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트풀
앨리 스미스 지음, 이상아 옮김 / 프시케의숲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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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앨리 스미스는 2011년에 나온 다섯번째 작품인 <데어 벗 포 더>를 읽은 후에 독특한 문장과 구성에 홀딱 반해서 연달아 <호텔 월드>, <우연한 방문객>을 읽고 좋아한 적이 있다. 비록 이후 사계절 시리즈의 첫 작품인 <가을>이 별로 탐탁하지 않았지만, 하여간 이름만 갖고 기꺼이 작품을 선택할 수 있는 작가 가운데 한 명으로 꼽는 데는 주저하지 않았다. <가을> 이후 조금 머뭇거리는가 싶다가 벌써 3년의 세월이 후딱 지나갔다. 그리고 눈에 보인 신간 <아트풀>. 놀랍게도 <데어 벗 포 더>를 출간한 다음 해인 2012년에 나온 것을 12년만에 번역한 책이다. 2022년 작품인 <이어지는 이야기: Companion Piece>가 2024년에 번역, 출간한 걸 보면 꽤 오래 걸린 셈이다. 왜 그랬을까? 뭘 알겠느냐만, 읽어보고 추리는 할 수 있었다. 소설인 듯 소설 아닌 듯, 그러나 소설인 작품. 즉 대중성 측면, 쉬운 얘기로 하자면, 팔릴 거 같지 않은 책이다. 전문가적 소양을 가진 다른 분들은 모르겠지만 내가 읽어본 감상을 말하자면 그렇다. 책 표지 사진은 영국에서 발간한 원서의 표지 사진과 같다. 근데 작품과 썩 어울려 보이지는 않는다. 어디까지나 보는 사람 마음에 따라 다른 것이니 믿으실 필요는 없다.

  이 책은 2012년 초에 앨리 스미스가 옥스포드 대학에서 돈 많은 유대인 출판업자 바이덴펠트를 초빙교수로 모셔오는 것을(옥스포드에서 가장 규모가 큰 장학기금을 공동 설립했으니 이 정도야 성의표시에 불과하긴 하겠지만.) 기념하기 위한 강연회에 참가한 적이 있는데, 이때 작가는 네 가지 주제, ①시간On Time, ②형식On Form, ③경계On Edge, ④제안 및 반영On Offer & On Reflection이었으며, 당시 강연을 위해 작성한 자료에 스토리를 담아 소설 작품으로 만든 것이 <아트풀>이다. 그리하여 네 부part로 구성된 소설도 마찬가지로 시간, 형식, 경계, 그리고 제안 및 반영이란 제목을 달고 있다.


  두 명의 인물이 있다. 죽은 연인을 그리워하는 여자. 그리고 이 여자 앞에, 옆에 심지어 같은 침대 위에 아직도 있는 것 같은 바로 그 죽은 연인. 여기서 잠깐. 작가 앨리 스미스는 커밍 아웃을 한 레즈비언이다. 이 죽은 연인을 남자라고 생각할 이유는 1도 없다. 작가가 레즈비언이니까 죽은 연인도 여자겠거니 생각할 이유 역시 1도 없다. 그냥 연인으로 여기자. 이 연인이 죽기 전에 강연을 했는데 그걸 위한 자료가 우연히 시간, 형식, 경계, 제안 및 반영으로 되어 있을 뿐. 이 강연이 유럽의 비교문학을 다룬 것. 따라서 전체의 반을 넘어서는 분량을 시공 초월한 유럽 각지, 심지어 (라틴 포함)아메리카까지 시인, 소설가의 작품을 인용, 비교하고 있어서, 스미스가 자료로 쓴 작품을 몽땅은 아닐지언정 웬만큼 읽어보지 못한 독자들은, 아마, 독립감 좀 느낄 걸? 아니면 자만심이 좀 상할 수도 있고.

  책 제목 아트풀Artful이 뭐냐 하면, 사전적 의미로 기교적인, 교묘한, 교활한, 잔재주 좋은 정도로 생각할 수 있는데, 그건 아니고, 찰스 디킨스가 쓴 <올리버 트위스트>의 조연 가운데 한 명인 잭 도킨스의 별명 ‘아트풀 다저’에서 가지고 왔다. 즉 <올리버 트위스트>를 읽지 않은 독자는 초장부터 김이 새면서 앞 문단에서 말한 독립감, 그리고 자만심에 스크래치가 갈 수밖에 없다. 아트풀 다저가 누군데? <올리버 트위스트>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데? 괜히 묻지 마시고 얼른 이 책을 덮어 버리고 <올리버 트위스트>를 읽은 다음에 다시 오시라. 그러면 그걸로 끝나냐고? 천만의 말씀. 내 경우엔 외국 사람이 쓴 시는 읽지 않는다. 근데 소설만큼 많은 시인이 등장하고, 시 구절, 그리고 외국시를 읊을 때 빠지지 않는 두운, 각운 같은 걸 무수하게 이야기하건만, 두운 각운을 더듬더듬 감각이라도 할 수 있게 원시도 첨부했으면 도움이 되겠으나, 애써 우리말로 번역한 시에서 우리나라 독자들이 어떻게 우리글로 번역한 시를 다시 뇌 속에서 영어로 바꾸어 두운, 각운을 알아채고, 그것도 모자라 거 참 귀신이 곡을 할 만큼 절묘하구나, 경탄할 수 있겠느냐는 말이지. 예를 들어서 영국(미국? 아 몰라, 몰라!)에 윌리스 스티븐스라는 시인이 있는 모양이다. 그가 이런 시를 썼겠다:



  나는 테네시에 병을 두었다.

  둥근 병을 언덕 위에 두었다.

  병은 제멋대로 펼쳐진 황무지가

  언덕을 둘러싸게 했다.


  황무지가 그것을 향해 솟아올라

  주변으로 뻗어나갔다, 더는 야생이 아니었다.

  병은 땅 위에서 둥글었고

  키가 크고 공기가 드나드는 항구였다.


  병은 모든 곳을 지배했다.

  병은 광택이 죽고 닳아 있었다.

  새나 수풀을 선뜻 내어주지 않았다.

  테네시의 다른 무엇과도 같지 않았다.



  이렇게 인용하고 앨리 스미스가 말하기를,

  “시는 그 경계를 넓혀 그 자체의 형식적인 요구사항에서 벗어나 음절적으로나 운율에 대해 우리가 기대하는 관점에서 형식이 수행해야 할 역할을 자체적으로 거부한다. ‘수풀’을 위한 운율은 어디에 있을까? 그런 건 없다. ‘황무지’를 위한 운율도 없다. ‘테네시’와 유일하게 운율이 맞는 것은 ‘테네시’이다. ‘언덕’도 마찬가지이다. 이 시에서 운율은 ‘공기air’와 ‘모든 곳everywhere’을 ‘닳아 있었다hare’와 연결시킨다.”

  어떠셔? 읽을 만하셔? 무엇을 말하려는 지는 알겠다. 운율이 그리 중요하지 않은 시도 있다는 거겠지. 하필 이 시를 셰익스피어하고 견주어서 ‘쥐랄’이지만. 아니, 그건 내가 저 유라시아 대륙의 동쪽 끄트머리에 있는 작은 땅의 일개 독자이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할 수 있는 거다. 서쪽 끄트머리 섬나라 지식인은 이것을 타당하게 생각할 수도 있는 거니까.


  하여간 소설의 반이 넘는 분량을 이렇게 나처럼 독립감과 자만심에 상처를 입으면서 (말이 그렇다는 거지 실제로는 이 상처가 별로 크지 않다. 돈 주고 산 책이 아니라 도서관에서 빌려 읽었거든.) 인내심 함양의 시간을 견디어야 한다. 그리고 여기에 보태는 이야기, 이야기들.

  죽은 연인이 실제로, 아직도 자신의 옆에 있다고, 정말로 눈에 보이는 환시를 심각하게 겪고 있는 화자. 갑자기, 난데없이 삶에서 사라진 것처럼 보이는 연인. 칫. 그러나 생각해보라. 삶이란 얼마나 하찮은 것인지. 태어나기 전의 아무것도 없음과 죽은 이후 아무것도 없음의 무한대라는 거대함에 비하면. 그러나 그건 철학자의 이야기이고 당장 연인을 상실한 여자는 비어있음을 견디지 못해, 상점에서 소소한 물건을 훔치고, 집안에서 중요한 부품을 내다 버리고, 그걸 죽은 연인이 한 행위라고 덤태기를 씌워버린다. 호텔 로비에서 술도 마시지 않았으면서 난리를 죽이기도 하고. 뭐 그렇다는 거다. 스코틀랜드, 더 크게 영국의 대표적인 모더니스트이기도 한 앨리 스미스가 이이 특유의 그럴 듯한 허구를 만들어내는 것까지는 참 좋은데, 암만해도 소양이 부족한 극동의 독자한테 너무 전문적인 비교문학적 자료를 팽개쳐버린 느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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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하수 2024-10-28 21:2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럼에도 끝까지 읽으셨네요~~^^
저 같았음 그냥 팽개쳐버렸을 듯해요.
앨리 스미스 ... <가을> 읽다가 팽개쳤는데 다시 돌아가지지가 않아요.
몹시 지루하더라구요!

Falstaff 2024-10-29 05:53   좋아요 1 | URL
저도 <가을>이 별로더라고요. 근데 전작들은 꽤 좋지 않았나요? <데어 벗 포 더>, <우연한 방문객>, <호텔 월드> 다 마음에 들었다가 가을에서 확 얹혀 버렸습니다.
저는 좀 더 스미스를 읽어보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