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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트우드 (무선) ㅣ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67
주나 반스 지음, 이예원 옮김 / 문학동네 / 2018년 10월
평점 :
고유명사 “Djuna”는 ‘주나’로 발음하는 모양이다. 1892년 출생. 이이보다 12년 빠른 1880년 영국에서 레드클리프 홀 여사가 태어나 반스 보다 8년 먼저인 1928년에 <고독의 우물>을 세상에 내놓았고, 그리하여 여성 퀴어 문학의 새로운 장을 열게 된다. <고독의 우물>에서는 아들을 원했던 아버지가 외동딸에게 스티븐이라는 이름을 지어주고 남자 아이처럼 교육을 시킴으로 해서 성적 혼동을 초래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었던 반면, 주나 반스는 어떻게 남녀 동성애자로 결정되었는지에 관해 아무 설명 없이 해당 인물이 등장하는 순간부터 벌써 동성애 진행 중에 있다고 설정해버린다. 두 작품 공히 동성애적 표현이라고는 여성끼리 입맞춤 외엔 등장하지 않지만 최초의 레즈비언 소설이었던 <고독의 우물>의 경우엔 런던 시장에 의하여 시중에 뿌려진 수많은 책을 전량 회수하여 폐기하라는 명령을 받았고, 주나 반스가 <나이트우드>를 썼을 당시엔 8년 전 홀의 경우를 심각하게 복기해서 출판사가 작품을 여러 방향으로 다시 편집, 홀과 같은 무참한 경우를 피했다고 한다. 그리하여 이 책의 원본은 “셰릴 J. 플럼이 편집한 Nightwood: The Original Version and Related Drafts (Djuna Barnes, Dalkey Archive Press, 1995)"가 된다. 그리고, 솔직히 말하건데, 이이가 여성작가라는 걸 알고 좀 놀라기도 했다. 이렇게 생겼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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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나 반스는 처음 들어보는 작가였다. 그래 아무 생각 없이 책을 열고 읽기 시작하는데, 첫 문장부터 심상치 않았다. 같이 읽어보자.
“1880년 초, 하느님에게 선택받았으나 뭇사람에게는 눈엣가시 같은 저 민족의 영속이 과연 권장할 일인지에 대한 근거 있는 의구심에도 아랑곳 않고, 강장한 기백과 군사적인 아름다움을 겸비한 빈 태생의 여성 헤트비히 폴크바인이, 캐노피가 달리고 휘장에는 합스부르크왕가의 갈래진 나래가 박혔으며 공단 겉감에 폴크바인가家의 문장을 올 굵고 색 바랜 금사로 우뚝 뜬 깃털 침대보가 덮인 휘황한 선홍빛 침대에 몸을 누인 채 마흔다섯 나이에 초산으로 독자를 낳았으니, 이는 의생이 임부의 죽음을 내다본 지 꼭 이레째 되는 날의 일이었다.”
1) 하느님에게 선택받았으나 뭇사람에게는 눈엣가시 같은 민족 : 유대인
2) 폴크바인 가의 문장을 금사로 뜬 깃털 침대보 : 적어도 남작 이상의 귀족
3) 마흔다섯 나이에 초산 : 귀한 자손의 출생
4) 의생 : 醫生 ‘옛’ 의술로 질병을 고치는 것을 업으로 삼는 사람
이런 모든 것을 합치고, 길고 화려한 문장을 고려해볼 때, 첫 문장부터 확 끼쳐오는 의문점. 캐나다 토론토에서 태어나 지금은 서울에서 살고 있다고 하는 역자 이예원이, 원래 화려한 문체를 즐겨 사용하는 사람일까, 하는 것. 이 책 읽으면서 그래도 우리말 단어 깨나 알고 있다고 자만하던 나는, 적어도 스무 번 이상 사전을 뒤져 정확한 낱말의 뜻을 찾아봐야 했다. 같은 말이라도 현재 쓰고 있는 단어와 다른 표현을 즐기는 것이 역자의 습관일까? 예를 들어, “그리스도교 민인에게 유락을 제공하라는 명”이라는 표현. 민인은 ‘인민’과 같은 말이고, 유락은 놀며 즐긴다는 뜻이라 “그리스도인에게 놀며 즐길 거리를 주라는 명”이라고 하는 것이 좋을 듯한데 굳이 이리 쓴 것은 ‘틀림없이’ 이유가 있어서일 것이다. 재미있는 표현 알려드릴까? “구합媾合(책에서 인용한 한문의 ‘구’는 계집녀女 변이 아니라 책받침辵이지만 두 단어가 같은 뜻을 가지고 있는데, 아래한글에선 지원이 안 된다)”이 무슨 뜻인 줄 아시나? 나도 한문 좀 알고 산다 했다가 코피 났다. 성교와 같은 뜻이다. 이렇게 화려한 옛 문장체로 번역하는 것도 젊은 역자로서는 쉽지 않을 터. 그럼에도 이런 수고를 마다하지 않은 이유는, 만 원 건다, 번역해야 하는 원본이 옛 문장체로 쓰여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문장이 어느 하나 빠짐없이 유려하고 재기가 번득이며 읽는 재미를 듬뿍 주긴 한다. 그래 처음엔 감탄을 해가며 읽어 나가게 되지만, 이런 효용에는 한계가 있는 것. 어느 순간부터는 그냥 그런가보다, 하는 심정으로 접어든다. 그럼에도 처음부터 끝까지 같은 톤을 유지하는 입심에는 껌뻑 넘어가지 않을 수 없다. 특히 가장 중요한 인물 가운데 하나인 사이비 의사 매슈 오코너의 무한정한 수사가 펼쳐지면, 이이의 장광설이 나오는 장章마다 페이지 수가 늘어갈 정도인데, 그 화려한 변설에 넋을 잃을 정도. 오코너 선생도 스스로 이를 잘 알고 있어서 나중엔 결국 이렇게 절규하게 된다.
“듣고 싶었던 건 이제 다들 들었을 테니 이만 날 풀어주면 안 되겠어요. 이제 그만 놓아주면? 난 인생을 허투루 살았을 뿐만 아니라, 인생을 허투루 이야기했어―추잡한 무리의 와중에서, 가증스럽게―알아, 다 끝났다는 거, 모두 끝났어, 한데 날 빼고는 아무도 그걸 모르지―코가 비뚤어져 개가 됐대도―너무 오래 버텼어―” (231쪽)
그렇다. 헤트비히 폴크바인 남작부인이 마흔다섯의 나이에 사내아이를 낳고 “장려한 몸짓으로 돌아누우며 아이를 펠릭스라 명명”하고 숨은 거둔 다음, 독자는 당연하게도 책을 이끌고 가는 주인공으로 바로 이 아이, 펠릭스라고 생각하게 되게끔 만든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펠릭스는 기도(이탈리아계 유대인이니 Guido, ‘귀도’일 것 같긴 하지만)를 낳고, 기도는 끝내 자손을 내지 못하고 쉰아홉에 숨을 거두고 만다.
그럼 스토리는 어떻게 되고, 또한 처음에 얘기한 것처럼 어떻게 여성 퀴어 소설이 되느냐고? 좋다. 가르쳐드린다. 펠릭스는 로빈과 결혼해 발육이 부진한 기도를 낳고, 로빈은 집에서 이렇게만 살기엔 도저히 근질근질해 참지 못하고 가출해 미국으로 날라버린다. 거기서 동성의 애인 노라를 만나 좀 살다가, 함께 파리로 건너와 잠깐 지내는 동안, 네 번의 결혼 이력이 있는 영국 과부 제니 페더브리지가 로빈한테 반하게 되는 데, 어느 날 밤, 다섯 명이 탄 마차 안에서 과부 제니가 로빈의 얼굴을 손톱으로 할퀴어 피를 철철 흘렸음에도, 오히려 노라를 버려둔 채 제니와 함께 다시 미국으로 도피해 버린다.
여기서 제니와, 특히 노라가 겪는 번민과 사랑이 스토리의 주요 줄기가 되고, 무면허 의사 오코너 선생의 변설이 기막힌 향신료로 작용하는 소설. 이리 내용을 밝히는 건, <나이트우드>라는 작품의 진짜 매력은 21세기 현재 시점에서 그리 자극적이지도 않고, 흥미를 유발하지도 않는 그냥 그런 스토리에 있지 않고, 좋은 소설이 그렇듯이 몇 몇 인간의 심리상태를 찬란한 문장으로 써 내려가는데 있기 때문이다.