작고 사랑스러운 청년이 어떻게 아이린의 짝이 됐느냐 하면, 청년의 이름이 티치 봅스였는데, 이제 아이린의 집안 사정이 좋아지자 어머니가 아버지한테 포드를 사달라고 이야기했고, 아버지도 속으로 은근히 바라는 바였는지 흔쾌하게 허락을 해, 차 세일즈맨 와일드 댄, 댄 봅스를 불러 구매협상을 했던 것이 연분의 시작이었다. 댄 봅스는, 우리나라에서 차 사면 세일즈맨이 바닥 깔개 해주고, 유리 필름 해주듯이, 당시에 포드를 사면 면허를 딸 때까지 운전 교습을 해주겠다고 일종의 끼워팔기를 했고, 이 조건으로 운전교습을 해줄 자기 아들 티치 봅스를 빅토리아주 절롱에서 배커스마시로 오게 했던 거였다. 그렇게 작고 사랑스러운 티치가 아이린의 집에 하숙을 하기 시작했으나, 정작 차를 사달라고 했던 어머니가 갑자기 세상을 뜨는 바람에 포드 구입은 갑자기 어영부영하기 시작했고, 티치도 이 와중에 슬그머니 짐을 싸 절롱으로 돌아가기도 좀 야박한 거 같고, 이 집에 그냥 머물자니 그것도 좀 어색해, 가족 가운데 그나마 운전을 배울 여유가 있는 유일한 사람인 아이린한테 교습을 해주면서 찌리릿 또는 파바박, 다들 아시지? 전기가 통했던 거다. 그런데 아이린이 운전에 소질이 있어도 보통 소질이 있는 게 아니었다. 원래 운전은 앉아서 버티는 힘이 있어야 하는 거란다. 이건 땅덩이가 워낙 큰 오스트레일리아 기준이다. 이에 맞게 딱 바라진 엉덩이를 가지고 있는 아이린은 여기에 놀라운 순간 판단력까지 지녀 티치도 감탄할 정도였다나? 하여간 이들은 아이린이 운전면허증을 딴 날 결혼을 했고, 160킬로미터 떨어진 워러걸까지 아이린이 직접 운전을 해 첫날밤을 치룬 다음, 베언즈데일로 이사를 갔다.
시아버지짜리 댄 봅스가 문제적 인물 가운데 한 명인데, 댄 봅스, ‘위험한 댄’이 아이린한테 어떻게 했는지 모르겠지만, 아이린은, 결혼 전이겠지, 배커스마시 친정집 현관에 있는 코트걸이 앞에서 위험한 댄, 존경하는 시아버지 댄 봅스 씨한테 오지게 따귀를 날린 적도 있다. 이후 아이린은 시아버지 댄이 남도 아닌데 남보다 못한, 남도 아니면서 남보다 더 못하면 뭐야? 웬수로 여기기 시작했다. 댄은 심지어, 오스트레일리아에서는 상상도 하지 못하게, 아들 며느리가 신혼살림을 시작한 하숙집이나 셋방에 쳐들어와 침실 바로 옆방에 침대를 깔고 드르렁 드르렁 코를 골기도 했으니 며느리 입장에서 웬수 맞지? 티치가 베언즈데일에서 차 세일즈맨을 하며 근근이 모은 돈으로 처가가 있는 베커스마시로 돌아가 자기가 직접 포드 딜러를 해보고자 했을 때도 위험한 댄은 온갖 것을 고물 차에 싣고 와 그걸 아들에게 떠 안기고 몇 푼을 요구하기도 했다. 어쩌면 아들 하는 일에 사사건건 그렇게 어깃장을 놓기만 하는지 읽는 독자도 참 얄미울 정도다. 그러다가 혹시 나중에 아버지가 며느리 아이린이 모르는, 이들을 위한 큰 뒷바라지를 준비하는 건 아닐까? 이런 생각을 할 찰나, 결코 이 비슷한 미덕을 한 번도 보여주지 않은 댄은, 몇 년 전 사부인이 그랬듯이 갑자기 급사해버리면서 저 세상으로 가면서까지 부부의 앞길을 콱 막아버린다. 진짜 이런 웬수도 없다 싶다.
무슨 일이냐 하면, 이때는 아이린과 티치 봅스 사이에서 딸 이디스와 아들 로리가 제법 자랐을 1954년이었는데, 베커스마시의 딜러 상점을 위하여, 또는 상점을 시작하면서 광고 비슷한 효과를 내려고 오스트레일리아에서는 가장 인기가 높은 자동차 랠리, 사실은 랠리도 아니면서 혹독한 오스트레일리아를 일주하는 대회 “레덱스 테스트”에 참가했을 때였는데, 시아버지, 위험한 댄도 같은 경기에 출전하면서 다양한 사달을 만들었던 거다. 작가 피터 캐리가 아이린과 티치의 체구를 작게 설정한 건, 다른 참가 차량은 메인 드라이버와 코드라이버 두 명이 탑승하지만, 이들의 제너럴 모터스 차에는 운전을 할 부부와 지도를 읽을 네비게이터 윌리 박후버, 이렇게 세 명이 탈 것이기 때문이었다. 셋이 타긴 하는데 중량으로 치면 다른 차의 두 명과 비슷해서 연비와 차의 부담에 차이를 없앨 수 있었다.
그러면 이제 새로이 등장하는 윌리 박후버에 관해 이야기해야 하리라. 어려서부터 스릴을 느끼기 위해 경솔한 짓을 했던 것 같다. 우스운 짓을 하다가 2층에서 떨어져 어깨에 큰 흉터가 생기기도 했을 정도로. 장로교 목사의 아들이지만 좀 분방하게 성장해 육체적으로 애덜리나 캐이니그에게 끌린 것도 이런 욕망 때문 아니었을까 싶다. 둘은 십대 시절에 연애를 시작해, 당연히 섹스를 했고, 그때만 해도 적당한 성교육이 미흡했던 시절이라 덜컥 임신을 해버렸다. 이 시절 윌리는 더없이 만족한 직장인 도서관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함께 일하던 지도 전문가 사서인 서배스천이 도움, 쉽게 말하자면 적지 않은 돈을 주고, 알선도 해주어 임신중절 수술을 받았다. 그러나 임신은 한 번만 하고 마는 게 아니라서, 애덜리나는 다시 아이를 갖게 됐고, 윌리 역시 적법한 나이가 됐으니 목사 아버지한테 이실직고하고 결혼서류에 인감도장을 눌러 찍었다. 여기까지는 하나도 이상하지 않다.
이들 부부에게는 매디슨이라는 이름의 남자 간호사 흑인 친구가 있었다. 미국인이었다. 나중엔 의사 공부를 해서 정식으로 의사가 된다. 그건 나중 일이고, 이제 애덜리나가 진통을 하기 시작해 분만실에 들어가 아들을 낳았는데, 마음이 급한 윌리가 의사를 만나는 순간, 의사는 심각한 얼굴을 한 채 애덜리나와 아이를 보여주었고, 아이는 누가 봐도, 흑인이었다. 대경실색한 윌리. 그는 그 길로 고향 애들레이드에서 도망쳐버렸다. 세상에. 죽도록 사랑했던 아내 에덜리나가 나의 둘도 없는 절친 매디슨의 아이를 낳다니. 그는 완벽하게 타지인 배커스마시로 와 나름대로 정착했다. 초등학교 교사로 일하면서 맬버른의 라디오 방송 “디지의 라디오 퀴즈쇼”에 출연해 소소하게 출연료도 받았다. 그러나 아이의 양육비, 아내의 생활비 같은 건 물론이고 단 한 번의 연락도 하지 않고, 모든 우편물도 거부하며 틀어박혀 살고 있었다. 아이린과 티치 봅스 가족이 옆집에 이사오기 전까지는.
윌리가 봅스 부부를 만났을 때는, 바로 옆집에 사는 이웃이니까 안 만날 수도 없는 노릇이긴 하지만, 학교에서 유난히 말썽을 부리는 베넷 에지의 발목을 잡고 2층 교실의 창문 밖으로 대롱대롱 매다는 바람에 정직을 당해 처벌 심사를 받고 있던 중이었다. 당시엔 유급 정직이었으나 나중에 무급으로 떨어지다가 결국엔 해고를 당하고 말지만. 하여간 봅스 부부와 친해지면서 윌리의 지도 읽는 재주와 오스트레일리아의 지리적 특성에 대한 놀라운 지식을 유심히 관찰한 티치 봅스가 그를 위대한 랠리인 레덱스 테스트에 네비게이터로 초대하면서 윌리는 소설의 두번째 화자가 될 자격을 얻었다.
좋다. 확 말해버리겠다. 윌리는 박후버 목사의 적자, 독일인의 후예, 즉 백인이 아니었다. 잉글랜드 목장주가 오스트레일리아 선주민 여성을 강간해 나은 아이로 백호주의를 외쳤던 정부가 강제로 선주민한테 빼앗아 가 목사에게 보낸 거였다. 반 흑인, 반 백인이며 흰 쪽을 많이 탁한 아이를 굳이 흑인이라 할 필요를 느끼지 않아 정말 라인강변에서 이민 온 백인으로 키워진 흑백. 그러면? 뭐긴 뭐야, 애덜리나가 낳은 흑인 아이도 윌리의 아들이었던 것이지.
여기서 오스트레일리아의 선주민 약탈과 학살, 즉 다른 형태의 식민지배 문제가 대두된다. 그리고 어쩌면 이 문제가 소설에서 가장 하고 싶었던 이야기일 수도 있다. 그것을 위하여 작가 피터 캐리는 윌리를 자신의 진짜 고향, 저 중서부 지역의 황량하기 그지없는 목장지대로 보내야 했고, 그 방법으로 레덱스 테스트의 네비게이터로 만들었을 수도 있다. 하여간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은 결과 드디어 윌리는 자신의 원래 터전을 찾아가는 기적을 만드는데, 이거 세상에 이런 우연이 또 있을 수 있을까 싶은 거다. 다른 곳도 아니고 오스트레일리아 대륙에서 말이지. 차라리 대천 앞바다 모래사장에서 와이셔츠 단추를 찾는 게 더 빠르지 않을까? 이거 하나만 아니라면 정말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책이다.
작고 아름답고 착한 티치 봅스? 이 남자가 위험한 댄의 아들이잖은가. 작고 착한 티치 봅스의 변신을 보는 것도 작은 즐거움 가운데 하나일 수도 있다. 세상 사는 게 다 그렇지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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